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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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에 있는 영정

성명

원균(元均)

출생

음력 1540년 1월 5일
(율리우스력 2월 12일)[1]

사망

1597년 7월 15일(?)[2]
(그레고리오력 8월 27일)

출생지

조선 충청도 진위군 여방면 도일리
(현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국적

조선

평중(平仲)

본관

원주(原州)

비고

사후 선무공신에 녹훈됨.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3]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 4월 2일 2번째 기사. 사관의 논평.

1. 소개2. 생애
2.1. 임진왜란까지2.2. 임진왜란 발발 이후2.3. 삼도수군 통제사 2.4. 칠천량 해전
2.4.1. 사실 살았다?
2.5.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의 전투 일지
3. 인간성과 잔혹행위4. 추증 - 선무공신 1등5. 원균옹호론6. 기록에서
6.1. 난중일기
6.1.1. 1592년6.1.2. 1593년6.1.3. 1594년6.1.4. 1595년6.1.5. 1597년
6.2. 실록6.3. 난중잡록6.4. 달천몽유록
7. 창작물에서8. 기타

1. 소개[편집]

원흉(元凶)[4], 희대의 분탕종자, 진정한 내부의 적, 천하의 매국노.
한국 역사상 최악의 졸장 중 하나이자, 희대의 트롤러.[5]

조선 선조 당시 활동 했던 무인.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우수사를 역임했으며 이순신에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재직했으나 칠천량 해전 이후 행방이 묘연한 인물이다. 당시 선조의 정치적인 불안감을 이용하여 벼슬을 얻고, 일본 수군에게 2번이나 길을 열어주고 도주한 역사적인 인물.

일본에 2번이나 바다를 열어주고 도망쳤고, 스스로 버린 판옥선이 최대 200여 척을 넘길 수도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긴 장수이다. 경상도 우수사 당시에 자침한 배가 70~100여척. 칠천량 해전에서 싸우지도 않고 후퇴 명령을 내린 함대가 최소 70여 척. 너무나 수치가 어이없어서 도리어 안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기록에서도 교차되어 확인된다.

일부에서는 지엽적인 이득을 위하여 이순신과 비교하며 원균 명장론 등을 통해서 쉴드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편집]

2.1. 임진왜란까지[편집]

1540년 1월 5일, 충청도 진위군(현 경기도 평택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인 집안 출신이자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원준량. 이후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를 거쳐 부령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원균의 무과급제는 아버지 원준량의 입김이 작용한 부정시험의 의혹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30권 19년의 6월 21일의 기록에 따르면 원준량이 자식을 부정입시케 하여 탄핵받은 바 있다. 이때 원균의 나이는 24살로 입시에 응할 나이이며 원균의 바로 아랫동생인 원영은 21살이나 문과 급제생이었고 남은 두 동생들은 무과에 응시하기엔 지나치게 어렸을 것이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원균일 가능성이 높다.

김탁환의 소설 불멸이나 불멸을 원작으로 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북방에서 여진족 토벌에 활약했다고 설정되어 있지만 실록에 원균이 군공을 세운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그의 승진속도는 꽤 빨랐으며 과거 급제한 뒤(1579년[6]) 12년 만에 경상우수사에 오른 것을 볼 때 군공을 세웠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근거는 없고 그냥 추측이다. 원균 옹호론자들이 조산만호 때 변방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했다고 말하는데 승진기록만을 볼 때 조산만호에서 부령부사로 특진한건 기록에 나와있고[7] 시전부락 전투에 당시 종성도호부사(약칭 종성부사·종3품)였던 원균이 '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하기는 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순신과 달리 자세한 전공기록은 역시 없다.

이 전투에는 이순신 또한 원균과 같은 계급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나이는 5년 어려도 급제는 3년 먼저 했으니 이순신은 원균의 선배인 셈이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8]


조선왕조실록》 선조 25권, 2월 4일(신미) 1번째기사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런 자리에 앉기엔 성과가 형편없다"라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9] 그러나 159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지 3개월 뒤에 그의 인생을 바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라좌수사에서 일 못한다고 탄핵받은 인사가 경상우수영에 임명된 걸 두고 논란이 생기는데 당시 무관들의 평균적인 수준을 이해해야 한다. 문관들에 비해 학문이 떨어지는 무관들이 평시에 불량한 행실, 행정능력 미숙 등으로 탄핵받는건 무척 흔했다. 별시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식년무과만 노려 급제한[10] 엘리트 무관이면서 행정능력도 정상급에 꼬박꼬박 독서하며 독후감쓰고 시도 짓던, 문관 수준의 식견과 교양을 갖춘 이순신은 당시 무관들 중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존재였다.[11] 조정도 무관들에게 그런쪽으로 기대는 많이 하지 않았고 전시에 싸움잘하고 용맹하길 요구했다.[12]

2.2. 임진왜란 발발 이후[편집]

임진왜란 초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연려실기술에는 그의 초기 행보에 관한 두 가지 기록이 있는데 하나는 경상우수영 병력을 이끌고 부산포 앞바다로 나갔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서 후퇴했다는 것과 어선을 보고 적인 줄 알고 후퇴했다는 두 가지 기록이다.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원균이 경상우수영 병력을 모아서 부산포 앞바다로 나갔다는 것이다. 적을 보고 후퇴한 경우 수송선인지 전투선인지 판단하기 힘들었을 테니 이 부분까지는 까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700여 척이나 되는 일본 함선이 상륙한 부산포 앞바다에 한가롭게 고기잡고 있을 어부가 존재할 리는 만무하니 원균이 적을 보고 후퇴했다는 쪽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진짜 문제인건 이 다음부터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5월 10일 선전관 민종식이 전선시찰을 마치고 돌아와 원균이 적선 30여척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6월 28일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올린 경상도 전선의 상황보고에 따르면 원균이 군영을 모두 불태우고 보유 판옥선을 전부 자침시킨 후 배 한 척 달랑 몰고 도망쳤다는 정반대의 보고를 올린다. 이 때 자침시킨 전선의 수는 최소 70여척.

일부에서는 이것도 처음부터 동원할 수 없는 '서류상 전선'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원균이 경상우수사에 취임한 이후 전선 및 군수 물자의 상당수를 횡령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경상도 관찰사인 김수가 경상우수영에 대해 일제 점검을 행했는데 이 때는 문제가 없었으므로 설득력이 조금 떨어진다. 어쨌든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것은 확실하다.

물론 도망친거 자체는 옹호(?) 해줄수도 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우린 수군 약하고 육군이 강함" 이라는 오판을 내리고 있었는데, 당시 조정이 "까라면 까" 수준이었으니 원균 입장에서는 공연히 나가서 용감히 싸우다 깨져서 목 잘리는것보다는 그냥 육지로 도망치는게 그나마 나았을거라고 생각했을수도 있다. 또 도망치며 군수물자를 날려먹는것 또한 흔한 일이다. 문제는 육지에 올라와서도 싸울 생각이 있었는지가 의문인데다. 조정엔 거짓 장계를 올렸다. 즉 작전이라기 보단 보신에 가까운 행동이다.

개전 이틀만에 본영인 동래부가 함락된데다 경상좌수사 박홍이 적이 군세가 많음을 이유로 도주한 바람에 경상좌수영은 와해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원균은 경상좌수영을 구원하러 왔다가 적의 함선을 보고 후퇴하여 판옥선을 자침하고 군영을 불태운다. 그리고 육지로 달아나려했으나 부하인 이운룡의 만류[13]로 그만두고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후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일본군과 싸운다.

사천 해전 이후 조정에 공적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는 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게 된다. 원균과 이순신의 반목이 심해지자 조정은 원균을 충청병사로 발령을 냈다. 경상우수사(정3품)에서 충청병사(종2품)으로 발령이 났으니 여하간에 승진이었다. 충청병사 재임시에 상당산성을 다시 건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완공된 후에 내린 비에 무너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포악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옹호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1596년에 전라병사로 다시 전출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요시라가 반간계로 조정과 이순신을 흔들고 있을 때 원균은 '수군이 출동해서 부산 앞바다에서 위용을 과시한다면 가등청정이 수전에 약한지라 그냥 물러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선조비변사는 원균의 이 상소에 대해서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이순신이 파직되는데 한 몫을 거들게 된다. 하지만 경상도의 주요 항구/포구 및 거점들이 일본군들에게 모두 점령되어있는 데다가 일본군들이 곳곳에 왜성을 쌓아서 해로를 감제하고 있는 점을 완전히 배제한 원균의 상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다.[14]

실제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후에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를 점령해야 부산포로 출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원균 본인마저 수륙병진으로 부산포 출정을 주장했으니 위의 수군 단독으로의 부산포 출정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준다.

2.3. 삼도수군 통제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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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좌천된 후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았다. 이때 원균은 친척 안중홍에게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라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징비록에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자마자 기수열외를 자초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울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약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 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징비록(2007년, 이재호, 역사의아침, 291p)

이순신이 계급을 막론하고 작전에 대한 의견과 본인에 대한 충언을 듣는 창구로 사용했던 운주당이라는 별당을 이 녀석은 기생 끼고 술판이나 벌이는 장소로 만들면서 아예 언로를 막아버렸다는 뜻이다.참고로 징비록에서는 이 묘사 바로 직후에 칠천량 해전의 기록적인 패배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또 원균의 친척인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峰全書)에는 안방중의 집안 어른인 안중흥과 원균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15]의 처가 원씨의 친족이기 때문에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고 하므로 중부는 "영감이 능히 성심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뛰어나야만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이순신의 직함을 대신하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긴대서야 어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균은 다시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16]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라고 하므로 중부는 웃으면서 "대장으로서 칼과 정을 쓰게까지 해서야 될 말인가?"[17][18] 하고 대답했다. 원균이 떠난 뒤에 중부가 나에게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19]기겁(騎劫)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한참이나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은봉전서(隱峰全書)


위의 은봉전서를 요약하면 안중흥을 만난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게 기쁜 게 아니라 이순신을 엿먹였기 때문에 기쁘다"라는 막말을 하자, 안중흥이 "자네가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이순신보다 더 큰 공을 세워서 엿을 제대로 먹여야지, 지금 관직만 얻었다고 그 소리가 나오는가? 적은 어떻게 상대하려는가?"라며 어처구니 없어했다. 이때 원균은 "멀리서 싸울 땐 편전을 쓰고, 가까이서 싸울 땐 칼과 몽둥이를 쓰면 되오''라고 진짜 듣는 사람 뒷목 잡게 만드는 소리를 했다.

그후 안중홍은 원균이 돌아가자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도 필시 원균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괄은 명장 조사의 아들이었고 이미 당대의 수재라 평가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전혀 없고 그저 책상에서 공부한대로만 병법을 적용하다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실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겁 또한 아무리 악의가 연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를 대신할 정도면 어느정도 능력이 있다는 얘기고 적장 전단이 직접 뇌물과 함께 성이 함락되거든 자기 가솔들을 보살펴 달라는 편지를 보내오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뜻하지 않은 기습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괄과 기겁의 상대는 그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도 손꼽힐 명장들인 백기전단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지휘한 도도 다카토라나 가토 요시아키도 분명 유능한 장수들이었지만, 백기와 전단에 비교할 바는 못 된다.

  • 참고로 은봉전서에는 원균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써놨다. "남쪽의 사람들은 (은봉전서가 쓰여진)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다"[20]

  • 은봉전서에 기록된 또다른 원균에 대한 평은 이렇다.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 데만 정신이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구걸까지 하니 병사들이 이를 두고 '한 숟갈씩 얻어온 밥이 온 공기보다 많다'라며 비웃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책은 원균의 친척이 쓴 거다. 저자는 서인에 속해 있었다. 친척이고, 같은 당파에 속해있는 사람마저도 원균이 한심하고 무능하다며 까고 있다. 더구나 안방준은 그 장인이 을묘왜변에서 활약한 정승복이다. 그런 사람에게 인척이란 작자가 이런 망언을 하니 더더욱 갑갑하게 여길 수 밖에 없다.

원균은 통제사에 제수되기 전에는 이순신이 겁쟁이라서 부산을 공격하지 못한다면서 비난하는 발언을 자주 했는데 그 역시 제대로 공격에 나서지 못하면서[21] 권율에게 호출당해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겪었고 결국 여차저차 출전은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이라는 한국 전쟁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160여 척 중 상황이 불리해지자 배설이 이끈 12척을 제외하고 전부 '증발'했다. 단, 이에 대해서는 명량 해전 직후 수군의 재건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는 점을 들어 침몰한 게 아니라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채 뿔뿔이 도망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전 직후만 해도 조정에서는 전멸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후 '뿔뿔히 흩어졌다'는 식의 서술에서 '단 한 명도 죽은 이가 없다'는 서술까지 나오면서 이 해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전사가 확인된 장수는 (뒤에 밝혀진) 이억기최호 둘이었고 (사실 처음엔 유일하게 죽었다고 알려진) 생포된 김완 이외에는 전사가 확인된 장수가 없으며 명량대첩 이후에 하나둘씩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뒤에도 나오지만 전사를 확인할 수 없는 목록에는 원균도 포함되어 있다.

조정과 권율이 출전을 거부한 원균에게 출전을 강압했기에 원균만 나쁘다 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지만 애초에 상술했듯 원균 자신이 부산포 진격 떡밥을 흘리며 이순신의 경질과 자신의 부임에 큰 역할을 했으니 이는 자업자득이다. 장비와 훈련도는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며 아군인 무적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적인 왜군의 사기는 장졸을 막론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할 정도에 조선 수군은 그동안 배 한 척 부서지지 않고 일본군을 쥐잡듯 했으니 나름 충무공과 비슷한 급의 수군 장수로서 '함께' 왜군을 격멸한 원균이 패배하리라고, 그것도 적군은 아무 타격이 없고 아군은 수습할 여지조차 없는 패배를 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무리 낙천적인 일본군이든, 아무리 염세적인 조선군이든 일본군의 승리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이는 달리 말하면, 원균이 그토록 무능한 주제에 자신이 이순신처럼 잘 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재주는 뛰어났다는 뜻도 된다.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거부했다는 게 통설인데 이순신은 부산포로 출전을 몇 차례 했었다. 1597년의 실록 2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김응서와 함께 부산포로 출전해서 늘 하던 것처럼 신나게 부수다가 돌아왔고 원균이 했던 것처럼 가덕도에 하루 경야한다. 이때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병사 1명이 전사하고 초동 5명이 잡혀갔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노하여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공성전을 벌였고,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협상 후 포로들을 돌려받은 후에야 돌아갔다. 굳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후 원균의 출전과 너무나도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의 병력은 겨우 62척이었다.

아래는 칠천량 해전을 전후로 한 원균의 작전 결과이다.

  • 원균이 통제사가 된 직후 거제도에서 벌목하던 왜병 30여명을 잡은 공이 있었다. 숫적으로도 열세인 데다 그 유명한 조선 수군이라 별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로 인해 선조는 통제사가 되자마자 공을 세웠다며 추켜 세워줬고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전투는 원균이 그들을 달래서 돌려보내준 후 뒤에서 기습한 전투였다. 기습당한 그들은 죽기살기로 싸워 판옥선 한 척을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평산만호는 눈 아래에 총상을 입었고 보성현령 안홍국이 죽었다. 이게 밝혀진 후 조정의 반응은 그저 망연자실.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말하자면 옥포해전 이후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판옥선이 점령당한 최초의 사건이다. 정조 때 편찬한 <충무공전서>에 안홍국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과 같이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그러자 후손들은 죽은 것은 같으나 싸우다가 죽은 것과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라면서 잘못된 기록으로 공이 묻혔으니 정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니까 이 때는 그나마 싸우다가 죽은 거라도 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죽었다는 건 싸우다가 죽은 것도 아니라 후손 입장에서는 조상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의미다. 조선 후기 칠천량해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 단면.

  • 부산포 앞바다에서 시위하던 중에 일본 본토에서 오는 수송선단과 마주쳤는데 이때 선전관 김식은 그들이 조선 수군을 유인하며 뿔뿔히 흩어졌다고 한다. 원균은 이를 추격했고 이 과정에서 무려 12척의 배가 해류에 떠내려 가버린다. 격군들이 해류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하게 추격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물마루를 넘었다고 하는데 이건 조선 수군 전체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미친 듯이 추격했다는 말이 된다. 그나마 유인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쫓아가는 것은 바보짓이고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그냥 조선 수군을 보자 겁이 나 피해서 도망간 것이라고 한다.

  • 이후 원균은 가덕도에서 경야하는데 이번에도 물을 확보하러 간 병사들이 기습을 당한다. 이때 원균의 병력은 최소 130척이지만 400명이나 되는 아군을 버리고 도망간다. 버려진 400명의 운명은...... 이순신이 겨우 62척으로 공성전을 벌인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사건.


물론 당시 일본군은 크게 증원된 상태였고 조선 수군을 어떻게든 격멸해야 했기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맞서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을 보면 원균의 지휘에 크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에 분노한 권율은 직접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친다. 여기서 의견이 갈리는데 한 번 맞았다는 말과 두 번 맞았다는 것.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7월 14일에 곤장을 때렸다고 나오는데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7월 11일이라고 나온다. 곤장을 한 번 맞았다면 두 기록 중 하나가 틀렸다는 뜻이고, 두 기록이 모두 맞다면 권율이 11일과 14일 두 번 때렸다는 뜻이 된다. 자식인 원사웅까지 같이 맞았다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확인바람. 만약 두 번 다 맞은 거면 권율은 거제도 바로 근처까지 와서 원균을 때렸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이때 곤장을 친 이유는 도주한 것 때문이 아니라 조정을 기만했기 때문이라고 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즉, 이제 와서 말바꾸는 원균에게 분노했다는 이야기.

결국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었던 원균은 일심으로 순국할 뿐이다며 비장하게 싸움을 결의한다. 그리고 일본군 역시 조선 수군 격멸을 위해 전멸을 각오한 야습을 펼치게 되는데...

2.4. 칠천량 해전[편집]

이렇게 칠천량 해전은 시작되었다. 칠천량 해전 때 조방장으로 선봉에 섰던 김완은 이 상황을 자신의 저서 《해소실기》에 자세히 남겼다. 당시 사관의 표현대로 가슴이 찢어지고 가 녹는 임진왜란 최대 패전이 시작된 것.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칠천량 해전의 예고편에서 이 구절에 대해서 찢긴 희망이 피로 흘렀다라는 비통한 문구로 나온 적이 있다.

칠천도 앞바다인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에게 일본군은 야습을 시작했고 김완은 이에 맞서 싸운다. 이때부터 조선 수군의 비극이 시작되었는데 휘하 병력의 절반 가량이 무작정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런데...이때 기습한 적은 단 두 척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조선 수군 주력이 있는 곳으로 후퇴했다고 하는데 이때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라서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 당연히 두 척밖에 안 되는데 김완은 거부했고 아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면서 김완의 함선은 결국 점령당한다. 이때 김완은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힌다.

흔히 통념상으로는 이 야습 때 일본 수군의 주력 함대가 모조리 뛰쳐나오고, 이 기습으로 인해 조선 수군이 칠천량 앞바다에서 그대로 궤멸하고 배설이 이끄는 12척만이 간신히 도주했다는게 칠천량 해전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후퇴는 정상적인 명령으로 작동했다는 것. 야습한 적은 토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수군의 도주가 확실해진 이후에야 우리가 잘 아는 '바다를 뒤덮은 천 척의 적'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16일 오전 8시경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반도를 향했다.[22]


《해소실기》 1권


이는 칠천량 해전 최고의 의문으로 지휘권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든 아니든 조선 수군은 견내량으로 후퇴해서 한산도로 가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우리가 잘 알듯이 고성 앞 춘원포로 후퇴해서 거기서 배를 버리고 모두 도주해 버린다. 배설만이 홀로 후퇴하여 경상우수군만 살았다는 것이 통설인데 명량대첩에서 배가 없는 장수들은 통제사 좌선에서 일개 사수로 참전했다는 것을 보아 자신의 배를 타고 도망친 장수는 그대로 배에 타고 참전했다는 걸 알 수 있고 여기에 전라수영 휘하 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배들이 견내량으로 후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와 명량대첩 이후 임치첨사 홍견 등 판옥선을 끌고 합류한 장수, 조선 수군의 부활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서 제법 많은 배가 춘원포로 가지 않고 견내량으로 탈출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춘원포로 갔다는 건, 지휘관의 명령이었다는 말이 된다.

원균이 술에 취해 기생들을 끌어안고 있다가 기습 당해서 지휘권이 무너졌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정말 원균을 좋게 봐준 거고 낙관적으로 상황을 본 것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가 춘원포에서 전사한 것은 원균의 명령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고, 설사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원균 단독으로라도 한산도로 돌아갔어야 했다. 원균은 그야말로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놓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차라리 원균이 술에 취해서 지휘권이 무너졌거나,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너희들이 알아서 도망가라'라고 손을 놓아버렸다면 더 많은 배들이 한산도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춘원포에서 대다수가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 내내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가 점령된 것은 해전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원균이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정상 참작이 된다. 이게 아니라면 원균은 제정신으로 자기 혼자서 도망치기 위해서, 조선 수군 전체를 사지로 끌고 가놓고 탈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나마, 그나마 그를 옹호해줄 유일한 방법이 견내량 바로 서쪽에 막힌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견내량으로 착각해서 갔다가 육지에 막히자 패닉에 빠져 도주했다는 것. 하지만 이 역시 그의 지휘가 무능했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칠천량 해전이 사실상 정유재란이 시작된 원인이라는 걸 생각하면[23] 이 전투에서 그를 옹호해줄 방법은 없다. 디테일하게 보고 싶다면 김경진의 임진왜란 1~3권 참조.

능력이 무능해서 졌다는 것은 충분히 정상참작이 되는 사항이다. 그러나 원균이 정말 괘씸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배를 버린 것이다. 싸우다 패했으면 그나마 정상참작이라도 되는데 원균은 적이 몰려왔다고 배를 내팽개치고 육지로 도주한 것이다.

이로서 대전 액션 게임에서 최종보스로 플레이 했다고 해서 무조건 다 이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원균이 보여줬다.

2.4.1. 사실 살았다?[편집]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였던 그는 왜적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징비록》


원균은 장렬하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미지수다. 일단 조선의 공식입장은 원균은 칠천량 패전 이후 가덕도로 도주했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출처 선조수정실록 1597년 7월 1일 기사). 문제는 패전 직후부터 원균이 살아있다는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고, 추측만 무성한 이순신 생존설, 자살설과는 달리 당시 책임자이던 권율이 목격자까지 확보해서 증언을 바탕으로 한 신빙성이 있는 증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서술하자면 원균의 행적에 대한 첫 보고는 칠천량에서 살아서 돌아온 선전관 김식의 보고다. 1597년 선조는 선전관 김식의 칠천량 패전 보고서를 받는다. 여기서 김식은 자신과 원균의 도주를 알리면서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라고 보고서를 올린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김식도 도망치는 상황에서 도주를 무마하기 위해 거짓 보고를 올렸을 가능성도 있고, 거기에 김식조차도 원균에게 왜군이 달려들었다니 죽지 않았겠느냐는 다시말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죽었다고는 보고하지 않았다. 그외에도 이순신이 칠천량 패전 직후 곤양에서 경상우후 이의득과 경상우수사 배설과의 대화에서도 원균이 도망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도망후 전사했는지는 자신들도 모르는 상황이었다(출처: 난중일기 1597년 음력 7월 21일, 22일 일기)

선조는 이 보고 직후 벌인 회의부터 바로 원균이 죽었다고 단정해 버린다. 문제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도원수 권율의 보고서가 올라오는데 이순신의 복귀가 주요 내용이었지만 여기에 원균의 패전 이후 행적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도)(蛇梁-통영 부근의 지명)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도)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선조실록 1597년 7월 26일 기사


물론 오보의 가능성도 있고 특히 임진왜란은 통신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라 전사했던 정발, 송상현을 두고 한양에서는 일본군에 항복해 일본 장수가 됐다는 오보가 올라올 만큼 오보가 잦았지만, 원균 생존 보고는 다른 오보와 다른 점이 최영길이라는 명백한 증인과, 최영길 본인이 원균을 목격한 수준이 아니라 원균과 대면한 후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을 증언한 것이다. 더욱이 원균이 전사했다는 선전관 김식의 글은 김식 자체가 신뢰하기 힘든 사람이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출처부탁) 권율의 보고 직후 조정에서는 당연히 원균이 살아있으니 찾아내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고 처음에는 선조도 여기에 응해서 사실상 즉결처분을 명령했다(선조실록 1597년 8월 5일).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이 명량해전으로 목숨 연장을 시켜주자 다시 입 씻고 원균의 처벌 요구에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 대지 말라."는 개드립을 쳐가며 원균의 처벌을 반대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칠천량 패전의 공범이 한양에서 멀쩡히 선위 놀이나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원균은 공식적 전사자로 대우받는다. 선조의 방기결과인 듯하다.

선조는 위와 같은 원균 책임론에 응하지 않았는데, 그럴 만도 한 게 칠천량 패전의 1차적 책임자는 분명 원균이지만, 이순신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대신에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해 그 판을 깔아준 건 선조다. 더욱이 실제로 상황을 파악하고 난 후에는 생각을 바꾸어 그냥 한산도에 주둔하려 한 원균을 끝끝내 떠밀어 공격에 나서게 한 이도 선조. 이래저래 최종 책임은 선조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그냥 원균이 전사했다고 취급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피해를 최소화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할 이를 논할 때에,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음에도 신하들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할 것을 은연중에 요구하자 결국엔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를 승인해야만 했을 정도로 선조의 정치적 입지는 많이 좁아진 상황이었다. 하물며 살아 있는 원균을 불러들여 진상을 파악했더라면 선조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을 것이다. 결국 선조의 방기로 인해 원균이 확실히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그저 공식적으로만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24] 김경진 등이 집필한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이러한 생존설에 따라 순천부사 우치적이 평생 숨어 살도록 원균을 숨긴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25]

한편 일본 측이 기록한 사살 적장 목록에 원균 생존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데 일본군도 장수들의 논공행상을 위해 죽인 적장의 기록은 빠짐 없이 했는데 그 어디서도 그 명단에 원균은 없다. 즉, 적어도 원균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해 수급이 입수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원균 정도면 갑옷으로 인해 구별하기 쉬웠을 것인데도 말이다.비록 원균의 이름은 몰랐어도(이순신의 이름이 일본에 알려진 게 에도시대 이후 류성룡의 징비록이 유행하면서부터다.) 갑옷 등 화려한 장비들로 봐서 충분히 고위급 지휘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테고 원균의 신원을 확인해 줄 고위직 포로도 있었는데 말이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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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사했든 안 했든 원균은 시체조차 못 찾고 행적이 묘연해졌다. 원균 본인도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설령 살아서 도망쳤다 하더라도 죽은 것처럼 위장해서 숨어 살았을 것이 뻔하다.조선 수군을 거의 폐지시켜 버린 것과 가까운 행동을 했으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알려지면 당연히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질 것이라고 원균은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원균은 시신이 없어 고향인 경기도 평택에 가묘를 만들어 봉했다.(경기도 기념물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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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는 통영시 안정국가산업단지에서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로 이어지는 국도 77호선 주변 야산 20여m 지점에 완만하게 오른 자갈 흙더미가 하나있는데 지금은 흔적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주변 마을 주민들 사이에 '엉규이(원균의 지역적 발음으로 추정) 무덤' 또는 '목 없는 장군묘'로 불려 온 이 봉분은 각종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원균의 묘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통영군사편찬위원회가 1985년 펴낸 '통영군사'와 통영문화원의 '통영향토사 연구 논문집' 그리고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에 선전관 김식이 기록한 원균의 마지막 행적을 고려할 때 봉분이 원균의 묘로 확실시된다는 게 향토 사학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무덤이 공인되게 되면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그냥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는 점으로 인해 원균을 어떻게든 포장하려는 후손들이 애써 외면해 왔고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 그러다 봉분 주변을 지나는 국도 77호선 확장공사로 아예 사라질 처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굴조사 필요성이 다시 제기됐다.

2.5.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의 전투 일지[편집]

  • 1597년 (선조 30년) 원균이 세는 나이로 58세인 해

    • 2월 :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됨.

    • 3월 9일 : 거제도에서 일본군의 수급 47개를 취함. 하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래 최초로 판옥선을 탈취당함.[27]

    • 6월 18일 : 100여 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동.

    • 6월 19일 : 안골포에서 일본 군함 2척을 포획, 가덕도에서도 군선 여러 척을 포획함. 전투 이후 회항하던 도중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역습을 받음. 평산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총상을 입었고, 보성군수 안홍국은 머리에 탄환을 맞고 전사함. 또 판옥선 1척 탈취당함.

    • 7월 4일~7월 5일 : 출전한 것으로 추정[28].

    • 7월 8일 : 소규모 전투에서 일본 수군 10여 척을 격파. 이후 일본 수송함대와 조우했고, 도주하는 적 수송함대를 추격함. 그러나 무리한 추격으로 격군[29]이 지쳐 해류에 12척이 떠내려가 5척은 두모포에, 7척은 서생포에 표류함. 서생포에 표착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30]

    • 7월 9일 : 서생포에서 왜군과 교전한 끝에 판옥선 20여 척의 손실을 입음.

    • 7월 14일 : 조선 수군 함대 전체가 출동 부산 앞바다 물마루[31]을 지나가 가덕도에 정박. 이때 물을 구하러간 조선 수군 4백 명이 다카하시 나오쓰구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에 의해 전사함. 가덕도에서 거제도 북단 영등포로 이동했으나 또다시 기습 당해 육지에서 돌아감.

    • 7월 15일 : 비바람이 몰아쳐 기상을 살펴보다 오후에 풍랑을 무릅쓰고 영등포에서 칠천량[32]으로 이동함. 밤 10시에 일본 수군의 습격으로 전선 4척이 불에 탔음.

    • 7월 16일 : 새벽 4시,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포위를 완료하고 공격을 시작함. 조선 수군 거북선 3척 모두 침몰, 판옥선 중 50~100척이 침몰당하거나 실종됨. 수군 수천여 명 전사.

3. 인간성과 잔혹행위[편집]

게다가 원균은 무능한 것 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의 민간인을 왜군으로 몰아 학살도 저질렀다.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에게 위임받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오던 조선인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여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고 속였다.이따위 거짓말을 조정이 믿었을것 같다는게 참 한심하다.[33]

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원균)가 적선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 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만록》


이후 전란을 피해 남해안의 섬에서 살아가던 조선인 어부들을 죽여 그 수급을 바치려다 이순신에게 저지당한 기록이 난중일기에 남아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나온다. 심지어 어부들에게 머리카락을 일본인처럼 꾸미고 옷도 일본식으로 입혀놓았다가 이순신에게 발각되었다.모문룡 스승이네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난중잡록>에 따르면 "한 끼에 밥 한 (10공기), 생선 5마리, 3, 4마리"를 먹는 대단한 대식가로 위의 그림과 같이 비대한 몸의 소유자였으며, 비만이 제대로 움직이거나 전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심해서 죽던 날도 제대로 싸우기는커녕 주저앉아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부터 많은 사람이 원균의 이런 못난 모습을 조롱했으며, 한 유생은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듣고 '원균이 나라를 버린 게 아니라, 원 수사의 배때기가 원 수사를 버렸다'라고 시를 지어 고인드립을 치기도 했다.[34]

"최소한 배신하거나 임무를 방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았다"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부 원균 옹호론자들의 논거 중 하나이고, 원균을 마구 조롱하고 비난하는 당시의 여론을 공정하게 기록한 <난중잡록>에서도 주석에서는 '당시에 겁에 질려 임무를 저버리고 도망쳐버린 놈들이 하고 많은데, 무능했어도 최소한 싸우다 죽은 원균을 마구 비난하는 건 과도한 것이 아니냐' '원균을 선무원훈에 책정한 것은 왕법의 공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시의 정권의 검열 하에서 선조의 관점에서 쓰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

다시 돌아와 도망친 것은 제외하더라도 원균은 무능하더라도 임무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기보다는, 자기가 판 무덤을 자기가 들어가게 되자 궁지에 몰려서 자포자기하고 자살적인 행동을 한 것에 가깝다. 조선 수군의 전력을 저승길 동무 삼아서. 따라서 죽음으로 항전했다기보다 죽음으로 이적행위를 하고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린 것에 가까운 행동에 근거를 둔 원균에 대한 그런 류의 옹호론은 결코 올바른 주장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끌고 갔더라도 중간에 질 것 같다고 느껴졌을때 "그냥 니들은 알아서 살아남아라" 라는 무책임해보이지만 그나마 그가 내놓을 수 있을만한 조치중엔 가장 나을 조치라도 내렸다면 수군이 그리 허망하게 궤멸되진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그토록 키운 수군의 반수는 침몰하고 반수는 도망쳤다. 차라리 저 명령을 내렸다면 각자 적어도 이탈해도 죄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원균 무능했지 그 아래는 죄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해온 베테랑들이니 그들은 살아남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원균은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출격할 수 있는 상황인데 출격 명령을 거부했다'는 둥 이순신을 모함하는 논리에 적극적으로 찬동했으나 막상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나니 칠천량은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손바닥 뒤집듯 주장을 바꾸어[35] 이순신처럼 출격이 힘들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이에 격노한 권율은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며 두들겨 패고 전장으로 내몰았다.[36][37]단 원균이 한 짓은 매질은커녕 죽어 마땅한 이적행위이지만[38], 이런 처벌은 원균이 자포자기해서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돌격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권율에게도 칠천량 패전에 대한 간접적 책임이 일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헛소리가 있다.

하지만 본인이 이순신을 그런 식으로 모함해놓고 자리를 꿰차니 갑자기 말을 쓱 바꿔버리는데 수군 전략을 따지기 전에 권율이 더 나아가 선조도 빡칠만한 상황이다. 즉, 인과응보인 것이다.

더구나 이 인간, 칠전량 당시에 종사관으로 종군했던 친동생 원전(元㙉)[39]을 버려두고 도망갔다. 원전은 이억기, 최호등과 남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4. 추증 - 선무공신 1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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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 본래는 원균의 묘역 앞에 있었으나 물이 나고 낡아 현재의 위치인 묘 뒷편 언덕으로 옮겨 세웠다.

의외로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임진왜란 3대 선무공신 중 한 명인데 그가 선무공신에 제수된 것이 그의 공을 증명한다는 시각도 있으나 사실은 선조의 무한한 원균 사랑의 발로. 개그 같지만 개그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왕권 강화에 집착했던 선조는 이순신의 위명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매우 꺼렸으며 그에 대한 견제로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만든 것.[40]

더군다나 이몽학의 난을 당해 정신적 충격을 받아버린 선조로서는 뭔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존재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다. 게다가 신립이 탄금대에서 드러눕고 한양까지 털려버리자 선조는 요동으로 도망가려고 한 반면 광해군은 분조를 꾸려 조선을 누비고 다니며 전쟁을 독려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백성들의 지지도 역시 선조<<<넘사벽<<<광해군인 상황이었다. 당시 조정에선 이순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한 목소리로 원균에게 어찌 그런 영예를 주냐고 반대했지만 선조가 다 씹고 무리하게 공신으로 만들었다. 이는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비교적 잘 드러나는 편이다.

그랬기에 원균은 전후 논공행상에서 2등에 제수되었으나 원균에게 출정하라고 독촉하던 선조는 태도를 싹 바꿔 칠천량의 패배를 도원수와 비변사의 독촉으로 몰며 자기의 생떼만으로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제수시켰다. 또한 이는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 자체를 공으로 만들어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술책이기도 했다.

종전 후 공신 책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선조는 명나라 덕분에 이겼지, 조선 장수들은 한 게 없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왕이 공로가 있다고 한 세 장수 중 하나가 원균인데 공신 명단 자체에서 빼면 왕 체면이 뭐가 됐을까? 2등 공신에 올린 것조차도 선조 체면 세워주기용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원균이 공을 세운 게 된다. 바로 선조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킨 어처구니 없는 공로가 된다. 그런 즉 전쟁과는 아무 상관 없는 선조 개인 영달을 위한 공로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원균의 선무공신은 의전상의 공로이지 실질적인 공로가 아닌 셈이다. 결국 선조는 자기 명예 떨어지는 걸 막으려고 원균을 공신으로 삼아준 것일 뿐이 된다. 절대 원균이 잘나서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으로 따지면 똑같이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어도 이순신과 권율은 진짜 원수가 맞는데 원균은 의장대 병력 하나 뽑아서 원수 정복을 입힌 것일 뿐이다. 선조가 노골적으로 도망쳐버렸는데 그걸 덮기 위해 똑같이 도망친 원균을 옹호하여 원균에게는 임금님이랑 같은 행동을 한 것만 강조하고 선조에게는 그런 원균과 같은 행동을 했으니 영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디밀어 원균을 선무공신으로 삼아준 것이다.선조의 논리가 워낙 횡설수설이라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튼 원균은 선조 본인과 같은 행동을 해서 킹왕짱이고 선조 본인은 원균과 같은 행동을 해서 킹왕짱이라는 계속적인 논리의 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 원균이 왜 훌륭해? - 선조 임금과 같은 행동을 해서.

  • 선조 임금이 왜 훌륭해? - 원균과 같은 행동을 해서.

  • 그럼 원균은 왜 훌륭해? - ......


(순환 논증의 오류)

선무공신 제수는 선조 37년(1604) 10월에 하사된 선무공신교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로도 매우 정치적인 녹훈으로 선무공신 1등공신인 이순신, 권율, 원균은 1604년 제수 당시 시점으로도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원균 1597년 전사, 이순신 1598년 전사, 권율 1599년 병사). 말 그대로 죽은 영웅은 있어도 살아있는 영웅은 없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편찬자들이 상당한 원균까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선조 외에는 원균을 까는 사람 밖에 없었다 쪽이 답이다. 그 후 실록을 보면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다. 그 지역에 탐관오리가 넘쳐나 마치 원균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구, 왕이 잘못하면 원균 같은 놈이 벼슬을 하니 저쩌구 등등.

敎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孝忠仗義迪順協力宣武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元均書
자헌대부(정2품)·지중추부사(정2품) 원균을 효충장의적순협력선무공신·숭록대부(종1품)·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종1품) 원릉군으로 추증한다.[41]


내용은 "장군은 전사하였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공업(功業)은 끝을 보지 못하였으나, 훈상(勳賞)은 죽어도 가상하므로 선무공신 1등에 책훈(策勳)하고 3품계를 올려주며, 부모와 처자에게도 3품계를 올리고 노비 13구(口), 전지 150결(結), 은자(銀子) 10냥, 옷감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원균이 전사했다고 쓰고 있다.

위키백과의 '칠천량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는 설에 따르면 [42][43] 핏덩이 손주를 당시 55세의 부인 윤씨가 길러 대를 간신히 이었다. 윤씨는 무려 96세까지 살아 홍주 땅에 묻혔으나 가세가 몰락해 시신을 거둘 이가 없었다. 집의 노비가 말년의 인조에게 알려 간신히 매장하였다.

그러나 이 간신히 대를 이은 증손자가 송시열의 제자(박세채 등)들에게 새 행장을 부탁했고 영문도 모르던 이들이 "중과부적"으로 대표되는 왜곡된 행장을 지었다.

참고로 원균의 3살 아래 동생인 원연개막장인 형과 달리 선비로 살다가 전란이 터지자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파(!)하고 이후 현감이 되어 치적을 쌓다가 정유재란 때 다시 군사를 모아 왜군과 맞서싸우다 전사했다. 원연의 아들 원사립도 서천군수로 있다가 왜군을 막아냈다. 내용. 이들 부자야 말로 평택의 진정한 위인이라 할 만하지만, 평택에선 무슨 이유에선지 조선시대 역대급 개막장을 역사 왜곡까지 일삼으면서 지역의 위인이라고 밀고 있으니... 명사 라고 하면 틀린건 아니다. 말 그대로 유명하니까 나쁜쪽 이라는 함정 이 있어서 문제 이지..

사실 보면 원균이 사고 안치고 싸웠다면 그래도 선무2등 정도는 받을 자격이 되었을 것이다.[44] 아무리 무능해도 이순신의 명령대로 출전하고 그렇게 출전했을때 맨 앞에 나아가 다 쳐부숴버리며 공을 쌓았다면 적어도 그 공은 진짜 공이 되었을테고 오늘날 우리는 "아 원균은 무능해 근데 싸울때는 잘 싸웠음" 이라며 진짜 원균을 옹호하는게 바보짓만은 아니라는 소리도 나올수 있었다. 그리고 원균의 집안도 대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45]

5. 원균옹호론[편집]

원균옹호론 문서 참조.

6. 기록에서[편집]

위에서도 있지만, 안방준이 쓴 은봉전서도 참조.

6.1. 난중일기[편집]

이순신은 원균에게 악감정이 있으니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개인의 주관적 시선이 크게 들어 가는 일기 형식의 난중일기로 이순신과 서로 사이가 나빴던 원균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선 한계점이 있지만, 난중일기에서도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주관적인 불평이나 악평 부분을 제외하고 역사적 사실 부분만을 미루어서 기존 사료와 비교하면 일기 형식의 글도 실록 못지 않은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기에, 아래 실록과 비교해서 일치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원균을 평가하자. 오히려 난중일기가 실록보다 원균을 더 점잖게 표현한다는 걸 염두하고 보자.[46] 실록은 원균을 올린 말 그대로 원흉들과 방관적 공범자들의 책임 회피가 난무하는 형국이다.

6.1.1. 1592년[편집]

  • 5월 2일. 삼도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군관 송한련이 남해로부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수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김축 등이 왜적의 소문을 한번 듣고는 벌써 도망쳤고, 온갖 군기 등 쓰던 물건도 모두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 5월 3일. 방답[47]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 원균이 온다고 좋아 했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크게 실망했다.

  • 5월 29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곧장 노량에 도착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6.1.2. 1593년[편집]

  • 2월 8일. 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였다.[48][49]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는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온 진중이 바라보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2월 22일.[50] (중략) 곧이어 진도(珍島) 상선(上船)이 또 적에게 둘러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돌아서서 구원해내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때문에 경상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수사 때문이다.

  • 2월 23일. 원 수사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 2월 28일.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항[51]으로 향하는데 우부장(김득광)이 변고를 알려왔으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군관의 배와 가덕 첨사(전응린)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수사에게 보냈던 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

  • 3월 2일.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52]

  • 5월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만호 이어념이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하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보고 수사 원균의 망령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하다.

  • 5월 14일. 선전관 박진종(朴振宗)과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복윤(福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우수사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렸는데 온 배 안 장병들로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15일. 아침에 낙안군수 신호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尹東耈)가 그 대장의 장계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21일. 원 수사가 허위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 5월 27일. 영남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 경략[53]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 5월 30일.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54]

  • 6월 10일. (전략) 새벽 2시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의 시기(猜忌)와 흉모(凶謀)는 형언할 길이 없다..[55] 이날 밤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 6월 11일. 아침에 적을 토벌할 일로 공문을 만들어 영남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라고 하였다.[56]

  • 7월 21일. 경상우수사와 정 수사가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 일을 같이 한다면 뒷걱정이 없을까?

  • 7월 28일. 사도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보자기[57]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하는 짓들이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경상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58] 족장(발바닥을 때림) 10대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 8월 6일.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영공,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장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 8월 7일. 저녁에 경상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公)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말 전하기를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 8월 26일.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 정 수사도 모두 모였다. 흥양(배흥립)이 오므로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 8월 30일. 원 수사가 와서 영등(永登)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이 부분은 원균은 아마 이순신을 깔보고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는 항목이다. 자신의 배 25척은 어디 숨겨놓고 7, 8척만 이끌고 와서 출동을 제안한 것을 보아하면 이순신이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리고 후에 장계에 올릴 때 이 일을 들먹이면서 "저는 항상 용감하게 나가 싸우자고 했는데 이순신 저놈은 쫄아서 절대 안 나왔습니다"라고 모함까지 했다. 전라도 병마 절도사 원균의 서장. 선조실록 30년 1월 22일 3번째 기사.

6.1.3. 1594년[편집]

  • 2월 11일. 식후에 활터로 올라가니 경상수사와 우수사 조방장도 왔는데 같이 술에 취해 있었다.

  • 10월 17일.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6.1.4. 1595년[편집]

  • 2월 27일. 원균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裵楔)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더라고 한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6.1.5. 1597년[편집]

5월 2일부터는 아예 이름도 안 부르고 직책으로도 안 부르고 경어도 생략하고 있다.[59]

  • 4월 27일. 일찍 떠나 송치[60] 밑에 이르니 (중략) 저녁에 부사[61]가 와서 보았다. 정사준(鄭思俊)도 와서 원공의 망령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 4월 30일. (전략) 병사 이복남이 식전에 와서 보며 원공의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 5월 2일[62]. 진흥국(陳興國)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의 일을 이야기하였다.[63]

  •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에서 와서 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5월 6일. (전략) 정원명이 한산에서 돌아와서 흉측한 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부찰사가 여수로 나와서 병으로 조리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 5월 7일. (전략) 송대기, 유몽길이 와서 보았다. 서산군수 안괄(安适)도 한산에 와서 흉측한 자의 일을 많이 전하였다. (후략)

  • 5월 8일. (전략)[64]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원흉(元凶)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65] (중략) 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 5월 11일. 맑다. 전 광양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을 데리고 살대 구할 일로 순천에 왔다가 와서 보았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문이란 모두 흉측한 자의 일이다. (후략)

  • 5월 13일. (전략) 지난 밤 부사가 말하기를 "체찰사가 보낸 편지에 영공(令公)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하더라"고 하였다. (후략)

  • 5월 28일. 늦게 출발하여 하동(河東)에 이르니 현감[66]이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성 안의 별사(別舍)로 맞아들여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 6월 19일. 새벽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진에 이르니 원수와 황종사관이 나와 앉아 있었다.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기를 "통제사의 일은 그 흉측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안골포와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심보인가. 질질 끌면서 나가지 않으려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천으로 가서 독촉하겠다"는 것이었다. (후략)[67]

  • 6월 17일. (중략)휘하의 여러 장수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 7월 7일.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꿈에 원공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주장[68]이 실책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원수[69]에게 붙들려갔다고 하였다.[70]

6.2. 실록[편집]

이제 실록의 기록을 보자.

  • 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기사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윤근수가 상소를 올린 회의에서 선조가 "원균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류성룡은 "원균은 용감히 싸우는 것은 장점이나 지친 군졸을 위로하는 법을 모릅니다. 이런 일을 할 줄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원균을 제하고 그를) 써야 합니다"라고 했고 정탁은 "수전이 그의 장기이니 이제 그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류성룡이 "원균이 힘껏 싸운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나 영남의 수군 중에는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가 많으니 원균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이원익이 "올라온 뒤에 들으니 원균이 이순신에게 분한 말을 매우 많이 하였다 합니다. 이순신은 결코 한산도에서 옮길 수 없으니 옮기면 일마다 틀어질 것입니다"라고 전하자 선조는 "원군을 청해 수전한 것은 원균에게 공이 많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라 하며 이의 공이 원균보다 나으나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원익이 "원균은 당초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았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서 일어납니다."라고 했다.


이 외에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원균으로 검색 후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을 클릭하면 무수히 많은 선조의 사랑과 대신들의 디스를 볼 수 있다.

6.3. 난중잡록[편집]

  •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씩을 먹으며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한다.

6.4. 달천몽유록[72][편집]

  • 원균은 배가 볼록하고 입은 비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다.

7. 창작물에서[편집]

파일:external/www.jjan.kr/132171_4423_0004.jpg


심지어는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묘책이 꿈 속에서 본 원균이 일러준 것으로 설정되어 있을 정도. 불멸의 이순신이 대차게 까이는 이유가 바로 역사를 무시하고 원균을 띄웠기 때문. 애초에 원균과 이순신이 어린 시절에 서로 만났다는 기록도 없고 근거도 없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부턴 본격적으로 이순신의 행보에 별의별 트집을 잡아 헐뜯기 시작하더니 이순신이 삭탈관직당하고 자기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꿰찬 다음부턴 고증대로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근데 배우의 연기가 워낙 호연이었기 때문에 굉장한 버프를 받아 이상하리만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가끔 보여준다.

덕분에 부흥 카페애초에 임진록2 - 조선의 반격 길드 네이버 카페에서 출발해 불멸 안티 카페를 거쳐 역사 카페로 거듭났다. 그래도 한민족 사상 최고의 영웅을 다루는 드라마라서 고증을 잘 하려고 역사학자를 초빙했는데 그 인물이 하필 원균 옹호론자여서 그나마 그 뒤 제대로 된 사학자들이 "당신들 지금 무슨 짓거리 하는지 알기나 합니까?"하고 지적해서 열심히 수정은 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윤모 작가의 병크로 결국 기록도 없는 거북선 침몰, 그 뒤 이순신이 신립에게 싸닥션을 맞는 것까지 그려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임진왜란 공저자 중 한 명인 윤민혁은 타입문넷 등에 글을 올려 변호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100화가 넘는 대하 사극이다보니 작가가 여러 명이 있었고 그중 역사 고증을 맡았던 작가가 원균 옹호론자라서 고증이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중반 이후 제대로 된 자문위원을 들이고나서 잘못된 걸 알게 되었고 어떻게든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초기의 캐릭터 설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 왜란종결자에서는 마찬가지로 막장 행각인데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도망치던 중에 왜병의 손에 죽는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마수한테 씌였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내가 널 홀렸다고? 천만에. 너 자신이 나한테 혼을 팔았던 거야."라고 비웃는 마수의 모습은 나름대로 명장면. 그제서야 이순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이 "다 이순신 때문이다!" 하는데 작가가 "사관은 논한다"에서 "다 니 때문이다!"라며 대차게 까버린다.

  • 오세영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주인공 유승업이 왜군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은 후 분의복수군으로 칠천량 해전에 참전한 후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다. 그런데 여기서 대놓고 '이순신은 지장이요 덕장이면 원균은 용장이요 맹장이다'라고 적어놨다.

파일:attachment/원균/노주현원균.jpg

  • SBS의 전 시트콤똑바로 살아라에서는 노주현극중극인 사극 '난중일기'에서 원균 역을 맡는데 악역을 재해석하면 인기 오른다[73]는 말에 혹해서 맡았더니, 분장도 사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악의적으로 희화화 시킨데다가 임진왜란 초반에 겁에 질려 경상우수군을 몽땅 날려버리고 이후 이순신을 몰아내기 위해 모함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오는 등 고증에 아주 충실한 실제 원균의 모습 그대로 나왔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어찌저찌 귀양을 가는데 귀양지에서 기생 끼고 술판을 벌였다.

결국 이런 행보에 격분한 노주현이 "세상에 귀양 가서 기생 끼고 술판을 벌이는 작자가 어디 있냐?"며 작가랑 대판 싸웠고[74][75] 그만 "이럴거면 원균에게 사약을 내려라!"라고 윽박지르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래서 실제로 노주현씨는 이런 원균 연기를 토대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원균 역할을 부탁했다고 한다.

왜 이게 실수였냐면 대판 싸운 이후 원균 배역을 맡은 덕택에 CF제의도 들어오고 한참 잘 나갈 때였기 때문. 그러나 작가는 노주현이 사약을 내리라고 한 대로 시나리오 방향을 그렇게 잡았으며 각종 매스컴에서는 '원균에게 사약을'이라고 도배된다. 노주현은 뒤늦게 작가랑 화해를 하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촬영장에서 사약을 엎어버린다. 뒤에 여차저차해서 해결하고 다시 출연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역은 김형일, 선조 역은 황일청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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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징비록에서는 6화에서 이일에 의해 이름만 언급되는데 디스당한다. 그리고 21화에서 오랜만에 등장했지만 팀킬과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하급자들에게 언급되면서 결국에는 빼고 출정하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시당한다. 이순신 역시 참고 있다가 언젠가는 엄중히 경고하겠다고 말할 뿐. 참고로, 배우이일재[76]

  • 1980년대에 나온 삼성당 출판사의 위인전 만화 이순신에서는 무능한 찌질이로 등장한다. 작중에서도 공을 세우는데만 미쳐서 도움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대차게 깠다. 최후에도 칠전량 해전에서 기생 데리고 술이나 마셔서 부장들이 원균을 한심한 놈 보듯이 보고, 수군 병사들마저 "이순신 장군이 있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한심하다, 한심해."라며 깐다. 결국 해전에서 패하자 육지로 달아났으나 왜장의 칼에 베여 죽는다.

  •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 <구국의 태양, 성웅 이순신(1981)>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해 죽은 왜군의 시체를 끌어올리고는 자기가 해치웠다고 조정에 올리라고 하는 찌질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칠전량 해전에서 패해 뭍으로 올라가다가 총에 맞아 죽으며 조선 수군을 망친 천하의 무능한 장수라고 나레이션으로 대차게 깠다.

  • 디시위키에서는 아예 무패의 이순신을 파직시켜 칠천량 해군에서 일본군의 승리를 이끌어냔 일본군 명장이라거나 하늘이 먼저 조선에 이순신을 내려준 다음에 철저히 발릴 왜구가 불쌍해서 밸런스 패치용으로 넣어준 인물이라고 비아냥거리며 까는걸로 나온다. 그 와중에도 무타구치 렌야는 인성이라도 좋았지 원균은 자국민까지 학살했다고 비교당하며 까인다. 문서 마지막에는 저승의 원균이 자신 때문에 조선이 망할 뻔했고 그로 인해 영원히 비웃음받을 것을 후회한 끝에 저승사자에게 다시 한 번 세상에 나가 조선을 왜로부터 지키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했고 그로 인해 무타구치로 환생했다는 소설 겸 개드립이 쓰여 있다(...).

8. 기타[편집]

  • 평택시 국회의원인 원유철은 원균의 후손이다. 어째 원균 영정이랑 닮았다. 관련 링크 그래서 원유철의 지역구이자 원균의 출신지인 평택시에서는 원균을 밀어주는 중이다. 평택시에서 원흉을 자랑하는 글을 읽어보면 비웃음을 금하기 어려운 내용이 한둘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자면, 기원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충각전술[77]을 마치 원균이 창시한 전술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 포장하여 서술하고 있으며, 이순신과의 불화 이유를 공로 다툼이라고 설명해서 충무공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78]처럼 양비론을 주장하는데다가, 칠천량 해전의 패전 책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이없게도 권율에게 완전히 떠넘기고 있다.# 가짜 영웅만들기가 막 나가는구나 아주... 역사 왜곡해봐라
    '평택시가 기릴 만한 역사인물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원균을 띄워준다'는 말도 있는데, 암행어사 박문수, 독립운동가 안재홍은? 무능하고 부패하며 왜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원균을 기리는 것은, '강직과 공명정대'의 상징 박문수와 '일본에 맞서 굴하지 않는 독립운동'을 한 안재홍에게 큰 실례이자 무례다. 게다가 그 후손도 뇌물을 받아먹은 부패한 정치인이자 친일매국 정당의 요인이었다 이분들부터 확실히 띄워주면 될 걸 굳이 원균을 띄우는 것은, 결국 평택시의 문화 및 역사인물 홍보행정에 원유철과 원주 원씨 문중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결국 원유철은 2018년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었다. 조상님의 인격을 아주 진하게 물려받은 후손.

    2010년 1월, 평택시에서 그 곳 출신의 위인(?)들을 배경으로 하는 달력을 선보였는데 다른 건 뭐 특별히 문제 없으나 원균이 1월에 있다. 얼마나 인물이 없었으면... 7월도 아니고 1월이라니

  • 2011년 7월에는 옥포해전이 원균이 총대장이고 이순신은 그저 원군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것도 옥포대첩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회장이라는 작자가 한 말. 이럴 땐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위에서 언급되었듯 파면 팔수록 막장이라는 증거만 나오는데도 아직도 원균을 못 띄워서 안달인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신기할 따름. 이렇게 보면 원균처럼 한국 역사상 거저 행복한 대접을 받는 역사인물이 있는지 의문이다.

  • 원균을 선무1등공신에 봉한다는 내용의 공신교서는 현재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어 있다.[79] 참고로 이순신 공신교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수십년 간 뒷세계를 떠돌다 2007년에 발견되었고 2008년 6월 27일 보물 제1564호로 지정되었다.

  • 이이화는 자신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 11권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편에서 원균의 죽음을 묘사할 때 도망하다 죽었다고 분명히 옆에 명시해놓고 그 다음줄에 '최후만은 참으로 장군다웠다'라는 서술이 있다. 잘 죽었단 소리인가? 당시에는, 육지로 도망가긴 했어도 싸우다가 죽었단 이론이 대세이긴 했다.

  • 디시위키에서는 아예 일본인으로 취급한다.

  • 묘는 도일동(송탄동)에 위치하고 있으며[80] 사실 이 근처에 저수지가 하나 있어 가끔 가다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 머리는 일자무식이며 능력이라고는 딱 무과에 급제할 만큼의 능력은 갖고 있었다. 그 어떤 무예 시험이라도 병법 실기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무과에서 보는 과목이란 게 그 개인의 무예 실력이랑 병법 이론 (및 유교 교양지식) 정도일텐데, 수전의 장수로서 그 개인의 무예 실력은 거의 필요가 없고 어느 학문에서나 (그리고 특히 병법같은 실기 중심의 학문이라면) 이론만 빠싹하고 실기에서는 개판 치는 사람이란 건 흔하다. 그래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당하게 되었을 때 정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삼도수군통제사를 하고 싶은 것에만 눈이 멀어서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의견을 지지했다. 다만 보통 모함으로 직위를 빼앗은 경우 전임자와 차별화와 공적을 세울 욕심에 무리하게 나가는게 보통인데, 막상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아니다 싶어서 주저한 것을 보면 의외로 나름 기본적인 소양은 있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당시 상황이 기본적인 소양으로 어림도 없었고, 무엇보다 원균의 그 지랄맞은 성격과 좁은 속, 욕심 때문에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자리가 원균에게는 죽음의 자리였다.

  • 뚱뚱하다. 이 때문에 체구가 큰 연예인들이 원균 배역을 맡아야 적절한 고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선굵은 외모의 신충식이,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젊은 시절 당대 미남 배우로 꼽히던 최재성이 원균을 연기했다. 왕년에 돌아이 시리즈로 잘나가던 시절 생각하면 최재성에겐 엄청난 굴욕 캐스팅[81] 유명인사 중에서는 씨름 선수 박광덕이 원균과 가장 외모가 흡사하다. 박광덕 : 뭐라고요?

  • 엄청난 대식가로 그의 한끼 식단이라는 게 두말, 생선 20마리, 4마리였다. 일반인이 닭 1마리만 먹어도 한 끼를 배불리 먹는다는 것을 감안하다면 식사량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 동생 원연과 조카인 원사립은 임진왜란에서 당당히 공적을 세운 장수였고, 아들 원사웅도 평범한 수준은 되는 무난한 장수였지만 원균의 희대의 뻘짓만 숨기고 왜곡하려 급급하다보니 반대급부로 묻혀 버린 케이스. 기록을 찾아보면 무언가 공을 세웠다는 업적은 원균을 제외하고 이쪽에 있는데...

  • 삼국지로 비교하자면 하후무에 상당히 일치한다. 당대에 원주 원씨가 마치 삼국지에서 위나라의 하후씨처럼 엄청난 명문가였는데 원균 역시 하후무처럼 이러한 훌륭한 가문에 묻어가서 고관대작이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원균이나 하후무나 둘 다 가문값을 못하는 위인이었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원연하후연에 비견된다. 응? 둘 다 이름이 으로 같네?

  • 배를 버려라! 이게 뭔 말인고 하니 원균은 수군으로 출전할 때마다 배를 버리는 일이 잦았고 첫 출전부터 배를 버렸는데 한산도 대첩 역시 경상우수사인 원균이 경상우수영에 자기 배를 버리고 이순신의 등 뒤에 숨은 것에 불과하며 특히 칠천량 해전에서는 거북선을 포함한 조선 수군 전부를 내다 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원래 육군 지휘관은 말을 타고 다녀야 하는데 원균은 너무 뚱뚱해서 말을 못타니까 수군으로 배치되었지 원균이 수군으로서 능력이 뛰어나서 그 자리로 간 게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있다. 원균 맹장설이 지지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

  • 일본 측에서는 자국 측 다이묘를 띄어주기 위해 맹장으로 띄우는 경향이 강하다(...) 주로 시마즈 요시히로 미화에 사용하는듯.일본판 협판안치? 적어도 안치는 원균에 비해 더 유능하고, 처세도 뛰어난다. 조선판 무타구치 렌야라고 하면 알아들을 수도.. 근데 무다구치는 인격이라도 원균보다 좋다. 그럼 도조 히데키에 적절하네. 그러나 도조 히데키 또한 부하들과 동고동락하여 군 내부에서는 인격자로 평가받았다. 도대체가 비견할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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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없다. 뭐 이순신 장군의 멘탈 단련이 도움이 됐다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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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균장군기념사업회라는 곳에선 원균의 어록으로 해당 발언을 강조하고 있다. 선처해달라는 말이 기회를 달라, 다시 봐달라라는 의미로 알고 있는데 조선 시대에선 다른 의미로 쓰였는지 추가바람


[1]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이 개력한 때가 1582년이므로, 1540년에는 서유럽에서도 율리우스력이 쓰였다. 다만 개력 시점을 무시하고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2월 22일이다.[2] 일단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당대에 원균을 봤다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좀 있는 편이다.[3] 같은 선무공신 1등이라도 권율과 이순신의 경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은 반면, 원균의 경우는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대광보국숭록대부와 숭록대부의 사이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있다. 그리고 이 당시 권율과 이순신에게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 및 부원군의 작호가 추증된 반면, 원균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군의 작호가 추증되었다. 국왕 선조에 의해 어거지로 선무공신 1등이 되었는데도 종1품에 머무른 점을 보면, 조정에서도 원균의 평가가 좋지 못 했음을 단면적으로 드러낸다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간단하다. 선조는 올려주고 싶은데 이에 호응하는 신하가 한 명도 없고 죄다 반대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임금이 하자는 거니까 마지 못해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추증만 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이순신 장군이 피땀 흘려 부강하게 키워 놓은 조선 최정예 수군의 군함을 12척 남기고 모조리 침몰시키는 대패를 당하고 공적을 위해 인간백정행각까지 저지른 주제에 부총리에 해당하는 좌찬성과 검찰총장/기무사령관에 해당하는 판의금부사를 제수받았다니 분에 차고 넘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곽재우조헌김시민사명대사처럼 진정으로 임금인 선조와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몸을 바쳐 싸운 훌륭한 이들은 정규군 장수가 아닌 의병장이란 이유로 조선 조정의 실책을 숨기기 위해 아예 공신에 제수되지도 못한 것을 생각하면(물론 원종공신에 책봉되긴 했지만 격이 한참 떨어진다.) 통탄할 따름이다.[4] 이순신이 실제 난중일기에서 사용한 호칭이다.[5] 오죽하면 일본의 명장이라고 비꼬기도 할 정도. 일본: 계획대로이무니다한반도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 보자면, 원균 못지 않은 졸장이 더 있기는 있었다. 인지도 면에선 원균이 가장 유명하지만 나머지들도 실상을 알면 무능함 면에선 원균과 막상막하에 대동소이로 자웅(...)을 겨루기 어려울 정도다.[6] 명종 19년(1564년)의 입시 부정 논쟁으로 낙방한 뒤 다시 응시하여 급제한 것 같다.[7]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융경원년정묘식년문무과방목(隆慶元年丁卯式年文武科榜目)』[8]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사관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은 수령으로 있을 때 평가가 바닥을 기었습니다. 근데 겨우 반년이 지나서 전라 좌수사라는 큰 일을 맡기시다니, 실력 위주 인사 원칙을 거스르는 일이라 세상이 다 비웃습니다. 해고하시고, 각별히 젊고 무예와 지략을 갖춘 사람을 전라 좌수사로 보내주십시오."[9] 불멸의 이순신에선 단 일주일만에 그것도 한참 환영회를 열고있을때 파직된걸로 각색 되었으며 그 교지를 받드는 원균의 패악질은 덤(...) 게다가 그 만행을 당시 원균의 초청으로 자리에있던 이순신도 보고 있었다[10] 식년무과와 별시의 난이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별시 합격해 근무하면서 경력 쌓은 다음 식년 무과를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이 식년 무과 급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온양의 부자였던 방진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넉넉하게 과거 준비를 할 수 있었던 덕이다.[11] 사실 집안 자체가 문관 집안이니 그럴수도 있다.[12] 당시 최고의 명장 취급을 받는 신립조차도 성격은 포악했다고 한다.[13] 이때 한 이운룡이 만류하며 한 말이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출처-한국컨텐츠진흥원, 이운룡. 원균은 배에다 불을 질러 버린후 도망치려 했던 것이다.[14] 물론 이순신 장군이 한번 부산포로 쳐들어갔고 이긴 적은 있다. 그런데 그래서? 한번 이겼다고 같은 방식으로 또 이길것 같은가? 일본군이 그렇게 멍청했다면 평양까지 가는것도 불가능했다.[15] 안중홍(安重洪)으로 동암처사라 불렸다.[16] 기름칠한 곤봉을 말한다.[17] 현대전에 대입해보자면 해군사령관에게 "적이 이러이러하게 오면 어떡할 거냐"라고 물었더니 "멀리 있을때 K-2를 쏘고 가까이 오면 수류탄을 던지겠다"라고 대답한거나 같다. 철저하게 일본군 도륙내는 킬링머신으로 조선군을 키워놓은 이순신의 공학자적 마인드와 크게 비교된다. 억지로, 이 말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뛰어난 장수가 직접 적과 맞부딪치는 군에 선봉에 서서 지휘하면 훨씬 유동적인 전술이 운용될 수 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진작되었다. 태조 이성계도 본인의 무력이 뛰어났던 용장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지휘관이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았고 군 자체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실제로 손책을 비롯한 고대의 용장들 중 많은 이들이 그렇게 죽었으며 그 이전에 지휘관 본인이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상황판단력, 무력 등을 갖추어야만 할 수 있는 행위다. 거기에 활도 아니고 총이 보급된 당시에는 당연히 헛소리. 괜히 무기와 군대가 발달할수록 사령부를 더욱 후방에 더욱 꼼꼼하게 숨기려 드는게 아니다.[18] 이해하지 못한다면 군대갔다온 위키러라면 대대장급이 직접 소총을 잡고 보병전투를 한다고 생각하보자. 중대장급만 해도 특수부대가 아닌 이상 총을 들고 직접 보병전투를 하는건 최후의 저항을 하는 상황인데 이 인간은 현대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이다. 지금 부대단위 전술과 해군단위 전략을 논해야할 인간이 총과 수류탄으로 싸우겠다는 소리하는 중이다.[19] 지상담병이라고 자기 이름으로 고사성어까지 있을 정도로 입전략의 달인이었다.[20] 참고로 같은 기록이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에도 있다. 조경남 자신은 '그래도 싸우다 죽은 원균은 도망친 다른 관군 장수들보다는 낫다'는 식의 동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원균에 관해 들은 악평들을 자세히 기록해두고 있다. 조경남 스스로가 배설처럼 아군 내 다른 쪽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짙다는 걸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21] 이 당시 원균 본인이 쓴 장계가 육군 30만을 동원해서 섬을 일단 정벌하면 해군도 따라 나서겠다는 내용. 원균 병크의 대표주자이자 원균맹장론 최대의 반론이다. 혹자는 "원균 10만 해병대 양병론"이라고 깐다.[22] 이 함대가 배설을 위시로한 훗날 합류하는 함대일 것이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주력함대는 죄다 진해만으로 달려갔고 그 결과...[23] 엄밀히 말하면 시작은 이미 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조선수군을 말아먹음으로써 전선이 크게 확대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사실상 정유재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24] 다만 사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선조가 원균의 생사 확인을 방해했다는 것 정도이며, 그가 죽었는지를 정말 알았거나 알아보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25] 이는 90년대에 인기를 끈 '원균 그리고 원균' 같은 소설 및 기타 매체에서 이순신 노량해전 생존 음모론이 횡행했던 것의 패러디 성격이 짙다.[26] 물론 김완이 입 꾹 다물고 있었다면 몰라도 동료들 다 물속으로 처넣은 지휘관이 보기 좋겠는가?[27] 하지만 실상은 휴전 기간에 일본군의 뒷통수를 쳤다. 그리고 일본군은 배 3척과 병사 47명을 잃었지만, 반대로 조선 수군은 판옥선 1척, 고성 현령 조응도, 병사 140명을 잃었다. 자세한 내용은 칠천량 해전 항목 참조.[28] 선조실록 30년 7월 7일 기사에 조선 수군이 다대포에 정박했다는 기록으로 추정.[29] 노를 젓는 병사들.[30]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 16일자 기록.[31]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수정마을.[32]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장초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 "7월 9일에는 맞바람이 거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어서 거제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33] 분명한 사실은 조정에서 믿지 않았다면 원균에 대한 문책이 있어야 했다. 아무리 군공을 조작하기 위해 거짓 전공을 보고하는 일이 난무했던 때라지만 자국민 학살은 자칫하면 백성들이 "아오씨 우리 군사들도 우리 죽이네? 이딴나라 필요없음" 하며 외면할수도 있다. 그럼에도 넘어가진건(...)[34] 중국의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송나라의 당진이라는 무장이 식탐이 심해 늘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었는데, 어느 날 평소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배야, 내가 널 저버리지 않았단다!"라며 (실로 황당한)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걸 보고 기가 막혀하며 "장군은 장군의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장군의 배는 장군을 저버렸구려. 장군은 장군의 배를 그렇게 정성스레 먹여 살리는데 배란 놈은 장군을 위해 계책 하나 내놓지 않으니 말이오!"라며 비웃었다.[35] 휘하 장수들도 자살행위라며 전부 반대했다.[36] 3번이나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37] 권율을 출정강요라고 나무랄 수도 없다. 애초에 권율은 육군이라 바다일은 수사한테 들어서 알 수밖에 없는데 원균이 지금까지 빠득빠득 출정 가능하다 우기다가 엄한 사람 보내놓고 이제와서 말을 바꿔버리니 권율 입장에선 뭐가 되겠는가...[38] 저 장면에서 권율이 원균의 모가지를 쳤으면 조선수군은 살았겠지만 대신 권율이 죽었을 것이다. 원균은 권율이 아니라 선조가 임명했기 때문에.[39] 원균의 셋째 동생인데 관련기록을 보면 연락관 노릇을 많이 했다.[40] 이순신이 죽자 남도의 백성들이 모두 통곡할 정도였다고 한다.[41] 이전 내용은 불천위에 모셨다고 하였으나 불천위에 관한 내용은 없고, 또 한문 부분은 어디서 교지 중간 부분을 잘아온 것 같은데 내용이 오기된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추가해서 수정 바람[42] 원사웅이 실제로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확인된 이상 동정심을 얻기 위해 지어낸 거짓 사실일 것이다. 심지어 원주 원씨 족보에 기록된 걸 보면 원사웅은 자식까지 있다.[43] 그나마도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살아남은 공신들의 종묘사직 기도 연명문인 <17공신 회맹문>에 보면 버젓이 살아있다는 설이 있다! 그것도 "선무공신 원균의 큰 아들이자 절충장군 전지중추부사인 원사웅"으로 확인사살.[44] 일례로 임진왜란 초반에 조선 정규군 대부분을 말아먹고 자살한 신립도 선무2등공신이 되었다[45] 당시 조상이 대단한 일을 하면 후손들까지 줄줄이 덕을 보았다. 어느정도냐면 세조때 단종 복위 운동때 정보란 사람이 껴 있어서 참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가 정몽주의 후손임을 알게 된 세조가 귀양형으로 낮춰 주었다. 세조가 명색이 왕이고 왕을 죽이려 했음은 그 당시로선 반역죄인데 그 반역죄를 저지를 죄인조차도 조상 덕에 살았다. 이 정도니 공을 세워 인정받는 건 가문의 영광이다. 근데 이 인간은 가문의 수치가 되었으니.[46] 본인의 사견이 잔뜩 들어갈 수 있는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목격담이나 원균의 직속부하 등의 주변인물들의 증언과 공문 등의 증거물들을 바탕으로 올바른 비판이나 팩트폭행을 하고 있다.[47] 방답(防踏)은 사람이름이 아니라 지역명이며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충무공과는 동명이인)을 말한다. 정3품인 우수사가 아니라 한계급 아래인 종3품의 첨사가 병력을 보냈으니 현대로 치면 사단 병력이 오는 줄 알았는데 연대 병력이 온 셈. 이 우수사는 이억기 전라우수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 [48] 난중일기에서는 2월 1일부터 비가 계속 내렸고, 역풍이 있었다고 언급되었다. 2월 5일. 보성군수의 소속함대가 비때문에 발이 묶여 합류가 늦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안그래도 바람세를 포함한 기상여건이 불순했고, 거기에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신안 앞바다 기지 함대들까지 우수영에 모여야 하고, 여기에 우수영이 있는 해남에서 견내량까지 이동거리를 감안하면 원균 함대보다 10일정도 더 수고할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균은 이걸 따져보지도 않고 이억기가 안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발끈한거다.[49] 이같은 원균의 험담은 원균을 두둔하는 대신들에게 '원균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왔지만 이순신과 이억기는 때마다 늦었기에 원균이 화가 나서 단독으로 출동하고자 했다'고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뭐병[50] 이 날은 웅천포해전을 한 날이다.[51] 禿沙伊項, 현재의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52] 이영남과 이여념은 원균 휘하의 기지대장들이다. 계속 언급되겠지만 부하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정도로 무능했다.[53]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54] 참고로 이 시기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55] 전략된 내용에서는 탐망꾼이 보고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웅천에 있던 적선 4척이 자기네 본토로 돌아갔고 김해 어귀에 있던 적선 150여 척이 나왔는데 19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남은 배들은 부산으로 갔다'는 내용이다. 원균의 얘기는 이걸 공격하자는 얘기 같은데... 새벽 2시에 떠나자면 취침중인 병사들을 깨워서 출동준비에 들어가야 하고, 여기서 웅천에 도착하면 정오쯤. 수비력이 가장 탄탄할 시간이다. 때문에 작전제의를 하려면 수사들간의 정보분석->작전입안->출동준비->출항 순으로 절차가 있는 법인데 원균은 그런거없이 그냥 가자고 한거다. [56] 6월 10일 새벽 2시에 온 원균의 제안에 대해 이순신이 공문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계획안과 작전회의 요청서를 보낸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출정하자고공문을 보냈던 본인은 전날 마신 숙취인지 아니면 아침부터 술을 마셨는지 인사불성이었다는 얘기. 상식적으로 자신이 출정하자고 요청했으면 바로 답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안을 구체화하여 다른 수사들과 논의를 하고있어야 하는데...[57] 바닷속에 들어가서 조개,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58] 수급을 위해 (조선인의 목을 친후 왜구의 목이라고 우기기 위해) 그들에게 왜군 복장을 입혔던 것 같다.[59] 전쟁 초기에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적을 때 왠만하면 경상 우수사나 영남 수사, 원 수사라 적었고 때로는 영감이라 적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원균의 모함이 시초가 되어 죄인 취급되었다가 겨우 백의종군 처리되어 석방되었고, 죄인이었기 때문에 4월 13일 모친의 사망소식을 들었음에도 시묘살이조차 못했다.(당시엔 부모상을 당하면 전쟁중이라도 고향에 돌아가 시묘살이를 해야했다. 임진왜란 직후 저술된 소설인 김덕령전에서, 왜군을 막겠다고 출정하는 김덕령에게 어머니가 "부친상을 치러야 하는데 그걸 외면하고 전쟁터에 나가냐 후레자식아"라고 까는 부분이 있고 이에 김덕령은 엄마 몰래 나가서 왜구 소탕을 해야 했다. 또, 몇백년은 뒤인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이 서울 진격작전을 앞에 두고 부친상을 챙기러 내려가는 바람에 13도 창의군이 와해된 일도 있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사람 이름을 부를 때 아무런 직함이나 칭호 없이 그냥 성만 딸랑 써놓는 건 흉악범죄자한테나 하는 일이다. 참고.[60] 松峙: 순천시 서면[61] 우치적: 순천 부사[62] 백의종군 하던 당시.[63] '여수 본영'에서 진흥국이 와서 '눈물을 뿌리며' 하소연했다. 여수는 전라좌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이고, 한산도는 둔치고 있는 진이다. 도대체 원균이 무슨 짓을 했으면 여수 본영 사람들이 이순신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뿌릴까...? 이건 원균이 부임한지 이제 겨우 석달 지났는데 여수 본영과 한산도 진영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짐작가능하다.[64] 전략된 내용에서는 원균이 권율의 명령으로 편지를 보내 억지로 조상했다는 내용이 있다.[65] 원균이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려 시도했다는 증언이다. 더구나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당시 머문 지역은 오늘날 합천으로 그 근방에 삼국시절 격전지인 대야성이 위치한다. 거기에서 김춘추 사위 품석이 동일한 짓거리를 하는 덕에 백제한테 점령당하는 결과를 부르고 여기에서 화랑 죽죽이 역사상에 알려진다.[66] 申蓁. 신진.[67] 원균의 주장이 정당한 것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이순신을 모함하면서 부산포 공략 떡밥을 뿌린건 원균 자신이었으니 동정할 필요가 없다. 자업자득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안골포와 인접한 곳에 있는 조선 육군은 김응서 경상우병마사의 병영 뿐인데, 고작 수천 명 뿐이며, 그나마도 낙동강 하구부터 초계까지 수비작전 중이었다. 이 병력으로 요새에 틀어박힌 왜군을 몰아낸다는게 말이 되는가?[68] 主將, 원균을 뜻한다.[69] 도원수 권율(權慄).[70] 맨날 되도않는 모함만 하던 원균으로부터 상석에 앉아 대접받는 꿈을 꿔서 이게 웬일인가 싶었는데, 현실에선 사고치고 총대장한테 붙잡혀 갔다는 얘기. [71] 이 내용 때문에 결국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고 그 자리를 원균이 차지한다.[72] 임진왜란이 끝나고 2년 후 윤계선이란 선비가 쓴 소설이다.[73] 참고로 이 말을 한 이는 극중에서 주현의 매니저였던 이동욱.[74] 다만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작전 중에 군선에 기생을 태우고 논 건 사실이다. 그런 인물이니만큼 유배지에서 기생을 끼고 논다는 전개도 일단 원균을 훼손한 것은 아니었을 것.[75] 다만 이건 노주현의 말이 틀린 건 아닌게 귀양은 엄연히 처벌이고 귀양지에서의 반성과 근신이 주목적이니 만큼 아무리 생각 없는 사람이라도 귀양지에서만큼은 조용히 지내려 하지 주지육림에 빠지려 하지 않는다. 방탕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조정과 왕의 눈밖에 나고 생명줄을 단축시키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76] 이일재는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균에 버금가는 졸장이자 원균과 마찬가지로 사욕을 위해 이순신장군을 모함한 바 있는 이일로 나왔었다. 연개소문에서는 백제의 용맹스런 맹장 윤충으로, 대왕의 꿈에서는 신라화랑의 믿음직하고 강직한 지휘관이며 감독관인 풍월주 호림으로 나왔으니 삼국시대 사극에서는 명장이자 충신으로써 멋진 모습을 보여준 사람인데 어째 조선시대 사극에만 나오면 대조되는 무능한 졸장과 간신 역할만 맡는다는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77] 해당 글에서는 당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당파라는 이름 자체도 이미 기원전부터 사용된 명칭이다.[78] 충무공이 전과를 너무 정직하게 기록한 탓에 참수기록이 격침 기록에 비해 너무 적어 공과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는 걸 고려해보면 그야말로 개소리다.[79] 당연한 소리지만 공신교서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지, 원균이 받은거라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80]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선산의 묘지는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 실제 묘지는 통영시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실제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은 방치된 상태이며(해당 링크의 기사는 부산일보 8월 기사, 후손들이 벌초비용을 보내고 성묘도 온다고 한다), 77번 국도 확장공사로 아예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81] 그런데 정작 최재성은 이를 굴욕으로 여기지 않는 듯. 오히려 불멸의 이순신 방영 전 인터뷰에서 "원균이 세간에서 평하는 것처럼 악랄한 인간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캐스팅을 거부했을 것"이라며 원균이 역사의 피해자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