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최근 수정 시각:

역대 소련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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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초프

* 스탈린의 후임인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서기장의 위치가 아니라 소련 장관회의 주석의 자격으로 소련을 통치했다. 흐루쇼프가 서기장 직위를 맡은 뒤 제1서기라는 직위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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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1](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2]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국적

러시아 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Russia.svg.png소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the_Soviet_Union.svg.png

출생

1879년 12월 18일, 러시아 제국 그루지야 고리

사망

1953년 3월 5일 (73세), 소련 쿤체보

학력

트빌리시 신학교 중퇴

직업

정치인, 작가, 군인, 시인

정당

소련 공산당

종교

조지아 정교회국가 무신론

신체

168cm, A형

배우자

에카테리나 스바니드제 (1906–07)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1919–32)

자녀

야코프 주가슈빌리, 바실리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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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업적에 대한 평가
3.1.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3.2.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만든 공업화3.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3.4. 외교적 승리와 초강대국이 된 소련3.5.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4. 대인관계5. 가족사
5.1. 아내들5.2.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5.3. 차남 바실리 스탈린5.4.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5.5. 사생아
6. 이름7. 루머8. 비합리적인 의심과 불안9. 이야깃거리10. 평가
10.0.1. 현대 러시아의 평가10.0.2. 긍정적 입장과 평가10.0.3. 부정적 입장과 평가
10.1. 구 소련 가맹국들의 평가10.2. 종교정책 (러시아 정교회)10.3. 한국북한에서의 평가
11. 스탈린을 다룬 저서
11.1. 국내 정발된 저서11.2. 국내 비정발된 저서
12. 미디어믹스13.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14. 어록

1. 개요[편집]

파일:CroppedStalin1943.jpg

테헤란에서의 스탈린, 1943년[3]


소련의 초대 공산당 중앙위 서기장이자 소련 장관회의 주석. 일명 강철의 대원수 혹은 인간백정.[4] 블라디미르 레닌 휘하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참하여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을 건국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레닌 사후 교묘하게 권력을 장악하면서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권력을 장악한 이후 독재를 벌이며 정적과 반대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명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5] 한편, 구 러시아 제국 시절의 낙후된 농업 사회 기반의 소련을 5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학공업 위주로 급속도로 발전시켜서 초강대국이 되는 발판을 놓았다.

세계에 전운이 감도는 와중, 나치 독일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개시되며 연합국에 가입,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대숙청으로 말미암은 소련 내부의 혼란을 비롯한 여러 문제로 초기엔 큰 피해를 입었지만, 2천만을 훌쩍 넘기는 인명손실을 견뎌내며 끝끝내 승전하였고, 인민을 희생해 이룩한 공업화는 소련을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의 자리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캅카스조지아 출신이다.[6] 러시아 출신이 아닌데도 그는 평생 러시아의 내셔널리스트였다.[7] 그의 반대 선상인 극우에 서있던 아돌프 히틀러 역시 독일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역사 속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8] 1913년에는 캅카스 민족들은 우월한 러시아 문화에 머리 숙이고 들어와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스탈린을 가리켜 볼셰비즘을 러시아-슬라브 민족주의로 바꾸었다라고 평가한게 결코 틀린 말 아니다. 현재 학자들까지도 히틀러의 평가가 일리있다고 본다.[9] 더욱 흥미있는 점은,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스탈린은 당 내에서 대표적인 민족문제(특히 소수민족 문제) 전문가라는 평판을 얻었다는 점이다. 실제 스탈린 선집에는 민족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논문이 들어있기도 하다.

인간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잔인한 학살자로 지구상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권력자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다. 스탈린이 실시한 대숙청에 의해 죽은 숫자만 약 6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굴라크에 끌려갔다가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사망자는 좀 더 많아진다. 한편 서방 쪽에서는 대체로 200~400만 정도로 측정하며,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독재자들>의 저자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180만 정도로 추산했으며, 미국 하와이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국가권력에의한 민중 학살인 데모사이드(Democide)라는 용어를 정립한 루돌프 럼멜(Rudolph Rummel)은 여러 사학자들의 소스를 교차검증한 결과, 대숙청 시기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430만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10] 이 때문인지 사후에는 소련의 공식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서방 세력이 아닌 스탈린의 후임인 니키타 흐루쇼프를 비롯한 소련 공산당이 직접 내린 평가.

흔히 대숙청이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만 진행되었다고 오해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1945년을 제외하고는 대숙청 기간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소련인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위협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사회 전반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 이후에 더 강해진 면이 있다.

후퇴하는 비겁자에게 자비는 없다는 최고 사령부 명령 제270호(1941년 8월.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와 악명높은 형벌 부대를 만든 국방 인민 위원회 명령 227호(1942년 7월 형벌 부대 창설명령) 등이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그의 피비린내나는 예술적(?) 사상이 돋보이는 대표적 작품이다. 붉은 군대 내 방첩부의 이름을 지을 적의 일화를 보면 그의 예술적 똘기가 잘 나타나는데, 그가 직접 제안하여, "스파이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 스메르찌 쉬피오남!)의 앞글자들을 따서 스메르쉬(СМЕРШ)로 지었다. 이것이 그냥 별명이 아니라 공식명칭이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간첩사살"을 기무사령부 공식명칭으로 한 셈.[11]

멋있는 카이젤 수염을 기른 인상적인 용모를 하고 있으나[12] 사실 공식 사진 대다수가 곰보자국을 지운 편집판. '인민의 뽀샵질'이 아니라 '인민의 에어브러시'질이 이루어졌다. KGB의 검열기구 내에 이를 위한 특별팀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레닌 시절부터 에어브러시질은 소련 정권의 필수품이었다. 한 사람이 숙청되면 곧바로 공식 사진에서 그 사람 얼굴을 날려버려야 했으니까. 이것이 소설 1984의 모티브가 되었다. 물론 뽀샵질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레닌의 연설에 모인 사람들을 수십배로 뻥튀기한 사진 등이 있다. 천연두를 앓은 관계로 그렇게까지 미남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자라면서 많이 잘생겨졌다. 그렇지만 마차 교통사고로 왼팔을 제대로 쓰지못해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키도 163cm 정도였는데[13], 그당시의 키로서는 아주 작은 편은 아니었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김정일과는 달리 높은 구두를 신어서 키를 커보이게 하려고 하진 않았다. 이사람은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재자들과는 달리 권력 자체에만 탐닉했을 뿐, 허세를 부리거나 사치를 일삼는 일은 거의 없었다.[14] 그래서 독소전쟁 전까지는 군복이 아니라 그냥 인민복 차림으로 다닐 정도.

2. 생애[편집]

문서 참조.

3. 업적에 대한 평가[편집]

3.1.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편집]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지방장관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문화적으로 뒤떨어져서,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1931년 2월 4일 산업 관리와 경영자 협의회에서의 스탈린의 연설.[15]

"러시아인이 탱크와 비행기, 함대로 무장하면 절대 정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나 기술이 없어 제대로 무장하지 않으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933년 노동절, 스탈린의 연설.


하여간 결과로만 봐서는 후진 봉건 사회였던 러시아를 미국과 맞먹는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원래부터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을 표방했으며,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생산력을 들었다. 그러므로 스탈린은 생산력을 증가시키는게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생산력 증가에 올인했다. 특히 철강과 전기 생산이 중점적으로 강조되었다.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여 산업화[16]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17] 이렇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독일과 일본에서도 벌어진 일이었지만, 소련은 스케일이나 범위, 강도에서 독일과 일본을 훨씬 능가했다. 대부분의 개발독재자들처럼 스탈린도 기술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경제개발에 큰 열의를 보였다.

과학자들도 대접을 받았다. 대우가 훨씬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푸짐한 연구비를 타내 여러 최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로켓 연구가 대표적인데, 현대 로켓의 아버지였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같은 경우 러시아 제국 때는 지나치게 공상적인 연구때문에 학계에서 푸대접을 받았지만, 소련 성립 이후에는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본 소련 정부의 적극지원을 받게 되어, 소련 공군사관학교가 생겼을 때 창립 교수가 되었고 장례식도 국장으로 치뤄졌다. 비록 과학계에도 대숙청의 칼날이 덮치긴 했으나, 심지어 체포당일 처형되던 많은 다른 분야의 인재들과는 달리, 숙청대상이 된 많은 과학자들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훨씬 편한 전용감방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일류신이나 우주개발의 책임자가 된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바로 이 케이스. 물리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인 레프 란다우(196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는 서슬퍼렇던 대숙청기간에 "스탈린 독재는 히틀러와 다름 없다"고 말했다가 NKVD에 체포되어 반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재능을 아낀 대물리학자였던 표트르 카피차(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가 스탈린에게 "쟤 죽으면 나도 그만두겠음"이라고 직접 위협 편지를 썼고, 스탈린이 베리야에게 명령해 감방에 갇혔던 그를 석방하였다. 소련은 하마터면 천재 물리학자를 잃을 뻔했으나, 스탈린의 과학자 사랑으로 란다우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은 더욱 경이적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된 당시 영국 식민지 인도제국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던 농업국가가 15년 만에 발전된 미국까지 넘보는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스탈린 주도의 경제개발은 단순한 총생산 증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련 경제의 체질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에 그 중요성에 있다. 더 나아가 스탈린식의 경제개발은 소련의 상하부 구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사실 러시아는 덩치가 크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못해도 5강(20세기 초반까진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함께)에는 꼭 드는 나라였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주산업은 농업이었으며, 공업의 비중은 매우 낮았고, 사회는 봉건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후진 농업사회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제국은 20세기 들어와서도 그 덩치와 국력에도 불구하고 초강대국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분하에 러시아의 모든 부분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제정시절에는 의무교육도 없었고, 문맹율은 90%에 육박했지만, 스탈린 집권기간동안 교육기관의 확충으로 문맹율은 1%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광범위한 지식층이 생겨났다. 또한 제정시설 러시아의 과학기술은 유럽본토에 비해서는 2류로 간주되었고, 연구기관이나 교육기관 모두 형편 없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의 과학기술은 뿌리를 내리고 일취월장하여 20세기 중반에 가면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 스탈린 덕으로 소련이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맞장뜰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19] 소련이 독소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0년대 스푸트니크보스토크로 우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스탈린 시절에 키워놓은 중공업과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소련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나 종전 3년 만에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킨다. 그가 죽은 50년대에도 소련의 GNP 경제성장률은 평균 5.8%.[20] 소련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28%로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도 나중에 국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소련과 아시아국들의 성장에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아시아국들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잘 이용한 반면, 소련의 경우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기에 이 시기의 소련의 경제성장은 더더욱 경이적인 것이다.[21] 이후 만주국을 비롯한 신생 국가들의 산업화 모델이 되었다.[22] 김일성도 역시 중공업화를 신나게 추진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중공업화 정책은 말 그대로 망했어요.[23] 소련의 공업화는 소비재 위주가 아닌 중공업이라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북한 같은 작은 나라에서 수출목적으로 많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수입대체로 자력화 목적인데 그런 생산력 수준으론 경제적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다.[24]

3.2.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만든 공업화[편집]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인민들의 희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저 닥치고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뭐,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상당부분 자본주의적 요소가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25]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네프만(NEPman)/쿨라크)[26]도 생겨났으나,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27]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28]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29]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필요 이상의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30]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을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최소 700만명이 사망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라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선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8천800만이 넘어야 되는데 2천만 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31]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0~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1000~1100만명 정도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고…[32]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결국 이런 삽질들은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2~23%,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33]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과[34] 나름대로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의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서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된다. 냉전 이후 미국에 비해 딸리는 경제력으로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부분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소련은 북한과 같은 막장국가는 아니었다.[35]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36]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배가 넘는다.
박노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에는 미국 부자들처럼 엄청난 부를 손에 쥐고 살고 싶어했던 소련 "높으신분들"의 욕심도 작용했다고한다.

문제는 이런 좋은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성의 혁신이 제자리걸음을 걸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이기심의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스탈린 시절 잠시였고, 잘하나 못나나 똑같은 봉급을 받으니 게으름피우는 것은 당연한 일. 덕택에 1960년대부터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뿐이었다. 어차피 일을 대충 대충한다 해도 대놓고 봉급이 크게 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저서인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들이야말로 사회주의를 좀먹는 반동이라고 비난했다.[37]

고르바초프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급진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나, 치밀한 계획없는 시장경제 도입은 유통-배급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고, 인민의 삶은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막장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것. 여기에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리려던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수파들이야 막나가는 나라를 걱정했겠지만, 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소련체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얼마간 연장할 따름이었음은 명약관화. 그러나 옐친 대에는 애써 모은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임금수준이나 사회보장제도가 소련대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지면서 많은 러시아인들은 저임금빈곤층으로 굴러떨어져나갔고, 많은 러시아인들은 적어도 삶의 질의 면에서는 소련 시절이 현재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과 그 저항으로써 보수파의 쿠데타에도 여러 관점이 있는데, 이중에는 아예 당시 소련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적 이상이 완성되는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었는데, 그 과도기적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고르비가 설레발을 쳐서 다 말아먹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교수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막장 종북주의자들이 할 주장같지만 걔들은 북한밖에 몰라서 소련은 관심도 없으며, 애시당초 북한은 출발만 공산체제지 실제로는 전제왕정이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주로 소련 말기의 개방기에 유학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한국에서 대학 다니려면 부모 등골을 빼먹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학비가 공짜일 뿐더러 대학생은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월급까지 주는 체제에 매료돼서 눈에 뭐가 좀 씌인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듯. 어쨌거나, 위 단락의 내용처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질은 소련 시절보다 훨씬 열악하고, 그나마 좀 나아진 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뒤의 일이다.

3.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편집]

급진적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38] 이게 꼭 소련의 경우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국가 주도의 고속 공업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농촌과 농업이 희생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공업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자원을 공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 밖에 없고, 공업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을 싼 값에 도시에 공급해야 하니까... 스탈린 정권 당시의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토지를 국유화해서 이런 문제점이 크게 두드러진 부분은 있지만, 다른 나라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39] http://ko.wikipedia.org/wiki/영국의_농업_혁명을 보면 알듯이 영국의 산업 혁명은 원래 농업 혁명부터 시작된 것이며 한국의 저곡가 정책 역시 흔히 왜곡되는 것과는 달리 농업 보조금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자유롭지는 않아서 일본의 전체주의가 크게 발흥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무자비한 식량 수탈은 다 이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일본 농민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이촌향도 현상은 원래 농촌에 있던 실업자들이 새로 일자리가 생긴 도시로 떠나는 현상이며 농촌이 가난해지거나 착취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40]

이렇게 중공업 우선주의는 인민 생활의 저하 등의 많은 문제[41]를 야기했으나 소련은 안보적으로 이에 우선순위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세력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외국군들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서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런 강박관념은 허상이 아니었다.[42] 1920년대 초엔 폴란드에 쳐발리면서 붉은 군대의 현대화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43] 하여튼 중공업 투자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못지 않게 기계화가 되어 있어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에 승리할 수 있었다.[44] 실제로 1920년대에 투하쳅스키가 붉은군대의 현대전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에 필요하다 주장한 수만대의 전차, 장갑화 차량과 항공기의 요구는 당시 소련의 공업력 수준으로 불가능했고 스탈린의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시에 소련의 생산능력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이때 이루어진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페레스로이카 이후 재발견된 부하린을 지지하는 시각에선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중농을 때려잡는 바람에 급격한 식량 문제가 발생하였고 오히려 이 같은 식량문제가 중화학공업을 추진했던 당시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부하린은 급격한 중화학공업화는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이는 꼴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급격한 중화학공업추진은 결국 식량문제를 안게 만들었고 실질적으로 부하린식으로 추진했더라도 스탈린이 원하던 시기에 원하던 수준의 중화학공업에 이르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부하린도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 필요성은 분명히 인식하기도 했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은 하되 급격하게는 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급격한 공업화로 인하여 가축생산의 공급은 50%가 감소하였으며 곡물생산은 기대보다도 적었다. 부양인구가 줄었으므로 공업자본을 형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유입은 산업자본 성장을 저해하였다 실제로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들어간 인민이 필요보다 약 1900만명 이상 이주해버렸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기초하여 1920년대 말에 소련경제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남용했다는 것이고, 만일 대안의 정책들이 채택 되었더라면 좀더 큰 산출이 있을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자본이 더 적절한 비율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출처]

여하간 이런 닥치고 밀어붙이는 스탈린의 경제를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로 보는 시각도 있다. 스탈린과 대척점에 선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처하는 IS(국제 사회주의.) 등의 소수 시각인데, 일리가 없는 시각도 아니지만[46] IS 자체는 좌파내에서도 극좌 모험주의라고 비판될 정도로 급진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지구상에 존재한/했던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을 정부가 자본가인 자본주의 국가로 본다. 마찬가지 이유로 북한도 자본주의 국가로 본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친북이 아닌 반북이 된다.

여하간, 적어도 수성, 발전의 측면에선 스탈린이 트로츠키보다 나은 인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2차 대전의 이후 잭팟으로 전지구의 상당부분이 공산화되지 못 했을 것도 사실이다.

3.4. 외교적 승리와 초강대국이 된 소련[편집]

또한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는 얄타 회담에서의 외교적 승리가 있다. 얄타 회담을 통해 스탈린은 루즈벨트의 불안함을 이용하여 대일전 참전을 약속하는 대가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확장을 보장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만주 작전을 통해 70만의 관동군을 2만의 사상자만으로 제압하는 위업을 달성하여 한반도의 북쪽의 38선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미국과의 합의가 없었다면 아마 한반도 전체는 소련군이 점령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유럽 각국에 공산정권을 세워서 소련과 서방의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2차대전에서 폴란드 침공의 결과 독일과 국경을 맞대었다가 독소전쟁 초반에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음을 상기하면 스탈린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희생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 같은 경우는 수백만의 일본군을 대륙에 잡아놓는 대가로 약 2천만 가량의 인명을 희생당하고도 전후 처리에서 6주만에 참패한 프랑스보다 떡고물을 못 얻은 것을 보면 스탈린이 외교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은 명백하다.[47]

2차대전이 끝난 이후의 스탈린은 인류란 종족의 정점에 올랐다고도 평할 수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스탈린과 정치적으로는 대항점에 있었지만, '짧은 임기'를 지닌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라는 한계 상 국가 전체를 쥐고 흔드는 독재자인 스탈린에게 있어서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3.5.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편집]

독일의 소련침공 초기 대숙청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독소불가침조약을 믿었던 점과 히틀러를 과소평가해 독일의 초기침공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점은 역사적으로 보자면 가십거리에 오르내리기 좋으나, 국가총력전의 형태로 흐른 당시의 전쟁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계열의 게오르기 주코프세묜 티모셴코등을 등용했다는 점과 미국의 랜드리스를 받아 투하쳅스키의 종심전투이론을 해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이전문단에서도 나오다시피 스탈린은 초반의 충격을 털어낸 채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정을 챙겼는데, 군사적능력이 전무한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정치장교로 시작했던 스탈린의 능력보다는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주코프와 같은 고위 군장교들 보다는 무리가 있었고, 작전의 대부분을 주코프에게 맡기고 본인은 행정을 맡아 전시의 행정을 처리해나갔는데, 이는 히틀러와 대비되는 점이었다. 즉흥적으로 작전을 입안하고 이에 관여한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은 철저한 분석과 현실적인 안목을 통해 주코프와 일선 야전사령관들의 업무에는 그다지 개입하진 않았다.[48]

공업화정책을 통해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전쟁지휘능력과 대숙청, 정치장교제도를 빼고본다면 스탈린이 관료로써의 능력이 제법 괜찮았음을 알 수 있는데, 혁명기부터 행정분야를 도맡아 처리한 점과 권력을 잡고 난 뒤에는 의욕적으로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한 점이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했다고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물론 그놈의 대숙청과 초반의 오판으로 독일이 엄청난 전과를 올릴 수 있게 해준것도 사실이지만.

4. 대인관계[편집]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서기장은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는 자리였으며, 특히 개인 숭배가 절정을 이루었던 스탈린 집권기에는 단순한 독재자를 넘어 황제와 유사한 지위에 있었다. 때문에 스탈린과 당대 주요 열강 지도자들 간의 대인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 정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아돌프 히틀러[편집]

당대 공산주의의 정신적 본산인 소련의 최고 권력자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무조건적인 척결을 외치는 나치당의 리더인 히틀러는 사상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게다가 히틀러는 예나 지금이나 동유럽의 주류 민족인 슬라브인을 유태인과 동급의 열등인종 취급하기도 했다. 비록 2차대전 직전에는 서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대(對)독일 안보동맹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상황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기도 했지만, 이는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화려하게 뒷통수를 맞으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20세기를 상징하는 최악의 독재자들답게 통치 기술(독재 기술)에서는 서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스탈린의 대숙청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벌인 두 차례의 숙청에 다소 영향을 받았으며, 히틀러 역시 프로이센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독립적이었던 군부를 통제하는 데 스탈린의 방식을 상당수 차용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소련을 정복한 뒤 유럽 러시아 영토를 관리할 적임자로 스탈린을 꼽기도 했다. 히틀러는 전쟁 후반기에 가서 고참 지휘관들이 자기와 계속 의견충돌을 빚자, 측근들에게 "나는 정말 스탈린이 부럽다. 그 사람은 정말 자기 뜻대로 군을 좌지우지하잖나. 나도 머리가 굳어버린 군윗대가리들을 스탈린처럼 모조리 쓸어버렸어야 했는데..."라고 말하기도 했고[49], 히틀러 암살 음모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정말 스탈린 방식[50]으로 군부 숙청을 단행한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에른스트 룀과 SA상층부의 숙청사건(장검의 밤)을 보고, "봤지, 히틀러 그친구 참 멋지게 해치웠군"이라고 말하며 대숙청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딸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후에 '히틀러와 함께 했으면 무적이었을텐데' 하는 식의 넋두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비슷해보이는 행적으로 라이벌로 보이는 히틀러와 스탈린[51] 사실 실제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스탈린의 통치술은 스스로의 두뇌능력으로 하여금 히틀러보다는 치밀했다. 일반 행정측면만 봐도, 스탈린은 스스로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챙긴 반면, 히틀러는 행정에 무능이 아니라 무관심했고 자신의 역량이 버거워 주위의 2인자들인 괴링, 괴벨스, 힘러, 보어만 같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행정을 맡겼었다.[52] 또한 스탈린은 절대로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히틀러는 괴링, 힘러, 보어만, 슈페어, 괴벨스 등의 수많은 2인자들의 충성경쟁을 즐겼고[53], 하지만 부작용으로 부하들만의 정치적 불화 때문에 제3제국의 국력에 낭비에 기여 되었다. 반면 스탈린은 당내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압한 뒤 대숙청 기간에 자신의 측근들 사이에서 다툼이 난 것도 모조리 정리했다. 하지만 이러한 스탈린식 대숙청의 처신은 정치계를 완전히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버려 반대로 말단의 부하들에게까지 인정과 친분을 가지기를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한 히틀러는 부하들에게 전쟁이 끝나고도, 심지어 지금까지 살아있는 나치잔당들에게 개인적으로까지 지도자라고 불리우며 광기적일 정도로
충성을 받은 반면에 스탈린의 부하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충성을 하고 개인적으로는 말년에 스탈린은 배신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스탈린의 사망 이후에도 세뇌때문에 진심으로 그를 추종했던 인민들과 달리 노멘클라투라들은 그를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또 둘의 차이는 전쟁적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히틀러가 배짱으로 정면돌파를 지르고 보는 성향이 강하다면[54] 스탈린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타입이라고 해도 좋을정도로 철저하게 계산해가며, 어떻게 보면 매우 소심하다고 할수 있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증거는 많다. 독소전쟁 초기의 독일을 자극하지 말라는 명령이라던가, 한국전쟁을 허락받으러 온 김일성을 48차례 쫓았다던가, 한국전쟁 참전조차도 최대한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 쪽으로 한다던가.

여담으로 스탈린과 히틀러가 직접 만난 적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당시에도 없었으나 한 때 같은 도시에 머문 적은 있었다. 1913년 빈에서 스탈린이 기거할 때 히틀러도 거기 있었던 것. 심지어 그 때는 티토도 빈에 살았다고 한다.

4.2. 프랭클린 D. 루즈벨트[편집]

루즈벨트, 스탈린, 처칠은 연합국의 세 주축인 미국, 소련, 영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전시의 전략적 결정 및 전후처리를 위해 여러 차례 회동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지만, 루즈벨트는 파시즘에 대해서는 강경했던 반면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유화적인 입장이었고, 때문에 전쟁중에 이루어진 몇 차례 회담에서도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상반되는 이념에 비해서 다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라는 불편한 동맹국 지도자의 호의를 철저히 이용할 능력과 의도가 충분한 현실주의자였고, 국제연합이나 자유선거 등 미국의 다소 이상적인 전후 구상에 장단을 맞추어주는 대신[55] 동유럽중앙아시아 등지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공인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소련의 절망적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자본과 공업력이 건재한 데다 렌드리스를 통해 사실상 연합군의 전쟁물자를 대부분 책임진 미국에게서 상당한 양보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이는 전후 냉전의 주도권을 내줄 뻔 한 루즈벨트의 대표적인 실책이자 스탈린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받는다.

사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전쟁 후기까지는 아무도 미국-소련의 2강체제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오히려 미국-영국-소련 사이의 삼파전이 예상 되는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은 협력할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경쟁해야 할 상대로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 멀리 동쪽에 있는 소련보다는 같은 서방의 영향권을 다투어야 할 서로가 더 큰 위협으로 보였고, 견제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손을 내밀은 것을 스탈린은 최대한 활용했을 분이다. 이것은 루즈벨트 뿐만 아니라 그렇게나 공산주의를 경계했다는 처칠도 해당되는 일이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소련에 유화적이었다는 것을 실책으로 보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본 것이고, 당시 시점으로 보면 루즈벨트도 스탈린에 휘둘린건 아니다. 미국도 전통적인 고립주의자의 입김이 세기 때문에 전후처리를 두고 소련과 아웅다웅하기는 힘들었고, 스탈린은 이를 잘 이용한 셈이었다. 또한 루즈벨트가 단순히 스탈린에게 양보만 한 것은 아니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대일전 참전 약속은 받아냈으며, 이는 사실 2천만명 넘게 희생한 소련을 다시 큰 희생이 요구되는 다른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은 매우 큰 소득이었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관동군 궤멸로 일본이 쉽게 GG친 것처럼 보여서 사실 소련의 대일전참전은 가볍게 여겨지고 있지만,미국은 일본 본토 점령전에 거의 100만이 넘는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일본과 중립조약이 되어 있는 소련을 여기 끌어들이기 위해 유럽에서 대폭 양보를 한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소련 역시 몰락 작전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만큼 소련군에게도 이득이 있긴 있었겠지만(이를테면 한반도, 일본 북부) 독소전쟁에서 이미 연합군 최고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게다가 루스벨트가 전후의 소련을 어떻게 대할지 자체가 루스벨트의 급사로 오리무중에 빠져버려서 루스벨트가 넋놓고 소련에게 유화적으로 대처했다는, 공화당 강경파 일각의 반역의 20년 정권은 너무 나간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당장 키신저는 루스벨트 역시 오히려 스탈린을 이용해먹은 정황이 있으며 그가 살았으면 어떤 냉전 질서가 구축되었을지, 그가 스탈린을 상대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었을 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4.3. 윈스턴 처칠[편집]

루즈벨트와는 달리 처칠은 전후에도 떠오르는 미소의 도전을 뿌리치고 대영제국의 영광을 유지하려는 입장이었다. 제국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였던 처칠이 각국의 반제국주의 세력을 후원하는 공산주의자인데다 강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친하게 지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온 영국으로서는 19세기 그레이트 게임 시절부터 늘 그래왔듯이 안보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전후 패권국으로 부상할 것이 자명한 소련을 외교적으로 반드시 견제해야 했으며, 이는 제2전선 문제나 자유 폴란드의 전후 처리, 독일 분할 문제 등의 사안을 두고 양국의 첨예한 대립과 의심으로 이어졌다. 처칠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복고를 비롯하여 구질서 회복을 외치기도 했지만 구 오헝 제국의 영토를 자기 배당금으로 받아야 할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조차 탐탁치 않아 했다. 그러나 쇠퇴해 가는 대영제국의 힘만으로 소련에 맞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처칠은 독일의 항복 후에 잔존독일군과 서방연합군이 연합하여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언싱커블 작전을 벌여 소련의 뒤통수를 치려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뒤통수를 벌이기에는 미국이 여기에 매우 소극적일 것 같고, 새로운 전쟁을 만드는건 매우 여론이 안좋은데다가, 결정적으로 영국군 참모부가 유럽전선에 전개된 소련군이 서방 연합국에 비해 3배 많아서 이기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려 취소했다.[56] 처칠의 반소련 정책은 미국의 미온적인 반응과, 결정적으로 처칠 자신이 종전 직후에 실각하면서, 처칠과 스탈린의 대결은 스탈린의 판정승으로 돌아가게 된다.

4.4. 해리 S. 트루먼[편집]

종전을 얼마 앞둔 1945년 첫 집권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어리벙벙하고 무능력해 보였고, 그가 친했고, 또한 존경한 루즈벨트와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고까운 존재였다. 물론 트루먼은 빠르게 새로운 직위에 적응했고, 반공주의자이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트루먼의 입장에서 미소간의 대규모 첩보전이나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 동유럽 및 제3세계의 연이은 공산화 등 일련의 시대적 흐름은 스탈린과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여기게 했으며, 스탈린의 입장에서도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지역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이나 마셜 플랜 등으로 대놓고 소련을 견제하며 적성국 취급하는 미국이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미국이 전쟁 동안 보여준 압도적인 생산력과 핵무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을, 미국은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저항정신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기갑전력을 각기 두려워했고, 양국 모두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또다른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다행스럽게도 미소간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편 소련군이 만주 작전으로 만주를 넘어 한반도 북부까지 폭풍처럼 밀고 내려오면서 38선을 경계로 미소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고, 급기야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의 첫 포화를 알리게 된다. 다만 스탈린은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히틀러처럼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일부 반공소스가 주장하듯이) 미국과의 세계대전을 꾸미려는 인물은 아니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군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어쩔수 없이 공군을 참전시키면서도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엄청나게 신경썼다.

4.5. 마오쩌둥[편집]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의 꼭두각시였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역전하여 승리하자 "승자는 비난받지 않는다"고 말하며 마오쩌둥을 인정하고 중공 정권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고, 기술고문을 파견한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에 나온 마오쩌둥의 후기저작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즉, 스탈린은 기술과 생산력을 사회주의로 가는 가장 큰 요소로 보았는데, 마오쩌둥은 그 반대로 인간의 의지를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스탈린의 사상을 비판한것. 마오는 스탈린이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했다.[57] 중소관계가 최악이었던[58] 1969년 10월 1일 국경절에 톈안먼 광장에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세웠다.

4.6. 김일성[편집]

한마디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셔틀이자 시다바리였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오만방자한 김일성이 유일하게 무서워한 사람이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으며, 김일성이 유일하게 정상인이 될때가 바로 스탈린과 만날 때였다고 한다. 소련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북한의 지도자가 된 만큼 김일성이 비정규직 인턴쉽이라면 스탈린은 대기업 회장 관계로 스탈린이 살아있는 동안 김일성은 스탈린 눈치를 항상 살펴야 했다.

마오쩌둥에게조차 강요해서 6.25 전쟁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던 김일성은 오직 스탈린에게만 굉장히 무서워하고 어려워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으나 무려 48번이나 거절당하고 쩔쩔맸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그 전쟁만은 무조건 일으켜야 했기 때문에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말을 만들어냈고 결국 애치슨 라인을 열심히 설명해서 스탈린에게 "한국에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계속 설명해서야 간신히 전쟁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 허락을 받았어도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 중에서 육군은 아예 내주지 않았고 극소수의 공군만 지원했다. 물론 그 뒤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꼴을 쳐다만 봤다. 심지어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이 시종일관 수세에 몰리고 있는 와중에도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기도 했다. 소련은 세계대전을 우려해 공군의 참전조차 감추었지만, 미국도 이를 인지하고서도 문제삼지 않았다. 미국도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대대적인 인민재판을 통한 학살로인하여 점령지에 민심을 잃고있다는 소련군 보고를 듣고 "김일성 그놈은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왜 가만히 있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북한에서 김일성을 대체할만한 인물이 없어 그냥 둔것일뿐. 정확히 말하자면 김일성보다 말 잘듣는 인간이 없어서 그냥 둔 것이다. 당장 박헌영도 스탈린의 신임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스탈린은 박헌영같은 인텔리는 먹물 들어서 자기 말 안 들을거라고 판단해서 박헌영을 버리고 오히려 박헌영 숙청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죽기 1년 전 간이 부었는지 노망이 들었는지 "스탈린은 내 친구요."라고 지껄이기도 했다.[59]

5. 가족사[편집]

파일:JJhtv48.jpg


두번 결혼하여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사실 가족에게도 냉혹한 성격으로 처자식조차 믿지 않았다. 야코프 자신도 이런 저런 일로 자살 기도를 한 적이 있었고, 스탈린은 그 소식을 듣고 그 놈은 총도 제대로 못 겨누는 군인이라고 했다.

5.1. 아내들[편집]

첫 아내 : 예카테리나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სვიმონის ასული სვანიძე) : 1885년 4월 2일 ~ 1907년 12월 5일(22세)
두번째 아내 :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 1901년 9월 22일 ~ 1932년 11월 9일(31세)
아내들에게는 좀더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첫 아내가 결혼 2년도 못채우고 병사하자(제정 러시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도 있다.) 몇 달 동안 상복을 입은 채로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60] 심지어 아내 장례식 때 아내의 관을 묻을 때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구덩이로 뛰어들려고 했다고. 친구들이 다시 붙잡고 산 사람은 앞으로도 살아야지 이랬다지만... 흠좀무한 건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제국 정보부인 오흐라나의 정보원이 장례식에 끼어있는 걸 간파하고 장례식 중간에 슬쩍 도망갔다는 사실.[61] 두번째 아내가 자살한 직후에는 정치국에 사표를 내고 서기장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첫 아내의 사인은 원래 허약한 아내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이곳저곳 도피생활을 반복하다 생긴 영양실조가 원인이 된 티푸스였고 두번째 아내의 자살 원인은 스탈린이 혁명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생긴 우울증이라고 보고 있으니[62]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5.2.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편집]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BD%BA%C5%BB%B8%B0%B0%FA%20%B1%D7%C0%C7%20%C0%DA%BD%C4%B5%E9%20-%20%BE%DF%C4%DA%C7%C1%20%C1%D6%B0%A1%BD%AC%BA%F4%B8%AE.jpg


1907년 3월 18일 ~ 1943년 4월 14일(만 36세)
(Яков Джугашвили, 조지아어로는 이아코브 주가슈빌리-იაკობ ჯუღაშვილი)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첫 결혼에서 탄생한 아들이며 그루지야에 남겨져 조모에게 길러지다가 아버지인 스탈린이 최고권력자가 되자 모스크바로 와서 살게 되었다. 스탈린은 맨 처음 야코프를 얻었을 때 매우 기뻐했으며 아기가 울지만 않는다면 키스하고 코를 간질이며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하지만 야코프가 울면 일에 방해가 된다고 짜증을 내곤 했다. 결국 이후 부자 관계는 크게 들어졌다.

2차대전 당시에는 포병장교로서 군에서 복무하다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자신이 직접 명령으로 '독일에 투항하면 반역자로서 취급하고 그 가족들도 피해를 받게 하라.'라고 항복을 못하게 강력히 지시해놓은 상황이었는데, 스탈린은 실제로 아들의 가족을 투옥시켜버렸다.[63] 게다가 '내 아들이라 하더라도 반역자는 가만 놔둘 수 없다.'라고까지 하는 등 완고했는데, 아들은 결국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이래서 그런지 "스탈린은 가족에게도 냉정했던 철면피다."면서 그를 비난하기도 하는데 전시 지도자로서는 솔선수범을 했다고 봐야 한다. 스탈린의 두 아들은 모두 제2차 대전에 참전해서 최전선에서 사지를 넘기는 근무를 했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할만하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이 가족에게 냉혹했다고 비난하는 주장은 주로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권의 반공진영에서 나온다. 일단 이런 나라들은 직접적인 전쟁위협을 덜 느끼는 편이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역시 징병제나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편이라서...(서유럽 중도우파야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건 유명하니까) 아무리 전쟁이라도 어떻게 아들을 버릴 수 있느냐는 감성을 가지기 쉽지만, 징병제를 유지하는 한국 입장에서 이런 감성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을 듯. 또한 이 당시 소련은 독소전쟁에 인민을 백만 단위로 갈아넣고 있었는데 자기 아들에게 안전하고 편한 보직을 주거나 아예 군 입대를 막았다? 이건 정치적으로 자살행위다.

스탈린은 며느리를 반역 행위로 수감했지만, 야코프는 그래도 포로생활을 의연하게 했다고 한다. 독일 측이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거대한 가치를 지닌 야코프를 전향시키려고 했는지, 독일의 거대한 군수공업을 보여주었지만[64], 야코프는 소련측이 최후에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독일 측은 다시 야코프를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65]

그런데 기밀 해제된 그 측근들의 증언 등에 따르면 스탈린은 가끔 아들을 걱정하는 이야기들을 했으며, 여러 번 야코프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포로협상과 구출작전도 계획하고 실행도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구출작전에 대해서는 스탈린에게 '감히' 언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게오르기 주코프가 구출작전 이야기를 물어보긴 했다고 한다. 스탈린 역시도 동의하고 구출작전을 지시했으나, 실질적으로 구출작전을 실행할 방법이 없었다. 야코프는 매우 불확실한 정황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비밀해제된 러시아의 자료로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수용소의 명령을 듣지 않아 초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원래 우울증을 앓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전쟁 전에 자살기도를 했으나, 총을 제대로 못쏴서 상처만 입었다.

야코프에 대해서 독일 측이 야코프와 흔히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로 지목되는 어느 독일 장군을 교환하자고 스탈린에게 제의했으나 스탈린이 모든 소련군 포로와 바꾸는 것이면 몰라도 원수와 중위를 바꾸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일화가 굉장히 유명하며 이는 정설처럼 유통되고 있지만 해금된 소련 기밀 문서고를 다 뒤져도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뱀발이지만 스탈린은 자신의 맏며느리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상당히 싫어했으며 야코프가 항복하자 유대인 반동 며느리가 자기 아들을 사주시켜서 항복시켰다는 기가막힌 생각을 했다고 한다.[http://egloos.zum.com/flager8/v/2940317|#]

5.3. 차남 바실리 스탈린[편집]

파일:external/www.historyinanhour.com/Vasily-Stalin.jpg

소련공군 소장 예복을 입은 바실리 스탈린. 얼굴 생김새가 아버지의 유년기와 매우 비슷하다.[66]


1921년 3월 21일 ~ 1962년 3월 19일(만 40세)
둘째 아들인 바실리 스탈린(Василий Сталин)[67]은 지상공격기 IL-2 조종사였는데, 26번 출격한 공로로 20대에 공군 장성까지 되었다. IL-2는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손실율도 엄청났기 때문에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 것임은 틀림없다.

바실리는 2차 세계 대전에 끝난 후에도 살아남았으나, 모스크바에서 승전기념 에어쇼를 하다 충돌사고가 일어나자 스탈린이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고 스탈린 사후 아버지가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술에 쩔어 살다가 41세로 요절했다. 흐루쇼프가 제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아버지를 모독한 것에 대한 회한도 있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가 없는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자기를 찢어죽일 거라고 두려움을 토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라리사 바실리에바의《크레믈린 여인들》에 따르면 부하린이 어느 때 스탈린을 만나러 갔을때 스탈린은 갓난 아기였던 바실리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기가 콜록거리며 우는 걸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아, 괜찮아. 애한테 좋은 일이라구. 연기를 뿜어주면 이 놈이 강해진단 말이오!"라고 했다. 흠좀무.[68]

5.4.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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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미국에서 인터뷰를 하는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1926년 2월 28일 ~ 2011년 11월 22일(만 85세)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Аллилуева)는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머리는 꽤 좋아서 러시아어는 물론,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에도 매우 유창했고, 최고 명문대인 모스크바대학을 나와서 번역자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두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딸에 대해서도 그다지 특전은 주지 않았고, 분가 후 생활은 서민처럼 했다고 한다. 첫번째 결혼에서 대학시절 만난 교우와 결혼했다가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그 이혼이 스탈린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혼 이후 스탈린이 자신의 관저 옆에 그녀의 집을 만들어 놓고 그녀를 사실상 감금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유대계 시나리오 작가 알렉세이 카플레르를 스탈린이 무척이나 싫어했었고, 여러 차례 총살시키려고 했었으나, 결국 굴라그로 보냈는데, 스베틀라나가 이 때문에 스탈린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스탈린이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자신의 성씨였던 스탈리나(Сталина, 스탈린의 여성형 성씨)를 그녀의 어머니이자 스탈린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의 성씨에서 따온 알릴루예바로 바꾸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 유리 즈다노프와 두번째로 결혼했다가 자식낳고 얼마안가 이혼하고, 다시 결혼은 하지 않고 인도의 공산주의자와 동거하다가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 이주하여 '라나 피터스(Lana Peter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피터스 라는 성은 미국에서 재혼한 세번째 남편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의 성을 딴 것. 그와의 사이에서도 딸을 한 명 낳기도 하였다.

1984년에는 두명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다시 귀국하여 소련 국적을 회복한 후, 소련 당국의 강요였는지, 자의에 의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라며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년도 채 못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잠시 살다가, 말년에는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소도시 리치랜드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며 극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그 후, 2011년 11월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1년 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스탈린이 내 인생을 망쳤다. 어딜 가던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언제까지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 전에 소련에 있을 당시에는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스탈린은 도덕적, 정신적인 괴물이다."라고 공개비판하기까지 하였다(...). 하인리히 힘러도조 히데키의 딸과는 비교되는 부분, 망명 후에 미국에서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것이 소련 정부의 어그로를 끌었다. 당연히 소련에서는 금서. 그러나 그녀는 이 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녀의 망명 당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소련 정부는 그녀의 망명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으며, 오히려 그녀의 망명으로 스탈린과 그 가족들의 명예가 실추되길 내심 기대했었고, 당시 미국에서도 그녀에게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었다는 주장도 있다.

5.5. 사생아[편집]

앞서 말하듯 유배 시절 사생아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흥미로운 케이스가 조선에서 태어난 손자인 유리 다비도프. 노보쿠즈네츠 지역 건설기술업자인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베리아 쿠레이카 마을에서 혼외로 자신의 부친 알렉산드르가 태어났으며 출생 후, 아버지인 스탈린은 곧 떠났고 어머니는 한 마을에 살았던 '다비도프'란 성을 가진 남성에게 시집가 다비도프란 성으로 자랐으며 차후, 스탈린은 아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동의하지 않았다."

사생아인 아버지가 1941년 독소전쟁에서 모스크바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일본군의 침공을 대비하여 다시 극동지방으로 부대가 이동하였다고 한다. 유리 다비도프가 태어난 경위는 그의 아버지가 적군으로서 "한반도(조선반도) 해방전투(만주 작전)"에 참여했으며 1948년 4월 22일에 조선(북한)에서 아들을 보았다는 것이며, 1955년 노보쿠즈네츠크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프다 러시아신문의 보도.

또한 러시아 대중역사가 에드마르트 라진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두번째 아내 알릴루예바가 사망한 이후, 가정부였던 발렌티나 이스토미나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고 하며, 두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한다.

6. 이름[편집]

  • 러시아어 :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 영어 : Iosif Vissarionovich Stalin


조지아어 초명은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69] 조지아어로 '제(ძე)'는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베사리오니스(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는 아버지의 이름인 베사리온. 따라서 러시아어로 바꾸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가 된다.
'이오시프'라는 이름의 영어 표기인 조지프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부르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 참고하자. 영미권 국가에서 만든 2차대전 관련 다큐멘터리 등지에서도 이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가명으로 코바(კობა)가 있는데, 조지아 사람인 알레크산드레 카즈베기(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ყაზბეგი)가 쓴 소설 <아버지 살인(მამის მკვლელი, 마미스 므크블렐리)>의 주인공 코바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주인공은 말하자면 로빈 후드 같은 인물이었다. 스탈린의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은 숙청으로 처형 직전에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고.[70][71] 애칭으로 자주 쓴 모양이다. 레닌이 다른 사람들에게 스탈린의 성을 물을 때도 코바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랴보이'(Рябой, 마맛자국)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시절 천연두를 앓아 마맛자국이 있었기 때문. '가이오즈 니자라제(გაიოზ ნიჟარაძე, Gaioz Nizharadze)'라는 별칭도 조금 쓰였다. 또 여러 번 쓰인 가명인 베소와 베소시빌리라는 이름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 밖에 수많은 가명과 별명, 필명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동네 친구나 어머니와 같은 가족은 그를 소소라고 불렀다. 문필가로서 작품을 발표할 땐 소셀로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페트로프, 이바노비치, 갈리아시빌리, 세묜 즈벨라야, K. 카토, 곰보 오스카, 오시프 코바, 괴짜 오시프, 캅카스인, 우유장수, 곰보, 게자(절름발이), 쿤쿨라(비틀거리는 사람), 코바 신부 등등등... 나중엔 그의 캅카스적 정체성을 대표해주는 코바의 사용빈도가 늘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별칭은 항목명과 같은 스탈린. 스탈(Сталь)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하는데, '스탈린'이란 '강철 사나이'라는 의미다. 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스탈린 본인은 "동지들이 나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며 말했지만 바쿠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류드밀라 스탈이 지어준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스탈린의 평생 측근이었던 몰로토프는 "그건 그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72] 수없이 많은 가명들 중에서 본격적으로 '스탈린'의 사용빈도가 늘어나는 것은 스탈린을 당내에서 정말로 유명하게 만들어준 저작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에 필명으로 이 이름을 쓰고나서 부터다.

7. 루머[편집]

신빙성이 희박한 루머이긴 하나 사모님과 비서, 자신해서 3P플레이를 시도하려 했다가 사모님에게 퇴짜를 맞은 적이 있다 한다. 사모님은 당연히 울고불고 뛰쳐나가고, 실망한 스탈린은 비서 하나를 더 불러서 소원을 성취했다 한다. 흠좀무. 그리고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어린이를 사랑해서 같이 자기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다. 진실이라면 페도필리아. 그가 로리콘이란 설은 있다. 그의 딸 스베틀라나의 기록에 의하면 스탈린은 사망 직전 병적으로 소년, 소녀들의 사진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했다고 전한다.[73]

또 다른 루머로는 스탈린의 자살한 두번째 부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나디아)가 실은 자신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나데즈다의 어머니와 스탈린이 내연관계였다는 에 기초한 것이다. 스탈린은 나데즈다의 아버지의 집에 자주 피신을 왔는데, 이때 어린애였던 그 딸과 친해졌고, 혁명 후에 그 애와 결혼을 했다. 결혼할 당시 나데즈다는 18세, 스탈린은 40세로서, 아무리봐도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었다. 나데즈다가 자살한 이유는 스탈린이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충격받아서 그랬다는 것이다.[74]

또는 항상 민심을 탐방하던 나데즈다가 스탈린 앞에서 농업정책 실패와 대숙청을 비난하자, 이를 듣고 스탈린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끝에 부인을 사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썰도 있다.[75]

하지만 냉전 이후 공개된 KGB의 사건 조사서 및 의학 기록 등의 문서 자료에 의하면 나데즈다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는게 정설, 계속되는 두통과 발작, 빈혈, 생리불순(폐경기도 아니었지만 3년 넘게 하지 못했다.) 등등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했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과 모인 파티 직후에 충동적으로 방에서 총으로 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결론으로 정립되었다. 게다가 둘째 아내와는 결혼생활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디아는 사교적이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길 원했지만 스탈린은 내조를 원했던 것.

아내들의 끝도 좋지 않았지만 처가 식구들의 끝은 더 좋지 않았다. 부하린이나 과거 다른 볼셰비키들과의 친분도 있었지만, 스탈린은 자신이 인격적인 모습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스탈린 관련 포스터를 보면 스탈린을 마치 부동자세를 취한 고요한 신처럼 그리고 있는데, 군중들 속에 섞여 있거나 캐리커쳐로 바뀌어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레닌 포스터와는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자신의 인격적인 모습을 알고 있는데다가 그것을 출판까지 한 처가 식구들은 스탈린의 눈에 좋기 보일 리가 없었고, 아내도 죽었기 때문에...

8. 비합리적인 의심과 불안[편집]

굉장히 심약해서 잔걱정과 겁이 많은 성격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에도 불안을 버리지 못해 대숙청을 감행하였다. 특히 군을 믿지 못해 장교를 왕창 죽였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같은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군을 믿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형성된 소련군은 매우 정치화되어있던 군대였고 스탈린을 비롯한 국가대사에 사사건건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군을 정치의 개로 밖에 생각 안 했던 스탈린 입장에서는 다 조져버리는 것이 맞았던 것. 상부의 통제를 안 받으려고 하니까 각종 비리가 횡행한 것은 덤이었다.

한편으론 매우 사무적이고 꼼꼼하여 수많은 서류를 자신이 직접 보고 결재하고 계산해 가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런 과도한 업무에다가 자신이 신경 안써도 될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독소전쟁 시절에는 직업군인들이 짠 작전의 세부적인 면에까지 간섭하다가 몇 번 크게 말아먹었고, 그 다음부터 작전에 그다지 간섭을 안했다니,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못한 히틀러는 결국...

한편, 정작 자신은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11시쯤 늦게 일어났는데 반면에 주위 당 간부들과 군 장교들은 스탈린이 그러고 나서도 아침 일찍 업무시간을 엄수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도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술까지 폭음을 했기에, 주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로에 수면부족에 숙취까지(…) 3중고로 시달려 결국 병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 통제 하의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의 생활리듬에 맞춰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생활리듬을 모두 바꿔야 했고, 언제 스탈린이 전화를 때릴지 몰라 늘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머리는 상당히 명석한 편으로 판단력이나 이해력은 서방의 관찰자들도(심지어는 윈스턴 처칠도!)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는데, 문제는 잊어버려야 할 사소한 원한 같은 것도 기억했다가 후에 모조리 배로 갚는다는 점. 아주 기억하기도 힘든 작은 노여움 때문에 후에 숙청당한 이도 많았다. 반대로 스탈린이 유배 생활 도중에 즐겁게 지내고 동지들과 연락하는 걸 방조해주었다는 이유로 부농으로 몰린 유형지 간수 하나를 그냥 풀어준 경우도 있었다(...). 막심 리트비노프는 런던에서 스탈린이 항구 노동자들에게 두들겨맞던 걸 구해준 것 때문인지 말년까지 험한 꼴을 안 당했는데 리트비노프는 아무래도 자신이 스탈린을 구해줬던 것 때문같다고 농담하곤 했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도 무명 시절의 스탈린과 친해졌다가 덕 본 케이스.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연해주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와 독립군들이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 일본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끌려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가 죽어버렸다. 물론 그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올라서기까지의 고통은 누구라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고려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항상 그 당시를 이야기 하는데 영하 -10도인 상황에 몸만 던지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땅굴을 파서 겨우겨우 살아 남은게 현재 고려인이다. 홍범도 장군도 이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가서 극장 간수로 취업하여 빈곤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잠시 묵념.

또한 1941년 독소전 발발을 틈타 캅카스의 무슬림 체첸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자 1944년 봄, 체첸인들을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인근의 잉구시인과 함께 몽땅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당시 체첸인의 10%가 강제이주 당시 사망했다. 이들은 흐루쇼프 시기가 돼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캅카스인이나 고려인만이 타깃은 아니었고,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도 스탈린에게 밉보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실제로 캅카스나 아시아 출신 러시아 포로들을 이용해서 독일군은 파르티잔들을 때려잡거나 포로 감시소 경비로 쓰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 근거 없이 숙청한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숙청을 단행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자기 주치의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주치의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관계로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90년대에 구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자료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그 베리야도 흐루쇼프에 의해 축출…이 외에도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가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한다.

말년에는 의심이 너무 심해져서 심지어는 자신의 충복이었던 베리야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 게다가 필생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의 망령이 씌웠는지, 갑자기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953년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 사건이 계속 벌어났고,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는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소련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 이는 대숙청 당시와 비슷한 패턴이라 소련 인민들은 모두 긴장했으나, 본격적인 숙청이 이뤄지기 전에 스탈린이 사망하므로서 흐지부지되었다. 스탈린 사후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조작이라며 혐의자를 모두 KGB(NKVD의 후신)에서 풀어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베리야였다.[76]

9. 이야깃거리[편집]


  • 혁명가 시절에는 여성편력이 대단하여 엄청난 숫자의 애인을 사귀고 곳곳에 사생아를 만들고 다녔지만[77] 정작 집권을 한 후에는 대다수의 독재자와는 달리 여성편력 면에서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독재자 치고는 사생활이 매우 담백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명령을 집행하던 NKVD 장관들인 겐리흐 야고다,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는 하나같이 변태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색마이자 새디스트들이었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된 스탈린의 3P 얘기는 양성애 성향의 변태였던 예조프의 얘기가 와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예조프는 실제로 한 부부를 통째로 협박하여 동시에 3P로 성관계를 가졌다. 여자아이들을 납치해서 같이 잤다는 얘기는 베리야의 얘기가 와전됐을 가능성이 크다. 베리야는 실제로 NKVD를 동원해 여자아이들을 무작위로 납치, 강간하는 것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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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년 전당대회 연설

얄타회담 같은 사진같이 서방기자들이 찍은것을 제외하고 스탈린의 사진이나 영상은 여러 이유로 뽀샵질로 처리된 것이 많지만 이 동영상은 해상도가 낮아 조작이 어려워 그나마 가공이 안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중들이 지루해서 턱을 괴고 있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은 스탈린의 연설을 들으려 귀에 이어폰을 대기 위해서임이 영상에서 확인된다. 소련이 다민족국가라서 소수민족 언어로도 번역해서 들려 준 것인지, 걍 음량 좀 더 키워서 들려 준 것인지(…)는 불명. 엄청난 연설능력을 가졌던 레프 트로츠키아돌프 히틀러[78]와는 달리, 스탈린의 연설은 어눌하고 매우 평이하게 원고나 읽는 수준이었다.[79] 일단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어모국어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러시아어를 조금 아는 사람은 눈치채겠지만 스탈린의 연설에는 러시아어 특유의 억양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 콜라와 관련해서 꽤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트루먼 대통령이 보내준 코카콜라의 맛에 감탄을 하면서도 그런 음료가 서구에서 나온다는 것에 격분하며 식품화학자 미트로판에게 배를 원료로 해서 콜라를 능가하는 음료를 만들라고 명령했으며, 콜라를 수입금지 시켜버렸다.[80] 그러자 콜라의 맛에 푹 빠졌던 게오르기 주코프는 안절부절 못해서 콜라를 밀수입해서 들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 스탈린은 말년에 러시아에 대해서 병적으로 집착했으며, 또한 모든 위대한 인류의 지적 유산은 소련과 러시아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역사왜곡까지 하려고 들었다. 그는 말년에 소책자로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점>를 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러시아 민족의 언어'의 기원을 쿠르스크와 오룔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언어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말에 동의를 하지 않지만, 스탈린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유럽의 르네상스의 뿌리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에 두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 2차대전 직전 미국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과, 소련 국내에서 폭압 통치를 자행하는 스탈린을 맹렬하게 까댔으나, 이후 독소전이 발발하고 소련이 자신들의 우군이 되자 이번엔 소련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을 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에게도 애칭을 붙였는데, 바로 조 아저씨(Uncle Joe).[81] 링크 단 스탈린은 이 별명을 싫어했다고 한다.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회담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미국인들은 스탈린을 친근하게 조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조크를 던졌는데 스탈린은 불쾌해했다고 전해진다.

  • 어느 회담[82] 당시 욕탕에서 킬로이 다녀감을 보고 "도대체 그 빌어먹을 킬로이가 누구야?"라고 말했다는 루머가 있다.

  • 자신을 강철의 사나이로 자칭했지만 고소공포증 환자였다. 1943년 연합국 지도자와 열리는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캅카스 지방 바쿠까지 열차로 이동하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다만 격이 떨어진다면서 조종사를 장군으로 하라는 측근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대령에게 조종간을 잡게 했는데, 이유는 "장군까지 됐으면서 비행기 모는 법 기억이나 하겠냐?"였다(…). 스탈린이 비행기를 기피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이는 소련의 항공기용 엔진 신뢰성이 낮아 사고율이 높았기 때문. 의외로 당대의 많은 국가원수 및 군 수뇌가 그 문제 때문에 비행기를 기피했고, 추락사고로 죽기도 했다. 1945년엔 비행기로 이동하기 싫은 탓에 얄타 회담시엔 건강이 나쁜 루즈벨트를 억지로 데려와서 루즈벨트가 건강이 더 악화돼서 죽게 만드는 데 영향을 주기도 한다.

  • 앞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주로 밤에 일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드는 그의 수면리듬에 맞추느라 그의 측근이나 주요정부기관까지 새벽근무를 해야했다.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히틀러가 행정업무를 싫어했던 것과 달리 스탈린은 지독한 일벌레로 모든 일을 꼼꼼하게 직접 처리하는 스타일이어서 부하들은 그야말로 죽어났다. 2차대전 때는 철도 운행 스케줄에 과부하가 걸려서 병력이나 물자를 수송하던 열차의 행방이 묘연해진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를 보고하던 한 장군에게 "별을 달고서도 못 찾겠다면 전선에 졸병으로 나가 찾게 해주겠다."고 갈구기도 했다.[83]

  • 트로츠키를 평생 싫어하고 두려워해 그의 업적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위조했다. 호찌민의 당당함을 질투해서 소련에 초대되었을 때 KGB에게 그의 소지품을 훔쳐내게 하여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고, 마오쩌둥을 기름진 똘마니 정도로 보고 혐오하여 '마가린 공산주의자'라고 험담했으며, 김일성을 의외로 마음에 들어했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 건국 60주년 영화 건국대업에선 저 마가린 운운하는 내용을 조금 비틀어서 스탈린이 미국을 마가린같은 자본주의자라고 욕하는 장면으로 바껴서 나온다.

  • 히틀러만큼은 아니지만 스탈린도 반유대주의적인 측면도 조금 있었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유대인만 딱히 더 싫어하고 차별한 것은 아니고 그냥 소수민족 자체를 탄압 대상으로 여겼던 듯 하며 능력있으면 측근도 유대인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니 반 유대주의자 라고 하기는 좀 지나친 감도 있다. 이는 그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84]를 비롯한 고참 볼셰비키들이 유대인이었다는걸 근거로 드는데 초기 혁명 직후에 러시아 내 유대인 인구에 비해 공산당원수나 고위급 중에 유대인이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후 적백내전 때부터 새로 당원들이 유입되면서 유대인 출신은 인구수 법칙상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다. 소련에서 유대인 박대는 서유럽처럼 종교적이나 히틀러처럼 인종적인 면이 아닌 스탈린의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국제적으로 선민사상이 쩔었고(…) 국제적으로 전통과 민족문화를 중시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당이나 국가보다 이스라엘에 더 충성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히틀러와 의도나 목적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스탈린은 캅카스인(고향 조지아 포함), 폴란드인, 중앙아시아인 등을 모두 공평(?)하게 박대했다. 히틀러처럼 엄청난 반 유대주의, 유태인 혐오에 휩싸여 유대인이라고 더 박대한건 아니다. 그리고 따져보면 사실 무작정 박해만 한 것도 아니어서 막심 리트비노프처럼 유대인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했고 시베리아에 유대인 자치공화국을 만들고 소련의 유대인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려고도 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대인 자치주'는 이 때의 유산이지만, 이 지역에 이주한 유대인은 극소수였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 체코 공산주의자들을 반역죄로 처형한 것,[85] 스탈린의 마지막 숙청이 될 뻔했던 "유대인 의사 음모 사건"도 반유대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 있다. 스탈린 사후에 아이러니하게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베리야가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 스탈린은 참새를 쫓아버린답시고 총을 들고 나간적이 있었는데 결과는 경호원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다. 또 한 번은 총을 다듬다가 오발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미코얀을 죽일뻔 했다. 미코얀은 물론, 식탁 앞에 앉은 측근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어느 누구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고,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자신이 사격의 명수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흠좀무.

  • 한번은 스탈린이 하루 정도를 쉬기 위해서 카프카스로 온 적이 있었다. 때마침 라코시(헝가리 공산당 서기장)가 스탈린을 방문하기 위해 그 곳에 왔는데 라코시가 도착하자 스탈린의 측근들은 그와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셨다. 그런데 스탈린의 측근들은 스탈린이 자주 술을 권해서 주량이 늘었기 때문에 측근들은 취할 때가지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측근들이 너무 심하게 술에 취하자 파티 와중에 라코시가 한 마디 내뱉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꼴들이요? 이런, 주정뱅이들 같으니라고!" 측근들은 라코시의 모욕에 견딜 수가 없었고 라코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달려가 라코시가 자신들을 싸잡아 모욕한 사실을 고자질하자, 그러자 스탈린이 말했다. "좋아, 두고 보자고!" 바로 그날 밤, 스탈린은 만찬 석상에서 라코시에게 마구 을 권했고, 샴페인을 두서너병, 아니 얼마나 많은 술을 먹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강제로 먹였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자마자 라코시는 곧바로 도망가 버렸다. 스탈린은 기분이 몹시 좋았는지, 하루 종일 농담을 했다. "보게! 그 녀석이 지금쯤 어떻게 되었겠나?!"

  • 사담 후세인은 스탈린을 존경하여 그를 벤치마킹 했다는 흠좀무한 사실이 있다. 한편 고향 취급인 조지아에서는 나름대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인이다(…).

  • 사실 아무리 악명 높은 권력자라 해도 정작 고향에선 그 인물에 대한 지지도가 의외로 높은 경우는 꽤 많다. 후세인도 그렇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고향을 여러번 털어먹은 전적이 있기 때문에 평판은 반반이라고 한다. 특히 조지아어를 아예 없애려고 했으니...죽은 뒤에 기밀해제된 문서들이나, 자료들에 의하면 나름대로 좋은 면도 있지 않았나 싶지만 해놓은 짓이 위낙 악당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 위의 행각 때문에 좀 그렇긴 하지만 훌륭해 보이는 일화도 있는데, 존경하는 모든 노동자와 농민의 지도자에게 자신이 기르던 암소를 선물하려던 페클라 코르슈노바라는 한 70세 노인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직접 답장을 써 줬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 다정한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없어 소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완전히 국가에 고용된 사람이라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하지만, 고용된 사람은 농장이 없답니다. 어머니, 제 생각에는 제게 소를 선물하지 말고 계속 기르면서 저를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탈린-"

  • 또다른 훌륭해 보이는(?) 일화가 있다. 소련군의 총참모장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아버지는 러시아 정교회 신부였는데, 당시 신부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바실렙스키는 출세에 지장이 있을까봐 아버지와 의절하고 지냈다. 아무리 스탈린이 군사 지도부에 대해 의심을 풀고 신뢰하게 되었다 해도 대숙청을 생각해보면 그 피튀기는 시대가 얼마나 지났다고 인민의 적과 공공연히 만나겠는가? 아니 생각해보면 아직 숙청은 끝나지 않았다. 인민의 적과 가족이란 점은 출세가 문제가 아니고 그 이전에 목숨이 위험했다. 한 번은 스탈린이 같이 식사를 하다가 바실렙스키에게 그의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동무의 아버님은 잘 계시나?" 그러자 바실렙스키는 "저의 아버지는 신부로서 인민의 적입니다. 저는 공산당원으로서 아무리 아버지라 하더라도 인민의 적과는 상종을 안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꾸짖으며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자네 아버지의 아들 아닌가. 아들이 그러면 되나." 하고 아버지와 화해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누구 명령이라고 거역하겠는가...

  • 현대 러시아와 주변국들을 들썩이게 하는 러시아 내 공화국들의 독립투쟁이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문제는 사실 이 사람이 러시아 내 소수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펼친 이주정책의 공이 크다. 여러 의미로 러시아는 스탈린이 남긴 유산들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셈이다. 소련 초기 민족인민위원 시절에는 캅카스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볼셰비키에 의해 떼몰살을 당하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간섭해서 자기 지인을 빼내주기도 했었다.

  • 1945년1948년 노벨평화상 후보가 된 적이 있었다. 한 국가의 의회의 의원이면 누구나 추천할 수 있었기에 그런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히틀러, 무솔리니 등 온갖 사람이 후보에 오른적이 있다.(당연히 상을 받을 일은 없다.)

  • 의외로 단신이다. 영상이나 사진 등 매체에서 일부러 스탈린을 크게 보이려고 노력했기 때문. 프로필에는 168cm로 적혀 있으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60cm 정도로 보았다.

  • 사후에 레닌과 마찬가지로 엠버밍 처리되어 훗날의 김정일마냥 붉은 광장레닌 영묘에 합장되었으나, 후에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 크렘린에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 사람이 "꿈에 레닌이 찾아왔는데 스탈린 보고 방 빼랍니다."라고 크레믈린에서 연설을 하자 스탈린을 빼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결국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영묘 바로 뒤에 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다. 모욕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부처리를 중단한 후, 바로 화장하지 않고 뜸들이다가 시체가 많이 부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크렘린 벽 묘지도 국가에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상당한 영예인데,[86] 아무리 스탈린을 디스하던 흐루쇼프도 스탈린의 업적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나보다. 아직도 붉은 광장 한켠에는 이 벽 묘지와 스탈린의 흉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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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의 동상은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 여기저기에 많이 남아 있다. 위 사진과 같이 모스크바 크렘린 벽묘지에는 스탈린의 석상이 하나 남아있으며, 그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 시청 앞의 거대 동상은 철거되었으나 스탈린 박물관[87] 내에도 또다른 스탈린의 동상이 있고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에도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도 스탈린의 벽 묘지 앞에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참배객들이 매일 찾아와서 을 놓고 간다고 한다.

  • 6.25 전쟁은 스탈린이 지시한 것이라고 추정되어 왔지만, 흐루쇼프 회고록이나 소련 붕괴 후에 문서 상 밝혀진 바로는 스탈린은 이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었고, 김일성이 계속 주장해대서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후에 북한이 패망 직전에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으려 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공군력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마지못해 소련 공군의 참전은 허락했는데, 이것이 들통나지 않도록 미그앨리라고 부르는 북한의 북부 상공에서만 비행하도록 했고, 교신에 러시아어를 쓰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을 정도였다. 스탈린은 미국과 대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의외로 북에 대한 지원은 매우 소극적이었다.[88]

  • 말년에는 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신병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개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레코드를 틀어놓고서는 정치국(폴리트뷰로)의 일원들을 춤추게 하였는데, 흐루쇼프, 말렌코프, 불가닌, 몰로토프, 주코프 같은 자들이 구두를 벗고 개 울음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흐루쇼프는 춤을 아주 못 추어서 웃음 거리가 되었지만, 몰로토프는 상당한 춤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춤판에 딸 스베틀라나를 데려와 실신할 때까지 춤을 추게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냉전시대의 선전이 아니라 드미트리 볼코고노프[89]의 책에 실린 내용이다. 높으신 어른들이 이런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남녀노소 술퍼먹고 미친듯이 춤추는 건 러시아의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다. [90] 서비스의 서술에는, 죽기 전날의 파티에서 스베틀라나에게 춤을 추자고 했지만 스베틀라나가 싫다고 하자 스베틀라나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 다음에 머릿채를 잡고 파티장에서 마구 끌고다녔다고 한다.(...) 주변에선 스베틀라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면서도 감히 스탈린을 말리진 못했다고. 근데 서비스는 이것도 나름대로 스탈린의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 볼코고노프의 책에 실린 또다른 회고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친지, 심복들과 같이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서는 웃으면서 같이 보면서 웃던 사람들의 유배문서에(...) 서명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국 회의 도중에 갑자기 한명을 지목하여 '당신은 스탈린 동무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나?' 등의 얼토당토 않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91]

하지만 저 내용이 신뢰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실제로 볼코고노프의 책은 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역사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인용된다. 이 사람은 원래 소련군 장성 출신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소련이 흔들리자 가장 먼저 사상전향하고 소련과 공산당을 디스하는 책을 많이 펴냈다. 이런 책들이 옐친에 이로움을 줬음은 물론이다. 한국 뉴라이트들의 역사관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의 역사관이 대충 그림이 나온다. (태생적으로 반공적인) 영미학계에서는 이사람 소스를 인용하여 스탈린 체제나 동유럽 체제를 비판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사람은 원래 옐친 정권에서 대통령 보좌관을 했던 사람으로, 특히 옐친 정권 하에서 정권의 입맞에 맞는 역사서를 펴내서 러시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던 사람이다.

  • 참고로 전쟁에서 딱히 도움이 안 되었던 이 사람은 전쟁에서 공적을 인정 받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두번 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 사람의 공업화 정책 덕분에 기갑웨이브를 선보일 수 있었다는 것?[92]

  • 그가 죽은 후 그의 블리즈냐야 별장의 서랍에서 신문지로 쌓인 3장의 편지가 나왔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1.

스탈린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낸다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것입니다. 나는 두번째는 보낼 필요가 없을 겁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2.

코바, 왜 당신한테 내 죽음이 필요하지?
-니콜라이 부하린

3.

스탈린 동지에게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당신은 내 아내에게 전화하여 욕설을 하는 무례를 범했소. 비록 아내가 그 일을 잊자는 당신의 말에 동의했을지라도, 이 사실은 그녀에 의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 알려졌소. 나는 내게 적대적인 행위를 그렇게 쉽게 잊을 생각이 없는데, 아내에게 적대적인 행위는 내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러므로 동지에게 청하건대, 동지가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를 끝내는 것을 선택한든가를 저울질해보기 바라오.

경의를 표하며, 블라디미르 레닌.


각각에 대해 로버트 서비스는, 1에 대해 깡패가 다른 깡패에게 편지를 보냈고 스탈린에게 대든 유일한 깡패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간직했을 것이라 했으며 2에 대해서는 부하린을 죽이면서 떨리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씨니컬하게 평하면서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을 거부했다. 3에 대해서는 그의 마음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키고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보관했을 것이라 평했다.

10. 평가[편집]

보통 악명 높은 독재자들은 후세의 평가가 부정적인 평 일색인 경우가 많지만, 스탈린은 그 악명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병존하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이는 그가 아직까지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악명이 자자하며 무수한 악행을 저지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소련이라는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여러 가지 남긴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일단 스탈린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소련의 전쟁 지도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을 패퇴시키고 소련과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과, 스탈린 집권기에 소련이 기존의 2류 강대국이 아닌 명실공히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 올라섰다는 것이다.[93] 그러나 그러한 업적을 가릴 정도의 악행 또한 상당하다. 익히 알려진 대숙청카틴 학살,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직접적인 학살 외에도 인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각종 제도화된 수단들을 보편화[94]시켜서 공산주의를 왜곡하고 극도로 잔인한 독재체제를 구축한 것 또한 전술한 대표적인 악행들에 비해 눈에 띄는 임팩트가 적어서 그렇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
단순히 공과가 병존하는 독재자 자체는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볼 수 있지만, 스탈린처럼 공과 과가 모두 극단적으로 큰 경우는 정말 드물다. 때문에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망으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의견이 매우 심하게 갈리고 있으며, 딱히 이렇다 할 총평이 정립되지도 않고 있다.

10.0.1. 현대 러시아의 평가[편집]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입장은 크게 조국을 부강하게 만든 위대한 지도자수많은 인민을 숙청한 잔혹한 독재자로 나뉜다. 그러나 러시아 내에서 국가주의와 우경화가 진행된 2000년대 이후로는 전반적으로 스탈린이 남긴 업적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95]

10.0.2. 긍정적 입장과 평가[편집]

스탈린의 진정한 핵심적 업적은 나무 쟁기를 가지고 일하던 러시아를 원자로를 완비한 나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아이작 도이처[96]


러시아 국영 TV 채널과 러시아 역사 연구소가 진행한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발하는 프로젝트에서 스탈린은 조지아인임에도 불구하고 3위에 올랐으며, 특히 소련의 정치가들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97] 2006년에 진행된 또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7% 가량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부정적인 답변은 29%에 불과했다.[98] 2007년에 러시아의 10대 청소년 약 1,8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다른 투표에서도 절반 이상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46%는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라는 견해를 부정했다.[99]

현재 러시아의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경우, 소련의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꺼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종종 표명하고는 했다. 일례로, 푸틴은 1937년의 대숙청을 '공포의 역사'라고 표현하면서도 "타국이 우리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소련과의 단절을 선언한 일부 러시아 정치가들을 비판하고 소련과 러시아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또한, 푸틴 집권기에 개정된 러시아 교과서에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봉착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계층의 부상을 유도했으며, 뛰어난 추진력과 지도부에 충성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100]

이러한 인식은 주로 소련 붕괴 이후의 사회, 경제적으로 엄청난 혼란이 불어닥쳤고, 러시아인들이 그에 대해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된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이 러시아인들을 부유하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대다수를 빈곤하게 만들고 양극화를 극심하게 진행시켰으며 러시아의 국력까지 크게 쪼그라 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는 나라가 그나마 정상적인 꼴은 갖추게 되었지만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부패한 지배층이 부를 거머쥐고 있고, 민주주의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은 독재와 잔혹함보다는 승리와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소련 시절을 경험한 노년 및 중장년층은 물론이고 청년들에게까지 스탈린은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자,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던 시절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101]

결론적으로,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변질시키거나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그런 실정과 악행을 넘어, 끝내 조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고 공산주의를 전세계로 확장했다"는 것이 러시아의 주된 평가이다.

10.0.3. 부정적 입장과 평가[편집]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그리고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 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며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이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에제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그 결과 혁명적 준법성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과거에 당의 노선을 지지했던 그 어떤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스탈린이 악한이라는 표지는 그가 마음대로 도덕을 전복시켰다는 점에 있다. 선이 악이 되었고, 악이 선으로 둔갑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이 모든 진보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사람이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102]-

아버지는 더이상 없지만, 아버지의 그늘은 아직도 우리 곁에 드리워져 우리에게 자주 명령하며, 우리는 아직도 자주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스탈린의 딸. (<친구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 중, 1967년)


스탈린에 부정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스탈린에 대한 인식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누구냐?"고 할 때 그냥 스탈린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려질 정도로 엄청난 악명을 가진 독재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스탈린 치하를 겪고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나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며 개혁을 주도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나,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옐친조차도 스탈린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전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2009년 크렘린의 공식 비디오 블로그에서 스탈린을 "재평가"하자는 모든 움직임들을 비판하며, 스탈린의 대숙청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103] 뿐만 아니라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소련을 "암울했던 시기"로 묘사하며, 강한 국가보다는 경제적 자유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기도 했었다.[104][105]

이외에도 대다수의 러시아 내 진보정치가들이나 인권운동가들 역시 스탈린에 부정적이다. 대숙청 기간 동안 스탈린이 저지른 엄청난 학살은 당대에도 지속적으로 서구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미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 내부로부터도 자성의 목소리가 일어서 한 동안 스탈린이 묻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의 일부 인권운동가들에게도 이어져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인명경시풍조 및 정치적 부패와 결부되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등 회고록을 네 권 썼는데, 스베틀라나는 책에서 "세상에는 자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믿게 됐다"고 썼으며,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을 "매우 단순하고 무례하며 잔인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2009년,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대숙청을 두고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로 묘사한 노바야 가제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106] 패소하였다.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지적했다.[107][108]

또한 스탈린이 저지른 대숙청과 일당독재를 넘어선 일인독재, 인민 학살등을 봤을때 스탈린은 성공한 개발독재자가 될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공한 공산주의자가 될수는 없다.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공산주의 조국의 경제성장과 국력신장을 위해서 아무리 악한 일이라도 필요악으로 여기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미 그들 자신들이 그토록 비방했던 자본주의의 돼지과 같은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면 이러한 인간백정을 찬양하는 것이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흐루쇼프 이후의 소련에서 스탈린의 이름은 사실상 말해서는 안될 자 취급을 받았다. 흐루쇼프는 물론이요 브레즈네프 시절 수상을 지닌 알렉세이 코시긴 역시 이 시절을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으며 안드로포프 역시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스탈린을 비판했다. 이렇듯 소련 공식 역사에서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타락시킨 독재자, 학살자의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를 휩쓸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오히려 스탈린은 찬양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웃기게도 스탈린 본인은 자신이 믿었던 부하들 (흐루쇼프, 말렌코프, 몰로토프, 베리야 등등)에게 사실상 배신당하듯이 쓸쓸하게 죽었고, 자신이 키운 차세대 공산당원들 (브레즈네프, 코시긴, 포드고로니, 안드로포프(?))을 비롯한 노멘클라투라에게도 겉으로는 나름대로 균형있게 평가됬지만 속으로는 다시는 그런 사람이 등장해서는 안된다 의 대표격인 인물로 취급받았다.[109][110][111] 심지어 더한 악당인 히틀러조차 개인적으로는 성격이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스탈린은 말그래도 성격이 개판이였다.

10.1. 구 소련 가맹국들의 평가[편집]

독립국가연합(CIS) 소속의 국가들은 민족 억압책을 편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하지만,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을 지켜낸 것만큼은 높이 평가한다.[112]

다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문에 아직까지도 증오하는 사람이 많다. 설문조사에서도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우세하며, 2010년에는 우크라이나 법원이 대기근과 대량 학살의 책임을 물어 스탈린을 기소한 적도 있었다.[113] 뿐만 아니라 2010년 봄에 스탈린 기념 동상이 건립되자, 당해 12월 말에 머리가 잘리더니 급기야는 폭발로 파괴되었다고 하니...민족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114] 아르메니아의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8%가 '스탈린과 같은 리더가 필요하다'고 답한 반면, 72% 가량은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스탈린을 사랑하는 민주주의자들(Democrats who love stalin)>

스탈린의 출생지인 조지아에서는 평가가 갈린다. 조지아의 한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115]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서도 조지아에 진주한 러시아군은 많은 전리품을 챙겼으나, 스탈린 기념관과 동상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조지아군 병사가 자신의 스탈린 문신(!)을 보여주자 러시아 병사는 그를 바로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보드카까지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조지아 입장에서 스탈린은 소련 시절 조지아 탄압에 누구보다도 앞장선 인물이기에, 일단 조지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스탈린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특히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급증하면서, 고리시 시청 앞에 있던 그의 동상을 2010년 철거했다.출처

10.2. 종교정책 (러시아 정교회)[편집]

  • 이 챕터의 내용은 고려대 노어노문과 석영중 교수의 <러시아정교 -역사 신학 문학>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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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하게도 정교회 성인들이나 그리는 이콘에 나오기도 했다.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성녀 마트로나(Матрона)와 비밀리에 만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스탈린부터 정교회 신학교 출신이긴 하나,유럽에서 가난한집 수재들은 신학교가 학비가 면제되기에 진학하는일은 흔했다. 스탈린은 신학교 시절 일치감치 공산주의자로서 훗날 공산주의 이론서적도 여러권 펴낸다.

앞서 레닌시절 러시아 정교회는 박멸수준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우선 러시아 제국의 국교였던 정교회의 지위가 법적으로 박탈되며 교회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총대주교 제도를 용인해주긴 했지만 신학교는 폐쇄되어야 했고, 적백내전당시 초법적으로 교회에 대한 약탈과 사제 살해등이 이어졌다. 특히나 1918년 키에프 수좌 대주교를 비롯하여 주교 교구사제 부제 수도자 평신도등 1만 2천명이 집단 살해되고 교회와 수도원은 약탈당했다. 내전이 끝난후 볼셰비키 지도부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는데, 레닌은 직접적인 교회에 폭력을 선호했고 트로츠키는 교회 내부를 분열시킨다음 장악하는 방법을 썼다. 1922년 신경제정책 이후에 교회에 침투한 볼셰비키 추종자들이 교회의 반혁명적 행태를 항의하며 소련정부 체제를 찬양하고, 교회를 장악하려 했는데 이를 반대한 총대주교는 체포 구금 당했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석방되나 1925년에 사망했고 17년간 총대주교좌는 공석이었다. 물론 교회에 침투한 '진보'들이 교회 탄압과 성직자 처형과 추방을 긍정한것은 아니나 무신론을 표방한 공산주의에서 자유 평등 정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이런 가치를 추구하면 공산당에서도 교회를 용인할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이었다.

스탈린 시기인 1929년부터 1930년말까지는 이미 교회는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200여개내지 300여개를 제외한 모든곳이 폐쇄 당했고 4만명의사제와, 비슷한수의 수도자와 수녀, 수백만의 신도들이 추방내지 유배, 처형당했다. 어용화된 기존 교회를 대체하여 상당수의 신자들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신학교 출신이라서 정교회의 본질과 러시아 민중의 전통적 신앙심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만큼 그의 교회 탄압은 전례없이 잔인하고 가혹했다. 기존의 공산당 종교 정책에서 정치 깡패 노릇을 했던 무신론자 연맹을 1929년 전투적 무신론자 연맹으로 개창하여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부수고 이콘을 불태우며 교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앞에 있는 스탈린 이콘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생존을 위해 굴욕적으로 제작한것으로 진지하게 스탈린을 성인으로 추존한 건 아니다.. 공산당에선 실제로 정교회에서 거의 유일한 자체수입인 양초 판매 수익을 끊기 위해 초 불매 운동을 벌이고, 이콘과 성물 십자가 때려부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종종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은 전투적 무신론자 협회 운동은 "무신론을 통해서 공산주의로, 종교와의 전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같은 호전적인 구호로 미화 되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무신론자 동맹은 러시아를 무종교 국가에서 반종교 국가로 만들라는 지령을 받아 모스크바를 무신론의 수도로 만들자는 계획까지 세웠다.

한때 러시아 정교회에서 러시아 제국의 국가적 성원을 받아 만드려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스탈린의 계획에 따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고 부지는 '소비에트 인민대궁전'으로 마개조할 예정이었으나 2차대전 때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철골을 뜯어가자 미완성 상태로 방치된다.

2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정교회에 숨돌릴 틈을 주었다. 다만 스탈린은 종교 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 전반에 걸쳐 완화책을 쓴것이지 특별히 종교정책을 유화적으로 한게 아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탄압이 완화된건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면 그동안 러시아 역사와 밀접한 정교회를 끌어들어야 하는 실용적 목적 때문이었다. 1943년 교회의 지지를 공식 요청했는데 이는 유물론자들이 2차대전 승리를 위해 믿음의 힘을 믿을리는 없고 그해 12월 테헤란에서 루즈벨트와 처칠과 만나기로 약정이 되었는데 영국 성공회 주교단이 소련교회를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의 숙원이던 17년간 공석이던 총대주교 선출을 승인하고 사제 석방, 교회 신학교 복구도 승인했다. 이과정에서 총대주교는 스탈린에게 감사를 표시했고 정교회는 소련과의 굴욕적인 밀월관계를 시작할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스탈린이 교회 탄압을 그만둔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무신론자 그룹과 유사한 즈나니에(Znanie) 협회를 창설했는데 이번엔 과학자와 교수집단들을 이용하여 종교를 무지몽매로 몰아가는 전략이었다. 러시아 정교회 수뇌부는 전쟁 직후 그리구 전후 잠시 동안은 외국 귀빈이나 단체가 방문시 스탈린 동무와 함께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서계 청소년 축제가 개최되었는데 공산당에 포섭된 정교회의 어용 사제 평신도들에게 환대받은 멕시코 기자단들은 "소비에트 정부와 국민들 덕분에 종교는 이 나라에서 존중받고 있다"고 술회 할 정도였다. 마치 1930년대 서구 좌파에서 소련을 지구상 최초의 남녀 평등 실현, 노동자의 천국으로 묘사한 프로퍼갠더에 낚인것처럼...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절 다시 정교회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탄압당한다. 반정부 성향 사제는 암살되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되어 사라지고, 수도자들은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강제수감 되었으며, 정교회 신자 개인은 직장에서 진급과 급여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 같은 탄압은 브레즈네프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소련 공산당은 그동안의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박멸 정책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존의 반 종교 정책을 전환하진 않았으나 소련 내부에서도 러시아 정교회를 이용하여 슬라브 민족주의와 러시아 역사 문화 부흥이라는 목적으로 교회 탄압의 수위를 낮추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치하에 희생당한 기독교인들의 수는 1200만~2000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출처 #
스탈린과 소련 시대 반(反)종교, 반 기독교 정책에 대해선 다음도 참조 바람.

10.3. 한국북한에서의 평가[편집]

당연히 한국에서는 카를 마르크스, 김일성, 마오쩌둥,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빨갱이들의 두목, 소련의 독재자라는 평가가 있었으며 특히 1950년 6.25 전쟁소련북한에 밀접적으로 군사지원을 하였고 남침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전쟁 이후에는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6.25 전쟁의 원흉[116][117]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한국군의 주적론에 나오는 6.25 전쟁 주역 중에도 당연히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포함되었다.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의 체제를 개발동원체제라 평했는데, 비스마르크 정권과 스탈린 체제가 박정희 정부와 같은 성격의 체제라고 평가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도와주었던 영웅으로 손꼽혔으며 김일성을 북한 주석자리에 앉히고 지금의 북한을 세우게 하였던 간접적 인물(...)로서 남한과는 달리 호의적이고 영웅적인 평가를 받고있다. 40~50년대의 북한에선 집집마다 스탈린의 사진을 걸어놓는것이 흔했을 정도, 그러나 스탈린 사후에 김일성의 1인 우상화가 진행되면서 스탈린의 사진을 걸어놓거나 스탈린의 저서를 읽는것은 금지되었다. 근데 또 스탈린 사후~지금까지도 스탈린의 업적(경제 개발, 중공업 육성, 독소전쟁에서의 승리 등)만큼은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니 이래저래 아이러니(...)

그리고 이제는 대한민국에서도 반공정서가 사그라들고, 밀덕들[118] 및 소빠들이 대거 늘어남에 따라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스탈린은 가장 성공한 독재자이며, 그의 대숙청한고제홍무제, 광종, 태종 등이 벌인 국가를 위한 숙청이라고 평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젠 나름 한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셈.

11. 스탈린을 다룬 저서[편집]

11.1. 국내 정발된 저서[편집]

  • 스탈린 선집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적이 있다. 하지만 현재는 절판.

  •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가 내놓은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란 책이 있다. 우리나라엔 1993년에 들어왔으며 2017년 현재도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

  • 러시아의 반공 역사학자이자 소련 장성 출신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이 지은 스탈린 평전과 <크렘린의 수령들>이 스탈린을 다루고 있다. 문제는 볼코고노프의 스탈린 평전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2차 대전 이전 얘기가 죄다 짤려버렸고 볼코고노프 장군이 친 옐친, 반 소련 사관을 중심으로 매우 편향적인 내용을 많이 저술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볼코고노프의 연구는 언급되면서 근거 제시가 미비하다는 등의 비판이 한번 쯤은 반드시 언급된다. 하지만 유사역사학의 수준은 아니라서 볼코고노프의 관점을 연구한 논문들도 있다. 2017년 현재는 스탈린 평전과 크렘린의 수령들 모두 절판.[119]

  • 로버트 서비스가 내놓은 스탈린 평전이 있다. 맨 처음에 강철 권력이란 부제를 달았으나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이란 새 부제를 달고 새로 나왔다. 하지만 현재는 두 버전 모두 절판되었다.

  •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가 스탈린과 히틀러의 권력작동 방식을 연구한 <독재자들 - 히틀러 vs 스탈린, 권력작동의 비밀>이란 책이 있으나 역시 절판.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가 내놓은 젊은 스탈린이라고 스탈린의 혁명가 시절을 다룬 전기가 있다. 이건 아직 판매되는 중.

  • 2017년 8월 러시아 연방 국립문서보관소 선임연구원이자 러시아 국립고등경제대학 소속의 올레크 흘레브뉴크가 집필한 스탈린 평전인 스탈린: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이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을 출판한 바가 있는 삼인 출판사에서 정발되었다. 90년대 이후 해금된 기밀문서들을 중심으로 스탈린을 전체주의자이며 악랄한 폭군으로 묘사한 저서이다. 한국의 소련사 권위자인 류한수 교수가 감수했다. 하지만 노경덕 박사가 지적한 대로 학계에 누적된 스탈린의 통치에 대한 다각도에서의 분석을 무시한 채 과거의 전체주의자 프레임을 가져와 스탈린 신화를 부수기 위해서만 노력하였기 때문에 무리한 비난과 억측이 많이 섞였단 비판이 있다.

11.2. 국내 비정발된 저서[편집]

  • 2014년 프린스턴 대학의 스티븐 코트킨 교수가 내놓은 스탈린 평전이 있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될 것이라는 이 책은 현재 1878~1928년을 다루는 1부까지 나왔다.

  • 제임스 해리스 교수의 거대한 우랄 산맥, 스탈린의 철도 시리즈 등이 스탈린 시대의 중앙당과 지방당 사이의 관계 및 스탈린 시대의 중공업화 정책을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 아치 게티는 스탈린의 대숙청과 대기근에 대한 2세대 수정주의 차원의 연구를 많이 내놓았다. 로베르타 매닝과 공저한 대숙청에 대한 새로운 관점 등이 대표적인 저서로 나무위키 대숙청 문서는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12. 미디어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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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1세와 스탈린의 카툰.

파일:attachment/이오시프 스탈린/thefallofberlin.jpg

  • 충격과 공포의 개조 스탈린. 대원수께서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강림하신다는 내용으로[120] 우상화가 극에 달한 1949년에 만들어진 선전영화 <Падение Берлина(베를린 함락)>의 엔딩 장면. 다만 스탈린 본인이 아니고 닮은 배우다. 게다가 달려나오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소련의 깃발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체코 등 온갖 국가들의 깃발이 보이며 유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야말로 세계를 발아래 둔 대원수의 위엄이 잘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나?

  • 1992년에 HBO에서 스탈린 전기 영화를 만든 적이 있었다. 로버트 듀발이 스탈린을 나와서 유배 시절부터 사망까지를 다룬 작품인데, 배우들과 실제 인물의 싱크로율이 꽤 높다. 역사영화이고 TV물이어서 극적인 장면은 부족하지만 스탈린의 일생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정도 볼만한 작품, 작중 화자인 스탈린의 딸을 줄리아 오몬드가 맡았고 레닌역을 철십자 훈장에서 찌질 독일장교를 연기했던 막시밀리언 셀이 맡았다. 한국에서는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도 현실과 비슷한 설정으로 나오며, 굉장히 똑 닮은 사람을 정말 스탈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캐스팅 했다. 브리핑 영상 여기서 스탈린은 직접 무능한 부하의 목을 꺾는 터프한 일면도 보여준다.(…) 근데 소련군 엔딩이든 연합군 엔딩이든 둘 다 죽는다.

  • 2009년 중반 스탈린이 군대를 이끌고 몸소 화성인과 대적하는 맛 간 게임이 출시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트레일러에서 나오는 서기장 동무의 화려한 꺾기춤은 그야말로 백미. 그런데 게임 자체는 게임스팟 평점 1.5/10에 빛나는(...) 쓰레기 게임이다. 결국 게임은 판매를 시작한지 불과 3개월만에 디지털상점에서 판매가 중단됐다. 믿거나 말거나 2013년에는 후속작 제작을 위해 킥스타터를 한 적이 있는데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망했다.

  • 이분 역시 모에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자면 카텔린(대제국) 등. 그 외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꽤 정신나간 패러디도 많다.

  •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대체역사물에서는 그루지야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자주 나온다. 다만,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라는 게임에서는 베리야의 부하로 나온다. 베리야는 그루지야의 수령(?)으로, 스탈린은 치안장관으로. 흠좀무? 물론 스탈린이라는 이름도 없다.

  • Wind Blow라는 게임에서는 점점 커져가는 베리야를 이용하려다가 도리어 독살당해 사망한다.

  • 겁스 무한세계겁스 테크노맨서의 멀린-1 세계에서는 마법으로 부활하여 벨라루스의 공산 군벌을 이끌고 있다. 소련은 이미 무너져서 러시아 공화국이 성립된 상태. 하지만 그렇게 주목받거나 하지는 않고 그냥 듣보잡 취급.

  • 동일 작가의 단편 <Steele>에서는 그루지야인 탄압에 못 이긴 스탈린의 부모가 미국행 여객선을 타게 되고, 스탈린은 'Joe Steele'이 되어 충실한 미국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문제는 대공황을 전후로 해서 민주당에 입당해서 배후에서 음모를 꾸며 루즈벨트를 불태워 죽이고서 미국 대통령이 되어서[123][124] 경제개발 4개년 계획[125]으로 미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독재자로 탈바꿈하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지도자가[126] 되고 냉전의 한 주축이 된다는 이야기. 일본은 분단되고 북일본과 남일본의 전쟁 때는 당연히 초반부터 일본에 핵을 날린다. 6번째로 취임해서 1년이 채 못 되어 죽는데, 그가 죽고 난 뒤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가 결국에는 에드거 후버가 대통령이 되어서 전임자 못지않은 폭정을 저지른다.

  • 맨 프롬 엉클(영화)에서는 당 자금을 횡령한 자신의 친구를 시베리아로 보내 숙청시켜버리고 그의 아들에게 평생에 걸친 심각한 트라우마와 신경성 장애를 선사했다.

  • 로버트 해리스의 <아크엔젤>은 사실은 스탈린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스탈린이 죽기 전에 베리야가 그 비밀을 훔치고, 역사의 비밀이 될 뻔했는데 스탈린의 사생아를 떠나서 그가 스탈린과 똑같이 생겼고 어려서부터 철저한 스탈린주의자로 키워졌으며[127] 소련 붕괴로 듣보잡 괴물로 전락할 뻔한 것을 러시아의 어떤 재벌이 인수해서 꼭두각시 독재 체제의 괴뢰로 세우려는 음모를 그리고 있다. 90년대말 현시창인 러시아를 리얼하게 그리고 있으며 그러한 현실체제에서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를 바라는 러시아인들을 꼬집는 작품. 참고로 열린 결말.

  •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미국의 핵전력에 겁을 먹은 것으로 나오고, 그 뒤 해리 S. 트루먼과 비밀 회담을 가져 골치 아픈 존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중국 공산당과 북한을 미국에게 넘겨주는 대신, 서독을 넘겨받기로 협잡한다. 이후 의사와 짜고 사망한 척 페이크를 써서 베리야를 비롯한 부하들을 숙청하고, 트루먼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 러시아인에게는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 하츠 오브 아이언 3에서는 정부 수반으로 등장, 국가 원수는 미하일 칼리닌인데 당연하게도 스탈린의 비중이 더 커서 스탈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주요 장관들이 내각에 앉아 있다. 다른 장관들은 트로츠키주의를 따른다. 다만 다 축출해내고 전부 스탈린주의자들로 때운 내각을 만들 수도 있다. 특성은 헐뜯는 자로서, IC를 5% 감소시키고 여당 지지 +10%를 주는 특성이다. 그런데 소비에트 연방은 투표가 없는 정부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런 이득이 없다.

  • DUST에선 스탈린그라드를 함락당했지만 오히려 하르코프와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을 박살내버렸다. 하지만 영미연합군이 독일군의 VK기술[128]에 데꿀멍해서 휴전 협정을 맺자 피가 거꾸로 솟은 스탈린은 영미연합군과 동맹을 끊고 중국의 마오쩌둥과 합심하여 중국과 소련을 합쳐서 중소 연방(Sino-Soviet Union)을 만든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배신한 영미연합군을 박살내기 위해서 알래스카를 침공하면서 남미의 공산혁명을 지시해서 미국대륙을 압박한다.

  • 알파캣월드 오브 탱크 역사전투 웹툰에서는 히틀러와 함께 단골로 등장한다. 히틀러는 회사방침으로 모자이크 처리인데 스탈린은 그대로 등장인게 차이점.


파일:attachment/이오시프 스탈린/HIT.jpg

12.1. 스탈린주의[편집]

스탈린은 그 특유의 독재정치로 인해 '스탈린주의'라는 독자적인 사상을 낳았고, 이는 오랫동안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현실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보급되었다.

13.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편집]

이들 지명 중 대부분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 원래 이름이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14. 어록[편집]

다만 여기에 기록한 말 가운데 정말로 스탈린이 했는지 의심스러운 말이 많다. 스탈린은 러시아어에 서툴렀고, 유창한 언변을 구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은 대부분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문답식의 자문자답 형식의 문장이 많다.(예를 들어, "자본가들을 왜 타도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했기 때문에[130] 가끔은 다른 작가들의 말(아래에도 있는 레마르크)이나, 창작물 속에 등장하는 스탈린의 말이 스탈린이 한 말로 둔갑한 경우가 많다. 다만 그래도 타고난 문재가 어디 가진 않았는지, 비교적 서툴렀던 러시아어로도 복잡한 내용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쓰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한다. 실제로 중요한 외교전문은 초안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당의 결정을 따르는 일꾼일 뿐이죠."
ㅡ 1931년 영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군은 공격부대다. 붉은 군대는 현대군이다.!"

'이어야한다'가 아니다.


"히틀러라는 친구 굉장해! 정적은 바로 그렇게 다뤄야 해!!"
ㅡ 1934년 돌격대 숙청(장검의 밤) 소식을 듣고[131]


"지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인민들은 남습니다. 오직 인민만이 영원합니다."
ㅡ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연설


"현명한 자는 보는 걸 믿고 겁쟁이는 믿는 걸 본다."


"정직한 외교관은 나무로 만든 철이나 마른 물과 같다."[132]


"어떤 나라의 외무장관이 평화 협정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그 시간에 본국에서는 최신 군함과 전투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133]


"감사하는 마음나 앓는 질병이다."[134]

"예의배려나 앓는 질병이다." 라는 것으로도 전해진다.
웃기게도 스탈린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면 늘 감사하다면서 인사를 했으며,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


"우리의 적들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해버리면 된다."[135]


"가장 큰 기쁨은 적을 골라 세심하게 한 방 먹일 준비를 하고 무자비한 복수의 갈증을 충족시킨 뒤 집에 가서 자는 거야."[136]

트로츠키는 이 말을 카메네프가 스탈린, 펠릭스 제르진스키와의 대화 내용을 말해준 것을 회상한 것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어릴 적부터 조그만 모욕이라도 당하면 장기적 보복 계획을 세밀히 궁리했다고 한다.


"교황이라! 그런데 교황은 몇 개 사단이나 갖고 있답니까?"

1935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라발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과 회담하다가 소련에서 종교 탄압이 줄면 저희가 교황과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스탈린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137] 야사로 이 발언에 대해 교황은 "그(스탈린)는 우리의 군대를 저 위(하늘 나라)에서 보게 될 것이오."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결국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낼 것이다."[138]

스탈린 다음으로 집권한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작정하고 까내렸지만, 세월이 흐른 21세기 러시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이 말은 정말로 사실이 된 것이다.[139]
쿠바피델 카스트로 또한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너희들이 현재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는 말인데...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140]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1941년 7월 3일, 라디오 연설에서.


"붉은 군대에서는 전진할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 당시의 미국 대사 Averell Harriman과의 대화 중.[141]

독소전 초반 독일군의 기세에 놀란 소련군에서 탈영병이 늘어나자 스탈린이 탈영병뿐만 아니라 탈영병 가족들도 모두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한 말이다.


"교육은 누구의 손아귀에 쥐어졌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결정되는 무기다."
- 1937년 9월, 허버트 조지 웰스와의 인터뷰.


"신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지.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야."
-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에게.[142]


"양은 양만의 질이 있지."


"열린 마음은 문지기 없는 요새와 같다."


"인간에겐 막역한 사이란 없다. 막연한 사이만 있을 뿐이다."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된다."

고로 악인을 하자?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된다."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스탈린의 부하들이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스탈린의 명령에 따르자, 그것을 부러워한 처칠이 스탈린에게 비결을 물어보자 스탈린이 답한 대답이라고 한다.


"결국 죽음이란 나쁜 것을 잃는 거다."


"공포 앞에 논쟁이란 없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은 단지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혁명은 적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흘린 피에 익사하는 길을 택하겠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인민은 낙엽과 같다. 하나씩 밟을 때는 바스락거리지만 한데 긁어모아 불을 붙이면 매우 잘 탄다."

낙엽(인민)을 적당히 탄압하거나 한두명만 못살게 굴면(밟으면) 국민들은 저항하지만(바스락거리지만) 군중 다수를 싹 모아 불을 붙이면(집단 학살, 대숙청) 매우 잘 탄다.(죽이는 족족 잘 죽을 뿐더러 대중들은 공포에 겁을 먹게 되어 찍소리 못하고 조용히 사라지게 된다.) 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본격 인간 연료설, 혹은 떨어질 인민은 떨어진다. 뭔가 나무 뭉쳐서 꺾어보라는 일화도 생각나고…


"사단을 시장에서 판다면 사주겠지만 시장에서는 사단을 팔지 않는다. 증원은 불가능하다."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치르던 세묜 티모셴코의 병력 증원요청을 거부하며 남긴 말. 은하영웅전설암릿처 성역 회전에서 라인하르트양 웬리 함대에 털린 비텐펠트에게 하는 말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

현대전에서 포병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그 문구이다. 이를 두고 포병 병과에 복무했던 스탈린이 남긴 일종의 자뻑이란 의도도 있었다는 설이 한 때 있었으나, 스탈린은 기병 정치장교 출신이다. 오히려 기병으로서 포병의 무서움을 정확히 체험하고 이 발언을 남긴 것에 가깝다. 또한 스탈린은 단순히 경험만으로 저런 말을 한 게 아니라 포병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 글을 보면 스탈린은 포탄을 아끼고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를 비판하면서 포탄을 아끼는 것을 범죄로 취급하고 있다. ㅎㄷㄷ 그리고 포병이 주는 심리적 효과와 전천후 능력이 떨어지는 공군의 문제 등, 상당히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 그 교리를 착실히 따른 어떤 군대가 있다


"석유 없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장차 다가올 전쟁에서는, 석유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 1927년 12월 3일 연설에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 1935년 5월 4일 붉은 군대 사관학교 졸업식 연설.

간부가 결정권을 전부 갖는다는 뜻이 아니라 간부 집단의 질적인 상승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소련 정권은 수준미달인 중견간부들 때문에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넌 스탈린도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냐!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143]

그의 둘째 아들 바실리 스탈린이 자신의 성을 쓰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 그리고 누가 공산주의자인 척 말하고만 있는지 보게 될 것이오. (중략)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권력을 얻었으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권력을 행사하는 능력은 부족하오."
- 1928년 시베리아의 바르나울에서, 대대적인 농업 집단화를 시행하기 전에.


[1] 레닌이 지어준 별명으로 개명 전[2] 레닌이 지어준 별명으로 개명 후[3] 원본 사진에는 옆에 루스벨트, 처칠도 같이 앉아 있다.[4] 전자는 스탈린이 집권했을 당시, 후자는 스탈린 사후에 붙여진 별칭이다.[5] 보통 숙청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생명만 끝장내고, 귀양이나 투옥, 수용소행이라는 온건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한 이들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다수였다.[6] 조지아의 고리(Gori) 시에 스탈린의 생가와 박물관이 있다. 고리 시의 중심부 스탈린 광장에는 거대한 스탈린 동상이 스탈린 격하와 구소련 붕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서 있었지만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2010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스탈린 박물관 안쪽에 동상이 남아 있다.[7] 그가 젊은 시절에는 당 내에서 수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조지아 민족주의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8] 단 아예 계통이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 출신인 스탈린과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언어ᆞ민족이 같은 나라이므로 히틀러도 분명히 독일 민족이며 독일인 우월론을 펼치는 데 명분적인 문제는 없었다. 물론 금발벽안의 순혈 아리아인은 아니었지만 사실 독일인 중에서도 금발벽안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다.[9]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10] 허나 이보다 더 많을수도 있음은 결코 부정할수 없다. 서구의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가진 기준에 비춰 보면 이쪽은 그나마 기록 검증, 증언 등을 교차해서 생각보다 높은 정확도를 컷트라인으로 잡아서 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실제 수치보다 낮을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만 해도 이 걸 지네들 공적으로 삼아 그럭저럭 쉽게 잡혀 1100만이 정설이지만, 확인안되는 것 까지 따져 1700만까지도 되잡힌다.하물며 스탈린의 학살은 정치적 이유가 주된 모토였다 보니까 생기는 은폐성이 너무나도 강했던 면이 있으니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게다가 대숙청과 홀로도모르를 제외해도 스탈린 36년 집권기간 동안 장기적으로 이루어진 숙청,소수민족 강제이주,강제적인 집단농장화로 인한 아사 등을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려나갔을지는....[11] 하지만 한국도 이같은 방법으로 부서이름을 작성한다. 기무사의 전이름이었던 방첩부의 이름도 방어할 방 과 첩자 첩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다만 한국어는 한자를 채용해 쓰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뿐이다. 스메르쉬와 유사한 한국어 예시는 사첩또는 사간이다.[12] 서구권 사회주의자들 중에선 스탈린의 용모를 두고 어떤 아이가 스탈린의 자애로운 얼굴을 보고 안기지 않겠는가 하는 오글거리는 찬양을 남기기도 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에 나오는 대목.[13] 당시 20세기 초의 동부유럽인 평균키가 160cm대 초반이었다.[14] 이데올로기 때문에 사치를 부린다는게 쉽지도 않았지만, 스탈린 본인이 사치와 거리가 멀었다. 혹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특성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신학교 출신이었기에 그렇다고 하는데 어찌됐든간에 스탈린은 다른 독재자와 달리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15] 정확히 10년후 독소전쟁이 발발했고, 10년간의 무자비하게 밀어붙인 산업화로 나치독일에 승리했으니, 스탈린의 예언은 들어맞았다.[16] 특히 중화학 공업 분야.[17] 그리고 이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개발도상국이 모방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18] 미국이 영국의 공업생산을 추월하면서 세계1위의 총생산 국가가 된게 1870년대였다. 1차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강대국의 하나였지, 초강대국은 아니었다.[19] 소련은 스탈린 이후 G2로 평가받은 바 있지만, 러시아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도 그 위치에 이른바가 없었다. 스탈린 시절과 그 사후 40년 정도가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보여준 가장 전성기였다. 19세기에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패퇴시키기는 했지만, 당시 양대 초강대국은 프랑스와 영국이었지, 러시아가 아니었다. 현재 냉전시절 소련의 위치를 가질 수 있는 나라로 가장 먼저 꼽히는 나라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다.[20] 60년대까지도 소련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대부터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한다. (70년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3.7%였다.) …그래도 소련은 붕괴되기 직전(1990년)에도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았다. 1990년 당시 소련의 1인당 GNP는 9300$ 대였지만 한국의 1인당 GNP는 5800$ 대였다. 지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반밖에 안되는 러시아를 보면 소련보다 얼마나 몰락했는지 알 수 있다. (이걸 역으로 뒤집어 본다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했을때 부작용이 심각했다는 얘기도 된다.) 덧붙여 저 당시 서방의 국민소득은 1만달러 ~ 2만달러였다.[21]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소련이 해외 시장이 봉쇄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인구가 있었고 드넓은 땅에서 자원이 쏟아져 나왔다. 또, 소련은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기 이전 제정시절에는 GDP만 따지면 프랑스보다도 더 높은 세계 5위였다. 유럽에 비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세계적으로 강대국 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예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또, 내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것은 맞지만 원래 역사적으로 그런 쑥대밭 국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GDP 성장률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2차대전 이후 50~60년대의 전세계가 GDP 성장률이 쩔었던 것은 전후 수습의 탓이 크다.[22] 박정희가 이를 벤치마킹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이정우' 교수의 일방적인 주장인데, 그건 어떤 학술적인 검증이 된 게 아니라 그냥 신문 기고이고 개인의 의견일 뿐이므로 믿을만한 레퍼런스라 할 수 없다.[23] 사실 이건 소련-중국간의 갈등과 소련의 붕괴에 따른 석유 수입통로 봉쇄 등이 원인이긴 했다. 하지만 체제 내의 무능으로 동력을 잃은 것도 역시 사실. 사실 남한이 그러했듯 북한 역시 "닥치고 광물이나 파내시고 내수나 잘 돌리시죠"라는 식으로 소련의 간섭을 받고 있었기에 중공업화 자체는 타당하긴 했는데...중공업화 자체는 좋은데 원조 없이는 살 수 없던 경제였던지라 망했어요. 실제로 소련이 망하고 북한은 싸게 원료를 얻을 수 있는 공급처와 물건 사주는 판매처가 없어져 찰지게 망했고 90년대 고난의 행군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24] 김일성 당시에 경제막장의 이 보이긴 했지만 김일성이 사망하는 1994년까지는 북한 경제가 그런대로 돌아가긴 했다. 적어도 김일성 시절에는 굶어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인 1994년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에선 커다란 식량난이 발생하고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지 황장엽을 포함한 나이가 지긋한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김정일천하의 개쌍놈으로 욕하지만, 김일성에 대해선 그다지 비난의 강도가 심하지 않다.[25] 물론 이후에 부하린은 농업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숙청되었다.[26] 쿨라크는 단순히 부농이란 뜻보단 계급의 적으로 통했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제정 러시아 시대 때에도 반동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칭했고 적백내전 당시 붉은 군대에 식량을 숨기거나 병력 제공을 거부하거나 백군과 내통하는 부농들을 뜻한다. 쿨라크 판정 기준도 한심한 게 잘산다는 기준이 자기땅에 도와 줄 일꾼을 둘 이상 쓰거나 가축이 3마리 이상이면 부농이다.(1927년 소련 재무부 기준) 나중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폴란드인이면 반드시 쿨라크다란 소리도 나왔다.[27] 부하린도 집단농장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28] <러시아 역사>(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и народов России) (신아사) 문명식 번역.[29] 다만, 농촌의 잉여 역량을 도시로 흡수하는 과정 자체는 공업화 과정을 거친 모든 나라가 겪은 과정이다. 공업 지역에 밀집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한 동시에, 농업 구조를 개편해서 농업의 노동력 효율을 높임으로써 생기는 잉여 노동력으로 공업 노동력을 충당해야 하니까...멀리는 인클로저 운동이 이러한 공업을 위한 농촌 착취의 효시로 꼽히고, 가까이는 60~80년대의 한국에서도 추곡수매의 저가정책을 통해 농촌 착취는 일어났다. 다만, 초고속 공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가 지극히 격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스탈린 당시의 소련같은 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30] 이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도 농민의 소 부르주아지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공장 노동자야 어차피 공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이니 국유화가 되건 말건 큰 불만이 없지만 농업은 가족이 소유한 땅을 가족 단위로 경작할 수 있으니 집단농장화를 곧 자기 땅을 빼앗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농민들에게 자신이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야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자 조직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땅과 자유.[31] 니얼 퍼거슨(하버드 교수) 著 <증오의 세기>[32] 이 당시 농담으로 '볼셰비즘(20년대)와 공산주의(30년대)의 차이는 볼셰비즘은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엔 지방엔 식량이 없는 것'이란 소리도 나왔다.[33]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도 그 해 러시아 농사가 흉작크리가 겹쳐서 전 세계 곡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34]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영토이고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어 있다.[35] 사실 북한이 이상할 정도로 막장인거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그런데로 무난하게 사는 편이었다. 문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공산국가는 북한인데 북한이 워낙 막장이라서 소련같은 다른 나라도 죄다 경제가 막장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36] 신혼부부들은 꽤 오랜 시간을 단독주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려야했고, 배정받기 전에는 한국처럼 여러 가구가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37] 아이러니하게도 혁명 1세대들은 자본가의 착취를 직접 겪었지만, 2세대들은 자본가에 의한 착취와 해고의 공포를 겪지를 않으니 나태했던 것이다.[38] 대체로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저렇게 생각하며, 푸틴도 저런 식으로 스탈린을 옹호했다.[39]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60~70년대 중공업화 기간을 거치면서 농촌이 거의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공동화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영국도 산업 혁명 당시 농촌의 붕괴로 인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겪었다.[40] 브리태니커에 "Disguised unemployment"를 검색해도 나오지만, 전근대 농촌의 경작지들에서는 사실상 일손이 남아도는 바람에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 이들까지 해당 경작지에 소속된 농민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아서 공식적으론 실업자가 아니지만 사실상 생산성 향상에는 아무런 기여가 없는 인구가 많고 이를 한자어로는 "위장실업"이라 한다.[41] 미국인 기자가 방문하고선 강철 생산 19톤당 인민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철생산을 위해선 베르됭 전사자(약 70만) 정도 사람이 희생 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42] 트로츠키조차도 군비확충을 위한 공업화를 구상하긴 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무지막지한건 아니었지만.[43] 혁명 직전의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1차대전의 와중에 기본적인 무기인 소총조차 모자라서 한때 적국이었던 일본에서 38식 소총을 대거 사와야 했을 지경이었다.[44] 냉전 시절에 한국에서 독소전을 설명한 자료들에서는 이 부분은 빠지고 소련군을 단지 물량으로만 밀어 붙이는 야만적 군대로 묘사하곤 했다. 사실 독일군과의 교환비로 치면 소련군이 대부분 열세였기에 아주 부당한 평가까지는 아니지만, 뭐 어쨌든 상대 전차에 전차 물량으로 밀어붙이려면 나도 전차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출처] Testing Early Soviet Economic Altematives", Slavic Review, Surnmer 1991, pp.251-267., 1920년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부하린적 대안의 문제, 권희영[46] 스탈린 시기에 도입된 노동영웅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회사에서 쓰는 우수사원 모범사원제도와 비슷하다.[47] 다만 그 당시 중국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으로 나뉘어 일본군이 침공하는 가운데서도 내전을 벌이고 정부가 각 당의 수뇌부로 이원화 되어있으며 국민당이 나치 독일과의 밀월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심하게 손실을 본 이유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값도 못하고 6주만에 캐발린 다음 국민 다수에 의해 비시 프랑스까지 수립되고 독일의 속국화되어 전범짓을 하는 가운데(이를테면 홀로코스트협력 등) 자유 프랑스와 소수의 레지스탕스만이 대독전선을 형성했던 프랑스보다 외교적 혜택을 못 받은건 좀 너무한 처사이긴 하지만서도...[48] 불필요한 간섭을 줄인 것이지, 여러 장치를 통해 장교단을 단 철저히 휘어잡고 있었다.[49] 그 유명한 히틀러 관련 영화인 몰락에서도 이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50]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 고문으로 거짓진술, 연출된 간략한 공개재판, 판결즉시 처형.[51] 실제로 서구나 아시아나 스탈린vs히틀러 라는 의식은 매우 넓게 퍼져있다. 실제로 지정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숙적이라는건 사실이고.[52] 이 때문에 히틀러의 명령을 행정기관에 하달하던 마르틴 보어만이 실질적인 독일의 통치자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53] 스탈린은 전형적인 1인 원톱 체제를, 히틀러는 2인자들의 불꽃 터지는 충성경쟁을 통한 1인 권력의 강대화를 노렸던 것이다. 참고로 2인자들의 박터지는 충성경쟁을 통한 1인자의 권력 강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게 화가 되어 암살당하지만... 히틀러는 그것을 계산하고 충성경쟁을 유도했었다. 책 <악당의 명언>에서는 진정한 악당의 부하관리 방식이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54] 특히 프랑스 침공과 관련된 책만 봐도 알 수 있다. 전격전의 전설같은[55] 알다시피 국제연합불과 5년 뒤에 그 한계가 드러났고, 동유럽에서의 자유선거 약속은 말뿐이었으며 철의 장막 너머에는 죄다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정부가 들어서게 된다.[56] 이 언싱커블 작전은 90년대 비밀이 해제되면서 수면에 나왔지만, 소련은 당시 스파이망을 동원해 이런 처칠의 의도는 대충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스탈린 자신도 처칠을 매우 안좋게 생각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 나온다.[57] 이런 평가는 덩샤오핑이 훗날 마오에 대해 그대로 다시 써먹는다.[58] 당시 중앙아시아와 만주접경에서는 중소 양군 수백만이 일촉즉발의 태세로 대치중이었다.[59] 원래 김일성 성격이 이렇다. 감히 본인 앞에선 하지도 못했을 소리를 지껄이면서 허세를 부리는 것. 어디까지나 국내용 허세인데 이 허세의 대상엔 스탈린, 마오쩌둥, 피델 카스트로까지 있었다. 한번은 카스트로가 피그스만 침공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서 집권한 것이 사실은 자기 덕분이라고 주접 떨다가 주 쿠바 북한 특명전권대사가 그게 진짠 줄 알고 카스트로에게 깝쳤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60] 이에 관하여 한 말이 앞서 보듯이 "나는 첫 아내를 묻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 또한 묻었다." [61] 실제로 이 시기의 청년 스탈린을 다룬 전기 '젊은 스탈린'은 그야말로 어지간한 첩보물 뺨친다.[62] 자주 도는 일화는 두번째 아내가 아는 사람이 굴라그로 추방될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의 아내를 통해서 줄을 놔서 추방을 면하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강철의 대원수는 추방될 사람과 아내에게 줄을 놓는데 가담한 사람 전원을 처형시켰다고 한다. 냉전 때 돌던 이야기니 신빙성은 얼마나 있을지?[63] 손자 예브게니 쥬가슈빌리 역시 예외였다.[64] 스탈린의 아들이 전향한다면 아마도 소련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65] 저명한 스탈린 연구자인 올레크 흘레브뉴크 교수는 스탈린이 죽은 야코프의 유족들에게 전후에 대접을 전보다 잘해준 것에 대해서 야코프가 의연한 태도를 보인 것이 전후에 입증된 것 때문이 아니겠냐고 추정한다.[66] 스탈린 젊었을 시절 사진을 보면 굉장한 훈남이었는데, 이 시절에는 턱수염을 길러서 곰보 자국이 가려진 덕도 있었다. 2차 대전 연합국 지도자 중에서 처칠 또한 젊은 시절에는 날씬한 몸매의 미남이었다. 그러나 30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비만과 탈모로 인하여 급속히 노화하기 시작하더니 말년에는 우리가 잘 아는 그 모습이 되었다. 이미 31살 때에는 앞머리가 완전히 벗겨져 나갔다.[67] 주가시빌리(Джугашвили)라는 조지아식 성을 붙여준 첫째 아들과는 달리 두번째 아들은 자랑스럽게 "스탈린"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68] 2000년대 이후로는 천하의 개쌍놈이나 할 막장짓이지만 사실 우리나라도 90년대까진 이랬다. 그땐 극장에서 영화보며 담배피고, 택시기사가 손님 태우고 운전하며 담배피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담배피고, 강의실에서 교수가 강의하며 담배피던 시절이라...[69] <크렘린의 수령들>에 따르면 레닌은 1915년에 지노비에프에게 보낸 자신의 서한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코바의 성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리샤(지노비에프)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레닌은 그에 대해 재차 카르핀스키에게 묻고 있다. "부탁이 있습니다. 스티프코나 미하에게 코바의 성을 알아봐 주십시오. 우리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시프 드주…뭐라고 했는데…"[70] 스탈린은 이 편지를 죽을 때까지 자기 책상 서랍 안에 보관하고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다. * 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메드베데프 알랙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71] 참고로 부하린은 러시아 혁명에 동참한 혁명 영웅중 하나다. 레닌과 설전을 벌일 정도로 수준 높은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의 유언장에 언급되는 차기 국가원수 후보자이기도 했다. 대숙청 말기에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이후 1988년 복권됐다.[72] 여담으로 몰로토프는 망치라는 뜻이 있다.[73] 스탈린이 치매에 걸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노년에 치매에 걸리면 증상 중 하나로 갑자기 페도필리아 증세를 보일 수 있다고 한다. 당신들의 조국의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가상역사소설 아크엔젤이 스탈린의 어린이 사진 수집을 중요한 플롯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런 페도필리아설의 신빙성이 낮은 것이, 아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격심한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누군가에 대한 흑색선전을 하면 꼭 나오는 것이 아무개는 페도였다는 이야기라서...스탈린 페도설, 베리야 페도설, 마오쩌둥 페도설이 다 있는데, 뭐 공산당이 무슨 페도당도 아니고?[74] 문제는 이 설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건 스탈린이 나데즈다의 부모와 처음 알게 된게 나데즈다가 3살때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내연설은 사실 당대부터 있지만 나데즈다가 딸이라는 건 조금만 봐도 성립되기 어려운 일.[75] 김일성도 비슷한 이야기가 도는 걸 보면 냉전시 흑색선전은 어디나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나데즈다가 자살한 방에서 나온 문건이 당시 감옥에 있던 고위 볼세비키 당원이 퍼뜨렸던 스탈린 흑색선전에 대한 문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비밀 서류도 아니었고 스탈린이나 기타 당원들도 사건 자료의 목적으로 보던 문건이었고 무엇보다도 스탈린 자신이 읽다가 만 것이었다![76] 전 버전에서 농아를 숙청했다고 잘못 기술된 레닌그라드 사건(1950)은 농아학교의 교사진이 연루되어 숙청된 사건이다.[77] 이중에는 스탈린이 집권한 후에 양육비를 청구했다가 사라져버린(...) 사람들도 있다.[78] 엄밀히 말해서 히틀러의 경우, 연설 자체의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제스처, 말의 톤과 투 특히 무대설정이라는 연설 내용 외적인 요소를 통해 청중들의 감정적 자극을 이끄는데 능숙했다. 요즘 언어로 청중들이 원하는 "사이다"적 발언과 메세지 내용을 전달하는 능력, 카리스마적 선동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 실제로 말이 산만한 경우가 많다. 또한 연설능력 자체가 뛰어났던 인물은 그의 친구 중 하나인 베니토 무솔리니.[79]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스탈린의 연설능력이 떨어졌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대중 앞에서 많은 연설기회를 가졌고, 그때마다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설의 대상인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때때로 멘셰비키나 지식인들의 달변에도 불구하고 연설 내용에 대해 어려워하거나 쉽게 흥미를 잃었는데, 그럴 때쯤 등장하여 지식인들의 달변보다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연설을 통해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스탈린의 장점이었다.[80] <스탈린>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말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족을 남겼다.[81] 실제로 이후에도 조, 혹은 조 아저씨는 소련의 상징이 된다. '샘'과 '조'는 냉전기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특히 수학자 폴 에어디쉬는 자신의 수수깨끼같은 말버릇 중 하나로 이런 말을 애용했다.[82] 카이로인지, 테헤란인지, 포츠담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카더라통신이니 그렇겠지만.[83] 리처드 오버리의 저작에 따르면, 실제로 이런 과부하가 걸려서 철도 수송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는 곧장 숙청당했고 바로 신입이 들어와서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 신입도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숙청당했다.[84] 원래 성이 브론슈테인으로, 전형적인 유대인 성이다.[85] 초창기 이스라엘의 무기들은 체코제가 많았다. 근데 이스라엘에 무기를 팔라고 한 것은 스탈린의 지시였다.(...) 이스라엘 측에서 먼저 스탈린에게 중동에서의 소련 영향력 확대를 돕겠다면서 지원을 요청한 것. 스탈린은 이를 반신반의하면서도 받아들였다가 이스라엘의 친미화를 보고 이스라엘과 단교하고 엉뚱한 사람들을 조졌다.(...)[86] 스탈린 외에도 막심 고리키, 유리 가가린, 게오르기 주코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 소련의 쟁쟁한 위인들이 다수 묻혀있다.[87] 스탈린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88] 사실 미국은 소련 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국 역시 소련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원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모른척 했다고 한다.[89] 1928-1995. 정치장교이자 구소련 심리전부서의 책임자였으며 장성까지 승진했던 인물로, 후일에는 역사가로서 맹활약하였다. 만나본 사람의 평가에 의하면 꽤나 공산주의 사회의 고위층답지 않게 자유롭고 유연한 사상을 가졌다고 하며 나중엔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근데 이사람은 아버지가 대숙청 때 숙청되었기 때문에 원래 공산주의를 좋게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소련은 의외로 연좌제가 느슨했던 듯.[90] 우리나라도 의외로 예외는 아닌데 왕이 이러기도 했다(...). 차이점이라면 꽐라가 되는게 목표라서 왕과 주변 인물들은 춤은 커녕 몸겨누기도 힘들어 했다랄까.[91] 레드얼럿 1편의 소비에트 미션9 오프닝 컷신에서 이게 패러디되었다. 그라덴코 장군과 함께 보드카를 들이키며 화기애애하게 유배문서에 서명했지만 다음미션에서 쿠코프와 정부인 나디아에게 독살당했다.[92] 독소전쟁 초반의 병크대문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일반적으로 그때만을 제외하면 스탈린의 전쟁수행 지도는 모범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는 서구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리처드 오버리著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군사적인 면은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인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민간부분에서 독재권력을 이용하여 모든 국력을 전쟁에 효율적으로 투사하도록 지도했는데, 군사작전에 개입하여 말아먹거나 혹은 행정을 팽개친채 괴링이나 힘러 등의 중간보스들의 전횡을 방치하여 국력을 낭비한 히틀러와 비교하면 스탈린의 성과는 분명하다.[93] 이것이 자주 비교되는 인간백정 라이벌 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총통독일을 완전히 말아먹었고, 주석중국을 완전히 말아먹지는 않았으나 엄청나게 퇴보시킨 반면, 스탈린은 피바람을 일으켰지만 어쨌든 그 대가로 소련을 엄청나게 발전시키기는 했다. (후술하겠지만 스탈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조차도 스탈린이 소련이라는 "국가"를 크게 발전시켰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 일색인 히틀러, 긍정적인 평이 없진 않으나 자국을 제외하면 부정적인 평이 더 많은 편인 마오쩌둥은 어느 정도 후세의 평가가 정리된 반면 스탈린은 아직까지도 긍정적인 평과 부정적인 평이 혼재되어서 이런저런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94] 스탈린이 그것들을 시작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는, 레닌, 트로츠키 등 전임 지도자들이 그런 수단들을 먼저 개발하고 사용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KGB, 국가감찰기구, 수용소 등을 확실하게 제도화시키고 심지어 전세계의 공산주의 정권들에 퍼트리기까지 한 것은 스탈린의 책임이 맞다.[95] <왜 러시아는 여전히 스탈린을 사랑하는가(Why Russia Still Loves Stalin)>[96] 아이러니 하게도 이사람은 트로츠키주의자이며 트로츠키와 같은 유대인이다. 그리고 이사람이 쓴 트로츠키 전기 시리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악하고 교활한 스탈린이 착한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고 암살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면에에서는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특이할 만하다. 그 흐루쇼프조차도 스탈린의 공업화가 없었으면 소련은 압살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97] <스탈린, 러시아인들의 영원한 우상>. 심지어 러시아 공산당은 스탈린이 1등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조작 의혹을 제기했을 정도이다.[98]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99] <러시아 청년들: 스탈린에는 긍정적, 이민자들은 나가야: 설문조사(Russian youth: Stalin good, migrants must go: poll)>[100]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101] <스탈린시대 러시아는 존중 받았다>[102] 고르바초프는 스탈린과 정반대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103] <메드베데프가 스탈린의 옹호자들을 비난하다(Medvedev blasts Stalin defenders)>[104] 다만, 메드베데프는 당선 직후 푸틴에게 통수권을 넘겨받으면서 72년간 지속되어온 전통을 기념한다는 내용의 축사를 남겼는데, 이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6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인정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치 독일 시절부터 통수권 위임식이 시작된 독일에서 만일 총리가 비슷한 전통의 기념 운운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하면...[105]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106] 스탈린 장남의 아들로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했던 것. 만약 장남 야코프가 살아있었다면 야코프와 함께 아버지를 디스했을 것이라고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기는 하지만, 스탈린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드는데 어느 정도 일조를 했다는것을 뻔히 아는데도, 소송을 제기한것을 보면...(물론 야코프랑 예브게니랑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그리고 야코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것과는 다르게, 스탈린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탈린이 아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관계가 소원해 보였지만, 둘이 부모자식으로써 대단히 사랑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자기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주코프에게 비밀리 명령을 하달하고, 아들도 아버지를 위해 적에게 투항해서 편하게 사는것을 포기하고 포로로 살다가 죽은것을 보면 알수 있다.[107] <스탈린 손자, 조부 명예훼손 소송 패소>[108] 그리고 이걸로 폴란드에서는 입국금지도 먹었다.[109] 흐루쇼프가 독선적 태도로 정치를 일삼다가 강제은퇴한 이유도, 무능하고 우유부단하지만 온화한 성격의 브레즈네프가 삼두정치에서 결국 정권을 쥔 이유도 스탈린 시대의 피비린내나는 참혹한 정치를 더이상 공산당 스스로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0] 정확히 말하면 노멘클라투라 계층은 스탈린이 관료독재를 확립할 당시의 부와 권한은 계속 누리고 싶었지만, 동시에 절대권력자의 눈에 잠깐 어긋났다는 이유로 파리목숨이 되는것은 바라지 않았다.[111] 수슬로프나 그로미코등을 비롯한 온건파들과 우스티노프, 안드로포프 같은 강경파들의 입장이 좀 다르긴 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같은 관료계층이 정치국의 중심을 잡았고 그들은 스탈린을 안정과 발전의 측면에는 받아들였지만, 다른 의미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12] 독소전쟁 초기 동유럽 국가들은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여겼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이유 불문의 잔혹한 학살뿐이었다.[113] <우크라이나 법원, 대기근 제노사이드에 대해 볼셰비키의 죄를 묻다(Ukraine court finds Bolsheviks guilty of Holodomor genocide)>[114] <우크라이나, 스탈린에 비판적인 입장 고수(Ukraine stands by its view of Stalin as villain)>[115] <스탈린 닮아서 행복한 사나이>[116] 물론 직접 개입한 적은 없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스탈린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라는 의견도 많이 있었고 전쟁을 승인해준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은 미국과의 전쟁을 우려해서 김일성을 말리기는 했고 개입도 중국과 북한의 징징거림에 어쩔 수 없이 소수의 조종사들을 투입하는 선에서 그친만큼 원흉이라고 보기는 조금 애매하다.[117] 이 스탈린 원흉설은 한국에서 극우, 종북 모두가 잘 써먹고 있다. 극우진영에서는 빨갱이 두목이라서, 종북진영에서는 김일성이 그랬을리가 없어! 라는 논리로..[118] 특히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서 나치의 패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점에 주목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119] 단 볼코고노프의 스탈린 평전은 riss에서 서비스하고 있어서 정 읽고 싶다면 거기서 볼 수 있다.[120] 스탈린은 전시 당시에도 전선시찰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건 흡사 나치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 오프닝 장면 같다.[121] 사실 무속(무교(巫敎))에선 '죽은 사람 중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으로 삼아 숭배나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데, 인지도나 파괴력을 봤을 때엔 스탈린 역시 신으로 섬겨질 여지가 있다.[122] 다만 문제는 송아람이 과학 사이드에 서서 스탈린을 스탠드로 소환, 신령을 박살낸 것인데 신령이라는 초과학현상을 부정하는 주제에 그에 버금가는 초과학현상인 스탠드를 부려대며(스탈린 뿐만 아니라 찰스 로버트 다윈도 스탠드로 등장한다.) '과학도로써 유물론에 역행하는 것들은 묻어버리겠다.'는 모순이 개그포인트. 또 이 장면을 곱씹으면 우스운게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는 정도만 제외하면, 그 학문적 맥락이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 사실상 상통한다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바닥에 깔린 사조가 앞의 송아람의 대사에서 언급된 유물론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무속, 사회사상, 과학론 등을 절묘하게 연관시켜 만든 개그포인트라 할 수 있다.[123] 그것도 6번이나 해먹는다. 참고로 1944년부터는 아예 자기 혼자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해서 당선되는 기염까지도 토한다.[124] 이때의 소련 서기장은 레프 트로츠키, 심지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여기서는 트로츠키그라드 전투로 나온다.[125] 연방대법원에서 관련 법안 몇 개를 위헌이라고 하자 에드거 후버를 시켜 판사나 정치인 몇몇을 나치 독일 스파이로 몰아 숙청하고, 알래스카굴라그를 설치해서 사회주의자나 반대파 인사들을 나무 거름으로 만들어 버린다.[126] 올림픽 작전실제로 시행한다. 다만 핵은 Steele의 독재에 회의를 느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보내지 않아서 유럽전선 종전 후 개발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중에 발각되자 아인슈타인을 포함해서 애꿎은 유대인 과학자 여럿만 골로 보낸다.[127] 배우는 건 하나같이 스탈린의 철학과 연설문, 저서뿐이다.[128] 이 VK 기술을 연구하던 혈십자 군단이 히틀러와 나치당을 제거하고 나치즘이 덜했던 장성들로 독일을 이끌게 하였다.[129] 소련 당시 소련의 최고봉.[130] 사실 기독교 교리문답식의 자문자답 문장은 스탈린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이후의 혁명가들이 굉장히 선호하던 형식이다. 일단 기독교문화권에서 교리문답은 대중들한테 상당히 익숙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한테도 따라 읽기도 좋고, 외우기도 좋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강조하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구전으로 퍼트리기엔 최적의 형식이다. 사실 공산당 선언마르크스가 싹 정리해서 새로 쓰기 전의 초안은 '공산주의자의 교리문답' 형태로 쓰여졌었다.("당신은 무슨 주의자입니까? 저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자는 무엇에 반대합니까? 공산주의자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반대합니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이유 중 하나가 트로츠키처럼 말 많은 혁명가들을 혐오하는 러시아 인민들의 성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131]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132]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133]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134] The Memoirs of former Stalin's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135] The Political Report of the Central Committee, The Fifteenth Congress of the C.P.S.U.(B.) (7 December 1927)[136] 1923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잡담 중. Trotsky's Diary in Exile, 1935, p. 64.[137] 1차 출처, 2차출처 Churchill, Sir Winston. The Gathering Storm : The Second World War Vol.1. Houghton Mifflin, 1948(Houghton Mifflin Harcourt, 1986). p.121.[138] 1943년, 몰로토프와의 대화에서. 출처: Felix Chuev's 140 Conversations with Molotov Moscow, 1991.[139] 자주 비교되곤 하는 마오쩌둥은 "살아서 비판받지 않은 자, 죽어서 비판받을 것이다."라는,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른 말을 한 적이 있다. 웃기는 것은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말이 현실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의 말 또한 마오쩌둥 사후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이 마오를 평한 '공7과3'이 현재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사실상의 공식적인 견해이며, 현대 중국인들도 3의 과오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있다.)[140] Said in 1923, as quoted in The Memoirs of Stalin's Former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141] 출처: Truth about the Great Patriotic war by B. Sokolov (in Russian)[142] 출처 - Fallen Eagle: The Last Days of the Third Reich (1995) by Robin Cross, p. 21[143] 젊은 스탈린, 49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