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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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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oseon_little_white_minimal.png 조선 문묘 배향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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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가 그린 표준영정의 부분이다.[1]

이름

이이(李珥)

출생

1537년 1월 7일[2]

사망

1584년 2월 27일[3] (47세)

출생지

강원도 강릉(고향은 경기도 파주)

사망지

한성(現 서울특별시)

분야

정치, 교육

가족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사임당 신씨, 부인 노씨

저서

격몽요결, 성학집요, 동호문답 등


1. 개요2. 생애와 사망3. 구도장원공4. 사상5. 붕당 정치에 휘말리다6. 전시 국방 장관 이이와 십만 양병설에 대한 논란7. 경장론자8. 조선 성리학의 완성9. 고향 및 출생지에 관한 정체성10. 트리비아11.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李珥
1537년 1월 7일 ~ 1584년 2월 27일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중기 예술가로 유명한 신사임당과 그 남편 이원수의 아들이며, 십만 양병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한 유학자이자 정치가.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이다. 신사임당의 초상이 오만원권 지폐의 도안에 쓰이면서, 모자가 모두 지폐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썩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남긴 중 그의 아버지에 대해 별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실제로 이이와 그 형제들은 아버지와 상당히 자주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썩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그 신사임당이 워낙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그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존재였으니 이원수 본인이 질투와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

붕당정치에서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정치가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물론 생전에 그의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4]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그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2. 생애와 사망[편집]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5][6]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외가인 강릉을 떠나 본가인 파주 율곡리에서 자랐으며, 1548년에 11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아명은 현룡, 혹은 견룡.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그가 14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그가 20세 때 성주 목사의 딸인 곡산 노씨와 혼인을 하게 되었으며,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절에서 들어가 수양했던 적도 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사실 그가 삭발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기는 했다. [7] 그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해했다고.전해진다. 그러나 우연히 유교 서적을 다시 읽은 그는 곧 하산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쓰고있는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으며 법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비판받아 마땅한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며,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신례도 심하게 당했는지 그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만 면신례는 본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다. 심지어는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치른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었다(!). 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던 이이에 대한 괴롭힘은 말할 것도 없이 심했을 것이다

그가 29세 때는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6품 호조 정랑으로 등용된 이래 예조와 청요직인 이조좌랑, 그 뒤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쳤고 14대 왕 선조 재위 1년에 명나라 가는 사신으로서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1581년에 그는 장차 임진왜란이 발발할 것을 예지하여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이와 더불어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은 후술. 이후, 탄핵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후 그는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 그는 1584년에 47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8]에서 운명(殞命)하였다.

묘소는 그를 배향한 경기도 파주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주 가까운 위치에 그를 배향한 서원인 자운서원이 있어서 지금은 율곡 유적지-라는 형태로 한 동선에서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묘역은 이이과 부인 노씨의 묘 이외에도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이이의 형 이선의 묘, 이이의 아들 이경림의 묘, 장손 이제의 묘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가족묘이다.

3. 구도장원공[편집]

가장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ㄷㄷ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 / 진사과(소과) 초시 → 생원과 / 진사과 복시 → 문과(대과) 초시 → 문과 복시 → 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이이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 시험인 별시[9]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 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 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10]한 이상의 대업적이다.[11]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명 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이이가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 생원과 초시 : 29세

  • 생원과 복시 : 29세

  • 진사과 초시 : 13세, 29세

  • 진사과 복시 : 21세 (29세에도 응시했으나 장원은 못 하고 합격) 그때 장원한 사람은 대체 누구냐.

  • 대과 초시 : 29세

  • 대과 복시 : 29세

  • 대과 전시 : 29세

  • 별시 초시 : 23세


이이가 장원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4세 때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다.[12]

그는 책을 읽을 때 무려 10줄한 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13] 그런데 사실 이이가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의 학습 능력이 빼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뛰어난 사상 때문이다.

4. 사상[편집]

화담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14]과 퇴계 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에 의해 크게 받들어지매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게 된다. (흔히 이기 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즉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비판받게 된다.)[15][16] 그런데 그의 이론은 현대의 평범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부분 무슨 소리인지 알기 힘들다. 때문에 이황과 더불어 전국의 윤리와 사상을 선택하는 문과 고등학생들에게는 지탄의 대상(…).[17]

5. 붕당 정치에 휘말리다[편집]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 간의 싸움에서 그는 중립을 지켰다[18].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년의 이이는 붕당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붕당 자체도 군자당으로서 의미가 있으므로 무조건 악한 것은 아니고, 붕당은 존재하여도 그들이 모두 군자당이기 때문에 서로 공존하고 화합하지, 분열하고 대립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붕당의 문제보다(붕당의 문제를 인정하여 훈구의 반격 빌미를 주는 것이 더욱 문제다라는 것이 주 이유였다. 이 때문에 붕당을 경계할 것을 언급한 이준경의 유언[19]을 말이 사악하다라고 비난했고, 죽은 이준경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20]

하지만 실제로는 사림이 주축을 차지하고, 붕당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훈구의 정치적 수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고, 실제 역사에서도 붕당의 문제와 대립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 현실을 자각한 이이도 자신의 생각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였다. 이때 이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바로 1575년 (선조 8년)에 있었던 을해당론 (乙亥黨論).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며 슬슬 붕당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보내버린 것.

당대 집권층인 동인은 이이를 맹렬히 규탄했는데,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이 성장하여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여 본래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던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세워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실제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심의겸의 파벌을 서인이라 부르다가 어느새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서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사실 심의겸은 학파를 형성하지 못했고, 이이가 보호를 해주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주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심의겸은 김효원에 대립되어서 동서 분당의 원인으로 언급될 뿐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다. 이건 김효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서경덕,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유들의 제자인 신진 사림인 동인들에게는 독학으로 학문적 일가를 이룬 이이가 배척의 대상이었던 반면, 훈구들에게 우호적던 기존의 권세가들에게 맞설 만한 사상 체계를 이룩한 거유가 없었던 서인들은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제 등 이이의 성격과 행동은 당대 조정의 비난 대상이었다. 29세로 젊은 나이에 한참 명성을 날리던 이이가 이미 합격을 해놓고도 아홉번이나 장원 자리를 노려 과거 시험에 매진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단적으로 이이는 진사과 초시와 복시에만 2번이나 응시했다.), 이이의 성격은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라며 삼사의 탄핵 사유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실록을 보면 이이는 어전에서 이황이나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그 제자들이 이이를 역공하기도 했다.[21]

선조 초년에 그는 관직 생활을 하며 <경연일기>를 남겼는데,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에게 있어서 이황, 이언적, 권벌, 이준경, 기대승은 다 비난대상이였다. 특히 기대승, 그리고 이준경과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는데, 특히 이준경은 을사 위훈 삭제 문제에 대하여 대립하였다. 이준경은 위훈 삭제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하게 반대했는데, 자기 스승이 그와 비슷한 일을 하려다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이는 이준경의 면전에서 "대신의 말이 애매모호하다."고 말하며 대놓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준경이 죽으면서 붕당을 경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자, 그 말이 악하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추천한 백인걸 역시 예외없이 비판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 평을 요구받은 이이는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22]

가령 이황의 제자였던 김성일과 동석한 어전에서 이이는 "이황의 학문은 좋은데, 자풍이나 정신은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고 발언했다. 이를 들은 김성일은 발끈하여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평가할 수 있겟습니까?"라며 반박하였고, 이황의 또 다른 제자인 류성룡은 이이에 대해 "다 좋은데 뭐든지 따지고 고치려 드는 성품이 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23]

또한 서경덕의 학문을 "도에 너무 치우쳤다"라고 비판했다, 이건 그냥 학문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당대로 치면 "노장"이나 불교와 한 유현을 얽는 것은 그야말로 "너 사파! 너 이단!"선언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선조 대가 사문난적 운운하는 숙종 때의 무한 쟁투 때보다 덜했다고 할 지라도 "도가의 냄새가 나는 학문"이라는 평가는 공식 석상에서 그의 학문을 조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4][25] 하지만 서경덕의 우의정 추증을 찬성한 사람도 이이였다.

이렇게 서경덕을 비판한 것은 제자이자 허난설헌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26] 특히 이이와 허엽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 사이였는데[27]향약의 시행을 두고 허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며 그를 혐오하였으며, 이이는 허엽을 평하며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고 비판했다. 또한 허엽의 아들인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계미삼찬'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서 파직당했고, 귀양에서 풀려난 직후 병사한다.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의 최종 승리자는 이이와 그의 문파였다.

6. 전시 국방 장관 이이와 십만 양병설에 대한 논란[편집]

선조가 강릉 사투리를 못 알아들어서 채택이 안됐다 카더라

그가 서인의 종주로 추대된 이후 임진왜란 종전과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정권을 얻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명 조식과 그 직계인 정인홍 등의 북인, 특히 대북 계열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상단에서 언급된 이이와 직접 대립했던 이들의 평가도 아작난다. 그리고 이것은 이이에 대한 평가가 대폭 수정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선조실록에는 없으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실린 십만 양병설이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이이가 선조에게 여러가지 국방과 세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기록인 시무 육조는 있으나, 십만이라는 구체적 숫자를 언급한 기척은 전혀 없다. 십만 양병설은 서인들이 이이를 높이기 위해 짜맞추어 만든 기록일 가능성이 높아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우선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던 1583년 올린 시무 육조에는 양병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십만이라는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이는 양병은 양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면서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건 마치 중국의 삼국 시대 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삼국 정립설과 같이 당시에 통용되던 의견들과 비슷하다.

그럼 십만양병설은 이후에 주장했다면 시급하여 의견을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만양병설에 대한 주장은 1582년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여기서도 본문에는 없고 덧붙여진 기사로 10만을 양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는 없고, 서인 집권 이후인 선조 수정실록에만 존재하는 이 내용은 그 외에도 여러 글들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게 모두 이이의 제자인 서인들의 문집으로, 그나마도 양이 점점 불어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글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편찬한 율곡행장이다.

'일찍이 경연에서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혼의 제자로 역시 서인이고 이이가 죽었을 때는 겨우 13살이었던 안방준이 '임진기사'에서 그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역시 서인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한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겁니다. 원컨대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비치하고, 세금을 덜어주고 재주 있는 자를 훈련시켜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다가 변란이 있으면 도성을 파수하게 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소서'


이 글들에서는 10만이라는 수 외에도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이라는 구체적 방법과 더해서 앞서 언급된 글의 10년이 되지 않아서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1582년 4월 조에, 선조수정실록은 그 시기에는 이이가 상소를 올린 기록 자체가 없으니 그나마 비슷한 1582년 9월에 기사를 올리고 있는 것은 상당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역시 서인인 이정구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성혼의 문인이었던 어우당 유몽인이 1622년 편찬한 어우야담 등에서 십만 양병설을 언급하고 있다. 십만 양병설 회의론에서는 이들이 모두 김장생의 율곡행장[28]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볼 분명한 근거는 없다. 특히 이항복은 조정 내부 사정에 대해 어느정도 정통한 인물인만큼 이이가 실제로 그러한 종류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몽인은 북인이었고 실제로 류성룡이 한양에서 후퇴하며 '문성(文成, 이이)의 말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식으로 후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성' 칭호는 인조가 내렸으므로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이이를 문성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문정은 참 성인이다'라는 표현은 뛰어난 선견지명에 대한 당시의 관용구로 쓰였고, 실제로 율곡행장의 초판이나 율곡연보에도 이문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항복이 쓴 이이신도비에는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李文靖眞聖人也)라고 쓰여있고, 율곡전서에도 문성이 아닌 문정으로 되어 있다. 문성으로 나오는 것은 후대의 것이다. 이문정은 북송 때의 명신 이항으로 류성룡이 이이를 이항에 빗대어 찬탄한 것인데, 율곡전서의 후기 교정자가 문정을 문성으로 잘못 교정한 것이다. 따라서 교정자의 실수에 불과한 것을 십만양병설 후대 조작설의 근거로 볼 수 없다. 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지어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십만 양병설이 등장하고 유성룡의 후회도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유성룡이 이이를 숙헌(이이의 자)이라고 지칭했다. 참고로 덕사마는 이 꼬투리를 잡아서 십만 양병설을 율곡연보의 저자인 송시열이 조작했다고 우기고 있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으로 볼때 10만 양병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200만 정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훈련하고 먹이는 비용은 상상도 못할 비용이라서 그 때 당시 조선으로서는 안하는 것이 상책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10만의 군대를 모았다 해도 백성들의 민심이 나라를 떠나버리기 때문에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1200만명 중 절반은 여자임이 명백하고 그럼 나머지 600만 중에서도 왕족, 양반, 노비등의 천민을 제외하면 징발 대상은 더욱 한정될 수밖에 없다. 다만 양반의 경우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의 신분으로 병역을 이행할 수 있긴 하나 모든 양반이 무반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조선 인구에서 성인 남성 10만명을 차출하면 조선 경제를 충분히 마비시킬 수 있다. 물론 노비를 징발하면 머릿수는 채울 수 있긴 하다. 그럼 그 노비의 주인들이 가만히 있을지의 여부가 궁금해진다.

반대로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이 유지한 상비군인 갑사의 숫자가 3천 ~ 5천에 불과했던 것을 보면 1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만, 상비군이 아닌 예비군으로 해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유형원의 반계수록 등에는 임란 전 조선의 군액 중에서 보인, 수군을 제외한 정병 기보병을 17만 ~ 18만으로 잡고 있다. 이렇게 10만을 훌쩍 넘어가는 숫자가 가능한 것은 조선군의 기본적인 체계가 교대 근무이기 때문이다. 4교대라면 정병 17만 ~ 18만에 상번군이 4만 남짓이 되며 이 숫자는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17만 ~ 18만에 달하는 정병은 엄연히 전시가 되면 정상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방군수포화되거나 노동 부대로 전락해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은 사실상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선조도 "병농일치제가 좋은 제도라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조선)는 군대가 없다. 단지 농민을 몰아 싸움할 뿐이니 패할 뿐이다(兵寓於農, 雖曰好制, 而我國則無兵, 只驅農民以戰, 宜其敗也)"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10만의 상비군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력 10만을 갖추자는 것은 현실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군제에 맞는 대응책이었다는 것이다. 댓글 참고

또한 이이가 주장한 것이 십만 양병설 하나가 아니라 십만 양병설은 그저 그가 주장한 경장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이는 기본적으로 사회 개혁을 주장한 경장론자였고 그의 경장에는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 세제 개혁 등 여러 개혁이 있었으며 10만 양병론으로 대표되는 것은 그 중 군제 개혁 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십만 양병론 때문에 이이의 군제 개혁의 기반을 위한 양민 정책이 묻혀 버린 성향까지 존재한다. 이이의 주장은 시종일관 양민 후에 양병이었다.

여하튼 학자적인 성취는 상당해 지금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에게 연구대상이며 조선의 엘리트층을 길러낸 밑거름이지만 당파 싸움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그의 위치와 서인들의 신격화 흔적 등은 그의 가치를 깎아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문제다.

이와는 별개로,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해도 그것이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시절, 조선이 가장 우려한 외세의 공격은 일본이 아닌 여진족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이 경험한 가장 큰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니탕개의 난이다. 이이는 장장 1년에 걸쳐 병력의 선발과 양성, 보급으로 니탕개가 호시탐탐 노리는 함경도에 중앙군 파견을 지속했다.

이이의 관료로서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전시 국방 장관으로서의 업적이다. 또한, 이 시기의 여러 긴급 조치들이 동인들에게 탄핵받으면서 "망국의 간물"이 하는 공세에 시달린 것도 이 때다.

반면 이 당시의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이후 다시 극심한 혼란 상태로 빠졌고, 조선은 일본이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되어 안정을 찾을 것인지조차 예측이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국방상 집중할 곳은 정치 전황 자체를 예측하기 힘든 일본보다는 당장 침략이 자행되어서 위기감을 조성시키고 있는 북방의 여진족이었며, 이이의 십만 양병설도 이와 연계된 것이지 임진왜란이란 일본의 침략과는 별개의 사항이라는게 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찬양하는 부분은 '당장은 없더라도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군사적 변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식견이지, 미래의 외국 정치 상황을 예언하는 노스트라다무스식 신통력이 아니다. 그러한 '미래의 변란'이 임진왜란으로 현실화된 것 때문에 이이의 식견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 뿐이므로, 이이가 구체적인 변란의 내용까지 예측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7. 경장론자[편집]

이이의 저서인 성학집요를 보면 왕조의 변천사를 창업 - 수성 - 경장의 3가지로 분류했다. 창업은 요, 순, 탕, 무의 덕을 갖추고 개혁해야 할 시대를 만나 하늘과 사람의 뜻에 순응해야 하므로 논할 필요가 없고, 수성은 성왕과 현명한 재상이 법령을 세우고 제도를 만들어 다스릴 수 있는 도구를 모두 갖추고 예악을 훌륭하게 하면, 후대의 임금과 신하는 이걸 따르기만 할 뿐이라고 하였다. 경장은 나라가 세워진지 오래되면 초기에 새웠던 정책과 제도가 본래의 뜻을 잃고 폐단이 발생하게 되므로, 밝은 임금과 총명한 신하가 나라의 뼈대를 다시 세우고 묵은 폐단을 고쳐서 공적은 선열에 빛나게 하고 사업은 후손이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수성은 중간쯤 가는 평범한 임금 (中主)과 자리만 채우는 무능한 신하 (具臣)라 할지라도 할 수 있지만, 경장은 높은 견해와 빼어난 재주가 필요하므로 더 어렵다고 적고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무너지려고 하는 집을 가진 집주인은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쓸 재목을 구하려 것이라는 예시를 들어 경장을 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이이는 당대의 조선이 창업과 수성을 지나 경장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전정, 군정, 환곡, 공납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책을 내놓았다. 훗날 대동법의 전신이 되는 대공수미법[29]이 대표적인 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실록 전반기를 이이 중심으로 그려낼 만큼 이이의 경장을 높게 산다. 이순신만 아니었어도 중종실록 편의 조광조처럼 표지 모델로 썼을 거라는 평가. 다만 사상사 - 제도사 등 큰 그림에서 역사를 보지 못해서, 이이의 경장론이 후대의 서인에게 이어지는 대목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 또한 해당 책에는 '경장'이란 단어만 강조되나, 이이는 '시무(時務)'와 ‘무실(務實)' 이란 표현도 즐겨 썼다.

사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이이는 1564년(명종 19년) 급제 직후 차관보 ~ 국장 급인 6조 좌랑에 오를 만큼 능력이 뛰어났던 관료였다. 불가에 잠시 몸을 담근 적은 있으나 보우, 윤원형 탄핵에 가세하는 건 물론 3년 뒤 선조가 즉위 할 때는 인순왕후의 외척을 탄핵하는 파이터이기도 했다.[30] 그 직후 즉위 사신단 서장관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 - 대사간을 거쳤다.

그러나 이후 17년간을 빙빙 돌다가 말년에야 이조판서의 자리에 앉았다가 곧 세상을 떴다. 당장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이 전란을 맞아 각각 38살, (1년 늦어) 44살, 46살의 나이에 정승에 올랐던 걸 생각하면(...) 박시백의 묘사처럼 왕의 신임을 받았다기에는 조금 에러가 있지 않나 싶다. 결국 삐친 이이는 만언봉사라는 역대급 디스를 날려 선조를 바보로 만든다. 문제는 선조가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는거...-[31]

여하튼 다행히(?) 왕의 신임이 있을 때에 떠나 좋은 평가를 들었다.

8. 조선 성리학의 완성[편집]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킨다. 성리학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그리했다고 볼 수 있다. 끝까지 '이'와 '심' 중심의 경학적 해석을 제일시했던 이황과 '이통기국'의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독창적이고 자연과학적인 관점으로 이기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해석을 고집했던 이이의 성리학은 '이기론'을 대표하는 입장들이었고 이후 조선의 모든 붕당은 표면적으로나마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조선 땅에서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리학은 이렇듯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기론, 18세기 인물성동이론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 쪽으로 치중돼갔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이이 등을 필두로 시작된 이 일련의 논의들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인 것이다.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당사자들이 학문하면서 스스로 밝혔던 바와는 판이하게 각각 성리학이 아닌 율곡학, 퇴계학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이 성리학을 국학으로 하여 건국된 당시 명나라 대부터 이미 성리학이 주가 되지 아니했던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에서 양명학 등 다른 학문의 논리임이 분명한 견해도 이치에 맞는 훌륭한 답변이면 정답으로 친 것에 반해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답변자를 사문난적으로 간주하였다. 이이와 이황은 성리학 논의의 방향성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나 말 그대로 '학문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주류 유학이 조선 중기 이후 강한 폐쇄성을 나타내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는 폐단의 책임도 본의는 아닐지언정 일정 정도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유학(新儒學)을 주창한 두웨이밍 교수는 한국의 천 원 지폐와 오천 원 지폐를 가지고 다니며 유학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링크

9. 고향 및 출생지에 관한 정체성[편집]

흔히 세간에서는 이이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이가 강릉 오죽헌에서 사임당 신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본래 강릉은 이이의 모친 사임당 신씨가 태어났던 고향이었으며 이이에게는 어머니의 친정, 즉 외가가 있던 곳으로 사임당 신씨는 이이가 태어나기 전에 친정에 와서 이 곳에서 이이를 출산하였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32]과 친영례(親迎禮)[33]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남귀여가혼이 주자가례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든 성리학자들이 인정했다는 것은 차처하더라도 결혼하고 2년이 지난 후에야 시가(媤家)에 인사를 간 신사임당의 경우는 굉장히 특이한 사례이다. 다만 아이를 친정에 가서 낳는 풍속은 남귀여가혼과 별 상관 없이 별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장자 상속과 친영 등 종법 질서가 자리잡는 것은 17세기 중 후반이 지나서야 가능했다. 이이가 태어났던 16세기만 하더라도 균분 상속과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이 또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문서가 남아 있다.

이이는 6살 때 가서야 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자랐고 이후 파주에서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사망하게 되었으며 그의 묘소도 파주 자운산 근처에 있다. 그의 아호인 율곡도 실제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율곡에서 본딴 것인데 알밤이 자라고 나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한편 이이가 정착한 곳은 처가가 있는 황해도 벽성군 석담이다. 수백년간 후손들이 그곳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소련군정 하에서 사유 재산 몰수가 한창 이루어지던 1947년에 14대 종손이 월남했다. 월남 도중 북한의 내무서원들에게 잡혔으나, 운 좋게도 그 직원 중 1명이 한때 종가집의 하인 일을 한 적이 있어서 몰래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다른 종가집처럼 한옥 고택에서 기거하기는 곤란해서 고양시의 평범한 아파트에서 종가를 꾸려나가고 있다. 참고로 14대 종손도 원래는 셋째였는데, 형제 중 장남은 한국 전쟁 때 행방 불명되었고 차남은 종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남북 분단으로 소식이 끊어져서 종손 자격을 잇게 되었다.

10. 트리비아[편집]

KDX-III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2번함인 DDG 992의 함명은 그의 이름을 따 율곡이이함으로 명명되었다. 22사단은 원래 '뇌종부대' 였지만 이후 부대명을 변경하기로 하고 그 명칭을 공모했는데, 22가 이이'로도 읽을수 있으니까 '율곡'으로 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율곡부대'가 되었다.

여담으로, 민담 중에는 이황과 이이의 부부관계에 대해 비교를 해놓은 것이 있다. 어느날,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부관계를 엿보는 일이 있었는데, 과연 대학자였다는 이이는 아주 점잖은 체위와 점잖은 빠르기로 조용히 일을 한 회 치르고 바로 잠들었다 한다.

이이의 제자들은 라이벌이었던 이황의 제자들을 만나서, "실로 우리 선생께서는 방사조차 거유(巨儒)답게 하신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약이 오른 이황의 제자들은, "우리 선생께서 율곡에게 점잖음으로 처지실리가 있겠느냐."며 자기네도 스승의 부부관계를 훔쳐보기로 결의했다. 그러고는 즉각 계획을 실천했는데, 뜻밖에 이황은 보기 드문 체위로 격렬하게 몇번이고 일을 치렀다고 한다. 제자들이 졌다는 부끄러움에, 다음날 스승에게 대담하게도 전말을 고하고 그 까닭을 따졌더니, 이황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남녀의 정사란 천지간의 큰 화합과 같아, 비구름이 끼고 천둥이 몰아치듯 해야 한다. 율곡이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치르니, 필경 후사가 포도알처럼 많게 되지는 못하리라."

참고로 이이는 인간의 감정을 긍정하는 사람인데 비해, 이황은 감정 이상의 도덕적 본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또한 일단 이이와 이황은 한세대 정도 다른 시대의 인물이라는걸 감안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사실이라면 나이도 지긋한 이황 선생이 저렇게 할 정도라면 진짜 괴물. 그러나 실제로도 이황은 후손이 있어 이황의 종손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세계에 전파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반면, 이이는 적자를 낳지 못했다. 본처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지만 첩 경주 이씨에게서 2남 1녀를 보았으며 이중 서녀는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에게 시집을 갔다. 서장자인 경림에게 대를 잇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면도 보였는데 위에 언급되는 후손들은 그렇게 해서 근근히 이어진 것이다. 불천위 제사도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다. 이를 생각하면 진실일지도...

한편 정치에 있어서는 서인 쪽이 압도적으로 앞서서 이이 - 김장생 - 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노론은 조선 시대 후기 붕당 정치사를 주도하게 된다. 이걸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문묘에 배향된 18인을 의미하는 동국 18현이다. 동국 18현은 고려 시대에 헌액된 최치원, 설총,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 (또는 안유)가 종사 되었고, 조선 시대에 광해군 때 5현 종사를 시작으로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 종사되었다. 이중에서 이이의 제자가 김장생과 조헌(덤으로 성혼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과 송준길(이 둘은 김집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자 이이의 사위이고, 김집의 제자가 박세채이다. 즉 이이의 후대로는 이이의 문열이 아니면 아무도 문묘 배향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이황의 문열조차 이황 본인을 제외하면 18현에는 없다. 여기에 기대승, 서경덕, 김안국, 조식 등의 굵직한 인물들의 명단은 하나도 없는 것을 봐도 그 위세를 알만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이이는 또 한 번 부상되는데, 바로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전면에 들고 나왔던 율곡사업 때문이었다. 이 시기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그야말로 이슈가 되어서 수많은 논문이 쏟아지고, 교과서에도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율곡 사업은 율곡 비리 사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이 때문에 덕수 이씨 문중은 비리 사업에 율곡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조상 이름 더럽힌다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물론 비리 사업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그런 적 없었다.

민간 설화 중에 젊은 시절의 이이가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천년 묵은 구미호에게 홀렸다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소감이 "주변 충고 더럽게 안듣는 찌질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말 안듣고 멋대로 굴어서 자기를 도와주는 신들을 여럿 피보게 만든다.

이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이이가 젊은 시절 금강산에 가서 수도하던 중에 일이다. 어느 날 자신을 누가 애타게 부르자 달려가보니 큰 잉어(또는 자라)가 어부의 그물에 잡혀있었다. 측은하게 여겨 어부에 사정해 그 물고기를 풀어주었다. 얼마 후 이이는 금강산 주막의 노파로부터 금강산에 혼자 사는 여인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이이는 한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유혹을 받는다. 아무래도 이 처녀가 노파가 말한 여인 같아 자리를 피한 후 노파에게 일러바친다. 그녀는 처녀가 천년 묵은 구미호니 접근하지 말라며 퇴치할 방법을 여럿 내주지만 그때마다 처녀의 유혹과 충동에 사로잡혀 실패, 마지막으로 노파가 이전에 살려준 물고기에 도움을 받으라고 충고해준다. 알고보니 물고기는 용왕의 아들로, 이이에게 목숨을 구해져 은혜를 갚기를 기다리던 차였다. 용왕의 도움을 받아 용궁의 병사로 구미호를 퇴치하려하지만 노파가 말한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이것도 실패, 결국 마지막 수로 이이는 용왕을 통해 상제에 건의해 간신히 구미호를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얘기를 보면 알겠지만 진작에 퇴치할 수 있었는데 이이의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여럿 그르치는 바람에..... 여담으로 주막의 노파는 원래 금강산의 산신령이였다고 한다.#

다른 민간 설화 중 너도밤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이이가 어린 시절 한 지나가던 스님이 이이를 보곤 "아깝다. 이 아이는 커서 큰 인물이 되겠지만 10살이 되는 해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대책을 물어보자 스님은 "뒷동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원수는 그대로 행했다. 이이가 10살이 되던 해에 승려로 변신한 호랑이가 이이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이원수는 지나가던 스님이 말해준 데로 밤나무 100그루를 이미 심었다고 하자 호랑이는 직접 밤나무를 세더니, 1그루가 말라 죽었으니 데려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너도밤나무가 "나도 밤나무다~"라고 말해 호랑이는 도망쳤다는 이야기.[34]

다른 유명한 얘기로 파주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이이는 화석정이란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이때 이이는 비싼 송진과 기름을 정자에 수시로 발랐는데(또는 잘 타는 나무로 정자를 지었다고) 당시 사람들은 이이가 사치한다고 비웃었다. 이이 사후 터진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파주 나루터에서 불이 꺼져 배가 안 보이자 애를 태우게 된다. 이 와중에 생전 이이와 친했던 도승지 이항복이 이를 기억해내 정자에 불을 지르자 송진을 먹인 덕에 잘 탔고 멀리서도 비출 정도였다. 그 덕에 빈 배를 발견해 선조는 무사히 피난을 갔고, 모두 이이의 혜안에 감탄했다는 얘기다.

다만 이는 근거가 별로 없다. 이 내용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비슷하게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임진나루를 건너면서 나루터를 관리하는 관청인 승정 건물을 부숴서 불을 질러서 밤길을 밝히고 왜군이 뗏목으로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담으로 화석정은 700m나 떨어져 있어서 너무 멀다는 점에서도 현실성이 부족하다.

평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단순히 국법을 잘 지키는 모범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사대부들이 몰래 쇠고기를 먹을 건 다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소의 힘으로 지은 곡식을 먹고 또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옳겠는가'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긴 한 모양. 현대에도 이이의 제사상에는 쇠고기를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이의 부인인 곡산 노씨는 이이가 사망한 뒤 8년을 더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이이의 묘를 지키다가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 가까이 지내던 하녀도 함께 살해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는데, 본래는 이이의 묘에 노씨를 합장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난 탓에 노씨와 하녀의 두 시신 중 어느 쪽이 노씨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별개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이의 경우 이황과는 달리 밤 퇴계 낮 퇴계 자식 복이 좀 부족한 편이어서 정부인인 노씨와는 딸만 1명이 있었고 그나마 일찍 죽었다. 이 때문에 이이가 죽은 후 후사를 이을 방도가 마땅치 않자 서자가 대신 대를 잇도록 나라에서 허락하여서 대를 잇게 되었다.

2018년 6월 모의고사에서 비문학 지문의 소재로써 등장하였다. 수기치인을 통해 성인,유학사회를 이륙하기 위함을 목표로 , 이기론에 이론적 근간을 두고 수양론과 경세론을 펼치는 내용이다. 개인의 기질 수양을 통한 이의 실현을 강조했을 뿐만아니라, 조종성헌,경국대전과 일반적 법제의 구분을 이기론을 통해 규정하며 법제개혁의 당위성을 주창하는 그의 노력이 담겨있다.
충무공 이순신과는 같은 덕수 이씨로 촌수가 17촌이나 된다. 이순신이 무관이였던 시절 율곡이 같은 종씨라 한 번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순신이 지금은 바빠서 대감께 만나실 수 없다고 전해라라고 이순신의 강직함을 들수있었다. 만났다면 최고의 유학자와 최고의 명장이 역사적 만남이겠지만 말이다.

11. 관련 문서[편집]

[1] 전체를 보고 싶다면 링크로.[2] 음력 1536년 12월 26일.[3] 음력 1584년 1월 16일.[4] 선조가 무능해서는 아니고 조광조 사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제대로 된 민생개혁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이이 밖에 없었다. 사림은 대중의 인식과 달리 개혁적이지 않았다.[5] 흔히 이이의 고향이 강릉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이의 본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라는 곳에 있었다. 강릉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이이에게는 외가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이의 아호인 율곡은 파주 율곡리에서 본딴 것이다.[6] 사실 엄밀히 말해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고향'은 '나 자신'이 아니라 '집안'이 연원을 두고 있는 곳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전근대적인 관점에 따라 율곡의 고향은 탄생지인 강릉이 아니라 본가가 위치한 파주인 것이다. 그런데 이이의 경우는 강릉이 본거지가 맞다. 왜냐하면, 이원수가 신사임당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강릉에는 외할아버지 신명화와 그 윗대로 이어지는 고리가 있고, 집안 재산의 절대다수가 있는 반면에, 파주에는 진짜 아무것도 없다. 유일한 장점은 근기, 즉 서울에서 가깝다는 것 뿐이다.[7] 이걸 밝혀낸 인물이 바로 이병도이다. 머리를 깎았다기보다 거사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8] 지금의 인사동 관훈빌딩 언저리이다.[9] 특히 별시 당시 내놓은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은 당시 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에 학문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시험은 몇 달 동안 출제자들이 고심하여 제출한 문제였는데, 이이는 단 세 시간 만에 답안지를 작성해서 제출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0] 과거시험은 보통 9세부터 일평생을 바쳐 공부해야 한 번 될까 말까한 시험으로 문과 평균 합격자 나이가 35세였다.[11] 모 언론사에서는 단순히 이이의 이러한 과거 성적을 근거로 그가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칼럼을 내기도 하였는데 하지만 이 칼럼은 유독 시험 성적에 집착하는 현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반영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시험 성적만으로 우수하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지만, 확실히 우수함을 부정할 수 없는 성적이긴 하다.[12] <퇴계선생전서 권16 담이숙헌>에 퇴계가 '소년 등과는 불행'이라며 등과에 실패한 이이를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13] 이게 뭐가 대단하냐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시대 책들은 일부 서적을 제외하면 전부 한자로 적혀 있던 시절이다. 이 시절에는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조선 선비라도 한 번에 1줄 읽는 것도 어려워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14] 카를 마르크스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 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된다.[15] 흥미로운 점은 심지어 서인의 두 거두인 이이와 성혼도 논쟁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이기 분속설(理氣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 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16] 참고로 이 시기에 '주기론'이라고 하면 "사문난적."과 같은 소리.[17] 본 위키 유교 항목에 적당히 설명이 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조선의 유교 항목과 명, 청 시대 심학과 이학의 비교 부분을 더불어 읽어 보시라. 비록 정확한 내용은 되지 못하지만 대강 이해라도 하는 것에는 도움이 된다.[18]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는 분열된 사림들에게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자 사림들이 양시론과 양비론을 들고 나왔는데, 이에 전국 시대 군주들의 전쟁은 다 그른 것이고 주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것이나 백이 숙제가 말린 것은 다 옳은 일이라고 또 한마디를 하였다[19] 이준경은 붕당의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고, 이이가 그 한 축을 차지할 것으로 보았다.[20] 해당 문제는 류성룡 등의 동인이 반대해서 무산. 결과적으로 보면 이 문제도 동서 분당의 무수한 전개 과정 중 하나로 작용한다.[21] 이에 대하여 박시백의 의견이 흥미로운데, 정리하면 이이는 이황이나 조식, 서경덕 등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 그들의 학파가 정립이 된 상황에서, 그들의 영향과는 별개의 학술적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그 자신의 비판은 타당할 수 있을 지언 정, 퇴계, 남명, 화담 등 선배 학자들의 문하에게는 필연적으로 적대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22] 그런데 정작 백인걸은 이이를 동네방네 자랑할 정도로 이이빠였다.[23] 류성룡이 좀 보수적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작 류성룡은 이이를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이이의 정책과 사상을 지지했던 서인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재상이 된 이후에 이이의 경장론과도 부합하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류성룡은 이이가 제안했던 대공수미법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는데, 이는 뒷날 대동법의 토대가 된다.[24] 사실 성리학 자체는 도가적 성향이 커서, 주희(주자) 이래 조식(이황으로부터 비판 받았다), 서경덕, 이이 자신도 비판받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황과 이이의 심성론이 포함된 이후로는 불교까지 섞이기 시작한다.[25] 근데 엄밀히 말하면 이이도 이런 이유로 까였다. 심지어 "제가 잘 모르는데 이이는 아직도 집에서 능엄경을 외운다고 합니다."라는 말이 이이 탄핵 상소에까지 들어갔으니까.[26] 흥미롭게도 허엽 - 허균 - 기자헌 등의 동인 인사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놓고 스님이 되었던 전력이 있는 이이도 그렇고, 조선 성리학에 불교 냄새가 강한 것이 괜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전에 성리학에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불교적 요소들도 있고.[27]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였다. 토끼라는 게 아니라, 동서남북 네 방위를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열둘로 나눈 것인데, 이렇게 하면 묘지는 정동(正東)이 된다! 그야말로 타협 없는 동인이었다는 이야기다.[28] 율곡전서에는 십만 양병설이 본편에는 없고 부록에 들어가 있다. 물론 율곡전서 역시 김장생의 율곡행장보다는 편찬시기가 느리다.[29] 현물로 거둬들이는 공물을 대신하여 쌀로 걷는 제도. 조광조가 먼저 주장한 바 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30] 좌의정 심통원으로, 심의겸의 작은 할아버지라는게 압권이다. 하지만 심의겸은 이를 일절 문제삼지 않았고, 이것이 이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배경이라고도 한다. 박 화백 만화에는 안 나옴.[31] 다만 동인들이 선조에게 "이이가 당을 만들었는데요?" 하자 "그래? 그럼 나 이이의 당에 들어갈래" 라고 했다던가 이이에게 보낸 편지 등을 보면 인간적으로는 각별히 여긴 듯 하다. 선조 자체가 당시 동, 서인 돌려막기에 급급했던 점도 있지만 말이다.[32]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본가로 돌아가는 형태[33] 남자의 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여서, 혼례를 남자집에서 치르고 신혼을 보내는 형태[34] 이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죽은 밤나무가 승려로 변한 호랑이에게 "죽은 밤나무는 밤나무가 아니더냐~!"라고 호통쳐서 호랑이가 달아났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