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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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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파일:국회상징.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 개편
심대평[1]

제19·20대
이해찬

현직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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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정부기 (구).png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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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현

제38대
이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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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중



파일:국회상징.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을)

선거구 분리
임철순[A]
김수한[A]

제13~17대
이해찬

제18대
김희철

파일:PYH2017101615740001300_P4.jpg

이름

이해찬 (李海瓚)

출생일

1952년 7월 10일 (66세)

출생지

충청남도 청양군

본관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4]

최종 학력

서울대학교 사회학 학사

가족 관계

5남 2녀 중 다섯째

가족

배우자 김정옥, 외동딸 이현주[5]

소속 정당

더불어민주당

지역구

세종특별자치시

의원 선수

7

의원 대수

13, 14, 15, 16, 17, 19, 20

소속 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현직

제20대 국회의원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더불어민주당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의장
더불어민주당 중앙당후원회장

경력

돌베개출판사 대표
평화민주당 원내부총무
민주당 당무기획실장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제38대 교육부 장관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제36대 국무총리
민주통합당 대표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트위터


1. 개요2. 생애3. 정치 활동
3.1. 국회의원 시절3.2. 교육부 장관 및 국무총리 시절3.3.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3.4. 난항 끝의 재등원(再登院)3.5. 중국 특사3.6. 문재인 정부 이후
4. 이해찬 세대5. 트리비아6. 선거 이력7. 둘러보기

아빠는 현주가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자주 그려보곤 한단다. 엄마 아빠가 학교 다니던 때와는 달리 현주의 학교생활은 훨씬 자유롭고 재미있을 거야. 그때쯤에는 세상도 훨씬 좋아지고 자유로와질 테니 말이야.


외동딸 이현주 양의 3번째 생일에 보낸 편지[6]

1. 개요[편집]

친노계, 친문계의 맏형
현재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중 현역 최다선 의원

대한민국학자, 정치인.

국민의 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고, 2012년 대선 때 안철수와의 대선 후보 단일화 때문에 금방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제13대~17대, 그리고 제19대~20대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13대부터 17대까지는 지역구가 서울 관악구 을 지역이었고, 2008년 18대 총선 때에는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가 2012년 19대 총선세종시로 지역구를 옮겼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적인 선거 전략가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1992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선거 전략을 담당하면서 조순 후보를 당선으로 이끌어 처음 선거 기획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 후 자신이 선거 전략에 관여하면서 대통령 배출하여 '킹 메이커'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의 요직을 지냈다. 사회학 기초 교과서 중 하나인 C.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공역하기도 한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담으로 역대 국무총리JP와 더불어 실세 총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유이한 사람이며[7] 민주당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친노무현계의 상징적인 큰형님이자 정신적 지주이며 투 탑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8] 그래서 보통 언론에 '친노의 좌장'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 편이다. 심지어, 친문계의 리더로 불리는 문재인 대통령도 깍듯하게 형님이라 부르면서 선배로 대우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려 7선 국회의원인데 이는 민주당 현역 의원들 중 최다선이며 20대 국회를 통틀어서는 무소속 서청원 의원(8선) 다음이지만, 서청원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 비례대표 공천을 대가로 뇌물을 받은 게 드러나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7선 의원이라고 봐야 한다. 즉, 이해찬은 공식적으로 서청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다선 국회의원인 셈이다.

민주당의 최다선 현역 의원이지, 최고령 의원은 전혀 아닌데다가[9], 여전히 친노계친문계의 큰어른인 거물이기에 아직은 정계 은퇴를 말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 2018년 기준 65세로, 역대 대통령 중 그보다 많은 나이로 출마해 당선된 사람만 넷이니 그리 많은 나이라 보기도 힘들다. (이게 모두 초선을 만 35세에 한 데다가 은근히 노안이라서 그렇다) 막말로 다음 대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나이로 공격 받을 소지는 없을 것이다.

2. 생애[편집]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에서 아버지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 슬하 5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 참고로 이해찬의 조상은 덕흥대원군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시절 여타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해찬은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부친인 이인용 씨가 청양면 면장 출신이기 때문. 이인용 씨는 광복 후에 32살의 나이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마을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자유당 정권에 말기에 치러진 지방선거[10]에서 야당 후보로 나서 면장에 당선 되었다고 하니, 지역 주민들의 신망이 투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입학한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다녔으나 적성에 맞지않아 자퇴하였고, 이듬해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11]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했는데,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약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 사건 후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등 재야 인사로 지냈다. 1979년에는 돌배개출판사를 창업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이 되었다가 해금 조치되면서 1980년 복학하여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는데, 그해 6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12]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그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5년에 처음 서울대를 입학한 지 14년 만에 졸업하였다. 1987년 말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냈다.

3. 정치 활동[편집]

3.1. 국회의원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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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19대 총선 포스터

학생 운동의 이력을 지니고 있었던 이해찬은, 여러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지역구로 공천을 받아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13] 이후 5회 연속으로 관악을 국회의원 당선에 성공했고 20대까지 합해서 현재 7선 의원을 기록 중이다.

제5공화국에서 방영된 이해찬 의원의 5공 청문회 모습[14]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5공 청문회의 일원으로 참석해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사건과 녹화사업 등을 추궁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주로 야당이었지만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했고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에 공을 세웠다. 88년 등원 직후부터 5공청문회에서 통일민주당노무현, 이인제 의원과 함께 송곳 질의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는 스타가 되었지만, 당내 활동에서는 DJP연합 당시 정책 공조 협상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서 선거 전략가로 더 알려지게 된다.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에 따르면 선거 운동 들어가기 직전에 이긴다고 말하며 예측한 백분율이 소수점까지 딱 맞아떨어져, 한동안 '선거의 제왕'이라 덕담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3.2. 교육부 장관 및 국무총리 시절[편집]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여당의 일원이 된 이후로는 48세에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 교육 정책을 주도하고 공무원 성과급 제도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부작용들로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수험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특기-적성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정책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을 딴 이해찬 세대를 양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국민의 정부가 저물 때쯤 차기 대통령 후보로 노무현을 지지하였고, 참여정부 출범 이후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여[1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 되었다.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얼마 안 가 국무총리에서 사임하자 후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 시절 국회 질의에서 야당 측과의 공개 설전을 마다하지 않은 파이터 기질을 발휘했다. 이로부터 먼 훗날인 2018년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는 이때의 모습들을 거론하며 '야당과 잘 지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이해찬 의원은 "이 당시 야당의 질의가 너무 수준 이하여서 그랬다"고 반박하기도. 실제로 마지막 김정훈 의원 질의를 보면 저질스럽기는 하다

국무총리대통령과 더불어 내각을 이끄는 막중한 자리지만,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에 눌려 제대로 권한 행사를 하지 못하고, 그냥 얼굴마담이나 대통령의 방패막이나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DJP 시기를 거치며 자민련 출신 총리들이 연립정권의 지분자로서 어느정도 역할을 했고, 참여정부 시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당대의 국무총리들은 비교적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 대표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한 고건.

이해찬 총리도 그 혜택을 본 인물로서 '대표적인 책임총리(또는 실세 총리)'[16]라는 타이틀이 생겼고,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을 지휘하는 등 현실 정치에서도 실세 총리로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 지금도 책임총리나 실세 총리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이해찬 총리다.

그러나, 강원도 양양군에 산불이 번지는 와중에도 골프를 친 사건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고, 이후로도 이런 행적은 정치적 부담이 되어버려 평생까임권 공격의 주요 소재가 되어버렸다. 이후 골프와 관련된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국무총리에서 사퇴했다.

사실 이해찬 총리가 재직 시절 골프로 구설에 오른 것은 양양 낙산사 산불건 외에도 몇 차례 더 있었다. 가장 먼저 구설에 오른 포천 포사격 훈련 사고는 당시 골프를 치다가 사건 보고를 받고 즉각 조문을 가서 별 문제가 안 됐지만, 양양 낙산사 산불 사건으로 상당한 논란이 되었고, 같은 해 남부 지역에 홍수로 수해를 입고 있었는데도 제주도에서 골프를 치는 바람에 빈축을 샀다. 결정적으로 2006년 3.1절 기념식에 불참하고 부산에 골프치러 갔던 것이 밝혀지자 청와대에서도 쉴드를 포기했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3.3.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편집]

10년 만의 정권 교체로 다시 야당이 된 이후 유시민친노 세력을 모아 탈당한 뒤 기존의 열린우리당의 부활을 염두로 신당 창당에 박차를 기울였다. 바쁜 일정 때문인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연임 기록은 일단 5선으로 마감했다. 그러다 대선이 임박해오자 친노 및 진보 NGO 인사들과 함께 가칭 '시민통합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뒤 민주당과 합당하는 방식으로 민주당에 복당하였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호남이라고 불릴 만큼 실제 호남출신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제일 막강했고 자신이 내리 5선을 지내기도 했던 서울특별시 관악을 지역을 떠나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했다.

이해찬 후보는 자유선진당심대평을 무려 14%P차로 밀어내고[17] 4년 만에 국회로 복귀했다. 당초에는 지역 거물 정치인이던 심대평의 당선이 점쳐졌지만[18][19] 이해찬 후보는 국무총리를 지낸 경력 하나만으로도 전국적인 인지도가 월등한 데다 국무총리 시절 세종특별자치시 설립에 앞장선 경력도 있고 여기에 지역적 연고까지 있어서 생각보다 큰 7,000여 표 차로 이겼다. 설마 이해찬... 그 4년 사이에 세종으로 아예 옮긴 건가...여담으로 2년 뒤 치뤄진 6.4 지방선거에서도 세종특별자치시장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

민주통합당의 첫 지도부였던 한명숙 지도부가 19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그 뒤를 이을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 경선에 출마해 김한길 의원 등을 쓰러뜨리고 당선되기도 했었지만 대선 국면에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인적쇄신론이 나오면서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당대표 대행을 맡기고 사퇴했다.

대선 이후에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다가 박근혜정부개성공단을 일방적으로 폐쇄하는 조치를 내리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임금의 70%가 북한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간다'고 주장했다가 야당이 '이명박 정부부터 지금까지 약 5억 2,000만 달러가 개성공단에 들어갔는데, 이 돈이 무기 개발에 쓰여진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방치했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반론하자 급히 말을 바꾼 것을 두고 한 차례 비판한 뒤, 현역 통일부 장관도 모르고 있었던 개성공단의 임금 흐름을 설명하며[20] 홍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자후를 보여주기도 했다.# 암이 나았습니다.

3.4. 난항 끝의 재등원(再登院)[편집]

2016년 3월 14일, 더불어민주당김종인 지도부가 그의 지역구인 세종시를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해 이 의원을 쫓아내면서 다시 그의 존재감이 되살아났다.

공천관리위원회는 이해찬 후보에겐 부적격 사유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를 공천하려고 했지만 김종인 대표가 차일피일 결재를 미뤘다고 한다. 이 행동을 놓고 모두들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에게 '내 손으로 잘라내기 전에 본인이 명예롭게 물러나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해찬 의원은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결국 더민주 지도부는 이해찬 의원을 쫓아내기에 이른다.

김종인 대표는 '정무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며 이해찬 후보를 컷오프한 구체적인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론에선 주로 당내 다선 의원 물갈이의 연장선상에서, 또는 실체없다는 말도 많지만, 어쨌든 많이 비판받는 '친노 패권주의'를 표면적으로나마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친노계 좌장인 이해찬 의원을 제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수적인 이유로는 과거 서울 관악 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해찬과 맞붙었다 패했던 김종인 대표의 사적인 감정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고, 세종시에서 여론조사를 돌려보니 결과가 형편없어서 탈락시켰다는 말도 나온다. 심지어는 문재인 전 대표가 친문계 세력으로 친노계를 재편하려고 배후에서 조종해 친노계의 2인자인 이해찬 의원을 김종인 대표를 통하여 쫓아낸 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다 나왔다.

언론 보도를 인용하자면, 문재인 전 대표 쪽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을 잘라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해찬 의원 컷오프가 확정되기 전날, 문재인 전 대표와 김종인 대표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여기서 김 대표는 '전체 선거 구도를 위해 어쩔 수 없다. 내게 맡겨달라'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를 보면 김 대표 본인도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일반 대중의 시각을 생각해 이해찬 의원을 일찌감치 잘라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거 같다.

어찌되었든, 탈당은 없을 거라는 언론의 추측성 보도와는 달리 이해찬 후보는 3월 15일, "어떠한 결격 사유도 없는데 모욕을 주고 강제로 쫓아내면서 친노를 척결한다고까지 말하는 객관적이지 않은 공천 방식은 인정할 수 없으므로 무소속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종인 대표는 이해찬 후보의 상대로 다른 곳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인지도 낮은 후보를 보냈다 다만 자길 따라 동반 탈당하겠다는 세종시 당원들과 시장, 시의원들은 당에 남아 있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고, 본인도 당선될 경우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결과는 새누리당 박종준 후보, 더민주 문흥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된 직후 인터뷰에서 이해찬 의원은 김종인 대표의 '정무적 판단에 따른 컷오프'에 대해 엄중히 항의해 사과를 받아낼 것이며 복당이 된다면 당을 바로잡겠다'며 복당하면 차기 당대표 선거를 겨냥한 듯한 뉘앙스를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당선으로 그는 7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지지않고 전승한 국회의원이 됐는데, 이는 윗 당선 수를 따져봐도 9선 의원인 김종필자민련 총재 외에는 없다. 허나 그 JP조차 비례대표 1번을 받고도 떨어지는 굴욕을 겪은 바가 있다.

참고로 JP와 같은 9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4대 총선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3대 총선4대 총선에서 낙선한 흑역사가 있다. 8선 의원 중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경우 2의 낙선, 정일형 전 의원의 경우 한 번의 2위가[21] 있으며, 새누리당서청원 전 최고위원의 경우 1번의 낙선이 있어 김재광 전 의원만 8선 모두 당선(!)되는 진기록을 가졌다.

같은 7선 의원인 정몽준 전 의원은 국회의원 선거는 7회 모두 당선되었으나, 2014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패배하여 1번의 낙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해찬 의원은 농담 삼아 "좀 교만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왜 선거에서 지는지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승리를 함으로써 선거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을 이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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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마감된 가운데 이해찬 무소속 후보가 세종시 도담동 선거사무소에서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자 선거 캠프 직원들 및 지지자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22]


지지자들과 20대 총선 당선 축하 떡을 자르는 이해찬 당선인. 참고로 사진상으로 이해찬 바로 왼쪽에 있는 인물은 이춘희 세종특별자치시장.[23]


당선되는 즉시 복당하겠다며 복당을 일찍이 천명했지만, 탈당한 인물들을 복당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싸우고 있는 새누리당과는 달리, 더불어민주당은 탈당해 무소속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한 이해찬, 홍의락 두 의원의 복당 문제를 거의 거론하지 않는 분위기다.

홍의락 의원이야 본인이 복당할 뜻이 없다고 말했으니[24] 그렇다고 친다지만, 이미 본인 스스로도 복당을 천명한 바 있고, 더불어민주당의 가장 튼튼한 지지층인 친노 성향의 지지자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한 이해찬 의원의 복당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이해찬 의원이 복당해 전당대회에 출마하면 아마도 가장 유력한 당권 주자가 될 것이고, 그럼 김종인 대표는 자기가 갖고 있었던 당 지휘권을 앙숙(?)인 이해찬 의원[25]에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걸 원치 않아서라고들 보고 있다.

그래서 이해찬 의원의 복당은 빨라도 아마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공식 지도부가 선출된 다음인 2016년 가을 즈음, 늦으면 대선 직후에나 이뤄질 듯하다. 이해찬 의원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아마도 2016년 9월 쯤에 복당할 수 있을 거라 내다보는 중이라고.# 일단 일여다야 구도에서 무소속으로 나갔는데도 무난히 당선돼 '컷오프는 잘못됐다는 걸 세종시민들이 입증해 주었다'는 등의 명분도 생겼고 전당대회에서 친문 성향 최고위원들이 다수 당선되고 친문 진영에서 밀었던 추미애 대표가 압도적 득표율로 새로 당선되면서, 복당은 시간 문제일 듯.

2016년 8월 18일, 세종시 전동면에 있는 자신의 전원주택 근처에서 퇴비 냄새가 난다고 해서 민원을 넣었다.[26]이에 세종시청에서부터 심지어 세종시 행정부시장까지 나서서 이웃 농민의 퇴비를 15톤이나 수거해 가는 바람에 갑질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악취의 농도도 허용치 안이었다는 말이 있었다. 관련 기사

그러자 이해찬 의원실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문제의 퇴비는 일반적인 퇴비가 아닌 돼지 분변을 바탕으로 한 퇴비로, 악취가 심해 그 주변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찜통 더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이해찬 의원도 세종시를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이지만 무엇보다도 함께 피해를 보고 있었던 인근 주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을 대표해 민원을 넣었다는 거였다. 세종시청에서는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땅 주인에게 수거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진영 지지자들이나 반노/반문 성향의 야권 지지층의 반응들은 대체로 '전원 생활을 하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이라며 갑질이라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세종시당도 '이해찬 의원의 민원은 황제 민원이다'라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문제의 해당 비료를 조사한 결과 중금속아연 함유량이 기준치를 초과해 부적합 결과가 나왔으며 설상가상으로 해당 마을은 상수도를 쓰지 않고 지하수를 쓰는데, 비료가 뿌려진 땅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중금속아연이 마을의 상수원으로 흘러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의 발행인은 김종인 대표가 이해찬 의원 쪽과 가까웠던 당직자를 몰아내고 더민주 세종시당 사무처장에 앉힌 사람이라 중립적인 시각에서 나온 보도인지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왔다.#

2016년 9월 30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당무위원회의에서 이해찬 의원과 징계를 받았던 세종시당 당원들의 일괄 복당을 의결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했다.# 그리고 11월 2일 더불어민주당이 당 국정자문회의를 외교안보통일 자문회의와 국가경제 자문회의로 이원화한 뒤 이해찬 의원을 외교안보통일 의장에 선임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 경선에선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선거 캠프에 참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중립을 지켰다. 몇 차례 경선 과정을 비판하는 의견을 낸 적은 있지만 특정 후보를 겨냥하지는 않은 원론적인 의견에 가깝다. 이후 문재인이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에 선대위원장이 되었다.

3.5. 중국 특사[편집]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취임 이후에 중국 특사로 내정되었다.

파일:이해찬굴욕.png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회담 과정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YTN 특사는 대통령의 대리인인 만큼 타국의 정상과 회담을 할 때 대등하게 나란히 의자에 앉는 게 외교적 관례인데, 중국 측은 회의식 좌석 배치를 하여 대통령의 대리인인 이해찬이, 다시 말하자면 문재인 대통령이 마치 시진핑보다 낮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연출되게끔 만들었다. 일각에서는 양제츠 위원, 딩쉐샹 총서기 판공실 주임, 장예수이 외교부 부부장 등 중국 측 참석자가 많아 규모에 맞게 배치한 것일 뿐이라 해석했지만, 이전의 박근혜 특사(이명박 정부), 김무성 특사(박근혜 정부)가 후진타오, 시진핑 주석과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었던 것에 비춰보면, 탄핵 정국 와중에도 박근혜 정부가 기습적으로 사드를 배치한 것에 대한 ‘무언의 항의와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모양새.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PYH2013012309980001300_P2_59_20130123173505.jpg
이는 2013년 1월 23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파견한 김무성 특사와의 모습인데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 자리에서 이해찬이 깍듯이 인사를 하는 모습이, 마치 조선시대 조공사절처럼 인사를 하는 모습이라는 취지로 조선일보, 연합뉴스를 통해 회자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대리인, 더 나아가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굴욕적인 행동을 한 것은 실수라는게 비판의 요지. 인터넷 등지에서는 비판과 함께 방구석 여포라는 멸칭까지 나왔지만, "성대한 의전은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는 외교 격언을 감안하면, 오히려 중국 측에 뭔가 큰 선물을 안기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반응도 있다.

일례로 역대 대통령의 대미외교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펜타곤 안방"까지 안내 받으며 가장 성대한 의전예우를 받았는데, 이 의전에 앞서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연평도 포격의 여파로 한국이 한-미 FTA 협상에서 '놀라운 양보'를 하였다"고 평했을 만큼 자유무역협상에서 입장을 뒤로 물린 사건이 있었던 것. 이해찬은 굴욕적인 행동을 감수한 끝에, 시진핑 주석과는 예정된 20분을 넘겨 40분간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양제츠 국무위원이 우리 측의 롯데마트 영업중단 조치 등을 해결 요구에 “우려를 이해하고 적극 노력하겠다"는 화답을 했으며,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공식 석상에서 "중국도 한국과 함께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공동 노력을 하길 원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한편 이런 이해찬 특사의 일거수일투족은 WSJ에도 보도되기도 했다. archive

10월 31일 한중 양국이 사드 배치로 인한 갈등에서 벗어나 교류 회복을 전격 협력 한 것에 외교부와 국가안보실, 노영민 주중대사와 함께 막후에서 활약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월 공식, 비공식으로 문정인 특보와 함께 여러차례 중국을 방문해 현지 고위 인사들과 두루 접촉해 중국의 불안을 불식 시키는데 활약했다고 전해졌다.*

3.6. 문재인 정부 이후[편집]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집권여당의 원로로써 예전처럼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2선으로 물러나 있는 상태이다. 2017년 중국 특사로 파견된 이후 언론에 비추는 빈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20대 국회 전반기,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국회 결석률이 매우 높은 편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국회 결석률 상위 20명 중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으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00% 출석률을 기록한 같은 친노계 원로 국회의원하고 비교된다

6.13 지방선거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후, 추미애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18년 8월에 있을 전당대회에서 차기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어 왔다. 이해찬 의원은 민주당 현역 의원들 중 가장 국회에 뼈가 굵은 사람이고, 또 안철수와의 단일화 협상 때문에 중도 사퇴하긴 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를 역임한 경험도 있어 연륜과 수완을 모두 갖추고 있는 카드로 평가 받고 있다.

게다가 현재 민주당 내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친문 성향 당원들의 표심을 상당 부분 가져갈 것으로 보여져 만일 당 대표 자리에 재도전한다면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가 될 거라고들 보았다. 민주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정치인들 중에서 확실한 친문계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최재성, 전해철(불출마), 이해찬 세 명으로 좁혀진 상황에서 이해찬 전 총리가 출마를 결심할 경우, 나머지 두 의원이 단일화에 응할 가능성이 높을 거라는 예측도 나왔다.

이번에 선출되는 민주당 당 대표는 임기가 2020년에 있을 21대 총선에 걸쳐져 있어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대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다. 따라서 후보 공천 과정에서 여러모로 계파 사이에 갈등으로 인하여 잡음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원들 사이에서는 이해찬처럼 카리스마 있고 정치 경력이 어마어마한 거물급 인사가 당 대표로 있어야 잡음이 덜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해찬 의원은 무슨 이유에선지 제법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후보 등록 마감을 앞둔 2018년 7월 20일 본격적으로 당 대표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2018년 7월 26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 대표 후보 예비 경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했다. 이해찬 본인은 당 대표가 되어 마지막 소임을 다하고 싶고, "다음 총선에 나갈 생각이 없다."라며, 일종의 은퇴를 선언을 했다.

4. 이해찬 세대[편집]

교육부 장관 시절 추진한 정책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해찬 세대 문서 참고.

5. 트리비아[편집]

  • 신림동에서 1978년부터 '광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한 바 있다. 이 서점은 이해찬이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동생 이해만이 운영하였으며, 처음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으나 1990년대 들어서는 고시서적도 많이 취급하게 되었다.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큰 서점이어서, 신림동 고시서점 중 목이 좋고 가장 유명했던 '상원서적'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으나,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여느 고시서점들과 마찬가지로 몰락하여 2012년 12월 31일 부도를 내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광장서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북션' 서점이 들어서 있다.

  •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정치인이며, 지지자들 사이의 애칭은 '해찬들'[27], '찬들이형', 또는 '대장부엉이'라 불리며, 비토 세력들에게는 '해골', '해골찬'이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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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선거에서 경선 후보, 대선 후보, 캠프 및 정당 관계자들이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말 실수를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일 때마다 이 짤을 사용하면서 이해찬 1승이라고 외치는 게 이 되어버렸다.

  • 이투스 수리논술 강사인 오승준과 상당히 외모가 흡사하다. 또한 묘하게 박정학 배우와 비슷하게 생겼다.

  • 위의 선거 당선 당시의 사진처럼 무표정인 모습이 많아서 포커 페이스의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깐깐한 이미지의 외모와 겹쳐서 더 큰 시너지를 나타내는 편.

  • 파일:1494484245075.png
    국회 모범생과 결석생의 모습
    뒤에 장병완 의원, 심재권 의원, 이석현 의원이 보이고, 세사람 뒤에는 깨알같이 양승조 의원이 보인다.[28]
    위 사진은 동료 의원인 문희상 의원과 함께 국회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장면이다. 문희상은 참여정부 시절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29]으로 일했던 적이 있고, 이해찬은 앞서 말했듯이 참여정부 시절 법에 보장된 권한을 마음껏 행사했던 '책임 국무총리'로 일한 적이 있어서 둘 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며,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 유세를 지원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연히 문 대통령 취임식 날 사진에 표정이 이렇게 찍혀서 마치 반(反)문재인 성향 의원들이 억지로 참석한 모습처럼 나와 버렸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친노계 - 친문계에서는 원로급으로 분류되는 의원들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매우 열심히 뛴 인물들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둘 다 해외 특사로 파견되면서 외모 패권주의의 희생양이란 소리를 들었다

  • 20대 국회의원들 중 유일하게 총리 경력이 있는 의원이다. 그래서 현직은 국회의원이지만 사석에서는 '총리(님)'이라 불린다. 일종의 예우 차원.[30][31]

  • 201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 시절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증상을 자꾸 보여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2017년 김어준의 파파이스와 같은 공개석상에서 나온 모습을 보면 가끔씩 손을 떨거나 말이 끊기는데, 이는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으로 예전에는 말을 날카롭고 빨리 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여러 모로 고문 후유증이 생긴 게 아니냐는 염려가 있다. 특히 2018년 7월 20일 민주당 당 대표 선거 출마 기자회견에서는 몸을 떨고 코를 훔치는 등, 건강이 염려되어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 6월 15일 tbs와 한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개혁 우파, 진짜 진보는 정의당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불어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정당들은 우리나라의 사회 구조상, 깊이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분명히 규정하기도 하였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평화민주당

39,950 (31.18%)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민주당

64,035 (44.69%)

당선 (1위)

재선[32]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새정치국민회의

54,049 (44.75%)

당선 (1위)

3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새천년민주당

48,751 (47.48%)

당선 (1위)

4선[33]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열린우리당

49,673 (41.12%)

당선 (1위)

5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세종)

민주통합당

22,192 (47.88%)

당선 (1위)

6선[34]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세종)

무소속

46,187 (43.72%)

당선 (1위)

7선[35]


선거의 귀재 해찬불패

보다시피 지역구 7전 7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선거 득표율이 50%를 넘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민주당 중진인 정세균 국회의장이 지역구 6전 6승에, 모두 50%를 넘긴 득표율로 승리한 걸 비교 대상으로 드는데, 정세균은 2012년 총선 때 서울 종로구로 지역구를 옮기기 전까지는 민주당 후보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주던 호남에 지역구를 두고 있었으니 적당한 비교 대상이라고 보긴 힘들다.

서울 관악구가 민주당 지지세가 서울에서 제일 강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호남만한 텃밭은 당연히 아님에도 연이어 5선을 한 것은 대단한 결과이다.

물론 비교적 유리한 지역에 출마해온 것은 사실이다. 관악구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서울 내에서 가장 민주당 계열 지지율이 높은 지역이었다. 다만 세종시의 경우에는 본인이 국무총리 시절 수도 이전을 전면에서 지휘한 곳인데다가 자기 자신이 충청도 출신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는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던 것은 사실이며 19대 총선 당시 맞붙었던 상대는 충청 정치권의 거물이었다. 물론 이를 감안해봐도 7전 7승은 선거의 달인으로 평가받을만한 기록이기는 하다. 남경필이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구이기는 했어도 수도권에서 6전 6승을 한 것이 대단한 기록으로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른바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박근혜의 경우, 차례의 총선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2006년 5.31 지방선거한나라당의 대승으로 이끌긴 했지만 누가 봐도 새누리의 승리가 명확해 보였던, 그것도 대통령으로서 이끌었던 20대 총선에서는 참패해 박근혜가 본인의 능력으로 선거의 여왕이 된 건지, 아니면 그동안 기울어진 운동장 덕분에 얻게 된 승리를 박근혜의 능력 덕택에 얻은 것처럼 포장이 된 건지 불투명하게되었다

반면, 이해찬은 소위 말하는 험지 출마는 해본 적이 없었고 항상 유리한 지역을 출마해왔다는 점은 박근혜와 같을지 몰라도 13대 총선에선 민주정의당김종인, 통일민주당의 거물 김수한을 꺾고 당선되었고, 19대 총선에선 충청 지역 정치권의 거물 심대평을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큰 선거를 이끌어본 경험도 서울시장 두 명[36]의 당선에 기여한 바 있고, 2012년 대선을 제외하면[37] 자신이 참여한 대선에서 모두 승리를 맛 보았으니 박근혜에게 크게 뒤쳐진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1988년 첫 출마부터 2012년 총선까지 소속 정당의 이름이 모두 다른데, 이인제김한길처럼 탈당을 밥먹듯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가 몸 담고 있었던 민주당의 이름이 유난히 자주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건 문희상도 마찬가지다. 물론 신민주연합당 시절과 열린우리당 입당으로 인한 탈당 및 20대 총선에서의 무소속 출마 등 3번 탈당하긴 했다.

7. 둘러보기[편집]

[1] 공주시·연기군 선거구의 제18대 국회의원이다.[A] 2.1 2.2 서울특별시 제12선거구의 제12대 국회의원이다.[4]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 14세손, 시조 43세손 '海'자 항렬이다. 순종황제의 조카뻘이자 배우 이해랑, 소설가 이해조와는 같은 항렬이고, 마라토너 이봉주의 아버지뻘이다.[5] 숭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6] 당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중이었다.[7] 2016년 현재 자신의 국회의원 지역구인 세종시의 설계 및 추진 또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8]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 사후에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정계로 끌어들인 당사자가 이해찬이었다.[9] 20대 국회 기준으로 민주당 최고령 현역 의원은 후반기 국회의장이 된 문희상 의원이다. 2018년 기준으로 73세.[10] 1956년 지방선거로 추정[11] 신경민MBC 앵커, 현 더불어민주당소속 국회의원과 같은 과 동기(72학번)[12]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참조. 이때 당시 딸에게 쓴 편지글이 의외로 꽤 감동적이다. 당시 학생운동 전력의 요시찰 인물들이 많이 피해를 봤다.[13] 그 당시 보좌관이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유시민이었다. 실제로 유시민은 이해찬의 보좌관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했다.[14] 녹화사업(3번 항목) 관련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박준병 장군에게 질의를 하는 모습이다. "안 하겠다는 사람에게는 부탁을 하고..."라는 궁색한 변명에 "군대에서 부탁이란 게 있습니까?"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백미.[15] 당장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을 지은 이가 이해찬이다.[16] 사실 이회창이나 공동정부 지분을 갖고 있었던 김종필도 비슷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권한을 행사하려 해도 대통령과 마찰을 일으키고 사퇴하거나, 공무에 바쁜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무 및 국정 지원에 몰두하는 모습이 더 자주 비춰졌다. 이해찬은 본인 의지와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산이라는 박자가 맞아 이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고 실질적으로 부통령, 아니 그 이상의 내각 수반이나 다름없게 된 셈.[17] 정확히는 이해찬 47.9%, 심대평 33.8%[18] 심대평은 공주시 출신으로 관선 대전광역시장, 관선 1회 + 민선 3선 충남도지사에다 대전 서구을과 공주시 - 연기군에서 총 2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충남의 맹주를 노리는 인물이었다.[19] 정당 활동으로는 충남도지사 시절에 자민련 세력을 모아서 국민중심당을 창당, 이후 당대표를 거쳐 17대 대선에 나가기도 했다. 이후 합당하면서 자유선진당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이하게 보수 진영임에도 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과의 접점은 적은 편. 이해찬에게 패한 후 결국 그대로 자유선진당과 함께 정계에서 사라졌다.[20]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월급을 달러나 북한의 현금이 아닌, 일종의 상품권으로 받는다고 한다. 이 상품권으로 개성에 있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생필품을 사가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즉, 박근혜 정부는 북한 노동자들이 개성에서 밖에 쓸 수 없는 상품권까지 강제로 뜯어내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21] 9대 총선, 중선거구제하에서의 당선[22] 저 사진에선 무표정한데, 사실 저 사진은 박수부터 치는 걸 찍어서 그런 거고 실제로는 웃었다.(!)[23] 단순히 자치단체장과 지역 국회의원의 관계가 아니라, 이해찬 의원이 총리 시절 지금의 세종시를 적극 추진하고 이춘희가 행정복합도시건설청장으로 현장 실무를 담당했던지라 매우 사이가 각별하다. 그래서 이해찬 의원의 컷오프 때 이춘희 시장까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려 했으나 이해찬이 적극 만류했다고. 이해찬 : 난 어차피 당선될 건데 뭘 자네까지 탈당해? 나중에 와서 떡 자를 준비나 해 그래서 정말 이춘희 시장이 떡자르러 왔다.[24] 당선 이후 대선 전까지 무소속 신분을 정리하겠다는 발언을 했지만, 더민주는 TK지역의 수구정서와 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인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새누리당 역시 그동안의 스탠스를 고려했을 때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바른정당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자체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국민의당에 입당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방향을 다시 틀어, 결국 2017년 5월 4일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하였다.[25] 위에 쓰여있듯이 김종인 대표는 13대 총선에서 본인의 출신지인 서울 관악 을에 출마했다가 이해찬에게 패배해 낙선한 적이 있다.[26] 여담이지만 우리나라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살고 있는 집과 본인 지역구가 따로따로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많은 의원들이 선거 전에 자기 지역구가 정해지면 전세나 월세집을 구해 들어오곤 한다. 부유하다고 알려진 지방 쪽 지역구 국회의원들 중 다수는 서울 강남구에 사는 경우가 많다. 이해찬 의원처럼 사는 곳과 지역구가 일치한 국회의원은 그리 많지 않다고. 서울특별시장의 경우도 장관급이기 때문에 주무 부처 장관의 명령과 권고도 거부할 수 있다.[27] 고추장 브랜드에서 따온 별명이다[28] 이듬해인 2018년에 국회의원직 사퇴하고 충남도지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29] 마지막 청와대 비서실장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었다.[30] 항상 욕만 먹고 금방금방 경질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무총리는 의전서열 5위로 굉장히 높은 자리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수장인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바로 다음 위치다. 이해찬의 경우 야당 대표(8위) 경력도 있다.[31] 장관이나 교섭단체 당 대표(비대위같은 임시 당 대표 제외, 정식 당 대표 한정)를 역임한 의원의 경우에도 사석에서는 '의원님'이 아닌 '장관님'이나 '대표님'이라 불린다. 또 다른 사례로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나 정병국 바른미래당 의원 또한 사석에서는 각각 장관을 지낸 경력 때문에 의원님이 아닌 '장관님'이라 불렸다. ???: 충성충성충성 장관님 사랑합니다 충성 다만, 이 두 사람 모두 2017년 초에 각각 당 대표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장관님보단 '대표님'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32] 1995년 7월 의원직 사퇴 (조순 시장하 서울시 정무부시장 임명)[33] 2003년 열린우리당으로 당적 변경[34] 첫 세종시 국회의원. 2016.3.15 더불어민주당 탈당(공천불복)[35] 본인 선거이력상 최초로 무소속으로 당선, 세종시 재선 국회의원, 2016.9.30 더불어민주당 복당[36] 사실 서울시장은 2승 1패다. 1패는 2010년 6.2 지방선거 때 생긴 전적이다. 이때 이해찬은 한명숙 후보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한명숙 후보는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와 접전 끝에 겨우 0.6%p 차이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투표함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 여론조사에서 두 사람의 지지율 차가 15~20%p 가량 차이가 났던 걸 감안하면 상당한 반전이었다. 크게 이길 줄 알았는데 크게 이기기는 커녕, 강남 3구의 몰표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떨어졌을 정도로 후들거리는 격전을 치렀으니까. 오세훈 본인도 가까스로 당선된 뒤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를 못했다.[37] 18대 대선에서는 안철수와의 단일화를 위해 당대표직에서 중도 사퇴해 선거를 끝까지 돌보지 못했다. 당 지도부가 선거를 앞두고 총사퇴한 건 문재인의 패인 중 하나로 꼽힌다. 팟캐스트 등에서 이해찬이 한 말을 보면 본인 스스로도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을 깊이 후회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