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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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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
徳川幕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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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가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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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1868

위치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열도[3][4]

수도

에도[5]

정치체제

일본식 봉건체제

국가원수

쇼군

주요 쇼군

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

언어

일본어

민족

일본인

종교

신토, 선불교

주요사건

1603년 막부성립
1853년 쿠로후네 사건
1867년 대정봉환
1868년 왕정복고의 대호령
무진전쟁/멸망

통화

료(両)[6]

성립 이전

전국시대 or
도요토미 가문 독재체제
도쿠가와 가문 세력

멸망 이후

일본 제국, 에조 공화국


1. 개요2. 역사3. 통치체제4. 막부군5. 경제
5.1. 생활 수준5.2. 화폐제도
6. 문화
6.1. 식문화6.2. 교육
7. 대외관계8. 역대 쇼군9. 매체
9.1. 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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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현재의 도쿄 지역)를 본거지로 창설한 에도 막부(江戶幕府, 강호막부)가 집권하던 시대. 보통 지명을 따 에도 막부라고 하지만 종종 집권쇼군의 성씨를 따 도쿠가와 막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 최후의 막부가 된다.

2. 역사[편집]

1867년 11월 9일의 대정봉환 때까지 약 265년간 일본을 통치하였다. 앞서 존재했던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와는 달리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안정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일본 역사 전체 기준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는 데도 그럭저럭 성공했다.[7] 사실상 반(半)중앙집권 시대이라는 것. 또한 이 시기부터 전국시대까지 변방이었던 관동지방과 동북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됐고, 그 결과 일본의 정치/사회의 중심지는 기존의 교토, 오사카긴키 지역에서 현대의 도쿄간토 지역으로 완전 이동하게 된다.

에도 시대 중기인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에는 경제 호황기로 국부를 축적하고 국력도 신장해[8] 소위 겐로쿠 시대를 맞았으나, 18세기 중후반 이후 개혁의 실패, 자연재해의 빈발 등이 거듭되면서 문제점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막번(幕藩) 체제는 임시 방편만 남발할 뿐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지방의 강력한 번들이 개혁을 주장하고 지방민의 반란이 거듭되면서 붕괴에 직면하였다.

결국 1853/54년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격동의 동란기에 빠져 사쿠라다문밖의 변(櫻田門外の變)이 일어나고 번들은 대놓고 막부의 말을 안듣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등 사실상 통치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사쓰마, 조슈 등의 토막(討幕)파 번들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1867년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소멸, 이듬해 무진전쟁(보신(戊辰)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에도 막부가 소멸한 1868년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明治) 시대의 시작이라 하여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도.

3. 통치체제[편집]

에도 막부는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참근교대) 등 독특한 다이묘(大名) 통제 정책으로 성공적인 지방 통치를 수행하였고, 엄격한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유지하여 조선에서 유입된 유교적 질서 체제를 사상 처음으로 구현한 무사 정권이기도 했다. 또한 일본 전체의 1/4 과 주요 도시, 화폐 발행 등을 막부가 통제했고, 5~6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면서 중앙정부의 권력이 매우 강했던 시기이기도 했다.[9] 산킨코타이에 의해 촉발되어 전국 단위로 발달한 상업 또한 뒷날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전 막부와는 달리 오오쿠라는 쇼군만을 위한 여성들을 모은 공간을 만들어 운영했다.

4. 막부군[편집]

5. 경제[편집]

이 시기는 전국시대의 자유로운 교역보다는 쇠퇴했지만[10], 도자기우키요에 등을 수출하고 , 을 대대적으로 발굴하면서 국부를 쌓은 시기이기도 하다. 덕분에 금, 은 화폐 사용이 일반화되었으며, 한편으로 전국시대 난립했던 관소[11]들이 철폐되고 해상 교통이 대통합하는 등 상업 발달이 두드러진 시기. 다만 후기에는 근처 은 먹는 하마 중국이 일본 금, 은, 동을 죄다 흡수해버려서 고생하기는 했다.[12]

5.1. 생활 수준[편집]

나카무라 사토루,박섭의 저서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의 본문에서 에도 막부의 공식적 수취율은 21%였다고 서술한다.[13] 또한 런던정경대 경제사학과 교수인 스티븐 브로드웨이는 1990년의 미국 달러로 환산한 1800년의 일본과 청,인도의 구매력 지수는 일본 876 달러,청 639 달러, 인도 569 달러 이후 1850년 일본 933 달러, 청 600 달러, 인도 556 달러로 추산한다. 더하여 근세 일본의 일인당 소득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으며[14] 자료 일본의 평균 수명 또한 중국과 인도보다 10년 이상 높았다. 자료 [15]

역사학자 이헌창은 <조선 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2010)에서 논문에서 일본의 일인당 소득이 조선보다 높았지만 조세 부담률은 조선보다 높았다고 추정하고 있다.그러나 수취의 정황 만을 놓고 당시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에는 보기에는 엄청난 무리가 있다.

물론 "일본의 공식적 공조율은 21%"라 논하였던 나카무라 교수가 조선의 공식적 공조율에 관해서는 "3.7%"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그리고 에도시대에 일본을 방문하였던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 사실상 농노화가 된 일본 농민들의 심각한 빈곤상태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16] [17]등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간혹 에도 시대의 일본인의 삶이 저하되었다는 근거로 신장의 변화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자료 우선 인골로 확인하는 신장은 그 편차가 큼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더하여 위 자료에서는 금육령이 시행되어 일본 식문화에 고기를 꺼리게 되었던 나라-헤리안-가마쿠라 시대를 건너뜀이 확인된다. 에도 시대와 그 이전 시기의 신장 차이는 큰 폭으로 줄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농업 기술 및 상공업 기술은 에도 시대에 뒤떨어지고 세율은 훨씬 높았던 전국시대보다 에도 시대의 신장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던 이유를 들자면 17세기 폭증한[18] 인구가 어업으로 인한 1인당 육류 소비를 급감 시켰다는 것이 있다. 무로마치 시대 일본인은 1일 3식을 시작하게 되는데 에도 시대에도 변함이 없었으며 1인당 곡물 소비량과 쌀 값은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신장을 통하여 주장을 하는 측도 있다. 자료 그렇다면 1937년 일본과 조선의 징병 검사 자료를 확인해보자. 자료 교육, 의료, 소득 등 모든 지표에서 일본인이 훨씬 좋았음에도 신장의 차이는 3~4CM 으로 오히려 조선인이 더 높다.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신장 또한 3~4CM 차이가 있다. 게다가 기사의 자료는 근대 이전 일본인 신장의 추정 자료 중 가장 낮은 것을 채택한 것에 기인하였다. 다른 추정 자료에서 드러난 근대 일본인의 신장은 약 158 CM으로 계급 차이에 따른 신장 차이도 보이지 않는다. [19] 쌀 농사가 중심이었던 일본에 비해 조선은 밭 농사의 비중도 컸으며 조,수수 등이 주식이었던 지역도 많았다. 앞서 서술한 바 있듯이 선천적으로 한국인의 신장이 크다는 점과 밭농사의 비중이 높아 조선이 잡곡의 섭취량이 많으므로 영양학적으로 우월한 식단을 가졌음이 일본인의 일인당 곡물 소비량이 조선인 보다 많았음에도 불구한 동시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신장 차이를 설명한다. 다만 일인당 미곡 생산량/소비량의 격차발생은 근세의 것이라기 보다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양국 모두 아직 농업이 비교적 전근대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1880년대 초기의 일본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과 한일병합이후 조선의 일인당 미곡 생산량을 비교하면 그다지 큰 차이가 존재한다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20]

에도 시대를 과대 평가하여 당시 일본이 지녔던 한계와 어두운 면을 외면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행위이다. 하지만 이전의 서술처럼 에도 시대의 어두운 면만을 집중적으로 드러내어 폄하하는 행위 또한 지양해야 할 것이다 기근으로 인한 폐해, 농민들의 생활고는 전근대의 한계상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벌어졌던 양상이다. 이것을 두고 지나친 반일적인 관점으로 에도 시대의 착취로 인해 일본인의 국민성이 열화되었다 운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의 근대화는 에도 시대의 성장에서 왔음이 분명하기에 이를 공정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5.2. 화폐제도[편집]

에도 시대 이전에는 일본의 각지마다 다양한 지역 화폐가 쓰였지만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화폐발행권을 독점하고 금은동 3종 동전을 기반으로한 통화양식으로 전국적으로 통일한다.

금화(金貨)로는 코반 (小判, Koban) 금화가 1냥(両)으로 가장 널리 쓰인 대표적인 금화였고 다른 화폐의 기준이 되었다. 약간 길고 둥근 타원 형태로 일본 사극 등 시대물 에 흔히 등장한다. 무게는 금 15그램 가량. 에도시대 당시 1냥의 가치는 쌀 3~4 고쿠(石, 1석 = 한 사람의 1년분 식량, 약 150 kg )으로 4석을 기준으로 무게로 약 600 kg 분량, 20 kg 쌀 포대로는 30포대 분량이었다. 1,000달러 가치 이상의 매우 고액권인 셈이다.

오오반(大判, Ōban) 금화[21]는 그 10배인 10냥(両)으로 주로 재산축적이나 고액 거래에만 한정적으로 쓰였다.

1냥의 1/4 인 1 분(分) 화폐는 금 또는 은으로 만들어졌다. 1냥의 1/16 인 1주(朱)라는 단위도 있었다.

소액 거래에 쓰이는 일반 동전은 전(錢) 또는 몬(文) 이라고 불렸고 1,000 전이 1 칸몬(貫文), 금 1냥과의 교환비율 대체로 전4칸몬, 4000 전이 금화 1냥이었다. 즉 에도시대 초기에는 금(金)1냥(両) =은(銀)60 몸 (匁 , 돈 = 3.75 그램)=전4칸몬 (4,000文). 고정 비율은 아니고 시세에 따른 변동제여서 시대에 따라 점차 인플레가 심해져 동전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다.

에도시대 금화 1냥의 가치는 오늘날에는 약 12-17만 엔 정도로 본다. 1700년 당시 음식 소바 250 그릇 값. 일급 은화 5문 4분인 목수가 금화 1냥을 벌려면 12일간 일을 해야 했다. 1전은 현대의 4엔 가량이니 한화로 40원 정도.

6. 문화[편집]

6.1. 식문화[편집]

에도 시대 에도를 비롯한 대도시들은 빠른 발전을 거듭하였고 이들 도시에는 대규모 공사가 매일같이 진행되는 등 한밑천 잡아낼 건덕지가 많았기 때문에 전국에서 청년들이 꿈을 가지고 상경하였고 한편으로는 독신생활을 하고 있는 하급 사무라이들도 대도시에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에도 시대 대도시에는 독신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패스트푸드 등 요식업이 전례없이 발전하였는데, 17세기 에도에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전문점이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대도시들은 노점 음식의 천국이기도 하였다. 노점에서는 텐푸라, 장어꼬치, 스시, 오뎅, 우동, 소바, 모치, 단고, 오징어구이 등을 취급하였다. 이 중 텐푸라는 노점에서만 먹을 수 있었는데, 이는 에도 막부가 화재 예방책의 일환으로 텐푸라를 실내에서 튀기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노점의 음식은 대개 정규 음식점의 음식에 비해 질적 수준이 낮았지만 이러한 특권(?)도 있었다는 것.

현재 일식의 얼굴마담인 스시도 에도 시대에 현재와 비슷한 꼴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에도 시대 일본에서 즐겨먹던 스시는 오늘날의 스시와는 모양새나 만드는 방식이 다른 육면체의 하코즈시(箱寿司)였다.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스시'는 니기리즈시인데, 니기리즈시는 에도 시대 막부실세 저택 앞에 한 스시 명인이 점포를 차려 가장 맛있는 생선부위를 활용해 만든 고급 스시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시가 대중들의 식탁에 올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업과 어패류 교역업도 활기를 띄었는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수산물시장인 츠키지 시장은 이 시기에 에도에서 형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것이다.

다도 또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 더 발전하였고, 류큐를 통해 설탕이 대규모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다도의 필수요소인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도 오늘날의 그것과 가까운 형태로 진보하였다.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특히 유럽과의 교역으로 새로운 요리기법들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포르투갈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빵 문화가 들어왔으며, 오늘날 동아시아권에 잘 알려진 빵인 카스테라(カステラ)는 이 때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빵이다. 상기에 언급한 텐푸라도 유럽식 튀김법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이다.

6.2. 교육[편집]

에도 시대의 초등 서민교육은 테라코야(寺子屋)에 의해 수행되었다. 중세 사원의 교육원에 유래를 두고 있는 테라코야는 입학생들에게 문자의 해독과 쓰기, 계산 등 간단한 산수, 도덕, 그리고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 등을 가르쳤다. 테라코야의 교사는 주로 학식있는 평민들이었고, 전체교사의 10% 가량이 여성이었다. 테라코야는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는데 10명 가량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부터 100명 이상의 학생이 수학하는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테라코야는 남녀공학이었다.

상위 학교로는 번교(藩校)와 사숙(私塾)이 있었다. 학교는 서민용 교육기관이었으며, 사숙은 민간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 번교는 각 번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일반적인 번교는 재지 사무라이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나, 개중에는 서민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도 있으며 일반적인 사족학교들 중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수가 일반 평민에게도 입학을 허용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생도들은 번교에 대개 7~8세에 입학하여 교육적 성취도에 따라 13세에서 2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에 졸업하였다.

대부분의 번교는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의 교육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으나 소수의 일부는 국학이나 난학, 의학 등을 메인으로 삼기도 하였다. 번교는 사무라이 학교인만큼 검술과 궁술 등의 무예도 중시하였으며, 번교생들은 각종 기예에 대한 수행도 겸하였다.

유교 이외의 학문을 중히 여기는 학교의 비중은 번교보다 사숙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사숙으로는 일본 개화기를 주도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들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사숙에는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입학할 수 있었고, 유교 위주의 번교 교육에 염증을 느낀 학구열이 높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번교에서 이탈하여 사숙에 몸을 담기도 하였다.

7. 대외관계[편집]

에도 막부가 존속한 기간은 대체로 외국과 교류하지 않은 쇄국주의를 고집하던 시대와 일치하지만 조선과 국교를 맺었고, 류큐 왕국은 1609년 사츠마 번에 의해 침략당한 후 복속되어 종종 에도에 사절단을 보내 조빙하는 등 교류하였다. 또한 에조치(훗카이도,쿠릴,사할린)에도 세력을 뻗쳐 아이누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에서는 총 12회에 걸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해 두 나라 간의 우호통상관계와 쇼군의 권위 과시, 선진 문화[22]의 수용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23] 그리고 국교를 맺지는 않았지만 네덜란드, 청나라 등과도 교역하였다. 거기다 소규모나마 네덜란드와 지속적으로 교류하였고 네덜란드를 통해서 국제정세에 정확히 알수있었고 네덜란드 기술과 학문등 서구문물을 공부하였는데 이를 난학이라고 한다. 이는 훗날 일본이 개항을 하고 메이지유신을 일으키는데 기본 토대가 된다.

8. 역대 쇼군[편집]

이름

재임기간

비고

1대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 家康)

1603 ~ 1605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로 막부 개창
1605년~1616년 오고쇼(大御所)[24] 역임.
태정대신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 (德川 秀忠)

1605 ~ 1623

오사카 전투겐나 엔부, 무가제법도 제정
1623년~1632년 오고쇼 역임.
태정대신

3대

도쿠가와 이에미츠 (德川 家光)

1623 ~ 1651

산킨고타이, 시마바라의 난
막번 체제의 완성

4대

도쿠가와 이에츠나 (德川 家綱)

1651 ~ 1680

일본판 성종

5대

도쿠가와 츠나요시 (徳川 綱吉)

1680 ~ 1709

개 쇼군
겐로쿠 시대, 추신구라 사건

6대

도쿠가와 이에노부 (徳川 家宣)

1709 ~ 1712

학자쇼군, 금은 개혁[25]

7대

도쿠가와 이에츠구 (徳川 家継)

1713[26] ~ 1716

소년 쇼군, 거인증, 쇼토쿠의 치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 (徳川 吉宗)

1716 ~ 1745

최초의 방계 계승[27].
쌀 쇼군, 쿄호 개혁.
1745년~1751년 오고쇼 역임.

9대

도쿠가와 이에시게 (徳川 家重)

1745 ~ 1760

10대

도쿠가와 이에하루 (徳川 家治)

1760 ~ 1786

텐메이 대기근

11대

도쿠가와 이에나리 (徳川 家斉)

1786 ~ 1837

역대 최장 재임 쇼군
막부 최대 판도[28], 칸세이 개혁
1837년~1841년 오고쇼 역임
태정대신, 물개 쇼군

12대

도쿠가와 이에요시 (徳川 家慶)

1837 ~ 1853

텐포 개혁, 쿠로후네 사건

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 (徳川 家定)

1853 ~ 1858

14대

도쿠가와 이에모치 (徳川 家茂)

1858 ~ 1866

각기병 쇼군, 청년 쇼군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 (徳川 慶喜)

1866 ~ 1867

대정봉환, 무진전쟁메이지 유신


전대 막부의 쇼군들과는 달리 시해당한 쇼군이 한 명도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일찍 사망한 쇼군은 있지만 전부 자연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막부의 지배력이 전대 막부에 비해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29]

또한 일본 역사의 막부 정권에서 유일하게 조정 최고위 관직인 태정대신 직위를 받은 쇼군이 존재하는 막부이며, 특히 제109대 덴노인 메이쇼 덴노는 2대 쇼군 히데타다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9. 매체[편집]

일본의 매체에서 한국의 조선시대처럼 단골로 나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특히 막말(막부 말기)은 일본 사극 3대[30] 인기 시대 중 하나.

일부 작품은 일제 시대를 아예 없애고 에도 막부가 계속 존속했다는 대체역사를 배경에 깔기도 한다. 역으로 에도 막부가 존재치 않거나 일찍 멸망하고 에도 막부를 모티브로 한 다른 막부나 혹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공전기 대체역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9.1. 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편집]


[1] 막부 말기에 제정된 국기라 그다지 많이 쓰이진 않았다.[2] 기존에는 '세 잎 접시꽃'으로 알려저 있었으나 접시꽃이 아니라 족도리풀이라는 설도 있다.#[3] 다만 홋카이도 남쪽 일부는 센고쿠 시대에 자리잡은 마츠마에 번이 통치했다. 코에이 신장의 야망 시리즈의 가키자키 가문이며, 삼국지 시리즈의 공손씨나 맹획남만처럼 변방 세력으로써 컬트적인 인기가 있다.[4] 18세기 지금의 러시아 사할린 (남부)지역과 쿠릴 열도 4도(구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를 차지한 적이 있다. 그나마 그것도 에도 바쿠후가 망한 뒤로 조약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에게 넘어가서 일제시대 때 다시 차지하게 된다. 헌데 2차 대전으로 도루묵.[5] 오늘날의 도쿄.[6] 금화인 쿄슈킨(甲州金) 등으로 유통되었다. 단위는 1료(両)=4부(分)=16슈(朱)=64이토메(糸目). 막부 말기 사회 혼란시기 이전까지는 1료≒쌀 한 섬이었다. 이외에도 은화나 동전도 널리 쓰였다.[7] 단, 권력 구조에 있어서는 중기 이후로는 쇼군들의 능력치가 떨어지다 보니 그 휘하의 로쥬(老衆)에게 실권이 쏠리고 쇼군은 다소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나게 된다.[8] 에도시대가 막을 내린 메이지 유신 초의 일본 인구가 3,200만에 달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초는 중앙집권이 다시 확립되어 질서와 안정을 되찾았기에 인구 증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전에는 인구가 2,600만~2,700만을 계속 유지했다.[9] 물론 이것도 말기에는 혼란과 중앙 정부의 무능으로 기회를 잡은 번들이 다시 제멋대로 나서면서 중앙정부는 전국시대처럼 다시 통치력을 상실한다.[10] 물론 다이묘들의 독자적인 교역을 막았기 때문이다.[11] 통행세를 비싸게 뜯어내다보니 상업발전의 걸림돌이었다.[12] 명은 일조편법, 청은 지정은제로 은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은을 수입해다 썼는데 상당수가 일본산 은이다. 대항해시대2에도 일본의 특산물 중 하나가 은으로 매우 싸다. 일례로 오늘날 "일본명동"으로 불리는 긴자 지역의 이름은 과거에 이곳에 은 주조소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13] 일본의 에도시대는 총생산량으로 볼 대, 중앙정부인 막부가 전국의 약 4분의 1(700~750만 석)을 영유햇고, 게다가 그중 대부분을 직속가신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막부 직할령은 약 420만석이었다. (중략) 1871년의 전국 공조액은 1,225만석이었으며, 정부가 파악한 공식적인 수확량이 3,220만 석이었으므로 공식적인 공조율은 39%였다. 실제 수확고가 4,681만석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이 역시 과소평가된 것으로 판단되어 대략적인 수확고는 6천만석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면 공조율은 약 21%가 된다. 1870년의 일본 인구는 3,440만 명이니, 1인당 공조액은 0.365석이다.[14] In particular, Japan had very low levels of per capita GDP at the start of the second millennium, then experienced modest but steady growth at 0.06% per annum through to the mid-nineteenth century. Japan’s more dynamic growth after the Meiji Restoration of 1868 thus built on this earlier progress. China’s per capita GDP, by contrast, was on a downward trajectory from its high-point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On these estimates, Japan overtook China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India. shared in the Chinese pattern of declining per capita GDP from 1600, at the height of the Mughal Empire under Akbar. However, Japan was already slightly ahead of India by the time the Indian series starts in 1600.-<Asia's little divergence>[15] 위 논문의 30p 참고[16] "일본 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에 일에 불구하다." 원중거, 승사록 [17] "일본 시골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아로 들어가고 풍년이 들어도 콩 반쪽도 잇기 어려워 스스로 처자를 팔아먹기 까지 한다. 빈부가 균등치 않음은 다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신유한, 해유록[18] 1600년 일본의 추정 인구는 1700만 명이다. 이 숫자는 1700년 2700만 명으로 급등한다.[19] 자료[20] 1911년 박섭의 미곡생산량 추계를 바탕으로 구한 1911년 조선의 1인당 미곡 생산량은 약 0.72석, 총 곡물 생산량은 약 1.65석. 1881년 일본 통계연보중 미곡생산량 값을 바탕으로 구한 1881년 일본의 1인당 미곡생산량은 약 0.81석이다. [21] 오방이라고도 하는데, 오방떡할 때의 그 오방이다. 참고로 포켓몬스터에서 나옹의 이마에 붙어있는 것도 오방이다.[22] 정확히는 주자학 중심의 중국계 문화.[23] 그래서인지 조일 관계는 에도시대가 끝난 후 급속도로 악화되었다.[24] 본래는 은거한 친왕이나 섭정이나 관백의 부친으로서 실권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에도시대에는 은퇴한 전임 쇼군을 일컫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를 일컫는 관용어로 쓰인다.[25] 순금/은 순도를 이에야스 시대로 끌어올렸지만... 바로 하쿠세키의 불황을 초래[26] 이에노부 사후 쇼군직을 승계받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27] 이에야스의 10남 요리노부의 자손이다.[28] 1799년부터 몇 년간 북방 탐험으로 사할린 남부와 쿠릴 4도를 얻게되는 시점이 이때이다.[29] 다만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당대에 정실인 노부코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도쿠가와 이에사다도 독살설이 나돌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그 외 도쿠가와 이에모치도 유체의 상태에 근거해서 독살설이 제기된 바 있다.[30] 겐페이 전쟁, 전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