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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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전쟁
3.1. 전쟁 결과3.2. 학살
4. 그 이후5. 일화6.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알제리 전쟁(프랑스어: Guerre d'Algérie, 아랍어: ثورة جزائرية, 영어: Algerian War)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과 프랑스간에 벌어진 전쟁. 알제리 입장에선 독립전쟁이고, 프랑스 입장에선 식민지 반란군 진압 작전이었다.[1] 전쟁의 결과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고, 프랑스는 석유가스 등 막대한 국부를 잃고, 전쟁 중 프랑스 제4공화국이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의 대세와 흐름을 무시하고 벌어졌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과 더불어 유럽 식민지 열강의 식민지 재침의 예시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이 전쟁은 탈식민지화에서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게릴라전, 민간인에 대한 테러, 양측의 고문 자행, 프랑스 군대의 대테러 작전 등 복잡한 성격을 보인 전쟁이었다.

2. 원인[편집]

프랑스는 알제리를 북아프리카의 지리적 요충지로 여겨 관심을 가져왔으며,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의 발판으로 여겼다.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 정복을 결의했다. 이 결정에는 당시 알제리의 지방 총독에게 프랑스 외교관이 부채로 뺨을 맞고 쫓겨난 것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결국 알제리 북부의 지중해 바르바리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공격을 가해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이었던 알제리의 술탄을 제거하고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세계가 로마 제국 이후 아프리카에서 도시 개개가 아니라 지역 단위의 정복을 다시 시작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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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알제리가 독립할 때까지 수많은 항쟁과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정부는 회유와 무력을 통해 알제리 식민지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 본토로 생각했다. 내알일체 프랑스 남부에서 지중해를 아주 조금만 건너면 바로 코앞에서 마주보고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우며, 프랑스와 같은 본토의 땅이라고 생각해서 1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반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적어도 대도시는 완전한 유럽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덤으로 알제리의 사막들도 전부 물을 끌어올려서 개간해서 나무와 식물을 심어 전부 녹림과 밭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공군, 육군, 해군의 주요 군항과 수출용 제조 공장들과 많은 군수물자 공장들도 알제리에 있을 정도로 군사적 중요 요충지여서 프랑스 본토 못지않은 대접까지 받았다. 알제리에는 그 유명한 외인부대가 여기서 시작한 곳이 었고, 이 최정예 부대의 본거지였다. 아울러 알제리는 본토로 만든지도 120여년에 육박하면서 현지에 정착해서 사는 피에 누아르라고 불리는 알제리 거주 프랑스계 백인과 그 후손들도 엄청난 인구 숫자였다. 그래서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기 전에 샤를 드 골은 "모로코와 알제리는 절대로 아프리카 대륙에 속하지도 않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으며, 우리와 똑같은 유럽 민족의 피가 흐르는 형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환경의 차원이 매우 다르다" 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 다 내주더라도 알제리만큼은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본토가 점령되면서 프랑스 당국의 권위는 떨어졌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치솟았다. 그럼에도 자유 프랑스 당국은 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타협을 거절했다.

그런 가운데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자 알제리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이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외쳤다. 이는 사전에 계획적으로 준비된 시위였는데, 이미 3월부터 알제리인들은 전쟁이 끝나는 날을 기해 독립 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5월 1일 메이데이에 이미 시위대가 식민당국과 충돌하여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사망자 5명이 발생할 정도였다. 하지만 계획에 따라 시위가 벌어진 곳들 중 스티프 주 세티프 시에서는 참극이 발생했다.

5천 명에 달하는 무슬림 시위대가 프랑스인 상점가를 행진하자 경찰과 국가헌병대가 막아섰다. 이때 경찰과 헌병들이 독립을 상징하는 알제리 깃발을 빼앗으려 하는 도중에 쌍방간 총격전이 시작되어[2] 대규모 충돌이 벌어져 프랑스 경찰과 국가헌병대에서 일부 총상자가 발생하고, 시위대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때 알제리 깃발을 들고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한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는 이후 알제리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분노한 시위대로 인해 주변 지역으로 폭동이 확산되면서 비무장 민간 유럽인에 대한 공격으로 102명의 유럽인이 사망했으며 사체가 훼손된 사례와 유럽인 여성이 강간당한 사례도 1건 발생했다.

프랑스 당국은 이 사건을 그동안 진행된 반항을 일거에 제압할 명분을 주는 기회로 여겼다. 세티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프랑스 경찰 병력 뿐 아니라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정규군, 알제리인-튀니지인-모로코인-세네갈인 식민지 부대, 외인부대까지 보복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 이탈리아군 포로들까지 무장을 지급받고 동원되었다. 덤으로 백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병대까지 가담했다. 여기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알제리인 마을을 초토화시킨답시고 해안 마을에는 순양함[3] 이 함포사격을 하고 내륙의 40개 마을에는 급강하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대학살을 벌였다. 당시 인구 4천명이 넘은 마을이 알제리 깃발을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겨우 3명만 살아남은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4] 5월 16일까지 계속된 이때 학살로 죽은 알제리인의 숫자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1,020~1,300명이라는 숫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웠으나 그 뒤에 이 수치는 2만 명으로 늘었고, 알제리인들은 못해도 45,000명은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2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위해 싸운다고 프랑스군에 지원해서 나치 독일군과 싸우고 돌아온 알제리 병사들이 이 꼴을 보고 말았으니, 이들 중 다수가 FLN에 투신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뿐 아니라 이들의 다음 세대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도 속속 여기 가담했다. 실전 경험을 가진 이들이 참여하면서 오합지졸이던 FLN은 이전과 다르게 군조직을 잘 정비하고 프랑스 군경을 괴롭히게 된다. 독립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이였던 벤 벨라(1916~2012)도 이렇게 해서 반프랑스 항쟁에 뛰어든 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군 부사관 출신이었고 벤 벨라에 이어 알제리 제2대 대통령이었던 우아리 부메디엔(1932~1978)도 프랑스군 부사관이었다.

여하튼 학살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프랑스에서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지만 고작 알제리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유럽계 백인(피에 누아르)과 나머지 알제리 현지인한테 같은 숫자의 의석이 배당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했으며,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이런 기만적인 조치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힘으로 일어서자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제리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했다. 봉기가 시작된 1954년 11월 1일까지.

3.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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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54년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독립운동을 유혈폭동으로 규정하고 NATO에 파견된 정예 사단까지 빼내서는 무력 진압을 시작한다. 한편 같은 시기 똑같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베트남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하자 이 사실이 알제리인들에게도 크게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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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국방부의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이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전력에서는 월등하게 앞섰으나[5] 현지인의 압도적 지지속에 게릴라전을 펼치는 FLN을 일소할 수는 없었고, 수 년간 그들의 테러와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프랑스는 계속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지만 알제리인들도 똑같이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하는 것으로 맞서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프랑스군의 마구잡이 학살과 진압은 전세계적으로 욕을 먹었으며, 소련 및 다른 공산권 나라들이 전쟁에 끼어들 기미가 보이자[6] 미국은 알제리 독립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한다. 알제리와 같이 프랑스 식민 통치를 겪었던 튀니지모로코같은 북아프리카 주변 국가들도 프랑스를 비난했다.[7] 특히 튀니지는 자국에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과 독립운동 활동을 허용하며 사실상 알제리를 지지했으며[8] 이에 프랑스는 알제리 임시정부가 있는 주권국가인 튀니지를 반란군 소굴로 규정, 폭격을 감행해 알제리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튀니지인들을 사살했다. 튀니지는 프랑스의 공격과 학살에 분노했지만 프랑스를 이길 힘이 없다보니 어쩔 방도가 없었다. 이에 대한 자제를 촉구하는 미국의 요구에 "대통령은 미국의 개인가?"라고 총궐기하여 무시했다.

그나마 독립 운동에 유화적이던 좌파 사회당(프랑스)[9] 정권의 르네 코티는 여론의 반발과 프랑스 정규군의 쿠데타 위협 속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며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하지만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프랑스군도 67만 대군 중 9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며 200만에 이르는 알제리인들과 6천에 이르는 프랑스계 알제리인들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베트남 전쟁으로 억지로 징집되어 싸우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알제리에서 똑같이 전쟁을 치루면서 징병 기피자들만 늘어났다. 거기에 시간이 흐르자 아랍 국가와 소련의 압력은 가중되고, 자국내 좌-우익간 여론이 분열되며 지속적으로 피해가 누적되면서 프랑스의 알제리 유지는 불투명해지기 시작했고, 5월 위기로 결국 알제리에 유화적인 드골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제4공화국은 무너지고,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제5공화국이 들어선다(1958).

그러나 쿠데타로 드 골을 옹립한 군부 세력의 기대와는 달리, 드골에 의해 1961년 사실상 평화협정 체결이 확정되자 군 내부 사조직인 Organization armée secrète(OAS) 소속 극우파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알제리 주둔 3개 공수연대를 동원해 알제리의 주요 전략거점을 수 시간 동안 무력으로 장악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4월 21일 일어난 이 반란이 번져나가자 샤를 드 골이 군복 차림으로 방송에 나와서 반란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반란에 참가한 3개 공수연대는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 전력의 0.6%에 불과했기 때문에 26일 결국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OAS에 가입한 일부 반란군은 탈영하여 드골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하고, 알제리 내에서 무차별 테러를 자행하였다. 결국, 프랑스군과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서로 손잡고 이들을 진압하게 된다.

정권을 잡은 드골 정부는 알제리에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의 세가지 제안을 내놓았고, 알제리 독립세력은 이에 3번안을 선택하여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

3.1. 전쟁 결과[편집]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병력: 34만여 명
피해 : 14만 1천 전사 : 15만 3천여 명 부상 : 16만여명
알제리계 민간인 200만여 명 이상 사망(알제리 측 주장, 프랑스에선 20만 정도로 축소하고 그동안 학살이 아니라고 반론해왔다가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

병력: 프랑스 군 67만여 명, 아르키(Harki, 알제리계 프랑스 군인) 20만 명 이상
피해: 프랑스 군 2만 9천여 명 전사, 6만 5천여 명 부상. 아르키 3만-9만 명 사망
프랑스계 알제리 민간인 3천-6천여 명 사망


결국 알제리의 독립으로 종료되었다.

3.2. 학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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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독립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학살을 벌였는데, 특히 프랑스는 1961년 파리 학살[10]을(2001년 10월에 프랑스 정부가 인정), 기점으로 알제리 내에서 민간인들 거주지를 폭격하고 각종 전쟁 범죄를 일으키는 둥 막장짓을 일삼았다.

그리고 알제리가 지금까지 프랑스를 까대는 데 명성을(?) 날리고 있다. 알제리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비웃을 정도고, 프랑스가 EU 가입 문제로 터키가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을 거론하면 터키는 알제리인 학살을 언급하면서 반격한다. 당연히 죽은 사람 수로는 아르메니아가 주장하는 150만~200만과 맞먹거나 넘는 수이기에 프랑스가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정하라고 하면 알제리에서는 그러는 니들이 알제리에서 한 짓은 뭐냐고 폭풍같이 까면서 대꾸하여 프랑스를 애먹이고 있다. 더불어 아르메니아 학살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선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 꼴이 터키와 똑같고 나중에서야 일부 학살을 인정하지만 학살자가 20~30만 정도라고 줄여 주장하는 것도 숫자까지 터키와 똑같다.

물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저지른 1962년 오랑 학살에 대해서는 알제리는 지금도 사과는 커녕 인정도 안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프랑스와 알제리 간의 관계에는 아직도 미묘한 악감정이 남아있다.

자세한 건 구글에 algeria france war를 쳐보면 프랑스군에 의해 벌어진 각종 전쟁범죄의 충격적인 사진들이 널려있다.[11]

4. 그 이후[편집]

독립 이후 알제리는 당연히 좌경 노선을 걷게 되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였고 초대 대통령이자 수상이었던 아흐메드 벤 벨라는 제3세계의 해방 및 좌익 혁명을 위해 적극적 지원을 하다 너무 지나치다는 좌익 세력 내부의 불만으로 인해 쿠데타로 망명을 떠나는 등[12] 알제리는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전까지는 국제 사회에서 좌경 노선을 따르는 제3세계 대표 국가 중 하나였다. 또한 독립 이후에도 양국의 관계는 좋지 않으며, 1980년대 초까지는 알제리의 경제는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1980년대 중반의 유가하락으로 알제리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20~30대 알제리 청년들이 프랑스에 밀입국해 프랑스 사회의 심각한 문제거리가 되었다.

프랑스 내에서 좌우익의 견해가 가장 다른 것이 이 알제리 전쟁인데, 좌익들은 이 전쟁을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독립을 억누른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우익들은 이 전쟁을 "소련이집트를 위시한 아랍제국들의 지원으로 발생한 자국내의 중대한 반란"으로 취급하여 알제리의 독립운동 성격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일부 극우들은 아직도 알제리가 프랑스 땅이라고 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이 거부해왔던 공식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알제리에서 요구하는 학살 보상 및 핵실험 관련 문제와 같은 일은 보류하고 있기에 알제리 반응은 반 쪽도 안 되는 사과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다.

반대로 프랑스 백인우월주의자이며 극우정당 국민전선(FN) 총재인 장 마리 르 펜이 젊은 시절, 장교로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던 바 있는데 당연히 학살을 부정하고 알제리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지금도 프랑스계 거주자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2009년 선거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알제리를 피로 물들이는 그림으로 대문 장식했다가 알제리 여론의 반발을 불러오자, 사르코지 정부는 알제리에서 반프랑스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결국 2011년 정계에서 완전 은퇴하면서도 알제리를 내버린 프랑스를 따져가며 지 잘못은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르 펜의 딸인 마린 르 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주장해왔는데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노리면서 알제리 및 북아프리카 이슬람 나라들의 교류를 위하여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알제리와 관계개선에 나서고 있다. 물론 알제리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그동안 알제리의 폭동, 프랑스 영토 알제리라고 하던 여자가 잘도 이제와서 일부 학살 인정에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며 진정으로 사죄한다면 200만 학살 인정 및 보상을 하라고 맞서고 있다. 결국 알제리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던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알제리에서 축하하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기득권 기성 세대에 환멸을 느낀 청년층이 들고일어나 68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5. 일화[편집]

  • 독립전쟁 전, 프랑스가 알제리를 통합하려고 시도하던 당시 알제리 초등학교에서는 프랑스 본토와 같은 교과서를 사용했다. 그 교과서에서는 첫 문장을 "우리의 조상인 갈리아인들은...(후략)"으로 시작했다.[13]

  • 초기에 나름 정석적인(?) 진압을 시도하던 프랑스군은 FLN의 게릴라전에 빡친 나머지 방향을 전환하여 FLN과 똑같이 암살, 테러, (전보다 더한)학살로 무자비하게 대응한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프랑스군이 똑같은 전법으로 나서자 FLN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1958년경에는 거의 잦아들어 군사적으로는 확실히 반란이 진압되어갔다. 하지만 이런 무자비한 군사작전에 드는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고, 잔혹행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시대가 된 데다가 전쟁에 지친 프랑스군이 내부 붕괴를 일으키면서 허사로 돌아가게 된다.

  • 이 전쟁은 프랑스군의 전력을 퇴보시켰다. 아무리 정예 기계화부대라도 알제리에 일단 투입되면 그저 대게릴라전에 종사하는 보병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1958년에는 공군에서 병력 1만 명을 덜어내서 보병으로 편입시켜 알제리로 보냈을 정도였다.

  • 이시기 프랑스의 수많은 식민지들이 죄다 독립했기 때문에 알제리는 프랑스 최후의 해외영토나 다름없었기에 아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 몇년전 끝난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고 민심확보에도 실패하여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를 계기로 패전하였으나 알제리는 프랑스본토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보급과 병력 보충이 훨씬 쉬웠다. 그래서 베트남과 기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철수한 프랑스군들까지 전부 긁어모아 알제리에 투입 했다.

  • 쿠데타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매스컴의 발달이었다. 징집병 중 다수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본토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은 이들은 쿠데타에 동참한 장군과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여 쿠데타를 무산시켰다.

  • FLN은 전력에서 상대가 안 되는 프랑스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프랑스와 알제리의 공존을 주장하는 온건파 아랍인이나 아랍인 공무원, 알제리에 우호적인 온건파 유럽인에 대한 공격을 우선했다. 그래야만 중도파가 사라지고 양극단 세력만 남아 대결 국면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 1962년 알제리 군중들은 알제에 있던 프랑스의 영웅이자 성녀인 잔 다르크 동상을 끌어내려 참수했다. # 자신들에게 악랄한 식민 지배와 탄압을 하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대부분인 알제리 군중들에게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잔 다르크의 동상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보쿨뢰르로 옮겨진 동상 모습
    현재의 알제리에도 잔 다르크 동상이 있긴 있다. 그나마 식민지배와 전혀 무관한 동상이라 파괴하지는 않았다. 스킥다에 있는데, 알제에 있던 동상처럼 광장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박물관 근처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으로 있다. 보기크게 보기

  • 잔 다르크 광장으로 부르던 알제에 있던 중앙 광장도 독립하자마자 독립 전쟁 시초가 된 사르 알 부지드(위에 서술한 대로 당시 사살된 12살 사내아이)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알제리 전역의 프랑스 관련 건물은 죄다 용도가 달라졌다. 알제에 있던 노트르담[14] 성당은 국립도서관으로 바뀐지 오래이며 아니면 더 많은 성당들이 이슬람 모스크로 바뀌어버렸다.

  • 이방인으로 유명한 문인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출신자였지만 정작 알제리의 독립에는 반대하였는데, 아랍인이 아닌 프랑스-스페인계 백인 혈통인 피에 누아르였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보다는 프랑스 연합 내에서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등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 때문에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에게서 왕따 취급당했다. 정작 카뮈는 그에 개의치 않긴 했다. 이 때문에 알제리인들에게 카뮈는 이름조차 견딜 수 없는 침략자를 상징하기에 지금은 알제리에 가면 그가 살던 집들은 부숴지거나, 재공사로 사람들이 살면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더불어 알제리에서 그의 이름은 아예 모르는 이름이다.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세워진 그의 문학 기념비도 남아있지만 카뮈 이름을 누군가가 부숴놓아서 누굴 위하여 만든 건지도 모르게 되었다. 당연히 관리도 되지않아서 금이 가고 한동안 누군가가 신나게 두들겨패서인지 금이 가고 낡고 언젠가 무너져버릴 듯...

  • 이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알제리계 보조병[15]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다. 그리고 독립이 되자, 이제 매국노가 된 그들에게는 알제리 전역에서 끔살이 기다릴 뿐이었다. 당사자 본인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가족들까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지뢰밭에 맨몸으로 떠밀리기도 하고 광장으로 끌려나와 사람들 욕설과 같이 침으로 범벅이 되어 산 채로 몰매를 맞아 죽거나, 총살 당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거세 당하거나, 광장에서 목매달린 시체로 며칠이고 방치되었는데 그 수는 최저 3만에서 최대 15만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처형당하기 전에 프랑스군에서 받은 훈장을 직접 삼켜야 하기도 했다고.
    학살이 벌어지기 전에 알제리를 탈출한 91,000명의 아르키와 그 가족들은 프랑스로 도망가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온갖 잡일과 차별 뿐이었다. 자기네 청년들에게도 해준 것도 없으면서 가서 죽으라고 전장에 내몬 게 프랑스 지배층들이었으니 아르키들이야 그보다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다.[16]
    프랑스는 자기들에게 충성하던 알제리인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어떤 운명을 겪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이들의 안위에 대해 배려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군을 동원해서 아르키들의 무장을 해제하고[17] 이들을 알제리 독립세력에게 넘겨주었다.[18] 이 상황을 보면 가서 천대를 받을지언정 프랑스로 갈 수 있었던 아르키들은 행운아라고 해야 할 정도. 이때 도망친 아르키 중 한 사람이 그 유명한 지네딘 지단의 아버지이다.

  • 검은 발, 즉 피에 누아르들의 처지도 아르키나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에서 100년이 넘게 살다보니 프랑스가 낯설고, 알제리에 모아둔 재산은 죄다 가루가 되었으며. 급히 챙길 돈이나 귀중품만 가지고 프랑스로 가보니 프랑스에선 이들을 아니꼽게 보면서 이들은 서운한 마음이 들고... 결국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귀화하거나 아니면, 다시 튀니지같이 프랑스어가 많이 쓰이지만 프랑스에 대하여 증오가 덜한 이웃 나라로 이민가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떠나는 이들만 속출했다고 한다. 알제리가 아르키 후손들을 용서해주면서 이들 일부가 프랑스로 가서 살기도 하는 와중에 피에 누아르들도 알제리로 돌아갈려는 뜻을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피에 누아르들은 거의 50년 전, 알제리 독립 당시 몰수당한 농장이라든지 여러 재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알제리 측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고[19], 프랑스 측도 알아서 하라는 투로 물러서 있기에 이뤄질 일은 없어 보인다.

6. 창작물에서[편집]

이 직후 벌어진 베트남 전쟁이 워낙 시끄러웠고 정작 프랑스쪽에서는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인 탓인지 그 규모와 피해에 비하자면 이를 소재로 한 창작물은 그리 많지 않다.

1964년에 나온 자크 드미의 영화 쉘부르의 우산이 이 때를 배경으로 하고 남주인공이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다리를 다치고 애인과도 헤어진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그리고 은근슬쩍 전쟁으로 인해 힘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 전반에 깔아두고 있다. 그러나 태생적인 한계(멜로 영화) 때문에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하지 않는다.

이처럼 전쟁 기간이 누벨바그 감독들이 왕성하던 시절이라 검열로 표현은 못해도 은근슬쩍 언급되는 영화들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아녜스 바르다5시에서 7시까지 클레오, 장 뤽 고다르작은 병정이 있다. 그 중 크리스 마르케의 다큐멘터리인 아름다운 5월는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의 차별주의적 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이후 1966년에 나온 안소니 퀸과 알랭 들롱이 주연한 로스트 코맨드(라스페기[20])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도입부 부분에 나온 디엔비엔푸 전투 부분이 인상적인 작품, 디엔비엔푸에서 같이 싸운 전우들이 알제리인과 프랑스인으로 나뉘어져 적으로 전선에서 만나게 된다는 프랑스 현대사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종전 직후 이탈리아 좌파 영화인들의 지원을 받아 알제리 쪽 시각에서 제작된 세미 다큐멘터리《알제리 전투(La batalla de Argel. 1965)》가 가장 유명하다. 베니스 영화제 출품,상영 당시 프랑수와 트뤼포만 마지막까지 남아 시상될때 손뼉까지 치며 축하해주었다. 그밖에 장 뤽 고다르[21], 루이 마르와 같은 프랑스 유명 영화인들은 앞서 언급한 한 사람을 빼고 모두 보이콧한 일화는 [22] 꽤 유명하다. 그 뒤에 트뤼포를 프랑스 극우들이 엄청 씹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2009년 10월 한국에서도 아트하우스 극장 재개봉 형식으로 개봉되었다.

한편 알제리에서는 1975년 모하메드 라크다르 하미 감독이 식민지 시절부터 알제리 전쟁 발발까지 다룬 불타는 해의 연대기라는 영화를 만들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수상 당시 프랑스 극우파들이 모하메드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프랑스 내무장관이 급하게 영화제에 참석한 모하메드 감독 가족들에게 호위 부대를 붙여줘야 했다. 모하메드는 이후 마그레브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과작 감독으로 남았다. 그리고 2014년 오래간만에 신작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부터 반세기 가까이 흘러서야 비로소 프랑스의 시각으로 다루어진 창작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오스트리아 출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프랑스에서 만든 2005년작 '히든'이라는 영화가 유명하다. 이 쪽은 1961년 파리 학살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망각을 스릴러로 비판한 영화. 이 영화를 보면 지금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다... 2005년 칸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DVD 출시.

하지만 프랑스 영화로서 알제리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첫 작품은 2007년에 등장한 《친밀한 적(L'ennemi intime)》이 사실상 최초이다.

이외에도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인 라쉬드 부샤렙 감독은 《영광의 날들》(2006)과 《법 밖에서》(2010)라는 연작을 만들었다. 《영광의 날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알제리 출신 식민지군 병사들의 이야기고, 《법 밖에서》는 파리 학살에 대한 이야기다.

《Simon: An English Legionnaire(국내 개봉명-톰하디의 도망자)》(2002)는 이 당시 외인부대에 입대한 영국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톰 하디가 국적을 조작하고 입대한 프랑스인 전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출세작 《자칼의 날》은 알제리 전쟁 직후 우익 테러의 표적이 된 드골에 대한 암살 음모를 배경으로 한다.

[1] 프랑스 의회는 1999.6월, 전쟁이 끝난지 37년 만에 이것이 "전쟁"이었음을 인정하였다.[2] 프랑스에서 먼저 사격했다는 주장과 시위대에서 먼저 사격했다는 주장이 있다.[3] 155mm함포 8문을 장비한 경순양함이었다.[4] 이 마을에서 살아남은 3명은 중년여성 1명, 20대 청년 1명, 꼬마아이 1명이었는데 이 꼬마아이는 커서 알제리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부모와 형제를 죄다 잃은 이 학살을 절대 잊지 못하여 글로 당시 현장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5] 프랑스가 워낙 1차대전 초반의 삽질과 2차대전에서의 광탈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엄연히 이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군사 강국이다.[6] 냉전 시절 소련은 전세계적인 반제국주의연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3세계반미/반서방 세력에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 굳이 좌익 성향이 아니더라도,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도와주곤 했다.[7] 튀니지와 모로코는 알제리보다 먼저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했다.[8] 이 때문인지 알제리와 튀니지는 이웃나라면서도 서로 사이가 좋다고 한다. 심지어는 알제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착취, 학살하고 사과조차 안하는 프랑스 놈들보다는 그래도 독립, 해방을 지원해준 아랍, 이슬람 형제인 튀니지가 그나마 낫다고 말할 정도라고...[9] 이 시절에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다.[10] 1961년 10월 17일 파리에서 이 전쟁에 대하여 비난 시위를 하던 알제리계 1만여명을 프랑스군경이 무차별로 사살하고 학살한 사건. 심지어 시위대에 있던 알제리 아이들을 프랑스군경이 센강에 내던져 빠뜨려 죽이기까지 했다![11] 예를 들면 알제리 여성을 성폭행하고 웃는 프랑스 군인들의 충격적인 모습이나 프랑스 군인이 알제리 사람을 참수하고 기념으로 촬영한 웃고 있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사진들이 널려 있다. 몇 장 안 되는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사진(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시체를 무표정하게 보는 오스만군 등)을 크게 내밀며 시위하던 프랑스가 과거에 자신은 이랬다...[12] 1990년대에 알제리로 돌아와 알제에서 2012년 만 95세로 숨을 거둔다.[13] 심지어 베트남에서 쓰던 교과서도 이 점은 똑같았다고 한다![14] 노트르담의 꼽추로 유명한 그 성당은 노트르담 드 파리이다. 도시마다 노트르담이 있다. 노트르담은 "우리 귀한 성모님"이라는 뜻으로 고유명사가 아니다.[15] 한국사와 비교를 하자면 갈데없는 헌병보조원이다. 일본군에 편성된 조선인 부대나 일본군에 징용된 조선인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대외침략이 아니라 전적으로 "국내 치안"을 위해 투입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헌병보조원에 더 가깝다. 다만 프랑스가 알제리를 지배한 기간이 130년이나 되었음을 감안하면 참작의 여지는 있다.[16] 드골의 제5공화국이 쉽게 집권한 것도 이런 지배층들의 행태에 분개한 청-장-노년층들이 일치단결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차대전 때 그렇게 국민을 총알받이로 내몰고, 2차대전 때도 오판으로 국민들을 죽여놓고, 이제는 식민지 지키겠답시고 또 총알받이로 내몰고 있으니, 격분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17] 무장해제에 투입된 프랑스군은 아르키들에게 낡은 무기를 신품으로 바꿔 주기 위해서 무기를 회수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18] 사실 식민 종주국 중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개인적인 이주자 외에 현지 출신 군인이나 공무원들을 체계적으로 자국으로 데려간 나라는 하나도 없다. 딱히 프랑스만 이런 행동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무장해제까지 하면서 반군에게 현지 협조자들을 넘겨준 나라는 프랑스가 유일하다. 따지고 보면 반군에게 밀려나서 식민지를 포기(알제리 외에 베트남도)한 나라로 네덜란드(인도네시아)가 있기는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국권을 되찾은 뒤에 이런 대학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19] 청년실업 문제 해결이 급한 상태인데다가 알제리 정부 입장에서 농장을 다시 되돌려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에 다시 줄 이유도 없다.[20] 국내 상영 제목, 대부분 이 이름으로 기억하는 분이 많다.[21] 고다르가 감독한 영화 《작은 병정》은 알제리 전쟁을 간접적으로 다뤘는데, 프랑스 당국의 검열에 걸려서 3년 동안 상영금지를 당해서 1963년에서야 개봉한 경험이 있었다.[22] 사실 질로 폰테코르보는 평소 카예 뒤 시네마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크 리베트가 폰테코르보의 영화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글은 아직도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