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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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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heson line

1. 개요2. 통설3. 진실
3.1. 남침유도설3.2. 트루먼 독트린과의 관계
4. 결과5. 대중매체

1. 개요[편집]

파일:acheson_line_seokj.jpg
애치슨 라인의 개략적인 모습.[1]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한다.

2. 통설[편집]

그동안 애치슨 라인은 미국이 "우리는 일본, 필리핀만 지키면 된다. 나머지는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라고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더니 진짜로 니들끼리 알아서 한 탓헬게이트가 열리고 말았다는 것. 시밤쾅

그러나 애치슨 자신은 이 선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여겼으며, 나중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회고록에서조차 자신의 연설 장소나 제목을 혼동할 정도였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후 제대로 까이게 되었고, 미국 내 보수파에게 평생까임권마저 얻었다. 반면에 북한김일성에게는 오랜 숙원을 풀어내고 비극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게 한 수혜자격으로 칭송받을 수준.

덤으로 2차 대전의 영향으로 파괴된 일본의 성장을 앞당긴 구원투수도 되시겠다. 전쟁특수로 쏟아져 들어온 기술이 일본의 비상에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 일본과 더불어 독일의 재군비도 이 전쟁이 빌미가 되었다. 유럽주둔 미군이 한국으로 가면서 전력공백을 채워야 했던 것.

3. 진실[편집]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국, 대만 섬, 인도차이나 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방위하지 않겠다보다는 목숨걸고 방위하지는 않겠다 정도. 그리고 상대는 그 작은 차이에 목숨을 걸었지

사실인즉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 시 미국 육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연짱으로 치렀으니 당분간 큰 전쟁은 안 일어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는 바람에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2][3][4] 그런데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니... 애치슨은 1954년의 한 세미나에서 "만약 대한민국이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더 도발적이고 호전적으로 되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후 변명에 가까운데, 6.25 전쟁 직전 미군은 국군 포병대 창설을 도우면서 포탄 낭비가 심하다며 대전차포탄 보급을 통제할 정도로 국군의 발목을 잡아놓고 있었다. 이것이 "포탄을 맞아도 멀쩡한 T-34"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애치슨라인 바깥으로 놓아 명시적인 보장을 하지 않았고, 군사적으로는 한국군의 피복, 무장, 탄약, 운영비 모두를 관할하던 고문단이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 하여튼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비를 쓰기 싫어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반론하자면 실제로 포탄 낭비가 심했던건 사실인데 옹진반도의 국지전에서 북한군 1명을 죽이는데 105mm 곡사포탄 350발과 각종 박격포탄을 포함하여 1만 4700여발을 소모했다. 당시 한국군 포병대는 미군보다 더 많은 포탄을 소모하고 전과는 저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비상식적인 포탄 소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T-34는 57mm 대전차포로 320m 이내에서 격파할 수 있고 실제로 철갑탄을 사용해서 격파했다는 증언, 기록이 있다. 물론 코앞에서 쏴서 맞췄는데도 튕겨나갔다는 증언 및 기록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방위선으로 책정한 것이 애치슨 라인이었고,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안 지켜도 되는 지역이 아니라 막강한 공군력으로도 충분히 커버 가능한 지역 혹은 포기할 수도 있지만 가급적 지켜야 하는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장 제독의 반란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에는 항공모함도 필요없다고 간주하고 핵무기전략 폭격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군부 역시도 비슷한 안건을 주장한 바 있지만 애치슨 라인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5] 그러므로 애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비(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지, 결코 공산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라인 밖의 비공산국가를 가만히 내버려두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설사 보수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NATO 밖의 우크라이나처럼 '전력을 다해 반드시 사수하는 지역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공산권에서 침공했을 때 그냥 내버려두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것을, 라인에서 제외한 만큼 절대적으로 방어할 지역이 아니므로 북한이 재빨리 점령해 기정사실화하면 미국은 결국 포기할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애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애치슨 선언 이후 북한에서 나온 발표의 내용은 "조선반도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를 비난한다"였다. 즉 원조법안이 중요했다는 것. 그런데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 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애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 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애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국방비를 포함한 정부예산 일체를 아직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2년차 정부가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 한국이 군사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뭐 여하튼 애치슨 라인은 실질적 의미는 적지만 그 당시 북한에게 사기진작이 되는 명분을 주었고, "미국이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대해 자세한 파악을 하지 못했다!"라는 인상을 주어 남한 침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으므로 비판받기에 충분하다. 애치슨 선언의 의미를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미국은 한반도 유사 시 이에 대응할 유의미한 전력을 갖춘 지상군부대를 신속투입할 생각도 계획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중요한 게, 수천 수만의 인원이 장비를 다 갖추고 이동하는 것은 흔히 양판소에서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군대가 바로 움직인다는 설정과 달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어떤 부대부터, 어떻게 이동시키고, 이에 대한 보급은 어떻게 하고 등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실제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그래도 실행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일정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게 다반사다.[6]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급하게 투입된 스미스 부대는 물론, 대전 전투에서 미 육군 사단이 패배한 것도 급하게 투입되느라 전력을 다 갖추지 못한 것이 한 이유다.[7]

그리고 이 부분이 와전되어서 애치슨 라인의 설정이 북한의 남침 의도를 완전히 굳히게 만든 요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애치슨 라인이 설정되기 전부터 이미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무력 남침을 결정하고 소련의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2차대전 이후 일본은 사실상 미국 군정의 식민지였으므로 미국 입장에서 애치슨 라인의 의미는 대만과 한국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전쟁터로 판단, 군시설을 집중시키지 않고 전쟁터의 배후지로는 과거 식민지였던 필리핀(대만의 배후지)과 현재 식민지인 일본(한국의 배후지)을 활용한다는 전략을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정책이 중국을 자극할 것을 염려해 군사원조를 제한하고 있었으나 혹시 전쟁이 난다면 전쟁터로써 한반도를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3.1. 남침유도설[편집]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학자들이 있으나 이는 무시해도 좋다. 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 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으로 보고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고, 남침유도설이 설령 사실이라해도 미국이 한반도를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공산권의 미끼로 던진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참고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학자들이 종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수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대개는 원망과 한탄조내지 미군도 못 믿는다 정도의 뉘앙스지만.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남침유도설 주장이 재야와 대학가에 퍼졌는데, 이건 강대국들의 외교 문서가 공개되지 않던 냉전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 침공할까 봐 두려워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38선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그럭저럭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문제는, 북한군이 전차를 가졌으니 전차를 보급해달라는 등, 당시 중국과 소련을 통해 물자와 병력 보충을 받던 북한 사정을 근거로 한 이승만의 국군 전력 강화 요구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미국은 그것을 억지 또는 착오로 여겼지 미국이 북한 사정을 알고서 한국군을 제어하려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남침을 유도했다면 정작 남침을 유도한 미군은 왜 박살이 날까?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급한 나머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주일미군의 일부 부대인 일명 '스미스 부대'(미 24사단의 1개 보병대대+포병 1개포대로 이루어진 대대급부대)를 먼저 파병했는데, 얘네들은 일본에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너무 편하게 지낸 데다가, 국공내전일본군과의 치열한 게릴라전까지 치른 전투의 베테랑이었던 조선인민군[8] 우습게 보다가 큰 코 다치기도 했다. 첫타자인 스미스 부대는 그렇다 쳐도 그다음에 도착한 미24사단은 사단 전체가 대전 전투에서 역시 개발살나다 못해 무려 사단장[9]까지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10] 만약 미국의 음모론 운운하는 일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군은 왜 한국전쟁 초반에 이리 허술하게 대처했을까? 백선엽도 회고록에서 북한군을 너무 깔본다고 초기에 참전한 미군들에게 얕보지 마라고 충고했지만 그 충고를 무시하고 실전 치른 미군이 호되게 털린 다음에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고 비아냥거리자 미군 장교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오해는 지금도 이어져서 웹툰 70의 작가 김재희가 직접 애치슨 라인은 한국에서 미국이 철수하여 일본을 방위선으로 삼는 계획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3.2. 트루먼 독트린과의 관계[편집]

나는 자유민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개척하도록 우리가 도와야만 한다고 믿습니다(I believe that we must assist free peoples to work out their own destinies in their own way). 47년 3월 미 의회, 트루먼 출처##


트루먼 독트린은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해리 S.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원조 개시를 역설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조지 C. 마셜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의 동맹을 위해 노력했던 마샬은 이제 소련과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트루먼 독트린에 대한 미 상원의원 청문회에서 국무차관은 딘 애치슨이었는데, 그는 트루먼 독트린을 한국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을 방어해야 할 또하나의 나라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많은 상원의원들은 경악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극동의 전쟁에 개입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딘 애치슨은 통념과 달리 한반도에 대해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마샬과 애치슨은 의회에 그리스와 터키의 경제원조 금액은 각 4억달러를 요청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금액은 6억달러를 요청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직접 대치하는 곳이었으며, 두 체제(regime)가 실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뒤 애치슨은 기존 트루먼 독트린에 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문제의 애치슨 선언을 발표한다. 3년간 뭔 일이 있던거냐

4. 결과[편집]

그러나 의도야 어쨌든 딘 애치슨은 방위선 하나 잘못 긋는 바람에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었음은 물론 미국 내 보수파들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실제로도 1950년 말에는 의회결의 형식으로 국무장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고, 죽을 때까지 보수파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변호해야만 했다. 한국에서의 악명이야 둘째치고 미국에서도, 한국전쟁동안 미국은 엄청난 군비를 썼고 만단위 사상자가 났으며, 외교전략을 고쳐 일본과 독일을 완전히 청소하지 못한 채 재무장시켜야 했고, 이 전쟁과 전후처리동안 소련과 중국을 대등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니, 어쩌면 그 선 하나 때문에 그 전쟁이 일어났을 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애치슨이 좋은 소리를 듣긴 어렵다.

애치슨 자신이 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고 정치가로서도 평판이 좋았다는 점에서 애치슨 선언은 아시아 정세에 어두운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능한 정치가가 당장 눈앞에 닥친 국내정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이 발생할 것이 예상되는 지역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는 어설픈 암시를 했다가 진짜 피 터지는 전쟁에 말려든 비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게다가 애치슨은 미국 국내만 아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럽 방면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식을 가진 정치가라 더욱 비극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정치 전반에 무감각한 작자는 아니라는 것. 당장 마셜 플랜이나 서유럽의 재건, 소련 블록의 확대 방지나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창설 등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주요 업적은 사실 애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오히려 서유럽에서 그는 서유럽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고,[11] 이렇게 유럽에만 관심이 있고 아시아에는 일본을 빼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후 냉전/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북한 및 공산 세력의 위력에 놀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의 참전이 확정된 후 서둘러 한국군 지휘권을 (한국 주둔 유엔군 사령부라는 이름으로 된) 주한미군에 넘겨주게 된다. 이후 평시작전권은 돌려받았지만, 핵심인 전시작전통제권은 계속 유엔군 겸 미군이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5. 대중매체[편집]

대체역사소설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그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비밀 회담을 제의하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그날 밤 애치슨은 분노에 찬 채로 폭음을 하고 바로 다음 날 과로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존 포스터 덜레스[12]가 새로운 국무장관이 되고 맥아더가 한국전쟁의 작전권을 계속 가지게 되면서 미국은 아시아 중심의 외교/국방정책 노선으로 전환한다. 덕분에 애치슨은 죽은 뒤에도 자꾸 까인다.

[1] 쿠릴 열도는 포함되지 않는다.[2] 이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 자세히 나와 있다.[3] 심지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기지에 "기념물"로 둔 M26 퍼싱 전차까지 가져왔다고 한다.[4] 미국은 아니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캐나다의 경우에도 UN 결의에 따라 파병하게 되었을 때 파병할 상비전력이 본토에 없어 새로이 지원자들을 모집해 부대를 편성, 훈련시켜서 한국으로 보냈을 정도였다. 당시 캐나다 참전용사 중 한분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다큐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허쉬 가(家)의 둘째가 먼저 파병되었는데 얼마후 큰형도 자원입대해서 한국에 왔고 같은 중대에 속했지만 형제들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과의 격전에서 간신히 적을 막고 전사자들을 옮기는데 동생이 형의 시체를 발견했고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괴로워하던 동생은 나중에 별세하면서 부산의 UN군 묘지에 안장된 형과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결국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까지 이 사례가 전해져 동생의 유골이 형과 함께 안장되게 되었다. 본래는 배우자만이 허용되는데 동생도 한국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로 보인다.[5] 미 공군은 핵무기와 폭격기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므로 해군이 퍼먹는 예산이나 좀 줄이고 자기들 잘 봐달라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었으나 해군은 이에 반발하여 제독들의 반란이 발생하는 등 미군 내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6] 출동을 목적으로 설치된 119나 파출소/지구대조차 장비 갖추고 지원 요청하고 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병사 개인이 40kg을 짊어지고 가야하는(이건 창칼 쓰던 시대도 마찬가지) 군대가 출동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좀 더 간단히 봐서, 긴급한 연락이 왔을 때 직장이든 집에서든 1분 안에 준비해서 현장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7] 작계 어쩌구 하면서 재차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미국 본토에서 증원될 전력의 규모를 정하고, 어떻게 투입할지 계획하고, 실제로 미군의 사전배치선단이나 대형수송기로 전차 등 중장비나 스트라이커 여단의 신속투입 등을 훈련하는 게 괜한 행동이 아니다.[8] 당시 인민군에는 홍군김원봉조선의용대 소속으로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병력이 무려 3개사단이었다! 이들은 인민군 선봉으로 전쟁 초기 경험이 일천한 국군을 완전히 개발살내버렸다.[9]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 자세한 내용은 수색 및 구출 작전 중 순직한 기관사인 김재현(철도 기관사) 문서 참고.[10] 이때가 되어서야 맥아더를 비롯한 본국의 미군 수뇌부는 북한군의 전투력을 재평가하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단순한 경찰활동'이 아니라 실제 전쟁임을 인식하고 가용가능한 군사력을 한국에 빨리 투입시키려고 난리를 쳤다...[11] 사실 애치슨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시 미국 정부나 미국 의회, 미국 정보부에서도 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다. 지금이야 들 때문에 백악관 내에서도 아시아 전문 자문관들이 배치되어있지만 당시는 현재 21세기같은 동아시아 정세가 형성되기 한참 전이였기 때문.[12] 대일강화조약을 주도한 외교통으로 아시아 우선 전략을 주장했고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실제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