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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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px-Seal_of_Seoul.svg.png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

민선2기

민선3기

민선4~5기

제31대
고건

제32대
이명박

제33~34대
오세훈

파일:국회상징.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 서울특별시 종로구 )

제11~14대
이종찬

제15대
이명박

제15대
노무현

전국시도지사 협의회 회장

초대 고건

2대 이명박

3대 김진선

파일:이명박.png
대통령 기록관 사진

파일:external/rfid.g2b.go.kr/24671.jpg
공식 초상화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이름

이명박 (李明博, Lee Myung-bak)[1]

출생일

1941년 12월 19일 (75세)

출생지

일본 오사카 히라노 가미나미[2]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학동로23길 42

본관

경주 이씨 국당공파[3]

부모

아버지 이충우, 어머니 채태원

형제자매

3남2녀 중 3남[4]

배우자

김윤옥

자녀

이주연, 이승연, 이수연, 이시형

학력

고려대학교 경영학 학사

정당

한나라당

종교

개신교[5](장로회)

재임기간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혈액형

B형

별자리

사수자리

십이지

뱀띠 (신사년)

취미

테니스, 음악감상

청계 (淸溪)[6]

약칭

MB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e_myungbak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
2.1. 현대건설2.2. 정계 입문2.3. 32대 서울 특별시장2.4. 제17대 대통령 선거2.5. 이명박 정부
2.5.1. 대통령 재임 주요 사건 일람
2.6. 퇴임 후
3. 평가4. 여담
4.1. 먹방 대통령4.2. 수트핏의 대가
5. 선거 이력6. 저서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대한민국정치인, 기업인이다. 어촌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샐러리맨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래 30세에 현대건설 이사, 37세에 현대건설 사장, 48세에 현대건설 회장까지 승진하였고, 이후 국회의원, 서울시장, 대통령까지 한 인물.[7]

호는 청계. 본래 어렸을 때 아호는 '일송'이었지만, 서울시장 재직 중 청계천 복원 사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대학 동문이던 역사학자 김정배의 권유로 지었다고 한다. 이름 영문자 이니셜을 딴 약칭인 'MB'로도 불리기도 한다. 취임식 당일 본인이 언급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YSDJ처럼 나름 자주 쓰이곤 했다.

2. 생애[편집]

이명박의 부모가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하던 중,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에서 4남 3녀 중 3남[8]으로 태어났다. 이때 지어진 일본식 이름이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고 전해진다. 이때 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자수성가로 조선에 있던 친척도 불러오는 등 나름 괜찮게 생활했던 걸로 보인다.

해방 후 이명박의 집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정원을 넘어선 귀국선이 좌초해서 모든 재산을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한다. 아버지가 일가친척의 목장 일을 봐주게 되어 경상북도 포항(당시 영일군)의 흥해에서 잠시 살았다. 흥해읍 덕성리에 '이명박 대통령 고향집'이 있다. 그러다가 포항 시내로 이사했다.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다고 한다. 온 식구가 좁은 단칸방에 모여 살아야 했으며, 하루 두 끼를 곡주를 빚고 남은 잔찌꺼기인 술지게미로 때우고 다니는 일도 흔하였다고 한다. 당시 옷도 남루하여 무릎에 이중 삼중으로 덧댄 누더기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언제는 한국에 있던 선교사미국에서 모아온 헌옷을 나눠줬던 적이 있었다. 이명박 역시 당시 깨끗한 바지를 얻고 싶어 줄을 섰다고 한다. 하지만 순서가 오기 전에 다 동나버렸고, 허탕을 쳤다. 이 일이 있고나서 이명박은 어린 마음에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러워 다음부터는 이런 구호 물자가 와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대통령이 된 이명박은 미 대통령 오바마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며, "제가 개인적으로는 미국에 빚 진 게 없는 거지요?"라고 하니, 오바마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등학생이었던 시기에 6.25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누나와 남동생을 잃었다. 전쟁 때문에 생활고는 더 심해졌고,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기 위해, 특히 형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집안 장사를 도왔다. 이 시대에는 가난한 집안의 동생이 진학을 포기하고 형의 학비를 보태기위해 일하는 것이 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명박은 중학교 선생으로부터 소위 '불량학생'으로 찍혀있었다. 그 이유라 함은 집에서 술지게미를 먹고 온 날이면 항상 입에서 냄새가 났기 때문인데, 이명박이 어린 나이에 밖에서 매양 술을 마시고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오해에도 이명박은 자존심 상 입을 꽉 다물고 집안 사정을 말하지 않았었는데, 이후 공부할 시간에 행상을 다니는 이명박의 모습을 보고 선생은 깜짝 놀라서 그간의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이 선생은 이후 이명박의 어머니를 직접 찾아가서는, 성적이 좋은 이명박을 고등학교라도 졸업시키라고 설득하곤 했다. 가정 형편상 불가능하다는 어머니의 대답에 돌아간 선생은 이후 다시 이명박의 집으로 와서, "동지상고에서 야간학부 학생을 모집하니, 낮에는 돈을 벌게 하고 그 돈으로 밤에 학교를 보내라."고 설득하였다. 하지만 이명박이 번 돈을 이명박의 학비에 쓸 수 없던 상황이였기에, 한 번 더 어머니의 거절과 함께 돌아갔다. 며칠 뒤, "동지상고는 수석 학생에게는 등록금을 면제해준다고 한다. 이명박은 공부를 잘하니 등록금을 면제 받을 수 있을 것이다."는 말과 함께 그 선생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곤 어머니의 등록금이 면제되는 동안만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조건부 허락을 받고 이명박은 동지상고에 진학한다. 하지만 3년내내 수석을 한 덕에 졸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집안이 가난하여 길거리 행상을 할 일이 많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머니가 뻥튀기 기계를 한대 빌려 이명박에게 뻥튀기 장사를 하게했는데, 일 하다가 바로 학교에 가야되어 교복 차림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특히 힘들었던 건 뻥튀기를 팔던 곳이 여자 중·고등학교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것인데, 일을 하다보면 얼굴과 손이 온통 시커멓게 되는 바람에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얼굴을 보는게 너무 부끄러워 챙이 큰 밀짚모자를 구해와 푹 눌러 쓰고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본 어머니는 이명박에게, "죄를 짓거나 남을 속이는 것도 아니고, 네가 네 힘으로 살기 위해 당당하게 일하는데 무엇이 부끄러우냐"고 호통쳤으나, 당시엔 창피함이 우선이었던 터라 이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취직하기 쉽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대학입학시험 준비를 결심했다고 한다. 집안 사정을 고려해 대학에 등록 후 바로 자퇴하여 학벌만 만들기 위한 계획이였다. 이 때 대입 준비를 위해 서울대를 다니던 친구를 찾아가 교과서와 참고서를 빌리려고 하였지만 헛걸음하기 일쑤였다. 당시 서울대 재학 중이던 그 친구가 "네 주제에 대학은 무슨, 꿈 깨"라고 비하했다고 한다. 그 뒤 찾아간 곳이 청계천헌책방이였다. 당시 뭘 공부해야 될 지도 몰랐던 이명박이 헌책방 아저씨에게 뭘 봐야 할지 좀 알려달라고 하니 아저씨가 한심한 표정으로 책을 대충 몇 권 골라주었다. 하지만 그만한 돈을 낼 여력이 없었고, 헌책방 아저씨는 헛고생만 시키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기가 죽은 이명박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주인은 잠시 생각 후 다시 책을 골라 내어놓고는, "있는 돈만 주고 이 책들을 다 가져가라. 다니고 안다니고는 합격하고 나서나 생각하고 지금은 등록금 걱정은 생각하지 말고 합격할 생각만 하여라."라는 충고를 하며 책을 주었다고 한다. 이명박은 그 책들을 가져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곤 야간 상고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의 입시 준비 끝에 고려대학교 상과 대학 (지금은 경영 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당시 서울대 입시에서는 제2 외국어 반영을 하고 있었는데, 동지상고 야간반은 제2 외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던 실업계였던지라 서울대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한다. 한편 이 입시 준비라는 것이, 낮에는 일당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노동자 합숙소 구석에서 작은 불을 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같이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밤에는 불 끄고 잠좀 자자"며 호통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합격 당시에는 대학교 중퇴 학벌을 만들기 위해 등록만 해놓고 자퇴할 생각이었으나, 1학기 이상 다녀야 학적이 생긴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좌절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시장에다가 이명박의 사정을 말하고 다녔고, 다행스럽게도 시장 전체에 소문이났다. 이후 시장 상인들이 모여 이명박에게 등록금을 선불로 주고, 시장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을 줬다. 그 돈으로 이명박은 처음 의도와 달리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명박은 이 때의 경험이 너무 고마워, '이런 사람들이 없어도 누군가가 이런 역할을 대신 해주길 바라는' 이유로 서울시장 재직 시절 '하이서울 장학금'을 신설하고, 대통령이 된 후 '든든학자금'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고려대 재학 시절에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하다 체포 당해 투옥된 경력이 있다. 감옥에 들어간 충격 때문인지, 어머니는 심장병이 재발했다. 한때는 어머니가 면회를 왔는데, "공부는 하느냐?" "기도는 하느냐?" "성경은 읽느냐?"는 물음에 "네." "네." "네." 라는 대답을 듣고는, 면회 시간 3분 중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면회실을 나갔다고 한다. 이명박은 이때, 그간의 유년기동안 어머니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아왔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어머니께서 "고생이 많지 않느냐,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을 하고 싶었어도 혹여 자식에게 눈물을 보일까 처음 할 말만 하고 나간 것이 아닐까 하며 회상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15일, 어머니는 심장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후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후 모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어머니에 대해 회상하던 도중 "어머니에게 좋은 옷 한 벌 해드리지 못한 게 평생의 한입니다."라고 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한일협정 반대 시위 때 함께 운동했던 인맥들은 6.3 동지회를 결성해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며 그의 가장 큰 원군 세력 중 하나가 된다. 그 중 한 명이 당시 중앙대 학생이었던 이재오 전 의원. 참고로, 이명박과 이재오는, 후술하겠지만 모두 김영삼 前 대통령이 발탁한 인물들이다.

2.1. 현대건설[편집]

파일:Abj7sPo.jpg

현대건설 신입사원 시절 증명사진

1965년, 현대건설의 재정/경리과에 입사하였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운동 전력으로 취업길이 막막해져 현대건설 필기시험에 합격 했는데도 최종입사가 불가능 하게 되자 청와대에 직접 탄원서를 넣어 그 패기를 높게 산 박정희 대통령이 민정비서관 이낙선을 보낸 자리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 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라고 말 해 청와대에서 현대건설에 최종합격을 통보했다고 한다고 하는데, 후에 공개된 위키리크스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오히려 정주영 회장에게 '이명박을 조심하라' 라고 경고 했다한다

입사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30세에 이사, 37세에 사장, 48세에 회장까지 올랐다. 이에 대해서 유명한 일화중 하나로, 이명박이 부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현대건설 사장 조성근의 아내와 가수 태진아가 간통을 한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건 덕분에 사장이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여 대통령까지 했으니 태진아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대통령을 만든 셈이라는 말이 넷상에서 떠돈 적이 있었다. 사실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9] 하지만 태진아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이명박의 사장 취임은 사건이 발생한 후 2년이 지난 1977년에서야 이루어졌으며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는 건 매우 일반적인 일이므로 그 사건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조성근은 박정희와 같은 쿠데타 동지로, 건설부장관 지내다가 낙하산으로 현대건설에 와서 5년 채우고 다시 대하건설 사장으로 옮겨갔다. 즉, 회장 정주영도 감히 건드릴수 없는 위치가 조성근이었다.

임기 내 이라크 건설 수주에 주력하였다. 당시 현대건설은 중동에서 터졌던 연이은 전쟁으로 막대한 공사 미수금이 쌓였고 대금회수에 차질을 빚던 상황이었다. 이명박은 공적 자금을 투여받은 후 각종 국내외 공사를 무난히 진척시키며 위기를 극복했으나, 이라크 정부로부터 공사미수금 2억달러를 회수하는데는 실패[10], 몇 년 후인 현대건설 부도의 책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다.

1992년 퇴임 후 정계에 진출했는데, 그가 입당한 당은 당시 정주영이 창당했던 통일국민당이 아닌 민주자유당이였으며, 이 때문에 정주영 명예 회장과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한다. 정주영 창업주가 사석에서 '(이명박은) 노비로도 못 쓸 사람' 이라는 말을 했다는 풍문이 있지만, 달변이기도 한 정주영 창업주가 그 정도 수위로 악담을 했다는 얘기는 확증이 있지 않은 이상 쉽게 믿기는 힘든 부분이다. 현재까지 정 명예 회장이 직접 밝힌 이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 관련 이야기는 "대선 출마 대신 우리 의견을 들어줄 수 있는 의원 수를 늘리자."고 주장했다는 것과, 드라마(야망의 세월)로 창작된[11]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일에 대한 아쉬움이 사장이 민자당 입당 후 정 회장의 반값 아파트 공약을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했다는 소문 및 이에 대한 정주영 본인의 소감이 완곡하게 묘사된 정도다.

2.2. 정계 입문[편집]

1992년 대선에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명박은 경제 관련 인사로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에 출마함으로써, 정주영 일가와 관계가 틀어진다. 이명박은 여기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995년 국회의원 임기가 1년 남았지만 처음으로 실시된 서울특별시장 선거후보 경선에 출마하였다. 최종경선까지 갔지만, 결국 정원식에게 패배한다.

파일:ENv0QGY.png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종로에서 11~14대 종로구 국회의원 이종찬, 그리고 노무현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그가 선거비용을 거짓 신고했다고 언론에 폭로하고, 이명박의 측근들은 그를 외국으로 도피시켰던 사실까지 밝혀지자, 이명박은 추세를 보다가 형이 내려지기 직전 자진 사퇴한다. 이렇게 생긴 공석에는 노무현 후보가 종로 보궐 선거에 다시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3월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그는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서울 고등법원에서 400만 원 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 4월 대법원은 이명박의 범인 도피 혐의에 대한 유죄를 확정하고 7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로써 이명박은 그 당시 해 3년 전에 국회 의원 피 선거권을 박탈당했지만 1년 후 광복절 특사사면복권되었다.

2.3. 32대 서울 특별시장[편집]

파일:external/www.allinkorea.net/2007101435461006.jpg

피 선거권이 회복된 것을 계기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서울특별시장으로 출마하였다. 상대 후보는 당시 떠오르던 정치인 김민석[12]이었는데, 여론조사에서는 오차범위 내로 상당히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김민석으로부터 과거의 여러 의혹을 제기받아 이때부터 과거 비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사업'과 '대중교통 체계 개편'을 공약으로 내걸어 일찌감치 분위기를 잡았고, 후보토론에서도 판정승을 거두며 52%의 득표율로 당선에 성공했다.

서울 시장을 계기로 생겨난 별명은 불도저 시장. 특유의 추진력으로 토목건축적인 정책을 밀고나가 서울 외관을 바꿔 생겨난 별명이다.

취임 후, 공약대로 청계천 복원 사업을 시행하여[13] 우여곡절의 과정 끝에 공사는 마무리를 짓는 데 성공하였다. 이명박의 서울 시장 대표적인 커리어이자 그를 대통령으로 진화시킨 최대의 교두보로 화자되지만, 임기 내에 끝내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에 이런저런 탈도 많은 공사였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서울 특별시 대중 교통 체계 개편 역시 주요 커리어로서 교통 카드 티머니도 이때 도입되었고 버스의 번호는 지역에 따라, 색은 종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으며 이용 요금은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 비례로 바꿔 당시 어려웠던 버스 회사의 재정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또한 중앙버스차로제를 도입하여 대중 교통의 질을 높이기도 했다. 2007년 타임지에서는 위 두가지 정책을 높이 사 '환경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이 인정하는 성공적인 정책이지만, 어떤 정책이든 한계는 있는 법. 지랄염병 버스(...) 참고.

이 외에도 뉴타운 사업 및 서울숲 조성, 숭례문 개방 등을 통해 대선을 향한 고지를 밟아간다.

2.4. 제17대 대통령 선거[편집]

당 살림을 사는 당대표를 뽑는 게 아닙니다. 나라를 살릴 대통령을 뽑는 선거입니다, 여러분! 저 이명박은 여러분의 꿈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ㅡ 한나라당 내부 경선 연설 中


성공적인 시장 경력을 계기로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당시 상황은 참여정부 동안의 민생, 경제 파탄과 실정을 심판해야 한다는 정권 심판론이 매우 우세했고, 정권의 임기 막판의 지지율 저하와 민주당 정권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 및 당시 분열과 막장을 보여주던 여당 대통합민주신당의 바닥을 찌르는 지지율로 인해 한나라당소속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기정 사실화될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대선 본선보다도 한나라당의 경선이 더 치열해지는 양상이 발생했는데,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박근혜 후보와의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 발생했다. 이명박은 여론 지지도, 박근혜는 당내 지지도가 우세했는데, 경선 룰에 따라서 승부가 뒤집어질 수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네거티브로 인해 둘의 과거 비리는 이때 대부분 드러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며, 여담으로 유명한 발언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와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도 이때 생겨난 것이다. 그러다 북핵 실험 등 박근혜에게 불리한 사건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고, 혈투 끝에 우세했던 여론 지지율을 앞세워 경선에서 승리하여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본선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과 매치를 벌이게 되었는데, 말이 좋아 매치였지 지지율이 2배 이상 차이나는 거의 이명박의 독주체제였다. 선술했듯 여당의 너무나도 낮은 지지율 때문에 예정된 시나리오기도 했지만... 하지만 새로운 변수가 생겼으니, 이회창의 한나라당 탈당 및 후보 독자출마였다. 같은 보수성향에다 당의 후광이 없어도 네임밸류가 컸던 정치인이기에 표가 분산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떠돌기도 했다. 하지만 돌풍은 오래가지 못하고 지지율은 정동영후보의 지지율은 이명박의 절반, 이회창은 정동영후보의 절반의 양상이 고정되었다.[14] 정동영측은 BBK 주가조작 사건을 내세우며 이명박을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이명박은 747 공약대운하 공사를 내세워 마이페이스를 걸어갔고 결국 지지율은 득표율로 그대로 연결되어 여유롭게 당선되었다. 표차가 가장 큰 선거가 되었지만[15], 정동영과 이회창 외에도 권영길, 문국현 등의 유력후보가 난립한 선거였기에, 과반 득표율은 달성하지 못했다.

2.5. 이명박 정부[편집]

재임 당시 자세한 여러 내용들은 이명박 정부 문서를 참고할 것.

2.5.1. 대통령 재임 주요 사건 일람[편집]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30219_0007756487_web.jpg

퇴임연설하는 이명박.[16]

2.6. 퇴임 후[편집]

임기 막판의 급작스러운 독도 방문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론 지지율을 올리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존재감이 희석되었고,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등에도 불구하고 자당 후보 박근혜가 당선되면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지지율 퇴임에 성공했다.[20]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등장한 이후 중앙정계나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중이다. 지방의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가 기자들을 목격하고 자리를 피하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다.

현재는 사무소를 차려[21] 재단활동을 벌이는 등 개인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페이스북으로 간간이 근황을 올리는 중이다. 해외순방을 자주 다니며 여러가지 대외적인 행사에 참여하곤 하며 캄보디아 총리의 경제고문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22] 운동하거나 자전거를 자주 타는 모습을 보여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이는 중. 4대강 비리, 자원외교 비리, 방위산업 비리 등 본인 임기 중의 사건과 검찰수사 여부가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자서전으로 '대통령의 시간 2008~2013'을 출판하였다.

2015년 10월 베트남벤처기업 세일즈 명목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조문을 오며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23]


2016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이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차기 정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하겠다라고 최근들어 누누히 강조해 왔다고 한다. 링크된 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차기 정권 창출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배경에 대해 잡지는 "박근혜와 완전히 등을 대고 갈라선 친이 세력이 의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박근혜가 임기 중 자신을 박대한데 따른 섭섭함을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분석했다.[24] 또한 측근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염두에 두고 있는 차기 대권주자로는 반기문 UN 사무총장, 김무성새누리당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었다고 한다. 특히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직접 저울질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드러났다.[25] 나머지 두 명에 대해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최근 들어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무실에는 측근들과 같은 여러 인물들이 방문하면서 활기를 띄고 있다고 한다는 사실도 전했다. 또한 최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의 기분이 좋아졌다는 사실 또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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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일 청계천에서 열린 청계천시민걷기대회에 참가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모습. 퇴임 직전까지만 해도 나이에 비해서 상당한 동안이었는데 이젠 세월의 흐름을 피해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2016년 10월의 비공식적 인터뷰에서는 가장 먼저 박근혜 및 박근혜 정부를 상당히 강한 어조로 비난함과 더불어, 문재인, 박원순도 비판하면서,[26] 차기 정권 재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하였다. 다만, 한나라당 시절 유력인사로 같이 했던 6년 동생인 손학규에 대해서는 '그 사람도 참, 그 사람은 한나라당에 계속 있었으면 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은 물론 18대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도 나올 수 있는 인재인데 괜히 옮겨다녀 가지고...'라면서 안타까워 하는 견해를 보였다. 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경제신문과 가진 비공식 인터뷰에서 반기문 UN 사무총장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27][28] 차기 정권 재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행적을 봤을 때, 반기문을 높이 쳤다는 말은 그냥 립서비스였거나, 본심이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최근에 이명박과 이재오가 신당 창당 및 신당을 지원하는 행보를 보면, 비공식적인 인터뷰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언급이다.

2016년 11월 21일, 김영삼 대통령 서거 1주년을 1주일 앞두고 현충원에 참배해 김영삼의 둘째 아들 김현철씨를 만난 이후에,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드디어 공식적으로 박근혜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부끄러운 일로 정말 참담한 심정... 박근혜가 국민의 뜻을 잘 받아줘야"라고 박근혜를 비난하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박근혜의 탄핵까지도 고려해봐야한다면서 탄핵에도 동의하는 입장을 표시했다. #

2017년 첫날부터 새누리당을 곧 탈당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10월~11월 초에 탈당할 생각이었지만, 여러 사람들이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봐 잠시동안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반기문/개혁보수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29]

2017년 1월 11일, 늘푸른한국당이 창당식을 거행하면서 창당 되었는데, 아직은 본인에 대한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창당식에 축하 인사차 나오지는 않았다. 추후에 늘푸른한국당을 겉보기에 소극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언론에 근황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30]

2017년 5월 17일, 박근혜 정부 시절 외부활동에 잠잠했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갑자기 선행활동에 나서면서 배경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링크

2017년 6월 2일, 이낙연이 문재인 정부 신임 총리로 임명돼면서 이낙연이 이명박 前 대통령의 사무실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이명박이 이낙연에게 언젠가 크게 될 줄 알았다면서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3. 평가[편집]


4. 여담[편집]

  • 여러가지 휘호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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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년 6월 10일에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에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 옆에 당시 박근혜 영애와 최순실이 앉았다. 그러나 박근혜와 최순실보다 한참 떨어져 있어서 이들 둘에게 소외된 모습으로 보인다.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외국(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 최초의 기업 CEO 출신 대통령이다.

  • 현대건설 사장 재직 시절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 서울특별시 시장 재직 시절 스타크래프트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03년 WCG 폐막식에서 우승자 이용범과 이벤트 경기를 벌이는 사진. 종족은 저그로서 경기를 위해 5개월 전부터 연습했다는 후문이 있지만, 시작 5분만에 4드론으로 패배했다. 거기다 상대방의 정찰기(오버로드)를 잡는 위엄을 보였다고 한다.

  • 카우치 사건으로 인디 밴드에 대한 질타가 높아지자,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이명박은 홍대 퇴폐공연 블랙리스트를 만들겠다는 으름장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한때 홍대의 클럽들을 싹 다 뒤엎으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디 밴드의 반발로 무산되고, 친분이 있었던 유인촌의 설득을 듣고, 오! 부라더스 공연을 관람하여 인디 밴드와 화해하고, 홍대거리에 대한 생각 또한 긍정적으로 바꿨다고 한다. 여기서 설명했다시피 대통령 이전 이명박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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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임 후 첫 철도 착공식인 원주강릉선 착공식에 병풍으로 KTX-산천 열차를 사용하였는데, 하필 착공식이 강릉역에서 열린 나머지 KTX가 영동선 스위치백을 넘는 장면이 목격되었으며, 400억짜리 병풍이라는 논란이 일었지만 철덕들에게는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 대통령으로서는 본의 아니게 매우 희한한 이력이 생기고 말았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평범하게 대통령을 했으나 자기 로 탄핵소추를 당한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결과 또한 전자의 경우 부활했으나, 후자의 경우 이미 처참한 결말을 맞은 정반대다. 그러나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명박도 재임 시절, 야당에서 탄핵소추를 하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 나이에 비하면 상당히 동안이다. 2016년 현재 76세이며 임기중에도 만 65세가 넘어간 할아버지였다. 당장 다음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과의 나이차도 10살 이상이고 이전 대통령인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도 나이가 많다. 운동을 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걸 보면 자기관리를 꽤 열심히 하는듯 하다.

  • 유행어로는 '나도 해봐서 아는데~'가 있다. 사용예로는 '나도 호떡 장사 해봐서 아는데~'.'내가 건물 만들어봐서 아는데~''내가 배도 만들어 봐서 아는데~' 식의 발언들이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할 수 있다. 농담식으로 넘기면 될 듯. 그리고 여러가지 장사를 해본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는 여고 앞에서 한 뻥튀기장사...가난했던 유년시절

  • 민주화 이후 최초로 임기 종료시까지 소속된 당에서 탈당하지 않고 당적을 유지한 대통령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모두 임기 말에 지지율이 떨어지면 소속된 당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탈당했는데 처음으로 새누리당 당적을 지킨 채 임기를 마무리한 것이다. 현재도 새누리당 평당원으로 지내는 중이었으나 대통령 퇴임 이후 당 회비를 계속 안 내고 있다가 탈퇴했다... 그리고 현 근황을 봤을때 여기로 자의로 입당할 것 같다. 대통령 임기 막판에는 인기가 시들해지고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려 당 차원에서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결국 당으로부터 압력이 들어와 쫓겨나거나 탈당해버리는 관습이 존재한다. 일례로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토사구팽 당했고, 김영삼부터 노무현까지 전부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명박이 당적을 유지한 배경으로는 퇴임 지지율이 높았던 점도 한몫했지만 그게 결정적일 정도의 수치는 아니었고(탈당했던 김대중과도 큰 차이는 없었다), 역대 대통령이 대선까지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했던 점과는 달리 친이-친박을 필두로 척을 치는 이미지가 강해서 박근혜와 크게 엮이지 않은 점이 큰 요소였다.

  • 논필가 지만원에게 뒷조사 시도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의외로 사이가 안 좋은듯. 그의 주장으로는 이명박의 부친은 (이명박)자서전에 언급한대로 양반 태생이 아니며, 친일 행각을 한 노비이며, 부친의 원래 이름은 떡쇠며(32세였던 쇼와 14년에 이충우로 개명함.) 이명박은 그의 일본인 첩 사이에서 낳은 서자라고 했다. 다만, 지만원 평소 행적의 특성상 지만원의 말이 사실일 확률은 거의 없다.

  • 조지 워커 부시 前 미국 대통령과 좋은 관계다. 퇴임 후에도 사적으로 만난적도 있었고 그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 중에 이명박 초상화도 있다.

  • 청담동 가로수길 꼬르소 꼬모에서 김윤옥 여사와 브런치를 즐긴다든지 원래 취미였던 테니스장이나 여러 공연장에서 목격되는 등, 꽤 여유로운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다른 후보들도 같은 대답을 했다는건 함정

  • 노홍철이 아는 형님 중 가장 높은 사람이다. 무한도전에서 게스트로 초청하겠다고 전화를 걸었지만 멤버들의 만류로 무산되었고 역시 돌+I 노홍철 본인에 의하면 정치적 목적은 없고 실제로 친분이 있다 카더라.

  • 서울특별시장 시절 탈모가 심해져, 모발이식 수술을 받았다. 실제로 서울특별시장 시절 재직 중 보면 거의 대머리 수준으로 탈모가 진행됐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대통령 중 탈모로 인해 모발이식 수술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이자, 어떻게 보면 미용 목적(?)으로 수술을 받은 두 번째 대통령이다. (탈모 수술은 서울시장 시절에 받았다.) 첫 번째는 쌍꺼풀 수술을 받은 노무현이다. 탈모가 질병이라면 미용목적이 아니지. 근데 탈모는 질병 맞잖아?

  •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수행을 못한다고 비난도 했었다. #.

  • 사적으로는 형인 이상은, 이상득사촌동생이재오와 사적으로 매우 친한 관계다. 배우 유인촌과도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어, 취임하자마자 유인촌을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33] 정운찬의 경우 원래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으나 능력을 높이 사서 한 때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친해지게 됐고 지금도 그 친분을 이어 가고 있다. 현재도 최측근들과 더불어 유인촌, 정운찬을 자주 만나는 편. 그리고 정운찬은 여기서 현재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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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박 대통령 본인의 아들보다, 형 이상득의 아들(조카)이 이명박과 외모가 유사하며, 어째 아버지 이상득보다 숙부 이명박을 닮은 편이다. 실제로 비교해보면 많이 닮았다.

  • 제 17대 대통령 당선 직후, 바로 심상정을 직접 찾아 가서 만나서 인사하기도 했다. 심상정을 은근히 높이 쳤던 듯 하다 그러나 심상정은 이후 유시민과 의기 투합한 후 이명박을 맹비난하기 시작한다 여담으로 이명박의 개명 전 성명이 돌림자와 항렬을 맞춘 '상정'으로 심상정과 같다(...).[34] 여담으로 이명박이랑 노회찬은 같은 고려대학교 출신이라고.(...)[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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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유명세를 타고있는 이재명 성남시장과 같은 경주 이씨이며, 종파도 같은 국당공파이지만, 이재명 본인이 이명박 前 대통령을 싫어하는 편이다(...).

  • 노무현과 더불어 상당한 자덕이다. 친한 이재오도 같은 취미를 갖고 있어, 종종 같이 타고 다니기도 한다고 한다.[36]

  • 자기가 퇴임하기 전 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차기 대선주자로 염두에 두고 있던 인물이 매우 친한 사이인 이재오정운찬이었는데, 이재오랑은 알다시피 매우 친해서 이재오를 지지했다.

  • 현재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과거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도 상당히 친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이 대통령 취임한 직후, 박원순은 이명박을 맹비난하면서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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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 임기 중에는) 아들 이시형이 검찰한테서 자신의 내곡동 사저 매입 의혹에 엮이다가 불구속 기소를 당하였으나, 자신이 대통령 취임 이전까지 거주하였던 논현동을 대통령 퇴임 직후에 현재로도 (그 곳으로) 거주하기로 결정하고 있다.

4.1. 먹방 대통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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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모든 정치인들을 통틀어 가장 음식을 맛깔스럽게 먹는 정치인으로 꼽힌다.명박이 억수로 부드럽네 안철수 의원이나, 같은 서민 출신인 박원순 시장, 문재인 대통령 등과 비교해 보아도 압도적으로 보일 정도로 탐스럽게 먹는다.[38] 이쪽에서 이명박의 내공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광고급 막걸리 먹방을 보여준 노무현 前 대통령이나 김영삼, 김대중 前 대통령 정도밖에 없다고 평가받는다.

보통 선거철에 시장에 나가 음식을 먹는 정치인들을 보면 과도하게 카메라를 의식하거나 애써 한두 입 베어물고 마는 보여주기식 먹방을 하지만, 이명박은 그냥 일반적인 식사를 하듯 후르륵 짭짭(...) 먹는다. 시장순회 때 그 자리에서 어묵 먹느라 정신이 팔려 먹기만 하자 옆에 있던 보좌관이 말리기까지 했다는 시민 목격담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당 출신 박근혜는 한국 정치역사상 최악의 먹방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가난했던 서민 출신으로서의 일생에서 습득한 식성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대통령 재직 시절 냉면은 물론이고 보신탕까지 즐겨먹을 정도로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으며 만두, 풀빵, 떡 등 군것질거리나 젊은 입맛인 피자나 스파게티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대선 광고때 보여준 국밥 먹방은 보는 사람마저 입에 침이 고일 정도이고, 어묵 먹는 사진이나 가래떡 먹는 사진 역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정치인들이 원래 보여주기식 서민 코스프레 쇼를 잘하게 마련이라 하더라도 저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정치인'인 편이었다.

가리는 음식이라면 잡곡밥. 어릴 때 하도 가난했다 보니 쌀밥에 대한 애착이 있다. 대선 후보 당시 김승현 정은아의 좋은아침에서 김승현 아나운서가 이명박 후보의 집을 찾아가서 아침 식사를 대접받았는데, 찌개 사이즈의 돌솥에 쌀밥을 짓고 날계란을 넣어서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뜨거운 쌀밥에 계란과 간장을 넣고 비빈 간장 비빔밥은 기운이 없을 때마다 별식으로 부탁해서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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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그도 후쿠시마 오이 먹방만은 실패. 어째 셋 다 찝찝함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이다(...) 그래도 한입 베어물고 만 중국 원자바오 총리와는 달리 이명박은 우적우적 전부 씹어먹었다고 한다(!)[39][40]

4.2. 수트핏의 대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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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대기업에서 고위직을 오래 지낸 경험 덕분인지 양복 고르는 안목도 제법 있는 데다가 대통령 중 비교적 큰 키에(173cm)[41] 슬림한 몸매 덕분인지 수트빨을 잘 받는 패셔니스타이기도 하다. 연관 검색어에도 수트핏, 수트간지 등이 있을 정도. 다른 정치인과 찍은 사진을 봐도 신체비율도 일품. 때문에 얼굴만 가린 채로 낚시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수트핏의 경우 이명박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는 둘째 형 이상득도 정장을 보는 안목도 똑같이 뛰어난데 이명박보다 키가 더 크기까지 해서 형 이상득에 비해서는 수트핏을 한 수 아래로 친다.(...)

그리고 자기관리에도 철저해서 샤넬 메이크업 베이스, 유리아주 립밤, 디올 립글로우, 아벤느 미스트, 설화수 기초 등을 사용한다고(...). 인터넷에서는 맹뿌템, 명박템으로 불리고 있다. 기자들이 그가 지나가면 짙은 향수 냄새가 남아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자유당

7,923,718 (38.5%)

당선 (25번)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신한국당

40,230 (40.5%)

당선 (1위)

[42][43]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한나라당

1,819,057 (51.8%)

당선 (1위)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11,492,389 (48.7%)

당선 (1위)

6. 저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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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편집]


[1] 개명하기 전 이름은 이상정으로, 형 이상은, 이상득처럼 상자 돌림이다.[2] 정확히는 오사카 히라노(平野)구 가미나미(加美南) 후쿠이도정(福井戶)이라고 한다. 현 일본 오사카 부다.[3] 경주 이씨 39세손 '相'자 항렬이다. 개명 전 이름은 이상정(李相定)이다.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인 이상정과는 본관, 한자, 항렬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다.[4] 큰형 이상은, 작은형 이상득, 이명박 대통령으로 3남이며, 2녀는 정치에 등장한 적이 없음.[5]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발언을 한 바가 있을 정도다.[6] 아호는 원래 일송(一松)이었으나 서울특별시장이었을 때인 2005년 10월 26일에 있었던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한 고대 동문 김정배 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청계(淸溪)로 바꿨다.[7] 자세한 내용은 그의 저서 <신화는 없다>를 참고 할 것.[8] 이 중 1남 1녀는 어릴 때 요절해 3남 2녀가 되었다.[9] 심지어 이 문서의 이전 버전에도 마치 사실인것처럼 쓰여있었다.[10] 이 대금은 2003년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붕괴한 후 일부 돌려받았는데, 이 전 대통령이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후세인 정권 하 관료들의 매너 및 일하는 태도를 극찬한 일을 비춰본다면 아이러니한 일.[11] 선배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졸업자들의 업적까지 이명박 사장의 작품으로 나온다.[12] 사실 386세대의 대표주자로서 이때만 해도 상당히 끝발 날리던 정치인이었다. 젊은 정치인으로 15대 총선에서 최연소 당선되었고 386세대 대표주자라는 위상을 밀어붙이며 서울시장까지 노렸으나, 뒤에 나온 대로 이명박에 밀려 낙선. 그리고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몽준을 지지하며 당을 옮기면서 철새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이후 "가출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민주당에 복당, 김민'새'(...)라는 오명을 얻은 채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고, 군소 정당인 민주당(2014년)의 대표로 여전히 정치는 하고 있으나 예전의 위상을 찾을 수가 없다. (2010년 불법정치자금 수수로 5년간 선거권 박탈.)[13] 정확히는 취임 1년 후였던 2003년 7월부터 시작하였다.[14] 이회창이 이명박의 지지율만 흡수할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정동영후보의 지지율도 상당수 흡수했다. 대통합민주신당한나라당도 좋아하지 않았던 20대의 표심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이회창 지지율의 대부분은 이인제의 지지율을 전부 흡수한 것이라 볼 수 있다.[15] 이 기록은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이 경신한다[16] 임기 중후반부터는 안경을 쓰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17]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2월 25일자로 종료되기 이전의 사건이긴 하나, 정말 임기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사건과 관련해서는 보름 후에 대통령이 될 이명박이 더 주목받았고, 서울시장 시절 숭례문을 개방했기에 직접적인 연관점도 많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후 처리는 이명박 재임 중 이루어졌다.[18] 남북관계를 완전히 냉각시킨 시발점으로서 의미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로 금강산에는 단 1명의 남한 관광객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19] 아동 포르노의 정의가 실제 아동 청소년에서 아동 청소년으로 인식되는으로 바뀌었다.[20] 노태우 12%, 김영삼 6%, 김대중 24%, 노무현 21%, 이명박 24%. 민선 이전의 대통령들은 지지율 조사기록이 없다.[21] 사무소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임대료 월 1300만원에 달하는 임대료에 퇴임 직전에 공사한 삼성동 자택 유지비용도 그토록 아방궁이라 공세를 벌였던 노무현의 경남 봉하마을에 비해 배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 특히 임대료와 자택 수리비용은 모두 다 국민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사실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22] 사실 대통령 취임 이전에도 7년간 맡았던 적이 있었다.[23] 이명박도 김영삼이 "우리는 도덕적 선구자가 아닌 능력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발굴해낸 인물이었다.[24] 다만, 이명박도 김영삼처럼 속으로는 박근혜를 맘에 안 들어했기 때문에, 정권 초에는 오히려 친박 계열들을 경선에서 대부분 쳐내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움직임 및 구실이 생기면 트집잡아서 박근혜를 쳐내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즉, 이런 의사표현은 박근혜에 대한 강한 불만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25] 다만, 늘푸른한국당에서 손학규를 영입할 의사도 있는 것과 이명박이 손학규에 대해서도 먼저 언급한 상황 및 반기문의 평가가 악화되는 근황을 봤을 때, 손학규같은 다른 인물을 내세울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 어쩌면 남경필, 손학규 중 영입해서 이들을 내세울지도 모른다였으나 이분을 내세운 것 같다.[26] 다만, 박원순과는 실용정부 시절 전, 서울시장~대선후보 시절까지는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용정부 출범 직후, 상호 정치적 시각, 노선의 마찰로 인해 대립하는 관계로 변했다. 검색 엔진에서 찾아봐도 나오며, 박원순 문서에서 참조해도 알 수 있다.[27] 김무성은 어렵다고 평가했다. 개인적으로는 오세훈을 생각하고 싶으나, 오세훈도 아직 경쟁력에서 떨어진다고 평가했다.[28] 다만, 손학규에 대해서도 먼저 평가한 것과 아쉬워 하는 평가를 남긴 것을 고려하면 손학규같은 인사를 내세울 가능성도 충분하다. 아니면 남경필이나[29] 이 곳의 창당 예정일이 2017년 1월 내인데, 탈당 입장을 밝힌 시기와 창당 시기를 고려하면, 곧 탈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명박이 대통령 시절, 차기 대선후보로 염두에 두고 지지했던 인물은 이재오와 정운찬이었고, 이 두 인물 모두 이 곳에 있다. 여러가지로 시기를 고려해서 탈당 시기를 정했을 것 같다. 어쩌면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30] 다만, 이명박 대통령과 늘푸른한국당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방식으로 적극 지원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여겨진다.[31] 정확히는 현재의 서울 지하철 9호선 고속터미널역 8-2번 출구의 건너편.[32] 영웅시대에서 이명박 역으로 열연하였다.[33] 유인촌이 한 드라마에서 이명박 역을 맡기도 했었던 만큼, 연결관계가 이 때부터 생겼을 수도 있다.[34]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명박이 옛날에 학생 운동을 했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지 노회찬, 심상정과도 면식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재오가 운동권 출신이라 이들과 인맥관계로 엮여 있는데 이명박이 이재오와 매우 친밀한 사이인지라, 이명박도 예전부터 노회찬, 심상정과 인맥관계로 엮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5] 그래서 그런지 노회찬, 심상정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 전부터도 이명박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지냈다.[36] 달리 유승민바른정당의 대선후보를 자전거 식 유세로만 펼치기도 하였음[37] 예측이고 자시고 박근혜의 무능과 최씨 일가와의 관계는 당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다만 이들이 자기보신 등 여러가지 어른의 사정 탓에 침묵을 선택했거나 혹은 이 기사처럼 쓴소리나 폭로를 해도 묻히던 시절이었다.[38] 사실 문재인의 경우에는 먹방에서 꽤 괜찮은 평가를 받는 편이기는 하나, 이명박에 비하면 확실히 밀리는 편.[39] 후쿠시마 오이 시식은 사전 협의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행되었다고 하니 아무리 이명박이라도 제대로 먹방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참고로 좌측의 일본 정상은 간 나오토. 시식 직후 후쿠시마산 오이라는 통역을 들은 수행원들은 황급히 시식한 오이의 방사능 수치를 검사했다고 한다.[40] 그리고 국산오이는 정말로 맛있게 먹었다#[41] 이명박 대통령의 20대시절인 6~70년대 기준으로 보더라도 173cm 정도면 어느정도 큰 키에 해당했다.[42] 1998년 3월 의원직 사퇴 (불법선거운동)[43] 그리고 후임은... [44] 한때 구글 번역에서 하츠네 미쿠가 이명박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