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 윈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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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프라.jpg

이름

오프라 게일 윈프리 (Oprah Gail Winfrey)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png

출생

1954년 1월 29일, 미시시피 주 코스키우스코

모교

테네시 주립대학교

직업

방송인, CEO

활동

1983년 – 현재

신장

169cm

서명

파일:오프라1.png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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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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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


1. 개요2. 어린 시절 및 데뷔 이전
2.1. 유년기2.2. 청소년기2.3. 아픈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다2.4. 전설의 시작
3. 오프라 윈프리 쇼
3.1. 오프라 윈프리의 자동차 선물
4. 영화5. 그 외
5.1.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10계명5.2. 신조어

1. 개요[편집]

미국 쇼 비지니스 세계, 혹은 전미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 받는 사람
진정한 인간승리
전세계 사람들의 희망의 아이콘

그야말로 가난과 절망을 딛고 전세계 흑인 여성중 가장 성공한 인물이자 여성으로서도 세계적으로 부와 명예를 가진 유명인이다.

2. 어린 시절 및 데뷔 이전[편집]

2.1. 유년기[편집]

찢어지게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속에서 재능을 발견한 소녀

파일:Oprahchild.jpg

미시시피 강 근처에 있던 가난한 흑인 마을인 코시우스코에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엄마는 겨우 18세에 불과했으며 가정부로 생계를 해결하기 바빠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여섯 살 때까지 농사일을 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집에는 tv도 없었고 인적이 매우 드문 시골마을이라 집주변엔 말건넬 이웃도 없어 심심했던 오프라는 항상 농장에 있는 동물들에게 말을 건네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3살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뛰어난 말재간과 암기력을 보여 동네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외할머니의 애정어린 교육으로 또래아이들보다 월등히 높은 어휘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6살때 외할머니가 병에 들어 오프라를 돌볼수 없게되자, 밀워키에서 파출부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의 집으로 이사가게 되었으나 어머니는 일에만 몰두하여 오프라에게는 거의 관심과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9살때는 집을 드나드는 사촌 오빠나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어머니에게 도움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어머니는 그녀의 말을 철딱서니없는 투정 정도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2.2. 청소년기[편집]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삶속에서 꿈을 버리지 않은 소녀

성폭행은 그후 몇년간 계속되며 오프라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 상처를 잊기위해 오프라는 공부와 독서를 부지런하게 하여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14살때 명문사립학교에 입학하게된다. 그러나 학교에서 자신이 유일한 흑인이었으며 게다가 자신과 달리 부모님의 관심속에서 부유하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백인친구들에게 극심한 열등감을 느낀다[2]. 설상가상으로 계속되는 친척의 성적학대로 인해 오프라는 견디다못해 반항아로 변해 집밖을 나돌게된다.[3] 이 과정에서 오프라는 원치않는 임신까지 하게된다. 반항아로 변해버린 오프라를 어머니는 감당할수 없게 되자 , 어머니는 오프라를 테네시에서 이발소를 하는 아버지집으로 보낸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재혼한 상태였고 오프라가 아이를 낳을수 있게 돕는다. 하지만 결국 낳은 아이는 2주 만에 죽었다. 당시 오프라는 기구한 세월을 견뎌내기 어려워 자살도 생각했고 마약이나 담배에 현실을 잊고자 했다. [4]

2.3. 아픈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다[편집]

하지만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격려와 지지 덕분에 절망을 딛고 동네인근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하고 회장에 당선되는 등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 꿈과 희망을 갖게된다. 이후 미국에서 개최한 여러 말하기대회나 콘테스트에 출연하며 점점 유명세를 탔고, 19살이 되는 해에 라디오 프로 진행자로 취직했다. 이를 계기로 방송인으로 일하기 시작한 오프라는 어느 지역의 저녁 뉴스의 공동 뉴스캐스터를 시작했지만 뉴스에 감정을 실어서 전달했다는 이유로 8개월만에 해고되었다. [5]

2.4. 전설의 시작[편집]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오히려 그녀의 즉흥적 감정 전달능력 덕분에 오프라의 활동무대는 낮 시간대의 토크쇼 ,<Peopla Are Talking>으로 옮겨졌다. 이 당시 지역 방송 토크쇼에 나와 인터뷰를 했는데 "당신이 만약에 100만 달러를 상금으로 받게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다른 토크쇼 참가자들은 저축한다느니 부모님에게 뭘 사다드리겠다느니 보통 많이 생각하는 걸로 말을 한 반면, 오프라 홀로 마음껏 쓸거에요. 저를 위해서 말이죠. 라고 답했다고 한다. 진행자가 "하지만 그 다음은요? 돈은 쓰면 벌기 어렵지 않습니까?" 라고하자 그녀는 똑부러지게 "그만큼 계속 벌 자신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진행자는 속으론 뭔 헛소리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20년도 안가 그녀가 엄청난 부자가 된 걸 보고 근거없던 헛소리가 아니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3. 오프라 윈프리 쇼[편집]

"제 쇼의 출연자들도 그렇지만, 저도 제 이야기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일단 말로 풀어 꺼내 놓으면, 다시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으니까요."

- 오프라 윈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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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Chicago 진행시절 오프라

1983년 오프라 윈프리는 시카고에서 낮은 시청률을 가진 30분짜리 아침 토크쇼인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방송 진행자가 되었다.
당시 AM Chicago는 가장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프로로, 당연히 오래가지 못하리라 봤던 이 방송은 한 달 만에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1986년에는 이 프로그램 이름까지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었고 미국 전역에 동시 방송되기 시작했다. 이후 당대 미국의 최고의 토크쇼로 손꼽히던 '필 도나후 쇼'의 시청률을 역전하게 된다. 또한 1988년에는 영화제작 스튜디오 , 잡지 발행사 및 촬영장을 두루 갖춘 9000평 규모의 하포 스튜디오 (Harpo Studio)[6]를 설립하며 미디어 사업가로서의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오프라의 토크 쇼에는 3만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나왔으며, 스포츠 선수·연예인에서부터 대통령 및 정치인·종교인·예술가 등 온갖 사람들이 나오며, 세계적인 대박을 거둬들였다. 25년간 총 5,000회 방송, 미국 내 시청자수 2,200만명, 전 세계 140개국 방영, 일일 시청자 수 700만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7]

3.1. 오프라 윈프리의 자동차 선물[편집]

2004년 9월 15일,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19주년인 것을 기념하여 자동차가 꼭 필요한 사연을 가진 방청객 276명을 초청해 진행했다. 그 사연 중에는 "서부 개척시대 총잡이들이 몰던 것과 같은 차를 타고 다니고 있다"거나 "40만 마일(약 64만km) 이나 운전한 고물차"와 낡은 차가 고장이 나 자주 수업에 지각한다는 사연의 당사자인 한 교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프라는 그 중 12명에게 차를 선물한다.는 말을 듣고 그 주인공이 자신이 되기를 바랬다. 11번째까지 자동차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받지 못한 방청객들은 부러워하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더 큰 반전은 지금부터. 오프라는 마지막 12번째 자동차 선물이라며 나머지 방청객에게 선물상자를 줬다. 그러면서 오프라는 "여기 상자 중에 한개의 상자에만 차키가 들어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카운트에 맞춰 상자를 여는 순간 놀랍게도 모든 상자에 차키가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앞에 있는 방청객을 손으로 찍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You get a car!(당신은 차를 가졌습니다!)


사실..... 이 선물은 신차 광고 효과를 노린 포드 사에서 전량 기증했다고 한다.


당시 장면

이 선물은 약 800만 달러 어치로 한때 미국 TV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경품이었으나, 이 기록은 2016년에 코미디언 존 올리버가 자신의 프로그램인 라스트 위크 투나잇에서 1,500만 달러 어치의 의료 부채를 탕감해주면서 갈아치워졌다.

4. 영화[편집]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컬러 퍼플(주연은 우피 골드버그)에서 조연을 연기하면서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8] 사실 동명의 원작소설은 인종차별을 다룬 소설로 오프라가 청소년시절 가장 좋아하던 소설이었다. 따라서 오프라는 이 영화의 캐스팅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 기회를 통해 그녀가 간절히 원하던 꿈이었던 배우의 꿈도 이루게 된다.

2018년 개봉하는 디즈니의 실사영화 시간의 주름에서 Mr.s 법사 역을 맡는다. 또,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더 크리스마스에도 목소리 주연을 맡는다. 프레셔스의 제작에도 참여. 오션스13에도 본인역으로 까메오 출연한 적이 있다.

5. 그 외[편집]

2004년 유엔이 주는 올해의 지도자상을 수상했고 2005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8년 오프라 윈프리 쇼 방송에선 다이어트 선언 4개월 만에 30㎏이나 감량한 뒤 꼭 맞는 청바지를 입고 손수레에 30㎏의 지방덩어리를 싣고 등장했다. 얼마 후 "4개월간 단식했으나 방송 직후 축하 음식을 마구 먹었더니 이틀 만에 청바지가 맞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 다이어트 경험을 담아서 낸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9][10]

1992년 미국 포브스 지 선정 미국 방송인 소득 순위에서도 내로라하는 유명 방송인,진행자를 제치고 여성 방송인 소득 1위를 차지했으며 남성 방송인까지 합쳐도 10위권에 들어가는 엄청난 소득을 벌어들인다고 한다.더불어 2007년지 포브스 지 선정 역대 미국 여성 부자 10인에서 유일한 흑인으로 들어갔다.

인터뷰에서 힘들고 불행했던 어린시절을 이겨내고 성공한 비결은 다름 아닌 모든것에감사하는 습관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매일 감사했던 일들을 몇가지씩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패션이나 화장, 코디네이터에도 각별한 신경을 쓰는데 코디네이터가 어떤 옷을 권하자 근방 옷가게에서 수억원어치 비슷한 옷을 사온 적도 있다고 한다.

아동 성폭행 및 학대 근절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3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 초대를 받고 국가아동보호법 시행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결국 오프라의 노력으로 국가아동보호법은 통과되었다. 이 법에는 '오프라 법안'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또한 자신의 방송계에서의 막강한 파워를 이용해 방송을 아동학대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아동학대를 다룬 여러 프로그램 및 영화를 제작해 전국민에게 널리 알리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 거둔 수익을 저소득층 아동을 지원하는데 사용했다.

매년 3억 5천만 달러를 번다고 한다. 약 4000억 원 정도다. 하포(Harpo)라는 엔터테인먼트 사를 운영하는데 이게 이름은 오프라(OPRAH)를 거꾸로 한 거였다.

Epic Rap Battles of History 시리즈에도 출연했다.

2008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졸업축사를 하였다. 이 축사는 2005년 스티브 잡스의 축사에 이어 스탠포드대생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연설로 꼽혔다. 졸업연설후 자신의 쇼에서 소개한 책 2권을 졸업생 전부에게 선물했다. 유튜브서 시청이 가능하다.

2014년 스위스의 한 명품샵에서 인종차별 논란이 있었다. 오프라가 가방을 보여 달라 하자 점원이 "너무 비싸다"며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 논란이 불거지자 해당 상점과 스위스 관광청에서는 윈프리에게 사과를 했다. 매장 측에서는 점원이 가격 대비 다른 좋은 상품을 소개하려 했지만 영어가 서툴기 때문에 의사소통 실수에서 빚어진 문제이지 절대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했지만, 오프라 윈프리는 이를 두고 흑인은 가난하다는 인종차별적 인식이 스위스인들에 만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적어도 예전에는(2004년) 다른 국가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차별을 행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자기 쇼인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한국 여성들을 폄하한 것이다. 세계 여성들에 대한 얘기를 하는 자리에서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좋은 말만 하고,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나쁘게 말한 것. 오프라는 '한국여자들은 성형수술에 집착한다'는 발언을 했으며, 쇼는 한국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한국여자들은 서구적 외모를 갖고 싶어 하며 외모 열등감이 있다'는 둥 성형 얘기밖에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나라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그 나라 여자들을 스튜디오로 초대해 진행한 반면, 한국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한국 여자 대신 '한국여자들은 지네들 외모 버리고 서양인 외모 갖고 싶어서 얼굴에 칼 댐' 이렇게 주장하는 중국 여자를 앉혀 놓고 쇼를 진행한 것이다! 그래서 쇼는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으며 공개 사과를 요구받은 바 있다. 기사(영문) 기사(한국어)

전세계 초호화 별장을 10개나 가지고 있다.
하와이, 콜로라도 국립공원등 다양한곳에 위치해 있다. 오프라는 매해 여름휴가를 이곳에서 보낸다고 하며, 오바마 부부를 초대해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적도 있다.
사진 링크

5.1.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 10계명[편집]

1. 남들의 호감을 얻으려 애쓰지 말라.
2.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말라.
3. 일과 삶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라.
4. 주변에 험담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
5.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하라.
6. 중독된 것들을 끊어라.
7. 당신에 버금가는 혹은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로 주위를 채워라.
8.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면 돈 생각은 아예 잊어라.
9. 당신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말라.
10. 포기하지 말라.

5.2. 신조어[편집]

그녀의 신드롬은 사회현상이 되었고 많은 신조어를 만들 정도였다.

  • 오프라히제이션 (Oprahization) - 오프라 윈프리가 다루면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다.

  • 오프라피케이션 (Oprahfication) - 대중들 앞에서 고백하고 치유받는 현상

  • 오프라히즘 (Oprahism) - 인생의 성공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달렸다.


[1] http://content.time.com/time/magazine/0,9263,7601980608,00.html[2] 오프라가 사는 곳은 밀워키의 지저분한 빈민가였고, 다른 백인학생들이 사는곳은 학교 인근의 넓은 부촌이었다. 게다가 오프라는 집이 학교에서 멀어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야했다. 당시 오프라는 매일 집과 학교를 오가며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하는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심한 열등감을 느껴야 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백인친구의 집에 한번 놀러가기라도 하면 그곳에서 일하는 흑인 파출부를 보며 어머니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3] 심지어 이 시기 어머니의 남자친구도 오프라를 성폭행했다고 한다.[4] 사실 본래 이러한 가정사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프라 윈프리가 인기를 얻고 난 후에 그의 가족 중 하나가 폭로를 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쇼에서 수치스러웠던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밝혀서 많은 이들에게 갈채와 지지를 받았다. 또한 당시에는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도움을 청하는것을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겼으나 오프라의 솔직한 고백은 많은 성폭행 피해여성들이 자신의 피해를 신고하고 도움을 청할수있게 이끌었다. [5] 당시 이 사실이 방송국 내부에 퍼지면서, 방송국 간부들은 오프라의 면전에 대고 흉을 보고 모욕하는 행동을 했고 그녀는 굉장히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되며 설상가상으로 남자친구와 결별까지 하게되자, 오프라는 견디다 못해 스트레스성 폭식을 시작하여 110kg에 육박할만큼 살이쪄서 주변사람들이 못 알아볼정도였다고 한다.[6] Oprah의 철자를 거꾸로한것이다.[7] 이후 자신이 세운 채널인 OWN에서 2012년 1월 1일부터 2015년 1월 4일까지 후속작인 오프라 프라임을 진행했다.[8] 그런데 이 영화에서 윈프리는 연기는 잘했는데 그만 작은 실수가 그대로 영화상에 나온다. 영화상에서 기절하여 쓰러진 그녀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이는데 눕혀진 채로 치마가 너무 위로 올라가서 넘어진 탓에 속옷이 미처 보일까봐 기절해야 하던 그녀가 영화를 보면 슬며시 손을 움직여 치마를 얼른 내리는 게 그대로 NG없이 들어가버린 탓에 국내 영화 프로그램에서 영화상 웃기는 실수씬으로 나오기도 했다.[9] 하지만 오프라 윈프리의 다이어트는 일반인이 따라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다이어트에 쏟아부은 비용은 최소 9억원. 전담 트레이너는 물론이고 요리사와 영양사 등 프로젝트 팀을 구성하였으며, 산책은 최고급 온천의 산책 프로그램을 통한다거나 조깅을 하기 위해서 비행기 타고 하와이로 날아가는 등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쓴다는 것에는 다이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 잡지 인콰이어러가 추정한 비용은 1Kg 감량당 적어도 1만 달러 이상.[10] 유명인들의 다이어트 및 몸관리를 보고 자신이나 주변 사람을 탓하지 말자. 댄스가수인 폴라 압둘은 식욕때문에 아예 냉장고에 열쇠를 채우고 24시간 입주 영양사에게 열쇠를 준 후, 영양사와 트레이너가 허락해서 꺼내준 음식만 먹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