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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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한영(李韓永)

본명

리일남(李一男)[1]

생몰년도

1960년 4월 2일 ~ 1997년 2월 25일[2]

출신지

평양직할시

사망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신도시

직업

방송국 PD, 사업가[3]

학력

만경대혁명학원
모스크바 외국어대학 어문학부
스위스 제네바 유학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경력

1987년 KBS 국제방송 러시아 부분 담당 PD 입사

가족

아버지 故 이태순
어머니 성혜랑
이모부 故 김정일
사촌동생 故 김정남

저서

1996년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잠행 14년> 출간.

종교

개신교(장로회)[4]

역대 탈북자 중 가장 불행한 사람
- KBS 국제방송 러시아 부분 PD



1. 일생2. 망명3. 망명 후의 삶4. 피살5. 피살 사건 이후

1. 일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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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 찍힌 김정일의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성혜랑(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언니), 가운데가 성 씨의 자녀 이남옥, 오른쪽이 이한영. 김정일 옆의 아이는 김정남. 출처: 신동아

이한영은 김정일의 처조카이며 김정남과는 이종사촌지간이다. 만경대 혁명학원에 재학중이었던 1978년 만 18세였던 그는 이모 성혜림으로부터 고 이병주의 소설인 <망향>을 받아 난생 처음 남한 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달콤한 애정 소설을 읽으면서 그는 며칠밤 잠을 설쳤다고 자신의 저서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에서 밝혔다. 또한 신상옥 감독의 <이별>과 같은 남한 영화를 좋아했으며 한국 드라마의 주제가를 기억할 정도로 열렬하게 시청하는 등 '남조선'에 대해 밝았다. 1976년 5월17일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게 되고 레닌 대로 바빌로가 85번지의 북한이 소유한 고급 아파트에 머물면서 공작원들에게 만달러와 벤츠를 선물로 받기도 하는 등 부유한 유학 생활을 보냈다.

한편 이한영의 이모인 성혜림김정일과 정상적인 결혼이 아닌 불륜이었기 때문에 북한 사회에서 김정남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졌다. 이런 인정받지 못 한 관계에 김정일성혜림에 대한 애정까지 식어버리자 성혜림은 아들을 빼앗기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신경성 질환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돼 버리고 모스크바스위스를 전전한다. 이때 자신의 어머니인 성혜랑과 이모 성혜림 등과 같이 생활하였다.

그가 '남조선'행을 택하게 된 이유는 다름아닌 그의 이종사촌 김정남의 교육 문제에 대한 원인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정일은 1980년 당시 만 9살이었던 김정남을 스위스에 있는 제네바 국제학교에 입학시켰는데, 불안에 빠진 성혜림은 김정남을 자신이 있는 모스크바로 불러들였고 김정일은 '일남이(이한영)는 스위스 제네바에, 정남이는 모스크바의 프랑스대사관 학교를 다녀라'고 명령해 1982년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 만난 '이철'(본명 이수용, 현 북한 외무상)은 이한영에게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게 하고 이한영은 어학원에 다니며 영어를 공부했다.

2. 망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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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이한영.

1982년 9월 28일, 이한영은 대담하게도 직접 제네바의 한국대표부로 전화를 걸어 “나는 북한 외교관이다. 북한 외교관 여권과 공무원 여권 등 3개나 가지고 있다. 미국 여행을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잠시 후 한국 대사관 직원이 “북한 여권으로 미국에 가려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라며 있는 곳을 물었고 3일 후 이한영은 프랑스·벨기에·서독·필리핀을 거쳐 김포국제공항에 도착, '남한'으로 첫 발을 디뎠다.

이것은 정부 문건에서 이른바 '몽블랑'이라고 보고 된 사안으로, 한국에서 숨막힐 듯한 물밑 작업에 의해 성사된 망명으로 알려졌다. 제네바 대표부는 당시 리일남, 즉 이한영의 전화를 받은 지 9시간이 지난 1982년 9월 28일 오후 7시 '몽블랑 보고(1)'라는 전문을 외교부에 띄웠다. '북한 공작원 김영철로부터 아국 귀순 요청을 받았다'는 내용. 김영철은 이한영의 가명이었다. 대표부는 '김영철은 제네바대 병설 어학속성과 연수를 위해 체류 중인 북한 당 연락부 무소속 공작원'이며 "리민영·이일남(이씨의 북한 본명) 명의의 여권도 소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후 관계자 5명과 함께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을 넘어 가장 가까운 국제 공항이 위치한 프랑스의 리옹으로 긴박하게 향하게 되었는데, 한국 정부는 그들이 스위스 당국에 알리지 않은 채 국경을 넘은 것을 우려하여 외교적인 파장을 걱정하기도 하였으나 여러 시나리오 끝에 극적으로 망명이 성공하였다.

서울 시내에 도착하여 차로 시내를 달리는 도중, 길가의 광고판이 눈에 띈 순간 이한영은 “어, 이주일이네. 저건 유지인이고”라고 북한에서 생소했을 남조선 연예인들을 친근하게 가리켰고 동승한 안내자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남조선 텔레비전을 봐서 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관계자는 고개를 갸웃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낯설 때인데 80년대 초 북한 사람이 한국의 연예인을 잘 알고있으니 갸웃할 만도 하다.(...)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사를 받으면서 그는 김일성이 거주하는 금수산 의사당(주석궁)의 구조와 조직 관계부터,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김씨네 생활상 및 권력구조 등 초특급 핵심 정보를 진술했다. 조사가 끝날 무렵 '자유 대한에서 영원히 살라'는 뜻으로 '한영(韓永)'이란 새 이름을 받았다. 주민등록번호는 그가 태어난 해인 61년과 스스로 한국행을 택한 9월 28일을 엮어서 610928라는 의미있는 숫자가 주어졌다.

3. 망명 후의 삶[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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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서울특별시 강동구의 28평 주공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이었으나 입주가 늦어져 반년간 서초구 잠원동의 18평 한신 아파트를 전세로 들여 거주하였다. 안기부로부터 받은 1억여 원중 전세값으로 2천만 원을, 나머지 8천만 원은 정기예금에 넣어두고 이자로 나오는 70만 원으로 생활하였는데, 당시 대학 등록금이 50만 원가량이었던 물가로 보면 한달에 70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으나 북한에서 귀공자처럼 살던 그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용돈이었다고 한다. 1984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는 집을 담보로 잡고 받은 융자 3백만 원을 대학 친구들과 술 마시는데 다 써버려 안기부에게 혼쭐이 났다고 자신의 저서에 밝히기도 했다. 당시 그는 '돈 쓸 때만 한국에 온 것을 느낀다'고 갓 20세를 넘긴 나이에 북한에서 홀로 한국에 도착한 극도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표현했다. 그러던 중 84년 강남에서 술을 잔뜩 퍼마신 뒤 여관에 들어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기도를 하기도 했는데, 실제 죽음에는 이르지 못하고 이틀 내리 잠만 자고 나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았다.(...)사고뭉치

안기부 측은 김정일의 측근이자 소중한 정보원이었던 이한영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었는데, 85년도에는 명동의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시키고 거처까지 바꾸도록 하였다. 혹시 모를 보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대학 졸업 전인 87년도 10월 안기부는 그를 유럽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요원의 자녀로 꾸미고 KBS에 취직시켰고, 국제방송국 러시아어 방송 담당 PD가 되었다.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이씨는 러시아어 전문가로 활약했다.

그 해 12월, 모델 출신이었던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다. 입국 때부터 신분을 철저하게 밝히지 않았던 그였으나 여성에게는 자신의 신분을 솔직하게 밝혔다고 한다. 마침 해외 여행 자율화가 시행된 1989년 그는 부인과 유학 시절부터 바라온 미국 여행을 계획했으나 망명 시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부터 '출국 정지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몰랐던 그는 "한국에 올 땐 자유롭게 미국에 갈 수 있다고 해놓고 이렇게 발을 묶는가"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KBS 재직 시절 직장 조합 주택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이한영은 사업에 눈을 뜨고 사표를 내어 사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곧 횡령 시비가 벌어져 한번 옥고를 치뤘다. 1994년 석방된 후로는 안기부에서 지급하는 80만 원으로 생활을 하게 되나 1년 뒤 이것마저 중단되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팔러 나섰는데, <월간조선>기자를 만나 모스크바에 있는 모친 성혜랑과 통화하는데 성공했고 이 일이 매스컴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것이 그의 비극적인 결말이 되고 말았지만...

4. 피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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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인 <김정일 로열 패밀리>와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김정일의 측근이자 성혜림의 조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신문, 잡지와 방송에까지 출연하는 등 활발하게 북한에 대한 실상을 폭로했다.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동아일보사)>이라는 김정일의 가족과 치부를 까발리는 내용의 저서를 출판하여 김정일을 비판하였다.남한생활 14년 꿈과 좌절의 고백(1996. 06.11 동아일보)

이러한 활동은 당연하게 북한의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한의 로열 패밀리였던 그가 폭로한 실상들은 북한에게 커다란 위험 요소였다. 김정일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사생활을 폭로한 것에 대단히 분노했다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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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귀순이후 북한이 공언해온 보복위협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국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어젯밤 일어난 귀순자 이한영씨의 권총피격 사건이 북한 보복의 신호탄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의 대북 경각심이 새롭게 점검돼야 할 시점입니다.

- 사건 다음 날 김종진 KBS 뉴스 9 주말앵커의 오프닝 멘트 중에서.


결국 1997년 2월 15일 밤, 자택인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시범현대아파트 14층 복도에서 간첩으로 보이는 신원 미상의 괴한들에 의해 피습을 당했다. 무기는 대남 간첩들이 주로 사용하는 벨기에브라우닝 권총으로, 실탄 1발이 이마에 관통하였다. 사건을 목격한 그의 부인은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나가자 괴한 2명이 남편에게 권총을 겨누고 이 중 한 명이 실탄을 발사한 뒤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쓰러진 이씨에게 "누가 그랬느냐"고 묻자,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펴보이며 "간첩, 간첩"이라고 말한 뒤 의식을 잃었다. 분당 차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에서 산소호흡기에 숨을 의지하다가 10일 후 사망하였다. (KBS, MBC, 동아일보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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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영 피살사건은 두 명의 북한 특수공작원이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다.[6] 당시 공안 당국은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테러 전문 요원인 일명 '최순호 조'가 암살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지었다.출처 사건 당시에는 범인이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으나 1997년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에서 붙잡힌 두 간첩이 '이한영 씨 살해범은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전문 테러요원인 최순호와 신원 미상의 20대 남자 등 2명으로 구성된 특수공작조였다'고 진술하여 그 정체가 드러났다. 2명의 특수 공작원은 이한영 피살 1개월 전 남파되었으며 북한에 돌아가서는 영웅 칭호를 받으며 재남침을 위한 성형수술까지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 테러는, 당시 대서특필된 황장엽 전 북한 노동장 비서의 망명으로 인한 보복 테러의 일환이었기도 하였다.

이는 당연히 국가안전기획부가 핵심 요인 보호를 소홀히 한 탓이다. 비록 언론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등 위험천만한 행위를 하기는 했으나 보호 책임이 있었던 국가에서 제대로 보호를 하지 못한 탓에 사망한 것.[7] 때문에 유족의 소송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되기도 했다.

김정일의 측근이자 엘리트로 살아와 망명했지만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여, 가장 불행한 탈북자, 북한 정권에 희생된 파란만장했던 사람이라 불리게 된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의 공원 묘지에 묻혔다.기사

5. 피살 사건 이후[편집]


2008년 대법원은 이한영이 피살된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할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한영의 부인 김모 씨가 낸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9699만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원심 확정했다. 단, 안기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언론 등을 통해 신분을 노출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여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고 밝혔다.



방송에서는 2014년 10월 29일, TV조선 강적들 51회 평양 주석궁 미스테리편에서 이한영과 그의 어머니 성혜랑의 전화통화 음원을 방영하기도 했다. 그의 암살사건을 모티브로 영화 의형제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약 20년 뒤 그의 사촌 김정남그와 비슷한 최후를 맞게 된다.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는 이한영의 사망 배후가 김정일이 아니라 러시아 마피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1] 참고로 북한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가 아니라 '리'인데, 원래 태어났을 당시에는 '리일남'이었고 북한에서도 '리일남'이었다. 남한에 오게 되면서 '이'로 고쳤고, '한영'(韓永)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영원히 살라는 의미로 안기부에서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2] 분당신도시에서 암살[3] 1989년에 건설회사인 '인터커넥션'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하였으나 1991년 부도처리.[4] 생전에 분당 이매동에 있는 한생명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관련 블로그[5] 반대로 일본인이었던 후지모토 겐지는 책 내용에선 체제 비판 내용이 없어 무사히 잘 넘어간 편이다.[6] 이한영씨 피살사건은 두명의 북한 특수공작원이 저지른 것[7] 애시당초 중요 인물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생활비 주고 보호해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