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통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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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전개3. 신문사 및 정기간행물
3.1. 중앙 일간지3.2. 지방지3.3. 정기간행물
4. 방송사5. 통신사6. 이어지는 언론인 해직과 세뇌교육7. 전두환 정권 내의 이견8. 언론통폐합이 우리 언론에 미친 영향9. 여담10. MBC 주식 몰수에 대한 논란11. 관련 자료
11.1. 동아일보 다큐멘터리 <5공의 언론수난>(1988.10.31 ~ 11.14일자 연재분)11.2. 중앙일보 실록 80년 서울의 봄: 언론 숙정·통폐합 제45 ~ 56회11.3. 미디어오늘 1995년 3월 27일자 <5공화국편 - 언론사 통폐합>11.4. 중앙일보 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문화'
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1. 소개[편집]



K-공작계획,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에 이은 전두환의 언론장악 파이널 라운드

제4공화국 말기[1]인 1980년 11월 전두환(당시는 제11대 대통령) 정권에서 시행된 정책. 다른 말로는 언론대학살이다.

언론사 구조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의 난립을 정리하고 공영방송 체제를 도입한다는 명분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에서 여러 국영-민영라디오 방송사와 TV방송사를 RDF(이후 RTF로 개칭)라는 독점 공영방송사로 통합한 바는 있다. 하지만 1980년 한국에서 벌어진 언론통폐합의 실상은 전두환 정권에 저항적인 언론인은 해직하고 언론을 체제에 순응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전두환 정권이 도입하려고 했던 공영방송 체제를 빙자한 국영방송은 이로부터 약 10년 뒤인 1991년 SBS가 개국하면서 다시 공영방송-민영방송 체제가 되었다. 그리로 그 당시의 라디오 채널 중 하나가 SBS에 넘어간 것도 아이러니.

2. 전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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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언론사주들이 신군부의 압력에 따라 내놓은 각서들 깨알같은 좋겠읍니다[2]

1980년 11월 12일 오후 6시경, 각 언론사 사주들은 국군보안사령부 측으로부터 보안사령관의 면담이나 강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보안사 요원들의 안내로 소격동 보안사령부[3]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보안사 요원들로부터 최대의 치욕과 수난을 겪었다. 서울지역 13개 언론사 발행인과 경영주 17명은 보안사령부에서 맡았고, 지방 언론사는 보안사 소속 지방 부대가 각서를 받도록 했는데 이 과정에서 몇몇 지방지 사주들이 각서를 쓰기를 거부하자 보안사 요원들은 이들에 대해 인격모독과 가혹행위를 가하여 각서를 강제로 받아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보안사는 모두 45개 언론사주들로부터 52장의 각서를 받았다. 당시 보안사 요원들이 구술한 각서의 내용에는 조건 없이 언론사를 포기한다는 것이고 향후 이 일에 대해서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이에 대해서 <일요서울>의 김광휘 기자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80년 말 그 음습한 보안사 2층 조사실에서 '노'라고 외치며 뛰어내린 언론사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언론사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거나, 또는 그 언론사를 포기하고 나서도 살아나갈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던 기업 총수들이었거나 고용 사장들이었다. 서울의 이런 사정과는 달리 각 지방의 보안사 분실에 끌려갔던 영세 언론사주들은 보안사 요원들의 어이없는 강요에 목숨을 걸고 반항하다가 인간적인 치욕과 함께 곤혹을 치룬 언론사주들도 많았다.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얻어맞고 채이고 본격적인 고문을 하겠다는 위협에 질려 지방 영세 사장들도 각서에 피를 토하듯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지장을 찍고 자신의 분신보다 더 소중한 언론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일요서울 1997년 6월 22일자 32면. <80년의 언론대학살> 김광휘 기자 글.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 14일에 신군부는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에 강요한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빙자해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 허문도가 전두환을 설득시켜 단행된 것으로 알려진 언론통폐합의 주 내용은 방송 공영화, 신문과 방송의 겸영금지, 신문 통폐합, 중앙지의 지방 주재기자 철수, 지방지의 1도 1사제[4], 통신사 통폐합으로 대형 단일 통신사(연합통신) 설립 등이었다. 당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언론은 한말 개화기 이래 80여년 근대언론사를 통하여 숱한 역사적 격동속에서도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문화의 향상,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왔음을 자부한다. 이제 새 시대의 문턱에서 산업사회에로의 구조적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시대 상황에 창조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우리 언론은 자랑스러운 전통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언론의 구조와 문제점을 정면에서 투시하고 자기혁신의 결단을 과감히 내려야 할 때를 맞고 있다.

우리는 겸허한 자성을 통하여 오늘의 언론이 해야 할 바를 실천함으로써 빛나는 우리 언론의 전통을 내일에 이어가고자 한다. 우리사회 각계에서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정의가 지배하는 제5공화국의 출범을 예비하는 이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언론은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바로잡고 실천하는 양식을 실증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같이 자세를 가다듬는 결단이 민주주의를 이땅에 뿌리내리게 하고 복지의 터전을 이룩하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선도의 역을 다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대적 요청과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가를 통찰하여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용기있는 언론의 길을 택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득하고자 한다.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 회원 일동은 우리 언론이 지난날의 잔재와 불합리한 요소를 제거하고 공익을 우선시키는 근대적 공론기관으로서의 체제와 태세를 갖추도록 자기혁신을 스스로 단행하고자 다음과 같은 결의를 국민앞에 천명한다.

1. 언론은 나라와 국민 모두의 이익을 증진하는 사회의 공기로서 민족성원의 번영 및 국가의 성장 발전에 기여하여야 한다. 우리는 조속한 시일안에 언론의 공익성에 명백히 배치되는 언론구조를 자율적으로 개편하여 민주언론 창달, 국민언론 흥륭의 바탕을 굳건히 한다.

2. 우리나라는 구미 각국과 비교해도 많은 신문, 방송, 통신사가 난립하여 왔으며 이로 인하여 언론이 각계 국민에게 본의 아닌 누를 끼쳐왔고 사회적 적폐 또한 적지 않았음을 자성하며 근대적 공론기관으로서의 언론기업의 발전과 체질 강화를 기한다.

3. 언론의 막중한 사회적 영향력과 책임에 비추어 언론기관의 과점화는 공익에 배치되므로 어느 개인이나 영리를 추구하는 특정법인이 신문과 방송을 함께 소유함으로써 민주적 여론조성을 저해하는 언론구조는 개선되어야 한다.

4. 신문·방송·통신 등 각 사가 서울과 지방에 저마다 주재기자를 두고 있는 전근대적 취재방식을 개선, 언론 비위와 품위 손상의 소지를 과감히 일소한다. 중앙지, 방송과 지방지가 각각 지방과 서울에 두고 있는 주재기자를 철수하여 구미 각국의 예와 같이 통상적인 역외뉴스는 통신으로부터 공급받도록 한다.

5. 기존 통신사와 우리 신문, 방송협회 회원 전원이 참여하여 국내외 취재와 뉴스공급기능을 대폭 강화할 영향력있는 새로운 통신을 조속한 시일안에 설립한다.

6. 1981년 1월부터 신문지면을 증면하여 산업사회의 정보수요에 대응하고 언론인의 자질과 전문성을 높인다.

7. 민족독립, 민족자주의 길잡이로서의 사명을 자임해온 한국언론의 윤리성을 재확인하고 민족성원의 권리와 명예를 존중 보호키 위해 윤리/심의기능을 활성화한다.

3. 신문사 및 정기간행물[편집]

신군부는 신문의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내부적으로는 해당 정책의 근거로 일본의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3대 신문이 각각 발행부수 1천만 부 안팎으로 세계적인 신문의 지위를 확보해 국익수호에 이바지한다는 해괴한 예증을 들어 합리화시켰다. 통폐합의 구체적 내용조차도 엉망진창이었다.

3.1. 중앙 일간지[편집]

  • 신아일보 → 경향신문으로 흡수.
    1965년 5월 6일, 국내 신문 사상 처음으로 상업신문을 표방하고 창간한 신아일보가 지령 4,806호를 끝으로 11월 25일 폐간되어 사원들은 경향신문에 통폐합당했다. 당시 신아일보 장기봉 사장은 국군보안사령부 조사실에서 수사관에게 "내가 전두환 대통령과 대구공고 동문인데도 이러냐"라고 저항했지만 소용없었고 포기 각서를 썼다. 재미있는 것은 비록 듣보잡 수준이긴 하지만 2003년 5월부터 신아일보 제호와 지령을 그대로 이어가는 형태로 신문이 발행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조.

  • 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로 흡수.
    11월 25일 지령 6390호로 폐간. 이 경우는 창간 주체가 한국일보로 동일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후 8년이 지난 1988년 8월 1일 복간했고 창간 40주년을 맞아 2000년에 한국일보에서 공식적으로 분리, 독립하는 데 성공하나, 언론통폐합 전과 같은 리즈시절은 이미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보급소에서 신문을 한국일보로 구독하면 서울경제도 거의 자매지 수준으로 같이 취급한다[5]

  • 일간내외경제 → 코리아헤럴드로 흡수.
    11월 24일 지령 2130호로 폐간. 희한하게도 경제신문이 영자신문으로 통폐합된 사례다. 1989년 내외경제로 복간했고, 2003년에 이름을 현재 사용되는 제호인 헤럴드경제로 변경했다. 원래 한국무역협회 산하였다가 1989년부터 미도파백화점으로 유명한 대농그룹에 인수되어 민영화되었으나,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신동방그룹으로 넘어갔다가 2002년부터 홍정욱에게 인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심지어 언론통폐합 내용 중에 골자화된 '중앙지 지방 주재기자 철수'에 따라 주재기자 제도가 금지되면서 대신 중앙일보의 '이동사회부'와 같은 방식으로 신문사들이 지방 소식을 편법으로 취재해 오다가 1987년 언론기본법 폐지 선언 이후 8월 1일에 지방 주재기자 부활이 공식 발표되어 주재기자 제도가 부활했다.

3.2. 지방지[편집]

  • 부산 : 국제신문 → 11월 25일 부산일보로 흡수, 폐간 당시 지령 10992호. 이후 1989년 2월 1일 국제신문 복간.

  • 경상남도 : 경남일보(현존 지방지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됨. 1909년 10월에 간행 시작) → 11월 25일 경남매일신문으로 흡수, 폐간 당시 지령 9342호. 마산에서 발행하던 경남매일[6]이 진주가 본거지였던 경남일보를 흡수했다. 이후 폐간된 지 정확히 9년 만인 1989년 11월 25일에 경남일보 복간.

  • 전라남도 : 전남일보(지령 9643호) + 전남매일신문(5806호) → 11월 30일 광주일보로 통폐합, 전남일보의 지령을 계승한다.
    1도 1신문사의 원칙에 따라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이 때 규모가 작은 신문사가 규모가 큰 신문사를 흡수하는 일도 벌어졌다.#.

3.3. 정기간행물[편집]

문화공보부는 언론통폐합에 앞선 7월 31일에 <창작과비평>, <씨알의 소리> 등 172개 정기간행물을 등록 취소한 데 이어 신문 통폐합이 이루어진 이후인 11월 29일에 66개나 되는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추가로 취소시켰다.

4. 방송사[편집]

  • 기능 개편

    • 기독교방송 → 보도방송 금지, 복음방송 전용 매체로 변화


명목상으로는 방송 공영화라고 했지만 사실상 방송 국유화이며 신방겸영 금지로 신문사가 소유하던 방송국도 날아갔다.

TBC(동양방송)와 DBS가 각각 KBS 2TV, 제3방송, KBS 2FM(이하 동양방송), 제4방송(KBS 라디오서울)로 개편됨으로써 KBS에 흡수되었다. 1980년 4월 1일 건설된 TBC의 여의도 사옥은 TBC가 몇 달 써 보지도 못했으며 현재는 KBS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TBC의 고별 방송에서는 이은하가 눈물을 보였다는 이유로 3개월 동안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KBS 제3방송은 1981년 KBS 제2라디오에 흡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이후 2000년에 KBS 제3라디오로 부활했다. 한편 KBS 라디오서울은 SBS가 개국한 후 1991년 AM 792KHz 주파수가 넘어가 SBS 라디오로 배정받은 뒤 SBS의 표준FM으로 개국했으며 이후 SBS 러브FM이 되었다. 지역의 경우 TBC 가맹국이었던 광주 전일방송과 군산 서해방송, 대구 한국FM방송이 각각 KBS 광주 제2라디오(현재 해당 주파수는 제3라디오용으로 사용중), KBS 군산 제2라디오(이후 군산방송국이 전주방송총국에 흡수, 현재 이 주파수는 제3라디오용으로 사용중), KBS 대구 FM방송의 형태로 KBS에 흡수되었다.

허나 국유화된 주제에 KBS의 일부 라디오 채널은 전국화되지 못했다. KBS 2FM은 한 술 더 떠서 국가기반 공영방송의 채널인 주제에 수도권에서만 방송한다. 1991년 SBS로 넘어간 라디오서울도 수도권에서 방송되었다.

당시 지방 MBC는 지금의 한국민영방송협회 회원사처럼 제휴 관계의 별개의 법인이었다. MBC도 지방 MBC국의 주식 절반 이상이 문화방송으로 강제 양도, 지방 MBC국은 가맹국에서 계열국(즉 MBC 본사의 자회사)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원래는 민영방송이지만 MBC 본사 주식의 65%가 KBS로 양도, 사실상 KBS의 자회사가 됨과 동시에 공영방송으로 전환되다. 또한 박정희 시절 경향신문과 통폐합되었으나 언론통폐합을 기점으로 경향신문과 분리되었다. 전두환의 집권이 끝난 후 공기업인 방송문화진흥회(약칭은 방문진)를 개설하고 방문진에서 KBS가 보유하고 있는 MBC의 주식을 모두 인수하면서 MBC는 반 공영방송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2015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0년 11월 25일 CBS의 마지막 뉴스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뉴스원고를 읽고 그만 울어버리는 사건이 터지자 11월 30일 마지막 방송이 예정된 DBS와 TBC에 <고별방송에 관한 지침>이란 희한한 걸 내보내 단순한 고별인사만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등의 감상적 내용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 지침에 따라 고별방송 원고는 사전에 검열되었으며 그마저도 낮에 녹음하도록 강요되었다. 행여 서러워하는 감정이 섞일까봐 원고 낭독 역시 입사 1년차도 안 된 여자 아나운서로 하여금 읽게 했다.

이후 언론기본법-정기간행물법에 따른 방송-신문 겸영 금지조항에 따라 방송 시설들을 돌려받지 못했고 비록 공중파로 부활하지 못했지만 2009년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미디어법 개정으로 신문-방송 겸영이 허용된 이후 TBC 자체는 31년 만인 2011년 12월 종합편성채널로 부활에 성공한다.

하지만 TBC는 1995년 5월 14일에 개국한 대구광역시 지역의 민영방송인 대구방송이 점유한 지라 이름을 JTBC로 정했다. 개국일에 개국축하 방송과 자신들의 존재를 어필하는 방송을 전면에 내세운 다른 종합편성채널들과 달리 JTBC는 31년이란 세월의 원한이 개국과 동시에 터져나와 개국일부터 언론통폐합 관련자들을 전방위로 까는 다큐멘터리를 집중 편성했다. 특히 언론통폐합의 원흉인 전두환에 대해서는 정말 사정없이 계속 깐다. JTBC가 전두환을 까는건 개국 방송에 한하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계속 깐다.

CBS박정희 정권 때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을 많이 했다가 언론통폐합 때 보도기능을 잃어 당사 소속 보도요원들이 KBS에 흡수된 뒤 극동방송같이 복음 방송만 했다.[8] 동시에 상업 광고도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오랜만에 보도기능과 상업광고가 부활했다.

결과적으로 언론통폐합 조치로 덕을 본 방송사는 KBS뿐이다. TBC와 DBS는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고 CBS는 밟히지 않았지만 순수 복음방송으로 전환되면서 정부로부터 입막음을 당했다. 결국 2009년 종편채널 허용 전까지 신문-방송의 동시경영은 결국 남의 나라 얘기가 되었고 신문사들은 오히려 나중에 CTS 제작시스템 구축과 인터넷, 옥외전광판, 케이블TV, PC통신 등 이른바 '유사방송매체(뉴미디어)'로의 확대에 사력을 다하게 되었다.

5. 통신사[편집]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는 동양통신, 합동통신, 동화통신[9], 시사통신, 경제통신, 산업통신, 무역통신[10] 등 통신사가 여럿 있었는데, 양대 통신사[11]였던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을 해체, 통합하고 나머지 작은 통신사들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모두 연합통신(연합뉴스의 전신)으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단일 통신사 체제는 2000년대 뉴시스가 정식으로 통신 업무를 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6. 이어지는 언론인 해직과 세뇌교육[편집]

80년 5월, 전두환-노태우 중심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미국 정부가 전두환 집권에 호의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한 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비화를 공개했다. "신군부 측이 사주의 개인 비리를 들먹이며 회사를 언론통폐합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으니 미국 내 친한파 인사와 긴급 인터뷰해 기사를 보내달라고 서울 본사에서 요청했다."며 "고민 끝에 인터뷰 기사를 전송했다."고 이 기자는 말했다. "이는 다른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 <신문, 재벌/족벌의 독점소유부터 깨야(김일 기자 글)> - 참여사회 1998년 10월호 p21~22


신군부의 입장에서 언론통폐합은 여러 효과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잠시 '서울의 봄'을 맞아 자유화의 기대에 부풀었던 언론의 기를 꺾어놓음으로써 언론의 자발적 충성을 유도케끔 만드는 것이었다. 정통성이 전혀 없는 신군부로서는 언론이 단지 굴종하는 것만으론 모자랐다. 언론통폐합 자체를 떠나 이전부터 나돌던 언론통폐합에 대한 소문 역시 언론의 자발적 충성을 유도하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 언론인 강제해직은 언론통폐합에 의해 또 이루어졌다. 1980년 방송 통폐합 당시 민간 방송사에서 KBS로 간 인원은 TBC 681명, DBS 139명, CBS 106명 등 모두 1,105명에 이르렀고 이들 중 2백여 명이 새로운 방송 목적에 적응하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김해식 박사는 1980년 1월 당시 언론 종사자 수는 18,730명인 반면 탄압 뒤인 1981년에는 16,786명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1,900여 명이 한꺼번에 해직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12]

또 해직 광풍에서 살아남은 언론인들은 '합격자'가 아닌 '세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세뇌 수법이 얼마나 치졸했는지 신군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일보 전 회장 방우영조차도 그 수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

통폐합을 단행한 전 정권은 기자들을 세뇌 교육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내걸어 전국 1,900며 명의 언론인들을 새마을연수원에 입소시켰다. 우리 사도 나를 비롯하여 120명이 11회에 걸쳐 수원에 있는 연수원에 들어가 2박 3일 동안 곤욕을 치뤘다. 악명 높은 '삼청교육'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언론인 집단교육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생각과 인식이 얼마나 전근대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 <조선일보와 45년 : 권력과 인간 사이에서>. 방우영 저. 조선일보사. p199.

7. 전두환 정권 내의 이견[편집]

의외의 사실은 원래 전두환 본인을 비롯한 노태우 보안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주요 인사들이 언론의 저항을 우려해 '사이비 기자들만 정리하자'는 수준에서 언론을 정비하자는 입장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허문도 공보비서관은 허삼수(허문도와 부산고등학교 동창) 사정수석비서관과 허화평 대통령비서실 보좌관에게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계엄이 해제되면 언론에서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을 거론할 것이니 정권의 안정성에 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인을 정리해야 한다"라고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언론통폐합을 관철시켰다.

8. 언론통폐합이 우리 언론에 미친 영향[편집]

언론통폐합 아이디어를 낸 허문도는 언론통폐합에 대해 "당시에는 정권이 강제력에 의해 질서를 세우는 단계, 즉 질서의 창세기였다."라고 말했다.[13] 이에 조상호 씨는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에서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해 "언론통폐합은 언론매체시장의 독과점을 제도화시킴으로써 박정희 정권 시기부터 이미 진행되어온 언론의 거대기업화를 심화시켰다. 이로 인해 막대한 이득을 얻은 언론사들은 권위주의 통치에 순응하였고, 1980년대에 들어와 국내 최고 수준으로 뛰어오른 언론사 급료체계는 언론의 비판적 기능 저하를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했다.[14]

이에 강준만 교수는 위와 같은 견해를 종합해 언론통폐합이 우리 언론에 미친 영향을 총 일곱 가지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 언론통폐합은 언론사들의 충성 대상을 박정희로부터 전두환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언론사의 생사여탈권을 마음대로 휘두른 신군부의 횡포와 만행은 전두환에 대한 충성경쟁만이 유일한 생존책이라는 걸 언론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2. 언론통폐합은 전두환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한 조선일보의 고속성장을 가능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조선일보의 경쟁지들은 모두 언론통폐합으로 엄청난 재산을 뺏긴 반면 조선일보는 아무런 피해 없이 5공 정권에 깊이 참여하는 등 5공과 지속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이다.

3. 언론통폐합은 언론매체 시장의 독과점을 제도화시키고 언론의 거대 기업화를 심화시킴으로써 언론의 순응 정서를 배양함은 물론 공산품 제조업체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이윤의 절대적 우선주의'를 언론사 경영자들의 언론철학으로 굳어지게 만드는 결과가 된 것이다.

4. 언론통폐합은 언론인 대량해직이라고 하는 무력시위로 언론인들을 무릎꿇게 한 뒤에 통폐합과 관련된 후속 조치로 순응하는 언론인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특혜를 제공케 함으로써 '기자문화' 자체를 타락케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 언론통폐합은 언론 기업과 언론인들을 정권 안보를 위한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 반면 시민사회 영역에 대해선 그들이 각종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보장해줌으로써 '언론의 특권계급화'라는 습속을 형성케 했다.

6. 언론통폐합은 최소한의 형식적인 명분을 얻기 위해 '방송 공영화'라는 방패를 앞세워 언론통폐합을 단행한 바, 이는 '공영화'라는 개념 자체를 타락케 만드는 결과를 초래해 이후 공영화에 대한 심리적 반발을 낳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7. 언론통폐합은 물리적인 강압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 '통폐합'이란 개념 자체가 언론계에서 트라우마가 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 결과 민주주의가 발달된 오늘날에도 민주적이고 자율적 방식의 통폐합이 바람직해도 통폐합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9. 여담[편집]

언론통폐합으로 해직된 언론인들은 소맥을 만들어서는 '통폐합주'라고 이름 짓고 마셨다.

10. MBC 주식 몰수에 대한 논란[편집]

MBC는 원래 부산의 실업가 김지태가 설립한 민영방송사로, 김지태가 설립한 부일장학회가 전지분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5.16 이후 김지태가 국가에 헌납한 재산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박정희 세력이 국고에 편입하지 않고 5.16 장학회로 전 지분을 이전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일부분이지만 과반수의 지분을 국고로 환수한 것은 옳다는 평가가 많이 있다. 물론 전두환이 환수하여 공영방송화한 MBC를 공영방송에 걸맞지 않고 정부를 찬양하는 국영방송처럼 운영한 것은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국고로 환수를 하려고 했다면 정수장학회 전체를 국고로 환수했어야지 박근혜 일가가 정수장학회를 계속 차지하도록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견해도 있다.

정수장학회를 경계하는 민주당계+진보계 당원들은 김지태 유족측에 돌려주거나, 국고로 환수하거나, 환수 후 부산지역 시민사회재단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정수장학회가 새누리당의 유력 정치인이자 전직 대통령인 박근혜와 관계가 깊기 때문에 민주당계 정당 집권 시기에도 정수장학회 환수 또는 사회환원에 대한 별다른 실효적인 조치가 나오지 못하였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정수장학회를 국고환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 경우 문화방송은 국유의 완전한 공영방송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

11. 관련 자료[편집]

11.1. 동아일보 다큐멘터리 <5공의 언론수난>(1988.10.31 ~ 11.14일자 연재분)[편집]

11.2. 중앙일보 실록 80년 서울의 봄: 언론 숙정·통폐합 제45 ~ 56회[편집]

11.3. 미디어오늘 1995년 3월 27일자 <5공화국편 - 언론사 통폐합>[편집]

11.4. 중앙일보 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문화'[편집]

12. 관련 문서[편집]

13. 둘러보기[편집]

[1] 제5공화국은 1981년 3월 3일부터 시작돼 1988년 2월 24일로 종식됐다. 때문에 언론통폐합은 제4공화국 말기에 일어난 일로 볼 수 있다.[2] 이때는 표준어가 맞았다.항목 참고[3]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4] 이는 일제가 1941년에 하던 짓을 재탕했다.[5] 서울경제가 인쇄 및 배달을 동아일보위탁하면서 병독지로 배달이 되지 않게 되었다.[6] 현재의 경남신문[7] 훗날 이 주파수는 SBS로 넘어간다.[8] 정확히는 "교계 뉴스"라고 해서 교회와 관련된 뉴스는 방송했다. 여기에 약간의 시사 비판 뉘앙스를 섞어 방송하기도 했다고.[9] 이미 1973년 4월에 폐국하였다. [10] 무역협회가 운영하던 무역통신은 이후 무역협회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긴 했다.[11] 동화통신이 있을 때에는 3대 통신사 [12] <한국언론과 사회학>. 김해식 글. 나남. 1994. p156.[13]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언론통폐합을 밝히다> - 백성호 기자 글. 중앙일보 1999년 12월 11일자 19면.[14]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 - 조상호 저. 나남. 1999. p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