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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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배경2.2. 부실 공사2.3. 붕괴2.4. 결과
3. 붕괴 이후 와우아파트4.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5. 여담

1. 개요[편집]

1970년 4월 8일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2동 와우산 기슭에 위치했던 와우아파트 15동이 무너진 대형 사고.

1970년대 건물 관련 참사로는 대연각 화재 사건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사고이며, 건국 이래 발생한 각종 참사 중 안전 불감증으로 인해 발생한 첫 대형 참사이기도 하다.

2. 전개[편집]

2.1. 배경[편집]

당시 서울은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말미암아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인구가 폭발하듯이 증가하였으나 그에 비해 주택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2017년과는 정반대 상황이다.[1] 이 때문에 소위 판자촌이라 불리는 무허가 건축물들이 기하급수로 불어나는 상태였다.

2.2. 부실 공사[편집]

이를 좋지 않게 본 박정희 대통령은 판자촌 정리를 명령했고 박대통령의 충복인 당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의 지시로 각 구청 별로 판자촌 등의 무허가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한 후 대부분의 판자촌들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들을 짓게 했다. 이에 따라 지어지게 된 시민아파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와우아파트였다. 그래서 아파트를 지은 곳은 대부분이 산중턱.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질문에 대한 김현옥 시장의 답변도 유명하다. "야 이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그리고 청와대에서 무너지는 걸 잘 보았겠지 물론 김현옥도 무너졌다 와우아파트의 위치는 현재의 홍대거리 뒷산인 와우산이니 중턱도 아니고 완전 산꼭대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 안에 아파트를 뚝딱 지어내야 하는 상황인 데다가 턱없이 낮은 원가[2]에다가 그나마도 중간에서 업체들과 공무원들이 떼먹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와우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시민아파트는 초날림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와우 아파트는 몇 개의 건설업체가 나누어 지었는데 이 중 13~16동은 (주)대룡건설이라는 업체에서 맡았다. 대룡건설은 이걸 박영배라는 업자에게 하청을 주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무면허 업자였다는 것. 거기에 공사비는 1동에 1100만원 정도로 5층짜리 아파트 한 동을 제대로 짓기에는 부족한 금액이었다. 여기에 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한 동당 125만원씩 떼먹었으니 공사비는 더욱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진 코로나나 현대 코티나같은 자동차가 100만 원 하던 시절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몇 억 주고 아파트 단지를 지으라는 셈이다.(...) [3]

또한 시민아파트의 기본 설계도 문제였다. 당시 서울특별시는 기존에 거주하던 빈민층의 생활수준을 고려하여 1㎡당 280kg 정도의 하중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설계 기준을 제시하였다. 문제는 브로커들의 개입 등으로 입주권 가격이 크게 올랐고 이로 인해 빈민층은 도저히 입주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안되자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실제 아파트에 입주한 건 대부분 중산층들이였다.[4] 이들이 무거운 가구와 많은 세간살이를 들여놓으면서 시민아파트에 걸린 실제 하중은 1㎡당 900kg 내외로 설계 기준의 3배를 넘었다.

결국 설계도 부실하고 공사비도 부족한 데다 그마저도 중간에서 떼먹은 상황에서 업자도 무면허니 엄청난 날림공사가 진행되었다. 철근 70개를 써야 할 기둥에 고작 철근 5개(...)를 쓰고 만들었으니 말 다한 셈. 콘크리트 강도도 크게 떨어졌는데 시멘트 함량이 적어 자갈 섞인 모래 반죽이나 다름없었고 콘크리트 만들 때 쓰는 물은 불순물이 엄청나게 많은 하수도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고작 6개월만에 아파트를 완성하느라 건축물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지반 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1~2층짜리 가건물 같은 걸 세우는 게 아닌 이상 건물을 지을 때는 고정해줄수있는 암반층이 나오거나 고정할수있는 공학적 조치를 할 수 있을때까지 파야 한다. 즉, 어느 정도 땅을 파서 기반을 보강한 후 그러고 나서 건물을 올리는 것이 건물을 짓는 정석[5]인데 애초에 건물을 어떻게 짓는 지조차 모르는 작자들이 건설을 맡았으니 어떻게 될지 뻔할 뻔자인 것.

2.3. 붕괴[편집]

이러한 탓에 와우아파트의 기둥은 암반이 아닌 부토 위에 세워졌으며 겨울 동안에는 땅이 얼어 있었기 때문에 겨우 버텼지만 땅이 녹는 봄철이 되면서 결국 기둥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6]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되어 그때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문제의 업자가 시공한 13~16동에는 금이 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4동은 콘크리트 받침 기둥이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붕괴 시점에는 주민이 대피한 상태였다. 해빙기가 되면서 땅이 녹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기둥도 내려앉고 아파트가 산 아래로 넘어가듯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래에 있던 판자집 세 채를 덮치는 바람에 이 사고 탓에 33명이 죽고 40명이 부상하는 큰 인명 피해를 냈다. 그나마 이 시점이 30세대 중 15세대만 입주된 상태여서 이 정도지 모든 세대가 입주해 있었다면 사상자가 더욱 크게 늘었을 것이다.

2.4. 결과[편집]

이 사고로 '불도저'라고 불리던 서울특별시장 김현옥은 사직했다. 사직의 형태였지만 사실상 경질이었다. 그런데도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후일 김현옥은 내무부 장관이 된다. 그리고 문제의 하청업자 박영배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외에도 3명이 징역을 선고받았다.

박정희 시대 고도 경제성장에 구성원 의식이 따라가지 못 한 문화지체현상과 당시 만연했던 비리가 제대로 드러난 사고였지만 이것을 두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7] 당대 최고 신인 가수이자 희대의 돌+아이였던 조영남은 한 공연에서 유명한 신고산 타령 속 대사인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차가는 소리에'를 '우르르르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라고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를 비꼬는 노래를 불렀다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도망가라 서울시 공무원들이 널 찾는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튀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고향은 황해도지만 월북? 충청도까지 쫓아온 형사들에게 잡혀 강제로 입대하기도 했다.

붕괴 직후 건축을 전공하는 서독 대학원생들이 사고 원인을 분석하려고 시도했는데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파트는커녕 농가 헛간을 짓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자재로 어떻게 아파트를 지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해서라고 한다. 지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도 기적으로 본 듯(..) 진정한 창조경제 한국에 강림한 오크놀러지 한마디로 제대로 나라망신당한 사례이다.

3. 붕괴 이후 와우아파트[편집]

15동 붕괴가 일어난 지 이레 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시공한 13, 14, 16동도 철거됐다. 콘크리트 질이 너무 떨어져 철거하는 데도 애먹었다고 한다.

와우아파트는 총 19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남아 있던 15개 동은 붕괴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보강 이후 계속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후 1976년과 1984년, 1988년, 1989년 네 차례에 걸쳐 차례로 철거되고 1991년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4개 동(3, 4, 5, 가)도 결국 철거되고 터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4.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편집]

이 사고 이후 아직 건설되지 않은 시민아파트는 건설 계획이 모두 폐기되었고 짓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골조를 더 보강해서 완성되었다.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는 434개동이 완공된 상태였는데 안전도를 검사하자 무려 349개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쓸 만한 아파트는 계속 보수해서 쓰고 못 쓸 정도가 된 아파트는 하나씩 철거되기 시작했다.

2012년 기준 서울 시내 시민아파트 대부분이 철거되고 남아 있는 것은 소월로 근처의 회현시민아파트 한 동뿐이다.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 특집 초반의 바로 그 아파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이후에 준공된 아파트라서 시민아파트답지 않게 골조가 튼튼하다고 하다. 몇 년 전부터 재건축이 논의되는 상황.[8]

이 사고 탓에 아파트를 불신하는 감정이 팽배해지자 정부는 시범아파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중산층을 겨냥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를 짓게 된다. 더욱 높고 더욱 쾌적하고 안전한 아파트를 목표한 것. 이에 여의도를 시작으로 시범 아파트들이 성공했다고 할 만하게 세워졌고 이것이 지금의 아파트의 전형이 된다. 그렇기에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는 대한민국 주거 역사에서 중요한 사고 중 하나다.

5. 여담[편집]

조성된 와우공원은 현재의 홍익대학교 뒷편에 바로 위치한다. 테니스 코트나 각종 헬스기구도 있고 밤마다 사람들이 운동하러 오는 좋은 근린공원이지만 와우산과 바로 맞붙어 있는 홍익대 시설물들(C동, I동, P동 등)에서 가끔 귀신 목격담이 나오는 등 일종의 심령 현상 스팟이 된 모양이다. 너무나 어이없는 사고 전말을 생각하면 이해할 만하다.

이 사고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건설업계는 그닥 개선되지 않다가, 결국 1990년대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면서 정점을 찍고 말았다.[9] 이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대한민국 건설사들의 신뢰도가 크게 추락하였으며 이것을 회복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였다. [10]

1980년대에 재산의 공유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무계급 사회를 지향한 책을 보면, 북한에서는 철근 대신에 싸리나무를 쓴 공법으로 건설하기에 1970년대 아파트 붕괴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서술이 있는데 당시 정부에서 고의로 유포한 낭설이었다.[11] 이 때까지는 남북한 간 체제 병림픽 경쟁이 계속되던 때였으니...물론 극과 극은 통한다 1990년대 이후 경제력이 악화된 북한에서 부실 공사가 성행하는건 맞으며(...) 2014년 결국 이 터졌다.

앵커 최일구가 와우아파트에서 살았었다고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성에서 서울로 이사했던 당시에는 이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난 후였지만, 어린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당시 상황이 꽤 참혹했던 모양. 이때의 기억 탓에 MBC의 기자가 된 후 "부실 공사"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인연이었는지 최일구는 MBC에서 한강 교량의 보수관리 실태를 취재하게 되었고 보도한 지 1년 후 실제로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최일구성수대교 붕괴 이후 당산철교의 균열을 발견하여 당산철교로 올라가 직접 촬영하였고 결국 안전 검사에서 딱 걸린 당산철교서울 지하철 5호선의 개통과 함께 철거 후 재시공이 결정됐다. 그리고 당산철교는 1997년에 철거하다가 기존 교량이 알아서 무너진 후(...) 1999년에 다시 완공했다.

웹툰 작가 강풀의 작품 어게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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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7년에는 아파트를 짓기는 정말 많이 지었는데 너무 비싸서 분양되지 않는 바람에 되려 유령도시같이 을씨년스러운 아파트가 꽤많다. 참고로 현재 대한민국의 주택 보급률은 101%대다.[2] 당시 서울시는 말도 안되는 수준의 단가에 입찰하게 하고, 거부하면 이후 관급공사에서 불이익을 주었다.[3] 당시 자동차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으므로 현재 액수로 환산해보면 대충 몇십억 정도겠지만..그정도 액수로도 당연히 아파트는 못 짓는다.[4]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 이런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실제 개발 독재 시절에는 재개발, 재건축 아파트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걸 중산층, 부유층들이 사들여서 부동산 재테크를 하였다. 2010년대 이후에나 기존 거주민들이 신축 아파트에 100% 입주하는 재개발 지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중 해당 재개발 구역에 주택을 사두고 실제 거주는 다른곳에서 하는 투자자들의 비율도 상당히 높다.[5]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 있는 피사의 사탑의 경우 거진 10층 다 되는 탑을 쌓는데 밑으로는 고작 3m밖에 파지 않았다.[6] 추위가 풀리고 봄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봄비가 내리면 산사태가 자주 난다. 쉽게 설명하면, 겨울 동안 내린 눈이나 물이 바위나 흙속으로 들어가 있다가 얼면서 부피가 커지면서 바위나 흙을 지면에서 밀어내는데 이게 봄이 되고 녹으면서 같이 쓸려 내려간다.[7] 이것은 정권을 반대하는 시위가 나올 빌미를 줄 수 있기에 비판 자체를 막았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동은 평양 아파트 붕괴사고를 상대로 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행동하고 완전히 똑같은 셈이다.[8] 또한 아파트 대부분이 재개발/재건축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70년대 구조형 아파트라서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를 위시해 관광 명소 일종이 되지만, 이곳도 노후가 진행은 되고 있서 어떻게든 재건축하든지 아현동 남아현 시민아파트처럼 리모델링이라도 시도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이미 서울시는 과거 약수 금호 지역 재개발 (지금의 남산타운 아파트 일대) 당시 주민들의 반발에 관한 기억 때문인지 이 지역을 상대로 삼은 확실한 출구 전략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서대문 금화시민아파트 재건축 때도 이것 때문에 내홍을 치른 서울시였기에 더욱 그렇다.[9] 성수대교는 1979년 완공. 삼풍백화점은 1989년 완공이다.어째 붕괴된 건축물들이 10년 단위로 건설된다!?[10] 그 대표로 1990년대 말레이시아스팡에서 기존의 공항을 대신할 신공항을 건설할 때 대한민국 기업들이 빠졌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이 말레이시아를 서서히 앞서가던 시기였다고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도 대한민국의 건설사들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얘네들도 이전인 1993년에 한번 일이 터진 적이 있었다.[11]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실제로 철근 대신 대나무를 써서 지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도 2010년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