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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최근 수정 시각:

히브리어: ירושלים (예루살라임: 평화의 도시)
아랍어: القُدس (알 쿠두스: 신성한 도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19px-Emblem_of_Jerusalem.svg.png

이스라엘 측 휘장

면적

652km2

행정구역

이스라엘: 예루살렘 구
(실효지배 중)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주
(영유권 주장 중)

인구

1,483,631명

링크

예루살렘 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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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érusalem

예루살렘

1. 개요 2. 지리 - 군사적 요충지3. 역사 - 3대 종교의 성지
3.1. 히브리인 이주 이전3.2.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도3.3. 바빌론 유수3.4. 헬레니즘 시대3.5. 하스몬 왕조의 수도3.6. 로마 시대
3.6.1. 로마의 간접통치3.6.2. 로마의 직접통치
3.7. 이슬람의 도래
3.7.1. 정통 칼리파 시대3.7.2. 우마이야 왕조
3.8. 십자군 시대
3.8.1. 11세기의 혼란3.8.2. 예루살렘 왕국3.8.3. 아이유브 왕조
3.9. 오스만 지배기 (1520-1918년)3.10. 근대 : 영국의 위임통치3.11. 현대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4. 예루살렘 구시가
4.1. 무슬림 구역4.2. 기독교인 구역4.3. 아르메니아인 구역4.4. 유대인 구역4.5. 템플 마운트4.6. 모로코인 구역
5. 국제사회의 입장6. 대중문화에서7. 사건사고8. 잉글랜드의 비공식 국가
8.1. 가사
9. 예루살렘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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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아브라함 계통의 3대 종교(유대교, 이슬람교, 크리스트교)의 성지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는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서(西)예루살렘은 1960년대에 가나안을 제패한 이스라엘 정부가 시내와 서부를 실효지배하는 행정수도이며, 동(東)예루살렘은 1990년대에 비유대인 지역의 통치권을 인수한 팔레스타인국(國)이 시외와 동부를 실효지배하는 헌법상의 수도이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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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구(區) : 이스라엘 국가의 행정수도이며, 예루살렘구(區)의 예루살렘시(市)에 정부청사 단지를 차례로 완공했다.


1948년부터 1977년까지 텔아비브가 이스라엘의 임시수도였는데,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6] 중앙정부청사와[7] 대법원[8] 및 복지부처와 공안기관(공안부+경찰청+소방청+교도청)과 이스라엘은행을 차례로 이전했다. 그래서 1977년에 이르면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경제부처와 방위기관(국방부+육군청+해군청+공군청) 및 국유기업증권거래소는 여전히 텔아비브에 있다. 아래에서 언급하는 국제법상의 이유로 각국 대사관도 텔아비브 시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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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분리독립을 지지하는 비유대인들은 알-쿠드스(القدس‎)라고 부르며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국가의 정식 수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국(國)도 동예루살렘에 천도하고 싶은데, 이에 맞서 이스라엘 정부는 공안부 본부와 경찰청 본청을 동예루살렘에 통째로 옮기고 신 베트헌병대보통경찰국경경찰을 총동원해 비유대인들의 반체제운동을 열심히 탄압하고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 내무부와 예루살렘 시청에서 근무하는 유대인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대(大)예루살렘 메트로폴리스를 조영하는 도시계획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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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000년전(BC 1000년경)에 건설된 도시로, 굉장히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이다. 2016년 기준 인구는 약 86만 명에 이르렀으니, 이스라엘 국가의 행정구역들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나, 이스라엘 본토에서 최대도시는 아니다. 도시권 인구권역에서 400만 명이 넘는 행정구역 2위인 텔아비브보다 예루살렘이 훨씬 더 적은 편이다. 이스라엘 국내의 모든 인구가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1300만 명을 초과한 마당에 예루살렘은 상징에 불과하다.[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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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주(州) : 2003년에 입법한 팔레스타인국(國)의 헌법에서 규정하는 수도


요르단 왕국의 중앙정부가 동예루살렘 지역에 설치한 예루살렘주(州)와 예루살렘시(市)는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해체되었고, 곧이어 이스라엘 국가의 중앙정부가 요르단강 서안지구가자 지구골란 고원시나이 반도를 군정 통치 지구(국방부↔헌병대↔비유대인 도시)와 민정 통치 지구(공안부↔경찰서↔유대인 정착촌)로 나누어 다스렸다. 1993년의 오슬로 협정에 따라 비유대인 지역의 통치권을 인수한 팔레스타인국(國)은 요르단 왕국의 지방행정을 복고했지만, 동예루살렘 지역은 예루살렘주(州)만 복고했으며, 팔레스타인 입법평의회에 우편투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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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예루살렘을 아랍어로 '신성한 곳'이란 의미인 알 쿠드스(Al-Quds), 정확히는 알-쿠드스 아쉬-샤리프(Al-Quds Ash-Sharif)라고 부른다.[11] 라마단 마지막 금요일인 ‘쿠드스의 날’에는 이슬람권 상당수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지지하는 행사와 반미 집회가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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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지역으로는 예루살렘 시가의 교외 지역인 아부 디스(Abu Dis, أبو ديس‎)가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인하는 한편 제프리 쿠슈너(트럼프의 사위)를 통해 "서안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을 인정하고, 동예루살렘 교외인 아부 디스를 팔레스타인국(國)의 수도로 받아들이라는 ‘협상안’" #을 제시했다고 한다.

2. 지리 - 군사적 요충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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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귀한 이스라엘 본토에서 나라의 수도로 삼을 만한 최적의 위치는 예루살렘 지역이다. 고대 시대의 지리를 고려하면,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식수를 공급하면서 험한 산지에 의지하여 방어전을 펼칠 수가 있는 도시들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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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이스라엘수자원공사(מקורות חברת מים בע"מ)가 바닷물의 담수화를 꾀하면서 골란 고원물을 끌어와 이스라엘 대수로(המוביל הארצי)를 통해서 하이파와 나츠라트,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베르셰바와 에일라트에 어마어마한 수량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3. 역사 - 3대 종교의 성지[편집]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성지다. 각각 거룩한 무덤 성당, 바위의 돔, 통곡의 벽이 그 종교의 상징인 성지.

예루살렘은 옛날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 시대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중세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현대에 들어서는 아랍인과 이스라엘인들이 서로 싸운다. 예루살렘은 역사상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2번[12]이나 완전히 파괴된 후 재건되었고, 그 밖에도 무려 23번이나 공성전을 겪었다.

3.1. 히브리인 이주 이전[편집]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기원전 4000년 경에 첫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시는 기원전 2000년 경에 이집트 중왕국의 문서에서 '루살리뭄' 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창세기에 의하면 기원전 1850년경에 이사악의 희생 미수 사건[13]이 도시 인근의 모리아 산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예루살렘 지방은 이후 이집트 중왕국을 멸망시키게 되는 힉소스 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기원전 1700년경)

한편, 힉소스인을 축출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신왕국은 투트모스 1세의 지휘 하에 팔레스타인 일대를 점령하였다.(기원전 1500년경) 그리고 이집트의 정복 군주인 투트모스 3세는 도시 인근에 군대 주둔지를 건설하여 시리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민족은 가나안 인이었고 이집트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는 기원전 1330년에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와 우루살림(예루살렘)의 지도자 간에 주고받은 서신인 아마르나 편지에서 확인되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a/ae/Amarna_Akkadian_letter.png

이집트 신왕국은 람세스 2세의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으나 동시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계자인 람세스 3세는 당시 지중해 동부를 휩쓸던 바다 민족을 가나안에서 격파하였으나 너무 많은 국력을 소모한 나머지 가나안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기원전 1178년)

3.2.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도[편집]

과거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으며 다윗이 중건했다고 한다. 성경에도 나오지만 다윗이 처음으로 건설한 것은 아니고, 가나안 족속들 중 하나인 여부스 족속에게서 탈취한 곳이다.[14] 그 때문에 다윗 성이라고 불렀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15] 그의 후계자인 솔로몬은 현재의 바위의 돔 일대에 성전을 세웠다.(기원전 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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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

3.3. 바빌론 유수[편집]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사후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는데, 북부의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하였다. 이후 100여년이 흐른 후, 남부의 유다 왕국은 이집트와 연합하여 칼데아를 공격하려 하다가 결국 칼데아 제국 (신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하였다. 당시 바빌론의 군주이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수만명의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칼데아의 수도인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동력으로 징발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바빌론 유수이다.

3.4. 헬레니즘 시대[편집]

페르시아 제국 특유의 관용 정책 하에 유대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며 예루살렘 재건에 힘썼다. 성전도 이전의 절반 규모로 재건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알려진 바와는 달리 처음부터 유대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한 것은 아니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의 폐혜

3.5. 하스몬 왕조의 수도[편집]

유대인들을 바르바로이, 즉 이어족이라며 멸시하던 후기 셀레우코스 국왕들에 반발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반란은 성공하였고, 예루살렘은 반란의 주도 세력인 하스몬 가문의 통치 하에 다시 독립 유대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3.6. 로마 시대[편집]

로마에게 유다 왕국이 멸망한 뒤로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유대인들 덕택에 상업이 매우 발전한 도시였다. 기독교에게는 메시아인 예수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곳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유대인들의 반란 때문에 기독교가 자리를 잡지 못해 기독교의 중심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가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 때가 되서야 총대주교로 자리를 잡았다.

3.6.1. 로마의 간접통치[편집]

폼페이우스의 정복, 헤롯 아그리파 왕국. 예수의 일생이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났다. 기원전의 예루살렘은 헤롯 대왕이 다스리는 유대 왕국의 도성(都城)이었지만, 기원후의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이 유대 왕국을 대리하여 통치하는 다양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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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대왕이 세운 2번째 성전

3.6.2. 로마의 직접통치[편집]

서기 70년에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났으나 로마군에게 함락되었다. 예루살렘 도성(都城)을 철저하게 파괴한 로마군은 폐허로 변한 도성의 터에 제 10 군단의 기지를 조성하였다. 한편 도망친 잔당들은 마사다와 감라에서 결사항전을 꾀했지만, 결국 로마군의 공세로 함락을 앞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60여년이 흐른 후, 5현제 중 한명인 하드리아누스가 순행 중 예루살렘 유허를 방문하고는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Aelia Capitolina) 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로마식으로 재건하였다. (서기 130년) 이 명칭은 7세기의 이슬람 정복 시까지 이어져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을 일리야 (إلياء)라고 불렀다.[16]

서기 131년,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하자 유대인들은 스스로 메시야라고 칭한 시몬 바르 코크바의 지휘 하에 재차 봉기하였다. (2차 유대 전쟁, 132 ~ 135년) 하지만 봉기는 처절히 진압되었고 빡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의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출입을 금하였다. (디아스포라) 파괴된 성전 터에는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 신전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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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엘리아(Aelia)의 주교에게 그 지방(팔레스타인)의 모든 권리와 로마 주교에 다음가는 명예를 부여한다.

니케아 공의회에서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313년의 밀라노 칙령과 395년의 테살로니카 칙령의 단계를 거치며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예루살렘의 중요도가 급상승 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주교는 총대주교승격되었다.

614년, 동로마 군대를 괴멸시킨 호스로 2세의 이란 군대는 크리스트교도들에게 차별을 받던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호응 하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이때 이란 군대는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를 자행하였고 기록에 따르면 무려 9만명의 기독교도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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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초의 동로마-사산 제국간의 대규모 전쟁. 성십자가를 다시 예루살렘의 골고다에 봉안하는 헤라클리우스

비록 동로마의 구원자인 헤라클리우스가 629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지만 콘스탄티누스부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까지 세워진 수많은 유서깊은 교회들은 이미 대부분 파괴된 후였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634년, 헤라클리우스에 의해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임명된 성 소프리니우스는 급한데로 승천 교회와 아나스타시스 교회를 복구하였다. 당시 동로마와 이란은 긴 전쟁을 마무리하고 전쟁 이전으로 국경을 원상복귀 시켰으나, 양측 모두 서로의 수도를 위협하는 총력전을 펼친 터라 지쳐 있었다.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신흥 종교 하에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아랍인들이 대팽창을 준비하고 있었다.

3.7. 이슬람의 도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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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즈 (한밤 중의 예루살렘 여행)를 경험하는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 예수와 대면하고 왔다고도 한다.

밤에 거룩한 마스지드로부터 선조의 사원으로 그의 종을 옮겨다놓은 그를 찬양하라. 우리는 기적을 보여준 그의 순회 여행으로 복을 누린다. 그가 본 자요, 또한 들은 자이다.

쿠란, 수라 17장, 53절 4-10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승천한 도시이자 최초의 기도 대상이었다.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예루살렘 방향으로 기도하라고 했고, 나중에 전통세력을 포섭하면서 메카로 바꾸었다. 이후에도 최초 기도 장소이자 무함마드의 승천 장소라는 점 때문에 메카와 버금가거나 동등한 위치로 인정받았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인 메디나조차 따지고 보면 예루살렘보다 아래이다.

3.7.1. 정통 칼리파 시대[편집]

신의 이름으로 자비와 은총이 있기를. 바이크 알 마크티스 (거룩한 집)의 거주자들에게 고한다. 진실로 당신들의 목숨과 재산, 그리고 교회에 대한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는 바이다. 저항하지 않는한, 무슬림은 어떠한 희생과 파괴도 하지않을 것이다.

2대 칼리파 우마르가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이슬람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에 죽은 후, 내부를 정비한 아랍인들은 칼리파 아부 바크르와 '신의 검' 할리드 장군의 지휘 하에 634년부터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기나긴 전쟁 후에 쇠약해져 있었고 단성론과 칼케돈 파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던 터라 로마군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636년에 벌어진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의 시리아 군대는 괴멸되었고 헤라클레우스 황제도 사실상 시리아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638년 2월, 칼리파 우마르는 성문 앞에서 타고있던 말에서 내렸다. 누더기를 걸친 까무잡잡한 노인이 예루살렘의 중심부로 나아갈 때에 시민들은 그가 서아시아를 정복해 나가는 이슬람 제국의 칼리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 당시 거룩한 성묘 교회에서는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수십분이 지난후, 뒤늦게야 칼리파를 알아본 회려한 복장의 총대주교가 성당의 열쇠를 건네며 내부에서 기도할 것을 권했지만 우마르는 그를 거절하고는 예배당 밖의 계단에 걸터앉아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채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는 자신의 선례가 후대에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할 근거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후에 비무장 차림으로 입성한 무슬림 병사들도 그를 따라 경건히 기도하였다. 예루살렘이 이슬람 지배하에 놓인 이후로도 성묘 교회는 크리스트교인의 전용 예배당으로 전속되었다. 무슬림은 동쪽 계단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23년전, 페르시아 군대의 잔혹한 점령과 462년 후 1차 십자군의 피로 물든 예루살렘 '입성'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여담으로, 우마르는 500년 전에 제정되었던 트라야누스의 디아스포라 정책을 폐기하여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과 거주를 허락하였다. (예루살렘과 우마르 이븐 알 카타브 #)

3.7.2. 우마이야 왕조[편집]

파일:Dome-of-the-Rock-Jerusalem-1-1163x775.jpg

서기 661년 7월, 무아위야 1세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에서 즉위식을 치르며 이슬람 첫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의 개창을 알렸다.

서기 690년, 우마이야 조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군주인 아브드 알 말리크는 내전 (2차 피트나)의 종결을 기념하여 당시 폐허이던 성전산에 바위의 돔을 지었다. 현재까지도 예루살렘의 랜드마크로 기능하고 있는 그 황금빛 사원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동 예루살렘의 아랍 무슬림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3.8. 십자군 시대[편집]

약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명목상 목적지였다. 십자군 전쟁 중에는 기독교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이 건국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이유브 왕조살라딘이 하틴 전투의 승리 이후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이후, 6차 십자군을 이끈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로 잠시 예루살렘을 찾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서 이슬람 세력이 도로 정복했다.[17]

3.8.1. 11세기의 혼란[편집]

아바스 왕조는 9세기 중반부터 혼란에 빠져 이라크 외부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고 예루살렘은 툴룬 왕조 등의 지배를 거쳐 북아프리카의 쉬아 칼리프 제국인 파티마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969년) 하지만 파티마 조는 기독교에 대한 불관용적인 모습을 보이며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를 파괴하였다. (1002년. 이후 1030년에 동로마 제국의 협박..으로 복구)[18] 한편, 1054년의 동서 교회의 대분열 때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 편에 섰다. 이는 로마 가톨릭 세력에게 큰 충격이었고 십자군의 다양한 원인이 되었다.

파티마 조는 11세기 중반에 이르러 쇠퇴하였고, 예루살렘은 1071년 이후 전성기를 맞은 튀르크 세력인 셀주크 제국에게 점령하였다. (1073년) 한세기만에 수니파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회복한 것이다. 하지만 11세기 중후반에 전성기를 누리며 서아시아를 제패한 셀주크 조는 말리크 샤의 죽음(1092년) 이후 급속도로 쇠퇴, 분열하였고 아르투크 왕조를 거쳐 다시 파티마 조의 땅이 되었다.

3.8.2. 예루살렘 왕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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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서 원하신다 ! [19]

1090년대에 서아시아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에 이어 교황으로 즉위한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에 소집한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제창하였다. (다만 20세기 이후에 들어 카톨릭 교회가 십자군에 대해 사과하며 클레르몽 공의회는 정식 공의회가 아니게 되었다.)[20] 원정의 표면상의 원인은 동로마 제국 측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게 대패한 후 지원을 요청한 것이지만 교황은 교황권의 확대와 동서 교회의 통합을 염두에 두었고 상속 받지 못한 왕자들은 영지 획득, 농노들은 순교에 대한 희망..을 품고 원정에 참가하였다. 원정대는 서로 물어뜯기 바쁜 튀르크 세력을 하나하나 각개 격파하며 나아갔고, 1099년 6월에 성도 앞에 도착하였다.

파일:1099_Siege_of_Jerusalem.jpg
예루살렘 함락

1099년 7월 15일, 1차 십자군은 파티마 왕조의 수비대의 항복과 함께 도시에 들이닥쳤고, 보이는 주민들을 보이는대로 죽이기 시작하며 '성지 정화'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로써 수천명의 무슬림/유대교도가 살해되었고 예루살렘의 길에는 장마비라도 내린듯 피가 홍건히 젖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모든 십자군이 이 광란의 살육에 빠진 것은 아니다. 이후 트리폴리 백국을 세우게 되는 툴루즈 백작 레몽은 일부 주민들을 보호하거나 성밖으로 피신시켜 주었다. 어쨋거나 예루살렘은 무려 462년만에 크리스트교 국가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십자군 국가들은 공국이나 백국을 자처한 것에 비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는 예루살렘 '왕국'이 건립되었다.

3.8.3. 아이유브 왕조[편집]

1187년 7월 4일, 살라흐 앗 딘은 프랑크 군대를 하틴의 뿔에서 제압하였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기를 생포하였다. 그해 9월 20일, 무슬림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재차 포위되자 성 안의 기독교도들은 (1차 십자군이 자행하였던) 1099년의 대량 학살에 대한 복수의 칼이 두려워 몸서리쳤다.

수비를 책임지던 발리앙 드 이벨린은 바위의 돔을 파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겠다며 공격군에 엄포를 놓았다. 이에 살라딘은 공성을 중단하고는 배상금을 받는 조건부 항복을 허락하였다. 라틴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몸값을 내고 예루살렘을 떠났다.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은 값을 치르지 못하여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기독교도 2천명을 대가도 없이 석방하는 풀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살라딘은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렸다. 그는 550년전 칼리파 우마르가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처럼 성묘 교회에 대한 어떠한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다만 690년에 이슬람의 성전으로 세워진 바위의 돔 위에 있던 십자가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돔 위의) 십자가를 쳐 넘어뜨리자 프랑크인은 물론이요 무슬림까지 큰 울음을 터뜨렸다. 무슬림들은 '알라후 아크바르 !!' 라고 울부짖었고 프랑크인들은 심히 괴로워하며 울었다. 서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도 커 땅이 흔들리는 착각마저 들정도였다. 유일신을 섬기는 두 종교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바위의 돔의 십자가 조형물이 내려진 이 작지만 큰 사건은 성스러운 도시의 주인이 다시 바뀌었음을 상징하는 작은 변화였고, 이슬람과 크리스트교 양측의 기록에 남아있다.

13세기 들어, 5차 십자군을 지휘한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2세는 아이유브 술탄인 알 카밀과 협상하여 예루살렘을 재차 십자군 영토로 복귀시켰다. 다만 수비대 설치는 금지되었으며, 시내의 이슬람교도 역시 안전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 공존도 30여년 만에 호라즘 왕조의 개입으로 깨졌고, 예루살렘은 아이유브 조를 멸한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9. 오스만 지배기 (1520-1918년)[편집]

이후 맘루크에 이어 오스만 제국의 400년 통치를 받았다. 오스만 조의 쉴레이만 대제는 소규모 도시로 전락해 버린 예루살렘에 대한 대대적인 보강 공사를 지시하였다. 성벽이 다시 세워졌고 도로가 정비되었는데, 현재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성곽이 이때 비로소 정립되었다. 공교롭게도 예루살렘을 다시금 중건한 쉴레이만은 고대 이스라엘의 명군 솔로몬을 터키어로 음역한 것이다.[21]

3.10. 근대 : 영국의 위임통치[편집]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영국프랑스가 점령했는데, 이 때 살라딘의 무덤 앞에서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을 되찾았다고 뽐내기도 했다. 30년간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치소(治所)로서 기능하다가 1947년의 UN총회의 결의(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를 철폐)에 따라 영국의 관공서가 모두 철수했고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시작되었다.

3.11. 현대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편집]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1960년대의 베를린 장벽처럼 아주 촘촘한 철조망으로 동서분할했고 악전고투 끝에 서예루살렘을 사수했지만,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에게 점령되어 합병되었다.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방위군이 동예루살렘을 해방(?)하면서 서예루살렘과 동서통일(?)하는 절차를 밟았다. 곧이어 1968년부터 1992년까지 중앙정부 관청들의 이전이 진행되었고, 이스라엘 정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동서통일한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탈바꿈했다.

이스라엘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시온주의자 정치인들은 마음 속으로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바위의 돔을 엎어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바로 여기가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인데다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바위가 있어서 유대교 입장에서는 성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소망은 솔로몬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슬람 입장에서도 위와 똑같은 이유 + 시조인 무함마드가 승천한[22] 자리로서 이슬람에서 성지로 받아들이는 곳이라는 것. 만약 여기를 부숴버렸다가는 전세계 이슬람 국가들이 남김없이 적으로 돌아서버릴 일이기 때문에 겨우 성전의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는 수준이다.[23]

결국 직접 부실 수는 없으니 하레디계 정치인들은 야훼께서 지진으로 이단의 상징인 알 악사 모스크을 무너뜨릴 때를 기도한다고 하지만 현실은[24] 오죽하면 여길 방문하여 아랍권의 분노를 일으켰던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조차도 '이걸 계기로 여길 무너뜨릴 시도를 할 겁니까?' 라는 예루살렘 포스트지 기자 발언에 예루살렘에 그냥 핵을 투하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 같구려? 란 말 한마디를 하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시오니스트들이 솔로몬 성전을 만든다고 큼직한 돌로 기둥을 만들고 직접 이곳으로 끌고갔다가 경악한 이스라엘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가로막았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냥 통곡의 벽 근처에 그냥 내뒹굴고 있다.

월트 디즈니알라딘이 아랍권 개봉할 당시 '예루살렘은 그 어디의 도시도 아니다'라는 홍보를 하여 이스라엘에서 항의한 적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적어서(600만 명 정도) 불매해봐야 별다른 영향도 없었다.[25] 게다가 당시 디즈니 회장이었던 제프리 캐천버그가 유대인임에도 이런 홍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캐천버그는 어차피 이스라엘인도 아니니 신경쓸 필요가 없었지만.

2014년에 이스라엘은 유로 2020 분산 개최 후보에 예루살렘을 등록하며 유로컵 개최 희망을 나타냈으나, 예루살렘에서 유로컵이 열릴지는 의문시되는 상황. 7월 들어서 가자 지구 무차별 폭격으로 모든 스포츠 대회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종교 국제 만찬이니 뭐니 그런 게 열리는 수준. 결국 유로 2020 최종 분산 개최도시에 뽑히지도 못했다.

예루살렘의 어원은 히브리어 평화(שלום, 샬롬) + 도시(עיר, 이르)로 평화도시.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평화롭지 않다.

4. 예루살렘 구시가[편집]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

한글

예루살렘 옛 시가지와 성곽

영어

[26]

프랑스어

[27]

국가·위치

예루살렘(요르단이 제안한 유적)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1년

등재기준

(ii)[28], (iii)[29], (vi)[30]

지정번호

148rev


예루살렘 안에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시가. 1860년까지는 예루살렘의 전부였다. 면적 0.9km2. 지금의 성벽은 16세기, 그러니까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 때 다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성의 출입구인 11개의 문 중 7개는 지금도 개방되어 있다. 지금의 예루살렘 구시가는 '무슬림 구역', '기독교인 구역', '유대인 구역', '아르메니아인 구역'으로 4분할되어 있다.

1981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는데, 어느 나라의 유산인지는 밝히지 않고 '요르단이 제안한 유적(Site proposed by Jordan)'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1982년 이래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중 한 곳이기도 하다.

파일:jerusalem_quarters_mappn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ldCityMapNameless.png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기독교인 구역, 무슬림 구역, 템플 마운트, 유대인 구역, 아르메니아인 구역이다.

6번 문인 Dung Gate는 말 그대로 "똥 문(門)"을 의미한다(...) 품위없게 똥이라고 할 수는 없어서 분문(糞門)이라고 돌려 번역하기도 한다.

4.1. 무슬림 구역[편집]

구시가의 북동쪽 사분면에 있는, 가장 넓고 인구가 많은 구역. 특히 예루살렘 인구의 3분의 1이 아랍인이며 아랍인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무슬림 구역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관련 종교시설도 꽤 있는데, 성 안나 교회, 채찍질 교회, 시온의 자매 수녀원 등이 대표적인 기독교 관련 종교시설이다.

4.2. 기독교인 구역[편집]

구시가의 북서쪽 사분면에 있다. 무리스탄 시장(市場)이 있고, 예수십자가에 못박힌 뒤 그 시신이 묻혔던 장소로 기독교 성지 중 하나가 된 거룩한 무덤 성당과 골고타 언덕이 이곳에 있다. 그 외에도 라틴 총대주교좌, 정교회 총대주교좌, 세례자 요한 성당 등의 명소가 있다.

참고로 이 거룩한 무덤 성당을 참고하면 그야말로 성지에서 각 기독교 종파의 분열과 갈등을 실감할 수 있다. 기 들릴이 그린 만화 "굿모닝 예루살렘"을 보면 이스라엘에서 이 건물 안에서도 각 기독교 종파들이 뒤엉켜 싸움질하는 게 나와 비꼰다.

4.3. 아르메니아인 구역[편집]

구시가의 남서쪽 사분면에 있고, 면적이 가장 작다. 상당히 유서깊은 구역으로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아르메니아 수도사들이 성지인 예루살렘에 정착해 형성한 디아스포라를 기원으로 한다.

아르메니아인도 기독교 신자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별도의 구역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것은 예루살렘 내의 구역들이 확정되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 정교회 신자들(룸)과 아르메니아인을 서로 다른 밀레트(millet)로 구분했기 때문이다.[31]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팔레스타인인들인데 반해 여기만 아르메니아인이라서 생긴 민족적인 이질감도 구역 분리에 한몫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총대주교좌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성 면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그 외에 성 야고보 대성당, 다윗 탑과 성채 등의 명소가 있다.

4.4. 유대인 구역[편집]

구시가의 남동쪽 사분면에 있다. 2004년 기준 인구는 2,348명이었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성지로, 이 벽을 향해 기도한다.

4.5. 템플 마운트[편집]

히브리어로는 하르 하바이트(הַר הַבַּיִת‎, Har HaBáyit), 무슬림들에게는 하람 에쉬 샤리프(Haram esh-Sharif), 말하자면 '성전 산'이다.

이슬람의 성지인 바위의 돔, 알 아크사 사원, 이슬람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종교적인 분쟁과 폭동을 우려해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파일:6qu2I4W.png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기념 우표

4.6. 모로코인 구역[편집]

현재는 사라진 구역. 무슬림 구역의 연장 구역쯤 된다. 무슬림 구역과는 북쪽으로 접하고 유대인 구역과 템플 마운트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6일 전쟁 중에 이스라엘이 모로코인 구역을 싸그리 밀어버리고 그 터는 통곡의 벽 광장이 되었다.

5. 국제사회의 입장[편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분할할 때, UN총회 결의안 181호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둘 중 어느 쪽의 영토도 아닌 별개의 구역으로 UN에서 관리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발발하여 무의미하게 되었으니,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예루살렘을 동서로 분할하여 다스리는 UN총회 결의안 194호로 대체했다.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 중앙정부가 예루살렘시(市)를 동서통일해 예루살렘구(區)를 창설했으며, 1980년에 이스라엘 국회에서 예루살렘 기본법을 입법하자, UN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호에 따라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대사급 외교공관들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 입장에 따라 예루살렘은 국제법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도 아니고, 팔레스타인의 영토도 아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수도라고는 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며,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옛 임시수도 텔아비브에 있다. 이스라엘을 열심히 옹호하는 미국도 아랍권의 엄청난 반발[32]을 우려해 1995년 외교공관 이전을 결정해놓고 안전상의 이유로 지금까지 미뤄왔었다. 그런데 2017년 12월 6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하고 대사관 이전을 추진한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 美 이르면 다음 주 공식 인정 이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선언 문서 참조. 2018년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맞이 겸 5월 14일에 옮겼다.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중남미 일부 소국들도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미국의 예루살렘 선언 바로 직전에도, 비록 반쪽이긴 하지만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한 국가가 있는데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는 2017년 4월부터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서예루살렘에만 한정되며, 러시아는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미래국가의 수도로 인정하는 2개 국가 해법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예루살렘을 인정한 것이다.

현재까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국가의 정식 수도로 인정한 나라들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그리스, 네덜란드, 덴마크, 핀란드, 체코, 필리핀, 가나,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바누아투,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파나마,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가 있다. 그러나 이 국가들 중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서(西)예루살렘만 인정'하는 식으로 예루살렘을 자국의 수도로 인정받으려는 이스라엘의 욕구도 일정부분 들어주면서, 아직 인정하지 않은 '동(東)예루살렘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서 중동 지역의 반발도 접수하고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남기기 위한 형식적인 인정이다.

6. 대중문화에서[편집]


황금의 예루살렘 (ירושלים של זהב)‭. 나오미 셰메르가 작사 / 작곡한 곡으로서 유대인들이 가장 즐겨부르는 국민 가요이다. 러시아의 카추샤와 위치가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삽입됨으로써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노래는 1967년에 만들어졌는데, 2주 뒤에 6일 전쟁이 발발하여 예루살렘이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온다.

"예루살렘이란 게 뭡니까? (What is Jerusalem worth?)"
"아무것도 아니라네. (Nothing.)"

짧게 답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살라딘은 이내 다시 돌아선다.

"모든 것이기도 하지! (Everything!)"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기사 이벨린의 발리앙살라흐 앗 딘대화.


이 대사는 짧은 대사지만 영화 속에서 예루살렘 시민들을 지키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가 결국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십자군가톨릭 교도들의 안전한 후퇴를 보장받는 발리앙과, 마침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승자의 자비를 베푸는 살라딘 사이에서 오고 간 명대사. 질문하는 발리앙의 대사도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이런 전쟁을 할 가치가 있어요?' 라는 의미와 '당신에게 예루살렘의 가치가 뭐죠?'라는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고, 이에 대한 살라딘의 대답도 '아무것도 없지'였으나 얼마 뒤 '모든 것이기도 하고!'라고 덧붙여 발리앙의 두 가지 질문에 모두 답한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가지는 가치를 단 한방에 정리하는 문답이다.

7. 사건사고[편집]

8. 잉글랜드의 비공식 국가[편집]




잉글랜드의 비공식 국가다. 실제로 연합왕국(United Kingdom. UK.)의 구성국가들[33]이 따로 팀을 꾸려서 나가는 국제 스포츠 경기에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있다. 크리켓이라던가 럭비라던가. 다만 경우에 따라 다르다.[34] 정부나 국회에서도 국가에 대한 법규를 따로 만든 적이 없다. 알아서 할 일로 취급하는 것.

일례로 잉글랜드의 상징곡으로 쓰여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여는 곡으로 사용되었다. 가사에 나온 그대로 영국의 푸른 대지가 산업 혁명으로 말미암아 공장 등으로 뒤덮여 '사탄의 공방들'이 되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영어로 발음할 때는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다(이스라엘의 도시 예루살렘도 마찬가지). 지루설럼 정도로 발음해야 한다.

Land of Hope and Glory를 잉글랜드 국가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최근에는 Jerusalem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예루살렘-영국인들의 또다른 국가(國歌)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가 편곡하여 앨범 Brain Salad Surgery에 수록한 적도 있었다.[35]

8.1. 가사[편집]

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
Walk upon England's mountains, green?
And was the holy lamb of God,
On England's pleasant pastures seen?

And did the Countenance Divine,
Shine forth upon our clouded hills?
And was Jerusalem builded here,
Among these dark Satanic Mills?

Bring me my bow of burning gold;
Bring me my arrows of desire:
Bring me my spear: O clouds unfold:
Bring me my chariot of fire![36]

I will not cease from mental fight,
Nor shall my sword sleep in my hand:
Till we have built Jerusalem,
In England's green & pleasant land.

그 옛날 그들의 발자취가
정말로 잉글랜드 산천의 수풀을 지나쳤을까?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 양께서
잉글랜드의 아름다운 초원에 나타나셨을까?[37]]

그리고 하느님의 얼굴이
우리의 구름 낀 언덕 위에 빛났을까?
그리고 예루살렘이 이 땅에 세워졌을까,
이 음침한 사탄의 공방들 사이에서?

내 불타는 황금의 활을 가져오라:
내 갈망의 화살을 가져오라:
내 창을 가져오라: 오 구름이여 걷혀라:
내 불의 전차를 가져오라!

나는 내 정신적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더불어 내 손의 검도 쉬는 일이 없으리
우리가 예루살렘을
잉글랜드의 푸르고 아름다운 대지 위에 세울 때까지.

9. 예루살렘 바이러스[편집]

13일의 금요일 바이러스의 별명 정식 진단명. 해당 문서의 3번 문단 참조.

[1] 덴마크어, 독일어, 바스크어, 그린란드어, 말라가시어, 노르웨이어, 스코트어, 핀란드어, 스웨덴어, 베트남어 [2] 영어로는 '저루설럼'으로 발음되며 루에 강세가 들어간다.[3] 타타르어, 코미어, 몽골어, 야쿠트어, 마리어, 체첸어, 오세트어[4] 1978년의 캠프데이비드 협정과 1993년의 오슬로 협정에 따르면 예전의 PLO를 개조한 현재의 PNA는 외교권을 향유하는 스코틀랜드급 자치공화국의 지위로서 규정되어 있었다. 2010년대의 팔레스타인국(國)은 최근에 UN총회의 옵저버로 가입한 PNA의 새로운 현실을 반영하는 칭호로서 1920년대의 아일랜드 자유국과 비슷하다. [5] 여기서 다루는 서예루살렘과 동예루살렘은 오늘날의 양국간(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행정구역을 가리키는 낱말이며, 유엔에서 거론하는 서예루살렘과 동예루살렘은 옛날의 양국간(이스라엘 vs 요르단) 휴전선이 지나가는 공간이다. [6] 6일 전쟁 이전에는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의 다양한 건물을 빌려서 국회를 열었다. 1966년에 서예루살렘에 현재의 국회의사당을 완공했지만,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은 서예루살렘의 열악한 도로교통과 전기통신망 덕택에 불완전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때마침 6일 전쟁은 상전벽해의 기회였으니, 요르단군의 포격으로 파손된 부분들을 수리하면서 대규모로 확장하는 개축 사업을 일으켰다. 게다가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착공하여 최단기간에 완공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회의 예루살렘 시대는 1968년에야 개막했다. [7] 1967년까지 서예루살렘 시내의 모든 관청들은 의전 위주의 작은 건물들 뿐이었다. 1968년부터 예전의 관청들을 차례로 철거하고 웅장한 관청들을 새로 지었다. [8] 새로운 청사를 지을 돈이 없는 탓에 오랫동안 남의 부동산을 월세로 빌렸다. [9] 이 때문인지 예루살렘에는 공항조차 없으며 텔아비브를 경유해서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10] 이스라엘에서는 도시 인구 기준도 다른데 UN에서 정한 세계 도시 기준은 5만 명이지만 이스라엘은 2만 명이다. 한마디로 인구 2만 명만 되면 도시다. 이스라엘 본토의 현실에 어울리는 1930년대 유럽 각국의 도시 기준을 수용한 것이다.[11] 여기서 아쉬-샤리프 Ash-Sharif는 성전 산의 명칭이기도 하다.[12]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파괴했다는 성경 기록을 포함하면 3번이지만, 이 사건을 기록하는 다른 사료가 없으므로 보통 포함하지 않는다.[13] 유일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둘째아들 이사악을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한 사건[14] 원래 이스라엘 12지파 중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곳이었지만 역량부족으로 여부스인들을 축출하지는 못하고 동거하는 상태였다. 다윗 시절에도 난공불락의 성이어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자를 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곳을 함락시켜 짱먹은 것이, 다윗의 조카인 요압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유일한 약점은 수원지가 성 밖에 있어서 비밀 통로를 통해 물을 길어오고 있었는데 요압이 그 비밀 통로를 발견하여 진입했다고 한다. 후일 히스기야 왕 때 실로암 지하수로를 파서 성 내부에 수원지를 확보하게 된다.[15] 심지어 2018년에는 이 시기 예루살렘 시장이 쓰던 직인이 발견되었다. #[16] 다만 이슬람에서도 신성시 되며 알 쿠두스 명칭이 이후에 정착하게 되었다.[17] 여담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이교도의 피를 흘리지 않고 성지를 찾았다고 더럽게 씹혔다.(...) 사실 성왕 루이 9세를 비롯해서 이후의 십자군에게도 아이유브 왕조가 외교로 예루살렘을 내주고 자기 땅으로 몰려온 십자군을 돌려보내려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유브 왕조의 거점인 이집트까지 정복하려고 거절했다가 전멸당했다.(...)[18] 다만 비용은 동로마 측이 부담하였다[19] 원래는 라틴어로 DEVS LO VVLT, 즉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이다. 영어로는 Deus lo(s) Vult. 라틴어는 U와 V가 모두 V라서..[20] 2000년 3월 5일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문건에서 십자군을 "교회가 저지른 범죄"라고 공식 인증했다. 또한 같은 해 3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집전된 미사에서 십자군의 만행을 교황이 주도하였다는 점을 사과하였다.[21] 솔로몬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아랍어인 술레이만으로 나오는데, 이를 다시 터키어로 읽어낸 것이 쉴레이만이다. 현재 터키에서 가장 인기있는 남자 이름 중 하나이기도 하다.[22] 무함마드가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은 장소는 메카이다.[23] 돔의 황금도 요르단에서 기부하여 장식한 것이다. 여기를 부쉈다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요르단이 1번으로 전쟁을 벌이자고 할 듯.[24] 물론 실제로 예루살렘을 포함한 이스라엘 일부 지역에서 과거에 한두 차례의 대 지진이 일어난 적은 있다. 원래 팔레스타인 지역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질대는 아니지만 영국령 팔레스타인 시절에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검색요망.[25] 되려 이 애니메이션 오프닝인 상인의 노래 가사에 나온 ~낯선 이의 팔을 자르는 곳이라네~ 이 내용에 빡친 아랍권에서 알라딘 불매를 벌인다고 하자 놀란 디즈니가 부랴부랴 수정하며 대조를 보였다.[26] Old City of Jerusalem and Its Walls[27] Vieille ville de Jérusalem et ses remparts[28]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9]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0]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31] 참고로 오스만 제국 시대의 도시들은 지금은 거의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밀레트들이 거주하던 구역들을 서로 나누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장 이스탄불만 하더라도 테오도시오스 성곽 이내의 구시가지 남서쪽은 아르메니아 구역, 북서쪽은 정교회 구역, 중부와 동부는 무슬림 구역, 그리고 강 건너 갈라타는 가톨릭 신자들과 정교회 신자들이 거주했다.[32] 사이가 그렇게 나쁜 사우디와 이란조차도 인정할 수 없다며 둘이서 공동대응을 할 정도였다. 이스라엘에 한해선 시아파와 수니파의 오래된 원한관계도 잠시 봉합될 정도이다.[33]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34] https://www.youtube.com/watch?v=YKK7Ys7mxsM[35] 하지만 영국에서는 BBC가 원곡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해치고 타락시켜버린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곡으로 지정했다고 한다.[36] 영화 불의 전차의 제목이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37] 이 부분의 가사는 예수아리마타이 요셉과 영국에 왔다는 전설에서 기반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