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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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대 국왕

고구려 1대 동명성왕 고주몽
십제 건국

1대 온조왕 부여온조

2대 다루왕 부여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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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역사문화공원 내에 있는 온조 동상.

시호

온조왕(溫祚王), 온조 건길지

해(解)[1]/부여(扶餘)

온조(溫祚)

생몰년도

음력

? ~ 28년 2월

재위기간

음력

기원전 18년 ~ 서기 28년 2월 (약 46년)


1. 개요2. 출생3. 백제 건국4. 치정
4.1. 외정4.2. 내정
5. 가계도6. 삼국사기 기록7. 기타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600년 백제 왕조의 건국 군주이자 초대 임금·건길지.

그는 고대 삼국의 시조 중 유일하게 탄생 설화나 전설이 내려 오지 않으며 황자로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고구려를 떠나 자신의 힘으로(어머니와 형의 도움과 같이) 자신의 나라를 건설한 뛰어난 인물이다.

아래 서술된 내용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만일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건국하자마자 중앙집권을 이루고 삼한 중 가장 강했던 마한까지 정복한 대단한 인물이겠으나, 학계에선 저 내용을 다 인정하진 않고 있다.[2] 대체로 맞다고 보는 건 마한과의 외교 관계 기사 등 소수 부분이다.

2. 출생[편집]

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여러 내용을 전하고 있다.

  •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이 주몽과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

  •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가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

  • 졸본 사람인 월군의 딸과 주몽이 결혼하여 낳은 아들.


첫 번째 전승의 경우 온조왕은 주몽의 셋째 아들로, 위로는 이복형인 유리와 친형 비류가 있다는 얘기이며, 두 번째 전승은 친형이라던 비류와 혈통마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는 같은 소서노이되, 비류소서노와 사별한 첫 남편인 우태의 아들이고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로 되어 있다.

동사강목에 따르면 본래의 성씨는 해씨였으나, 백제를 건국한 후 자신이 부여의 핏줄임에 의미를 두어 부여씨로 바꾸었다.

3. 백제 건국[편집]

고구려에서 지내던 온조왕은 후에 부여를 떠나 고구려로 온 이복형인 유리가 태자가 되자, 친형 비류와 어머니를 모시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아악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던 중 한강 이남의 땅이 나라를 세우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하남 위례성에 터를 잡고 십제를 건국했다.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하지만 위 기록에서 보이듯 비류는 온조왕과 생각이 달랐다. 바닷가인 미추홀을 선택해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바다의 짠물 덕에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GG를 치고 만 비류[3]는 백성들을 데리고 온조왕의 십제로 들어가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형의 백성들을 받아들이고 세력을 키운 온조왕은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4]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위례성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다. 원년의 건국 기록에서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뒤이어 14년의 기록에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그래서 일각에서는 온조왕이 처음에는 하북 위례성한강 북쪽에 도읍을 정했다고 주장한다.

하북 위례성의 후보지로는 서울의 세검정 일대나 중랑천 일대, 파주임진강 일대를 꼽는다. 하남 위례성으로의 천도 시기도 고이왕대, 비류왕대로 보는 등 이설이 있다.

4. 치정[편집]

온조왕의 치정은 크게 낙랑말갈, 마한에 대한 외정과 백제 내부의 정비라는 내정으로 나뉜다.

4.1. 외정[편집]

  • 낙랑: 초기에 온조왕은 낙랑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내 사이가 틀어져서 죽어라 싸우게 된다. 낙랑은 직접적인 공격 외에도 후술할 말갈을 사주해서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 말갈: 우리가 아는 만주 벌판의 그 말갈이 아니라 지금의 춘천 지역의 맥 세력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영서 예 세력을 말한다. 건국 초부터 백제와 밀고 밀리며 피 튀기게 싸웠다. 한때는 낙랑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 마한: 온조왕은 처음엔 마한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사신도 보내고 선물도 보내는 등.[5] 하지만 26년에[6] 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겨울 10월에 사냥 가는 척하면서 마한을 꿀꺽해버렸다. 원산과 금현 두 성이 끝까지 온조왕한테 개겼지만 결국엔 1년 뒤 함락되고 두 성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후에도 마한의 옛 장수였던 주근이 우곡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현재의 정설은 서기 3세기경에 이르러 백제목지국에게서 마한의 주도권을 탈취하고, 4세기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마한을 쥐어팬 후에 5세기 말의 무령왕대에 가서야 마한백제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는 것.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대에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을 꺾어 버리고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후대인 근초고왕이나 고이왕 대에 일어난 사건을 온조왕 대에 갖다 붙여놓은 기사로 보인다는 것이다. 솔직히 상식적으로 봐도 아무리 고구려인들이 세운 백제라지만 이제 갓 태어난 병아리가 자기들보다 더 오랫동안 이 땅에서 터 잡고 살았던 닭들을 두드려 팰 수 있었을까? 그 강대한 로마도 시작 때는 에트루리아 인에게 휘둘렸다는 걸 기억하자.

백제의 초기 왕대는 워낙 신비에 싸여 있어서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개중에는 '온조'라는 이름 자체가 '백제'라는 한자의 고대 한국어 버전일 뿐이고, 온조는 가상인물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7] 후대의 비류왕이 백제의 실질적 시조이며 온조 설화는 후발주자인 비류왕 집단이 온조집단을 계승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4.2. 내정[편집]

재위 14년에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38년째 되던 해에는 바로 전년도까지 자연재해가 잇달아 발생해서 농사를 말아먹은 백성들이 많았기에 나라를 돌며 백성들을 직접 돌보고. 농사와 잠업을 권장했으며 부역에 동원하는 걸 자제시켰다고 한다. 또한 41년에는 위례성을 보수했다.

5. 가계도[편집]

(부)...........................(모)
동명성왕─────소서노
...................
.............1.온조왕───────────(왕후)(배우자)
........................................
.................................2.다루왕(아들)

6. 삼국사기 기록[편집]

一年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一年夏五月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
二年春一月 말갈에 대한 방어 대책 마련을 지시하다
二年春三月 을음을 우보에 임명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우레가 일어나고 복숭아, 오얏꽃이 피다
四年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다
四年秋八月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 맺다
五年冬十月 사냥하여 사슴을 잡다
六年秋七月 일식이 나타나다
八年春二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八年秋七月 백제와 낙랑의 우호관계가 단절되다
十年秋九月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
十年冬十月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입하다
十一年夏四月 말갈이 낙랑의 부탁을 받고 병산책을 공격하다
十一年秋七月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다
十三年春二月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오다
十三年 왕의 모후가 죽다
十三年夏五月 하남위례성으로 천도를 계획하다
十三年秋七月 하남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다
十三年秋八月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 옮긴 사실을 알리다
十三年秋九月 성과 대궐을 쌓다
十四年春一月 도읍을 옮기다
十四年春二月 백성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十四年秋七月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十五年春一月 궁궐을 새로 쌓다
十七年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
十七年夏四月 사당을 세우고 국모를 제사지내다
十八年冬十月 말갈을 격파하고 추장을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다
十八年冬十一月 낙랑을 공격하기 위해 구곡까지 행차하다
二十年春二月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二十二年秋八月 석두와 고목 2성을 쌓다
二十二年秋九月 말갈을 격파하다
二十四年秋七月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이 항의하다
二十五年春二月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다
二十六年秋七月 마한 병합을 계획하다
二十六年冬十月 마한을 기습하여 합병하다
二十七年夏四月 마한을 멸망시키다
二十七年秋七月 대두산성을 쌓다
二十八年春二月 다루를 태자에 임명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一年春一月 민가를 남부와 북부로 편성하다
三十一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三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一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三年 큰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려 도둑이 생기다
三十三年秋八月 동부와 서부를 설치하다
三十四年冬十月 마한 잔당의 반란을 진압하다
三十六年秋七月 탕정성을 축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三十六年秋八月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다
三十七年春三月 달걀만한 우박이 내리다
三十七年夏四月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이 많이 나타나다
三十八年春二月 지방을 순방하다
三十八年春三月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백성의 부역을 줄이다
三十八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四十年秋九月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다
四十年冬十一月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다
四十一年春一月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다
四十一年春二月 위례성을 수리하다
四十三年秋八月 아산벌에서 사냥하다
四十三年秋九月 기러기가 왕궁에 모여 들다
四十三年冬十月 남옥저 구파해 일행이 귀순하다
四十五年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마르다
四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서 백성의 가옥이 손상되다
四十六年春二月 온조왕이 죽다

무려 65줄. 백제의 모든 왕들 중 기록이 제일 많다. 백제 초기 왕들 중에서도 건국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상당히 많은 편이라 후세에 덧붙여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후대 왕들의 기록이 상당히 빈약한데 비해, 가장 오래된 건국 왕의 기록이 상당히 많고 아주 세밀하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으로 큰 강역을 이유로 온조왕의 기록이 근초고왕의 기록과 섞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근초고왕 참조. 비슷한 시기의 고구려, 신라의 왕들과 비교해 봐도 아주 세세하고 사소한 내용이 많다.

덤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고구려왕은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신라문무왕이다. 보장왕과 문무왕은 책이 각각 2권씩이나 되는 유이한 왕들이며 삼국사기엔 문무왕, 보장왕 순으로 기록이 많은 TOP 1, 2위.

7. 기타[편집]

  • 백제의 건국자로 구태라는 인물이 중국사서에 등장하는데 이 사람과 온조왕 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궁금증이 남아 있다. 일설에는 비류가 구태 아니냐라는 논의도 나오기도.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사극에서 두 번 등장했다. 한 번은 주몽[8]에서, 다른 한 번은 근초고왕에서. 물론 둘 다 병풍이나 엑스트라 수준을 면하지는 못했다. 어차피 주인공도 아니었으니...

  • 온조왕의 백제 건국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인 미스터 온조와 그냥 온조도 있다.[9]


[1] 원래 해씨였으나 부여씨로 바꿨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내용 참고.[2] 원래 '삼국사기 초기 기사' 는 대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도 마찬가지로, 백제는 고이왕, 고구려태조왕, 신라지증왕 때의 기사부터 비로소 인정받는 상황.[3] 일부 학자들은 이를 온조로 대표되는 농업 세력과 비류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이 갈등을 일으켰고. 끝내 해양 세력이 농업 세력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사실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다는 등의 내용은 농사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즉 어디까지나 농업 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곳에 정착했으니 망할 수밖에' 였을 뿐. 실제로 이보다 더 안습한 지역에 정착하여 크게 성공한 경우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들 수 있다.[4] 십제가 미추홀의 비류 세력을 병합한 것은 온조왕 당대의 일로 보기도 하고, 더 후대인 초고왕대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5]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마한에 저자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왕 24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백제와 마한의 경계)에 목책을 쌓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도 없었을 때 내가 동북쪽의 땅 1백 리를 주어서 살게 해줬는데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을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항의하자, 온조왕은 부끄러워하며 쌓았던 목책을 허물었다고.[6] 처음 마한왕의 질책에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었다고 한 기록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이다.[7] '온'이 100이고, '조'가 '제'와 통한다는 것. 다만 음운만으로 추정하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다른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8] 아역배우 김석이 역할을 맡았다. 김석은 이전에 SBS의 서동요에서 무왕의 아역으로 나온 적도 있으니 어린 나이에 두 번이나 백제 왕을 해본 셈.[9] 이 두 뮤지컬은 완전히 다른 뮤지컬이니 절대로 헷갈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