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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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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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판본.

1. 개요2. 고사기와의 비교3. 특징4. 평가5. 다른 면: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증거6. 그 외
6.1. 위서가 아니다
7. 언어학 관련8. 국내 번역9. 관련 문서

일본의 육국사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

일본삼대실록

1. 개요[편집]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육국사(六国史)[2]중 첫번째 역사서다. 순수 한문체,[3]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고 총 30권이다. 일본의 역사책이지만 주로 백제 측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한국사 관련 정보도 들어 있는 덕분에 사료의 절대량이 절실한 고대사에 있어서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참고가 되는 귀중한 사료다.[4] 다만,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자주성과 천황 가문, 일본 조정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고대 역사서 특유의 서술 태도 때문에 일본의 신화시대와 한국 관련 서술 등은 여기에 써 있는 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참 쉽지 않다. 그 바탕에는 귀중한 사료가 가득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심각하게 과장됐다는 것. 예를 들면 647년 김춘추가 일본에 인질로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국제정세와 김춘추의 위치상 절대 신라가 인질로 보낼 사람도 아니고 김춘추는 금방 신라로 멀쩡히 돌아와 계속 활동하기도 한다. 즉, 김춘추가 647년 일본에 간 것 자체는 맞는데 인질은 과장이고, 실제로는 642년 고구려에, 648년 당나라에 간 것처럼 외교관으로서 갔다고 이해한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역사서도 다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일본서기는 위와 같이 무조건 일본이 짱이다스런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다. 현대에는 일본 역사학자들도 일부 사이비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일본서기의 내용에서 터무니없는 과장은 당연히 거르고 본다. 즉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하지만 엄밀한 사료 비판과 교차검증, 고도의 연구를 필요로 하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역사서.

2. 고사기와의 비교[편집]

고사기》가 먼저냐 《일본서기》가 먼저냐를 두고 논란이 있으나 고사기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임을 인정하되 일본서기가 최초의 정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고사기는 과거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역사(현대에서는 신화지만)를 문자화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

681년 덴무 덴노가 "옛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새로이 만들어라"라는 명을 내린후 고사기(712년)와 함께 완성된 일본서기(720년)는 과거에 중구난방으로 전해지던[5] 역사를 통일하라는 덴무 덴노의 지시로 편찬된 책으로 고사기(712년)와 함께 편찬되었다. 고사기는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 일본서기는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순수 한문체를 사용했고 고사기보다는 신화적이지 않고 사서적 성격이 강하다.

다만 내용이 삼국유사를 가볍게 찜쪄먹고도 남기때문에 중국과 한국 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부정하며, 교차검증을 통한 기록만을 인정하고 있다.

3. 특징[편집]

  • 진구 황후대의 기록부터 긴메이 덴노까지의 기록들은 백제삼서라 불리우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가 상당수 인용 되어 있다. 그래서 아직기왕인, 성왕과 관련된 기록이나 가야 연맹과 관련된 기록은 한국의 사서들보다 일본서기에서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 중국측 기록은 삼국지와 진기거주(晉起居注)가 인용되어 있다. 그 외의 기록들 같은 경우에는 후한서등의 중국 역사서를 다른 역사서들을 통해 간접 인용한 것으로 현재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4. 평가[편집]

≪일본서기≫는 고대 천황제국가 건설을 기념하여 8세기 초 일본의 지배층이 천황가의 유구성과 존엄성을, 나아가서는 일본열도 지배의 정당성을 천명할 목적으로 편찬한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역사서이다. 그 결과 국내관계 기록이나 대외관계 기록에서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개작과 왜곡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일본서기≫에서 백제와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의 근거가 된≪百濟記≫·≪百濟新撰≫·≪百濟本記≫라는 이른바 백제3서는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조정에서 일하던 백제사람들이 가지고 건너간 본국의 역사기록을 당시 사정에 의해 개서하고 수식하여 일본당국에 제출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들에 의해 제출된 내용들은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윤색되어≪일본서기≫에 인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일본서기≫의 백제관계 기록으로부터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풍부하지 못한≪삼국사기≫의 내용과 양적으로는 풍부하나 내용상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일본서기≫의 내용을 사료비판을 통해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가장 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들 자료에 대한 연구가 일치된 해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일본서기는 사실상 일본이 국가적으로 역사를 정리한 최초의 사서라고 볼 수 있지만 애시당초 편찬의 목적이 역사정리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덴노와 고대 일본 및 유력씨족의 위엄을 높이자라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통치계급 중심으로 원사료수집과 서술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일본서기 자체에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아...'라는 말이 있는데, 즉 야마토 정권의 프로파간다를 퍼트리겠다는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일본서기의 내용은 일본 내부자료로써의 신빙성은 높지만, 외교에 관한 부분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으로 한중일 삼국 학계의 의견이 동일하다. 외교적인 내용 중에서 한국과 중국의 자료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 금강 전투(일본측 기록은 백촌강 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이 부분은 사상자 숫자까지 똑같이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그 이외의 국제 뉴스 부분은 관점부터 많이 다르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런 점은 일본서기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온 역사서들도 외교에 관한 부분은 확실하게 일본서기와 맥을 같이 한다. 특히나 중국측의 자료와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다. 중세로 넘어오면 명나라에서 아시카가 막부에게 일본국왕이라고 쓴 것도 있는데 이 부분마저 왜곡하는 사례가 발생하니 비단 일본서기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사서중 외교부분은 주의하면서 봐야한다. 이는 이미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우리 일본이 최고"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성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서술하자면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귀화라는 의미는 "무언가를 흠모하여 자연스레 그리되다"라는 의미로 수당 교체기와 신라의 통일사업 기간동안 많은 중국,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넘어갈 때가 있었다. 이들을 가리키면서 일본서기에서는 귀화인(歸化人)이라고 칭했었는데 이 귀화인이 앞서 이야기한 개념의 "귀화"를 통해 일본인이 되었다는 한국 ≤ 중국 < 일본 이라는 일종의 개념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6]

신화시대까지도 편년체로 기록한 탓에 역사서로서의 정확한 기술성도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왜곡사례로는 진구황후음부를 돌로 막아 출산을 멈추고는는(...) 일엽편주를 타고 와서 삼한을 평정했다는 초황당한 기록이 그것이다.[7] 대체로 학자들은 이런 황당한 서술이 진구황후를 히미코와 동일시해 히미코와 그녀의 조카딸 이요의 치세를 숨기려는 의도로 일본 역사를 2갑자(120년) 앞당긴데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8] 하지만 의도적으로 2갑자를 당긴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 일본서기가 여러개의 다른 기록들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기록이 뒤섞이며 혼돈이 생겼다는 것. 백제사를 연구하는 쪽에선 주어를 일본에서 백제로 바꾸고 2갑자를 당기게 되면 백제역사와 일본서기가 딱 들어맞는 점을 들어서 백제의 사서를 일본서기가 참조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9]

과거 일본 사학계는 한때 이 주장만을 굳게 믿고 내부의 반론을 무시한 채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웠다가 현재는 대차게 욕먹고 찌그러졌다.(…)[10] 다만 진구황후 이야기 자체는 일본 민속학계에서는 타계(他界) 귀환 신화와 태양신 재생신화의 결합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 말고, 진구황후를 다룬 다른 기록을 보면 진구황후가 배며 군사들을 붉게 칠하고 삼한을 정벌했다고 하는데, 붉은색이 영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11]

사실 일본서기 내에서도 웃긴 게 있다. 일본서기 내 기록에서 신라구의 피해를 받는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한다느니, 그래도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안오겠지 하며 자기위안만 하고 있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것.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 위안용으로라도 진구황후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 한데, 안나온다. 심지어 신라구로 인해 신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일본에 살던 신라인들을 일본인들이 공격하는 일도 기록되어 있으면서 신화시대 기록 이후에는 안나온다. 또한 백제와 관련된 부분에서도 백제를 아랫나라로 보면서도 일본서기 곳곳에서 심지어 진구 황후 시절 일본이 쳐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의 소국 중 하나인 침미다례국의 경우 일본의 입장에서는 서쪽이나 북쪽이지 남쪽이라고 볼 여지는 하나도 없는데도 남쪽 오랑캐라는 뜻의 남만(南蠻)이라 적고, 출병과 전투시에도 일단 쓰기는 일본이 상국이고 시키는 식으로 쓰는데 모든 면에서 백제가 주력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아 좋은 츤데레다.

일본서기가 신화시대를 벗어나면 사실적이지만 그러한 기록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일본서기의 모순이 극에 달하는 부분은 긴메이 덴노에 관한 기록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긴메이 덴노의 분량에서는 긴메이 덴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80% 정도가 백제 관련 기록들이다. 대놓고 백제기복사 붙여넣기인용했다고 쓰여있다. 특히 백제 성왕 관련 기록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서 그냥 백제 사서가 아닌가 싶을 정도. 물론 일본서기답게 성왕이 긴메이의 신하라서 마치 아바타처럼 긴메이는 계속 지시를 내리고 성왕은 행동하는 식으로 쓰여있다(...)

즉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을 이리저리 짜맞춰서 왜국에 유리한 식으로 재구성했다고 추정된다(물론 앞서 말했듯이 초기 신화시대는 그냥 신화다). 따라서 한국 관련 기록들은 조공, 인질 같은 일본이 상국이라는 뉘앙스를 발라내고 주체를 백제로 바꾸거나, 관계를 역으로 생각하면 해결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자면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올린 것은 사실 선물이고, 백제가 가야 땅 어디를 하사해달라고 왜국에 요청하는 건 실제론 백제가 그 가야 땅을 점령했다는 뜻이고, 왜국이 고구려를 친 기록은 사실은 백제가 고구려를 친 것을 바꿔 써놓은 기록이었다는 식이다.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이리저리 왜국에 유리한데로 백제기 등의 기록물을 짜집기 맞췄지만, 근본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잘 판별하면 실제 사건에 대해 추론 가능해진다.(이렇게 누가 봐도 어설픈 마무리 때문에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라는 상부의 지시에 무언의 저항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반응도 있지만,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12]

본문 외에도 다른 전승을 일서의 형태로 정리한 덕분에 여러 가지로 유용한 고대전승을 간직했다. 하지만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표준'으로 간주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본문이며, 그와 다른 전승을 '일서에 말하기를' 하는 형식으로 주를 달았다. 신화시대 부분에서 아마테라스가 니니기를 강림시키며 '천하는 너와 네 자손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라고 말했다는, 그 유명한 '천양무궁의 신칙' 또한 일본서기에 기록됐는데, 그게 본문이 아니라 일서다. 본문에는 다카미무스히와 아마테라스가 공동으로 니니기를 파견했으며, 천양무궁의 신칙 또한 없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일본서기의 본문이 아닌, '천양무궁의 신칙'을 담은 일서의 내용을 표준판으로 가르쳤다. 그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5. 다른 면: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증거[편집]

야마토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기록은 거의 없고, 하나같이 백제를 통해서만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은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김현구,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일본서기를 보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는 커녕 오히려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 일본서기만 제대로 인용하면 되려 임나일본부설 주장세력을 버로우시켜 버릴 수 있다. 사료를 분석해 보면 '백제가 야마토 정권의 아래'이기는 커녕 오히려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지원했다(즉 백제가 위, 야마토가 아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 김현구는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 保和)[13]와 임나일본부설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스에마쓰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자 일본서기를 근거로 들어 임나일본부설 자체를 반박했다. 일본서기를 근거로 든 주장이었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고.

6. 그 외[편집]

일본서기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태도는 무척 미묘하다. 일본이 한반도의 삼국 모두를 복속시키고 종주국으로 행세했다는 굉장히 거북한 주장이 실려있는데 일단 이건 한국 측 사료와 전혀 들어맞지 않고, 중국 자료까지 갖다놓고 비교해보면 혼자 삼천포로 빠지는 일본서기 내용에 그저 막막해진다. 사실 일본서기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영 좋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정도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삼국사기나 여타 다른 사서도 오류와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14] 일본서기에 있는 한반도에 대한 기록은 당대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는 어떤 사료보다도 자세하기 때문이다[15]. 예컨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했다는 아직기나 왕인, 고구려에서 양원왕 즉위시에 왕위계승을 놓고 도성에서 '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그 외에 삼국사기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고간 도도가 백제 성왕의 목을 베었다고만 설명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그 전후의 상황을 주고받은 대화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등 [16] 백제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도 제법 싣고 있다. 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나마 삼국사기에서 다뤄주지만 가야에 대해서 제대로 다뤄주는 건 일본서기가 거의 유일하다.[17] 이러니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서 대략난감한 것.

물론 그것도 정확히 실었는지는 의문이라 삼국사기나 고고학적 자료들과 대조해서 평가해봐야 되겠지만, 삼국사기의 내용이 훨씬 간략하고 일부가 중국 사서를 복사 붙여넣기 하다보니 한계가 있고, 과연 삼국사기가 더 정확한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생긴다. 그대로 믿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한일 역사학계는 일본서기 내용 중 신뢰할 만한 부분을 추출하려고 노력해 왔다.[18] 이는 풍납토성 발굴과 신라 나정 발굴, 고구려사 연구 발전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진 지금도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다.[19]

6.1. 위서가 아니다[편집]

일단은 내용의 덴노 중심주의와 고대 일본에 대한 애국심 고취 사상으로 인하여 덕분에 양판소 위서 논란이 팽배했지만, 일단 일본서기는 위서가 아니다.[20] 위서 여부는 내용의 진실성으로 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서 항목 참조. 일본서기에 내용상 많은 허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일본 조정의 공식적인 역사서로 편찬된 그 서책임은 분명하다. 임진왜란 이전 필사본이 있고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서도 덴노 계보를 확인할 수 있기에 위서가 아니며, 야마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사서이기 때문에 야사조차 아니다.

반면 일부 아마추어 역사가들과 종교 단체에서는 일본서기가 소설이라거나 반대로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의 재야사서를 일본서기랑 비교하면서 재야사서가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담은 역사서라고 주장하지만, 환단고기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조작된 위조된 사이비 역사책으로서 빼도 박도 못 할 위서 맞다. 둘의 차이는 환단고기는 20세기 사람이 수천년 전의 기록이라고 거짓말한 것이고, 일본서기는 내용에 거짓과 과장이 섞여있지만 7세기 사람이 쓴 책이다. 교차검증을 통해 거짓을 발라내면 전자는 20세기의 지식이 남고 후자는 7세기의 지식이 남으므로 후자가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다.

현대사에서 국가폭력을 진상규명할 때도, 그게 비록 조작일지라도 당시 국가의 자료를 근거로 쓴다. 아무튼 일본서기는 환단고기와 같은 위서는 아니기 때문에, 교차검증할 사료로서의 가치 자체는 있는 것이다.

7. 언어학 관련[편집]

일본서기는 역사학 사료로서 뿐만이 아니라 고대 일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적 자료로서도 매우 이름이 높다. 이런 연구 끝에 일본서기에서 한자음으로 일본어를 표기하는 방식이 서로 두 가지로 나뉨을 밝혔다. 한쪽은 당시 한자의 '중국음'으로 일본어를 음역하고, 다른 한쪽은 한자의 '일본음'으로 일본어를 음역한 것이다. 일본서기를 작성할 때 중국계 인사와 일본계 인사가 서로 다른 부분을 각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음을 사용하여 음역한 부분은, 일본어 중 중국인들이 잘 구별하지 못하는 음소가 구별되지 않아, 그 필자가 일본으로 건너온 중국인이리라 추정한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중국계 인사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은 대부분이 정통 한문체로 작성되었으나, 일부 기사[21]에서 당대 일본식 언어 습관이 다수 발견되어서 이 부분이 후대에 모종의 이유로 가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여기서 중국 본토와 동일한 정통 한문체로 쓰여진 부분(일본서기 α군)은 속수언(續守言)과 살홍각(薩弘恪)이, 일본식 언어 습관이 첨가된 한문으로 쓰여진 부분(일본서기 β군)은 야마다노후히토 미카타(山田史御方)가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카타는 통일신라에 유학했던 경험이 있는 학문승으로, 당대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많아서 일본보다는 좀 더 한학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나라에서 직접 유학한 경험은 없어 한문을 정음으로 직독할 능력이 부족했던 것.

또한 일본서기에는 한자를 이용한 당대 일본어 표기법이던 만요가나를 일부 인명, 주석 등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고사기, 만엽집과 더불어 만요가나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8. 국내 번역[편집]

1987년에 성은구가 발췌번역본을, 1997년에 심리학자 전용신이 완역본을 내놓았다. 전용신의 번역본이 널리 읽혔는데 그러다가 2013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사학계에서 제대로된 번역본을 내놓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사학자들이 모여 번역한 것이니 사실상 오피셜.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격은 각 3만원 정도. 동북아역사재단 자료실에서 pdf로 볼수 있다.링크 이렇게 중요한 책을 왜 그간 사학계에서 번역하지 않았는지 미스테리동북아시아재단의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열람도 가능하다.

이외에도 일본서기 관련 연구서가 몇권 출간되어 있다. 읽어볼만한 책들은.

  •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전 3권):사학자들이 모여서 쓴 책으로 학계의 입장을 견지할수 있는 책.

  • 일본서기의 비밀

  • 일본서기와 천황제의 창출[22]


일본서기적 관점을 정리한 책을 보고자 한다면 도쿄대학교에서 발행한 《일본역사》를 읽으면 그 개략이나마 알 수 있으니 관심있는 역사 지망생들은 참고하도록 하자. 단 한중측 사료도 같이 보는 NPOV적 입장은 필수.

9. 관련 문서[편집]

[1] 니혼쇼키, 야마토부미라고도 읽는다.[2] 일본서기를 포함해 속일본기(続日本紀),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日本文徳天皇実録),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을 통틀어 육국사라 부른다.[3] 다만 부분부분 정통 한문이 아닌 왜습이 가미된 한문체로 쓰여있는 부분도 있다. 아래 언어학 단락 참조.[4] 그럴 수밖에 없는것이 이웃나라의 사서라고 하더라도 《일본서기》는 편찬 연대 자체가 《삼국사기》보다 3세기나 이르다. 백제가 멸망한 지 수십 년이 채 안 지난 시점에서 편찬된 사서인만큼 아무래도 백제측 기록이나 전승이 풍부하게 반영되었을 수밖에 없다. 한국 측의 고대사 주요 기록인 《삼국사기》의 경우, 신라가 남긴 기록 위주로 수록되었다. 당연히 신라가 삼국시대의 승리자이고 그에 따라 수백년간 나라가 더 이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같은 사건도 일본서기의 기록이 훨씬 자세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관산성 전투 부분은 삼국사기에선 간략하게 서술된 편이지만 일본서기는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았다는 배경 설명, 성왕이 죽기 전 상황부터 도도와의 대화,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까지 세세하게 적어놨다. 백제뿐 아니라 많은 가야계 소국들 등 당시 일본이나 백제와 관련이 있었던 나라들에 대한 기록도 한국 사서들보다 훨씬 풍부한데, 예를 들면 안라회의, 사비회의 같은 주요 사건이나, 탁순국아리사등 같은 인물.[5] 고사기에 따르면 이전까지 제왕의 역사를 담은 기록인 제기(帝紀)와 임금의 말씀을 기록한 본사(本辭) 등이 통일되지 않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제황의 일과 과거 있었던 사건들을 암기하는 신하가 있다고 되어 있다.[6] 이 때문에 한중 사학계에서 귀화인 대신 바다를 건너 넘어온 사람이라는 "도래인"을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물론 일본측에서도 이 도래인을 쓰기는 하는데 귀화인도 병용하고 있는 형편.[7] 진구황후 문서에 반박하는 문단이 존재한다. 향후 확인후 추가 바람[8] 여왕의 지배를 숨기려 한 것이라면 스이코 덴노, 고교쿠 덴노 등의 기록도 삭제되어야 하는데 그건 또 아니다(...). 이에 대해 히미코와 이요가 중국에 조공했기 때문에, 혹은 일본의 정통 천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숨기려 했다는 시각도 있다.[9] 이 때문에 반 우스개로 일본서기의 본명이 백제서기라는 말도 있다. 우스개치고는 너무 잘 맞아서 문제지만. 실제로 백제사 연구시 많이 참고하는 주 사료 중 하나가 일본서기다.[10] 다만 임나일본부설은 여러가지가 있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은 출선기관설로 이미 80년대에 사실상 폐기된 학설이다. 현재 임나일본부가 외교적 기능을 수행했다고보는 외교사신설이 대세. 여기서 찌그러졌다고 표현한 설은 출선기관설.[11] 참고로 진구황후의 기록을 이주갑인상 문제와 결부시키면 근초고왕 시기가 되는데, 이 때문에 근초고왕이 삼한을 정벌한 것을 일본서기가 왜곡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괴작 사극에서는 히미코가 근초고왕한테 데레데레했다고 묘사해 복수[12] 이런 점 때문에 삼국시대, 특히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적절히 인용한다. 위에 나타난 점 때문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록이라도 써놓는게 어디냐[13] 김현구는 자신의 책에서 그를 S씨라고 칭했다.[14]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남아있는 인물들의 나이를 따져 보면 말이 안 될 정도로 장수한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 - 이런 경우에 대해 역사학자 이희진 씨는 순서와 연대도 완전히 뒤바뀌는 일본서기와 순서는 다른 사서, 자료와 거의 비슷하고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삼국사기와 같이 비교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15] 아쉽게도 한국에는 이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가 현재까지 남아있는게 아예 없다(...)[16] 일본서기에는 말 먹이는 종 고도(苦都)또는 곡지(谷智)라고 기록하고 있다(삼국사기에는 김무력의 비장이라고 서술되어 있음). 이름이 비슷기에 본래 말 먹이는 종이었으나 왕을 참하여 비장으로 인생 역전 한게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기도 하다.[17] 일본서기에서 가야에 관한 자세한 서술로 인해서 학계에서는 한반도의 가야랑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18] 이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일본서기를 '복어'로 비유한 적도 있다. 그만큼 까다롭고 다루기 곤란하다는 뜻. 이영식, "《일본서기》 활용의 성과와 문제점" 에서. 《한국고대사연구의 새 동향》(한국고대사학회편, 서경문화사, 2007)[19]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삼국이 세워진 것은 훨씬 후대로 보고 있어 백제의 국가성립과 관련된 풍납토성의 경우 기원후 3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때 방사선탄소연대치로 삼국사기와 일치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 신뢰도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고 최근에는 실제 측정을 했던 기관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 게다가 상대편년에서는 풍납토성 아래 발견된 전문도기(동전문양이 새겨진 도기로 가장 빠른게 동오 장군인 주연묘에서 나온거다) 때문에 3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에서는 대세다[20] 위서는 아니라고 해서 그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므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진구황후의 일화를 예로 들면, 신화를 신화라고 기록했다면 역사서로서 정체성, 신뢰성에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일본서기는 신화를 역사, 즉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21] 특히 다이카 개신을사의 변 관련 기사[22] 이 책에서는 저자인 오야마 교수는 기기신화를 지토 천황과 후지와라 후히토, 특히 후히토가 주도적으로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기기신화의 성립에 있어서 덴무, 지토 천황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됐으리란 설은 이미 기기신화에 관한 학자들간 논의가 있으나, 이 책의 저자인 오야마 교수는 이러한 논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기기신화와 관련된 다른 연구성과를 무시하는 단점이 있다. 기기신화 성립 이전 일본의 종교적 토양과, 지토 천황 무렵의 정치적 상황이 기기신화에 반영된 바를 정리, 연구한 책으로는 김후련 교수의 "타계관을 통해서 본 고대일본의 종교사상"(2006, 제이엔씨)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