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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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프랑스 주간지 Le Journal illustre

1. 개요2. 사건 이전3. 사건의 개요4. 사건 이후5. 흥선대원군의 참여 여부6. 왕후의 능욕 여부7. 왕후는 죽지 않았다?8. 기타

1. 개요[편집]

한 나라의 왕비가 이웃나라의 자객들에게 살해된 초유의 사건
명성황후가 수많은 비판거리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 않는 동정론을 가지게 된 결정적 이유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친일 대신들과 모의한 일본인 자객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조선의 왕후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 명성황후 살해 사건이라고도 한다. '시해'했다는 표현도 자주 쓰이는데, 이는 일본 낭인 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가담했기 때문.

일본 측에서 주장하는 조선인 가담자도 있었는데 유길준, 이두황, 우범선, 권동진, 유혁로, 정난교, 흥선대원군 등이다. 대부분 친일파, 혹은 개화파였다. 단, 흥선대원군은 친일파도 개화파도 아니었고 단순히 명성 황후의 정적이었다.

2. 사건 이전[편집]

1894년 일어났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위협을 느끼고서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을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일본은 할 수 없이 따라야 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창 물이 올라 있던 일본은, 이로 인해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이를 지켜본 중전 민씨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소위 '인아거일(引俄拒日, 아라사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의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중전을 중심으로 한 민씨 세력들이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 대한 대대적 개편이 일어난다. 어윤중, 김윤식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축출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되었으며, 김홍집과 함께 친일 성향의 내각을 구성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내무 대신 박영효[1]는 왕후 민씨 살해 음모 사건으로 인해 반역 혐의로 수배한 상황이었다.

이런 조선 조정의 급변은 일본으로선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자칫 다된 밥을 날로 먹으려는 러시아에게 조선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왕후 민씨를 죽임으로서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다. 일본이 왕후 민씨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그녀와 그녀의 일가인 민씨 세력이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후를 죽이면 민씨 세력이 자연히 약해질 것이고, 다시 친일 성향의 관료들을 앞세워 조선 식민지화를 앞당기려고 한데서 나왔다고 볼수 있다.

3. 사건의 개요[편집]

이에 따라 일본은 치밀한 준비를 진행했다. 가장 먼저 진행한 것은 고종명성황후의 경계심을 푸는 일이었다. 박은식의 저술 <한국통사>에 의하면,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직접 입궐하여 고종과 민 왕후에게 상당한 거액의 선물을 바치고, 일본조선 왕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대한계년사>와 매천야록에서는, "일본인 고무라의 딸이 민 왕후의 양녀로 들어갔는데 이는 그녀를 살해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고, 궁중 가무를 맡은 자 하나를 은밀히 포섭하여 왕후의 얼굴을 그리게 하여 낭인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낭인들이 궁녀 한 명을 앞장세워 왕후를 찾게 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삼족이 멸되는 중죄를 당시 궁녀가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을미사변 당시 시간은 새벽이였고, 절대 왕후의 위치를 알리지 않자 낭인들은 궁녀를 궁 지붕에서 떨어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오히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민 왕후의 초상은 부정확하거나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 매천야록은 제목에서 이미 야록이라 적어뒀듯이 당대의 루머 모음집임을 기억하자.(이재선은 실제로 역모 혐의로 제주도 유배형을 당했지만, 매천야록에서는 서울 근교에서 사약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 등 매천야록은 사실 관계를 파악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책이다. 매천야록은 당대의 루머 모음집으로서 당시 한성에 이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이긴 하지만 기재된 내용을 그대로 사실로 믿어서는 곤란하다.)

9월 1일(음력 7월 15일), 이노우에를 대신해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가 새로운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했다. 육군 장성 출신을 공사로 부임시켰다는 점에서, 미우라가 모종의 특수한 임무를 받고 부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우라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척 연기를 하면서, 염주를 돌리고 불경을 외며 두문불출하여 염불 공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조선 왕실의 경계를 돌리려는 위장술이었다.

10월 3일(음력 8월 15일), 일본 공사관 지하실에서 민 왕후 암살 계획이 구체적으로 짜여졌다.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일본 공사관 무관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가 흥선대원군의 협력을 받아, 흥선대원군이 그를 데리고 경복궁에 들어가기로 했다.

낭인들은 주로 일본민간인들이 중심이었는데, 친일 신문인 <한성신보>의 사장인 아다치 겐조를 비롯해 편집장과 기자들, 그리고 구마모토 출신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도쿄대 출신의 극우 엘리트 학생들이었다. 민간인들로 중심을 삼은 것은, 혹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발뺌하기 위한 속셈이었다[2]. 또한 사건을 조선인들 간의 분쟁에 의한 결과로 만들려는 속셈에 따라, 해산될 예정이었던 대한제국군 훈련대를 끌어들였다. 우범선이 이렇게 포섭된 인물로, 우범선은 민씨 세력을 축출해야만 조선이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훈련대 해산에 대한 불만도 있었기 때문에 가담하게 되었다.

당초 계획으로는 10월 10일에 거사를 진행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훈련대가 급작스럽게 해산되는 바람에 거사일을 10월 8일로 앞당겼다. 변경된 거사 일자는 10월 8일 새벽 4시였지만, 이것 역시 틀어져 버렸다. 계획대로라면 흥선대원군은 적어도 새벽 3시에는 경복궁에 들어와 있어야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늑장을 부렸는지 아니면 강제로 끌고 오느라고 늦어졌는지는 몰라도 새벽 3시에야 공덕리(지금의 공덕동) 아소정(애오개역 부근)을 출발한 것이다. 흥선대원군경복궁에 도달한 것은 새벽 5시가 넘어서였고, 일본 낭인들과 훈련대 등은 그제서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버린 탓에, 예정과는 달리 많은 목격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이 잠자던 중에 낭인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전후사정을 미루어 볼 때 왕후 시해까지는 몰라도, 폐위까지는 분명 가담을 했다.

일각에서는 흥선 대원군이 일본의 의도를 따를 수 밖에 없던 것은 일본이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을 두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고 흥선 대원군이 이준용을 선호했던 것은 맞지만 이준용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권력을 위한 꼭두각시로 세울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끼는 손자를 두번이나 역모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할아버지가 어딨나... 그저 당시 대원군과 고종 명성 황후의 사이가 그렇게 콩가루는 아니었고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외세와 손을 잡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은 현재 사람들의 바람이 만들어낸 설 중 하나다.

치밀했던 사전 계획과는 달리, 사건은 상당히 엉성하게 진행되었다. 흥선 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에 일본 공사관 수비대 1중대는 장소를 착각해 낭인들과 우범선이 지휘하는 훈련대 제2대대와의 합류가 늦어졌다. 이들은 겨우 춘생문 앞에 집결한 뒤, 명성 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을 향해 돌격했다.

오전 4시가 되자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대한제국군 훈련대는 춘생문과 추성문 등을 포위했다. 이런 소란 통에 고종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민 왕후도 건청궁에서 벗어나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고종은 이범진을 보내 미국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게 했다. 이범진은 4m ~ 5m나 되는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은 뒤(!) 먼저 미국 공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이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4시 30분,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훈련대 병력은 광화문으로 돌격했다. 대한제국군 시위대가 윌리엄 다이 미국 지휘관의 지휘를 받으며 맞섰지만, 시위대의 무기가 빈약했던 탓에 밀리고 말았다[3]. 이때 시위대장 홍계훈이 달려와 훈련대 병사들을 꾸짖고 제지하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4]

시위대를 몰아낸 뒤, 훈련대는 흥선대원군이 대기하고 있는(혹은 감금된) 강녕전 앞 뜰에서 대기하고, 낭인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민 왕후를 찾으며, 닥치는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를 가했다. 이때 태자비는 복부를 낭인에게 가격당하여 이후 병상에 누워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왕태자가 머리채를 잡힌 건 말이 필요 없다.

결국 건청궁 곤녕합에서 낭인들은 왕후를 찾아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낭인들을 가로막았지만 권총에 맞았고, 이어 낭인들의 칼에 두 팔이 잘려나가는 참극이 벌어졌다. 2005년에 발견된 에조 보고서에 의하면, 왕후는 궁녀들 사이에 있다가 낭인들에게 끌려나온 뒤 낭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칼로 내리쳐 몇 군데 상해를 입혔고, 이후 절명시켰다고 한다. 대체로 그 시각은 새벽 5시 50분에서 6시, 6시 정각 직후 등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근 명성 황후를 시해한 주범은 낭인이 아니라 일본군 장교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후 민 왕후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들의 설명이 제각각 엇갈린다. 《매천야록》은 민 왕후의 양녀가 된 고무라의 딸이 그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처음부터 초상화 혹은 사진을 들고 와서 궁녀들의 얼굴과 대조했을 것이라는 설, 혹은 마마 자국을 보고 확인했다는 설도 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우범선의 진술을 기록한 《우범선 최후사》에서는, 낭인들이 우범선을 데려와서 민 왕후의 얼굴을 확인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5] 민 왕후와 주위에 있던 민 왕후로 의심되는 궁녀들을 전부 발가벗겨서 임신했던 흔적을 찾아 확인했다고 한다.[6][7] 아래에 나온 에조 보고서의 항목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 볼 수 있겠다.

미우라 고로 공사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직접 민 왕후의 시체를 확인한 뒤, 낭인들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체를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으로 가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렸다. 남은 유골은 훈련대에 소속된 윤석우가 몰래 빼돌려 산속에 묻었다가, 나중에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4. 사건 이후[편집]

미우라 고로는 이후 고종을 만나 협박을 가하여, 김홍집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그리고 <한성신보>는 흥선대원군이 입궐했다는 대문짝만한 기사를 내서, 간밤의 사건이 흥선대원군명성황후 사이의 알력으로 벌어진 것으로 유도하려 했다. 또한 미우라 고로는 조선 외부와 군부에게 이번 사건에 일본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요구해, 이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김홍집은 자기가 서명하고 고종의 명의로 명성황후를 폐서인한다는 조칙을 발표했지만, 이것이 되레 역풍을 불러 일으킨다

이후 김홍집 내각은 을미개혁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무너지고 김홍집, 어윤중 등은 끔살, 유길준,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왕태자(훗날의 순종)는 폐서인 조칙에 반발하며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거세게 항의했고, 이에 놀란 김홍집은 폐서인 조치를 바꿔서 명성황후으로 승격시킨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민심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중심으로 서양 각국도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국제 여론도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때 일본은 책임을 추궁하자 "조선인 말을 어찌 믿냐"고 반박했지만 "이건 조선인이 말한게 아니라 서양인이 본 거다!"라고 재반박당했다. 목격자가 좀 많았어야지(…).

결국 명성황후 살해를 조선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속이려 했던 일본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우라 고로 등 사건 가담자 47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나, 일본 법정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했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미파 관료들과 서구의 선교사, 외교관이 대거 개입된 고종 탈출 작전인 춘생문 사건이 터지자 "봐라, 구미도 조선에 개입하는데 왜 우리라고 개입 못하냐?"라며 사건 가담자 전원을 석방했다. 석방된 이들은 일본에서 애국자로 칭송받았고 이후에 출세 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했는데, 이를 보더라도 명성황후 살해의 배후에는 일본 정부의 입김이 개입했다고 볼 수 있다.

5. 흥선대원군의 참여 여부[편집]

일본인들이 왕비 시해라는 범죄 행위에 대해 흥선대원군에게 누명을 씌우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이 관여된 것 자체는 부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을미사변 전, 8월 16일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방문했다. 그는 별장 사랑에서 흥선대원군에게 "거사 후 대군주를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이준용을 3년 기한으로 일본 유학을 보내라는 등 네 가지 조건의 굴욕적인 각서를 제시하고, 자필 확인을 받아냈다. 거사 일자는 적당한 날을 택해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해 주기로 했다.

일본은 출발에 앞서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게 하였고, 그것을 한양 시내에 붙이도록 지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일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하고 5백년 종사도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고종)를 보익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 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을미사변 동안, 흥선대원군경복궁 내 강령전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태의 진전을 보고 있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 왕후 민씨를 싫어하여 을미사변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고, 실제 실행 역시 일본인들이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분 면에서 도움을 준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인 선교사외교관이었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의 죽음(The Passing of Korea, 1906년)'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런 까닭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조선에서 맨 먼저 상의하고자 했던 사람이 전임 섭정(흥선대원군)이었다는 사정은 이해하기 쉽고, 흥선대원군은 문제 해결에 대해 단 한 마디 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20년 동안의 그(흥선대원군)의 경험은, 공사가 겨냥한 목표를 이루는 길은 하나 뿐임을 그는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우라 고로 자작은 당연히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을 꺼렸지만, 그도 마침내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계획임을 확신하게 된 듯하다.


그리고 1896년 1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판결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0월 8일 새벽 3시,' 장사(壯士)들을 포함하는 일본인 대집단이 조선인 몇 사람들과 함게 한강에 가까운 흥선대원군의 거소로 가서 그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들이 출발할 때, 그들의 우두머리가 사정에 따라 '여우'를 처리하라고 그들을 독려했다. 그 말의 분명한 뜻은, 왕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이 틀 무렵, 그 무리는 광화문을 통해 궁궐에 들어갔고, 바로 대군주의 거처로 향했다.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는,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들의 죄에 더해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입 노릇을 한 흥선대원군을 통해 살해된 명성황후의 기억을 더럽히고 낮추기 위해 온갖 짓들을 다했다.


그래서였는지 1898년 흥선 대원군의 사망 때에도 아들인 고종은 장례식에 불참한 것으로 알려져서 을미사변 이후 부자간의 관계가 소원해진듯 싶다.

흥선 대원군은 사실 그 전에도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납치되기 전에도 사실 대원군은 청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대사관이 습격당했기에 일본이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을 해오면 청나라를 이용해 견제하겠다는 생각을 가진게 대원군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난의 주동자 라는 고종 세력의 밀고로 그는 청나라로 압송되고 이홍장은 고종을 택했다. 이후 고종이 일본을 통한 개화를 추진하자 도리어 청은 이를 견제키 위해 대원군을 조선에 돌려보냈다. 그러다 이번에는 반대로 동학이 일어났을 때,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내각을 세웠고 민심을 잠재우기 위하여 대원군에게 손을 뻗었고 대원군은 주저없이 그 손을 받았다. 더구나 그는 이 때 고종을 폐위하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실권은 김홍집 내각이 쥐고 있고 자신은 그저 허수아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동학군, 청군과 함께 일본군을 협공하려고 했지만,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둬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권력을 위해서 누구도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가장 큰 국내 정적인 왕비를 제거해 준다는 일본의 제안은 달콤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고종과는 을미사변 이전에도 그가 주도한 폐위 시도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권력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부자 관계가 조선 시대만 해도 어디 한둘인가?

6. 왕후의 능욕 여부[편집]

일본의 '에조 보고서'에 민 왕후를 강간하는 장면이 묘사된 내용이 있다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문구는 <여우사냥>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작가 김진명이 자작한 것이다. 실제 '에조 보고서'의 표현은 이와 다르며, 상식적으로 보고서에서 강간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의 실제 문구에서도 '국부 검사'를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시간이나 강간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강간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에서 국부(局部)가 다리 사이의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데 사용된 것은 1936년 아베 사다 사건이 시초이며 을미사변 당시에는 현재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지만, 해당 보고서에서의 '국부'는 '다리 사이의 신체 부위' 이외의 의미로는 해석 자체가 되지 않는다. 보고서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의 코와 귀를 자른 뒤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위에 나와있는 것처럼, 임신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 을 벗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 강간이 없었다고 해도 만약 살아있는 상태에서 발가벗겼다면 외부인들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조선 왕비에게는 강간에 맞먹는 능욕이다.

파일:에조보고서.jpg
오마이뉴스 기사

7. 왕후는 죽지 않았다?[편집]

2013년 7월 1일,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통합 인문학 연구소 연구 교수는, 독일 외교부 정치 문서 보관소와 영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민 왕후가 을미사변 때 죽지 않고 탈출했다라는 내용의 외교 문서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정 교수가 발견한 문서는 1896년 2월 6일, 러시아 주재 독일 공사 후고 라돌린이 총리 앞으로 보낸 암호 문서 해독문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조선의 왕후가 아직 살아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특별시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매우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보낸 문서도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는 "대군주와 왕태자(순종)는 피살을 모면한 것 같다. 그리고 대군주는 왕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는 것.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도 "일본인들이 궁녀 서너 명을 죽였으며, 왕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으며, 이후 힐리어는 베베르의 방문을 받았는데 베베르가 민 왕후의 생존 가능성이 있음을 말했다는 보고서도 작성했다고 한다.

과연 정 교수가 발견한 문서가 실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의문 부호가 달리기는 한다. 만약 민 왕후가 탈출했다면, 왜 이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다. 민 왕후가 살아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이후에라도 드러내서 일본을 궁지로 몰수도 있었는데, 왜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그런 카드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명성 황후는 이전 임오군란 때도 큰 난리통에 궁녀 옷으로 변장하고 궁을 탈출해 숨었고, 조정에서는 왕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왕후의 국상(國喪)을 선포한 적이 있다. 만일 왕후가 살았다면 임오군란의 해프닝이 그대로 재연된 셈인데, 그 때는 사태가 진정된 후 왕후가 직접 돌아왔지만 이 때는 그러지 않았다.

또한 일각에서는 일본외교가에 역선전을 살포한 걸, 독일영국이 착각한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 교수와 일부에서는, "당대 최강대국인 독일영국일본의 역선전을 아무 확인도 않고 덜컥 믿고 본국에 보고했겠느냐??", "민 왕후는 일본의 재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다가 곧 사망했을 것이다"라는 반론도 나온다. 결국 구체적인 사료가 더 발굴되지 않는 한,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듯하다고 하지만 사건 초기에 흔히 일어나는 오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8. 기타[편집]

을미사변에 가담한 48명의 낭인 중의 한 명인 토우 카츠아키(藤勝顯)는 민 왕후를 두 번째로 베어 마지막 숨을 끊었노라고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櫛田) 신사에 그가 사용한 칼[8] 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칼의 나무 칼집에는 그가 직접 새겨 넣은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는 문구가 그대로 있다. 이 칼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명성 황후 민씨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다른 방향에서 이 을미사변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왕조의 파멸에 대한 책임을 묻기가 곤란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일로 인해 명성 황후가 '나라를 위해 노력했으나 무참히 살해된 비운의 왕비'로 미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1] 당시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남편으로, 금릉위라는 직책도 가지고 있었고,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는 오히려 반일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인지 고종은 일본으로 도망가는 박영효의 피난로를 느슨하게 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2] 그리고 살해의 주범들은 전부 치외법권으로 인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갔다.[3] 그 전해의 경복궁 점령 당시,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궁궐을 지키는 조선군의 무기, 탄약을 죄다 향원정 연못에 처넣었다. 이 총들이 아직도 정비가 안 된 상태였다. 화력덕후고종이 모았던 통일성 없던 막대한 무기들은 이때 모두 맛이 가버렸고, 경복궁은 이후로도 몇 차례나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는다.[4] 무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위대 대부분은 궐 밖에 나가 있었고, 300명의 시위대 인원으로는 무기가 멀쩡했어도 일본군을 막기는 힘들었을꺼다.[5] 일본에서 열린 명성 황후 시해범들의 재판에서 나온 이야기라는데 확실한 걸 아시는 분 추가 바람[6] 궁녀들은 평생 처녀로 지내야 하고, 임신 경험이 있는 건 왕후 뿐이기 때문이다.[7] 민 왕후의 용모가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유방의 처짐으로 확인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유방만 가지고 나이를 추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냥 뒤에 덧붙여진 이야기인 듯하다.[8] 이 칼의 이름이 히젠토(肥前刀)라고 한다. 길이 120cm에 칼날이 90cm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