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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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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f/Elizabeth_I_Rainbow_Portrait.jpg

왕호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of England)

부친

헨리 8세

모후

앤 불린

생몰년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69세)

재위기간

1558년 11월 17일 ~ 1603년 3월 24일 (44년 127일)

대관식

1559년 1월 15일

장례식

1603년 4월 28일

서명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4/Autograph_of_Elizabeth_I_of_England.svg/831px-Autograph_of_Elizabeth_I_of_England.svg.png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a/Coat_of_Arms_of_England_%281558-1603%29.svg/640px-Coat_of_Arms_of_England_%281558-1603%29.svg.png

엘리자베스 1세 문장.[1]

타임지 선정 16세기의 인물
Time Person of the Century

엘리자베스 1세


1. 개요2. 즉위 전
2.1. 성장 배경2.2. 잉글랜드의 입장2.3. 혼담을 거절하다
3. 여왕 즉위 후4. 엘리자베스 시대의 유명인5. 이야깃거리
5.1. 총신들5.2.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의 관계5.3. 메리 스튜어트와의 관계5.4. 기타
6. 인간 엘리자베스
6.1. 사자같이 불같은 성격6.2. 성실한 공부광6.3. 백성에겐 자비로운 군주6.4. 여장부의 외모 관리
7. 평가
7.1. 내정7.2. 종교7.3. 외정7.4. 총평
8. 타 매체에서의 엘리자베스 1세

1. 개요[편집]

잉글랜드전성기를 개막하고 대영제국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한 여왕. 그리고 지금의 영국 요리를 만들어낸 일등공신 중 한명(?)[2]

16세기 잉글랜드의 여왕이다. 아버지는 헨리 8세, 어머니는 앤 불린.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이자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으로, 언니인 메리 여왕이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자식 중 마지막 생존자인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녀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튜더 왕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고, 그녀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이후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던 펠리페 2세스페인 무적함대칼레 해전에서 완전히 격파하고, 동인도회사를 세우는 등, 수많은 치적을 남겨 약소국이었던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한 여왕이다.

여러 가지로 단점도 많았으나 어려운 시대에 잉글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에 영국은 크게 부흥을 이루었고 그 때문에 영국은 여왕이 통치해야 강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참고로 영국은 2016년 현재도 여왕이 통치 중이다.

키가 상당히 커서 170cm대 중반에 달했으나 180cm가 넘는 메리 스튜어트보다는 작았다.

2. 즉위 전[편집]

2.1. 성장 배경[편집]

어릴 적엔 무사히 생존한 첫 왕손이라 귀여움을 받았던 언니 메리나 그토록 원한 아들로 태어나 사랑받았던 남동생 에드워드처럼 엘리자베스는 한동안 귀여움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나 믿었던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단 사실에 헨리 8세가 나중에 크게 실망해서 점점 아버지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그녀 자신은 아버지에 대해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없었지만 군주로서의 롤 모델로는 존경했던 듯하다고.

거기다 어머니 앤 불린은 백성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했다.[3]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도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했고, 교양인이었던 헨리 8세의 6번째 왕비이자 의붓어머니인 캐서린 파 아래에서 열심히 교양을 습득했다. 당시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여아들도 남자 못지 않게 교육시키는 풍토가 있어 엘리자베스 역시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에게 각종 학문을 사사받았다.

1547년에 부왕인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의붓어머니인 캐서린 파와 잠시 함께 살았다. 파는 헨리 8세와 사별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그의 3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오빠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했기에 엘리자베스는 시모어와도 함께 살게 됐다. 그런데 야심만만한 시모어가 왕위계승권을 가진 엘리자베스에게 추근대는 일이 생겼다. 이를 곧 눈치 챈 파는 그 즉시 엘리자베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자칫하면 왕위계승권자로서의 명예를 크게 훼손당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추문이었으나 그때 엘리자베스는 고작 14세의 소녀에 불과했으며, 캐서린 파가 엘리자베스를 진심으로 걱정해 조언해 주었기에 엘리자베스가 시모어와 절연함으로써 이 추문은 한때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4]

4살 터울이 나는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와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이복언니 메리 1세와도 어린 시절에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앤 불린원수의 딸임에도 동생에게 애정을 쏟았지만 점차 정치적 입장과 종교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벌어졌다.[5] 메리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모반 혐의로 런던 탑에 감금당하며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한데다 다행히 증거가 없어 풀려날 수 있었다. 줄다리기를 했으나 결국 메리 1세는 죽음을 눈 앞에 두자 할 수 없이 헨리 8세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 경종?[6]

2.2. 잉글랜드의 입장[편집]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 잉글랜드는 여러 모로 불안한 상태였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세운 수장령에 의해 잉글랜드는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전신)로 독립했으나, 언니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로마 교회로 복귀하여 가톨릭 국가로 되돌아선 바 있었다.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펠리페 2세가톨릭교회의 맏딸로 불릴만큼 골수 가톨릭인 에스파냐의 왕이었고, 프랑스 또한 종교적으로 분열되긴 했으나 왕가가 있는 파리중심은 골수 가톨릭 신앙으로 역시 개신교인 위그노들을 탄압했기에 종교적으로 긴장관계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공통의 적을 가진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어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프랑스왕의 장자 도팽(왕세자를 이르는 말)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하여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동군연합이 될 예정이라 잉글랜드를 적대 하고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외가가 프랑스 왕가에서도 한수 접어주는 골수 가톨릭 기즈가문[7]으로 역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계는 헨리 8세의 이혼을 무효로, 앤 불린을 첩으로 그사이에서 낳은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주장해서 엘리자베스를 인정하지 않고, 메리 스튜어트야말로 진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열강의 틈새에서 정치적 격변에 시달리는 잉글랜드의 지위는 여러 모로 불안정했다. 더군다나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아직도 종교적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비롯한 복음주의자들은 메리 여왕이 교황청에 영국교회를 조공으로 바친 상황에서 다시 독립하여 영국교회를 독립시키고 대륙의 개혁신앙이 뿌리내리길 바랬고 가톨릭교도들은 종교적으로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엘리자베스를 가톨릭 가문과 결혼시켜 영국의 가톨릭의 입장을 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런 탓에 영국은 엘리자베스의 신랑감으로 여러 명문가의 사람을 고려하고 있었고, 또한 엘리자베스에겐 많은 구혼이 들어왔다.

2.3. 혼담을 거절하다[편집]

맨 처음에 들어온 건 펠리페 2세와의 혼담이었는데, 이건 그가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것과 영국에서의 그의 평판이 나쁘다는 2가지 이유로 인해 바로 깨졌다. 하지만 그 후에 들어온 혼담의 경우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 때문에 바로 깨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들어온 대표적인 혼담으론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의 대공들[8],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신교도 귀족 로버트 두들리 경, 신교도 국가의 국왕 스웨덴의 에릭 14세 등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혼담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이유로 질질 끌다가 흐지부지되었다.

혼담 가운데에선 같은 시대를 살던 러시아의 뇌제 이반 4세도 있었다. 물론 그의 악명을 잘 알던 그녀는 러시아 사신에게 한마디로 거부했다. 사신은 돌아가면 죽는 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이반 4세는 기분 나쁜 얼굴을 했어도 사신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 대신인지 여왕의 시녀였던 레이디 메리 헤이스팅스에게 청혼을 했다. 영국과의 교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레이디 메리는 '미개한 야만인의 나라[9] 러시아에 가고 싶지 않다'고 떨었다. 여왕도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레이디 메리에게는 '러시아의 차리나(차르의 황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3. 여왕 즉위 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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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는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로 유명하다.[10]

실제로 그녀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이 붙여준 별명은 버진 퀸.(The Virgin Queen, 처녀 여왕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야사나 설이 존재한다. 성적으로 흥분하면 강력한 질 협착증이 찾아와 남성의 검열삭제박살내버린다든가, 생식기가 기형이라거나 하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것은 주로 가톨릭 국가들의 악의에 찬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생식이 불가능하다=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소문이 있어 에스파냐 대사가 특별히 조사를 해 보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녀의 생식 능력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사실은 결혼하지 않았을 뿐 이미 수십 명의 남자를 침대로 끌여들였다는 등의 악질적인 소문도 존재했다. 대부분은 정적들이 퍼트린 험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증명됐지만, 이후로도 소문은 종종 살아남아서 몇몇 인물이 여왕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남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와 같은 시대 인물인 셰익스피어마저 그녀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할 지경이었다.

본인이 예전에, 메리 1세가 추진하던 자신의 정략결혼에 반대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위와 같은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11] 일단 헨리 8세가 국교를 성공회로 갈아치운 후에도 왕족들이 정통 기독교 국가의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는 문제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 제의가 들어와도 임하는 척하면서 성사시키지 않는 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결혼한 여왕"이란 예찬 분위기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인이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사가들 사이에선 크게 부군과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12]와 성장하면서 안 좋은 결혼 관계를 많이 봐 왔기 때문에[13] 결혼을 싫어하게 된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실상 그녀의 결혼은 문제가 많았다. 그녀 자신과 비슷한 신분을 지닌 외국의 왕족은 대부분 가톨릭 교도였기에 이들 중에서 남편을 택할 경우 영국 국교회가 흔들릴 것이며 외세의 간섭 또한 심해질 것이었다. 실제로 메리 1세영국인들에게 인기를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이 때문이었다.[14] 자국의 신하와 결혼하는 것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음이 명백했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명백한 예였다.[15] 그러나 당시의 관념상 여성이, 그것도 한 나라의 여왕이 결혼하지 않고 후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은 두고 두고 문젯거리가 되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외세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미혼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가장 큰 자산이었기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결혼 교섭이 진행될 여지가 있다면 각국에서 침략을 개시할 이유가 없다). 혼담 진행 과정을 보면 혼담이 들어올 때마다 대부분 반가워하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 진전이 이뤄지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종교, 비용, 영토 등) 파토 나게파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왕만이 할 수 있는 스케일의 밀당

각각 근거가 있는 주장이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말한 적이 없으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뭐 겸사겸사 전부 다 이유였을 수도 있고 그냥 참고만 하자.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나중에는 신성한 성녀로써 공경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조차 두지 않은 탓에 국내에서는 계속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여왕이 갑자기 사망하기라도 할 경우 왕위를 둘러싼 혼란은 불 보듯 뻔하거니와 최악의 경우 가톨릭 국가가 지지하는 가톨릭 교도가 왕위에 오르게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신하들에겐 골칫거리였고 신하들은 그녀에게 제발 결혼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여왕은 언제나 결혼할 듯 결혼할 듯 하면서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이 40살이 넘어가가면서부터는 신하들이 여왕의 혼담에 대해서 찬성보다는 반대 입장이 되기 쉬웠는데, 노산으로 인한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출산하다 사망하는 여인이 드물지 않은데, 노산이 예상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하들은 결국 엘리자베스가 오래 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후계에 대한 말에 몹시 민감해서, 누군가 그에 대한 진언을 올리기라도 하면 몹시 격노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후계에 대해서 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후계를 정하는 순간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여성이었고 당시의 가치관으로써는 여성은 남성의 부속적인 존재로, 왕위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걱정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후계자로 지목한 자가 남성이라면 그를 옹립하기 위해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서 퇴위하라는 압박을 받을 것이었다. 여성이어도 그녀보다 젊은 이상 언제 그녀의 자리를 노릴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왕위 계승권을 지닌 왕가의 여성들(특히 아들이 있는 경우)은 언제나 엘리자베스의 경계를 받았다. 실제로 그녀가 즉위하기 전 제인 그레이의 예도 있었다.

그러나 여왕도 알고 신하들은 더 잘(?)알고 있었지만 후계감이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밖에 없다는건 명확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이라 이미 튜더 왕조가 단절이 예정된 상태에서 헨리 8세 후손들은 남지 않았고, 헨리 7세의 여계후손중에서 후계감을 골라야 하는데 가장 최우선 순위는 헨리 7세의 장녀이며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가렛 튜더의 후손이었는데 마가렛 튜더는 앞서 스코틀랜드로 시집가서 제임스 4세와 결혼했고 제임스 6세는 헨리 7세의 고손자이며 마가렛의 증손자였기에 혈통면에서도 최우선 순위였고, 엘리자베스의 항렬상 손자뻘인 6촌으로 나이도 적절했다.

스코틀랜드는 역시 종교개혁으로 장로회가 개신교 국가가 되었기에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과 로마 가톨릭에 치를 떠는 국교회 교도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후계자감이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는 전임 메리 스튜어트 시절 어그로 끈것과 달리 잉글랜드의 대외 정책과 크게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제임스 6세마저 칼뱅파 교리에 따라 교육을 받았었다. 1603년 임종이 가까워졌을때 여왕이 자리에 드러눕자 신하들이 (다 알면서도 혹시나 )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것이냐 물어봤고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왕의 자리는 왕의 후손이 물려받아야지 농부의 자식이 물려받을수 없지 않은가" 라고 하니 신하들이 힌트를 달라고 하자 청원하자 벌컥 화를 내면서 "스코틀랜드의 사촌밖에 더 있냐!"고 일갈했다. 실제론 여왕이 임종 전 비몽사몽할 때 재빠른 신하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오는길에 제임스 왕을 환영하러 나가서 온갖 아부를 떨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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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 말년에 그녀의 총신이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1601년 런던에서 봉기를 일으키려다 실패해 처형당한 사건으로 인해 고령의 여왕은 심신이 지쳐갔고, 결국 1603년 3월 24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여담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 곳의 지명을 버지니아라고 부르도록 했다.[16] 그래서 버지니아에 가리고 골라서 남자 85명과 여자 17명, 총합 102명을 이주시켰으나 모두 풍토병에 걸려서 죽었다.

4. 엘리자베스 시대의 유명인[편집]

해적으로 유명한 사략선장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주로 에스파냐의 선박을 습격하는 등 많은 재보를 모았고 여왕은 이를 매우 치하하여 기사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훗날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가 침공해 왔을 때도 크게 활약했으며 위대한 잉글랜드의 영웅으로 후세까지 회자되었다. 다만 칼레 해전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사략선 승조원들은 대개 역병으로 육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안습.

유명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시 동시대의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연극을 특히 좋아했으며 청교도 신하들이 런던 내의 극장을 폐쇄[17]하자 불호령을 내려 당장 연극을 재개하도록 했을 정도라고 한다.[18] 셰익스피어의 연극 역시 여왕이 무척 좋아했다. 셰익스피어는 여왕의 요청으로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란 작품을 쓰기도 했다.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쓸 때 무척 허겁지겁 만들었는데 여왕은 몹시 즐거워했다고 한다.

5. 이야깃거리[편집]

5.1. 총신들[편집]

엘리자베스 1세는 젊고 유능한 남자들을 총애하여 곁에 두기로 유명했다. 여왕의 총애를 받은 총아들 중 특히 유명한 사람은 여왕의 평생의 친우이자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경, 월터 롤리 경,[19] 뛰어난 시인이자 자처해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뛰어들어 잉글랜드 원정군을 지휘하다 전장에서 전사한 필립 시드니 경[20], 유럽 최초로 조직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평 받으며 무적 함대의 침략을 비롯한 수많은 외교적, 군사적 위기에서 슬기로운 대처를 한 프랜시스 월싱햄, 해적 출신으로 사실상 엘리자베스 1세의 전투력이자 오른팔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 당대의 명재상이자 잉글랜드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21],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던 마운트조이 경, 레스터 백작의 양자[22]이자 여왕의 말년에 특히 총애받았던 에식스 백작[23] 등 많은 청년들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또한 여왕은 프랑스의 앙주 공작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24]

이렇게 기나긴 여왕의 남자(...)들의 목록을 늘어 놓으니 은근히 막장 삘이 나기도 한데, 야사나 아줌마용 사극에서나 등장할 법한 부분은 접어두고, 이렇게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주위에 두고도 그 권력의 핵심을 항상 쥐고 있었다는게 엘리자베스식 리더쉽의 성공적인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의 정책 결정 과정은 주로 국무재상이자 왕실 내각의 수장이었던 벌리 경이 큰 외교적 틀을 세우고, 프랜시스 월싱햄 경 휘하의 마드리드에서 모스크바까지 전 유럽에 포진해 있던 정보와 외교 네트워크가 실무를 집행하면, 사적으로 여왕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레스터 백작이 달콤한 연인의 속삭임(...)으로 여왕을 설득하고 이러한 중신들이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확실하게 무게를 실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스템이 그렇게 안정적이기만 했냐 하니 그것도 아닌 게, 이렇게 대신들이 알아서 일 처리를 하고 군왕은 결정적인 대목에서만 개입하는 시스템은 권력의 핵심이 흩어지고, 대신들 몇몇 중심으로 왕실 내 계파가 형성되는 역효과가 있었으며, 실제로 이런 시스템의 취약함이 드러난 경우가 파리에 주재한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스테포드가 스페인 정부에게 뇌물을 먹고 벌리 남작과 월싱햄 사이의 미묘하게 껄끄러운 관계를 이용해 스페인을 위한 이중 첩자질을 한 경우가 있었다.[25]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와 봉건적 귀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하루도 권력이 안정적인 날이 없었던 16세기, 17세기 유럽 왕실에서 이렇게 걸출한 신하들을 밑에 두고 이러한 인재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신뢰를 주면서도 또 그 잘난 대신들이 왕권을 날로 먹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런 저런 가십거리와 막연한 낭만주의적 역사관 속에 어느 정도 묻힌 감이 있는 군왕이자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의 역사적 위대함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26]

5.2.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의 관계[편집]

야사에 의하면 애인들은 몇 명 있었고, 사학자들도 엘리자베스에게 애인이 아예 없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분위기. 과연 엘리자베스 1세의 애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차고 넘치는데, 대표적인 애인 후보(?)로 어렸을 때부터 친했고 나중엔 그녀의 심복이 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1532~1588)경이 있다.

야사가 아닌 정사에도 그녀와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었음이 드러나 있다. 아직 공주였을 때 형부인 펠리페 2세가 '엘리자베스는 로버트(더들리)와 결혼하지 않으면 처녀로 늙어죽지 싶어.'라고 말했을 정도. 또 엘리자베스의 어릴 적 친구이기도 했던 더들리 경은 그녀가 어릴 때 이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곧잘 말했다 한다.

엘리자베스는 어디를 가든 더들리 경의 거처가 자신의 거처와 바로 옆에 붙어 있도록 했다. 20년 넘도록 외국에 나가기는 커녕 곁에서 잠시 떨어지지도 못하게 눈치 주었으며 심지어 더들리 경은 첫째 부인이던 에이미 더들리(1535~1558)를 청부살인했다는 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다.[27]

에이미 더들리는 지방귀족이던 스펜서 롭사트 준남작의 딸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봐도 남편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서 독살을 염려하여 음식을 늘 개에게 먼저 먹이고 나서 먹는다고 하소연했다. 준남작은 기겁하여 손수 부하들과 에이미 곁을 지키면서 감시했는데 결국 에이미는 1558년 계단에서 넘어져 목뼈가 부려져 죽었다. 당연히 롭사트 준남작은 딸은 살해당했다고 절규하며 평생동안 더들리를 증오했다. 무엇보다 딱 2개뿐인 계단에서 넘어져 목뼈가 부러졌다는 게 이상하고 그녀는 늘 조심성있게 다녔으며 죽음을 무서워했기에 이렇게 죽는다는 걸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28]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를 좋아했지만 남편으로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청혼을 받아줄 듯 말 듯 어장 관리하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았다. 혹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자신보다 신분 낮은 남편을 맞아보았자 이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사실 더들리 경을 견제하는 대부분의 다른 귀족들이 거품을 물고 반대했다. 이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더들리는 반역자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29]의 아들이었다. 그런데다 그 자신도 오만한 인물이라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모두가 그녀가 더들리 경과 결혼하는 것은 제 발로 왕관을 내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전 유럽에선 로버트 더들리와 엘리자베스 1세가 서로 짜고 에이미 더들리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해 스페인이나 프랑스, 러시아 대사관의 영국 대사들이 여기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대놓고 당신네 여왕이 신하와 결혼하려고 신하의 죄 없는 아내를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면서요? 묻는다고 하소연을 할 정도로 입소문에 시달렸다. 이런 가운데 더들리와 결혼했다면 그야말로 온 유럽에서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재미있어 할 게 뻔했다.게다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하다가 거부당하여 이를 갈던 러시아이반 4세는이 소문을 믿고 신하랑 결혼하고 싶어 짐을 거부했구나라고 입만 열면 그녀를 헐뜯었으니 정말 결혼했다면 좋아라 내가 옳았다고 했을 것이다.

더불어 롭사트 준남작은 지방 작은 귀족이었지만 딸의 죽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런던에까지 와서 딸이 살해당했다고 하소연하면서 엘리자베스 1세를 아니꼽게 여기던 고위 귀족들이 그를 돕는다는 소문까지 자자했다. 아무리 여왕이라고 해도 고위 귀족들을 함부로 건드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준남작을 처형하거나 하면 되려 덮어버리고자 죽였다는 역효과가 날 게 뻔했다.

더들리 경은 12년 동안 재혼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길 기다렸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여왕의 친척과 재혼했다. 이 결혼 후 그녀는 곧바로 여왕의 분노를 사서 궁중에서 쫓겨났고 엘리자베스는 평생 그녀를 증오했다(…). 물론 한참 후엔 다시 그를 용서하고 더들리 경이 그토록 원했던 네덜란드 파견군 사령관에도 임명했다. 결과는 그저 그랬지만 더들리 경은 인품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평생 여왕에게 헌신하며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고, 나중에 더들리 경이 급사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5.3. 메리 스튜어트와의 관계[편집]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의 오촌 조카딸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 단리 경을 살해하고 보스웰 백작과 간통한 혐의로 폐위당하고 아들 제임스가 대신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참고로 원래 그녀의 친절한 언니를 자처하던 엘리자베스가 메리의 남편으로 다루기 쉬운 남자였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권한 바 있었다. 그러면서 더들리와 결혼해 낳은 후사에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준다는 조건도 함께 제시했다.[30] 하지만 더들리가 공공연히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알려진데다 반역자의 후손인데다 왕가와 혈연으로 이어지지도 않은 평범한 귀족에 불과했기에 메리는 물론 그녀의 신하들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까지도 엘리자베스의 저 제안을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저 제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메리가 풍채가 좋다는 이유로[31] 고른 남편이 잉글랜드 궁정에 있던 단리 경이었다. 하지만 단리 경 또한 혈통상 잉글랜드의 왕권을 주장할 여지가 아주 없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 결혼으로 엘리자베스의 메리에 대한 감정이 더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단리 경이 결혼 직후부터 메리와 사이가 틀어져 메리를 학대했기 때문에 메리로서는 엘리자베스를 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사생활 측면에서도 최악의 패를 뽑고 만 셈.

이후 감금되어 있던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잉글랜드로 왔으나 위에도 언급된 그녀가 가진 잠재적인 위협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일단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유폐시킨 후 감시자를 붙였다.[32]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의 사이는 매우 미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평생 열등감과 우월감이 교차되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메리는 태어나자마자 여왕이었고, 한 때는 프랑스의 왕비였으며 왕족으로서 평생 대접받았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이 생전에 평판이 좋지 못했고, 어머니의 사후 사생아로 격하당하여 어린 시절을 상당히 불우하게 보냈다. 그러나 후에는 상황이 뒤바뀌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나라에서 지지받는 국왕이었지만 메리는 평판이 나빴고 이 당시엔 아예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적으로는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가 가지지 못했던 외모와 교양, 귀족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구도 많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히스테릭하여 친구를 쉽게 만들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학문을 가까이 하고[33] 각종 국내외 현안들에 통달한 반면 메리는 어려운 학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데다[34] 어린 시절 내내 프랑스에서 살다 보니 영어는 성인이 되어서야 배우기 시작했다.[35] 엘리자베스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때로 국사를 위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절제하기도 했으나 메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자신의 의견이 신하에게 반대 당하면 한나절을 사실(私室)에 틀어박혀 지칠 때까지 울거나 드러눕곤 했다.

헨리 8세앤 불린의 사후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격하시켰다. 나중에 캐서린 파 덕분에 복권되었고 이에 헨리 8세가 에드워드, 메리에 이어 거명했기에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지만, 가톨릭 교도인 메리 스튜어트에게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재위기간 내내 가톨릭 쪽으로부터 왕위를 위협받았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스튜어트와의 약혼이 깨진 뒤 분통을 터뜨린 헨리 8세가 누이 마거릿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버렸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당시 엘리자베스 1세를 제외하면 가장 신분이 높은 왕위 계승권자는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였다.

어찌되었건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잉글랜드에 머물게 되기까지, 그녀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내내 스코틀랜드와의 사이는 불편했다. 마냥 불편한 사이만은 아니었고 때로는 일시적으로 호전되기도 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여러 번 서신을 주고 받으며 한때 회동을 가지기로 한 적도 있었으나 무산되고 말았고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스코틀랜드 본토에서 결국 벌리, 월싱햄 등 잉글랜드 내 강경 개신교 세력의 사주를 받은 반프랑스 칼뱅파 귀족들에 의해 메리는 폐위되고 잉글랜드로 망명을 오게 된다. 그런데 또 상황이 메리가 본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도망오게 되자, 엘리자베스는 또 나름 혈족이자 같은 군왕으로서의 유대감을 느꼈는지,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히는 벌리와 월싱햄의 주장을 물리치고 또 거절하며 무려 18년의 세월을 유폐된 것 치고 나름 안락한 생활을 메리에게 보장해 주었다. 벌리 경이나 월싱햄이나 이 시기를 전후로 초상화에서 늙은 점이 확 드러나며 벌리는 이 대목에서 "여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미치겠다"라고 말했다(...). 정치적인 면에서 해석하자면 엘리자베스는 본인 또한 강한 신하들을 거느린 군왕의 입장에서 아무리 자기에게 위협이 된다 한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군왕을 폐위하고 죽이려고 한다'라는 발상 자체를 굉장히 불쾌하게 해석했고, 또 엘리자베스 사후 엘리자베스 만큼의 통솔력을 가지지 못한 스튜어트가의 왕들이 제위하자 그녀의 이러한 예감은 영국 내전과 찰스 1세의 사형으로 들어 맞았다.

결국 메리는 반란을 도모한 혐의로 사형당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가 훗날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잇게 되었다.

5.4. 기타[편집]

프랜시스 베이컨이 엘리자베스 1세의 숨겨진 사생아고, 베이컨이 때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는 주장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설을 부정하고 있다.[36]

엘리자베스 1세가 사실 가짜라는 주장이 있다. 이 부분은 2015년 3월 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그런데 서프라이즈에 나왔다고 해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1. 집사와 유모가 사라진 점, 2. 뒤바뀐 필체, 3. 갑자기 완치된 충지등, 의혹스러운 부분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없다면 무조건 음모론으로 몰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뒤바뀐 엘리자베스 1세가 남자라는 주장도 있다.[37] 위 기사의 내용 중 비슬리에서 매년 5월에 이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고 있다고 나오는데, 이 축제는 바로 남자아이를 여장시키는 것이다.

소설 '드라큘라'로 유명한 작가인 브람 스토커(Bram Stoker)가 이것을 소재로 1910년에 소설인 '희대의 사기극(Famous Impostors)'을 내놓았다. 이것 뿐만 아니라 역사 추리 소설가 스티브 베리가 쓴 소설인 The King's Deception에서도 다루었다. 물론 이 설도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 엘리자베스 1세가 안드로겐 불응 증후군 환자라는 주장도 있다. 그 이유로는 위의 성격 항목에서 보듯이 그녀가 보통 여자와는 다르게 매우 활발하고 승마와 사냥 등 남성적인 취미를 즐겼고 위 유전병의 보편적인 신체적 특징 중 하나인 가늘고 큰 손을 가졌다는 이유가 있다. 게다가 이런 유전병 때문에 일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고 한다.

6. 인간 엘리자베스[편집]

6.1. 사자같이 불같은 성격[편집]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부친 헨리 8세를 닮았는지 무척이나 불같은 성격이었다. 당시의 보수적 시대상이 원하는 여성답지 않은 강건한 성격으로, 그녀가 격노하면 신하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고. 심지어는 회의 중에 격노하여 옥좌를 박차고 나가거나 국무대신의 을 치거나 슬리퍼를 집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오랫동안 꽁해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잘못한 후에는 빠르게 고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38] 게다가 체격도 컸으니 시너지효과를 일으켜서 그녀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여왕의 키가 170cm가 넘었다고 했는데, 당시 남성들의 평균키도 170cm가 안 되던 시절이다.

말년에도 그 성정은 여전해, 에식스 백작의 반란 사건 때 연루되어 변명을 하러 온 해링턴 경에게 무시무시한 분노를 퍼부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과연 헨리 8세의 딸이다"는 말이 나왔다고.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신하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싶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내가 남자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자신에 대해서도 언제나 "내가 사자는 아니지만 사자 새끼임에는 분명하다"[39]고 즐겨 말했으며, 스페인과의 전쟁 당시 포고문에서는 "나의 몸은 여인의 것이나 나의 심장은 잉글랜드 국왕의 것이다."라고 언명하기도 했다.

여왕이 즉위했을 때 여성에 대한 편견[40]에 가득 찬 신하들은 처음에는 여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으나 곧 그녀의 남다른 판단력과 정치력에 감복하여 여왕을 남성 이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육체적으로도 강건해서 승마사냥을 즐겨했으며 매일 강도 높은 운동을 했다. 궁전의 회랑이나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 특히 갤리어드(춤곡의 일종)를 즐겨 추었고 사망하던 해에 이르기까지 코란토 춤을 시연해 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신경질적인 면도 많았고 무척 까다로운 성품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한 면도 있어, 중대한 일은 일단 무조건 결정을 미루었다. 결혼에 대한 문제도 워낙 이런 식으로 결단을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 성사되지 못한 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엘리자베스의 신하이자 유능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은 이런 여왕의 면에는 진저리를 치며, "여왕 폐하의 우유부단함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고까지 했다고.

6.2. 성실한 공부광[편집]

어려서부터 학업에 열중한 걸로 유명했다. 하루에 3시간씩 책을 읽었으며 타키투스플루타르크고대 로마 철학자를 번역하는 것을 소일로 삼았다. 특히 그녀는 라틴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웨일즈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 이상을 유창하게 쓰고 말하는 등 어학 쪽으로 재능이 출중했다고 한다.

이는 외교관의 딸로 태어났던 생모 앤 불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귀족 여성들도 남성 못지 않게 교육시키는 풍조 덕분에 그녀 역시 방대한 지식을 쌓았으며, 여왕이 되어서도 각종 국내외 현안에 통달하여 즉위 초기 그녀를 여성이라 얕잡아보고 있던 고문관들을 감탄시켰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궁정 방마다 책을 가득 채워 놓아 혹자는 '잉글랜드 궁정에 처음 들어가 본 사람은 왕궁이 아니라 대학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여왕의 시녀들도 식견이 넓어야 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전을 번역하거나 성경을 읽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는 여왕을 위해 난해한 학술서를 큰 소리로 낭독하는 것이었다.

재위 말년의 일이다. 폴란드 대사가 방문하여 엘리자베스의 어전에서 무례하게도 의전을 무시하고 라틴어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41] 감히 여왕에게 있을 수 없는 위협적인 표정과 태도에 모두가 기가 막혀했으나 여왕은 즉시 옥좌를 박차고 일어나 유창한 라틴어로 대사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여왕이 "맙소사, 경들. 오늘 하도 안 쓴 지 오래되어 녹슬어 있던 라틴어를 본의 아니게 연습해 보았다!"라고 외치자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아 너무 흥분해서 라틴어가 나왔네요 그분의 역린을 건드려서는 안돼

6.3. 백성에겐 자비로운 군주[편집]

백성들에게는 당시의 군주상과는 대조적인 자비로운 군주로, 여왕은 잉글랜드 왕실의 연례 행사인 국내 순행을 매우 즐겼다. 당시의 도로 사정을 생각해보면 마냥 즐거울 리만은 없는 험난한 여정이었으나 그녀는 연례 순행을 매우 즐거워했고 가는 곳마다 많은 환영을 받았다. 여왕이 가는 도시마다 각종 행사와 환영회가 벌어졌으며 이후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여왕은 만나는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무례한 태도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런 소탈한 면이 백성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한국에서 숙종, 메리가 경종에 비견되기도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개인적 성품은 영조와 비슷해 보인다. 까다롭고 불 같으면서도 소탈한 성품이었던 것도 그렇고, 백성들을 자주 만났던 것도 그렇고, 재위기간이 길었던 것 등. 다행히 뒤주에 가둘 자식은 없었다.

6.4. 여장부의 외모 관리[편집]

참고로 현재 남은 초상화를 보면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쪽을 더 많이 닮았으며 아름답다기보다는 잘생긴 여장부형이었다 전해진다. 아버지에게서 붉은빛이 도는 금발과 매부리코를, 어머니에게서 검은 눈과 가무잡잡한 피부를 물려받은 듯하다.

즉위 후에 천연두를 앓았기에 얼굴에 다소 흉터가 생겼지만 흉한 정도는 아니었고, 어머니 앤 불린을 닮아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달린 아름다운 손이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존 헤이워드 경에 따르면 '호리호리하고 자세가 곧았다. 머리카락은 연한 금발에 가까웠고, 이마가 넓고 매끈했으며, 눈은 근시였으나 생기가 넘치며 상냥했고, 코는 약간 매부리코였다. 얼굴형은 좀 길었으나 감탄할 만한 미모를 자랑했고, 위엄과 수줍음이 적절이 조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키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또한 그 시대에는 키란 곧 군주의 위엄이라고 인식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키를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메리 스튜어트와 자신 둘 중에 누가 더 키가 큰가를 묻자[42] 그 전까지는 엘리자베스 1세의 자기 자랑에 적당히 맞장구쳤던 사신이 그 말에는 "우리 여왕께서 더 크십니다."라고 했고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놀라서 "그럼 너무 크군. 내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말일세."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참고로 메리 스튜어트는 180cm가 넘었다. 16세기 여자가.

몸매에도 신경을 썼기 때문에 운동 뿐만 아니라 식사에도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는데, 당시 유행하던 과식 풍조와는 달리 때를 정해두고 먹거나 하지 않고 배고플 때마다 허기를 잊을 정도로 조금씩 먹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달콤한 것을 많이 먹으면 입냄새 또한 달콤해질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것을 매우 좋아했다는 것.

덕분에 내내 치통으로 고생을 했다. 1578년 '에는 듯한' 치통에 시달렸음에도 '외과적 수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때 에일머 런던 주교가 용감히 나서서 그렇게 끔찍한 치료가 아니라며, 여왕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충치 하나를 먼저 뽑겠다고 제안했다. 1578년 12월 그가 치료받는 모습을 본 여왕은 9개월간의 고통 끝에 드디어 자신의 치아를 뽑아도 좋다고 윤허했다.

그 이후 치아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앞에서는 금기가 되었고, 펠리페 왕이 충치를 남김없이 뽑은 다음 죽만 먹고 살고 있다는 말이 들리자 여왕은 절대 더는 이를 뽑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때문에 평생 치통과 잇몸병에 시달렸으며, 그로 인해 얼굴과 목에 신경통이 생겼다. 당시 자료를 보면 뺨이 부풀었다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종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훗날 한 외국 사절은 말년의 그녀를 보고 "치아가 매우 누렇고 고르지 못하며 대부분 빠져 있었다."고 했지만,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 잃지는 않았다.

화장품은 달걀 흰자, 달걀껍질 가루, 명반, 붕사, 양귀비 씨 등을 섞어 만든 로션을 발라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마저럼(꿀풀 식물) 또는 장미수를 향수로 썼다. 머리카락은 나뭇재와 물을 섞은 잿물로 감았다고 한다.

7. 평가[편집]

7.1. 내정[편집]

여왕은 아버지인 선왕 헨리 8세 이후로 빈곤했던 나라의 재정을 꾸려가기 위해 왕궁 살림을 최소한도로 줄이고 검약을 실천했다. 덕분에 당시 빈곤하던 왕실과 잉글랜드의 재정을 많이 살릴 수 있었고 빚도 상당히 줄였다. 물론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 관리들의 임금은 한 푼도 오르지 않았다. 안습

이러한 검약은 왕실 재산을 최대한 매각하고, 영지나 궁전을 귀족들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그녀는 보석 컬렉션과 드레스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살아있던 당시 이미 수천 벌의 가운을 갖고 있었으며 방대한 보석 컬렉션은 교황마저도 탐을 냈을 정도라고 한다. 성직자가 뭐하는 짓이야?[43] 특히 진주를 많이 수집했는데 당시 진주는 아주 귀한 보석이라서 어지간한 왕족이나 귀족도 갖기 힘든 것이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는 그걸 대량으로 수집했다. 초상화에도 진주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당시 정치의 풍조상 궁정 내에는 여러 파벌이 있었으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엘리자베스는 때로 변덕을 부리거나 은전을 내림으로써 이러한 파벌들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견제했다. 하지만 통치 말년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애를 먹어야 했다.

7.2. 종교[편집]

종교적으로는 신교도이긴 한데 당시 영국에는 신교도란 말보다는 국교회(성공회)라고 칭했다.. 현재 개신교의 원류(?)격인 청교도들과 국교회의 성향은 일치하지 않고, 국교회와 가톨릭 구분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시대이고 신앙이라기보단 정치적인 문제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 메리 1세가 복음주의자들(국교회, 청교도)들을 화끈하게 탄압한것처럼 엘리자베스시대에도 가톨릭 탄압만으로 나오는데 즉위 초기에는 메리시대 탄압받던 국교회와 복음주의자들의 소망(?)과 달리 가톨릭 교회의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강대국 스페인을 자극하지 않을 입장으로 종교 타협 정책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1558년 2차 수장령을 내려서 영국 교회의 수장직을 포기하였고,[44] 1559년 프로테스탄트 통일령(Protestant Act of Uniformity)를 선포하여 귀족들은 종교적 맹세를 면제받고,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즉위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치적과 성과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것이다. 이 때문에 생모 앤 불린이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에게 바빌론의 창녀나 이세벨급 마녀 타령을 들었고 엘리자베스도 악마의 사생아 취급을 받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12년 넘게 1570년 까지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을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신교 탄압 성향과 이단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주장하던 교황 바오로 4세 시기였다는 것. 이것은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지만 교황청에서는 엘리자베스의 종교 정책을 봐서 영국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가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가톨릭 탄압은 형부(?)였던 펠리페 2세의 영국 침공 전후로 하여 가톨릭 교도는 매국노이며 외국 세력의 앞잡이 역할을 한다고 국민적인 공분이 일어 났기 때문에 섵부른 원정으로 영국에서 가톨릭 교회는 오히려 큰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앞서 즉위 초반부터 연간 60명을 태워죽인 언니의 치세와 달리 집권초 1570년까지 12년동안 단 1명의 가톨릭 처형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후 33년 동안 9명을 처형하고 9명이 옥사했는데 엘리자베스 시대는 편견과 달리 상대적으로 종교적 관용이 있었다.

1570년 가톨릭에서 희망을 버리고 파문을 내리고 스페인의 침공이 임박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이에 대응하여 헨리 8세 시절처럼 1584년 종교적인 일로 로마 교황청에 상소(上訴)하는 법을 폐지하고, 가톨릭 교회의 사제를 반역자로 정죄하고 벌한다는 법을 제정하였다. 자신의 기반이 성공회교도들의 지지였기 때문에 가톨릭에 좋은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국내 청교도들의 내부 반발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어디까지나 중도를 강조했으며 아버지처럼 대놓고 가톨릭을 박해하지는 않았다. 물론 자국의 상황에 따라 비밀리에 에스파냐에 적대적인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을 지원하거나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을 지원하는 일은 있었다.

중도를 강조했기 때문인지 그녀 자신은 그다지 엄격한 종교인은 아니었다. 앞서 서술한 극장 폐쇄에 관한 일화도 그렇고, 그녀 자신은 광적인 청교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시절 재임한 대주교 중 그린달 대주교는 강경한 청교도였는데, 그로 인해 엘리자베스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엘리자베스는 대주교를 램베스 궁에 가택연금시켜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한동안 영국 교회에는 신앙의 중심이 부재하는 결과를 빚었다.

신교도들은 성인 공경도 우상 숭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왕가의 수호 성인인 성 조지 공경을 오히려 부추겼다. 또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구교도들을 보며 크게 기뻐하기도 했는데, 한때 에스파냐 대사와 길을 가던 중 한 사내가 그녀의 가마로 달려와 외쳤다. "여왕 폐하 만세! 사념을 품은 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그러자 여왕은 에스파냐 대사를 보고 말했다. "이 선한 자는 구교의 성직자일세."

엘리자베스의 치세 하에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종교적 이유로 사형당했다고 하는데, 메리 1세 때 사형당했다는 사람들의 수가 과장되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역시 과장이다. 메리시대 5년간 개신교도 284명 처형, 34명 옥사인데 비하여 엘리자베스 시대는 재위기간이 45년임에도 9명 처형, 9명이 옥사한 것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시킨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가톨릭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교도들을 처형하는 것은 일종의 자극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45] 여왕은 주로 벌금형이나 구금을 선호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치세에 대규모 처형이 있었던 것은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본보기를 위해 주동자 등의 처형이 있었을 때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 반대되는 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헌병 활동과 고문헨리 8세 때와 함께 영국 역사에서 최고조로 이르렀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우외환 속에 봉기 조짐이 일어나던 1595년~1598년의 일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볼 면도 있었으나, 톱클리크와 같은 이들이 악명높은 고문을 자행한 것도 사실이다. 반면, 가톨릭 교도들이 죽을 짓을 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달라서, 상당수 가톨릭 교도들은 잉글랜드의 방어를 위해 자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장 해제와 (적은 수이긴 했지만) 처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숫자상으로 볼때 근거가 약하다.. 앞서 처형자 숫자만 봐도 메리 1세시기와 넘사벽이고 그런 논리라면 메리 1세가 정통성과 기반이 취약해서 더 많이 처형하고 더 많이 학살하고 더 많이 고문 추방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앞서 엄격한 개신교 칼뱅파 교육을 받고 자라난 에드워드 6세 시절과 엘리자베스 1세시절에는 가톨릭 교도 뿐만아니라 개신교 과격파에 해당하는 재세례파와, 대륙에서도 탄압받던 유니테리언 까지 처형했었다.즉 가톨릭 교도들만 본보기로 처형한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헨리 8세는 가톨릭 교도들 60여명을 반역죄로 처형하긴 했지만 그보다 좀더 많은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을 이단이라며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화형시켰다. 영국 국교회와 가톨릭만이 대척점이 아니라 국교회나 가톨릭 용인파, 복음주의 성향, 대륙의 신학에 영향을 깊게받은 청교도들 까지 복잡한 양상의 스펙트럼이 존재했고 이들 또한 목소리를 크게내고 탄압받고 했기 때문에 가톨릭만을 주적으로 삼는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한편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 12년간 처형자가 없다가 1570년대 이후 처형자가 생긴건 노퍽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메리 스튜어트를 공동왕으로 추대하고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 하려는 음모가 발생하고 이를 소탕하러 나선 과정에서 생긴것이 었고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하고 나선 가톨릭 본산 교황청에서 엘리자베스를 가짜왕으로 선포하고 가톨릭국가 스페인과 프랑스와 준전시 상태에 들어간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영국을 떠났나? 그렇지 않다. 많은 수의 가톨릭 교도들은 여전히 종교적으로 그다지 열성적 개신교 신앙이 아닌 엘리자베스에게 충성했고 엘리자베스도 1570년 이후 영국 국교회 예배 불참석시 귀족들에게 부과한 벌금을 올릴망정 아예 가톨릭 신앙을 금지한적이 없었다.


이렇게 말이 엇갈리는 건 이 시기 유럽에서 종교와 정치는 결코 딱딱 나누어지는 개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건만 하더라도 엘리자베스는 개인적으로 그녀의 가톨릭 신앙에 대해 깊은 의심과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실제로 정치적인 행동도 그에 기반해 스코틀랜드 내부의 칼뱅파 귀족들과 손 잡고 메리를 필두로 한 친프랑스파 가톨릭계 귀족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정작 벌리 경, 프랜시스 월싱햄 등이 10년 넘게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닦달할 때는 되려 같은 군왕의 입장에서 (자국이던 타국이던) "신하들의 손에 그 왕위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노골적으로 불쾌해 하며 더 과격한 개신교파 중신들을 미치게 만들었다.[46]

참고로 종교와 연관되어서 영국 요리원흉의 원흉이 되는데, 기존의 느슨했던 음식에 대한 반응이 청교도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엄해져 부랑자법을 통해 요리사를 부랑자하고 똑같이 보아 처형시키게 하였다(...) 덕분에 요리사들은 가톨릭 교도들과 함께 처형당하거나 해외로 나가거나 2지선다의 운명에 처해졌다. 영국 요리의 그 끔찍함은 산업혁명이나 세계대전으로 인해 완성되었지만, 그 근원은 엘리자베스 시대 때 생겨난 거라 생각하면 된다.

7.3. 외정[편집]

그러나 이렇게 국가 재정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세 유럽 국가 경제의 최악의 재앙이었던 전쟁의 마수만은 엘리자베스도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그녀가 상대한 스페인의 경우 당시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라는 무려 4개 대륙에 중남미의 귀금속, 벨기에(스페인 왕령 네덜란드)의 상업, 이탈리아의 공업, 동남아시아의 무역과 향신료라는 방대한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어 무적 함대라는 엄청난 병크에도 불구하고 일이년 만에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반면, 비교적 소국이었던 잉글랜드는 이러한 압도적인 물량의 기반이 없었다.[47] 말년에 들어 점점 경제가 어려워지고, 해외 원정의 실패로 경제가 피폐해져 죽을 때는 상당한 액수의 빚을 남겼다. 그렇기에 이미 죽기 직전에는 스튜어트 왕가가 있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아부를 떠는 이들이 늘었으며, 엘리자베스 자신도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그리 고평가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7.4. 총평[편집]

여자에다 사생아라는 논란 때문에 입지적으로는 불안했으나 왕족에 대한 충성심과 백성들의 지지, 현명한 통치로 끝까지 왕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백성들과 접촉하기를 즐겨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내를 여러 번 연례 순행하기도 했다. 이는 백성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군주에 대한 신뢰감과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과 인플레이션, 실업으로 백성들의 삶 자체는 1300년대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도 있었고, 실제로 전쟁중인 1595~1597년엔 여러차례 식량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의 검소한 태도와 여러차례의 순행은 그런 흉흉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는 평이 있을 정도. 하지만 뒤의 스튜어트 왕가가 각종 혁명에 시달린 나머지 해가 갈수록 엘리자베스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게 되었다.[48]

무엇보다 비단 엘리자베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헨리 7세의 시절 부터 잉글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집중화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순수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생산하는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지출은 엄청나게 먹어대는 왕실 내각과 휘하의 관료 조직의 비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독립 전쟁 지원과 대 스페인 전쟁 등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시절 이러한 왕실 조직의 비대화는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물론 이는 이 시기 자체가 잉글랜드에게 있어 백년 전쟁 이후 처음으로 외딴 섬나라가 아닌 유럽 정치 무대 속 하나의 열강으로 등극하는 시점이었으니 비단 엘리자베스의 책임만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결국 엘리자베스 시절 감당 못하게 커진 왕실 조직과 이에 대해 튜더 왕조 초기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의회와 지방 귀족과 젠트리 세력의 반발은 결국 훗날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이라는 격란의 원인이 된다.[49]

사실 엘리자베스 본인의 치세만 하더라도 내부 가톨릭 파벌과 메리 스튜어트를 기반으로 한 수많은 반역 음모, 봉건적 자치권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북부 귀족들의 반란 등 내적으로도 충분히 굴곡이 많은 시대였다. 여기서 엘라자베스가 단순한 호기심 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적으로 굉장한 명군이었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는 점이 이러한 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잘 봉합하고 국가가 나아갈 뚜렷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단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외세에 시달리고 있던 잉글랜드의 불안한 때에 즉위한 후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통치하였고,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의 침략을 막아내어 영국 해군의 위명을 떨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버지에 못지 않을 만큼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남기기도 했으며 잉글랜드를 이끈 위대한 여왕으로 현재까지도 칭송받는 군주이다. 사생활에 관련된 이런 저런 여담들과 무적 함대니 국교회 성립이니 하는 단발적 사건들 때문에 진지한 그 치세의 역사적 의미가 묻히는 감이 있는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고(...)

사회복지의 역사에 반드시 나오는 왕이 엘리자베스 1세라는것도 눈여겨봐야하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구빈법이라 일컬어지는 이 법은 1601년에 시행되어 많은 빈민을 살렸다. 노동능력의 유무와 의지에 따라 구분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이 법안이 사회복지의 시초가 되었다는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초수급권, 조건부수급권과 같은 의미의 복지 서비스를 왕조 시대의 17세기에 이미 기초가 되는 법안을 만들어 시행했다는것이다.

8. 타 매체에서의 엘리자베스 1세[편집]

이후 닥터후 50주년 스페셜에서 등장하는데, 10대 닥터와 데이트를 하다가 타고 오던 말이 자이곤이었다던가, 그 자이곤이 자신으로 변신했다던가 하는 기이한 수모를 겪는다.

자신으로 변장한 자이곤에 의해 처리되어 10대, 11대, 그리고 전쟁의 닥터를 런던 탑에 가두나, 사실 처리된 건 자이곤쪽이고 엘리자베스 1세가 일부러 닥터들을 끌고 오기 위해 한 일. 자이곤들의 계획을 알려주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겸사겸사 10대 닥터와 결혼을 치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사건이 해결되는 대로 다시 돌아와달라고 했지만, 엘리자베스가 노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수 명령을 내리는 게 어쩌면 매우 당연한 반응(...)

  •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지배자. 4에서는 재정적, 철학적이라는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빠른 테크와 잘 뽑혀 나오는 위인으로 고난이도에서도 적절한 플레이를 할 수 있고 5에서는 해상 유닛의 이동성이 2타일 증가한다. 초반 해상에서의 정찰에 이점이 있으며 빠른 속도로 확장, 침략, 점령이 용이하다. 자세한 건 문명 5/등장 문명/영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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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히 튜더스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Laoise Murray. 튜더스에서는 메리보다는 주목받지는 못한다. 아버지가 갈아치우는 왕비들에 대해서는 별 의견이 없는 듯 보였으나, 시즌 4에서 언니 메리에게 둘의 왕위 계승권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언니에게 신에게 맹세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 것을 선언했다. 나름 불만은 없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왕비를 갈아치우는 꼴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안나 클리브스가 평하기를 "총명함이 감춰지지 않고 드러나는 아이"라는 평을 받았다.

게다가 드라마 자체가 메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데 반해, 반대로 엘리자베스는 차갑고 냉철하며 이성적이다. 계속 결혼에 실패하면서도 결혼을 원했던 메리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왕위 계승권이 회복되자마자 독신 선언을 하고, 아버지인 헨리 8세가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눌때도 울면서 죽지 말라고 하는 메리와 달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돌아간다.

  •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 영국 편에서 그녀를 엄청 칭송하면서 반대로 메리는 악녀같이 그려내고 왜곡했다. 무엇보다 잘못된 건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을 검소하게 지내며 재정적으로 문제 없었다고 그린 것. 위의 글들을 보면 이게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 소설 트리니티 블러드의 히로인 에스델 블랑셰는 엘리자베스 1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알비온에서의 가족 관계나 나중에 여왕으로 즉위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 가에타노 도니제티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52]에서는 엘리자베타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53] 거기다 히로인인데, 이미 70세의 노파 할머니(...). 심지어 내연남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연인 관계로 기록된 에식스 백작이다. 근데, 여기서 에식스 백작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 밝혀서 감금된 상태이지만, 여왕은 거기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에식스 백작이 자신을 다시 사랑해 줄 거라는 바람을 가진 여인으로 그려진다.[54] 근데,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거기에 열 받아서 곧바로 사형 집행서에 사인해버리는 질투녀(...)[55]. 하지만, 마지막에 에식스 백작이 처형되자 이에 후회하게 되고, 곧바로 몸이 나빠져[56] 스코틀랜드의 제임스(제임스 1세)에게 물려주라는 유언을 하는 것으로 오페라의 끝맺음을 장식한다. 오페라 자체는 벨 칸토답게 실제 역사보다는 멜로물이 주로 이뤄졌다는 평.

  • 도니제티의 또 다른 오페라이자 메리 스튜어트의 최후를 그린 마리아 스투아르다에선 위의 오페라보다 젊었을 적의 모습이며, 여기서도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에식스 백작의 양아버지였던 로버트 레스터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타이틀롤 메리 스튜어트를 페이크 주인공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메리의 본격적인 등장은 2막부터니까...안습 근데, 실러의 희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나 로베르토 데브뢰와 마찬가지로 픽션이 첨가되어 있다. 여기서 레스터는 감옥에 갇힌 메리 스튜어트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에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당연히 메리에 대해서 질투하게 되고, 이에 메리 사형 집행서에 사인까지 해준 다음 레스터 경에게 메리의 죽음을 직접 보라는 냉정한 말까지 한다. 본격, 질투의 화신 엘리자베스 1세 이 오페라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것은 실제 역사에서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메리 스튜어트와의 대면에서 서로 신경전을 부리는 부분인데, 이는 실러의 가상으로 도니제티가 이 장면을 아주 화끈한 이중창으로 만들어 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57]

  • 어쌔신 크리드: 레벨레이션에서도 언급된다. 여기서는 암살단과 대립하는 템플 기사단의 일원인 걸로 나오며, 선악과를 가져간 것도 그녀라는 설정.


https://players-shakespeare.com/wp-content/uploads/2015/06/Queen-Elizabeth-I.jpg

  •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는 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007 시리즈의 M으로 유명한 주디 덴치가 연기했는데, 조연이지만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했다. 이 연기로 인해 주디 덴치는 1998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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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자르 카푸르 감독이 연출한 1998년 영화 <엘리자베스>와 2007년 개봉한 <골든 에이지:엘리자베스>에서 케이트 블랜칫이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특히 1998년도 작은 케이트 블랜칫의 본격 데뷔작이다.

  • 소꿉친구였던 로버트 더들리 경과 사랑에 빠지나 메리 1세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여왕으로 즉위해 원하지 않는 이별을 하고 여러 고난 끝에 역경을 딛고 점차 진정한 영국의 여왕으로 거듭나는 엘리자베스의 일생을 그려낸것이 1998년도 작의 내용.

여담이지만 케이트 블랜칫이 엘리자베스 1세역을 맡게되자 웬 듣보잡이 저런 중요한 역을 맡냐면서 사람들은 흥행 실패를 예상하였으나 결과는 엄청난 흥행이었고 블랜칫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 9년 뒤 블랜칫은 세자르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춰 <골든 에이지:엘리자베스>에서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는다. 2007년 작의 주된 배경은 칼레 해전이며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엘리자베스 1세의 불꽃튀는 대결이 주요 내용.

재미있는 점은 1998년 작에서 로버트 더들리 경과 사랑에 빠졌던 엘리자베스가 2007년에는 영국 사략선 선장 월터 라일리 경과 연애 플래그가 선다. 칼레 해전이라면 흔히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떠올리는 이들에게는 생소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월터 롤리 경은 서구권에서는 대단히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 잘해봐야 탐험가 내지는 사략선장인 드레이크에 비해, 롤리는 탐험가이자 군인이면서 동시에 학자, 역사가로 이름 높은 인물로 결코 드레이크에게 밀리지 않는다. 더욱이 북아메리카에 처음 정착을 시도하고 그 지역을 엘리자베스와 관련이 높은 이름인 '버지니아'로 명명한 게 롤리 경임을 생각하면 결코 듣보잡을 내세운 것이 아닌 것. 참고로 오늘날까지 해양력의 가치를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곧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을 한 주인공도 롤리 경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칼레 해전에서는 영국이 화공으로 아르마다(스페인 무적 함대)를 개발살내버리지만 실제로 아르마다가 패배한 이유는 악천후에 휘말려서 아일랜드 쪽으로 빙 돌아서 본토로 퇴각하려다 박살난 것이다. 실제로 전투로 격침된 배는 5척도 되지 않으며 영국의 피해도 그리 치명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펠리페 2세는 아르마다의 전멸 소식을 듣고도 별로 실망하지 않았으며 곧 비슷한 규모의 함대를 재건한다. 나라를 파산상태로 몰고 가긴 했지만

아무튼 2007년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엘리자베스의 치세 중기, 엘리자베스는 처녀의 몸을 지킬 것을 표명하며 결혼에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그런 여왕을 못마땅해한 주교들과 신하들은 끈질기게 여왕에게 후사를 위해 결혼을 하시라 간청을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난 불가능한 쪽에 흥미를 느낀다"라며 무심하게 대꾸하여 자신은 결혼 생각이 없음을 강하게 피력해 신하들을 데꿀멍시킨다. 공적인 자리에서 결혼 얘기를 꺼낸 신하의 뒷통수를 후려 갈기기도 한다(...) 어지간히도 거슬리게 했던 모양.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잉글랜드로 도망왔다가 엘리자베스에 의해 유폐된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를 처치하고 자신이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도 연결창구를 만들어 순조롭게 계획을 진행시켜 나가는듯.....보였으나 문제는 메리의 계획이 오래 전부터 메리를 주시하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신하들에 의해 뒷조사 당해 간파당해버렸다.

당연히(...) 엘리자베스를 노렸던 암살 계획은 실패했고 메리 스튜어트를 비롯한 음모자들은 전부 반역죄로 목이 잘린다.

메리의 처형은 영국을 침공할 구실이 없던 펠리페 2세에게 좋은 떡밥이 되었고 펠리페는 온 유럽에 명성이 자자하던 아르마다(무적 함대)를 영국 정복을 위해 출진시킨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사략선 선장 월터 라일리 경에게 푹 빠져 연애 감정까지 느꼈으나 문제는 라일리가 엘리자베스에게는 별로 호감이 없었고 엘리자베스의 시녀였던 베스에게 접근해 사랑에 빠지고 결국 임신을 시켜버리고 만다. 여왕의 시녀가 여왕의 승인 없이 결혼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했고 더군다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이 가장 아꼈던 시녀에게 NTR당한 엘리자베스는 분노로 눈이 뒤집혀 라일리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한편 그 시각, 아르마다는 도버 해협인근까지 접근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고 영국 본토에 상륙할 기회를 노린다. 그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백년 전쟁 이후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 군사력이 시망상태였고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그나마 해군쪽은 선왕인 헨리 8세가 신경을 써둔 덕분에 사정이 좀 나았으나 육군의 상태는 그야말로 개판 5분전이었다. 스페인 아르마다의 병력 1만+펠리페의 친구인 프랑스 파르마 공작의 휘하 병력 1만 5천을 합한 총합 2만 5천 대군에 맞서야 하는 영국의 병력은 꼴랑 3천명. 이런 압도적인 전력차에서 스페인군이 상륙하기라도 하는날에는 영국은 끝장이었다.

상륙을 허용하면 육군이 순식간에 박살이 날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상륙을 막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라일리를 석방하여 스페인과의 전투를 이끌게 한다.

해군을 출전시킨 후 엘리자베스는 농부들과 죄수들까지 풀어 무장시키고 몸소 갑옷을 입고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굳힌다. 한편 바다에서 영국 해군은 아르마다에게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있었고 전멸의 위기에 몰려있었다. 스페인군의 잉글랜드 상륙이 임박한 최악의 상황에서 라일리는 고심 끝에 화공 전술을 시전하여 악천후에 오밀조밀하게 뭉쳐있던 아르마다에 폭격.

좁은 해협에 밀집해 있던 아르마다는 닻줄을 끊고 튀려고 하나 오히려 자기네들끼리 뒤엉켜 모조리 불타 개발살이 났고 펠리페는 수만에 달하는 군대를 말아먹은 패배에 정신줄을 놓고 리타이어해버린다. 이후 대례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지도위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엔딩.

  • 여담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월터 라일리 경은 제임스 1세 재위 시기에 반역죄로 목이 잘려 끔살당했다(...)


[1]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명성이 높은 국왕이기도 했고 문장에 들어간 동물이라는 게 다름아닌 드래곤이라 카리스마빨을 제대로 받는다.[2] 이 항목 참조.[3] 세간에서는 불합리한 처사를 당한 아라곤의 캐서린에 대한 동정 여론이 높았다.그녀가 폐위되어 궁정 밖으로 쫓겨났을 때, 헨리 8세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과는 달리 백성들은 여전히 캐서린을 왕비님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이런 여론에는 앤의 드센 성격도 한몫 했다.[4] 그러나 이 추문에 대해 엘리자베스도 잘 생긴 시모어에게 반했기 때문에 시모어가 자신을 희롱할 때 거절하지 않고 호응했다는 설도 있다. 게다가 이 추문이 났을 때 캐서린 파는 시모어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파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신분에 따르는 책임과 예의 때문에 의붓딸과 남편의 추문을 묻어 두어야 했으나, 결국 아이를 출산하고 산욕열로 죽을 지경에 처하자 결국 자신의 고통을 모두 드러내며 두 사람에게 폭언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일화도 있다.[5] 메리 1세는 공공연하게 엘리자베스가 헨리 8세의 친딸이 아닐 거라고 말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헨리 8세의 외모를 쏙 빼닮은 건 메리가 아닌 엘리자베스라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메리 1세가 엘리자베스의 친부라고 믿은 사람은 앤 불린이 처형당할 때 같이 엮여 처형당한 사람 중 하나인 궁중악사 마크 스미튼(Mark Smeaton).[6]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는 아내인 메리 1세 사후에 처제인 엘리자베스와 재혼해 잉글랜드까지 통치하려는 펠리페 2세의 강한 의지가 작용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뒤통수(...)[7] 기즈 가문은 로렌가문의 방계로 프랑스 궁정에서 사보이가문과 부르봉 가문등과 함께 준왕족 취급을 받고 왕가와 결혼이 가능한 통치가문 취급했다. 프랑스 위그노 전쟁시 중심인물이던 로렌 추기경과 기즈공작 앙리는 메리 스튜어트의 삼촌들이다.[8] 펠리페 2세의 친척들이다. 구체적으로는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아들 카를인데, 이 사람의 아들인 페르디난트 2세가 벌여놓은 길고 긴 병크 삽질과 거기서 틸리와 그 수하인 파펜하임이 벌여 놓은 마그데부르크 학살을 생각하면.......영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안 봐도 비디오. 여담이지만 이 사람은 현 카톨릭왕가 거의 대다수(부르봉, 부르봉오를레앙, 합스부르크, 작센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시조격이다[9] 당시 영국이 보던 관점의 러시아는 그랬다. 실제로 나머지 유럽에서 러시아는 아직까지도 반쯤 아시아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의 지도는 대부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끝나고 러시아는 그냥 모스크바에 방점 하나 찍은 다음 외형만 보면 차라리 오스만 제국이나 페르시아와 더 유사해 보이는 동방풍의 사람이랑 천막(...) 하나 그려 놓고 치운 게 대부분이었다.[10] 그녀가 자신의 대관식 반지를 들어보이면서, "짐은 이미 잉글랜드를 남편으로 섬기고 있노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영미권에서는 나라를 여성형으로 호칭한다는 건 함정, 혹 백합?[11] 브리태니커를 비롯한 각종 사전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 추진 및 실패에 관련된 이야기는 상세히 다루고 있지만, 위와 같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12] 당시의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인해 설령 여왕이라 해도 결혼하게 되면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다. 어디까지나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인 시대였다.[13] 아버지 헨리 8세가 한 6번의 결혼, 메리 1세의 불운한 결혼, 의붓어머니 캐서린 파의 결혼 등 전례는 많았다. 게다가 귀족들 사이에서도 별거와 이혼이 비일비재했다. 이후의 일이긴 하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역시 결혼으로 인해 추문을 남긴 훌륭한(?) 전례이다.[14] 상세한 건 메리 1세 항목 참고.[15] 그녀는 원래 프랑스의 왕비였으나 프랑스 왕 프랑수아 2세가 죽고 자국으로 돌아와 잉글랜드 귀족인 단리 경과 결혼했다. 그러나 단리와 곧 사이가 나빠져 그에 의해 모반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이렇듯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와의 결혼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킴과 동시에 왕위에도 위협적이었다.[16] virgin에서 생긴 말인 듯하다. 이것은 여왕의 총애를 받았던 월터 롤리 경이 제안했다고 한다. 월터 롤리 경은 엘리자베스가 지나갈 때 진흙탕이 있자 그의 망토를 벗어서 깔았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17] 사람들은 지루한 신부의 설교 대신 연극을 좋아했다. 하지만 엄숙함을 척도로 삼던 청교도 대신들은 연극이 사람들을 나태하게 한다고 여겨 연극을 폐지해야 한다고 내내 주장했다.[18] 여왕은 직접 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 극단은 '여왕의 사람들'이란 이름을 얻었다.[19] 미국의 버지니아 주에 여왕이 처녀임을 기리기 위해 버지니아(처녀)라는 이름을 짓자고 제안한 인물이다. 이 외에도 각종 문학이나 과학 등에 자질이 있어 여왕의 후원을 받았지만 너무 오만한 탓에 사람들에게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한때 총애를 받았으며 여왕의 경호대인 젠틀맨펜셔너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의 시녀 레이디 베스를 유혹하여 임신시키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고, 풀려난 이후로도 한동안 총애를 받지 못했다. 이후 다시 젠틀맨펜셔너의 대장을 맡았지만 이전만큼은 총애받지 못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1세의 시대에 죄를 짓고 사형에 처해졌다.[20] 시인 겸 평론가로도 유명하다.[21] 적지 않은 수의 역사학자들이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절 실제 권력은 벌리 남작에게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벌리 남작 작위는 왕실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왕이 수여한 작위다. 원래는 젠틀맨 계급 출신이었다. 세실의 경우 여왕의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인물로써 여왕의 재위 기간 사망할 때까지 여왕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여왕은 그에게 '스피리트(영혼)'라는 별칭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별칭을 받는다는 것은 여왕이 그를 매우 총애한다는 의미였다.[22] 레스터 백작이 재혼한 여성인 에식스 백작 부인의 아들. 레스터 백작과 그들 모자는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고 한다.[23] 에식스 백작은 여왕의 말년(즉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에 등장했으나 여왕과의 사이가 몹시 두터워 많은 이들이 여왕이 에식스를 사랑한다고 볼 정도였다. 그러나 에식스 백작은 이후 여왕의 총애가 멀어지자 반란을 일으켰고 처형당했다.[24] 실제로 혼담이 오가기도 했고, 앙주 공작 프랑수아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자기가 직접 프랑수아가 아침에 먹을 야채 수프를 가져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앙주 공작이 잉글랜드 왕위보다는 네덜란드 왕위에 구미가 당겨서 그리로 떠나버렸고 여왕도 그가 진실한 사랑이 아닌 여왕의 지원을 노리고 있음을 깨닫고 서서히 지원을 그만두었다. 이후 네덜란드와 에스파냐의 전쟁 통에 사망했다.[25] 당시대에는 여러 정황으로 보면 이중 첩자라는게 확실 했으나 결정적인 물증이 없고, 무엇보다 벌리가 계속 쉴드를 쳐주어 그냥 파리 대사직 이후 중직을 맡기지 않는 걸로 끝났으나, 후대 역사학자들이 스페인 측의 첩보 기록을 분석해 본 결과 실제로 스페인을 위해 일한 이중 첩자였다는게 드러났다.[26] 대조적으로 신하들을 하나도 믿지 못하고 모든 사무를 공무원마냥 하나 하나 개인적으로 처리 했던 펠리페 2세는 권력 누수라는 쥐를 잡기 위해 공무의 원활한 소통이라는 초가삼간을 태운 격이 되어 버렸던 반면, 반대로 동시대 프랑스의 경우는 그 잘난 대신들의 힘이 너무 강해 왕이 있으나 없으나 한 종교 내전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앙리 4세가 수습하려다 못할 때까지...[27] 실제로 더들리 부인이 죽을 때 당시 하인들이나 집사가 곁에 없었는데 집사이던 안소니라는 사내는 로버트 더들리에게 상당한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하인들도 사고로 죽었다고 말하면서 일절 모른 척하고 죄다 독립하여 가게를 차린다든지 제법 잘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는 당시 권세가였던 더들리 경을 두려워해서였는지 그다지 공공연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25년이 지난 1583년에서야 나온 책에서 언급되어 전해졌다. 이 책을 본 더들리 경은 비웃으면서 흥미 위주의 소설이라고 무시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도 그 책을 보았으나 무척 격노하여 이는 악마나 믿을 거짓말이라 치부했다. 아무튼 더들리 경은 무척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흑색 선전이나 비방은 넘쳐났다. 그를 감싸는 것은 여왕 뿐이었다.[28] 실상 에이미 더들리가 타살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에이미 더들리는 계단에서 실족사하여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다. 후대의 학자들이 에이미의 관을 파내 열어 보았으나 이미 안에는 먼지만 가득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로는 에이미가 죽을 경우 가장 의심받을 것은 더들리 경이었으므로 그 자신이 그런 바보짓을 할 리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어찌됐건 당시의 조사로는 무고함이 증명되긴 했으나 더들리 경은 두고두고 뒷손가락질을 받았고 정적들은 틈만 나면 이 사건을 들어 그를 공격했다.[29]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옹립하려 한 인물. 제인 그레이 항목 참고.[30]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본인이 독신을 선언한 것도 있지만 여러 이유로 더들리와 결혼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사이인지라 더들리의 아이에게라도 왕위 계승권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자신의 연인인 더들리를 스코틀랜드로 보내 스코틀랜드를 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31] 메리 스튜어트의 키는 180cm에 달했기에 왠만한 남자보다도 더 컸다. 그래서 자신보다 키 큰 남편을 원했다고.[32] 메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받은 슈루즈버리 백작은 메리가 이후 처형당하기까지의 수십년간을 이 과중한 임무에 시달려야 했다.[33] 무거운 그리스서사시라틴어로 쓰인 철학서 등을 즐겨 읽었다.[34] 롱사르의 연애시 등 가벼운 작품을 주로 선호했다고 한다. 당시의 귀족 여성들에겐 흔한 경향이었다. 여왕이라서 문제지[35]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직후 신하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라틴어로 간신히 대화했을 정도였다.[36] 이 링크는 말 그대로 '설'을 사실로 단정하는 듯한 말투이기 때문에 걸러서 볼 필요가 있으니 주의.[37] 이 부분은 이상하게도 서프라이즈에서는 쏙 빠진 채로 나왔다.[38] 엘리자베스의 신하 레스터 백작은 "다른 군주들의 폭풍과도 같은 분노에 비하면 폐하는 일시적 돌풍에 지나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라는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39] 영어 원문 : I may not be a lion, but I am lion's cub and I have lion's heart.[40] 당시로서는 여성은 남성에 비하면 부족한 존재, 남성의 인도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편견이 팽배했다. 가정에서는 남자의 말에 순종하며 아이나 잘 낳아 기르는 것이 여자의 가장 중대한 사명이라고 생각된 시절이었다. 그것은 여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많은 신하들은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때만 해도 여왕이 곧 적절한 왕족과 결혼해서 왕자를 낳아 왕위를 물려주리라고 생각했다. 즉 남자로 왕위가 이어질 때까지의 일종의 징검다리라고 여긴 것이었다. 엘리자베스에게 추문이 돌거나 흉년이 들거나 해서 국가에 위기가 올 때면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긴다'는 어이상실한 생각을 비난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생각보다 오래 왕위에 있으면서 풍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잘 이끌자 그러한 비난도 사그라들어, 여왕의 사후에는 위대한 여왕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41] 이 당시 폴란드는 상당히 강한 국가였다. 유명한 폴란드 기병대 윙드 후사르가 활약한 것도 이 시기.[42]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군주의 위엄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일종의 기선 싸움이었다.[43] 정작 이 보석들은 여왕 사후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한다. 안습.[44] 수장 대신 최고통치자 직위를 썼다. 가톨릭 교도와 청교도들의 반발 중에서 타협을 고려한 것이다.[45] 교황을 등에 업은 펠리페 2세 등이 언제든지 성전을 일으켜 쳐들어올 수 있었다. 실제로 훗날 무적함대의 침공은 이러한 이교도를 몰아내는 성전이라는 대의명분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46] 여기서 나온 일화가 서술한 벌리 경의 "폐하의 우유부단함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는 발언이었다.[47] 이러한 거대한 대제국을 상대하는 소국의 근본적인 한계는 동시대에 매번 재현되는 대세와 같았으니, 유럽 반대편 동지중해에서의 오스만 제국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혈투(레판도 해전)은 기본이었고, 동서지중해 모두 스페인을 상대로는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그나마도 포르투갈은 병합),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는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폴란드-리투아니아신성동맹+페르시아가 다굴을 놓아 간신히 그 팽창을 저지하는 형태로 단락 되었다.[48] 흔히들 엘리자베스가 너무 통치를 잘해서 스튜어트 왕가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상은 반대라는 이야기. 물론 엘리자베스 1세든, 스튜어트 왕가든 통치를 답이 없게 못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긴 하지만...[49] 이런 측면에서는 그 시기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해도 지금 까지 영국의 특수성과 다른 유럽 국가와의 단절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기존 역사관도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종교 분쟁, 권력 집중의 문제(왕실 조직의 비대화)와 이에 대한 봉건 귀족, 자유 도시+상인 계급의 반발이 내전을 통해 폭발하는 이런 패턴은 당시 왕위 교체기의 스페인, 위그노 전쟁의 프랑스, 30년 전쟁신성 로마 제국, 독립 투쟁과 오렌지 공작파와 공화파 갈등의 네덜란드, 귀족 반란의 폴란드-리투아니아, 타임 오브 트러블[50]러시아 등 유럽 국가들이 모두 겪은 공통점이었다. 또한 이것이 바로 16세기~17세기 유럽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역사적 담론이기도 하고. 하지만 거꾸로 산업혁명건에 대해서는 또 자발적 근대가 이루어진 유일한 나라인 영국만의 특수성을 강조해야하는 아이러니가 있다.[50] Time of trouble; 이반 4세 사후 로마노프 왕조까지의 혼란기[51] 참고로 이 내용은 소설판과 End Of Time 1부 초반에 언급되는데 닥터가 그녀와 결혼해놓고 튀었다고 한다. 처녀가 아니라고 언급될 정도니 화날 만도 하다. 잠깐, 쎾쓰는 타조랑 체스 두는 거랑 같다며? 한 번 해보니깐 느낌이 타조랑 체스 두는 것 같아서 질린 거겠지[52]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통틀어서 '여왕 3부작'이라 불리며, 그 중에서 마지막 시리즈 이다.[53] 엘리자베타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탈리아어 발음이다. 메리 스튜어트마리아 스투아르다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케이스.[54] 작중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에식스 백작에게 "경이 여왕으로써의 나를 배신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여자로써의 나를 배신하는 것은 용서치 않으리라."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55] 오페라에선 에식스 백작이 노팅엄 공작의 아내 사라와 바람피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이것은 픽션이다. 그러므로 둘은 서로 남남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에식스 백작이 연인 관계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56]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는 에식스 백작을 처형한 이후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57] 작중에서 엘리자베스가 먼저 메리에게 모욕을 던지고, 이에 참지 못한 메리 스튜어트가 엘리자베스 1세한테 "천박한 앤 불린의 딸(Figlia impura di bolena)"라고 언급할 때부터 본격적인 신경전 이중창이 펼쳐진다. 흠좀무.[58] 작중 극이 끝나고 관객들이 다 환호하고 있는데 공연물 감독 관리들이 극장에 난입해 배우들과 작가 셰익스피어에게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너희를 체포한다!"고 하니까 관객석에서 박차고 일어나면서 "짐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지 마시오!"(더빙에서는 "그 이름 닳겠소이다!")라며 일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