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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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 공화국
República de Angola

파일:앙골라 국기.png

국기

파일:앙골라 국장.png

국장

면적

1,246,700km2

인구

30,643,234명

수도

루안다

국가

앙골라여 전진하라
(Angola Avante! )

공용어

포르투갈어, 기타 토착어[1]

정부형태

단일국가,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대통령

주앙 마누엘 곤살베스 로렌수

부통령

마누엘 비센트

민족구성

오잉분두인, 킴분두인, 바콩고인 등

종교

기독교 75%(가톨릭 50%, 개신교 25%) 토착종교 25%[2]

화폐

콴자

GDP

명목 1240억 3400만$

1인당 GDP

명목 4,401$

UN가입년도

1976년 12월 1일

남북수교현황

대한민국: 1992년 1월 6일
북한: 1976년 4월

교민 수

200명

여행경보

전지역 여행유의

앙골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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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 República de Angola (헤푸블리카 드 앙골라)
콩고어, 음분두어 : Repubilika ya Ngola

1. 개요2. 역사3. 상징물
3.1. 국기3.2. 국장3.3. 국가
4. 경제
4.1. 풍부한 지하 자원과 빈부 격차4.2. 중국인의 경제 장악4.3. 빈약한 제조업4.4. 부패한 경찰과 노동비자
5. 스포츠6. 외교 관계
6.1. 포르투갈과의 관계6.2. 한국과의 관계6.3. 러시아와의 관계
7. 기타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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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남서부에 위치한 국가. 콩고 민주 공화국, 잠비아, 나미비아와 접하고 있으며 본토에서 떨어진 월경지 카빈다(Cabinda) 주를 통해 콩고 공화국과도 접하고 있다. 국토면적은 124만 6,700㎢[3], 인구는 3064만여 명(2018년 기준) 수도는 루안다(Luanda). 언어는 주로 니제르-콩고어족에 속하는 토착 언어들이 사용되기도 하며, 공용어인 포르투갈어도 쓰인다.

2. 역사[편집]

1483년 포르투갈의 항해사 디에고 카옹(Diego Cão)가 앙골라 북부해안에 도착하여 콩고 왕국을 방문하면서 처음 유럽에 알려졌다. 당시 앙골라 지역에는 몇 개의 부족 왕국들이 있었으며 한동안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였다. 본격적인 포르투갈의 진출은 1540년대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루어졌으며, 1575년 포르투갈은 군대를 이끌고 앙골라를 침공하여 해안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앙골라의 대서양 연안 도시들 대부분은 이런 목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이 개척한 것으로, 수도인 루안다는 물론 벵겔라, 루방고, 그리고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카빈다 모두 마찬가지.

이 시기까지 포르투갈에게 앙골라는 그렇게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다. 주로 인도 무역을 할 때 지나가는 거점 지역으로 활용되거나,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노예의 공급지로 이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포르투갈이 콩고를 식민지화하는데 실패하고[4]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포르투갈은 본격적으로 앙골라 식민지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내륙진출이 이루어지고, 이후 열강들간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을 통하여 오늘날의 앙골라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포르투갈의 기본적인 식민지 정책은 동화와 강제노역이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철저하게 차별하여 대우했으며[5], 식민지 농업과 다이아몬드 광산개발을 위하여 무수히 많은 앙골라인들이 '계약노동'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하였다. 이는 당연히 앙골라인들의 불만과 지속적인 봉기를 낳았다.

20세기초 범아프라카운동이 대두되면서 독립운동의 물결이 조금씩 일기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1956년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이 조직되고, 1958년에는 앙골라인민연합(UPA)가 창설되었다. 1961년 이들 단체의 무장독립투쟁에서부터 앙골라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앙골라 독립에는 소련, 중국, 쿠바를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지원이 활발하였다.[6] 한편 소련과 쿠바가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을 지원하자 소련의 라이벌인 미국과 서방세계는 우파 성향의 앙골라인민연합(UPA)과 그 후신인 앙골라민족해방전선(FNLA)을 지원하며 이들은 경쟁관계 속에서 포르투갈이라는 상대를 두고 포르투갈군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와중에 1974년 포르투갈 제2공화국 독재 정권이 카네이션 혁명으로 붕괴되고 혁명 후 들어선 포르투갈 신정부가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1975년 앙골라는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도 잠시 앙골라는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독립군 단체들과의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 내전은 당시 앙골라에 있던 세 부족의 갈등, 냉전시기 이데올로기 문제, 그리고 앙골라의 자원을 둘러싼 열강들의 개입에서 비롯된다. 최초에는 당시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주요 독립군 단체인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7] 앙골라민족해방전선(FNLA),[8] 앙골라전면독립연맹(UNITA)[9]들의 인물들이 골고루 섞인 내각을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게 된다. 앙골라의 45%에 달하는 사람들이 UNITA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UNITA는 선거를 통한 정당제를 통한 내각 구성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FNLA와 MPLA는 이에 반발하였으며, 특히 이들은 UNITA보다 군사적인 힘이 강하였기에 무력을 통한 정권탈취를 꿈꾸게 된다.

결국 MPLA는 군사력으로 주도권을 잡고 사회주의 정권인 앙골라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UNITA와 FNLA가 임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별개의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고, 중국미국, 남아공은 이 정부를 지원하였다.[10] 이에 대항하여 소련과 쿠바는 본격적으로 MPLA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군사적 힘이 열세였던 UNITA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의 앙골라 주둔을 추진하였고, 이에 남아공군은 앙골라 보호와 나미비아 독립투쟁단체를 토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앙골라에 주둔하면서 내전에 깊숙이 개입한다. 이에 반발하여 쿠바 역시도 대거 군사개입을 하였으며, 내전 중에 쿠바군과 남아공군이 직접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내전은 국제화되고 냉전의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내전은 1980년대에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FNLA가 MPLA과의 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을 중단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MPLA와 UNITA의 2파전이 된다. 20여년 간의 독립전쟁 이후 10년 넘게 지속된 내전으로 인하여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이러한 내전은 냉전이 종식되면서 종식될 했다. 1988년 쿠바와 남아공은 협정을 통하여 앙골라에서 철수하고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유엔 평화 유지군이 파병되었다. 그리고 MPLA 정부는 사회주의 일당제가 아니라 복수정당제를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1991년 미국, 소련, 포르투갈의 중재 하에 MPLA와 UNITA는 1차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선거와 정전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 평화 유지군이 재차 파병되었다. 그리고 1992년 앙골라 공화국의 신헌법이 제정되고, 선거가 이루어진다. 당시 대선은 MPLA의 승리로 끝났는데, UNITA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내전을 일으킨다.

앙골라 내전이 1975년 이래 끝나지 않았던 이유는 정부(MPLA)와 UNITA가 앙골라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각각 장악하여 경제력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앙골라는 산유국이며, 다이아몬드 산출량도 높다(다이아몬드 생산량 세계 4위). 특히 석유는 매장량이 100억 배럴+a로 추정되어 세계 석유산업계가 군침을 삼키고 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은 부족간 대립이다. UNITA는 오빔분두족이 주도하며 MPLA는 다른 유력 부족이 이끌고 있다. 이처럼 양대 부족이 각각의 이념 및 자원 대결을 펼치면서 내전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50만 명이 사망하고 1993~94년 사이에는 하루 평균 1천 명이 희생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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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스 사빔비
코가 무슨 만화 캐릭터 같다

이런 상황은 2002년에야 겨우 해결의 실마리가 열려서, UNITA의 리더였던 조나스 사빔비(Jonas Malheiro Savimbi)[11]가 전사하면서 UNITA 세력이 약화, 정부와 UNITA는 정전 각서를 교환했고 가까스로 국가는 안정되고 있다. 그러나 2010년 독립을 주장하는 카빈다 지역에서 토고 축구대표팀이 테러를 당하는 등, 국가 치안은 여전히 불안하다.

또한 앙골라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360만명에 이르는데, 국토의 대다수에 지뢰가 남아있어서 지금도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있으며, 앙골라는 세계 최악의 대인 지뢰 피해국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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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현 대통령인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는 이념 따윈 내팽겨치고 국민들을 위한 복지나 교육, 의료문제같은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제 잇속 챙기기에 몰두하는 부패한 인물이며, 1979년에 첫 집권한 이래 2000년대 안정화 이후로도 계속 집권을 이어나가고 있다.[12]

내전 이후 앙골라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역시 산투스와 그 측근을 중심으로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앙골라 전체 국부의 30%를 대통령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그의 딸인 이자벨 두스 산투스는 앙골라 국내는 물론 과거 식민지 종주국인 포르투갈 및 유럽 내에서 여러 회사를 소유하고 있고, 아프리카 대륙 내 유일한 여성 억만장자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부정부패로 체포되어 포르투갈에서 조사받고 있는 정부 각료 문제로 양국간 정상회담이 취소되는 등 외교 분위기가 험악해진 상황이다.

2017년 8월 24일에 있었던 선거에서 여당인 앙골라인민해방운동이 승리했고 후보인 주앙 로렌수가 대통령으로 9월 26일에 취임했다.##

3. 상징물[편집]

3.1. 국기[편집]

파일:앙골라 국기.png
독립 이래 채택하고 있는 국기. 빨강은 독립 투쟁, 검정은 아프리카, 노랑은 국부(國富)를 의미하여, 톱니바퀴는 공업과 노동자, 마체테는 농업과 농민, 별은 단결과 진보를 의미하는 데 별과 톱니바퀴, 마체테의 모습이 낫과 망치와 많이 닮았다. 이는 공산 앙골라의 집권당이었던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의 당기를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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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제안된 국기 시안(試案). 귀엽다 다만 제안만 되고 채택은 되지 않았다. 어째 인공기 삘...

3.2. 국장[편집]

3.3. 국가[편집]

4. 경제[편집]

4.1. 풍부한 지하 자원과 빈부 격차[편집]

석유다이아몬드 외에도 막대한 양의 철광석과 석탄이 매장되어 있으며, 국토 대부분은 사바나이다. 앙골라에는 추정으로는 약 100억 배럴이 넘은 석유를 가지고 있으며, 다이아몬드 생산량이 세계 4위에 이를 정도로 매장량이 많다.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이자 OPEC 가입국. 아프리카 제7의 경제대국(나이지리아, 이집트, 남아공, 알제리, 모로코, 수단 순).

더욱이 경제성장은 연 10%를 넘는 매우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1인당 GDP가 5천달러이고 PPP로는 6100달러인데, 이게 5년전에는 2500달러였다. 하지만 1인당 GNI (국총소득으로 국총생산인 GDP와는 다르다)는 4800달러 정도로 소폭 내려간다.

그런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이유는 어마어마한 양극화 때문. 2007년 당시 앙골라 인구의 70%는 하루 2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게 지금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유는 석유수입의 다수가 횡령으로 낭비되거나 과시용 사업에 투입되고(...) 정작 필요한 복지(의료제도, 교육)나 마이크로크레디트, 공공주택 건설같은 부분에 별로 예산이 돌아가지 않고 산토스 대통령을 비롯한 윗대가리도 위낙에 썩어있다보니 앙골라 당국도 이를 시정할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 그런데 정작 지니계수는 0.5를 안넘는다.

이러한 상황이라 1인당 PPP GDP는 세계 113위인데 인간개발지수(HDI)는 세계 148위로 35계단이나 낮다. 인간개발지수는 GDP만으로는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판단하는데 한계가 많기 때문에 교육 연수와 평균 수명을 고려한 지표인데, 1인당 GNI 4812달러, 예상교육연수 10.2년, 실제 평균 교육 연수 4.7년, 평균수명 51.5세[14]로 나온 최종 점수가 0.508.
2016년 WHO 조사 기준, 평균수명이 세계에서 2번째로 짧다.

여담이지만 위키피디아와 페이스북이 해적판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을 전파하는 온상이 되고 있어서 은근히 골치를 썩고있다고 한다(...). 이유는 페이스북과 위키피디아가 앙골라 현지통신사와 제휴해서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도입시켜놓았는데 앙골라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이 많아 인터넷 사용을 하기 힘든 사람이 많기에 무료 서비스가 환영받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 무료 서비스라는 것이 "교육적인 목적"이라는 명목하에 페이스북이나 위키피디아 같은 일부 사이트만 무료로 이용해보게 하는 식이었던지라 위키피디아와 페이스북의 정석적인 이용에 질린(?) 네티즌들이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페이스북과 위키피디아 사이트에다가 영상공유를 하려고 페이스북과 위키피디아에 영상을 올려놓는 경우가 많아졌고 결과적으로 페이스북과 위키피디아가 해적판 영상 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http://motherboard.vice.com/read/wikipedia-zero-facebook-free-basics-angola-pirates-zero-rating

상술한 것처럼 산유국이기도 하고 비싼 물가[15]까지 겹쳐서 루안다는 아프리카의 두바이라고도 불린다. 실제로도 30곳에서 40곳에서 대형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 곳이 루안다이다. 다만 절대다수의 루안다 시민들은 루안다의 막대한 물가를 힘들어하는 빈민층으로 극소수의 졸부들 혹은 중국인들같은 외국인들이나 향유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중심가의 월세가 소득수준에 비하면 엄청난 수준인데 그래서 빈집들이 많다. 물론 빈민층들은 그런 집에서 살 능력이 없어서 판자촌에서 산다고. 루안다에는 100m가 넘는 빌딩이 여러개 있으며 현대적인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 이게 다 오일머니 덕분인데 이 건물들은 200미터를 넘지는 않지만 한국 기준으로도 근사하다.

4.2. 중국인의 경제 장악[편집]

2002년 내전이 끝나자마자 중국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도매시장을 장악해버렸다(...).[16] 여기에 중국 정부가 2004년 10월 정부개발원조(ODA) 명목으로 융자한 20억 달러는 앙골라가 날마다 석유 1만 배럴씩 17년 동안 중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지원되었는데,[17] 이 20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중국 국영기업이 수주하고 설비, 자재, 심지어 하급 건설 인부 같은 노동자 마저도 몽땅 중국에서 가져다 써서 정작 지원 대상인 앙골라에는 한푼도 돌아가지 못했다(...).[18] 원자바오 전 총리가 2006년 직접 방문했을 정도로 중국의 관심이 지대하지만, 이런 식으로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돈과 자원을 중심으로 마찰이 빈번하여 충돌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가뜩이나 생계가 막막한 중하층민을 중심으로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고 있다. 결국 반정부 시위까지 벌어지고 일부 반정부 세력이 이런 시위대를 통하여 지금 정부를 뒤엎자고 하는 탓에 겁먹은 정부가 이게 죄다 칭총[19]이라고 책임을 떠넘기면서 혐중이 깊어졌다. 중국-아프리카 관계 참고.

거기에 중국을 중심으로 대규모 곡물 농장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 대대로 작게 농사를 짓고 살아가던 이들에게 한푼 보상도 없이 땅을 빼앗아 정부가 준 탓에 여론이 폭발했다. 실제로 이렇게 땅을 빼앗긴 어느 앙골라 민중 한 사람이 그 분풀이로 중국인 농장 직원을 낫으로 찔러죽인 적도 있다. 그리고 수천여명 민중들이 모여서 그의 석방을 부르짖기도 했다.[20]

2015년 초부터 시작된 유가파동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 이에 치안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특히 중국인을 대상으로한 범죄가 증가하였다. 특히 2015년 5월은 주당 평균 3명의 중국인이 현금을 노리는 현지인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상황이었다.

4.3. 빈약한 제조업[편집]

앙골라를 비롯한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이 가진 문제로써 빈약한 제조업으로 인해서 전자나 기계 제품 가격이 무시무시하게 비싸다. 한국산 자동차 부품이 현지에 오면 10배가 된다 덕분에 싸구려 중국 제품을 포함해서 그나마 좀 괜찮은 브라질과 남아공에서 오는 제품이 시장에 많은데 이마저도 없어서 못쓴다. 그래도 2013년부터 대형 마트가 생기면서 물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이 많아졌다.

원래는 식민지 시절 포르투갈에서 대규모로 투자를 하여서 충분한 인프라와 제조 설비가 있어 오히려 농업에 집중하던 본국보다 경제 사정이 나았을 정도였지만 독립 직후 독립을 주도한 흑인들을 중심으로 반강제적인 백인 추방[21]으로 기술자와 관리자들 대부분이 공백 상태가 되고 여기에 치명타로 내전으로 모든 것[22]이 파괴되고 황폐화되었다.

4.4. 부패한 경찰과 노동비자[편집]

앙골라에서 가장 무섭고 위협적인 사람들은 폭력조직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폭력조직을 잡아야 하는 경찰들이라고 한결 같이 증언한다. 푸른색 제복을 입은 일반 경찰들도 있지만, 현지인들도 욕하는 가장 악질 집단이 있다면 'BET'라고 불리는 '고속도로 교통 경찰들'로써 외국인을 비롯해서 현지인에게도 악명을 떨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외곽 도로와 주 경계선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물류업을 하는 현지인들은 이들에 대해 얘기할 때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외국인은 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보너스 제공자로써 왠만해서는 총을 쏘지는 않지만 총으로 위협해서 보너스를 뜯어가는데 눈을 불키고 다닌다. 만약에 경찰이 총을 쏘았다면 본인이 아무런 죄가 없어도 당사자는 최대한 빨리 앙골라를 떠나는 것을 추천한다.

만약이 아니라 시내를 다닐 때에는 필수적으로 여권을 가지고 다녀야 하며, 여권에는 앙골라 입국 비자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비자에는 일반 비자와 노동 비자가 있는데 일반 비자는 단기간 1개월 정도로 여행이나 단기간 출장용인데, 현지어를 못하면 이것도 의심한다면서 꼬투리로 잡는다. 그러면서 강제 기부를 강요한다. 안하면 본인이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그 경찰과 인내심 싸움으로 최소한 2시간, 최대 반나절까지 시간 허비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과의 강제기부 협상이 늦으면 늦을 수록 강제 기부액은 늘어난다.

노동비자가 있으면 최대 2년간 법적으로 앙골라 내에서 경제활동과 거주가 가능하다. 하지만 경찰들에게는 강제기부자로 보일 뿐이다. 특히, 주 경계선을 넘어다닐 때마다 검문소가 있는데,[23] 노동비자가 있더라도 경계선을 넘어다닐 때마다 돈을 비롯해서 음료수 등 각종 물품의 기부를 강요한다. 거부할 경우에는 붙잡아서 강제 차량 점검을 실시한다. 단 고장나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앙골라 교통법규에 명시된 물품, 예비 타이어 및 자신의 교통법규를 강요한다.

만약에 비자가 있어도 여권 미소지 또는 비자 기한이 넘긴 여권 등으로 잡히면 경찰서에서 하룻밤이 아니라 무기한 구치소 생활을 각오해야 하며, 강제 추방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와 같이 인권 보호를 받으면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심지어 맞는 운전증을 가져와 운전사 운전 면허증을 경찰이 보더니 보더니 이 운전증은 위조라 난리를 치면서, 결국 100달러를 다시 갈취해갔다[24]는 증언까지 있다. 면허증의 경우에도 앙골라 정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국내에서 발급된 국제 운전 면허증, 앙골라가 정부가 인정하고 있는 아프리카 공인 면허증 전부 소용이 없다. 오로지 자국 면허증을 요구하기에 기부할 생각이 없다면 끝까지 버티는 수 밖에 없다.[25]

심지어 귀국하는 날에도 공항으로 가는 도로에서 경찰이 택시 운전자에게 시비를 걸어와서 결국 50달러를 경찰에 주게 된다[26]고 하기 때문에, 앙골라를 다니는 사람들은 매일 돈을 가지고 다녀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곳이 앙골라라고 증언한다.

반면에 중국은 앙골라에서 다수의 건설현장과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면서 노동비자가 타외국인에 비해서 쉽게 나오나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또한 경찰 단속에 걸려도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그냥 약간 돈을 주고 끝내나 중국인 건설용 덤프 트럭이나 대형 차량 운행자는 뇌물 요구를 무시하고 순순히 경찰서로 들어간다. 그렇게 하루 이틀 정도 있으면 중국 대사관에서 나와서 이들을 풀어준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일이 있지 않는 한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데 그도 그럴 것이 중국 노동자들은 앙골라로 오기 전에 최소 3년 짜리 계약을 맺고서 와서 일을 하는데 만약에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할 경우에 엄청난 위약금을 물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 기간 중에 억류 기간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를 반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에 많은 운전자들은 경찰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며. 만약 붙잡히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돈을 뜯어 간다고 한다. 앙골라에 일주일 이상 거주하면 4회 이상은 이런 돈을 뜯겨간다고 해서,[27] 앙골라에서 공무원들은 아주 직업이 좋다고 한다. 장소가 어디든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뒷돈을 챙길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자료

노동비자를 발급받으려면 우선 서울 한남동에 있는 앙골라 대사관에서 길어야 1개월 정도의 일반 비자를 발급받고서 앙골라에 가서 노동비자를 신청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때부터가 시작이다. 앙골라 내무부에 노동비자를 신청해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 물론 급행비가 있지만 2014년 당시만 해도 급행비가 최소 2만 달러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현지 경찰에 막대한 뇌물을 뜯겼다.[28]

5. 스포츠[편집]

축구와 농구가 인기가 많다. 농구의 경우 올림픽이나 세계급 대회에서는 동네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내에서는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프리카 선수권 대회(FIBA Africa Championship)만 봐도 1989년을 시작으로 11번 우승하며 최다 우승국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1 마다가스카르 대회에서 튀니지에게 패해 7회 연속 우승은 좌절됐지만 2013 코트디부아르 대회에서는 이집트를 17점 차로 이기며 통산 11번째 우승을 거두었으며, 이 다음으로 이집트와 세네갈이 5번 우승으로 뒤를 잇고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동네북 신세라는 말도 들어맞지 않게 되었는데, 2002년 미국에서 열린 농구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2라운드에 진출한 데 이어 2006년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일본을 87-62로 뭉갰으며 뉴질랜드를 상대로는 95-73으로 압승했고 덕 노비츠키가 분전한 독일과 연장전 끝에 103-108 패, 우승한 스페인에게 83-93으로 분전할 정도로 솜씨를 뽐내며 사상 최고 성적인 10위를 기록했다.

2010년 터키에서 열린 농구 월드컵 대회에서는 요르단을 이기며 역시 16강에 진출하여 3회 연속 월드컵 2라운드 진출을 이룩했다. 이후 한국을 상대로도 80대 69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최종 순위 17위를 기록하며 16강 진출에는 실패했다[29].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여자 농구가 본선에 진출했고 남자 농구는 최종 예선 8강까지 진출했지만 러시아에게 65:8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축구는 앙골라 축구 국가대표팀 참고.

6. 외교 관계[편집]

6.1. 포르투갈과의 관계[편집]

예전에 포르투갈에 지배당한 적이 있으며, 그 영향으로 포르투갈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고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의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포르투갈인들이 앙골라로 이주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앙골라가 산유국이라서 포르투갈이 경제적인 위기를 겪을 때 지원하는 등 완전히 관계가 역전되었다.# 포르투갈 지못미

6.2. 한국과의 관계[편집]

대한민국과는 한때 사회주의 국가 성향 때문에 외교관계를 맺어오지 않았다가 1993년에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이전 1988년 서울올림픽에 공식 참가했던 적이 있다.

북한과는 독립 후인 1976년에 수교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졌으며,[30] 국제 공항에 한국말 하는 사람 중에 북한 사람이 있으니 주의가 필요함 북한 의사들이 대거 앙골라에 파견이 된 상태로써 현지에서 높은 대우를 받는다. 그래도 월급이 적어서 전화 선불 카드 등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6.3. 러시아와의 관계[편집]

러시아소련시절에 앙골라를 지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앙골라도 친러성향을 띄고 있다.

7. 기타[편집]

2011년 미스 유니버스 라일라 로페즈를 포함, 국제 미인대회에서 아주 괜찮은 성적을 보여준다. 국제대회 참가 기간이 고작 10여년인데 한명의 미스 유니버스와 3명의 탑16위 진출, 미스 월드 대회에서 3명의 세미파이널의 성과를 거두었다.이들이 백인 취향에 맞는 비욘세풍의 백인 얼굴에 검은 피부의 마른 여성인지라 뚱뚱한 여성이 선호되는 자국에서는 이해를 못하기는 한다. 물론 빈부격차가 심한 앙골라의 특성상 미인대회에서 상위권을 확보하면 말 그대로 출세길이 열리는건 맞고, 앙골라인들도 세대별로 취향이 갈리기는 마찬가지라서 여기도 도시나 젊은층으로 갈수록 서구풍 몸매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기는 하다.

과거 내전의 영향으로 지뢰가 많이 매설되어 있다.아프가니스탄, 비무장지대 등과 함께 손꼽히는 지뢰 매설량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 화폐 개혁을 하여서 액수 단위는 다양하게 있는데 (10, 50, 100, 1000, 2000, 5000 콴자) 대개 1달러에 100 콴자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팁 단위는 1,000 콴자(10 달러, 한국 돈으로 약 10,000원 이상)를 요구하는 현지인이 많다. 공항에서 대개 짐을 찾거나 나르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데 잘못해서 짐을 맡겼다가 팁으로 100달러를 요구하는 놈들이 있으며 어설프게 1달러를 꺼내면 따지는 현지인도 많으니 주의 요망

2013년 말에 앙골라가 이슬람을 금지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앙골라 정부는 부정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항의시위를 했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앙골라에 칼리프제를 확립하자느니, 이슬람이 세속주의를 근절할 거라느니 하는 구호나 내세우는 병신인증을 했다. 2015년에 정말로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뉴스 등에 보도되었다.

신정환이 룰라 1집을 마치고 군입대하여 육군 제203특공여단에 배치되었는데, 정훈병으로 상대적으로 널널하게 보내다가 파병에 자원했는데 유엔 평화 유지군 소속으로 이 앙골라에서 군생활을 했다. 파병은 100% 지원으로 심사를 거치고 파병을 가서도 위험한 상황에서의 임무수행과 강도높은 훈련을 요구하므로 이 당시 여론도 신정환의 파병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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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현역입대+파병생활로 신정환의 방송 이미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의 배경 중 하나로 이 나라의 자이르와의 국경지대가 등장한다. 작중 배경이 내전이 진행되던 시대인 1984년인지라 UNITA를 지원하는 남아공 기반 용병들이 적으로 등장한다. 게임이 미완성작에 가까운지라 전작처럼 MPLA 소속 병력도 적으로 등장해서 교전한다든지 하는 부분은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1] 콩고어, 초퀘어, 움분두어, 킴분두어, 강겔라어, 콰냐마어[2] 영어 위키피디아 및 CIA 월드 팩트북 통계.[3] 세계에서 23번째로 넒다.[4] 당시 포르투갈이 콩고를 먼저 발견했다며 식민지영유권을 주장하였는데 무시당하고, 벨기에가 식민지화한다.[5] 하지만 막상 포르투갈어 교육이 제대로 이루워진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당대 본국인 포르투갈도 20세기 중반에도 식민열강 답지 않게 문맹률이 40%를 한창 넘나들었을 정도로 교육에 대한 투자가 미비했기 때문에 앙골라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루워질리는 만무했고 그래서 1950년대 당시에 앙골라의 문맹률이 98%에 달했다. 포르투갈어는 물론이고 ABCD를 외우는 사람조차 소수계층에 불과했다는 것.[6]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혁명과 관련하여 식민지 해방을 중요시여겼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냉전시기 세력확장을 위하여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한편 중국의 경우에는 소련과의 대립, 제3세계 주도권을 둘러싸고 활발하게 해외 원조를 하고 있었다.[7] 응분두족이 지지하는 사회주의계열의 독립단체.[8] 앙골라인민연합(UPA)의 후신으로, 바콩고족 중심의 우익적 성향 단체. 독립전쟁시기 때부터 자신들이 유일한 앙골라의 독립단체라고 주장하며 다른 독립단체를 공격하는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다.[9] 앙골라인민연합(UPA)의 지나친 종족주의에 반발하여 분리된 독립단체.[10] 이로 인하여 당시 미국과 중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펴는 남아공과 결탁했다면서 아프리카 각 국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11] 앙골라 내전 당시에 미국과 서방 국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서 수도 루안다를 빼고 앙골라 전역을 장악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루안다 점령을 앞두고 미국과 서방 국가와 맺은 밀약을 깨고 앙골라 자원 독점을 선언한다. 이 때 무려 친소 정권이고 상당수 중요 인물이 소련에서 유학을 다녀오거나 군사 훈련을 받은 인사로 구성된 MPLA 정권에서 미국으로 특사를 보내서 밀약을 맺으면서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MPLA를 밀어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전세가 완전히 뒤집힌다.[12] 이 사람은 로버트 무가베보다 더 오래 집권중이지만 1975년부터 집권 중인 카메룬의 폴 비야, 비록 미승인국이지만 모하메드 압델 라지즈가 1976년부터 집권 중인 서사하라같이 더 장기집권 중인 나라도 있다(모두 아프리카 나라이다). 덤으로 나이도 같은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둘 다 1942년생)가 똑같이 1979년부터 집권 중인 적도 기니도 있는데 음바소고가 한달 더 집권을 빨리하여 산투스보다 더 오래 집권중이다.[13]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무리한 도전 오프닝에 크게 등장한다.[14] 참고로 1인당 GNI가 1684달러로 앙골라의 1/3 수준인 가나의 인간개발지수는 세계 135위. 나머지 세 지표는 각각 11.4년, 7년, 64.6세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앙골라는 소득 수준에 비해 교육 및 의료 등 시설이 열악함을 알 수 있다.[15] 2014년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땅값을 차지한 곳이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다.[16] 2012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25만명의 중국인이 있다고 한다. 하도 중국인이 많아서 대도시 곳곳에 중국인 찾기가 어렵지 않으며, 노동 비자 발급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그런데 이마저도 괜히 날강도라고 불릴 정도로 선량한 이들이 아니라서 불법으로 위조해서 '앙골라 내무부 산하 이민국' 직원만 아시아인들 상대로 용돈벌이(반쯤 털어먹기)에 좋아라 하고 있다[17] 단순 계산으로 1배럴당 32달러. [18] 앙골라 프로젝트라고 할 정도로 중국 정부가 많은 투자를 하여서 특히 사회인프라 공사를 많이 했는데 전기를 이동시키는 송전선이 너무 얇아서 중간에 끓어져 정전이 나는 경우도 흔하고, 현지의 부실공사와 부패까지 겹쳐서 중국 업체에서 깔아 놓은 고속도로는 1년이 아니라 거의 매월 아스팔트 바닥이 주저앉아서 구멍이 나며, 건물의 경우 외부는 그럴싸 한데 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고 콘크리트 바닥에 벽돌로 개판이라 현지인들은 불만이 많다.[19] 앙골라 현지에서는 '시네쉬(포르투갈어)'로 불린다.[20] 원래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땅의 소유는 전부 국가이며 땅을 사더라도 장기 임대권을 구입하는 것이지 자신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또한, 누구 땅인지 몰라서 한 땅에 주인 10명도 나타나서 싸우기도 하는데 덕분에 한인 중에 사기당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정부 입장에서는 정부의 땅을 중국 업체에게 임대를 해준 것이라서 그 나라 법적으로 합법한 조치이다. 물론 이게 도덕적으로 옳은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장기 임대권 계약이 만료된 이들이면 모를까 앙골라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나리타 공항의 철거민들도 동정의 여지없는 폭력배에 불과하게 되니까.[21] 현지인들의 애기에 의하면 독립하자마자 백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언제까지 안떠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살해 위협을 가하였고 이를 주도한 집단이 백인들이 남겨 놓은 재산을 챙겼다고 한다. 이것이 내전 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22] 농업의 경우 피해가 더욱 심각해서 앙골라 고유 종자마저 전부 내전으로 사라졌다.[23] 이를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면 매우 골치 아픈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위험하다.[24] 이것도 운이 안 좋은 편으로써 오랜 기간 앙골라에 거주한 사람은 대략 10~50달러로 넘어간다. 그러나 초행자의 경우에는 최대 500달러까지 갈취당하는 것을 본적도 있다. 이 경우에는 경찰도 봉 잡은 날이라고 전화번호를 요구하고 사는 곳까지 안다면 그 지역 경찰들을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상황이 열린 것을 본 적이 있다.[25] 이 분야에서 최강자가 있으니 바로 중국인들로써 이들의 인내심은 가끔 경의를 표할 만큼 독한 놈들로써 경찰가 하루 동안 대치해서 벗어난 중국인 트럭 운전자도 본 적이 있다.[26] 앙골라를 떠나기 전에 국제 공항은 매우 작고 협소하며 앙골라 운전자들 대부분 교통 신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기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또한 공항을 다니는 사람은 그 만큼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기에 공항 주변에는 경찰들이 항상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27] 이것도 운이 좋은 편으로써 차를 타고 다니면 최소 1회/일 경찰과의 협상을 경험해야 할 것이며, 수도 루안다나 주 경계선을 넘어 다닐 경우에는 1시간마다 만날 수도 있다.[28] 이렇게 된 것이 진짜 중국인들 덕분으로 중국인들 상당수가 노동비자 기한이 지나도 현지에 머물면서 현지인들의 일자리를 차지하면서 이에 앙골라 정부는 전체 노동비자 발급량을 줄인 것이다.[29]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1994년 대회 당시의 13-14위 결승전에서 75대 71로 이겼던 것을 언급하며 자국의 승리를 점쳤으나, 상술했듯이 2000년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진 점을 무시한 분석이었다.[30] 수도 루안다에 가면 아프리카판 '주체사상 탑'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북한에서 설치를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