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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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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 한자: 安重根

파일:안중근의사.jpg

파일:대한민국 국기.png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생몰년도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향년 30세)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군

사망지

일본제국 치하 만주 지방 관동주 펑텐 성 뤼순커우 구 뤼순 감옥

사인

사형(교수형)

국적

조선대한제국

본관

순흥 안씨(順興 安氏)1파 참판공파 30세

별칭

초호(初號)는 청계(淸溪)
아명(兒名)은 안응칠(安應七)
일명(一名)은 안다묵(安多默)
칭호(號)는 의사(義士)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장군), 교육가

가족

안인수(조부), 안태훈(부), 조마리아(모)
안성녀(여동생), 안정근, 안공근(남동생)
김아려(부인), 안문생(장남), 안준생(차남), 안현생(장녀)
안웅호(손자), 안연호, 안선호(손녀)

학력

천주교학교(신학전공)
삼흥학교(설립)
돈의학교

종교

유교천주교(토마스)

조직

동의단지회[1], 서북학회, 한인애국단,국채보상기성회

복무

대한의군

복무기간

1907년~1909년

최종계급

참모중장

근무

의병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사령관

참전

일본군 경흥군 수비대 기습

의거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


1. 소개2. 생애
2.1. 하얼빈 의거 이전2.2.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2.2.1. 법률적 평가
2.3. 낯선 타국 이름 모를 야산에 잠들다2.4. 유해 발굴 시도
3. 신앙4. 가족5. 저작물
5.1. 동양평화론5.2. 장부가5.3.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5.4. 기타
6. 평가
6.1. 순종황제의 평가6.2. 이승만의 평가6.3. 박정희의 평가6.4. 일본의 시각
6.4.1. 학계
6.4.1.1. 이토 긍정파
6.4.2. 정치계
6.4.2.1. 2013년 아베 정부의 망언
6.4.3. 기타
6.4.3.1. 안중근은 친일파다?
6.5. 북한의 평가
7. 오늘날의 안중근
7.1.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7.2. 안중근을 모시는 일본의 절
8. 그 외
8.1. 장군인가 의사인가, 공식 칭호 논란8.2. 관련 어록8.3. 안중근을 연기한 배우
8.3.1. 영화8.3.2. 드라마8.3.3. 뮤지컬
8.4. 관련 단체
9. 관련 문서

도마 안중근 의사(多默 安重根 義士)

1. 소개[편집]

安重根은 以庚戌陽曆三月二十六日上午十時에 立刑場하여 欣然而曰 余爲大韓獨立而死하고 爲東洋平和而死하니 死何憾焉이리오? 遂換着韓服하고 從容就刑하니 年三十有二러라.

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독립운동가들 중 한 명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순국했다.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운동가이며 의병[2]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평화주의아시아주의자.[3]

본래는 교육 산업 등 민족의 계몽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의군을 조직하였다. 곧이어 독립군의 참모중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마지막으로는 FN M1900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하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고 아명인 동시에 이분의 자(字)이기도 하다.[4] 가톨릭 세례명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사도 토마스를 도마로 국역했기 때문.[5] 또는 한자로 多默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2. 생애[편집]

2.1. 하얼빈 의거 이전[편집]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아들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격의 명수였다. 놀랍게도, 그는 화승총을 쏘아 20보[6]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추었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7]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이 좌절되자 당시 7살의 안중근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8]

3년 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다시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데 내무 대신인 남정철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향장 유만현을 제거하고 빼앗은 세금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이를 원상복구하라는 내용이다.(1897년 5월 6일자 조회 제6호) 안중근은 동학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썼다고 한다.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9] 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안중근 의사가 진압한 동학농민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는 만큼 동학농민운동 문서를 참조하기 바람.

2.2.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편집]

파일:안중근장군.jpg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플랫캡을 쓰고 폴로코트로 추정되는 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 차림으로 의거를 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은 그의 전 생애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얼빈 의거 참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유동하[10]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채가구)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11]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12] FN M1900, 할로 포인트탄환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췄다고 한다.ㅎㄷㄷ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 是公)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13]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된다.[14][15]

Корея! Ура![16]
(대한 만세![17])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얼마 후 사망한다. 일본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18]

이토히로부미의 죄악
하나. 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불도의 짓[19]
둘. 천팔백구십사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한 짓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짓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일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등을 일일히 늑탈(勒奪)한 짓
여섯. 소위 제일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20]
일곱. 국채 일천삼백만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짓[21]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것을 막은 짓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짓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짓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22]칠적[23]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짓
열둘. 일천구백구년 또다시 거짓으로 다섯가지 늑약을 맺게 한 짓[24]
열셋. 한국 삼천리 강토를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짓
열넷. 한국自 일천구백오년 都無安日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오듯 쏟아져 숨쉴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짓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짓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문서 7권[25] / 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아래 법률적 평가 문단에서 나오듯 일제의 압력에 의해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법원으로 송치되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은 물론 러시아·영국·스페인, 심지어 일본(!)[26]에서까지 수많은 국제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이 불허되었고, 꼴에 법치국가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일제 측의 완전히 형식적이고 진짜 변호는 안 하는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게 된다. 안중근 평전 - 저:김삼웅(제 7대 독립기념관장)

안중근 의사 공판기록 번역 #1
안중근 의사 공판기록 번역 #2
안중근 의사 공판기록 번역 #3

2018년 4월 20일에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하바로프스크 도서관에서 ‘한국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일본군 참모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가 중국 현지 밀정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로 작성한 이 문서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후를 캐내는 데 목적이 있었고, 문서에서는 안중근이 1906년 8월 고향을 떠나 간도 용정에 망명한 것은 당시 간도에서 서전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을 모셔오기 위한 모금운동도 안중근이 주도). 보고서에서 '안응칠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도 합의해 간도에 갔다.’, ‘(유럽에 머물던) 이상설을 안응칠과 동지들이 모금해 연해주로 불러들였고…안응칠은 간도에서 이상설을 사사했다.’ 등 이상설과 안중근의 사제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 등장하는데, 보고서 말미에는 ‘조선통감부 촉탁경시 사카이의 신문’에서 안중근이 이상설을 두고 “포부가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만인이 모여도 상설에는 미치지 못한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고 호평하고 있어, 안중근의 사상에 이상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2.1. 법률적 평가[편집]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두고 법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중 재판상에서도 문제가 된 안중근과 이토의 신분 여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뤼순 소재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교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27]

이에 대해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순구 교수는 첫째, '대한의군 참모중장'(군인) 신분이었던 안중근은 1907년 발효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의 "비정규군도 교전자격이 있다"는 규정에 따라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과 둘째, 이토는 1909년 10월 사망 당시에 이미 조선 통감을 사임했지만, 대신 추밀원 의장을 맡고 있었고 그가 민간인이더라도 하얼빈 방문 자체가 한반도 지배를 포함한 대륙 침략을 목적으로 한 침략 행위였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따라서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교전에 해당될 수 있다고 말한다.[28]

다만 이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인지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침략행위와 연관이 있다하더라도, 단순한 방문이 문언적으로 "교전"에 해당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설령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이 교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교전단체에 소속된 자가 교전에 참가한다고 그 자체로 교전자의 자격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당시 적용되었을 헤이그 육전규칙(1907) 교전자격 요건에 의하면 민병이나 의용병단이더라도 부하에 의해 책임지는 자에 의하여 지휘되고, "고착된 표지", 즉 제복(혹은 이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전투원임을 식별할 수 있는 복장)을 갖추고, 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며, 전쟁법을 준수하여야 교전 자격이 인정된다.

다만 군민병이라면 공연한 무기휴대와 전쟁법 준수만으로도 교전자로서 자격이 인정되나, 안중근 의사를 군민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시 되며[29] 안중근 의사가 군민병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공연한 무기휴대 요건이 결격사유가 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권총을 들고 다녔다면 거사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 아닌가. 물론 이것말고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과정이 불법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요소는 많지만, 적어도 안중근 의사가 당시 국제법을 기준으로 교전자로서 포로 대우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재판 관할의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일본 검찰 측에서는 "하얼빈은 청국 영토이지만 동청철도의 부속지로서 모든 나라에 대해 자유지역이며, 일본국은 조약상 이 곳에 대해서 치외법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으며, "메이지 38년(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일한보호협약(을사조약) 제 1조에 의해 국외에 있는 한국인에 대한 보호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주장에는 을사조약 체결의 조약상의 문제점(강압적 체결)과 한국인에게 적용될 대한제국의 법률에는 섭외법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상존하고 있었다.[30] 한편 일본 법원은 일본 형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3. 낯선 타국 이름 모를 야산에 잠들다[31][편집]

파일:external/www.danji12.com/2010012958067132.jpg

순국 5분 전 사진. 어머니가 짠 새하얀 수의를 입고 찍은 사진이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32]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33]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가 처형당한 뒤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다. 유해는 뤼순 감옥 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2.4. 유해 발굴 시도[편집]

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34]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국공내전에서 패전, 이후 공산중국의 성립과 한국전쟁, 냉전으로 중국과 교류가 끊기다시피해 남한 측 주도로 찾는 것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졌다.

공산화된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한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 하며 물론 둘 다 성공하진 못했다.

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2008년 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한 발굴사업에서도 결국 유해를 찾지 못해 사실상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46-00_01264729.jpg

1997년 8월 15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안중근의사가 순절한 여순형무소(여순감옥)를 취재하여 시청자들에게 최초로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곳을 공개하였다. 당시 여순형무소는 외국인 방문이 금지돼 있어서 취재직전까지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당시 MBC가 처음으로 취재 비자를 받아서 여순 형무소에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시청자들에게 공개하였다.[35]

당시 MBC뉴스에 보도된 여순형무소에서 안중근 의사 시신 수습에 대해 말하자면

형장에 걸린 밧줄에서 수직으로 2m쯤 아래에는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바로 이 상자 안으로 떨어뜨린 뒤 흙으로 덮으면 사형 집행이 모두 끝나는 형식으로 사형이 이뤄졌다. 안 의사의 처형은, 그러나 이곳이 아닌 본관과 교수 형장 사이의 공터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안 의사가 처형된 곳임을 알리는 현판 하나가 전부. 사형을 당한 시신들은 나무상자에 넣어져 땅 속에 묻혔다. 이 중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찾지를 못했다. 안 의사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MBC 뉴스 1997년 8월 여순형무소 안중근 의사 순절현장 취재 내용 -


2010년 3월 중엽, 정보통제기간이 끝난 일본의 기밀정보 중 일부가 일반 정보로 풀리면서, 일제가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이후 철저하게 감시했고 재판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단 자료가 튀어 나왔다. 그동안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체포와 이후의 심문과 사형에 이르는 재판과정에 일체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당시 효력을 발하던 국제법에 따라 매우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풀려버린 자료에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 다수 실려 있어 결국 사과의 의미로 유해발굴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중국 정부도 당시 재판과정에 대한 책임을 마무리 하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출처 필요]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마지막 기회로 보고 한중일 공동유해 발굴단이 결성을 의제로 추진하게 되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광복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유해의 회수에 실패하였기에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36]에 허묘로 비도 없이 모셔져 있다.

3. 신앙[편집]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 성경 지혜서, 3장 1절 - 7절.


그는 천주교(가톨릭) 신자이다.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거 직후 살인자란 이유로 신자자격이 박탈되었다가 순교 후 100년이 지난 2010년에야 비로소 복권되었다. 순교 직전 천주교 신자로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받은 의식인 종부성사[37]를 요구했으나 당시 천주교 한국교구 전체를 관할하던 조선대교구장이었던 뮈텔이 그의 요구를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38]

이미 오래 전부터 가톨릭교회 일각에서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던 잔 다르크가 시성된 것처럼 안중근도 시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2011년 10월 3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의사의 시복(諡福)을 추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관련기사. 서울대교구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은 "안중근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범"이라며, "순교자"는 아니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신앙 고백함으로써 의연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한 증거자"라고 밝혔다. 염 추기경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과 노력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며, 안중근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당부하며,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시복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신학적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서울대교구가 시복을 추진 중에 있는 인물은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를 비롯해 조선시대 및 근현대 신앙의 증인 570여 명이며, 여기에는 안중근도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이 명백히 사람을 죽일 목적으로 총을 쏴 살인한 것은 맞지만 그의 생애를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한정시키지 않고 처형당하기 전 마지막 시기인 ‘동양 평화를 위한 수인(囚人)기’ 등을 깊이 조명하면 성인으로 공경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된 전쟁 영웅 잔 다르크[39]와 함께 성경에도 안중근과 비슷한 사례로는 구약시대의 유딧이 있다. 유딧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침략을 당하자 적진으로 찾아가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신임을 얻고, 연회 때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장군의 목을 잘라 귀환해 이스라엘을 구한 과부이다. 즉 안중근의 저격은, 유딧의 칼부림을 누구도 살인으로 일컫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6년 10월 22일 충남 홍성군의 홍주 생매장터 순교성지의 14처[40] 봉헌 미사에서 천주교 대전교구유흥식 라자로 주교는 미사 중 강론을 통해 안중근 토마스 의사에 대한 시복 및 시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본래 시복 및 시성 추진 관련 업무는 해당 성인의 출신지 교구장이 하는 것이나, 황해도가 북한에 있으므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교회의를 통해 이 직무를 맡을 주교 한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유 라자로 주교가 이를 맡게 된 것.

4. 가족[편집]

출처

  • 祖 안인수(安益壽)

    • 伯 태진(泰鎭)

      • 사촌 종근(宗根)

        • 조카 영생(榮生)

      • 사촌 장근(莊根)

        • 조카 봉생(鳳生)

        • 조카 춘생

    • 伯 태현(泰鉉)

      • 사촌 명근

        • 조카 의생(毅生)

        • 조카 양생(陽生)

      • 사촌 홍근(洪根)

    • 父 태훈(泰勳)[41], 母 조마리아(趙姓女)[42]

      • 중근, 妻 김아려(金亞麗)

        • 女 현생(賢生)

        • 男 문생(文生)[43]

        • 준생

          • 손자 웅호(雄浩)

            • 증손자 보영

          • 손녀 선호(善浩)

          • 손녀 연호(蓮浩)

      • 妹 성녀(姓女)

      • 弟 정근(定根)

        • 조카 원생(原生)

        • 조카 미생(美生), 사위 김인(金仁)[44]

        • 조카 진생(珍生)

      • 공근(恭根)

    • 叔 태건(泰建)

      • 사촌 봉근(鳳根)

      • 사촌 충근(忠根)

      • 사촌 성근(性根)

    • 叔 태민(泰敏)

      • 사촌 경근(敬根)

      • 사촌 형근(炯根)

    • 叔 태순(泰純)

사실, 안중근의 집안이 통째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45] 독립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 3월 25일에야 '해방 후 귀국[46]해서 1953~1956년에 효성여자대학교(現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여성 독립운동가」, 2014. 5, 국가보훈처

이후 안중근의 장남 안문생(안분도)은 어렸을 때 일제에 의해 독살당한다.[47] 그리고 이것 때문인지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이후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 文吉)[48]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49]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으며, 이에 분노한 김구가 안준생을 죽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는 대목이 <백범일지>에 있다. 김구 본인이 안태훈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으니 김구의 분노는 더 컸을 듯. 안준생을 죽여야 한다며 암살 계획을 짰다는 부분은 얼핏 보기에 김구가 '배은망덕한 인물'[50]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당시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러한 반응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가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안준생이 실제로는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죽음에 김구가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면서 2017년 현재 학계에서는 김구의 정치적 모략 쪽에 더 무게가 두어지고 있다. 비슷하게 김구 때문에 변절자로 억울한 대우를 받는 독립운동가로 김립이 있다.

5. 저작물[편집]

5.1. 동양평화론[편집]

세계 열강이 동양을 침범해 옴에 따라 한중일 3국이 서로를 돕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해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일본이 3국간섭으로 뤼순을 청에 반환하고 한중일 3국이 공동관리하는 중립지대를 만들며, 그곳에 3국 평화회의를 설립하고 3국에서 대표를 파견하며 동양 3국의 의견을 조율하며,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고 은행, 공용화폐 등을 만들자는 주장이 실려있지만 서문만 완성하고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사상은 공용화폐유럽의회를 통해 유럽의 평화와 통합을 추구해 나가고 있는 유럽연합과 비슷하다.

5.2. 장부가[편집]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이토 히로부미를 쥐, 도적으로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5.3.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편집]

뤼순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해당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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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기타[편집]

  • 결혼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하지 못했던 아내에게 미안함과 애정을 표한 편지를 자주 쓰는 등 로맨티스트로서의 면모도 있었다고 하며 이 편지는 현재에도 보존되고 있다.

  • TV쇼 진품명품에도 안중근 의사의 글씨가 나왔다. 경천(敬天)이라고 씌여진 글씨의 감정가는 6억원으로 가치를 측정할 방법이 없어서 전시회시에 보험가격을 내어 6억이라는 가격으로 측정되었다고 한다.#

  • 상기한 "경천"이라고 쓰여진 유묵은 감정가 7억 3천만원의 가격으로 2014년 경매장으로 나왔으나 유찰되었고 2014년 8월 서울 잠원동 성당이 5억 9천만원에 구입해 천주교 서울교구에 기증되었다.

  • 여순 감옥에서 작성한 자서전이 있으나 원본은 유실되었고, 일역본과 중역본이 남아 후에 복원할 때 참고로 하였다고 한다.

6. 평가[편집]

한국에서는 당연히 의사(義士)[51]로 추앙받으며, 항일 활동가 중에서도 첫번째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 또한 높다. 그의 올곧은 정신과 이를 잘 드러내주는 서예 작품 등 또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가 남긴 유묵은 전문서예가로 유명세를 떨치지 않았음[52]에도 또한 비교적 최근의 저작물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보물 제569호로 지정되어 국가적 관리를 받는것만해도 미뤄 짐작이 가능하다.

'온건론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한일 강제 병합을 앞당겼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이미 을사늑약 등에 이토 히로부미가 활발히 참가해 왔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일본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어왔으며(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에 조선 병합을 가결하고 가쓰라 수상을 필두로 병합을 추진 중이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병합이 됐네 어쨌네는 잘못된 지식을 가진 자들이나 일본찬양론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는 평화주의자, 혹은 친한파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정한론을 반대한 것은 일본 국회에서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패론당하였던 정한파들(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을 성급한 인물들이라고 경계하였고 그들로만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확실한 계획(실제로는 조선 정부의 청국 개입에 막혔다는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실패 (그 이후로는 톈진 조약 이용) 이후로도 조선-청국 김옥균 암살 논란(청일전쟁 요인)에 대한 철저 분석, 시모노세키 조약, (삼국간섭(러일전쟁 요인) 이후) 포츠머스 조약, 제1차~제2차 한일협정 이용, (2차 협정만 무효시키려는 고종의 반일 의식으로만 슬쩍 꾸몄던) 헤이그 특사 저지, 제3차 한일협정 이용, 경술국치)을 내세워서 조선을 완벽하게 지배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즉 그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강제 병합은 일어났을 것이며, 되려 살아남으려는 강제 병합이 이토의 생각대로 추진됐다면 소설 비명을 찾아서→소설 원작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같은 끔찍한 현실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안중근이 누구를 저격했는가를 떠나서, 처음으로 독립을 위해 일본 고위 관료를 사살했기 때문에 이후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이 일본 관료 암살과 조선총독부등의 기관 폭파 등을 통한 독립을 얻고자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6.1. 순종황제의 평가[편집]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을 전해 들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칙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은 미치고 도덕이 없는 자'이며, '장춘단에서 이토의 추도식을 성대히 열도록 하라'라는 것이었다.

순종황제의 칙문이 본심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황제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하던 인물로, 순종황제는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를 '친절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잘 챙겨주는 할아버지'로 여겼었다. 더욱이 순종황제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즉위 당시에도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의 한 측면만을 보고 그를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순종이 발표한 칙문은 그의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순종의 이러한 칙문은 순종의 정치적 감각이 0에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점을 눈여겨 본 친일파들이 이토의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난 후 한일합방을 해야 한다고 드러내놓고 준동하기 시작한다.

6.2. 이승만의 평가[편집]

전년도인 1908년, 친일 외교고문으로 한일합방을 지지하고 홍보하는 외교관 '더럼 스티븐슨'을 전명운과 장인환이 사살했을 때 싸늘해진 미국여론을 겪어본 이승만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은 윤봉길의거에 대해서도 비판한 바 있을 정도로 무력을 사용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해방후에는 나름대로 예우를 갖춰 1959년 05월 29일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6.3. 박정희의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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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1972년 1월 ‘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통일 세계평화)라는 휘호를 보냈고, 안중근 장군 탄신 100주년이던 1979년 9월 2일에는 ‘민족정기의 전당’이라는 휘호를 내려 기념관을 이순신의 현충사에 버금가는 성역(聖域)으로 조성하려고 계획했다. 즉, 안중근을 민족정기의 화신(化身)으로 추앙하여 이순신과 동격의 위인으로 높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10.26은 개관식 날짜(1970년)이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에 爲國獻身軍人本分를 새긴 바위를 세우기도 하였다.

6.4. 일본의 시각[편집]

일본에서는 보통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있다.[53] 일본 내에서도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일단 이토 히로부미는 예전에는 천 엔 지폐에 실렸을 정도의 위인이다. 일본인들은 안 의사가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으므로 한국인들이 안 의사를 영웅시 하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고. 그러면서 자기들은 A급 전범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배하잖아 내로남불일본의 대중적인 시야는 90년대까지 한국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저 '이토 히로부미를 쏜 테러리스트' 정도라는 단순한 인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 증대와 과거사에 대한 일본 좌파들의 각성 촉구를 통해 혁명 지사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에서 안중근 평전과 안중근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나온 적이 있다.1995년에 일본 ABC에서 방영했던 다큐쇼 <놀라운 20세기: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 제목만 보면 기분 나쁘겠지만 내용을 전부보면 안중근을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옥중에서 그의 고귀했던 성품, 대의명분, 그리고 인성을 본 일본인들은 안중근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54] 특히 그의 재판에 관련했었던 검사, 변호사, 그리고 뤼순 감옥의 간수들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지금도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사찰에는, 안중근을 존경했던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와 안중근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을 써서 지바에게 주었는데, 지바는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으며, 1980년에는 한국에 반환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유묵 외에도 총 26점이 일괄하여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그의 재판을 맡았던 일본 판사 히라시는 그가 그의 책(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그의 사형일을 재판이 끝나고서 몇달 후에 집행하려고 했으나, 도쿄에서의 직접명령으로 인해 미룰 수 없었다고 한다.지바 도시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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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린지 사찰에 세워진 안중근의 유묵기념비, 내용은 위와 같이 爲國獻身(위국헌신) 軍人本分(군인본분)

당시 일본 민간엔 비록 일본 정부의 이용으로 변질됐지만 동양간에 뭉쳐서 서구세력과 대항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사상은 아시아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또 천황에 대한 적대보다는 간신 이토를 처형했다고 하는 생각이 일본의 지사들에게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이 어느 정도 이해를 받을 수 있었다.

2010년, 도쿄대학의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55]는 자주 등장하시는 교토대학의 동료 역사학자인 이토 유키오의 2009년 글을 인용해 안중근 의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는 한국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강제 합병의 첫 단계로 인식되어 큰 저항심을 일으켰으며, 따라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이데올로기를 모르면서 그를 죽였다고 그를 책망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일본의 지식층에서 안중근을 미화, 신격화하면서 정작 일본인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습행보를 걷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정치인으로선 대단한 사람이긴 한데 행실이 하나하나가 문제점이 많아서 유신지사 중에서도 주로 비판을 받는 측인점도 한몫 하는데다가 아내에게 애정의 편지를 보낸 안중근과 달리 여자문제로 항상 추문이 나돌다가 사살된 후, 일본 내에 난잡한 여자문제를 풍자하는 만화가 실린 일이 발굴되어 지식층의 접근을 떠나서 그냥 이토 히로부미의 인식 자체가 나빠져버린 일도 있다.[56]

6.4.1. 학계 [편집]

6.4.1.1. 이토 긍정파[편집]

뜻밖이지만 이토 긍정세력들도 안중근 의사를 높게 평가한다. 이토 유키오는 이토 평전에서 (2014년 번역 정발) 이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안중근 의사의 잘못은 아니며, 의사의 독립운동을 폄훼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안중근 의사를 알아본 후 인간성에 반하게 됐다고 한다.

일본 같은 경우는, 독일 나치 정권과 달리 지식인들을 대거 숙청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했으리라 보인다.

6.4.2. 정치계[편집]

6.4.2.1. 2013년 아베 정부의 망언[편집]

2013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중국시진핑 주석에게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고, 중국이 이를 수락하여 하얼빈역의 의거현장에 표지석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11월 18일, 청와대를 방문한 양제츠 국무위원에게 이에 대한 사의를 표했는데, 이에 일본은 격렬히 반발하며 11월 19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 관방부 장관까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망언을 연이어 쏟아내었다.

물론 이 발언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만으로 따지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는데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것은 사사로운 원한 등이 아니라 이토가 한국 식민 통치에 앞장섰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처단한 것이다. 또한 재판 자체가 원래 재판이 이뤄져야 할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서 처음부터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쏙 빼고 명백한 독립투사를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당 발언은 아시아권의 화제가 되었는데, 일본의 현역 공식 관료가 안중근 의사의 표지석 설치를 반대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절 저질렀던 식민 통치와 침탈을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57]

이에 중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안중근은 저명한 항일 의사로 중국 인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일본 측 항의를 일축했다. 또 중국 공인일보는 안 의사를 "아시아 제일의 의로운 협객"이라며 높게 평가함과 아울러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했다.

중국일본도발을 정정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중국 공산당이 제대로 된 역사 의식이 없다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하였고[58] 마루타 같은 망언에 놀아나지 말라는 발언을 내놓았다. 이는 2010년부터 731 부대에 대한 내용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중국 측의 행보를 비꼰 것이라, 사실상 일본 측은 안중근 의사를 빌미로 중국 쪽이 추진하고 있는 일을 힐난한 것에 가깝다. 덕분에 국제정세 전문가들은 "일본이 알아서 어그로를 끌었으니, 중국 공산당은 지침상 빡칠 테고 적극 대응할 테고 하얼빈역에는 표지석 수준이 아니라 아예 번듯한 기념관이 생길 것이다"라며 환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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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4년 1월 20일, 진짜 번듯한 건물로 하얼빈역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생겼다. 해당 문서 참조.

6.4.3. 기타[편집]

6.4.3.1. 안중근은 친일파다?[편집]

13. 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59]


안중근 의사 본인이 이등박문을 쏘아죽인 이유라고 언급한 13번째와 15번째 이유 때문에 종종 그가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안중근 의사는 천황을 속여 기만하고, 천황의 아버지를 시해한 만고의 역적인 이등박문을 처단한 일본의 충신이라는 얘기다.상상력이 뛰어나다

물론 저열한 헛소리이자 트집잡기일 뿐이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들을 언급했는데, 그 이유들을 보면 안중근이 일본과 천황의 충신이라는 얘기는 신빙성이 낮다.[60] 외려 이것을 언급함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죄인임은 물론이거니와 당신 일본인들 처지에서도 천황의 아버지도 죽이고 천황을 속인 자인데, 이래도 죄인이 아니란 말이오?' 라는 의미를 전달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안중근은 소싯적 친일 사상에 감화되어 영향을 많이 받은것은 사실이며,[61] 동학운동을 적극적으로 탄압한 경력이 있고,[62] 한때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한다고 한적이 있었다.

또 애국자 vs 암살자로 극단화된 평가로 인해 잘 부각되진 않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아시아가 단결하여 백인들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자였다. 한때 이토 히로부미를 좋게 평가했던 것도 한일 양국이 협력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고,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그가 진술한 내용이나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의 내용으로 보면, 아시아주의가 허상이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이토 히로부미가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왜곡하여 조선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주의자로서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군주인 일본 천황을 속여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우호관계 수립을 망쳤다고 여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일본의 충신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공판시말서의 문답을 보면 안중근이 왜 천황을 언급했는지 그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 천황에 충의를 다하기 위해 이번 거사로 나왔던 것이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 의하면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이등이 통감으로 한국에서 와서 한국 상하의 인민을 속여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일본 천황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으므로 국민은 모두 통감을 원한하게 되었다.

일본 천황의 뜻은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지만 이등이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부터는 그의 하는 짓이 그것에 반하므로 한일 양국은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한국 황제폐하'와 '한국의 독립'등의 표현에서 그가 한국을 명백한 독립 국가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황제를 더 높여서 더 앞에 부르고 있다.

6.5. 북한의 평가[편집]

북한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70년대김일성의 지시로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을 단장으로 삼아 안중근 유해 발굴단을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발굴은 실패했다.

1979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1998년 북한 영화로는 최초로 SBS에서 국내에 방영되었으며,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에도 다시 한 번 방영되었다. 하지만 원작에 등장하는 김일성 찬양은 당연히도 삭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가 순국을 앞두고, 의거를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그의 출현을 고대하는 장면이라던가.[63] 어쨌건 남한과 북한 모두 존경받는 인물인 만큼, 돌아가신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교류에 기여하시는 셈이다.

2009년, 북한은 신문을 통해 "안중근은 민족이 기억하는 애국열사이며, 어쩔 수 없이 개인 테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풍운아"라 평가하였다.#

그러나 주성하 기자가 블로그에 밝힌 바로는, 2014년 11월 기준으로 북한에서는 해당 영화가 더는 상영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북한 지도부가 암살 한 번으로 민족의 영웅이 된 안중근 의사를 본받는 사람이 나올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 안중근 의사를 띄워주는 일은 이제 없을 듯 하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평하며 독립을 위해선 인민대중이 수령의 영도하에 조직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라는 교훈을 남겼다는 내용을 교과서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조차도 김일성의 우상화와 이로부터 이어지는 북한 정권의 정당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그럼 사람들이 1930년대까지 참고만 있어야 했다는거냐[64]

7. 오늘날의 안중근[편집]

  •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영웅이 그의 사망 100주기을 기념해 2009년 10월 26일 후손들의 참관 하에 초연되었다. 해당 뮤지컬은 뛰어난 완성도로[65] 2010년 6월 7일 제4회 뮤지컬 어워즈에서 최우수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안중근 역을 훌륭히 해낸 주연 정성화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일본에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극이 있다.

  • 2009년 12월 1일에 대한민국 해군에 그의 이름을 단 214급 잠수함 3번함 '안중근함'이 취역했으며 독립운동가로는 2번째로 해군 함정에 이름이 붙여진 셈. 첫 번째는 이 잠수함의 네임쉽인 손원일함이다.

  • 인터넷에선 의외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란 말을 안중근이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66] 실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말이다. 조선 후기에서 말기 사이의 작자 미상의 글인 추구(推句)에도 나온다. 안중근은 그저 예전부터 전해지는 그 글을 붓글씨로 썼을 뿐이다. 이 말은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매일 교양을 쌓지 않으면 언행이 거칠어진다(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이다.

  • 2009년 말부터는 삼익악기에서 안중근 기타를 제작하여 발매하기도 했다.

  • 2010년 3월 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KBS 뉴스에서는 '그의 업적을 잘 모른다'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이 어떤 것이냐는 것에 대한 질문에 많은 학생들은 올바른 답을 적어냈으나 일부 학생들은 오답을 적어냈는데, 오답의 내용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진짜 의사다' 등이었다.

  • (2009년 10월 25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열린음악회' 방송이후로도) 2010년 3월 27일 공연 이후, 4월 4일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KBS1에서 신세계그룹 부산 센텀시티점 야외 주차장으로 녹화방영할 예정이던 '열린음악회' 방영 방안에서 콘서트 티켓에 '호암 이병철 100주년 기념'이라는 문구 삽입 논란[67]이 퍼졌기에 네티즌의 부정 시선이 대폭으로 차오르나 KBS가 그 문제에 대해 편집하려하였고, 그런데도 그 프로그램이 천안함 피격사건에 의해 결방되어지기도 하였다.

  • 2016년 3월 20일에 방영된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 하얼빈 특집에서 중근의사 하얼빈 의거 전야인 1909년 10월 25일부터 그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1910년 3월 26일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획을 방영했다. 치밀한 연출과 감동적인 내용으로 1박 2일 역대급 에피소드라는 평가가 지배적.

  • 2016년 8월 15일 광복절 연설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감옥에서 순국하였다고 잘못 발언하여 논란을 만들었다.# 안 의사가 순국한 감옥은 뤼순 감옥이다. 하얼빈은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곳이다. 역시 혼이 비정상인 503

  • 문명 4에서는 위대한 스파이(Great spy)로 나온다.

7.1.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편집]

1970년에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41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남산공원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워져 의사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과 명언 및 어록, 붓글씨로 된 휘호 등을 전시하게 되었다. 2010년 10월 26일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여 현재의 자리에 신관이 개장되었다.

서울 효창공원에서는 삼의사(三義士)의 묘역 안에 안중근 의사를 위한 가묘(假墓)가 따로 있었는데 이 가묘에는 공식 비석이나 유골이 안장되어 있지않은 빈 묘소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어서 국내로 운구될 경우 이 묘역에 공식 안장하게 될 예정이며 명칭도 '사의사(四義士)의 묘' 로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

경기도 부천시에서는 관할 지역인 중동에 있는 근린공원의 명칭을 안중근 공원으로 변경하고 공원 내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부천종합터미널 건너편에 있으며, 부천시청역 3번출구에서 계속 직진하면 나온다.

경기도 의정부시의정부역 근처의 공원에 안중근 동상이 있다. 어째선지 중국에서 줬다고.

7.2. 안중근을 모시는 일본의 절[편집]

혼슈, 북부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절 이름은 대림사(大林寺). 이 절을 건립하였던 사람은 안중근과 친분이 있는 일본군 헌병이자 간수였던 치바 도시치이다. 치바 도시치는 안중근과 대화하면서 그에게 감화하였고, 안중근은 사형당하기 전 유명한 글귀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글을 치바에게 써 주었다. 이후 치바는 고향인 미야기로 돌아와서 안중근을 기리는 사찰을 세웠고, 본인도 사망한 뒤 유족들이 이 절에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안중근의 글은 안중근 탄생 100주년인 1979년에 치바의 유족들이 한국에 반환하였고 대신 이 글을 본뜬 비석을 절 내에 세웠다. 대림사에서는 매년 안중근의 추도식을 여는데 치바의 유족들 뿐만 아니라 미야기 민단과 센다이 주재 한국영사관에서도 참석하고 있다.

생전에 가톨릭 신자였던 사람을 절에서 모시는 것이 은근히 고도의 고인드립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한국의 장흥군에도 안중근을 모시는 해동사라는 사당이 있어서 좀 애매하다. 해동사는 고려 충렬왕 때의 성리학자 안향[68]의 사당인 만수사의 곁에 1955년에 지어진 사당으로 2015년에 전남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이런 유교식 사당도 우상숭배에 해당하는지라 조금 애매하긴 하다.

8. 그 외[편집]

  • 체포 당한 후 일본 법원에서 공판 도중에 자신의 상관으로 김두성을 거론한 적이 있다. 일본은 당연히 눈이 뒤집혀서 이를 잡으려 찾아다녔지만, 결국 누군지 찾지 못했다. 문제는 현재도 그가 누군지, 심지어 실존하는 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

  • 20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고종이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고 러시아 거류 한인들에게 변호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다는 내용의 일본 기밀문서가 이태진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 책임연구원 신운용은 다른 방계 사료로 그런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 안중근 의거를 병탄의 기회로 노리고 있던 통감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일제 외무성이 고종 배후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 고종과 황실이 안중근의 의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에서 성립될 수 없는 가설이라고 반박했다.[69]

8.1. 장군인가 의사인가, 공식 칭호 논란[편집]

해당 문서 참조. 안중근 의사(義士)/장군의 호칭 문제는 꽤 오래된 문제다.

일부 '의사'로 지칭하는 것이 안중근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일본이 뒷작업을 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사실이다. '의사'란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의사'와 '장군' 모두가 안중근의 업적을 기리는 칭호다.

'장군'칭호의 유래를 살펴보면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되었을 때 자신의 신분을 '조선의용군 참모중장'으로 밝힌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도 안중근은 북간도에서 김두성과 이범윤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의병내에서 참모중장의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이 이후 행적에 의해 안중근 칭호에 '장군'이 적합한지여부가 문제된다. 북간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안중근은 국내에서 의병활동중인 홍범도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할 목적으로 국내 진격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두만강을 건너기 직전 일본인 상단을 생포하게 된다. 이에 반일감정이 극도로 달하던 의병들이 생포자들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나, 안중근은 이들을 풀어주게 될 경우 다른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의로움을 전파하여 궁극적으로 조국의 독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하며 풀어줄 것을 주장한다. 결국 이 사건을 시작으로 의병조직 내에 분열이 일어나며, 이후 일본군과의 충돌에서 패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이후 안중근은 엔치야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피난하고 그곳에서 단지혈명을 결성한 뒤 이토를 사살하게 된다.

결국, 안중근이 의병 '장군'으로써 활약한 활동상은 사실상 미미하다 할 수 있기에 '장군'의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토를 사살하고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한 것을 무력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것을 보아 '의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70]

더구나 장군이란 칭호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의 모습이 부각된다. 그에 비해 의사라는 칭호는 일제 전체에 무력과 정신으로 맞선 애국자로서 그의 업적을 더 넓게 인정할 수 있다.[71]

다만, 안중근 의사의 이후 법정 진술을 볼 때, 안중근은 스스로를 군인의 신분으로 이토를 사살한 것으로 주장하였는 바[72] 를 고려하여 장군 칭호를 선택할 필요성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의사'와 '장군'의 호칭 문제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는지에 대한 차이에 불과할 뿐 어느 쪽을 사용하건 안중근의 업적을 결코 폄하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하겠으며, 사실 이 항목 또한 '의사'라는 표현이 격하하는 표현이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정보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어느 한 표현만 맞는 표현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실제로 민간에서는 "의사"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는 편이며, 군 내부에서는 "장군"이라는 칭호를 주로 쓰고 있다.

8.2. 관련 어록[편집]

風蕭蕭兮易水寒(바람은 싸늘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壮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 형가(荊軻, ?~기원전 227년)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1910년 3월 유언.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 사형 당일 1910년 3월 26일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 간수에게 써준 휘호.[73]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슬로건이 된다.[74]

'사군천리(思君千里) 망안욕천(望眼欲穿) 이표촌성(以表寸誠) 행물부정(幸勿負情)'
- "천리 밖 임금을 걱정하니 바라보는 눈이 허공을 뚫으려 하네. 작은 충성을 표하였으니 저의 충정을 잊지 마소서."

8.3. 안중근을 연기한 배우[편집]

8.3.1. 영화[편집]

8.3.2. 드라마[편집]

  • KBS 왕조의 세월(1990년): 안병경

  • SBS 의사 안중근(1996년): 이일재

8.3.3. 뮤지컬[편집]

8.4. 관련 단체[편집]

9. 관련 문서[편집]


[1] 왼손 4번째 손가락(무명지)이 한 마디가 없는데 이것은 안중근 외 10명의 독립운동가가 단지동맹으로 결심을 다지고 애국혈서를 쓰기 위해 잘랐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안중근의 애국심과 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고 있다.[2] 독립군 참모중장이다.[3] 당시 아시아주의의 지지자들이 워낙 서양 철학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데다가 당시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에 깊숙이 자리잡았던 우생학 때문에 아시아주의의 대외 인식은 대동아공영권 수준으로 시궁창이다. 그러나 평화주의적 아시아주의손문, 안중근 등등 한국중국의 많은 네임드 영웅들의 독립운동과 대일항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것을 어디까지나 악용하고 비틀어 먹은 놈들이 문제일 뿐이지..[4] 자서전에 따르면 가슴과 배에 걸쳐 점 7개가 있었던 까닭에 자를 응칠로 하였다고 한다.[5] 현재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도마라고 호칭한다.[6] 대략 10m[7] 김구가 안중근보다 3살 많은데 김구와 안중근은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은듯 하다. 아버지 손님일 뿐, 내 친구는 아님[8] 참고로 안중근보다 3살위인 김구는 동학운동 황해도 접주였다. 아 그래서 두 사람이 친하지 않은 거구나[9] 한국 이름은 홍석구.[10] 유동하는 당시 만 17세였다고 한다. 흠좀무[11] 안중근이 이토 저격을 성공한 후 유동하 의사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만세를 외쳤다는데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조를 나눌때 채가구에 우덕순,조도선, 하얼빈에 안중근과 유동하로 나누었다는 다른 기록이 있다. 거사 당시 다른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기 쉽진 않은데 국가보훈처 기록에는 정황이 이렇다. 일단 우덕순 조는 역 구내 숙소에서 새벽부터 대기하다가 조도선이 역 매점주인에게 일본의 대신(이토)이 온다는 것 때문에 러시아 군대의 경비가 철통같아 나갈 수가 없다는 얘기를 전했고 우덕순은 거사를 포기하고 대기 중이였다. 또는 이를 수상히 여긴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감금 상태였다. 유동하는 통역과 두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이때 뒤늦게 안중근과 합류했거나 처음부터 안중근을 보조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12] 유동하 친척의 증언이다.[13] 네이버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14] 이걸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안 의사는 당시 자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다. 총알 한 발을 남김은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15] 이 총알 한 발을 메시지로 해석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안 의사는 이토를 저격하고도 혹여 변장했을까 싶어 이토 주변의 일본인들도 저격했는데, 이토가 쓰러졌으니 쏘지 않았다 하면 모순이라는 것. 이 관점에서의 해석은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발을 일부러 남겼다는 것이다.[16] 열 걸음 앞 이토에 3발 명중… 러시아어(語)로 "한국 만세!" 3번 외쳐 이전 편집자가 이르길 안 의사께서 재판에서 세계공통어로 대한제국만세를 외쳤다고 진술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근거자료가 네이버블로그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코리아 후라를 에스페란토로 대한 만세! 라고 주장하는데 에스페란토로 한국은 Koreio 이고, 발음조차 코리아가 아니다. 심지어 여기서 말하는 '세계공통어'가 라틴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주장이 근거자료가 희박하고, 그나마 러시아어로 했다는 가설이 많다. 이 시기의 하얼빈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시베리아 횡단열도의 연장선을 건설할 만큼 러시아제국의 입김이 강한 지역이기도 했고, 만주는 러일전쟁이후 바로 이 하얼빈을 기준으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이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또한 체포 당시에 러시아제국 공안이 관여하였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로서 러시아 제국 사람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는 점으로 보아, 하얼빈에서 러시아어로 외쳤다는 사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좌파 계열의 지식인들이 에스페란토에 관심하기는 했지만, 안중근이 에스페란토를 배웠다는 내용은 지금까지 전혀 나오지 않았다.[17] 안중근이 근왕(勤王)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는 아직까지 논쟁거리이다. 즉, 그가 대한제국 만세의 의미로 외쳤는지, 아니면 대한민국 만세의 의미로 외쳤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18] KBS 역사스페셜에서 그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19]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는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적으로는 자연사지만, 에도 막부 측의 독살 혹은 그가 토막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이 부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취한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심증 내지 카더라 뿐이지 사실로 밝혀진 바 없는 부분이므로 주의.[20] 지폐 이전에 사용된 동전의 경우 구한말 한국 황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등의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가 용이한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과거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해 되는대로 핑계를 댄 것이라 주장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일본학자들이 소수 존재한다. 하지만 삼국 화폐통합은 어디까지나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이미 화폐 정리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의 행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21] 각종 불평등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시설 개선, 개혁등의 명목으로 강제로 진 빚이다.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이 600만원 정도였으므로, 2년치 예산이 넘어가는 셈. 이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운동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22] 을사늑약에 찬성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23] 정미 7조약에 찬성한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 이완용.[24] 기유각서 [25] 안중근기념관에서 실문서를 확인 가능하다.[26]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만화 맨발의 겐 왕도의 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후세 다쓰지처럼 일본 내에서도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은 언제나 있었다. 실제로 김두봉의 조선의용대 설립에 있어서 국민당 장제스를 설득한 이 역시 국공합작에 참여하고 있었던 일본인이었다.[27]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현재도 안중근 의사에 대해 테러리스트 내지 살인범으로 평가한다. 다만, 일부 양심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사죄하면서 안중근을 그러한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28] 명순구,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 평가 - 일본인이 안중근을 흉한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 P.157~161[29] 군민병은 적의 접근으로 민병, 의용병단을 조직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적과 저항하는 주민들을 의미한다. 이때 적의 접근이란 적어도 무기를 들고 저항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적의 공격을 의미하는데, 현실적으로 이토의 방문을 적의 접근이라고 볼 수 있으려면 위의 교전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30] 명순구,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 평가 - 일본인이 안중근을 흉한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 P.153~154[31] 1박 2일에서 내보낸 자막이다.[32] 원래는 3월 25일 집행 예정이었으나 한국의 의병 항쟁이 거세짐과 동시에 순종 황제의 탄신일이라 하루 늦춰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당시 대한제국이 거의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황제 탄신일 따위는 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 경찰권, 사법권, 군대를 뺏긴 상태였지,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다. 참고로 대한제국이 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된 날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조약 체결일이다. 그리고 일제는 일제강점기에도 구 대한제국 황가(경술국치 이후는 이왕가)의 권위를 이용하기 위해서 일본 황가에 준하는 고위 귀족의 지위로 인정할 정도였으니 순종의 생일을 챙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33] 여담으로 1박2일에서 사형장을 공개했을때 김준호, 차태현(나머지 넷은 스케줄상 귀국)등 현지 출연,촬영진들은 물론이요 보는 사람들마저도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한다.[34] 그리고 본인도 효창공원의 삼의사와 안중근의 허묘 옆에 묻혔다.[35] 안중근 의사 순절한 중국 여순형무소 취재 [36]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37] 예전 용어. 병자성사로 명칭이 바뀌었다.[38] 다행히도 니콜라 빌렘 신부가 신부의 자격으로서 개인적으로 안중근의 종부성사로 봐주었으며, 이로 인해 뮈텔이 치졸하게 빌렘 신부에게 성무 자격정지를 절차 따위 개나 줘버고 자기 멋대로 내렸다.[39] 다만 잔 다르크의 경우엔 검이나 창 등의 무기로 직접적인 살인을 한 적이 없고, 살인을 피하려고 깃발을 휘둘렀다고 스스로 밝혔고, 오히려 부상당한 영국군 포로들을 위로해주거나 살려줬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온다.[40] 조각가 고영환 토마스 作.[41] 동학군을 이끌다 관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김구를 보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를 계기로 안중근과 김구는 안면이 있었는데, 이 둘은 나이대도 비슷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42] 안중근의 순국 뒤에 많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녀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라고 불렀다. 200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43] 안분도(세례명인 베네딕토를 한자로 음차하면 '분도'다)로도 불린다.[44] 김구의 장남[45] 게다가, 안태건의 손자인 안민생(安民生)과 안경근은 4.19 혁명 이후 통일 운동에 나섰다는 이유로 5.16 군사정변 이후 투옥당하기도 한다. 출처 [46] 주로 중국에서 살았으나 러시아로 망명했었다는 기록이 있다.[47]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는 일본 밀정이 준 독이 든 간식을 먹고 죽는 걸로 묘사했다.[48] 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에서는 히로쿠니(博邦)에게 사죄했다고 나오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서자였던 분키치(文吉)에게 사죄했다고 나온다.[49] 2014년 MBC은 자신들의 다큐멘터리 '안중근 -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는 안준생의 퍼포먼스가 일제에 의해 꾸며진 퍼포먼스였다고 주장했다. 안준생은 이토 분키치에게 영어로 "네 아버지는 잘못했고 우리 아버지는 희생되었다"고 일갈했는데 일제는 안준생이 사죄를 했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당사자들도 아니고 후대 사람들의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으며, 당대에 기록된 사료나 문헌 상으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또한, 아래 나오겠지만 인척 관계였던 김구가 안준생의 발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살해해야 한다고 날뛰었을리가 만무하다.[50] 안경근·안춘생·안진생은 진짜로 '배은망덕한 김가 놈'이라고 펄펄 뛰었으며 김구 장례식도 안 갔다.[51] 호칭에 대해서 장군이냐 의사냐 논쟁이 좀 있었다. 하단 내용 참고.[52] 다만 서예는 당시 치체높은 사대부집안이라면 필수 소양이었다.[53] 단,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맞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54] 메이지 시대까지만 해도 스스로 큰 대의를 품고 활동하는 이들을 지사(志士)라고 부르며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있다 보니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맞서 투쟁한 안중근과 같은 인물에 대한 호의적인 의견도 나올 수 있었다고.[55] 이분은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시는 일본 개념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국내 신문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인터뷰도 자주 하시는 분.[56] 설상가상 이토 히로부미는 "남자는 배꼽 아래론 인격이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웅호색이란 식의 쉴드질도 불가능하다.[57] 따지고 보자면 정말 위의 말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를 높이 여기는것도 하면 안되는거다. 잔 다르크도 성인으로 높여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에서 화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 극우들이 그렇게나 떠받드는 사형된 전범들도 역시 떠받들면 안된다. 이들도 연합군의 전범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기 때문[58] 당장에 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는지는 무시하더라도 태평양 전쟁의 전범 국가인 일본에서 할 말은 아니다.[59] 사실 이 조항은 음모론 단계이고, 범인으로 지목되는 인물도 원래는 이토가 아닌 이와쿠라 토모미이지만 이런 사실이 안중근 의사의 귀에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60] 애초에 안중근 의사는 한국 사람이며 처단 까닭도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이다. 일본과 천황의 충신이라는 얘기는 그의 국적도 안 보고 하는 얘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충신이라면 말이 되겠지만[61] 그렇다고 이게 100% 비난거리는 아닌게 이 당시 일본은 개화의 성공 사례로 생각되었고 때문에 개화 사상을 부르짖는 자 치고 일본을 동경하지 않는 이 드물었다. 때문에 친일파=매국노는 아니고 친일파 안에 매국노가 있다고 봐야 한다. 괜히 그런 매국노들을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고쳐부르자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62]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는 한 동학 농민운동에 가담한 소년을 보호해줬다. 물론 그 아버지도 동학운동을 싫어했다.[63] 김일성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몇년 뒤에서야 태어났다.[64] 보천보 전투는 1937년의 일이다.[65] 부실한 완성도를 애국 마케팅으로 커버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무대 연출이나 음악 면에서 탄탄한 완성도를 보여주어 당당하게 체면을 지켰다. 한국에 몇 없는 성공적인 대형 창작 뮤지컬. 단 맹목적인 국수주의로 기울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을 추구하다가 '이토 히로부미를 너무 미화한 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영웅(뮤지컬) 항목 참조.[66] 인터넷 뿐이 아니다. 1993년 어린이 위인전으로 출판된 유레카 한국위인특대전집 32권 중 '안중근' 편에도 수록돼 있다.[67] 사회자 황수경과 절반 스타들이 이병철의 탄생을 축하하기도 하였다[68] 흥녕(순흥) 안씨로 안중근에게는 먼 조상에 해당하는 인물이다.[69] 여기에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와 관련하여 자신의 배후로 지목한 대한의군 총대장 김두성(金斗星)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태진은 김두성을 고종 황제 자신으로 지목했지만 신운용은 이를 반박하고 김두성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출처: 신운용 「한국의 안중근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둘)」 《남북문화예술연구》제11호, 2012). 이보다 한참 전인 1969년에 조동걸 춘천교육대 교수(현 국민대 명예교수)는 「안중근 의사 재판기록상의 인물 김두성고」(《춘천교대 논문집》7, 1969)에서 김두성은 유인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70] 의병활동 그 자체가 대단한 활동이지만 이후 이토사살이라는 위업이 안중근의 가장 주요한 업적이라는 점과 의병활동 결과 자체만 두고 평가했을때 장군으로써는 좋은 평가를 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71]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사형될 때까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한중일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즉, 투사뿐만 아니라 사상가의 면모도 지닌 셈.[72] 이쪽이 재판에서는 더 유리하고 정당성을 갖는다. 민간인이 통치자를 살해한 것과 군인이 적장을 처치한 것 중에서는 단연 후자가 정당성 면에서는 우월하다.[73] 치바 도시치는 안중근에게 사형집행을 알린 헌병이었는데 소식을 알린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안중근이 써준 글이 바로 이 글이라고. "나에게 미안해 하지 마라. 당신이 하는 그 행동은 군인으로써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라는 의미라고.(2016년 3월 20일 1박 2일 하얼빈 특집 중 소개) 즉 이 문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대를 이해한다는 계기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뭐 그게 본인의 신념이니까 그런 말을 한 것이긴 하겠지만.[74] 육군사관학교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휘호가 새겨진 바위가 있으며, 논산의 육군훈련소에도 곳곳에 이 문구가 붙어 있다.[75] 방송에서 문제를 푸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76] 위에 언급된 AOA의 경우, '공부를 안했다'로 넘어갈 여지라도 있지만, 이들은 광복절독립유공자분들을 자발적으로 모욕했다. 아카이브에 저장된 이들의 게시물과 댓글을 보면, 하나같이 독립운동가 분들을 모독하는 발언으로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