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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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프로필 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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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기록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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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이름

이승만 (李承晩, Syngman Rhee)[2]

출생일

1875년 3월 26일[3]

출생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사망일

1965년 7월 19일 (90세)[4]

사망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타네리아요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재임기간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2px-Syngman_Rhee_Signature.svg.pn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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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6세손[6]

부모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말란

형제자매

3남 2녀 중 둘째

배우자

박승선[7], 프란체스카 도너

자녀

친아들 이봉수[8], 양아들 이강석, 이인수

학력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박사

병역

해당사항 없음

종교

개신교 (기감)

신체

165cm, O형

십이지

돼지띠 (을해년)

약칭

우남 (雩南)


1. 개요2. 생애
2.1. 조선대한제국 시기2.2. 일제강점기 초기2.3. 임시정부 대통령2.4. 임시정부와의 갈등2.5. 태평양 전쟁2.6. 해방 정국2.7. 6.25 전쟁
2.7.1. 일본망명시도 논란2.7.2. 암살 미수
2.8. 전후 제1공화국
3. 선거 이력4. 묘소5. 평가6. 박정희와 이승만의 관계7. 매체8. 여담9. 관련 인용구10. 관련서적
10.1. 비전문가들10.2. 전문가들의 저서
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1·2·3대 대통령.[9]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호는 우남(雩南)이다. 1900년대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10]를 수여받았다. 이러한 행적에 따라, '리승만 전 대통령' 이외에도 '우남' 혹은 '싱먼리 박사'[11]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선에 태어나 대한제국의 중요 관직을 얻고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주로 미국에 머물며 온건한 독립 운동을 하였다. 광복 이후 신탁통치 반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11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부 수반을 지냈고[12]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2. 생애[편집]

2.1. 조선대한제국 시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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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 무의공 이순신의 방계 9대손.[13][14]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金海金氏, 1840년 ~ 191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경선은 이승만에 의하면 "그는 부자였으나 재산을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고 한다.

참고로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중에서 자신이 이승만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면 헛소리로 생각하자. 양자로 들인 이인수 씨는 양녕대군파 중에서 이승만 아들 항렬에 해당하는 자손이지만 사실 이인수 씨는 양녕대군파 중에서 자신과 같은 항렬[15]대의 사람들 중에서는 이승만과 거리가 가장 멀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서2남 장평도정의 후손이고 이인수는 적2남 함양군의 후손이라 실제 촌수는 33촌이기 때문이다.[16][17][18] 현재 양녕대군의 후손들은 이승만과 아무리 가깝다고 한들 최소 12촌[19]에서 20촌 사이이고 대부분 양녕대군의 후손들은 30촌이 넘어갈 정도로 촌수가 멀기 때문에 결국 이승만과 가장 가까운 부계는 사실상 없다. 참고로 이승만의 누나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20]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하였으며,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구한말 정치지형의 변화로 독립협회가 불법화 및 강제 해산당하면서 잠적하였다. 이 와중에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이유는 그 전단지 내용 중 일부가

황제는 나이가 많으니까 물러나고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한다.[21]

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협회 시기 이승만은 박영효 계파와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전단지의 내용이 박영효 내란 음모 사건에 연결되었다. 이 때문에 5년 7개월간 투옥되었고, 다시 외부에서 권총을 들여와서 탈옥을 했다가 도중에 잡혔고 종신형이 내려졌다.

감옥에 도서관이 생기도록 하고 개신교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간수 및 동료죄수들에게 개신교를 전도하고 독립정신이라는 책까지 썼다. 다만 김옥균을 저격했던 홍종우가 그를 취조해서 목숨은 건졌지만, 이승만에게는 고문이 가해졌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서 이로 인해 후유증을 얻고 살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안면근육경련이 바로 이 때 생겼다는 말도 있다.

이런 고문은 이승만의 평생에 걸친 조선 왕조 혐오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훗날 하와이에서, 현지 한인들에게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고종이 아니라 일본에게 잡혀서 고문당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는 주장도 있다(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등). 이 주장의 직접적 증거는 없다.

다만 이 의혹이 어느정도의 개연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승만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서술한 KBS2011년 다큐멘터리 "초대대통령 이승만"에서 '고문받은 기억이 나서' 손을 후후 불었다는 증언은 미담처럼 반영되었다. # 영상 주소 이승만기념사업회에 게시된 중앙일보의 연재글 <6·25 전쟁, 1128일의 기억>에서도 마크 클라크 유엔 사령관의 증언으로 그의 습관을 설명하며, "초기 독립운동을 펼쳐갈 무렵 일본 관헌(官憲)에게 붙잡혀 고초(苦楚)를 겪은 일이 있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손가락을 불로 지지는 고문을 당해 결국 손에 화상(火傷)을 입었다는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적어도 이승만 본인은 아니더라도 그런 주장이 사실로 통용되었던 것은 근거가 있다.# (244) 이승만의 손가락

이승만은 러일전쟁이후 미국과의 연결고리를 원했던 민영환을 비롯한 고관들의 끈질긴 주청으로 1904년에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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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을 즈음하여서는 미국으로 건너가 일제의 침략행위를 알리고자 하였던 민영환의 사절로 미국으로 건너가 이를 호소하였으나, 미국은 이미 일본과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기라 별 성과가 없었다.[22] 이후 미국에 머무르며 공부하며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조지워싱턴에서 학사, 하버드대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과 국제법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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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은 훗날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행정학자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이었는데, 윌슨은 이승만을 아끼고 좋아했다고 한다. 우드로 윌슨은 흑인은 열등인종이라 말했던 노골적 백인 우월주의자였는데 아시아인은 그리 안 본 모양이다. [23] 항상 이승만을 미래 조선의 지도자가 될 거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프린스턴 대학교의 ‘우드로 윌슨 스쿨'에 ‘이승만 홀(Syngman Rhee·1910 Lecture Hall)’이라고 하는 대형 강의실이 있다.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박사 학위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박사 학위인데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승만 '박사'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였으며, 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 "이승만 박사"라고 되어있다.

재학 중 재미 교포들이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미국 법정에서 통역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자 3천 달러의 보수를 요구하였다. 참고로 이후 이 사건을 담당한 미국인 변호사 수임료가 4천 달러였다. 이민자들이 그 돈을 모아 줬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외면하였다. 이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당시 이승만은 하버드 대학 석사 학위에 재학 중이라 미국 동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장인환 전명운의 재판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가난으로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했고 이승만의 아들은 돈이 없어 병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이승만에게 학업을 중도에 때려치고 서부까지 날아와 재판의 통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은 무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미국 내 여론이 일본에 우호적이었단 걸 알아야 한다(가쓰라-태프트 밀약). 살해됐던 외교관인 스티븐스는 미국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자국 외교관이었다. 이런 미국의 고위 공관을 일개 듣도 보도 못한 조선이란 나라의 두 명이 사살했다니 미국 내 여론은 조선인을 처벌하라며 들끓었다(어디 아프리카에 있는 이름도 처음 듣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외교관을 살해했다 생각해 보자 자국 여론이 어떨까?) 더군다나 이승만은 철저한 크리스천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반대하며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해야 한다며 외교독립 노선을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이승만에게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변호는 자신의 이념과 노선에 반대선을 이루었다.

2.2. 일제강점기 초기[편집]

1910년 잠깐 한국에 귀국하여, YMCA 청년부 간사 겸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05인 사건을 계기로 회의를 느끼고 얼마 안가 미국으로 돌아간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하여 교육자로서, 교육활동과 실력운동에 힘썼다는 주장이 있으나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라 하는등 자신의 신도를 모으기 위함이였고.
국민회를 갱스터를 동원해 장악한뒤 기숙사건립비등 여러 재단의 재산을 사적으로 취득하였다.
심지어 이에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일본 군함 이즈모를 도와 미국을 공격하려한다고 위증을 하기까지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그는 미국을 본받아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국무총리제가 아닌 대통령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과도한 권력 집중에 대한 우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합의 없이 임의로 대통령(President)을 자칭하다가 여러 임시정부 요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결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로 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24]하였으나, 임시정부에 직접 방문한 횟수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외교적 으로 독립운동한 업적은 크다

2.3. 임시정부 대통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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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민족자결주의가 확산되자, 외교독립 노선을 주장하던 이승만 역시 국제연맹에서 한반도 독립을 청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와 밀월관계에 있던 미국은 이승만의 출국비자 발급을 거절하였고, 이에 이승만은 안창호, 정한경과의 논의 끝에 윌슨에게 직접 한국 독립 운동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온 것이 바로 1919년 2월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3.1운동을 방해하려 했다는 오해를 사게 되면서 1920년대의 임시 정부의 자금난과 이승만의 취임 거부 등이 겹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하와이에서 노선 차이로 이승만과 정적이 된 박용만 계열이 문제 삼으면서 임시 정부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1925년 자금 문제로 탄핵되었고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승만은 임시 정부를 향한 재미교포들의 자금 지원을 차단하는 등 거리를 두었으며, 주로 미주의 한인 사회에서 활동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 참조.

주문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과 같다.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2.4. 임시정부와의 갈등[편집]

이승만은 탄핵 전부터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에서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각 나라에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거나, 임시정부의 인정, 독립에 지지를 호소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오히려 구미위원부가 이승만 개인시설로 이용되는 면이 있어서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 폐지 령을 발표하였으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고 계속 활동한다. 박용만의열단에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언론을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당시 이승만은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1933년 국제연맹 총회가 열릴 스위스 제네바의 사무총장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인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후 소련에도 가 보았지만, 역시 일본의 방해로 가자마자 쫓겨났다.

30년대 들어서 임시정부에서 反이승만 세력이 약화되자,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5. 태평양 전쟁[편집]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고한 일본 내막기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실제로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이것이 미국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 포고문과 임시 정부 승인 요구 문서를 미국 정부에 보낸다.

반공주의자이던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 운동을 도우면 소련이 한반도에 입성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펴 미국을 설득하려 했지만, 미국은 이미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소련과 동맹관계였기 때문에 거절당한다.[25]

이승만은 6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고 국제사회의 소식을 알리는 방송활동을 했었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처음 방송되었는데, 자세한 항목은 항일단파방송 사건 참조.

1943년 이승만은 미국에게 反소련전선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해 11월,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한국을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시킨다는 것을 발표했다. 비록 이승만은 '적당한 절차'가 신경 쓰였으나 미국 정부에 요청해도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수 없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탁통치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가긴 했었다.

1945년 5월 14일 독일 항복 후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 라는 미·영·소 3국 간의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에 미국은 부인했지만, 실제로 그 당시 신탁통치를 미국이 찬성했고, 소련에 대일참전을 요구하여[26] 3달후 만주 작전이 실행됨으로써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음이 밝혀졌다.[27] 결국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다.

2.6. 해방 정국[편집]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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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뒤 38도선으로 한반도가 분할되어 북쪽에는 소련소군정이, 남쪽에는 미국미군정이 들어섰다. 미군과 입국한 이승만은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던 김구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된다. 이후 독촉은 이승만 세력의 정치적 모태가 된다.

1946년 이승만은 김구가 이끄는 비상정치회의와 연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최고정무위원회를 설치한다. 미군정은 최고정무위원회의 명칭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바꾸고 군정 하의 과도정부, 민간정부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민주의원의 의장이 됐다. 그러나 3월 사무엘 돌베어라는 미국인에게 100만 달러를 받고 광산고문이라는 직함과 여러 광산의 채굴권을 주었다는 스캔들로 인해 의장 직을 사퇴한다.[28][29]

민주의원 의원직 사퇴 이후 4월부터 6월까지, 두 달간 삼남 지방을 순회한다. 이른바 '남선순행'을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지방까지 확대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6월 3일 정읍을 방문하던 중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로 무기한 휴회되자 이른바 정읍발언을 하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깜짝 발언은 미군정에게도 부담스러웠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유착이 공공연한 상황에서 정읍발언은 분단의 책임을 미국이 뒤집어 쓰게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등 강경 우익 대신 여운형, 김규식 등 중간파를 밀어주려던 차였다. 미군정이 이승만의 2선 퇴진을 요구하며 좌우 합작 운동을 지원하자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를 조직해 한국민주당과 손잡고 미군정과 좌우합작위원회에 맞섰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선거가 결정되자 이승만과 한민당은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한다. 그 결과 이들 세력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30] 관선의원 역시 이승만과 통할 수 있는 보수적 인사들로 채워졌다.[31] 이승만은 입법의원은 움직여 반탁 결의안을 통과시켜 미군정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자신감을 얻은 이승만은 입법의원을 발판으로 단독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1946년 11월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해 자신의 단정안을 선전하고 자신을 견제하는 군정장관 존 리드 하지을 공격한다. 심지어 하지를 용공분자로 공격하기도 했다. 미국의 일부 반공 언론을 제외하면 이승만의 방문은 미국에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국내 우익 신문은 이승만의 방미 성과를 과대 포장해 선전한다. 이승만 역시 방미 중에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자 자신의 업적으로 부풀렸다. 다만 트루먼 독트린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이 힘을 입을 것은 사실이었다.

1947년 4월 귀국 이후 이승만은 임정법통론을 거부하고 김구가 중심이 된 국민의회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등 자신이 중심이 된 단독정부 수립에 골몰한다. 그러나 5월 2차 미소공위가 시작되며 이승만은 또 한번 위기에 빠진다.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미소공위 보이콧을 선언한 이승만과 달리, 한민당이 미소공위 참여를 선언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우익 세력의 미소공위 참가를 막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우익의 힘의 근원이던 반탁 시위의 동력도 예전보다 떨어졌다.

1947년 7월이 되자 이승만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 지역을 방문한 미군정 관계자들은 좌우가 호각을 이루고 있는 남한 지역과 달리 삼팔선 북쪽은 좌익과 소련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는 미소공위를 통해 임시정부가 세워진다면 미국의 이익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미국은 미소공위에서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고 결국 미소공위는 또다시 결렬된다. 미국은 9월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고 유엔총회는 총선거를 통해 한국 내 자주적인 민간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독에 의해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은 동대문갑구에 출마하였는데, 상대 후보는 독립운동가이자 경찰관 출신 최능진이었다.[32] 결국 최능진은 이승만을 추종하는 서북청년회과 경찰세력의 물밑 공작[33]으로 후보 등록은 무효화되었고, 이승만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된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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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 자격으로 대통령 중심제 헌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제헌국회의 간접선거로 진행된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북한의 앞선 토지개혁에 남한의 농민들이 불만을 느끼고 현혹될[35] 것을 우려했으며, 이에 따라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36]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북한이 전쟁 초기 남한 농민들에게 선전한 토지분배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토지를 뺏아서 옆집 빈둥거리는 녀석이랑 똑같이 공짜로 나눠주겠다는데 어떤 농민이 환영할까. 그리고 국민 절대다수가 농민인 이 시기에 농심은 곧 민심이자 여론이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제아무리 미군이 강하더라도 현지 민심의 지지 없이 전쟁 승리는 어렵다. 한마디로 농지 개혁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대한민국의 안보 정책이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37] 한편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38]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반공 노선을 지향하였다. 해방 정국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롭던 친일파들은, 우익인사들의 반공노선에 편승하여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있었고[39] 국내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이들을 적극 등용하였다.[40] 한반도를 반소 반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던 미국에게도 친일파 청산은 별로 문제의식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통치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41][42]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였으나,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 경찰력과 정치깡패를 동원하는 친일파들을 처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역으로 해산되고야 만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이승만 라인 또는 평화선으로 대표되는 독도이어도, 대한해협의 해양주권 절대 사수라는 초강경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6.25전쟁 시기에는 일본이 맥아더를 통해서 자위대 파견에 대한 의중을 떠보는 것이 귀에 들어오자, 자위대가 들어온다면 총부리를 공산군에서 자위대로 돌리라고 하였고,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임기 내 일본에 대해서는 초강경 태세를 유지하였다.

2.7. 6.25 전쟁[편집]

한편 이승만과 관료들은 반공과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의주에서 먹는다."라고 장담하였으나[43][44][45], 이승만은 기자회견으로 군사지원 시 북진통일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북침이 발발, 전쟁이 확대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미국이 군사지원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실제 군사력은 소련의 장비와 중공의 인력을 비밀리에 지원받은 북한에 비해 터무니없이 딸리는 상황이었지만 하루 만에 북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북한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서울 코앞까지 진격해 있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2시에 서울을 피난한다. 문제는 몽진 직후 정부 내에서도 이승만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46] 국회의 경우 이 대통령 피난 직후 임시회의를 열어 신 국방장관의 피난 제의(당시엔 임시이동으로 표현)을 거부하고 서울사수를 결의하고 이승만에게 통보하러 찾아왔으나... 이승만은 이미 자리를 뜬 다음이었고 국회의원들도 개별적으로 피난을 시작했다. 같은 이유로 부통령 이시영 역시 마지막까지 피난에 반대하다가, 잠깐 상황만 보고 오자는 설득으로 뒤늦게 참여하게 된다. 각료, 국회, 부통령 조차도 이승만의 피난을 뒤늦게 통보받으면서 이들의 피난은 개별적으로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주요 인사가 붙잡힌다면 북한의 선전에 활용 될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인 27일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 KBS 방송과장을 불렀다. 27일 오후 7시 반 대전 KBS 방송국 유병은 방송과장은 대통령이 보낸 차를 타고 대통령이 머무르던 충남지사 관사에 갔고, 여기서 이승만은 방송과장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린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라.

  4.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5. 사전에 대통령 연설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유병헌 방송과장은 우체국, 대전방송국, 중앙방송국에 연락하고는 90여분 만에 밤 9시 생방송을 성사시켰다.

이와 관련 된 악명 높은 기만방송은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참고

훗날 유엔군의 진격으로 평양 함락 당시, 김일성은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라"고 해놓고는 몰래 도망쳤다. 김정일을 비롯한 가족들은 이미 훨씬 전에 국경을 넘어 만주로 대피시켜놨다.

이후 대전을 떠나 대구까지 내려갔으나(오후 10시) 서울로 돌아가고자 상행하던 도중 신성모 국방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의 만류로 대전에 임시수도를 세웠다. 다음날 28일 새벽 2시 30분경에 한강 인도교 폭파작전이 실행되었다. 육군본부, 해군본부, 공군본부는 27일 11시경 수원,대전으로 피난. 부통령인 이시영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울을 사수하다가 거의 납치될 뻔한 찰나에 측근의 만류로 피난하였고, 서울을 떠나지 못한 시민들(130만 중 50 만 피난 성공)들은 서울과 한강 북쪽에서 발이 묶였고 공산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3시에 비서관으로부터 '미 시카고트리뷴지 시먼스기자 말로는 수원이 뚫렸고 적이 천안을 육박했다'란 소식(훗날 시먼스 기자가 미전방사령부가 국군부대를 인민군으로 오인 후퇴하던 것을 알린 오보로 판명)을 듣고 대전을 떠나 14시에 목포에 도착했고, 여기에서 장장 19시간 동안 항해 끝에 7월 2일 11시경 부산에 도착했다. 전쟁 발발 직후 대략 일주일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이승만은 파나마 모자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일반인으로 철저하게 변장하고, 부인 프란체스카와 극소수의 경호원만을 대동하고 자신이 국가원수라는 사실을 극비에 부친 채 도망다녀야 했다. 인민군의 암살시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국 내의 반전여론에 부담을 느낀 미국이 휴전협정을 추진하자 이에 극렬히 반대하며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켜 한미관계에 일시적인 마찰을 불러오기도 하였다.[47]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유엔군 관할이었다.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직전 3군의 헌병조직을 통합하고 각군 본부가 아닌 국방부 직속의 '헌병총사령부'를 창설하여[48], 수용소를 관리하는 유엔군을 무시하고 한국 측 헌병과 경찰병력을 반공 포로 탈출에 적극 개입시켰다.

2.7.1. 일본망명시도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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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무초링크 주한 미국대사 보고서

Acting PriMin[49] visited me 7 a.m. Confirmed President had left at 3 a.m heading for Chinhae and Cabinet at 7 a.m. for south both travelling by special trains. (중략)[50] He despaired of saving anything and inquired possibility President and Cabinet moving to Japan as “government in exile.” I made no commitment.
오전 7시에 대통령 대리인 신성모가 와서 오전 3시에 대통령과 내각이 특별열차편을 이용하여 진해를 향해 남쪽으로 피신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낙담하였고, 대통령과 내각이 일본으로 이동하여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7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의 보고서 중


한편 서울에 남아있던 국방장관 신성모는 1950년 6월 27일 아침에 미국대사였던 무치오를 찾아가서 여러가지 논의를 하는데 이 때 신성모가 말한 '일본에서 망명정부을 수립하는 계획'이 논란이 된다.

일단 문서에는 신성모가 망명 이야기를 꺼낸것은 사실이지만 망명이 신성모 장관의 뜻인지, 이승만 대통령 본인의 뜻인지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를 두고 망명시도를 부인하는 측에서는 망명건을 언급한 사람은 신성모 한 사람 뿐이고 그것도 전보의 한 문장에 불과하며 이후 1951년 12월의 주미 한국 대사가 참석한 회의 전까지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누구도 망명에 대해 언급하는 기록이 없다며 정부가 공식적으로 망명을 요청했다는건 지나친 확대 해석, 추측이라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망명시도를 인정하는 측에서는 당시 신성모는 서울에 남아있던 최고위직 정부인사였고 국방장관이었다. 때문에 신성모가 독단적으로 이런 망명이야기를 꺼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고 더군다나 신성모가 단순한 망명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상관인 대통령의 망명을 주장한 것으로 보아 신성모의 독단으로 보기는 더 어렵다. 그리고 이 발언은 무초가 회고록이나 단순히 인터뷰 등으로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 국무부로 올라가는 정식 전보였다. 적어도 당시 무치오는 신성모의 이 발언이 매우 중요하고 심각하다고 인식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후 일본에서 야마구치현사라는 책을 발간하는데 여기서 총류편 현대2(山口県史 史料編 現代2)에서 한국전쟁당시 아마구치 현 지사였던 다나카 다쓰오(田中 龍夫)의 회고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본 외무성이 야미구치에 한국인 망명을 위한 시설을 지시하다가 다나카 지사가 외무성과 갈등을 빚은 일을 회고하고 있다. 이후 언론에서는 현사가 쓰여진 90년대 부터 이 망명 캠프를 두고 이승만이 망명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엮는데 일단 이 망명캠프가 이승만의 부탁으로 만들어 졌는지 부터가 불분명하고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도주하든 한국에서 죽든 적어도 반공시민들이 북한군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만의 경우처럼 한국인들을 피난시켜야 했는데 이것을 두고 이승만이 일본으로 도주하려 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 2015년 6월 24일에 KBS에서는 이승만이 [단독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이라는 뉴스 기사를 내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여기서 야마구치 현사에 원문에 없는 '(1950. 6. 27)'이라는 문구를 편집해서 넣은 것 때문에 징계를 먹는다. 그리고 단독 보도라고 했지만 이미 일본의 산케이 신문에서 1996년 4월14일에 보도한 바 있으며 그 다음날 조선일보(1996.04.15/사회/37면)에서 를 시작으로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도 교도통신 등을 인용해 보도하였다.


일부 언론에선 이승만의 처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을 참고로 삼아 변호한 사례도 있다. 이승만은 항시 권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무쵸 대사가 일본으로의 망명을 주선하였으나 권총을 뽑아들어 나는 한반도를 벗어날 뜻이 없다고 강경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다만, 대통령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의 주장이라 신뢰성도 떨어지고 이 권총설이 사실이더라고 권총을 들고 난리를 피운건 한 6월이 아니라, 8월이기 때문에 유엔군 참전등으로 상황이 많이 바뀐 뒤여서 일부러 강경하게 태도를 표시했을 가능성도 높다.

2.7.2. 암살 미수[편집]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건인데 1952년 6월 25일 6.25전쟁 2주년을 맞아 충무로 광장에서 이승만이 연설을 하였는데 유시태(柳時泰, 1890년 ~ 1965년)라는 의열단 출신의 노인이 이승만 바로 뒤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 하지만 권총은 불발돼 총알이 나가지 않아 이승만은 죽을 위기를 넘겼다. 4발이 불발이었는데. 김시현이 총을 일부러 그랬다는 (이승만에게 경고하기위해서) 초기증언이 있지만 실상은 정확히 알수없다. 이 암살장면을 포착한 사진은 2015년 8월달에 공개되었다. 김시현이 사주했다고 판결이 났다. 김시현이 애초에 국회의원이었는데 행사장에 들어가게 자기 신분증이랑 권총을 준비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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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전후 제1공화국[편집]

한국전쟁 휴전 이후 1953년 10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미국의 대(對)한국 안보보장을 얻어내었다. 이후 장기 독재를 위해 1958년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야당후보인 조봉암을 대상으로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이전에 1952년에는 정치깡패와 경찰을 동원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위한 상태에서 야당 의원들을 협박해 발췌 개헌, 1954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 연임 규정을 수정하며 독재 정치로 나아갔다. 결국 1960년 3월,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연루된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동해 4월 4.19 혁명이 일어났다.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기되었지만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51] 10년 동안의 이승만 정권에 억눌려왔던 분노가 폭발한 국민들은 혁명 동안 친정부 언론사인 서울신문사를 불태우고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을 파괴했으며,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 부정축재를 벌이던 이기붕의 집을 방화하였고 경찰과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강경진압을 천명하였고 이승만 본인도 전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도 못했고 시민들을 향해 '야당에 의해 선동당한 국민들의 폭동, 공산당이 사주한 난동'# 정도로 인식했다.

"본인(이승만)과 러닝메이트인 이기붕 부통령 민의원 의장은 3.15 선거가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민주당을 물리치고 석권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정부가 질서유지를 위한 경우 이외에는 선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민주당의 선동을 받은 일부 시위자들이 일을 저지를 때 수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민주당은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그런 수단(마산 시위)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 데 대해 한국 국민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제(4월 19일)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또 지방경찰은 각각 그 지방의 정돈을 지켜서 혼잡이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각계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고 교수들까지 참여해 시국선언을 발표, 부정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쳤으며 대한민국 국군과 주한 미국 대사관마저 지지를 철회하자 당황한 정부는 선거를 다시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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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대중과 직접 소통이 별로[52] 없었던 이승만은 4월 26일에 가서야 비로소 유혈 사태가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하게 된 이승만은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위에 동정을 표시했다. 그는 병원을 직접 찾아가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갔다. 그는 학생들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는 말로 위로했다.

이승만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깨달은 시점이 이 무렵이다. 4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김주열 학생이 죽은 사실을 언급하고 선거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승만이 국무위원에게 물었다.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은 없는가?"

양심이 살아 있다면, 그때 소위 장관이라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 해야 했다. 부정 선거를 치렀고, 부작용이 나왔고, 불의가 저질러졌다고. 대통령 모르게 우리가 일을 꾸몄고, 더 사태가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자백했어야 했다.

하기야, 양심이 살아 있다면 애당초 그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감추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간파했다.

정권의 최후가 시시각각 다가왔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평화로운 집회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데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깡패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자유당 집권 내내 악명을 떨치던 정치 깡패들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종말을 예고한 사건이 발생했다.

나라가 깡패를 동원해서 정의를 외치는 학생들을 구타했으니, 민심이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4월 19일, 대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시위가 서울을 뒤덮었다. 국민은 더는 이승만 대통령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군중은 국회의사당에서 경무대로 진격했다.

바로 그 시각에 이승만 대통령이 주재하는 자유당의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여기면서도 원인을 모르던 이승만이 발언했다.

"오늘은 내가 이거 무슨 난 중에 앉아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이 나를 나가라고 하는 모양인데 순순히 좋게 내주려고 해. 허나 무슨 이유인지, 무슨 까닭인지를 똑똑히 알았으면 해. 뭣인지 까닭을 알아야 해결할 것 아냐?"

그 지경에 이르렀으나 장관들은 여전히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려 했다. 홍진기 내무부 장관은 “마산 사태는 1차로 민주당이 선동했고 2차로 공산당이 조종한 듯하다”고 보고했다. 최재유 문교부 장관은 “학생들이 선동을 받았다. 배후 조종이 있다고 본다”고 발언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이 벌인 잘못을 공산당에게 뒤집어씌운 잘못된 역사가 후대에 올무로 남았다. 공산당으로 오인받아 피해를 본 이들이 발생했고, 그 피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반공 세력에게 영향을 줬다. 반공을 말하면 곧이듣지 않고 무언가를 은폐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경무대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경무대 안에서는 장관들이 공산당에 책임을 돌렸고 밖에서는 국민이 혁명을 일으켰다. 국무회의에서는 거짓말이 난무했고 거리에서는 진실을 향한 투쟁이 벌어졌다.

거짓으로 진실을 감추는 일이 한계에 달했다. 마지막 회의에서조차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던 국무위원은 4월 21일 모두 사표를 제출했다. 아마 그때쯤은 이승만도 상황을 파악한 듯하다. 이승만은 부정 선거로 당선한 이기붕에게 사퇴를 요청했다.

4월 22일, 이승만은 시위를 벌이다가 다친 학생들이 입원한 병실을 방문했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하고 안타깝고 슬픈 장면이었다. 기묘한 점은 노인 대통령과 젊은 학생들이 서로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을 다치게 한 권력자를 향해서 분을 낼 법도 하고, 본인더러 물러나라고 한 학생들에게 화를 낼 법도 하나 그 자리에서는 분도 없었고 화도 없었다.

피 흘리며 신음하던 학생들은 대통령을 보고 일제히 외쳤다. "할아버지!" 아마 학생들도 알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는 이승만이 잘못한 일이지만, 데모하다가 다쳐서 상한 다음에도 이승만은 여전히 젊은이들의 할아버지였다.

그날, 이승만도 울었고 학생들도 울었다. 다친 학생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면서 이승만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그 기막힌 순간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이 나라가 있었고 백성이 있었다.
#[53]


4월 26일 오전 10시 라디오로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당시에는 대통령의 명료하지 않은 표현때문에 국회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김선태 의원은 이 대통령의 말이 '국민이 원하니까' 사퇴를 한다는 것인지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를 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일부 의원들은 대통령의 진의를 확인하는 절차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국회가 대통령의 하야를 확인하고 권한대행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의지하여 우리 애국 애족한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고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번 정부 대통령 선거를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있는 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둔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가 책임질 대안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해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들이 다 힘써 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갑론을박 끝에 국회 시국대책위원회는 미리 준비해 둔 시국수습 대책에 대통령 하야 문제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국회는 담화문이 발표된 그날 오후 3시 시국수습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에 따라 다음날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함에 따라 즉시 수리할 수 있었다. 부통령 선거가[54] 부정선거였으니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게 당연한 일이며, 애초에 집권 여당과 측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비호한 것이 이승만 자신이기 때문. 그리고 시위대에서는 선거 재실시 요구가 나왔던 만큼 국민의 칼 끝은 분명히 이승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경무대에 피신해 있던 이기붕 가족이 자살했다. 그에 따라 자유당 정권의 핵심 세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한 달 간 이화장에서 거주하면서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용돈이나 주며 지내다가 하와이이주[55]하였으며, 이승만은 오랫 동안 활동한 하와이에서 옛 동지들도 만나다가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실상 허정이 출국을 허가한 이유는 그냥 추방[56]이었고, 결국 이승만의 수차례 귀국 의사는 허정은 물론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계속 거절당했다. 이후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마우날라니 양노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나이 9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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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유해는 전 주한 미군 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이 마련한 특별기로 한국에 이송된 후,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어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재임 기간 및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 대통령 일람을 참조÷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대문)

무소속

무투표 당선

당선 (1위)

[57]

1948

제1대 대통령 선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80 (91.8%)

당선 (1위)

[58]

1952

제2대 대통령 선거

자유당

5,238,769 (74.6%)

당선 (1위)

1956

제3대 대통령 선거

자유당

5,046,437 (70.0%)

당선 (1위)

1960

제4대 대통령 선거

자유당

9,633,376 (100.0%)

당선(1위)

[59]

4. 묘소[편집]

http://www.snmb.mil.kr/mbshome/mbs/snmb/images/contents/presiPic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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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雩南)[60]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國立—顯忠院) 국가원수묘역에 자리하였다.

5. 평가[편집]

이승만/평가로 분리하였다.

6. 박정희와 이승만의 관계[편집]

박정희는 이승만을 증오했다. 본인의 독재에 여전히 인기 있던 이승만은 장벽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하였으며 장면 총리는 죽어서야 집 밖에 나오도록 했다. 아울러 이승만을 무능한 지도자라 평가했고경향신문 1961년 8월 16일 1면 사설, 이승만 정권에 대해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박정희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정치 군인의 횡포, 여기서 비롯되는 인사 적체 문제 같은 이승만 집권기에 겪었다. 박정희는 이승만 일당의 횡포를 더는 참지 못했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을 계획했다.[61] 다만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데는 군 인사에서의 소외, 진급 지체 등 개인적인 불만과 군의 파벌 및 비리에 대한 반감, 장면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 등이 함께 작용했고, 그 바탕에는 만주군 시절의 경험군국주의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5.16 군사정변의 주체들이 내세우는 '국가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은 상당 부분 언어적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의 의도를 선의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5.16이 합법적인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한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라는 사실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 영결식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김종필은 박정희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일단 죽은 고인에 대해선 심한 비판을 삼가고 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인 생각과 별도로 영결식에서의 발언은 립서비스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증거로 박정희 대통령의 1962년 저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승만 평가는 영결식 당시 연설과 전혀 다르다. 내용 일부 발췌 그리고 2015년 4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조사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대신 참석한 정일권 전 총리가 말하길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사는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쓰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7BSINjCNxKM 배나TV 인터뷰 [길거리중계] '이인수 박사 (부제: 우남 이승만, 어떤 인물인가?)' 편, 5분 00초부터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는데, 당연하게도 이승만의 장례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었다. 거기서 양자와 의견 조율이 안 되자,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했는데,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한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열 받은 박정희는 그냥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심지어 박정희는 친일 경력이 있어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독립운동가와 그 일족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이승만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실제로 '그게 독립운동이냐, 그따위 경력으로 정치에 나서 당파싸움이나 유발했다. 그 경력 자체가 엉터리다.'라고 평가했는데, 이게 아직도 기록에 남았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재임 기간이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 또한 보수 우익 진영에서는 찬사와 고평가를, 진보 좌익 진영에서는 비난을 받는다. 다시 말해 근현대사에서 상징적인 지도자 겸 독재자다.

스스로 하야한 이승만이 그러지 않았던 박정희다른 대통령들보다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행동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 같은 것만 봐도 알듯이 이승만도 폭정으로 악명이 높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국제법에서도 최악의 범죄로 꼽히는 인도에 반하는 죄 (crime against humanity)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공적 지위에 의한 면제를 주장하지 못하는 범행이다.

7. 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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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물에서 이승만 역을 가장 맛깔스럽게 연기해낸 배우로는 역시 최불암이 첫손에 꼽힌다.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처음 맡은 이래, 거의 드라마 자체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 특유의 스타일은 그 이후 이승만을 맡게 된 후배 배우들이 이승만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최불암을 흉내내었다고 일컬어질 정도. 그 외에는 신구권성덕 등 유명배우들이 있지만 최불암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 권성덕의 경우는 이승만과 비슷한 외모라 현재 인지도론 2번째에 가깝지만.

  • 1984년에 방영되었던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는 서인석이 이승만 역을 맡았다. 다만 드라마의 시대배경이 동학 농민 운동운동 이후 경술국치이전까지의 시기를 다루다 보니까 이승만이 2~30대때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것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 성우 중 최고의 이승만 연기는 단연 격동 50년의 박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최불암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맛깔스럽게 대사를 구사했다. 동시에 이승만의 능구렁이같은 면도 세세하게 표현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미중년을 많이 맡았던 박일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준 연기라고 볼 수도 있다.

7.1. 야인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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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라고? 어림도 없다! 암!! 아암!!!


야인시대(2002, SBS)에서는 무풍지대에서 이기붕 역을 맡았던 권성덕 승진해서 이승만 역을 맡았다.[62][63]

고집불통인데다 자뻑도 어느 정도 심하지만, 그럼에도 극중에서는 최소한의 민주주의 개념이나 국민들을 신경쓰는 마음이 있긴 있는데, 결국은 그렇게 안 하거나 안 하게 되는 왕조 시절로 따지면 암군에 해당하는 행보를 보인다. 대표적인 말투는 "이보게 미스타~곽?". 옆에서 권력욕에 찌든 자유당 당원들, 즉 이기붕/박마리아곽영주, 장경근 및 온갖 인물들이 이승만을 구워삶고 설득하고 매달리는 식으로(이승만을 대통령 종신집권하도록 하고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 사고를 친다.

항상 한국인들을 칭할 때 '국민들'이 아니라 '백성들' 이라고 부르는 게 꽤 흥미롭다. 계속 집권하고 있으면 민주주의가 훼손된다며 대통령직에 출마 안 하고 은퇴하겠다는 모습도 보이지만 자유당과 이정재의 동대문파의 끈질긴 노력 끝에 '백성들이 진심으로 날 원하는구나!' 라며 또 출마하여 독재를 계속한다.

김두한이 처음에 백의사 밑에서 일할 때는 김두한을 기특하게 보았으나, 점점 김두한과 사이가 불편해지기 시작하고 그것은 김두한이 국회의원 당선 후 야당 인사들과 협력할 때 절정에 달했다. 일단은 1공화국 에피소드에서는 이기붕, 이정재, 곽영주 등과 함께 주요 악역 중 한 명에 해당하기도 하다.

내가 고자라니 합성물의 범위가 넒어지다보니 아예 연관성이 없는 이승만 파트까지 사용하는 사람도 등장했다.[64]이승만의 비명소리나 악을 쓰는 소리 등이 나온다. 주로 야인시대 87화에 나온 "중공군이라고? 어림도 없다! 암! 아아암!" 부분이 활용된다.87화 그 외에도 이승만 특유의 톤을 조교해서 야하게 만드는 방법도 활용된다. "암" "암"대더니 돌 박사가 된 이승만(...),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를 활용한 매드무비, 이제는 본인이 고자가 되셨다, Big Enough 버전

8. 여담[편집]

  •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고의 명필가로 평가된다. 근데 이는 당연한 것이, 후대 대통령들과는 달리 사실상 조선 시대 사람인지라 서예의 접근도와 숙달도가 다른 대통령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 취미로 즐긴 사람과 생활로 한 사람과는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평생 서예를 연마했기에 "명인"이라 불릴 만큼 글씨의 정교와 기교가 빼어나고 한자 뿐 아니라 한글과 영어 필체도 유려하고 필체가 굳세면서 부드럽다. 그리고 글씨를 매우 길게 썼다.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필체가 반듯하여 의지가 강하고 인간적인 완숙함을 갖추고 있으며 원칙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있고 자신감이 강하고 용기 있는 성격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2006년 지인용(智仁勇)이라는 작품으로 대통령 글씨로는 최대인 1억 5500만 원의 낙찰가로 경매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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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실의 후손이고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였던 무의공 이순신(동명이인)의 후손이라 한다.[65] 왕조에 대해 반대하였으며 공화정 추종자였지만, 곽영주가 '옥체'라든가, "~옵니다" 등 군왕에게나 쓸 용어를 사용하자 매우 좋아했다. 스스로를 지칭할 때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거군주제? 그리고 미국에서는 자신을 프린스 리라 칭했다 어느 정도 신분이나 지위가 있어야 사교계나 행정부서에서 상대를 해주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생활에서 이승만은 이러한 신분 위조를 통해 사교계에 적잖이 참여했는데, 이 원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공화국으로 시작되다 보니 왕족, 귀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더해진 덕택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게다가 동양인이었던 탓에 자신을 도와주던 미국 여성과 같이 있거나 하면 타 백인들이 미국 여성에게 '당신 옆은 당신 남편이냐'->동양인하고 결혼한 거냐ㅉㅉ식으로 비아냥거려서 먼저 동양의 왕자라는 식으로 선수를 친 적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동양인이라고 해도 일단 왕족이라 하면 그래도 좀 달리 봤다고.

  • 정작 이승만은 광복 이후 잔존한 한국 황족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매몰찼다. 궁궐, 종묘 같은 국가시설은 차치하더라도 의친왕의 사동궁이나 운현궁 같은 일종의 사유재산마저 국고로 환수하려 했고 실제로 일부는 성공했다. 8세 때 사실상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해방 때까지 환국하지 못했던 영친왕이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나 한국행을 논의코자 했지만 냉대받았고 이승만으로부터 "본국으로 오려거든 오시오."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말년의 순정효황후 윤씨[66]6.25 전쟁이 터지자 미군의 원조로 피난했는데, 휴전 후 이승만의 지시로 창덕궁으로 환궁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릉 수인재(修仁齊)[67]에서 기거해야 했다. 이 부분은 이승만이 미국 거주시기에 어떻게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는 점으로 보면 이해가 가는 게 이승만은 자신이 왕조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긴 했지만 정작 귀국한 뒤에는 그걸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독립운동 경력을 강조했고[68], 권력을 잡은 뒤에도 자신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지 왕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지만....

  • 이승만의 대통령시절 행보는 그냥 왕이었다.[69]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대화할 때 "짐은..."이라는 왕의 수사를 즐겨 썼고 주변인의 회고록을 보면 은근히 왕 느낌을 많이 냈다고 한다. 하지만 한반도에 공화정이 처음으로 자리잡던 시기이고 국민들 역시 생전에 공화정을 본 적이 없던 터라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왕과 같은 자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승만 본인 역시 사실상 조선시대 사람이었고.[70]

  • 국민의 요구에 스스로 하야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하야한 나머지 두 대통령인 윤보선최규하쿠데타에 의해 강제 하야당했다.

  • 광복 후 운현궁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인정받아 사유재산화 되면서[71] 관저로 쓰지 못하게 되자, 그 대가로 이우 왕자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운현궁에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등의 무례를 범했다. 출처

  • 그의 저서 일본 내막기는 일본의 가미카제나 일본의 집단주의를 정확히 예측하였고, 진주만의 공습과 일본의 패망을 예측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한국 독립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 조선시대 출생한 유이한 대통령이다. 다른 한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후임인 윤보선 대통령으로 둘다 고종 재위시에 출생했다.[72]

  •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낙방했다...[73] 이것은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이었고 이후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게 된다. 다만 선접 군과 거벽, 사수로 대표되는 당시 과거시험의 폐단을 생각해보면 이승만이 자력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승만의 집안은 과거급제자를 못 낸지 꽤 되어서 사실상 평민 집안이었고 급제자를 냈다고 쳐도 방계 중의 방계인, 말 그대로 종친의 떨거지라서 빽도 못 받는다.

  • 이승만이 미국에 유학했을 때는 영어 실력만 좋았을 뿐 공부 자체는 안 했다. 이 때문에 경제학 등에서 낙제를 받아 석사학위 취득에 실패하자 하버드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를 오가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진행했고 같은 날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건 아시아 최고의 박사였다.

  • 이승만/평가 항목에서 나와있듯이 모병제를 시행하던 한국을 징병제로 바꾼 사람이다.

  • 화가 났을 때 주먹을 쥐고 입김을 후후 부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독립협회를 하다가 공화정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민 죄로 체포되었을 때 손에 불 고문을 당했기 때문. 나중에 이승만 지지자들은 이것을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당한 고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왜곡이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기에 일본 경찰에 체포당할 일도 없었다.

  • 더글러스 맥아더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대할 때, 서양인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동양인을 대체로 아랫사람으로 인식하거나 소수가 동등하게 대했던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할 때처럼 공손하게 대했기 때문이다.[74] 또한 이승만의 얘기도 잘 들어줬다고. 그래서 이승만은 맥아더가 있는 곳을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맥아더가 GHQ라는 수완을 발휘한 것과 같이 볼 때 그가 동양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음을 엿볼 수 있는 면이다.[75] 그래서 맥아더가 UN군 사령관에서 잘렸을 때 이승만은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전자의 이유로 이승만의 마음에 들었기도 했지만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 폭탄 사용을 주장할 정도로 북진을 할 생각이 있어 이승만과 죽이 잘 맞았지만 월튼 워커[76] 후임으로 온 매튜 B. 리지웨이제임스 밴 플리트1.4 후퇴 이후 미국 정부의 북진 불가, 현 상황 유지 방침[77]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사사건건 충돌을 빚었다. 이들의 성격도 이승만 앞이라고 말을 가려 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불편해 했다고 한다.

  •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만나는 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아이젠하워는 미군 장병들을 위로하러 온 것이라 원래 계획에 없던 이승만을 만날 생각이 없었고 이에 환영 군중대회에 각료들까지 준비해놓고 기다렸던 이승만은 개망신을 당할 처지였다. 이에 백선엽이 한미 양국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겨우 회담을 주선했다.

  • 백범일지는 이승만 집권기에 금서로 지정돼, 판매와 독서가 금지되었다.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때 출정식을 하는 축구팀을 배웅해주며 "만약 (한일전에서)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져야 하네." 라고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당시 축구 한일전은 승리. 레알 필살

  •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때에는 리승만으로 불렸다. 북한이나 중국재중동포들은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 1백환권, 5백환권 등 그가 집권한 시기의 지폐는 모조리 그의 얼굴로 도배되어 있었다. 여담으로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처음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얼굴을 반으로 접고 다녀서 디자인을 변경하여 왼쪽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위에서 스스로를 짐, 왕으로 여긴 걸 보면 그럴듯하긴 하다. 실제로 이승만이 사람들이 지폐를 접고 다녀서 자신의 얼굴을 접어서 해지니 지폐의 위치를 바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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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경기도 성남시의 도로명에 그의 호를 딴 '우남로'가 있었다가 헌릉로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해당 도로에 지어지는 서울 지하철 8호선 역의 가칭도 우남역이었다가, 여러 논란 끝에 그냥 역명이 확정될 때까지 8호선 추가역으로 부르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만 81세의 나이였고, 1960년 퇴임 당시 만 85세[78]로, 대한민국 대통령 사상 최고령 대통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최초 취임 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만 74세였던 김대중 대통령.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나이가 만 73세였다.

  • 후임 대통령과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대통령 중 한명이다.[79] 후임 윤보선 대통령이 1897년생으로 이승만 대통령과는 22세의 나이차가 난다. 후임과 나이차가 많이 나는 또 다른 사례는 15대 김대중 대통령(1924년생)으로 후임인 노무현 대통령(1946년생)과 역시 22세의 나이차가 난다. 여러모로 역대 대통령 중 나이 관련 기록으로는 이승만, 김대중 두 대통령이 라이벌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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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와의 나이차는 24살이며 아내도 남편처럼 91세까지 장수했다.

  • 알고 보면 근현대사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장기간 활동한 인물일 것이다. 첫 등장이 1896년 독립협회이며, 마지막 등장이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한 퇴진이니, 무려 64년간의 활동이 소개된다. 심지어 독립협회 시절은 대한제국도 성립되기 전이니,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미군정)-대한민국을 거쳐 왔다. 근현대사 교과서의 대단원 구분이 '개항기-일제강점기-대한민국'으로 구분되는 걸 보면 사실상 모든 단원에서 이승만을 한 번씩은 보고 가게 된다. 사실 생존시기가 더글러스 맥아더[81]와 겹친다.

9. 관련 인용구[편집]

평생을 우리나라의 독립, 통일, 강력한 민주정부 수립과 그 발전에 바쳐왔다. 그러나 최근 사건이 말하여주듯 과업은 완수되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져야할 책임이나 닥쳐오는 위험을 회피한 일은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1959년 2월 3일, 대선출마 질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변 中

공산주의자는 콜레라[82]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같이 살 수 없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 연설 中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조약은 앞으로 우리를 번영케 할 것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10. 관련서적[편집]

아래 책들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대중서적들이며, 이외에도 이승만을 다룬 책과 연구논문들은 무수히 많다.

이승만의 전생애를 알고 싶다면 다소 방대한 분량이지만 정병준 교수가 출판한 <우남 이승만 연구>가 일독할만한다.[83]출판사 '역사비평사'에서 한국학연구총서의 일환으로 2005년 출간한 이 책은 개화기,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제1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이승만의 전생애에 걸친 행적을 중립적인 관점에서 매우 자세하게 담고 있다. 서적정보

10.1. 비전문가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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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깨기:이승만에 씌어진 7가지 누명서적정보
저자는 남정욱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 류석춘[84] 연세대 교수.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라이트 논객들이 2015년 11월 출판하였다. 한강철교폭파와 같은 민감한 주제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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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 젊은 세대를 위한 바른 역사서서적정보
뉴라이트 성향의 도서를 주로 출판하는 <기파랑>에서 2015년 4월 나왔다. 참고로 저자 안병훈은 2015년 8월에는 '혁명아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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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서적정보
저자는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2012년 9월 출판. 이승만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이다. 그 외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책에서는 이승만 개인은 아니더라도 정권은 숫하게 까이고 있다.

10.2. 전문가들의 저서[편집]

실제 전공분야의 학자들이 쓴 책이다.
▲ 유영익의 저서들

  • 유영익, [국내도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ㅣ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3 (학술서적)

  •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 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학술서적)

유영익은 이승만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닭살스런 표현을 쓴 것으로 까임을 당한다. 다만 다른 뉴라이트 학자에 비하면 최소한 독재나 학살을 부정하는 역사왜곡까지는 안 한다. 남정욱이나 조우석 같은 인간에 비하면 양반인 편.
▲ 정병준의 저서들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학술서적)

정병준의 책은 이승만 연구에 필수적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이승만 연구에 대표적인 학자중 하나인데 미군문서에 근거한 실증의 진수를 보여준다. 서중석이든 유영익이든 미군문서에 대한 방대함에는 정병준에 못 미칠정도다. 정병준의 사관을 고찰하면 국방부측의 연구는 굉장히 존중하며 양영조 같은 국방군사편찬위원회 측 역사학자와 교류하고 도움받을만큼 교류의 폭이 넓다. 브루스 커밍스의 역사학적 업적엔 호평하지만 '선제공격이 누구인지 상관없다'든가 국방부 연구를 부정하는 시각은 절대 반대하며 오히려 3공화국 시절 국방부의 연구가 (북한에 비하면) 객관적이라 호평하기도한다.
▲ 서중석의 저서들

  •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학술서적)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교양서)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학자면서 이승만을 가장 강도높게 비판하는 역사학자이다. 정병준과 다르게 서중석은 뉴라이트 측근에게 굉장히 경계를 받는편이다.[85] 그러나 대표적인 현대사학자답게 이승만 정권의 범죄나 학살에선 실증을 중요시한다.

11. 둘러보기[편집]

[1] 가장 잘 알려져 있는 1956 ~ 1960년 사이의 공식 사진. 관공서에 걸린 존영이다.[2] 밑에 서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문 이름을 이렇게 표기했기 때문에 현대 방식의 로마자 표기로 편집은 삼가 바람. 초명은 승룡(承龍)이다.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별칭 이박사(李博士).[3] 참고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순종보다 딱 1년 1일 늦게 태어났다. 순종보다 1살 어리고, 생일도 하루 차이인 셈.[4] 당시 평균수명(65세)을 감안하면 꽤 오래 살았다. 2018년 시점에서도 90세면 평균보다 오래 산 수준이다.[5] 로마자 표기가 Syngman Rhee다. 즉 리승만. 여러모로 일반적인 표기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표기 방식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립되지 않았었다.[6] 전주 이씨 양녕대군 16세손이며 시조 40세손 承자 항렬이다. 같은 항렬로 서강준(본명 이승환), WHORU(본명 이승준), 그리고 이승우가 있다.[7] 이혼[8] 이승만이 박승선 사이에서 둔 그의 유일한 친아들이었으나 10살 때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9]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자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마지막 지도자이기도 하다.[10] 당시 그가 다니던 대학 총장이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었다.[11] 동양의 실력자들이 서구 열강 지도층과 교류를 시작한 이 시기 인물들은 출신지역 방언, 서양인들의 발음현지화, 식민시대 정보망을 피하기 위한 가명 등 여러 사유로 본명과 상이한 영어/세계권 통용 이름이 굳어진 일이 흔하다. 장제스(장개석)가 Chiang Kai-shek, 쑨원(손문)이 Sun Yat-sen으로 그리고 이수종이 Yi Suchong 으로 굳어진 것이 한 예. 이승만이 Syngman Rhee가 된 것도 유사한 이유이다.[12] 초대 행정부와 입법부의 수장[13] 무의공 이순신의 직계 후손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 둘 다 양녕대군의 둘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후손은 맞지만 그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다. 무의공 이순신의 8촌인 이경조의 후손이 이승만이다.[14] 참고로 장평도정 이흔의 후손은 수많은 양녕대군파 중에서도 마이너한 축에 속한다.[15] 즉, 이승만 아들에 해당하는 항렬[16] 양녕대군파 안에서 이승만의 조카 뻘 자손 중 이승만과 가장 멀려면 마지막 공통조상이 당연히 양녕대군이어야 하는데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바로 아랫대 사람은 17대손이므로 이를 고려해 계산하면 이승만과 가장 먼 조카 항렬인 사람은 33촌이 된다[17] 아무리 항렬이 조카뻘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먼 촌수인데 어떻게 양자로 입양되었냐면 영어를 잘해야 하고 너무 나이가 많지도 적지도 않아야하고, 아직 미혼이어야 한다는 등 이승만 측이 원하는 조건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입양될 수 있었다.[18] 당시 조선 시대에는 제대로 된 의미에서 양자는 일족 중에서 들이고 진짜 자식으로 취급했다. 이를 보종차원에서 한다고 한다. 물론 제사를 지내게 할 목적으로 빈한한 먼 친족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이완용 참조.[19] 그것도 항렬이 같을 경우[20] 첫째 누나는 단양 우씨에게, 둘째 누나는 청송 심씨에게 시집을 갔다.[21] 정작 광복 후 그는 70대의 나이에 출마하여 대통령이 됐다는 아이러니함이 있다.[22] 이 외교활동에 대해서도 친일파 김윤정이 대두된 바가 있어 애국지사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나 일진회 소속으로 친일 행보를 보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23] 서구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고도의 문명국을 이루었던 청나라, 조선, 그리고 빨리 개화된 일본에 대해서는 흑인보다 우등한, 이른바 명예백인 취급을 해 주었다. 히틀러가 '일본 선수' 손기정과의 악수는 흔쾌히 한 게 그 좋은 사례다. 반면 진짜 백인이라도 유대인슬라브족의 취급은 좋지 못했다. 그 당시의 서구 사람들의 인종 구분은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다분히 문명화 수준이나 자기들 마음에 드느냐의 여부에 따른 구분이었고, 이로 인한 폐해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최악의 사례가 르완다 내전이다. 물론 이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시어도어 루즈벨트같은 혐한 와패니즈들은 한국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아니면 3국 모두를 차별하든지.[24]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는 처음에는 대통령 호칭을 반대하다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서 양보했다.[25] 즉 미국이 먼저 한반도에 진주하여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길 기대했으나 무산된 것. 결국 소련이 선수를 쳐서 이북 지역부터 점령하기 시작하고, 미국은 뒤늦게 원자폭탄을 투하해 한반도의 남쪽을 그대로 넘겨받는다. 그렇기에 미국이 먼저 진주했으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소련이 가만히 있을리는 없었기 때문에 분단될 확률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소련이 미국보다 늦게 참전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애시당초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하면, 미군은 머나먼 바다를 건너와야 하고 태평양과 한반도 사이에는 일본이 있으나, 러시아는 차만 타면 올 수 있다.[26] 물론 소련도 독자적으로 만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출혈이 컸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소련을 다그친 것.[27] 특히 루즈벨트는 후임인 트루먼과 달리, 그다지 소련을 견제하지 않았다.[28] 물론 공식적인 사직 이유는 신병의 문제였다.[29] 이승만이 해방 직전 돌베어를 임시정부의 광산고문으로 임명한 것은 사실이나 금품이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30] 민선의원 선거는 납세액을 기준으로 선거권이 부여됐기 때문에 자본가, 지주 출신이 많았던 한민당에 유리한 선거였다.[31] 입법의원의 절반은 간접선거로 선출한 민선의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군정청에서 임명하는 관선의원이었다.[32] 당시 그 누구도 동대문갑구에 출마하여 이승만과 겨루려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이 유력했는데, 느닷없이 최능진이 출마 선언하여 도전자가 생긴 것이다.[33] 정확히 말하자면, 최능진의 선거등록 문서를 서북청년단이 서류를 강탈하고 등록 자체를 무효화시켜 버리도록 온갖 공작을 벌인 것이다.[34] 한편, 최능진은 이 출마 건으로 이승만에게 단단히 찍혀버렸고, 1948년 10월, '혁명의용군 사건'(이 사건은 뒷날 CIC특무대 대장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진다.)을 빌미로 징역 5년 형 선고 받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터져 북한군에 의해 석방되었고(하지만 그는 결코 북한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중도파 국회의원들과 함께 '전쟁을 중단하자'는 평화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2015년에 결국 무죄판결을 받는다), 1950년 서울이 수복되자 다시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죄목은 '평화운동을 벌여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최능진은 이듬해 1951년 2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근교에서 전직 관동군 헌병인 특무대장 김창룡에 의해 총살형이 집행됐다.# 2015년 8월 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여담으로 최능진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2013년 별세한 정수장학회 전 이사장 최필립이다.[35]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 미국으로서는 냉전이 시작된 이상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남한에서도 농지 개혁을 시행해야 했다. 쉽게 말해 맞불작전 [36] 남한의 농지개혁 방식은 농지만 대상으로 한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이었다. 물론 당시 산업시설이라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토지는 농지였다.[37] 정치적으로는 반대 정파인 한국민주당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한국민주당의 중심 세력이 지주들이었기 때문.[38]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학제부터가 차등이 있었으며, 이 때문인지 광복과 정부수립 과정에서 국민의 교육열은 가히 폭발적이었다.[39] 당연히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에 협력한 친일파들도 있었다. 하지만 북한에 의해 숙청당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40] 우익 인사로 분류될 김구 역시 공산주의를 혐오하여, 친일 전력이 있는 인물들로부터 협조를 받았다. 김구가 사망 직전까지 머물던 경교장도 친일 재벌 최창학이 헌납한 건물이었다. 거기다 친일파는 해외 등지를 떠돌아다닌 독립운동가와 달리 국내에 완전히 자리잡았기에 한국의 정치, 행정, 경제 등 국내사정 전반에 정통했으며 적은 사례지만 독립운동도 지원했으며 정부에 자금 후원도 가능할 정도로 재력이 뛰어났기 때문.[41] 더글러스 맥아더가 뿌린 '맥아더 포고령'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대놓고 현재의 관청을 통해라고 명시했다.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어떤 놈들이 관청을 장악했는지 아는 사람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42]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우익 정치인과 고위 관료, 군인들(그리고 이들의 친인척과 후손들) 상당수가 1952년 공직추방령 해제 이후에 그대로 복귀하였고 미국도 공산주의 타도를 위해 아군이든 적군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실용주의적 포용 하에 이것을 묵인하였다. 미국이 친일파를 포용한 것도 이와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자유민주당(일본)요미우리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다시 일본 사회의 주류가 되었으며, 현재 문제가 되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침략 행위 미화도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다.[43] 이 대사는 신성모가 말했고 채병덕이 따라 말했고 이승만은 녹음방송했다.[44] 말할 때마다 지역이 바뀌고 아침이 추가되는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다.[45] 뭐 다들 알다시피 점심은 대전에서 먹고 저녁은 부산에서 먹게 되었다.[46] 피난이나 동선보도자체는 없는 게 당연한게 대통령은 적의 제거대상 1위이므로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47] 이승만은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을 압박해왔고 신생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2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을 협박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이승만 임기 때 종종 벌어졌다.[48] 당시 손원일 국방장관은 사령부 설치를 공표하면서, '옥상옥 조직이다'라고 좋지 않게 생각했다.[49] Prime Minister의 준말[50] Capt, Sihn says fight will be all over by this afternoon, in meantime has turned over full authority chief Army Staff Chae Pyong Tuk and radioed people to remain indoors and calm when tanks arrive. He says he will stay in Seoun with Army command to end. 국방장관 신성모는 전쟁은 오후에 끝날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동안 전권을 채병덕에게 위임하였고, 동시에 시민들에게 라디오로 탱크가 오더라도 진정하고 자택에서 대기하라고 방송하였다. 국군이 전멸할 때까지 자기도 남아서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말하였다.[51] 마산 경찰서는 제1차 의거가 일어나자 즉각 '빨갱이 조작'에 착수했는데, 국무회의는 4월 13일 오제도 검사, 조인구 치안국장, 하갑청 육군특무부대장으로 하여금 대공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차리도록 결의했다. '마산사건 적색분자 색출의 능률화'가 목적이었는데, 이승만 정권답게 빨갱이라고 조작하기 위해 엄청난 기구를 만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막 #) [52] 이 시기에 들어가면 고령으로 인해서 아예 없었다.[53] 개신기독교 계열(이승만에게 매우 동정적이다.)의 글임을 거르더라도 이승만 정권의 인의장막이 얼마나 두텁고 높았으며, 특히 이기붕에 대한 무한신뢰에서 이승만의 권력욕이 이를 더 크게 했음을 알 수 있다.[54] 대통령선거는 단일후보였으나, 이는 엄연히 대통령선거였다.[55] 망명은 망명신청자가 타국에 신청을 해서 그 국가가 승인하면 이루어진다.[56]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허정이 외교관 여권으로 내보낸 후 재입국을 불허했다.[57] 무투표 당선[58] 간접선거[59] 부정선거로 인한 4.19 혁명으로 하야 및 당선 무효. 제4대 대통령은 윤보선[60] 서울 우수현 남쪽에서 태어나 고향 이름을 본떠 기우제 '우'와 남쪽 '남'을 썼다.# [61] 원래는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서려 했다. 디데이는 5월 8일, 이 날은 3.15에서 두 달 뒤인 시점이다.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사람이 송요찬인데, 송요찬이 미국으로 가는 날이 5월 초였다. 그래서 5월 8일로 정한 것.[62] 공교롭게도 무풍지대에서 젊은 김영삼을 연기했던 배우 이인철 역시 이 드라마에서 이기붕을 맡았다.[63] 권성덕은 야인시대에 이어 영웅시대(2004, MBC), 서울 1945(2006, KBS 1TV)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출연하면서, '이승만 전문 배우' 타이틀을 얻었다. 시네마틱 유니버스[64] 이제는 아예 심영과는 연관성이 없는 김좌진이나 쌍칼, 시라소니, 신불출이 등장할 정도.[65] 더 위로 올라가면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참고로 이기붕은 효령대군의 후손.[66] 순종황제의 계후(繼后). 한국의 마지막 황후다.[67] 齊(제)로 썼지만 거처를 뜻하는 齋(재)를 대신해서 쓰는 경우도 있어서 수인'제'가 아니고 수인'재'로 읽는 것이 옳다.[68] 당연히 양녕대군파면 왕족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멀어진 후인데다(500년쯤 전에 왕족이었다는 소리다.) 이승만은 양녕대군파에서도 방계중에 방계이니 한국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이니 그걸 언급할 리 없다.[69] 거의 모든 화폐에 이승만이 실렸고 화폐의 이승만 초상화가 훼손될수 있다는 이유로 오른쪽으로 옮기던 시절이었다. 화폐의 인물 초상화가 원래 왼쪽에 있다가 가운데로 옮겨간 이유는 왼쪽이 있으면 좌익이라는 이유로 중앙으로 갔고, 자기 얼굴 접힌다고 오른쪽으로 다시 옮겼다.[70] 사실 이 항목에 링크된 조지 워싱턴처럼 건국초기인 19세기초 미국도 그런 인식이 있었다.[71] 이우 왕자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의 노력이었다. 장남인 이청 명의로 사유화되었다.[72] 참고로 윤보선 대통령이 출생한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이 건국되나, 윤보선 대통령은 같은해 8월생으로 출생시에는 국체가 조선이었다. 역대 대통령 중 대한제국 시대에 출생한 대통령은 없으며, 앞으로도 추가될 가능성은 없다.[73] 헤이그 특사 사건의 특사로 파견된 이상설이 이 마지막 과거의 합격자 중 하나였다. 시험 성적도 훌륭해서 병과 2위를 차지할 정도였다.[74] 같이 식사를 할 때도 맥아더가 이승만의 식기를 먼저 챙겨주거나 하였다고 한다.[75] 맥아더의 부친은 일찍이 일본 주재무관을 지냈으며, 더글라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이미 1905년에 일본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다.[76] 월튼 워커도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이승만이 싫어했다고. 그래도 그가 죽었을 때 매우 슬퍼하면서 사고를 낸 병사를 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어느정도 정은 들었는 듯하다.[77] 애초에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의 방침이 한국이야 어찌 되든 전쟁 끝내고 보자는 것이었다.[78] 그것도 당시 한국 남성 평균수명이 60년이 채 안되던 때다![79] 19대 대통령 재임시점 기준[80] 신탁 반대 운동을 하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발언을 한 연설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81] 같은 19세기 후반 출생으로 1차대전때 이미 사단장이었고 한 번 퇴역했다가 2차대전때 복귀해 6.25까지 현역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태평양 전쟁부터 인천상륙작전정도까지 알려져 있는데 알고 보면 짬밥이 상상을 초월한다.[82] 당시 표현으로는 호열랄(虎烈刺)[83] 정병준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으로 석사 학위를, 이승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하면서 한국전쟁과 제1공화국 시기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84] 연세대 사회학 교수.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이승만연구원장. 류석춘의 아버지는 박정희정부시절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과 공보처 장관을 지낸 류혁인이다.[85] 물론 극단적인 이승만 옹호자들은 정병준도 좌파몰이를 한다. 그러나 정병준은 양영조 소장에게 검수를 받거나 협력을 받는 등 좌파쪽 학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