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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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그룹 | 신세계그룹 | 한솔그룹 | 새한그룹 | 중앙그룹 | 동양방송

인물

역대 회장

이병철 | 이맹희 | 이수빈 | 이건희

주요 인물

홍라희 | 이재용 | 이부진 | 이서현 | 이윤형 | 김재열 | 임우재 | 최지성 | 장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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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현재

초대
이병철
(1938~1966)

2대
이맹희
(1966~1968)

3대
이병철
(1968~1987)

4대
이건희
(1987~2008)

5대
이수빈
(2008~2010)

6대
이건희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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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병철(李秉喆)

출생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사망

1987년 11월 19일

신체

167cm, 60kg

본관

경주 이씨 판전공파 39세손[1]

가족

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
배우자 박두을, 슬하 3남 4녀

종교

유교불교원불교


1. 개요2. 삼성을 만들고 키우다
2.1. 인재 관리의 삼성을 만들다2.2. 내 눈에는 돈이 보여2.3. 죽음
3. 사업철학4. 수집덕후5. 나무덕후6. 경쟁자들7. 생가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9. 루머10. 가계도

1. 개요[편집]

삼성그룹의 창업자로, 정주영과 함께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의 상징.

대한민국기업인. 경상남도 의령군 출신으로 호는 호암(湖巖)[2]이며, 본관은 경주다. 한국의 재벌인 삼성그룹, 신세계, CJ그룹, 한솔그룹, 중앙일보, 새한그룹이 다 이병철에게서 나왔고, 이 기업들은 '범 삼성가'라 불리며 재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아들 이건희보다는 손자 이재용훨씬 더 닮았다.

2. 삼성을 만들고 키우다[편집]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글공부에는 소질과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는 하나 신학문과 장사에서 수완을 보였다. 도쿄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건강문제와 더불어 신학문에 대한 흥미가 없어졌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게 되었기에 중퇴하고 귀국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병철 회장이 와세다대학을 중퇴한 뒤 귀국하고 바로 부친의 지원으로 삼성을 창업한 줄 알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귀국하여 고향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서울로 상경해 옛 친구들을 두루 만나며 거처를 잡았으나 취직을 못 했고, 2년 가까운 서울의 생활을 부친의 송금을 받으며 방황했다. 서울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집안일은 부친의 지휘 아래 형이 감당했고, 본인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아직 손을 대지 못한 고등소채를 재배해 보려고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오고, 개량돈과 닭의 원종도 들여왔으나 취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허잔한 마음을 달래려고 결국 이웃 친구들과 골패에, 즉 도박에 빠졌다. 그 정도는 한밤중까지 계속되어 늘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다가 그가 사업에 투신하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밤에 여김없이 골패에 빠져 밤 늦게 집에 돌아온 이병철은 당시의 나이가 26세로,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달빛에 비친 세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을 받았다고 한다. 너무 허송세월했던 자신의 방황을 자책하고 밤을 세워, 독립운동과 관리(官吏), 사업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며, 자신의 성격상 '사업이 가장 알맞으니 사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먼 훗날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3년간의 방황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헛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삼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칩시다.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습니다.

이후 부친에게 지원받은 쌀 300석분의 토지를 기반으로 사업을 일으켜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작으로 운수업에도 진출하였으며, 1938년 대구 서문시장조홍제, 허정구 등과 함께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1942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하였다.[3][4] 초기에는 부동산 투기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지며 사업이 몰락하고 부동산 투기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부동산 외의 사업은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었고, 경제적 흐름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짐작하는 대국적 안목과 수완으로 재기하기에 이른다.

6.25 사변이 벌어지자,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서울에 있었으나,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고 90일간 북한군을 피해다닌다. 이 때의 경험으로[5]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운전기사 위대식의 헌신으로 서울을 간신히 탈출하였으며, 1951년 부산삼성물산을 설립해, 전쟁으로 사방에 널리게 된 고철을 수집하고 다녔다. 2차 대전의 물자징발(物資徵發) 여파로 쇠가 부족했던 일본에 고철을 팔고, 다시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홍콩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 사업 6개월 만에 삼성물산은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올렸으며 1년 뒤에는 60억 원의 재산을 쌓으면서 재기하게 된 것. 또한 고철 수집 사업을 시작할 무렵, 전쟁 전에 홍콩에 수출한 면실박(棉實粕, 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깻묵) 대금 3만 달러가 도착해 다시 든든한 자본금을 갖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호재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던 구리 탄피들을 긁어모아 이를 재수출하는 사업까지 하면서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1953년에는 제일제당(현 CJ그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그룹 규모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손님에게 설탕을 탄 물을 대접할만큼, 시장에서 고급 기호품으로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 설탕 값을 낮추는데[6] 기여했으며, 양복 사업은 품질관리 부족[7] + 이미 시장을 선점한 외국제품의 영향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1957년 정부의 모직물 수입 금지조치 수혜를 입으며, 국내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

40 ~ 50년대에 갖은 시행착오를 거쳐오다 50년대 후반부터 뒤늦게 성장가도에 오른 정주영 회장과 달리, 50년대 이승만 정권 시기에 이미 기틀을 확실히 다져 성장한 기업인이었다. 선친(先親)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던 덕분에 이승만 정권과의 연고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이 회장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제일모직 같은 경우는 완공된 공장에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애국적인 사업"이라는 찬사를 보내며,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서 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한 해 비료 양은 40만 톤이었지만, 충주와 나주에서[8] 생산되는 비료는 6만 톤에 불과해, 이승만 정부로부터 달러 지원을 약속받으며 비료 공장 설립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런 50년대의 탄탄한 성장으로 5.16이 일어날 무렵에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이 된 상태였다. (오원철은 삼성이 비료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국내비료수요를 멋대로 해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비료공장 설립은 수포로 돌아간다.이 후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검찰에 연행되어 벌금 50억을 내며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16이 일어난다.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는데, 재계 1위 기업인인 이병철은 '부정축재자 1호'로 불렸다. 군사정권은 이병철 등을 부패 혐의로 몰았으나 경제 운용과 성장을 위해 이들과 타협하였고, 이 회장도 군사정권과 협력 관계를 갖게 된다. 정부의 도움으로 비료공장 설립도 재개할 수 있었다. 지방의 명망 있는 양반가 출신으로 유교적인 소양을 중시했던 이 회장은, 화폐개혁 당시 대통령의 경제 자문을 맡기도 했지만, 초창기 反기득권적 성향이 강했던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9]의 관계에 가까웠다는 후문.[10]

10년의 곡절 끝에 비료 공장이 세계 최대 규모인[11] 연 36만 톤 생산이 가능한 사업장으로 완공되려던 즈음,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며 삼성은 全국민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이병철의 지시하에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이병철은 완공 예정인 한국 비료 공장(한비)을 국가에 헌납하고,[12] "한수(漢水) 이남 제일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경주 최씨 가문에게 기증 (寄贈)받은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를 정부에 넘기는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경영을 장남 이맹희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1968년 삼성그룹에 다시 복귀한다. 이후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막내아들(삼남) 이건희삼성그룹의 차기 수장으로 지명된다.[13][14]

1960년 4.19민주혁명에 의해서 부정축재자로 몰리고 일방적으로 비난 당하는 상황을 겪으며 정계에 진출하려는 뜻을 품고 몇몇 명망 있는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였으나 이내 포기했지만, 그에 대한 대안 확보의 차원에서 언론사를 설립해, 라디오 서울, 동양 텔레비전 방송(TBC, 현재 JTBC의 전신), 중앙일보가 만들어진다. 이 중 TBC(현재 KBS 2TV)는 1980년 전두환이 등장하면서 KBS로 통폐합된다. 신군부에 의해 동양방송이 강제적으로 통폐합되었을 때 당시 방송계에선 이 회장이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은 한국비료 헌납 때도, 언론통폐합 때도 기복(起伏)을 드러내지 않고 다음날 출근해 집무실에서 일을 봤다고. 근데 언론통폐합 때면 이미 아버지랑 사이가... 그리고 그 와중에도 다른 사업으로의 진출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일찍이 한일은행·상업은행·조흥은행 등과 안국화재·동방생명 등을 인수하였고,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대한암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하였다. 삼성장학회 설립, 대구대학[15]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삼성전자·삼성전기 등을 통해 첨단전자통신 및 반도체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2.1. 인재 관리의 삼성을 만들다[편집]

"조직이 사람을 움직이는 기업은 망하지만,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은 발전한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 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5퍼센트는 탈락하고 30퍼센트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65퍼센트의 사람이다. 반 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국가의 발전이 유능한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면 기업의 발전은 유능한 경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 일생의 80퍼센트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은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60년이 걸렸습니다."


생전의 이병철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고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 이렇게 눈여겨 봐뒀다가 일을 맡긴 사람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6.25 전쟁으로 생명의 위기를 겪었지만[16], 충직한 운전사 위대식[17]의 도움으로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를 구해 가족들과 서울 삼성물산공사의 임직원들이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고, 서울의 사업 기반이 한 순간에 북한군에게 몰수되어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대구의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를 건실하게 경영했던 이창업이[18] 건넨 3억 원으로 재기할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일모직 공장을 지을 때는 와세다(早稻田) 재학 시절에 읽고 충격을 받은 <여공애사(女工哀事)>의 영향으로 사원들의 기숙사를 짓는 데도 공을 들였으며[19],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 사원들이 오갈 데가 없어지자, 원하는 계열사로 이직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1965년에는 5.16 직후 처형당할 뻔했던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을 포섭해 중앙일보를 창간, 일찌감치 자사(自社)에 우호적(友好的)인 언론을 만드는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고용된 사장이지만, 전직 국무위원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홍진기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으며, 나중에는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20][21]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회장이 O를 친 사람은 반드시 채용, < > 표시를 하면 면접 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사람(이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X표는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는 후문이다. 회장 옆에 일본의 골상학(骨相學)[22] 전문가가 동석해 사람을 판별한 적 있으며, 사실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내의 유명 관상가가 동석한 적도 있다고 한다.[23]

어느 기업이든 최고경영자를 잘 두어야 기업이 잘 굴러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는 가급적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을[24]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에 무척 신경썼다고 한다. 아래의 내용은 1984년 5월 22일자 일본 경제전문지 <<재계>>의 창간 30주년 특집호에서, 이병철과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 당시 상황을 대담(對談)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Q : 이 회장은 경영철학에서 인재 육성이 중요과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A : 지금 삼성그룹은 10만 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교육을 중요시하도록 하기 위해 의무라든가 사람 됨됨이를 입사(入社) 때부터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룹 내에는 4개의 사원연수소를 갖추고 그중에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연수원도 마련돼 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은 기초일 뿐이고, 입사 후 교육을 통해 성장케 한다는 생각입니다.

2.2. 내 눈에는 돈이 보여[편집]

1982년 암 수술의 고비를 넘기고 희수(喜壽, 77세)를 5년 앞둔 시점에 이병철은 2년 전, 일본 후지(富土) 화학 회장인 이나바 슈조(稻葉秀三) 박사와의[25] 대담 중 나온 반도체에 관한 발언을 염두에 두고[26], 미국의 반도체 산업 시찰(視察)에 나선다. 1974년 이병철의 3남 이건희가 반도체 산업 진출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 위기를 맞자 이병철이 삼성전자로 하여금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회생시키는[27][28]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겪어본 바가 있고, 그 후 몇 년 동안 일본, 한국의 반도체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며 정보를 입수해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측해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 일본 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에서, 세계 1등 수준이 되어야 승부를 걸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든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도박과 다름없었다.[29]

하지만, 반도체 시장의 진입 장벽은 높았다. 1984년 10월, 미국 마이크론사가 삼성 반도체에서 겨우 수출하기 시작한 64KD램 가격을 기존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업계들이 덤핑 공세에 나서며 가격이 30센트로 폭락한 것. 이에 삼성이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면서 84년 한 해에만 1,300억 원의[30] 적자를 보게 되었다. 부하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하였으나, 이병철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 말하며 꿋꿋이 밀어붙였다. 64KD램 가격이 폭락했지만, 다른 1,000여종의 반도체는 이익이 나는 만큼, 앓는 얘기를 자제하고 계속 공장의 생산라인 증설에 나서며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것이다.

1984년 10월, 악몽의 덤핑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업계에서 기적이라 부른 256KD램 세계 최초 개발에 성공하고, 86년에는 1메가D램을 출시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비록 개발 전후에 적자를 보더라도, 확고한 기술력과 관리능력이 갖춰진 이상,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 특히 256KD램 제품은 시장 출시 1년 만에 세계 D램 시장의 1/10을 점유, 64kd램으로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삼성전자는 시장에서 반석(盤石)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이후 미국, 일본의 선도자들을 차례로 추월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다.[31]

여담이지만 삼성이 대우그룹보다 작은 때가 있긴 했어도 삼성이 작은건 아니었다. 1980년대에 한국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는 단 3명이었는데, 정주영, 신격호[32], 그리고 이병철이었다. 김우중이 없는 건 무시하자. 오히려 LG의 구자경이 있어야 되지 않나?. 시작부터 건설사이고 중공업 위주로 나아간 현대와 달리 별 사업을 다 했다. 그리고 돈을 잘 벌었다.(...)

2.3. 죽음[편집]

생전에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33] 10년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1987년 77세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암 발견 초기부터 관련 질병 자료를 다방면으로 수집해 치료에 활용하며 관리한 덕분에 투병 중에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으며, 특히 2000년대 들어 약진한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착수한 시기가 이 투병 시기였다.

여담으로 폐암은 유전될 수 있는데, 큰 아들인 이맹희 전 회장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삼남인 이건희 회장도 폐질환이 발병해 불편을 겪었다. 또 이병철의 대를 잇는 범삼성가에는 일반인보다 약한 폐와 샤르코-마리-투스 병[34]이 유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건희은 삼성병원에 입원전까지 겨울에는 주로 하와이 별장으로 떠나있었으며 이재용 부회장 집의 공기상태는 하와이 별장에 준할 만큼 맑게 해놓는다고.

부모님이 천석꾼이라 할 만큼 재력이 있었지만, 난세를 살아간 기업인으로서 젊은 시절 2차례의 사업 실패를[35], 전후에는 국내 정치적 변동의 풍랑을 겪으면서 단련되었으며, 요즘 돈의 가치로 3억 원의 자본으로 삼성상회를 시작해 국내 1위의 대기업을 일구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사카린 문제나 국내 1위의 자리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관계 로비의 모습까지 깨끗하다고 볼 수 있는 기업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휴전 협정 후에도 세금을 전시(戰時)처럼 고율(高率, 117%)로 유지해 세금 제대로 내고 기업을 운영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 무조건 부패 기업인으로 몰아가는 건 무리가 있다. 세간에서는 대부분 이병철의 재력(財力)에 초점을 맞췄고, 훗날 3분파동 당시 담합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제일제당의 설탕 판매가 호조(好調)에[36] 이르자 직원들이 제기한 가격 인상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설탕 가격을 유지해 국민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돕고자 했던 것도 사업가로서의 이병철의 모습이었다.

3. 사업철학[편집]

사람 욕심이 많아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라고 말할 정도로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였다. 진대제, 이윤우를 비롯해 이임성(일본 샤프전자 고문), 이상준(미국 자일록 기술개발 책임자), 이일복(전 인텔 근무), 이종길(미국 인터실, 사이너텍 CMOS 제조수율 개선 기술자), 박용의(미 웨스턴디지털, 인텔사 메모리 설계 기술자)로 대표되는 박사급 인재들을 모셔왔고, 초창기 미국에서 생활하듯 청바지 차림으로 첫 출근을 한 황창규를 용인하며, 그를 나무라려 하는 임원을 말리기도 했다. 또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사업보국의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이러한 경영이념을 집대성한 호암자전에서는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언급했다.

또 호암자전에서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며 동양방송중앙일보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노조를 싫어한 기업인으로도 유명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삼성의 무노조 정책을 만든 사람.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은 무조건 지키고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출근해서 결재를 하다 펜을 딱 놓는 시간은 오후 12시30분, 점심식사 시간이고 마치 군인과 같이 정해진 스케줄을 지켰다 한다. 후임이자 아들인 이건희 회장과는 다른 게 이건희 회장은 딱히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룹 차원의 귀빈을 접대하는 영빈관 격인 승지원이나 자택에서 일을 보기도 했는데, 밤을 지새워 업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아무래도 막 성장하는 때였던 이병철 시절과 이미 국내에선 정점을 찍고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는 이건희 시대의 차이점 이라 할 수 있겠다.

4. 수집덕후[편집]

사적으로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고 욕심도 많았다고 한다.[37] 호암미술관에 있거나 현재 한남동 리움미술관으로 옮겨진 어마어마한 국보급 문화재들은 이병철 회장이 주도적으로 모은 것들. 다만 이들 중에는 도굴품으로 여겨지는 것을 사들인 것도 상당수라는 소문이 고고학계에 퍼져 있다. 심지어 신라 불교 사리유물이나 금림왕 같은 가야금관 유물 도굴과 연결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38]이 장물 취득 혐의로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고. 이에 대해 미술계 일부에서는 한국 고미술품들이 해외로 흘러가느니 차라리 삼성가에 있는게 낫지 않냐는 소리도 있지만, 애초에 도굴범들을 후원하고 사주했다는 얘기도 있어서(...) 군사정권 시절 고고학계가 자금난에 허덕일 때 일부 도굴꾼들이 고급 장비를 갖췄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잭을 동원한 도굴꾼과 나무 전신주를 사용하던 교수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여튼 사실여부를 떠나 그만큼 삼성가에서 열을 올리며 모은 미술품이 엄청나다는 소리.

심지어는 그 수집벽을 셋째 며느리인 홍라희에게 계승시켰는데, 박물관 설립 전부터 3달 동안 인사동에 나가서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킨 것. 당시 돈으로 10만 원 상한으로 매일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켰는데, 당시 국립대 등록금이 5만 원이었다니 지금 돈으로 치면 매일 대략 500만 원어치의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킨 셈.(...)

재벌로는 이례적으로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발굴단에게 단지 터의 크기만을 물어보고는 당시 돈 3만 원을 선물하고 떠났다고 한다.

5. 나무덕후[편집]

수집 뿐만이 아니라 나무도 정말 좋아했는데, 공장부지 안에 있는 나무마다 번호를 붙혀 관리하게 했고, 나무그늘 밑에 맥문동을 심어서 지피식물로 활용하는 지혜를 가장 먼저 보여준 인물로 약용식물로 쓰이던 맥문동이 조경식물로 활용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태산목을 특히 좋아해 이병철 생가와 제일모직부지에도 태산목을 심어놓았다.

6. 경쟁자들[편집]

이병철과는 띠동갑(1922년생)으로, 신중하고 심사숙고하는 면모, 사전에 철저히 공부해 사업에 뛰어들어 시행착오를 줄이는 모습이 호암과 흡사한 데가 있었다고 한다.[39] 유통업(백화점), 숙박업(호텔), 그리고 식품업(제일제당 백설햄)에서 롯데의 신격호와 경쟁을 벌였다. 삼성그룹이 원래 국수제조업으로 출발했고, 설탕을 만드는 제일제당이 식품사업에도 뛰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호암이 에버랜드의 전신인 용인자연농원을 세운 후 일본에서 들여온 돼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햄을 만들어 팔게 되었는데, 롯데 역시 신격호의 동생 신준호 사장이 롯데햄우유 법인을 설립해 햄 및 소시지를 가공-생산하면서, 이병철 vs 신격호 두 사람은 일종의 대리전을 치르게 된다.[40] 제일제당이 백설햄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롯데는 롯데햄을 출시해 승부를 걸고, 1987년 제일제당이 미국 호멜사의 햄인 스팸(SPAM)을 라이센스 생산하게 되자, 이에 롯데햄은 토종 브랜드 로스팜으로 맞불을 놓는 등 경쟁과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변신해온 두 기업은 현재도 국내의 식품업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

백화점과 호텔 사업 경쟁은 이미 삼성 산하의 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이었지만,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 "유통-숙박업 = 좋은 입지의 부동산 찾기"라는 걸 체득한 신격호 회장이 직접 업무를 챙겨, 국내 주요 역세권 부지를 매입하는 전략을 전격 실행,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다. 1979년 12월, 이미 가장 실속 있는 땅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가 된 (주)롯데쇼핑이, 6년 전에 건립된 37층 규모의 롯데호텔[41] 인근에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 쇼핑센터 본점을[42] 세우며, 신세계, 미도파 백화점의 독주 구도를 깨뜨리고 선두 자리를 차지, 새로이 시장의 판도를 주도해나가게 된 것. 이후 가세하는 현대그룹, 뉴코아, 그랜드 백화점과 함께 경쟁하며 본격 국내의 소비문화를 선도하게 된다. 1991년에는 롯데백화점 매출이 업계 총매출의 1/3에 해당하는 1조 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호텔롯데는, 신 회장이 주목(朱木), 코린트 양식의 기둥, 자판기 설치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현장에서 차츰 독자적인 운영 노하우를 개발해, 설립 23년차인 95년에는 총 50만 명의 외국인이 투숙해 3억3천만 불의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현재에도 호텔신라와 함께 끊임없는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다. 90년대 후반에는 운영 기법 관련 로열티를 0원으로 할 만큼 노하우가 축적된 상태.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건너는 안정 중시의 매우 보수적인 경영방식으로, 현대 정주영 회장같은 화끈한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이 내실경영으로 IMF 사태의 파고를 넘기고, 유통업계의 1인자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다시 한 번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5살 연하로 활동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삼성과 함께 한국 재계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현대그룹의 수장으로서, 반도체, 중공업, 유통업(백화점), 건설업 등지의 분야에서 팽팽한 경쟁을 벌여왔다. 두 사람 모두 1류를 추구하고 1등이 되어야 살아남는 승부의 갈림길에 수없이 서봤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회사를 이끌어가는 형태는, 세심-치밀한 사전준비[43] 끝에 착수해 성취해내는 이병철과, 저돌적이고 돌격형으로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정주영이 서로 달랐다. 국제적인 운동경기 유치전에서는 정주영의 저돌, 돌격형이 더 잘 통해, 정 씨와 롯데 유창순 사장이 주축이 되어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것과 달리, 호암은 국제대회 유치전에서 실패를 맛본 후, 후원 및 지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삼남 이건희가 IOC 위원 신분으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전에 관여해 성공한 건 훗날의 일.

대우그룹을 이끌었던 김우중과도 경쟁관계였다. 다만, 동향이자[44] 아들뻘(1936년생)인 김우중이 평소 호암을 깍듯이 모셨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원만했으며, 김우중이 정계 투신 및 선거 출마를 상의해오자, 그를 극구 말리기도 했다.[45]

이병철 같은 치밀한 계획성은 없었지만, 만렙에 가까운 대인관계 능력과, 홍보 감각, 회사 전용기를 써가면서까지 전문가를 초청해 조언을 구하며 공부하는 자세로 뭇 사람들의 마음을 사며 회사를 대기업으로 끌어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삼성과 현대그룹에서도 사업장이 있는 지역민들을 돕는 방안을 실천에 옮겼지만, 그 결과물을 알리는 측면에서는, 지식인들과 젊은 대학생들, 지역민들의 호감을 산[46] 대우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 측면이 있다. 90년대 초반에 "김일성"을 만나 독자적인 대북 커넥션을 구축한 양반이다

대우그룹이 파산하기 전까지 중공업, 건설, 백색가전 부문에서 각축을 벌였으며, 97 ~ 98년 경영난에 봉착한 쌍용자동차를 인수할 때는 (부채를 떠안는 대신) 상징적 의미로 1원 인수를 제안한 삼성과 달리, 소정의 보상액수를 지불하며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법정관리 및 일부 분할매각 과정을 거치는 곡절을 겪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이때 삼성이 쌍용차를 인수했더라면, 무쏘, 액티언의 스포츠형이 지금처럼 (법규정 때문에) 별도로 트렁크 부분을 붙이는 형태가 아닌, 완전한 일체형으로 출시되고, 중국이나 인도 신흥업체의 기술연수원 신세가 아닌, 국내자동차 업계의 (현대-기아차) 독과점 구조를 막는 한 축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의 결과론이 남아있기도 하다.

7. 생가[편집]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이 회장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 달성공원 건너편에 있는 옛 삼성상회 터에는 삼성상회 실물을 1:250으로 축소한 청동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CJ의 역사관에는 홀로그램으로 이 회장의 흉상을 구현해 놓았다. 그런데 정작 노년에 살던 생가는 지금 방치 중이다.(...) 삼성그룹에서 옛 제일모직 공장 부지에 기부채납한 대구오페라하우스에는 이 회장의 동상을 설치해 놓았으며, 근처 도로의 명칭도 호암로로 변경하였다.[47] 이 회장이 건설자금을 지원했다는 혜화동 경주이씨중앙화수회회관 앞에도 이 회장 흉상이 있다. 또한 삼성그룹이 운영하는 성균관대학교에는 이 회장의 호를 딴 호암관이 있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MBC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전광렬이 청년 역, 정욱이 장년 역을 연기했다. 정욱의 경우, 제3공화국에서도 이병철 역을 맡은 경험이 있어 작중 라이벌격인 정주영 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렬함이 부족한 이병철 회장의 캐릭터 구성에도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듯하다. 다만 정욱은 아들의 다단계 사기행위에 이 회장 연기경험을 이용, 이 회장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등 협조하는 바람에 구속당하였던 흑역사를 표출하였다.(...) 그리고 정욱은 현재 출연금지 연예인이 되었다.

SBS드라마 야인시대 1화, 최종화, MBC드라마 영웅시대 56화, 제3공화국 23화에는 국회의사당에서 김두한사카린 밀수 사건에 의해 삼성그룹한테 협조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인사들[48]한테 오물을 투척하였던 장면 연기만을 내보였다.

한국 영화 중으로의 <또 하나의 약속>에서 삼성전자의 회사원으로 활동하였던 황유미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는 삼성전자가 그녀의 아버지이던 황상기(극중 상구)의 소송 상대 회사로 등장하였고 <죽이고 싶은>, <투혼>(롯데엔터테인먼트 배급) 에도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가 반드시 이겨야 할 중요 상대 구단으로 등장하여 장면 연출하였다.

9. 루머[편집]

  • 라이벌로 흔히 언급하는 모 왕회장보다 여자 관계는 점잖았다지만, 일본인 소실은 그 존재가 분명하다. 적자들도 도쿄 유학시절 소실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당대 제일의 부호의 가족사였던 만큼 세간의 관심이 컸으며, 훗날 김영하(만화가), 박봉성 같은 만화가들이 여기서 모티브를 딴 기업만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 호남을 배척했다느니 하는 거짓된 소문이 있으나, 오히려 군사정권 시절에도 호남의 지역 수재들이 삼성에서 임원이 된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일례로,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사장단에 새로 발탁된 몇몇 호남 출신 인사들은 이병철 창업주 시절에 입사해, 성과를 쌓아 임원까지 승진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역시 "세간의 루머와 다르게 의외로 지역색이 옅었다."며 놀라워했다는 후문. 걍 능력있음 쓰는거지사실 회사에서 사내정치가 중요하다지만 지역에서부터 갈라버리면 회사 분열은 순식간이기에 지역색을 줄이는 것이 좋다. 즉, 요는 회사에 "수익"을 잘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여부이지, 출신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게다가 며느리이자 이건희 회장의 아내인 홍라희 여사도 호남 출신으로, 본인도 전주에서 태어나 부모님께서 이름을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란 뜻의 ‘라희(羅喜)’로 지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1989년 광주전자(주) 설립이나 야구팀 선동열 감독 선임 등... 이병철이 "호남 사람은 절대 뽑지말며 뽑더라도 절대 요직에 앉히지 마라"느니 했다는 거짓된 소문은 완전히 허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병철 창업주의 인사방침은 온정주의(溫情主義)가 배제된 철저한 능력주의였으며, 경영실적이 나쁜 사장은 가차없이 인사 조치되었다. 생전에 실제로 발언한 인재관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그릇"의 크기만큼 일한다. 사장은 사장의 그릇이 있으며, 상무는 상무의 그릇이 있다. 사장의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을 사장에 앉혔을 경우에는 그 사람도 죽고 그 직책도 죽는다.

    즉 결국은 실적 + 그 사람 됨됨이라는 이야기이다. 2010년대 들어 사장단에서 영남출신 비중이 늘긴 했지만, 차별로 인한 것이라기보단, 1. 이 무렵 정권을 잡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서울, 영남출신의 고관 발탁이 늘었다는 점에서 이들과 연결될 수 있는 사장단을 구축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과 관련지을 수 있다. # 롯데그룹의 사례 2. 그리고 이 시기에 발탁된 사장 일부가 이재용의 후계구도 확정 관련 일처리를 했던 사람들이란 점에서, 창업주의 고향출신 비중을 늘려 일종의 친위세력을 구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실적에 따라 그 뒤에 있는 서울, 강원, 충청, 호남 출신 임원들로 대체될 수 있는 고연봉 계약직이다. 실제로 이들 인사 중 일부는 2016년 후반기를 강타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다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 가끔 인터넷에 이병철이 이완용 후손이라는 포스팅이나 그림이 떠돌기도 하는데(디시인사이드 정보전사 글이라든지), 물론 이완용 후손 중에 이병철이라는 사람이 있지만, 그 이병철과 기업가 이병철은 동명이인일 뿐이다. 일단 이완용은 우봉 이씨, 이쪽은 경주 이씨라서 본관부터 다르다. 그러니 괜히 헛소문 내다가는 인실좆 당할 수 있으니 주의하자. 물론 삼성가에서 저런 내용을 일일이 대응하지 않아서 10년 가까이 저런 루머 포스팅이 보존되고 있지만...

10. 가계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범 삼성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범 삼성가 참고.

[1] 경주 이씨 39세손 '相'자 항렬이지만 항렬자를 쓰지 않는다. 연령대에 비해 항렬이 낮은 편이기도 하다. 손녀뻘인 스케이트 선수 이상화와 같은 항렬.[2] '호암아트홀'과 '호암미술관'에 붙는 그 호암이다. 성균관대학교에도 '호암관'이 있다. 고향인 의령 정곡면 생가 앞에도 '호암길'이 있다.[3] 커피로 유명한 동서식품을 키워낸 김재명 전 제일제당 사장이 이때 삼성으로 합류, 이병철과 30여 년 동안 동고동락한다.[4] 동서식품은 원래 1967년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커피사업을 연구해 제일제당의 커피사업부로 출발할 예정으로, 맥스웰하우스 동아시아 판권을 갖고있는 일본 맥스웰하우스의 책임자 야마모토와 합작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동기생 서정귀를 지원한 이후락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7년 뒤 제일제당의 임원들이 자금을 출자하여 사업장을 인수해, 대기업으로 육성한다.[5] 모두가 평등하고 잘 살 수 있다는 선전과 다르게, "전시(戰時) 체제"로 점령지역 시민들의 살림살이를 징발(徵發)하였다. 더욱이 삼성물산처럼 물자를 쌓아둔 창고가 있는 경우는.[6] 근당 300환 -> 50환[7] 설비 자체는 유럽에서 괜찮은 것을 이것저것 골라 들여왔기 때문에 어디다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물건 만드는 공정관리와 사후 관리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공들인 것에 비해 결과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 1987년 이병철 사후 전권(全權)을 잡은 이건희가 품질 중시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외치면서 마무리를 유독 강조했던 것도,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8] 방위산업체이자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급성장한 아시아자동차를 설립한 이문환이 독일인들의 공장을 인수, 확장한 것이다.[9]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이 한 말로 정계, 관계와는 멀리도 가까이도 않으며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얘기.[10] 사실 후대인 박근혜의 측근들이 막무가내 식으로 대기업들의 "후원"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던 것과 다르게, 박정희 정권 시절만 해도, 필요한 경제 현안에 맞추어 기업인들과 주고 받는 형태의 정치적 거래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 시절에 활동했던 어느 기업인은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그때는 저렇게까지 무식하게는 안 했다."라는 소회를 밝히기도.왜 그랬어[11] 이병철이 이승만 정권 때 비료공장 설립 계획을 세울 때 최대 규모의 비료 공장이 연 18만 톤 규모.[12] 이때 헌납한 한국 비료는 1992년 이건희가 2,400억 원에 다시 인수한다.[13] 차남 이창희가 이에 반발해 1969년 ~ 1970년 정권 인사들을 끼고 부친을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한다. 이창희는 훗날 부친에게 용서를 구했으며, 이게 일정 부분 받아들여져 이병철이 산하의 몇몇 알맞은 업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고.[14] 하지만, 성정이 불같았던 장남은 선친 생전에 갈등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며, 호암이 장남 이맹희 회장에 대해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맹희는 1987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이맹희 인터뷰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이를 후회하고 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참고로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분사(分社)한 건 이병철 사후 이건희 체제가 확립된 1993년.[15] 지금의 대구대학교와 다른 대학이며, 영남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이다.(현재의 영남대학교는 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통합한 학교다.) 유명한 경주 최씨 일가와 협력하였다. 여기서도 박정희와는 악연...더불어 최씨 일가 지못미...[16] 이 무렵 이병철이 서울에서 타고 다닌 쉐보레 승용차도 빼앗겼는데, 박헌영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그 차를 타고 가더라는 일화도 있다.[17] 훗날 이사급 대우를 받는 운전기사로 장안의 화제가 된 사람이다.[18] 최초 이병철의 와세다 대학 선배 이순근이 전문경영인을 맡아 삼성상회를 확장하는 데 공헌했지만 월북을 했던 고로, 이 시점에서는 이창업이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이병철이 서울 사업으로 신경쓰지 못한 몇 년 동안 대구 사업장에서는 청주(淸酒) 월계관과 삼성 사이다 판매로 큰 돈을 벌었다고.[19] 실제로는 최저임금도 주지 않으며 여직공들을 부려먹었다는 비판이 있지만, 이런 대우조차 타 업체들에 비하면 독보적으로 나은 것이었다고 한다.[20] 홍진기의 딸이 이건희의 아내인 홍라희다. 이후 이건희 회장 후계 체제 과정에서 장인인 홍진기가 이병철 회장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지어는 이건희의 한국반도체 인수에 대해서도 이병철 생전 부친의 눈 밖에 날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며, 배후에 (홍진기의 영향을 받은) 이병철이 있었을 것이라 의심하는 시선도 있을 정도. 두 형이 아버지가 다시는 삼성에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믿고 적극적으로 독자경영을 하다가 날라갔는데 이건희가 독자적 판단으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요지.[21] 하지만, 차남은 군부에 이병철의 비위를 밀고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장남은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했다는 의심을 받은 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비록 <호암자전>에는 자식들에게 흠이 될 부분이나 칭찬하는 대목이 거의 없지만(호암이 후계자 이건희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도 "의욕이 있었다."고 간략하게 묘사됐다), 일본 업계에서 분석한 삼성 반도체 개발 성공 요인을 인용한 대목에는 "(이건희의) 한국 반도체 운영 경험"이 명시되어 있다. 이맹희의 회고에 따르면 호암과 일민(홍진기)은 서로를 어려워하며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영향력 행사와 관련지을 수 있는 건, 장인이 경영수업을 해준 건데, 이건희의 증언에 따르면, 법률, 사회문화, 역사, 문학을 현재 사례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케이스 스터디 방식의 교육을 해줬다고.[22] 삼성에서는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23] 삼성에서는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 관상가가 강연 자리에서 밝혀 세간에 알려졌다.[24]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망(信望)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25]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 아래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수립했던 인물.[26] “일본 기업은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우주·해양공학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고,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다.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전략산업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수입은 급증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27] 닷컴 버블 사태로 IT 산업이 휘청거렸던 2001년, 이건희의 장남 이재용 삼성 상무도 부친과 같은 과정으로 설립한 회사 일부를 겨우 건지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28] 이재용 상무가 설립한 회사 중 e-learning 업체인 크레듀가 예상 외로 선전하며 살아남았다. 자격증 바람, 지식 정보사회로의 전환 과정의 수혜를 누리며, 시장을 선점한 휴넷과 업계 선두를 다투는 선도 기업으로 성장한 것. 2016년부로 사명을 멀티캠퍼스로 변경한 상태.[29] 사실 반도체 산업 진출을 결심할 수 있었던 건, 이병철 회장이 일본통으로,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일본산업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일본 경제史의 현장을 직접 탐문하며 이론과 실제에 모두 밝았던 만큼, 반도체 산업의 미래도 빨리 캐치할 수 있었던 것. 이건 와세다 대학 졸업하고 수시로 일본 들락거린 이건희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아들은 중국에 관심이 많다. 슬슬 인도에도 관심이 많은듯. 손주쯤 되면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등.[30] 80년대 초중반 1,300억 원이면 2010년대 중반의 3조 원이 넘는 규모이다.[31] 이병철의 별세 17년 뒤인 2004년에는 TV와 휴대폰 사업의 호조로 전자제품의 세계최강자 소니의 시가총액을 제칠 만큼 사세(社勢)가 커졌다.[32] 포브스는 일본인으로 분류한다. 시게미츠 타케오. 참고로 1980년대 버블경제 버프로 세계 부자 순위 4위였다고. 그러나 버블이 꺼지며 내려갔다. 2010년대 현재는 국내 40위 안에 들어가는 듯.[33] 진찰을 맡은 일본인 의사가 "가벼운 질환이 있는데,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완곡하게 말하는 걸 듣고 눈치를 챘다고.[34] 약어로는 CMT, 손과 발의 근육이 위축돼 점점 기형화되는 희귀병. 부인 박두을 여사 집안의 유전질환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이재현 회장이 이 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다. 이부진 사장도 이 병의 인자가 있어 발병할 수도 있다고 한다.[35] 부친의 돈으로 호기롭게 시작한 부동산 사업은 태평양 전쟁으로 몰락, 양조장 등으로 다시 재기했지만 6.25전쟁으로 서울의 사업 기반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피해를 입었다.[36] 이맹희의 회고에 따르면, 제일제당에서 설탕을 만들기 전 국내 시장가격은 3백 환/근이었지만, CJ가 설탕을 시장에 푼 후부터 50환/근을 밑도는 수준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50환 가격으로도 충분히 타산을 맞춰, 1년 뒤 축적된 이익금에 차관을 더해 제일모직을 설립했다는 후문.[37]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을 보면 이병철 회장은 양복도 일반 브랜드 양복이 아니라 도쿄의 한 골목에 있는 어느 개인 양복점에서 맞춤식으로 지은 양복만을 입었고, 만년필은 항상 워터맨을 썼는데 수십 개를 사서 쓰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필기감이 좋은 것들만 찾아서 썼을 정도로 일류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 그러한 이념은 현재의 삼성그룹을 비롯한 범 삼성그룹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엘리베이터만 해도 탑승감이 좋은 독일제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만 쓰는 걸 보면 말 다한 셈.[38] 현재 롯데푸드의 모체가 되는 일동산업의 창업주.[39] 다만, 호암처럼 입사 후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인재들에게 위임하는 면모는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며, 아이디어가 괜찮은 사원들의 의견을 경청해 반영하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그 정도만 돼도 대단한 건데...[40] 롯데그룹의 상징성이 있는 제과업은 제일제당이 적극 뛰어들지 않고, 대신 해태그룹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두 회사에서 운영하는 야구단 간에 트레이드도 하지 않았을 만큼,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41] 높이 152m로 63빌딩 건설 전까지 국내 최고층 건물이었다.[42] 1970년대에는 서울 4대문 안에 백화점 신설이 불허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허가 사인을 받는 대신 명칭을 백화점이 아닌 쇼핑센터라 하였다. 시장명을 백화점으로 바꾼건 개점 9년 뒤인 1988년 11월.[43] 사업착수 전에 검토하는 큰 줄기항목만 90가지였다고 한다.[44] 대구에서 나고, 부산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중학교를 다녔다.[45] 이 선거 출마 건으로 김우중이 호암에게 서운한 감정을 비추기도 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고.[46] 선친의 고향인 제주도(선친의 활동 당시에는 전라남도의 행정구역), 호남, 충청 등지에 병원을 짓거나, 야구장(무등경기장) 건설에 제일 많은 지원금을 쾌척하면서 지역민들의 호감을 샀으며, 전국 대학교수들의 연구 비용을 지원하고 결과물을 대우학술재단에서 책으로 편찬하였다. 배에 의료장비를 싣고 외진 섬을 돌며 진료하는 의료 봉사활동으로 인심을 얻기도 하였다.[47] 323(-1)번이 다니는 남침산네거리와 홈플러스 대구점 사이의 도로.[48]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김정렴 재무부 장관, 민복기 법무부 장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