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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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振宇
1917년 3월 9일 ~ 1995년 2월 25일

북한군인정치인.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북한에서 3인자 격으로 군림한 인물이다.

함경남도 북청에서 가난한 농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고, 일찍부터 항일 빨치산 활동에 참가하면서 김일성을 만나 최측근이 되었다. 이후 일본 육군의 항일 무장 단체들에 대한 토벌 활동이 강화되자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피난했고, 소련군에 입대, 육군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당시에는 바쁜 김일성 부부를 대신해서 갓 태어난 김정일을 업어가며 키웠다고 하며, 이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김정일 치하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와 1946년 9월에 중앙보안간부학교 군사부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에 참가했고, 육군 장령이 되어 한국전쟁 중에는 제43사단장, 최고사령부 부참모장, 제6군단 참모장, 근위서울제3사단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휴전 후에도 공군사령부 참모장[1], 총참모부 부참모장,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부상,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 등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쳤고, 1956년부터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 경력도 쌓아갔다. 5년 뒤에는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격되었고, 1967년에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총참모장,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겸하며 군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오진우는 김일성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후계자 문제와 관련하여 김정일의 경우 자신이 보모 역할까지 하면서 길렀음에도 제대로 된 군 경력이 없었다는 이유로 좀 더 군사적 능력이 있어 보이던 김평일에게 더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김정일은 오진우를 제거하기보다는 자기 편으로 회유하려고 거액의 뇌물을 계속 건넸고[2] 결국 김평일이 김정일의 정치 공작으로 권력을 잃은 뒤에는 친김정일 세력으로 돌아섰다.

이후 군부 내 보수 세력의 수장 역할을 하면서 오극렬 등 개혁 세력과 암암리에 권력 투쟁을 했는데, 1979년에 오극렬에게 총참모장 직책을 내주면서 일시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최측근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빨치산 1세대였던 최현과의 경쟁에서는 우위를 점했고, 1976년에 최현이 맡고 있던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여전히 정치력에서 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1980년에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김정일의 군부 장악을 도왔고, 그 공으로 1985년에 차수로 승진했다. 이후 자신의 최대 라이벌 중 한 사람이었던 오극렬이 정치위원의 권한 축소에 관한 문제로 김일성의 신임을 잃고 총참모장 직책을 갑툭튀한 원로인 최광에게 내주자, 최광과 함께 개혁파의 위세를 압도하면서 보수적인 정치 군인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1990년에 군부의 확실한 장악을 위해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자리를 스틸가져가고 1991년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부임하면서 입지가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 1992년 4월에 북한 군 역사상 단 세 명밖에 없었던 (오진우, 최광, 리을설) 인민군 원수에 가장 먼저 승진하는 등 말년에 가서도 여전히 강한 권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3]

1994년에 김일성이 죽은 뒤에는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이 시점부터 지병인 폐암이 악화되어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빈도 수가 현격히 떨어졌다. 김정일은 오진우를 특별히 프랑스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지만, 별다른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이듬해 평양에서 투병 중 사망했다. 장례는 김정일의 명령에 따라 국장으로 행해졌고, 유해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혔다.

전장에서는 정통 야전 지휘관보다는 참모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그 솜씨도 그다지 신통치 못해 나치 독일 국방군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장군이나 소련 육군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장군 같은 희대의 똥별들에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어차피 북한군 최고위급 대장이나 차수들은 나이가 나이다 보니 야전 지휘관이라기 보다는 그냥 군 원로직으로 보면 되니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대신 후빨정치적 보신술은 만렙 수준이었는지 김일성 시절 행해진 수많은 숙청에서도 살아남았고, 김정일 조차도 자기 편으로 회유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을 보면 군인 보다는 전형적인 정치군인 타입의 인물로 여겨진다.

어쨌든 덕분에 김씨 가족 외에는 영웅화되기 힘든 북한에서[4] 오진우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사후에 제작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잡지 '조선예술'에 실려 있는데, 내용이 아주 가관이다. 전장에서는 물론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이 더 부각되기는 하지만 거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수준의 명장으로 묘사되어 있고, 김일성이 죽은 뒤 골골 앓고 있을 때도 김정일이 최전방 시찰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님 곁으로 가고 싶다'면서 애써 몸을 일으켜 군복을 입고 차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죽는 등 손발퇴갤을 일으킬 정도.

아들인 오일정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장으로 군적을 유지하면서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장을 역임하고 있다.

신상옥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오진우는 술에 취하면 장군님 명령만 있으면 부산까지 일주일이면 쓸어버린다고 호언장담하곤 했다 한다.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드립을 친 신성모가 생각나면 지는거다.음주운전 항목에도 있듯 북한에는 유독 고위 공직자들의 음주운전 사고가 빈발한데, 오진우 역시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다.

김덕홍 회고록에는 김정일이 1976년부터 1982년까진 오진우를 무력부장동지로,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무력부장동무로, 1984년부터 1990년까진 오진우 영감으로, 1990년에서 1994년까진 오 영감으로, 1994년부터는 그냥 영감이라고 불렀다 한다.(...) 김덕홍은 이를 북한의 조선인민군이 김씨 일족의 사병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모습이라고 평했다.

[1] 육군 출신인 오진우가 공군사령부에 근무한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전세계 어느 나라나 공군 창설 초기에는 육군 출신들이 주축을 이룬다. 예를 들어, 미국도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한 게 1947년 이지만, 정작 공군사관학교는 1954년에야 생겼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육군 장교들을 충원하였다.[2] 김정일은 오진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 자주 그를 초대했는데, 어느 날 과음한 오진우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당시 김정일은 보고를 받고는 병원으로 즉각 달려 와서 의료진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치료할 것을 명령하고는 오진우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할시 큰 포상과 뒈지면 아오지행을 약속했고, 오진우를 후송한 교통 순찰관에게도 크게 포상을 주었다. 나중에는 오진우를 외국으로 보내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3] 2015년 11월에 마지막 인민군 원수였던 리을설이 사망한 뒤로도 이 계급에 오른 이는 한 동안 없었다가 2016년 4월 14일에 원로 차수들인 김영춘과 현철해가 동시에 진급했다.[4] 갑산파가 박금철 부부를 미화하다가 숙청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