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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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1.1. 개요1.2. 이름1.3. 생애
1.3.1. 청년 시절에서 회심하기까지1.3.2. 회심의 신뢰성 논란1.3.3. 사제로서의 활동
1.4. 대표적인 업적들
1.4.1. 저술 목록
1.5. 어록1.6. 그밖의 이야깃거리
2.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1.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편집]

서방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

파일:external/www.adorazioneeucaristica.it/ago2.jpg
생몰년도: 354~430년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대 그레고리오

언어별 명칭

라틴어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

영어

Saint Augustine of Hippo(세인트 어거스틴 오브 히포)

프랑스어

Saint Augustin d’Hippone (생 오귀스탱 디폰)

이탈리아어

Sant'Agostino d'Ippona (산타고스티노 디포나)

에스파냐어

Agustín de Hipona (아구스틴 데 이포나)

포르투갈어

Agostinho de Hipona (아고스티뉴 드 이포나)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평가이다. 그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굳이 꼽는다면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이다.

진리의 연인


― 前 주교황청 한국대사인 성염 교수의 평이다.

1.1. 개요[편집]

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고백록 13권 중에서


354년 11월 13일 누미디아(현재의 알제리 지역) 타가스테(Thagaste)에서 출생, 430년 8월 28일 히포 레기우스(현 알제리 안나바)에서 선종. 4세기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초대 교회 교부(敎父) 중 하나이며 교회학자.

기독교 교파를 막론하고 두루두루 존경받는 성인이다. 보수성향의 개신교에서도 이 사람은 존경하는 편이다. 축일은 가톨릭 및 서방 교회에서는 8월 28일, 정교회 및 동방 교회에서는 6월 15일. 상징물은 주교관과 지팡이, 학자를 상징하는 책과 깃펜, 조개, 비둘기 등이 있으며, 양조업자, 인쇄공, 신학자수호성인이다. 그의 신학적인 사상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보나벤투라,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 가톨릭 관련 인물들은 물론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의 개신교 신학자와 존 밀턴 같은 시인, 르네 데카르트,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장 폴 사르트르, 한나 아렌트,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두루두루 영향을 끼쳤다. 사실상 기독교 근본주의 진영의 인물들만 아니면 아우구스티누스를 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잘 찾아보기 힘들다.[1]

하지만 그의 빛나는 업적과 성덕(聖德)은 대체로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고, 젊었을 때는 양아치가 따로 없는 생활을 했다(...).그래서 악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카더라 그런 쓰디쓴 청년시절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와 그 후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신의 마음을 써낸 것이 바로 '『고백록(Confessiones)』[2]'. 사실 회심 이전에는 동거녀와 사생아도 낳는 등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분명 문제가 있지만, 아직 그리스도교 윤리가 확고히 정착하기 이전인 고대 후기 로마 사회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크게 양아치스럽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교 신앙, 애인과의 동거 및 사생아 등은 고대 로마 기준으로는 특별한 일이 아니였으니까.[3]

1.2. 이름[편집]

본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혹은 아오스딩으로 알려져 있다. 정교회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스라고 하며, 철학계와 서양사학계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한국 개신교성공회에서는 영어식 발음으로 성(聖)"어거스틴"이라고 한다. 교회학자로서의 칭호는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이다.[4]

참고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은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가톨릭 내부에서는 이 인물을 원칙적으로 "아우구스티노"라고 호칭한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정식으로 주교회의를 통해 외국 성인명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안에 대해 발표한 바 있다. ( PDF 자료) (쉽게 풀어 설명한 기사.) 다만 어감이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가톨릭 내부의 자료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부이고 주교이고 신학자이고 간에 거의 신경을 안 쓴다고 보면 된다. 궁금하면 바오로딸 같은 가톨릭 계열 인터넷 서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라고 검색해보자. 외래어 표기법이 다 그렇지 뭐

1.3. 생애[편집]

1.3.1. 청년 시절에서 회심하기까지[편집]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관리인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어머니 모니카(Monica, 축일 8월 27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성사는 받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서 양육되면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고[5][6], 370년에는 아들을 출세시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카르타고 대학에 입학해 수사학을 전공했다.[7]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371년 사망했는데, 점점 방탕해져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기가 막혀서 죽기 직전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철학에 심취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비상한 머리에 스스로 도취하여 어머니의 바람과는 점점 멀어져 갔고, 372년에는 때부터 어떤 여자[8]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아데오다투스'[9]라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왜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생활만 했는지는 불명이나,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이 고백록에서 "떳떳하게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 지각 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이었다"고 했다. 아데오다투스는 372년에 태어나 388년에 일찍 죽었고, 그녀와의 동거는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카르타고에서의 공부를 끝낸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 교수 자격증을 따 고향으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세웠지만 영 맘에 차지 않았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고백록 4권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 서로 마음이 잘 통했던 친구였던 듯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열병이 돋아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던 와중에 세례를 받았다.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신이 없었을 때 세례받은 것을 비하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았고 "나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일갈했다.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에 크게 충격을 주었고, 얼마 뒤 그 친구는 다시 쓰러지고 결국 사망했다. 친구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고 슬퍼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택한 길은 친구와의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고향을 떠나 다시 카르타고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카르타고로 가 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진리와 악 등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19살 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10]라는 책을 읽은 뒤로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경향이 더욱 심화 되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 모니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던 경험으로 그는 우선 성경을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가줘다준 키케로나, 그가 주로 읽던 수사학, 철학 책보다는 화려함이 떨어지는 성경의 문체 때문에 곧 그만둔다. 그때 그는 자신의 질문의 답이나 진리를 마니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을 가졌다.[11] 그래서 373년에는 열렬한 마니교도가 되었다. 그의 첫 저서도 마니교의 미학을 다룬 책이며, 자신의 친구들[12]도 많이 마니교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철학자들의 말들에 비해 마니교의 가르침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의구심을 풀어줄 마니교의 교사 파우스투스가 자유학예는 커녕 기본지식이나 간신히 갖추고 있는 인물임을 알고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13]

결국 382년, 그는 마니교를 떠났고[14] 9년간 몸담았던 믿었던 진리가 가짜였음에 허탈감을 느껴 진리는 알려질 수 없다는 회의주의 학파 아카데미아학파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신 플라톤주의[15]에 빠졌는데 그것도 잠시, 383년에는 아예 카르타고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로마로 가 수사학 교수 일을 했고[16] [17], 학생이 도무지 학비를 안 내자 질려서 이듬해 밀라노로 옮겨간다. 역마살 돋네. 때마침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를 구한다는 전령이 로마시로 왔고, 아우구스티누스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시키려 하였던 로마의 시장과 마니교도들의 지원에 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로 떠났다.[18] 본래 로마는 어머니 모니카가 모르게 갔던 것인데, 이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려와 아들을 찾아 밀라노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생의 턴포인트가 되는 인물인 암브로시오(축일 12월 7일) 주교를 만난다.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의 첫 인상에 큰 감명을 받았고[19] 그의 강론을 틈나는 대로 경청하곤 했는데, 딱히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진리를 얻고자 함이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말을 저렇게 잘 하나를 알아보려 한 것이었다. 계기야 어쨌든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와 그의 강론 내용에 점점 이끌리고 있었는데[20] , 그 때는 마침 자신의 여러 내적인 문제[21]로 고민하던 때였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 살던 고향 친구가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극도로 절제된 수도생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때는 쾌락에 빠진 노예인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한탄했다고 한다.[22]

심란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택 정원을 거닐며 고민하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라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뭐라도 집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들어와 눈에 있는 책을 집어서 펼쳐봤는데, 그건 바로 사도 바오로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 로마서(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3~14절 (공동번역성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을 받아 개종을 결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23], 그의 지인들과 카시키아쿰의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렀다.[24] 암브로시오 주교 밑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받는다. 또한 이듬해인 387년 4월 13일에는 친구 알리피오(Alypius, 축일 8월 15일),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32세. 한편 15년 동안 동거했던 여인은 그의 회심을 알고 곁을 떠났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녀 역시 회심하여 수녀원에 들어가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1.3.2. 회심의 신뢰성 논란[편집]

<고백록> 8권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극적인 회심과정이 감동적으로 기술되어 후대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아돌프 하르낙 이후로 처음으로 그의 회심의 역사성과 신뢰성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르낙처럼 고백록 8권의 회심은 역사적으로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하는 측의 주된 근거는 회심 직후에 쓰인 초기 작품들(소위 카씨키아쿰 대화록)과 고백록[25]에서 말하는 회심과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복한 삶>이라는 저술에서 서술된 회심 과정은 밀라노 정원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하나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대화록 <아카데미아파 반박>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이제 약간 알기 시작했노라’고 말했다. 또한 페라리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서 13:13-14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정작 회심 직후에 쓴 작품들에는 이 구절이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고백록 8권의 회심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기독교 신앙이 아닌 신플라톤주의에 빠진 철학적 회심이라는 주장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회심이 단순한 철학적 회심이라는 지적은 타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 후 몇 달 만에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신념이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믿음은 일치하는 면이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독백록>에 대한 <재론고>에서도 이때의 사상에서 몇 군데밖에 수정할 게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과거에는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설명했지만 사상이 완숙했지만 신학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된 것일 뿐 사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회심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렇다고 고백록 8권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과정을 실제 그대로 묘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선 구조적으로 대조나 의인화 같은 기법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인의 회심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예를 들어, 고백록 2권에서 자신이 배를 훔쳤던 나무[26]와 8권에서 회심 이전 엎드린 무화과나무가 대비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우둔함과 허영심’이라는 자신의 옛 친구들과 ‘절제’라는 여인을 등장시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400년경쯤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의 386년의 회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들어가 있다. 특히 회심 이후 발전시킨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은총론적 관점에서 자신의 회심을 해석한 것이 고백록 8권의 회심이다.

1.3.3. 사제로서의 활동[편집]

387년, 그리스도인이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 및 친구와 더불어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 모니카는 도중에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고, 388년에 아프리카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수도 공동체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머지 않아 아들도 죽고 말았다. 후에 수도회원들은 점점 늘어났고 공동체는 단순한 수도생활을 넘어 일종의 성서 연구소로 탈바꿈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꾸려놓은 수도 공동체는 한참 후인 13세기에 그가 정립한 회칙을 바탕으로 탁발수도회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로 정식 발족한다.


391년, 사제가 되지 않고 수도생활을 더 하고 싶었던 36세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료를 더 모을 생각으로 히포로 출장을 가 미사에 참례했다. 아우구스티노의 명석함과 타의 모범이 되는 보속의 생활은 이미 그곳까지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히포의 주교 발레리오가 강론 중 히포에 새로운 사제가 필요하다고 한 순간, 사람들이 다짜고짜 아우구스티노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졸지에 발레리오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게 아닌데 싶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울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엉뚱하게 그가 주교가 되지 못해 서운한가 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395년에는 보좌주교가, 발레리오 주교가 세상을 떠난 396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수사학 지식까지 총동원하여 히포의 백성들을 위해 사목 활동에 집중함은 물론이고, 자신이 직접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으며, 삼위일체, 은총론 등의 영성신학을 연구하고, 방대한 양의 각종 저술활동을 통해 교회를 공격하는 영지주의(그노시스), 도나투스파[27][28], 펠라기우스[29][30], 아리우스파 등 각종 이단들을 향해 쉬지 않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 중에는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마니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마니교 전력은 주교가 된 이후로도 평생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수많은 논쟁에 뛰어들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마니교 전력은 자신의 적들에게 인신공격까지 받을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고백록>의 집필 배경 중 하나도 지인들이 그의 생애가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받은 418년 이후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인 율리안에게서 자신의 논리가 마니교적이라고 공격받았다.

그러나 그런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나투스파들을 로마제국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무력진압한 일이 있었다. 물론, 이는 너무나 강한 종교적 광기로 가득찬 광렬 도나투스파들이 약탈과 방화 등 테러나 다름없는 행위를 일삼았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31] 그는 폭력을 써서라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종교재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32] 그러나 여기에도 오해가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칙적으로 '폭력적으로라도 개종시켜라'를 주장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본래 도나투스파를 대하는데 있어서 많은 동료 가톨릭 신학자들보다 훨씬 더 온건한 편이었다. 처음에 그의 입장은 "박해는 악인이 하는 것이다"였고, 도나투스파도 어디까지나 말로 설득해서 생각을 바꾸도록 해야 하며 국가의 공권력으로 탄압을 하는 일만은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동료 사제들을 달랬다. 근 10년에 걸친 온갖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도나투스 파와의 극한적인 대립과 폭력 상황이 이어지자 마지못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지, 이를 적극 권장하고 '폭력을 이용한 강제 개종'을 일반적인 정책으로 역설했던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극렬 도나투스 파에 대한 최후의 필요악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John Christian Laursen, Cary J. Nederman (eds.) Beyond the Persecuting Society: Religious Toleration Before the Enlightenmen, Philadelphia, 1998, p. 17.)

399년쯤에는 그의 3대 대작[33] 중 하나인 삼위일체론 저술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 중에서도 저술 동기가 꽤 특이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부분 이단을 논박하거나 논쟁적 상황, 또는 지인들의 요청에 의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유독 삼위일체만은 학문적 관심에서 저술하였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삼위일체론만을 저술해서 426년쯤에 최종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근데 이것도 주변 지인들이 중간에 원고를 몰래 가져가서 해적판으로 출시한 사건으로 그나마 앞당겨진 것이다. 안 그랬으면 유작 될 뻔[34]

죽기 3년 전에는 자신의 저서들을 다시 검토하는 <재론고Retractationes>를 지었다. 이때 100권이 넘는 저술 목록을 보고 놀랐다고. 특이한 건, 재검토 작업을 그 책을 짓기 시작한 순서대로 진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사고와 행적을 추적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재론고>이다.

은근히 워커홀릭 기질이 있다. 주교가 된 이후로 그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우선 그는 히포의 주교이기 때문에 매주 설교를 해야했다.[35] 당시 주교는 교회일뿐만 아니라 담당 교구의 민사 사건도 해결하는 역할도 맡았기에 자잘한 사건들의 해결도 전담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회의란 회의는 빠지지 않고 거의 다 참석했다.[36] 그와중에도 이단들에 대한 반박 저술이나 기타 저술도 끊임없이 지었으며, 말년에는 <재론고>를 쓰느라 자신의 책들을 전부 꼼꼼히 비평하는 작업까지 더해졌다.

427년에는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로마 제국을 약탈하며 북아프리카를 반달쳐들어왔고, 그들을 피해 타 지역에서 사람들이 히포로 몰려들어왔을 때 아우구스티노는 거처를 제공하는 등 그들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430년에는 히포까지 포위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공들여 이룩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병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8월 28일,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7장을 읊으며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유해는 반달족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 사르데냐 섬에 묻혔다가 훗날 이탈리아 본토인 파비아와 밀라노로 옮겨져 유해 일부가 성유물로 보존 중이다.

1.4. 대표적인 업적들[편집]

젊은 시절의 흑역사들 때문에 악의 문제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특히 그리스도교원죄 교리가 정립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그리스인들의 영향으로 사람이 짓는 죄를 외부적 요인에서 찾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의 원인을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찾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먼 옛날에는 죄를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 개념으로 보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관점을 돌려버린 것. 다만 원죄가 남자정액으로 인하여 유전된다고 보았는데, 당연히 현대에는 "아무리 위대한 교부라고 하지만, 이건 좀 뻘소리"라고 취급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조금 변호하자면, 과거에는 인간의 본질이 남자의 정액에 있다고 보았기에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었다. 게다가 과학적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고대인의 발언을 놓고 뻘소리네 어쩌네 하는것도 역사학적으로 금기시되는 시대착오의 오류에 불과하다.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플라톤주의적 답변을 내놓았다[37]. 그리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세상의 악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지적하였고, 악은 더 큰 선을 위한 조화임을 주장하였다.
악의 문제에 대한 그의 논증은 한 번 살펴볼만한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를 받았다.
-하느님은 지선하신분이시다
-선에서 악이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에 대한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그 자신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흑역사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임은 분명하지만, 또한 당시 서로마 제국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를 중심으로 성공적인 체제 개편에 성공하였고, 이러한 안정성 속에서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즉 자신들은 어떤 분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얻은 것인지, 곧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이고 그리스도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합의해야 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등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반면 서방은 동방과 같은 안정성을 누리지 못했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기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있던 시기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대제국이 붕괴해가고 있었고, 야만족이 쳐들어와서 약탈이 일어나고 로마의 온갖 위엄이 박살나는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이 세상은 왜 이리 막장일까?', '영원할 것 같은 도시인 로마도 망했는데, 결국 인간의 도시(인간의 문명)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단 말인가?'하는 생각들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시대적 부름에 응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이 막장인 이유를 '죄' 개념을 통해 논증하였고,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악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인간의 도시(인간의 문명)는 결코 영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즉 바빌론이나 로마처럼 아무리 잘나가는 문명들일지라도 이 법칙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오직 '하느님의 도시'만이[38] 영원하며,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도시(완전한 문명)라 하였다. 그리고 이 '인간의 도시'를 순례하는 '하느님의 도시'의 백성들을 이끄는 조직을 교회라 설명하였는데, 아우구스티누는 이러한 사상들을 그의 역작 <신국론>에서 체계적으로 논증해 버렸다. 그리고 이 책은 서유럽인의[39] 역사관을 돌려놓았다.[40]

고백록 11권에서 전개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굉장히 유명하다. 버틀란드 러셀 경은 그의 시간론을 '칸트의 시간론 보다 훨씬 명료한' 이론이라 평가하면서 이 이론이 현대 과학의 관점과도 맞는다고 말하였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이라 보았다.[41] 그리고 우리가 습관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을 구분하는데,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유일하게 현재만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과거는 현재에 대한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에 대한 기대'로써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100년 전', '10년과 20년 뒤'처럼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는 말을 쓸 수가 없는데,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 11권에서 이 문제에 대해 길게 고민한 흔적을 알 수 있다.

<교사론>에서는 언어철학을 다루었는데, 우리가 쓰는 단어가 그 실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예를 들어, '해'라는 단어를 쓰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해의 표징일 뿐 진짜 자연상에 존재하는 해를 인식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이러한 언어철학은 비트겐슈타인 같은 언어철학자에게 계승되기도 하였다. [42][43]

구원론에 있어서는 행위구원론[44]을 펼치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맞서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주장했으며, 당연히 후대 그리스도교 신학[45]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다. 이를 종교개혁 시기 루터가 로마서에 근거한 이신칭의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칼뱅의 '오직 은혜'와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가 영향을 받았다.

삼위일체론 교리의 발전에도 커다란 업적을 세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 성자 성령을 관계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세 하느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하느님은 삼위일체인 한 분이기 때문에 삼중의 존재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언제나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느님이 '하나의 본질과 세 위격'을 지니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헨 폴라(ευ πολλα) 논리'로 해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헨 폴라를 하나이면서 다수를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플로티누스는 일자와 그로부터 유출된 부산물의 존재 표현 방식을 '하나이며, 다수인' 헨 폴라로 설명하였는데, 이 논리를 아우구스티누스가 답습하여 '한 실체 세 위격'의 표현으로 설명하였다.[46] 따라서 세 하느님, 세 본질 등의 말은 불가능할 뿐더러 잘못된 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삼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니케아 신조를 따랐지만, 성령이 성자와 성부로부터 발출된다는 생각을 견지하였다.[47]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심리학적 유비를 통해서 자신의 삼위일체론 교리를 강화했다. 그 유비의 요점은, '마음과 그 마음 자체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사랑하며 또 그 자체의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과 '기억-지성-의지', 이 세 가지는 하나이며 다 같으며 나눠질 수 없고, 삼위일체의 흔적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는 것. [48][49] 서구라틴교회의 신학자들, 칼뱅이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50]

前 주교황청 한국대사인 성염 교수가 번역한 <신국론>의 해제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무수히 많으나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굳이 꼽는다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칸트라고 했다. 문화사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철학과 문학에서 최후의 대가다.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플라톤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위대한 라틴 사상가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중략)
사람들이 이 교부 철학자에게 크게 매료되는 까닭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 속에 숨겨진 진리에 대한 사랑이리라.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진리를 향한 구원의 불꽃" 또는 진리에 대한 열애(熱愛)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고[51] 규정하고, "아, 진리, 진리! 당신을 그들이 하고한 책들에 한 목소리로 자주, 또 가지가지로 내게 속삭여 줄 때,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사무치게 당신을 그려 애타하더이까?"라고[52] 외친다. 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는 음식이었으며, 그는 온 생애로 철학을 살았고, 삶 전부를 바쳐 진리를 사랑했다! 진리의 관상가가 아니라 진리의 연인이었다!
그 진리를 일컬어 "임"이라 부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임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라면서 저 유명한 <고백록>을 시작한다.[53] 사상적 방랑을 하면서도 그는 이 진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누구인지를 예감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o aeterna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54]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라고[55] 헌신을 선언했고 그리고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여생을 살았던 것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경건한 여가를 찾는 것"이기에[56] 그는 종교적 본질인 사랑을 정의하여 "우리가 진리를 고수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참사랑"이라고[57] 한다. "사랑이 진리를 깨닫는다"라는[58] 유명한 명제가 여기서 유래한다. 진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정을 보여주는 구절로는,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저 탄식, 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하는 고백이 있다: "오, 진리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59]

1.4.1. 저술 목록[편집]

*한국에 번역된 저서 위주로 적음. 아우구스티누스는 100권이 넘는 책을 지었기에 그것을 여기에 전부 옮겨 적을 수는 없다. 분도출판사, 두란노아카데미, 필립 샤프 <어거스틴 은총론> 등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잘 안 알려진 작품까지 읽을 수 있다.
<독백록>
<행복한 삶>
<아카데미아 학파 반박>
<교사론>
<자유의지론>
<참된 종교>
<믿음의 유용성> - 마니교에 빠진 호노라투스라는 친구에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는 책. 사제가 된 직후에 저술되었다.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신앙과 신조> - 아직 사제였던 시절, 아프리카 개혁공의회에서 했던 강연을 책으로 낸 것.
<심플리키아누스께 –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 주교가 된 이후 쓴 첫 번째 책. 로마서의 몇 구절을 주석한 책이다. 그의 은총론의 핵심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저서
<고백록>
<신망애편람>
<신국론>
<영과 문자에 관하여> - 대표적인 반펠라기우스 저서. 마틴 루터가 이 책을 읽고 이신칭의를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또 다른 반펠라기우스 저서들은 한국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엮은이 필립 샤프)이라는 책에서 읽을 수 있다.
<삼위일체론>
<요한서신 강해>
<기독교 교양> - 성경 해석학을 다룬 책.
<성도의 예정에 관하여>

1.5. 어록[편집]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춰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드러난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Cum dilectione hominum et odio vitiorum).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말라."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고, 언제 죽음이 올 것인가 하는 것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하느님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
(Quimirum si non comprehendias? Si enim comprehendis, non est Deus).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을 때는 대답을 알고 있지만 막상 묻는 자에게 설명하려면 대답을 알지 못한다."

"의심하는 나는 존재한다."[60]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Remota itaque i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

"신념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며, 그(신념)에 대한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혹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된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

"불합리하지만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먼저 수학을 철저히 공부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과 인간의 일들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학생: 뭐? 영원히 모르겠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죄를 질책하시는데, 그대도 자신의 죄를 질책한다면 그대는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과 죄인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대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죄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구원하시도록 그대가 만든 것을 부수십시오.……그대가 만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기에, 그대의 선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행의 고백은 선행의 시작입니다. 그대는 진리를 행하고 빛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일찌기 창세기천지창조와 실제 우주 모델이 다르다면서,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헛소리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정말로 창조과학 주장자를 위한 개념찬 발언이다. 그래서 고생물학자인 로버트 바커 교수는 창조과학 주장자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읽고 와라"고 말한 바 있다(...) 참고로 바커 교수는 공룡이 둔한 파충류가 아니라 활발하게 움직이는 온혈동물임을 주장한 '공룡 르네상스'의 주역 중 1명이며, 동시에 에큐메니컬파 그리스도교 신자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대개의 경우, 지구와 하늘과 이 세상의 구성요소, 천체의 움직임과 궤도 그리고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일년과 계절의 순환, 동물과 식물 광물 등의 종류 등에 대해서는 기독교 비신자들도 많이 알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이성과 경험에 의한 명확한 것이다.

그런데, 비신자에게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앞세우며 그러한 주제에 관해 사리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이는 기독교 신자의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어 비신자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창피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 수치는 단지 무지한 개인이 조롱받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믿음의 울타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신성한 성경 저자들 역시 그렇게 무식하다고 생각하게 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힘들게 일한 것도 소용없이, 우리의 성경 저자들이 배움이 없는 이라 여겨져 그들에게 비판받고 거부당하게 될 것이다.

만약 비신자들이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이 실수를 하고 우리의 성경에 대한 그런 멍청한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비신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의 경전이 자신들이 경험과 이성으로 습득한 것들에 대해 오류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 영생의 희망, 하늘의 왕국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경솔하고 서툰 성경 해설자들이 유해한 오류에 빠져 우리의 신성한 성경의 권위 밖의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은 보다 현명한 그들의 형제들에게 전에 없는 곤란과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럴 경우, 그들의 멍청하고 명백히 틀린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그 증거로써 성경을 내세우고 심지어 그들이 기억하는 많은 문장들이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티모1 1:7)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XIX-39, A.D. 408


즉 창세기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창세기에 담긴 신학적인 의미를 꼼꼼하게 연구해서 받아들여야지, 문자로 기록된 내용 자체만 어설프게 받아들이면 오히려 비신자들에게 망신당하고 다른 신자들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라는 뜻.

"정의로운 전쟁"론을 주장했고, "매춘처녀 및 결혼한 부인을 (강간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이라는 식의 주장으로 마르틴 루터 등에게 엄청 까였다는 말이 있다. 일단,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라 '적법한 전쟁'이 원뜻에 더 가까운 의미이며, 더욱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적법한 전쟁론'은 전쟁을 하라고 부추기는게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탄압을 받던 소수종파 시기에는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 등의 논의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제국의 국교가 된 이상 전쟁에 대한 이론적 정의는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전쟁을 안하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이는 현실에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나라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제국을 지키는 방어전을 치르는 군인들을 살인자라고 단죄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실제로 그리스도교가 막 국교화된 뒤, 몇몇 사제들은 병사들이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에 영성체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상당히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까지 하였고 병역거부를 하다가 잡혀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교 제국을 방어하는 최전선에 서있는 병사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 뒤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이 전쟁 자체를 정당화한다기보다는, '전쟁은 정의로워야만 정당화된다'라는 뉘앙스에 가깝다. 이는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고민하는 문제이다. 전쟁이 추악하다고 해서 아예 생각하기를 그만두면 더 추악해질 뿐이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쟁론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단순화시켜서 '적법한 권위에 의해서', '정당한 이유로',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수행되는것만이 '그마나 용인할 수 있는 물리력의 사용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적법한 권위'는 합법적인 정부를 의미하며, '정당한 이유'는 방어전쟁과 적의 공격으로 빼앗긴 영토의 수복을 의미한다. (Asbridge, 2010) 이는 필요악으로서 전쟁이 용인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세운 것이지, 전쟁을 정당화한것도 소위 '성전' 개념을 내세운 것도 아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 적용하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쟁론은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는 논리다.

매춘에 대한 주장도, 매춘을 필요악으로 여긴 것에 가깝다.

창조와 전쟁, 매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보면 종교적인 교리와 성경의 문구들을 현실에 맞도록 해석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속세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거나 현실성 없는 종교적 순결성을 내세우는 대신, 현실이 '하느님의 나라'와는 달리 추악하고 어리석은 면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정하되 그 추악함과 어리석음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하고 극복할 수 있는지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냐는"라는 질문에 대해)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냐고 묻는 자들을 벌할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

고백록 11권의 내용. 다만 심각하게 보면 안되는게 이건 본인도 '이런 식의 농담으로 대답할 순 없습니다'라고 표현한다. 즉 일부러 틀리게 표현한 농담.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놓은 실제 답은 '창조 이전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과학의 관점과도 비슷하다. 지옥 이야기는 아마 아우구스티누스 당대에도 널리 퍼져있던 농담으로 생각된다.

그대의 시선이 아직도 너무 연약하여 지혜가 그대의 시선을 물리치거든 지성의 눈을 저 길로 향하라! 지혜가 우아하게 모습을 나타냈던 저 길로 향하라! 다만 기억하라. 그대가 잠시라도 시선을 돌린 것은 어디까지나 더욱 힘있고 더욱 건강한 사람이 되어 그것을 다시 바라보기 위함임을!


―자유의지론 2권 XVI. 42 中

1.6. 그밖의 이야깃거리[편집]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세례명이 이 성인의 이름이다. 칼의 노래를 집필한 소설가 김훈의 세례명이기도 하다.

2014년에 사망한 가수 신해철세례명이 바로 이 성인의 이름이다. 신해철이 세례를 받았던 시절엔 표기법이 지금과 달라 장례식 자리에선 '아오스딩'으로 표기되었다. 생전에 신해철은 자신의 세례명이 된 이 성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타락이 꼭 나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예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언급한 것이다. 이 세례명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추천했는데, 훗날 가수가 된 신해철은 자신의 미래 모습을 어머니가 예견한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신해철은 성장 후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반대로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계와 거리를 둔 냉담자가 됐지만 교적은 어머니를 위해 유지했다.출처

2.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편집]

파일:external/f.tqn.com/augustine-saxons.jpg

생몰년도: ?~604

1번 항목과는 동명이인. 이런 사례가 있기 때문에 히포, 캔터베리 등 교구 지역명을 통해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고 잉글랜드로 건너가, 앵글로색슨 민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인물이다. 이때 세례를 준 사람들만 해도 켄트 왕국의 왕과 왕비, 그리고 수천 명의 신하들이 포함되었다고.(…) 그 외에도 주교가 된 이후로는 12개의 교구들을 새로 창설하는 등 맹활약을 펼쳐, 그 결과 601년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세인트 오거스틴 수도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해당 부지는 세인트 오거스틴 대학교 교내에 있다.

[1] 단 개신교와 가톨릭의 평가 차이는 존재한다. 가톨릭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거의 절대적이지만, 개신교에서는 그의 조직으로써의 교회를 강조한 교회관, 마리아를 높이 평가하였던 마리아론 등 때문에 가톨릭보다는 좀 복잡한 평가를 내린다.[2] 고백록은 한국에 여러 번역본이 존재하는데, 그 중 '바오로딸'에서 출판한 최민순역(천주교), '대한기독교서회'의 선한용역(개신교), 그리고 '경세원'에서 낸 성염역(천주교)주 판본이 평이 좋은 판본들이다.[3] 고대 로마뿐 아니라 중세까지만 해도 성직자들이 결혼하여 자식이 있음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상) -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1000년경 유럽 교구 사제는 대부분 기혼자였다. 기혼 주교의 수는 그보다는 적었지만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브리타뉴 지방의 돌(Dol) 주교와 그의 아내는 공개적으로 딸들의 결혼을 축하했고, 그녀들에게 주교 관구에 딸린 토지를 증여했다. 밀라노의 대주교들은 개혁자들의 독신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들의 수호성인인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도 결혼을 했고, 그가 자기 주교 관내의 사제들에게 영구이 결혼을 허락했다는 이유에서였다.[4] 종교개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이 그의 교회론을 이이긴 사건'이라는 말도 존재한다.[5] 문법학교에서 선생들의 너무 심한 매질로 인해 두려움에 떨었다고 <고백록>에서 밝힌다. 그 여파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어 공부를 포기한듯 하다. 그리고 <고백록>에서 비신자였던 자기 아버지에게도 감사를 돌리는데, 유독 어렸을 적의 교사들에 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6] 당시에 강제로 했던 공부가 너무 싫었는지, 언어공부는 학생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였다.[7] 여기에는 타가스테의 부자 후원자였던 로마니우스의 도움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로마니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도 그 가정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8] 참고로 이 여자는 노예 출신이였다.[9] Adeodatus. A deo datus로 풀어서 해석하면 하느님이 내린 선물이라는 뜻이 된다.[10] 지금은 유실된 키케로의 저서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서만 일부 구절이 남아 전해진다.[11] 당시 마니교는 로마황실에 의해서 공공연히 믿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악의 문제 등에 관해서 선악이분법적인 설명이 당대 지식인들에게 꽤 먹혀들어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이들이 마니교를 많이 믿었다고 한다.[12] 알리피우스나 네브리디우스. 물론 이들도 나중에는 어거스틴과 같이 마니교를 떠났고, 알리피우스는 394년에 타가스테의 주교가 되었다[13] 하지만, 이때 파우스투스가 솔직하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 것에 대해서 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14] 그러나 마니교의 신자들과 교류는 로마로 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마니교의 인맥을 통하여 출세를 할 수 있었기 때문[15] 주의하자, 플라톤의 사상에 빠진 게 아니라 플라톤주의에 빠졌다.[16] <고백록>에 따르면, 카르타고 학생들이 너무 망나니 같은 데 비해, 로마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학생들은, 온갖 편법을 다 부려서 수업료를 내지 않으려 하였다.[17]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갈 때, 어머니는 반대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머니를 버리고 몰래 배를 타고 떠나가 버렸다.[18]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니교의 이러한 계책은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와 완전히 연을 끊는 데 도움을 주었다.[19] 원래 기독교를 깔봤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에 나갔던 이유는, 마니교에 대한 회의와 기독교에 대한 재평가 때문이었다. 마니교와 가톨릭의 토론을 지켜보고, 가톨릭이 힘이 없는 종교가 아님을 느꼈다.[20]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끈 것은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이 해석법은 성경의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그 안의 상징적 의미들이 있다고 보는 해석방법론이다.[21] 세속적 출세욕과 여자문제. 그는 당시 낮은 등급의 총독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만 했다. 그리고 어머니 모니카도 자기 아들이 내심 그렇게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22] 성적 쾌락 외에도, 그는 수사학을 통해 로마에서 성공하고픈 세속적 야심도 갖고 있었다. <고백록> 전반적으로 아들의 카톨릭 회심을 기도하던 어머니 모니카마저 그의 세속적 명예욕을 부추겼다.(고백록 6권 참조)[23] 갑자기 가슴에 병이 생겼는데, 이를 핑계로 수사학교사 직을 내려놓았다.[24] 어머니 모니카, 아들 아데오다투스, 동생, 그의 동료들과 제자도 그와 같이 머물렀는데, 이때 그는 본격적으로 성서연구에 들어갔으며, <독백록>과 <행복한 삶>,<질서론>, <아카데미아학파 반박>의 카시키아쿰 저작을 저술했다.[25] 고백록은 적어도 회심 사건이 있은 후, 10년은 지난 뒤에 쓰인 책이다[26] 자신이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배를 서리하고는 한 입 맛보곤 버린 이야기. 이 경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2권에서 죄와 악에 대한 견해를 길게 성찰한다[27] 로마의 기독교 박해 때, 신앙적 배교를 택했던 이들이 다시 주교로 임명되자 이에 반발했던 부류이다. 시작은 도나투스 주교. 이들은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로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배교한 또는 타락한 성직자들은 다시 성직자로 일할 모든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교회는 성도와 죄인들의 혼합공동체로 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립하였으며, 공개토론까지 하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빨에 지고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흔히 분리주의로 분류되며, 극단적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정죄된 후 아우구스티누스를 암살시도까지 했었다. 은총론, 성례전, 교회론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매우 중요한 논쟁이다. 좋은 예로, 이근안이나, 신사참배를 한 목사를 목사로 칭할 자격이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28] 거룩함을 강조하는 도나투스파에게 '너네도 그렇게 살지 못하잖아'라고 반박했다[29] 영국출신의 그는 로마교회 성직자들의 타락을 보고 놀랐다. 또한 자신의 죄를 제대로 회개하지도 않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상황과 이러한 행태를 정당화시키는 듯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사상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데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간의 책임을 중요하게 보았으며, 원죄와 유아새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담의 타락이 인류 전체의 타락으로 이어졌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아 타락할 수도 선행을 할 수도 있는데,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죄를 저질렀을 때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게 된다. 이와 동시에 펠라기우스는 신의 은총 없이도 인간이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신의 은총이 그 유일한 수단이라고 본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쟁에 들어갔고, 이단으로 정죄되었다.[30] 인간에게 강력한 도덕적 의무를 주장한 점에서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주의는 유사하다. 펠라기우스 논쟁도 초대교회 주요 논쟁에서 꼭 거론되는 논쟁이다[31] 거기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오히려 가톨릭 신자보다 도나투스파 신자가 더 많았는데, 그중에는 기득권 세력과 결탁했던 상류층 상당수 있어서 매우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폴존슨,<기독교회 역사>)[32] 이때 그 생각의 근거가 된 성경 구절 누가복음의 "강권하여 데려오라"라는 구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 이후부터 그 구절을 강제로라도 교회 데려오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늘었다.[33] <신국론>과 <고백록>,<삼위일체론>. 이른바 ‘하느님을 만나는 인간의 길’[34] 삼위일체론 저술과 관련해서 한 가지 재미난 일화가 있다. 어느날 아우구스티누스가 해변을 걷고 있다가 모래 위에 구멍을 내서 거기에 바닷물을 넣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뭐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바다의 깊이를 재고 있다"라고 소년이 답했다. 이것을 들은 아우구스티누스는 피식 웃으며 "너는 결코 바다를 그 구멍 속에 다 넣을 수 없단다. 바다가 너무도 넓고 크기 때문이지." 하고 비웃었다.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면서 "삼위일체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랍니다." 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는 것이다.[35] 당시의 설교는 지금처럼 원고를 미리 작성해서 읽는 것이 아닌 그 자리에서 거의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어서 설교자의 언변이 그만큼 더 중요했다. 게다가 청중들은 설교가 맘에 안 들면 야유를 하거나 자리를 나가기도 했다.[36] 그는 이동할 때 배는 거의 이용하지 않고 거의 말을 타고 육로로 주로 이동하였다[37] 마니교 신도였을 때에는 인간의 악의 본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악의 책임을 다른 것에게 돌릴 수 있었던 것이 최고의 매려이었다고[38] '신국'이라고 쓰기도 한다. '도시'가 아닌 '국(나라)'으로 옮긴 것은, 이 시기의 국가들은 로마 등의 도시들이 확장한 형태이기 때문.[39] 물론 여기서 말하는건 넓은 의미의 서유럽으로,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 등을 포함한다.[40] 다만 정교회 문화권에서는 서방에서만큼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는데,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대동단결하여 오늘날에도 아우구스티누스에 열광하는 서방과는 달리, 정교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저명한 신학자 A' 정도의 위치이다.[41] 이러한 직선적 시간관은 유럽의 주류 생각이 되었고, 카를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직선적 시간관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42] 그런데 <교사론>의 컨셉이 자기의 아들과 대화를 하는 구성인데, 막상 읽어보면 15살쯤 된 애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대화를 진행한다.[43] 교사론 자체의 결론은 간단한데, 따라서 언어는 표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니 오직 성령만이 진정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44]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45] 구원은 믿음으로 얻으며, 행위는 믿음의 증거이다.[46] '신앙과 신조'라는 책에서는 좀 더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하였는데, 물로 비유를 하였다. 강물, 컵 속의 물, 바다의 물을 가리켜 세 개의 다른 물이 있다고 할 수는 어렵다는 것이 그 요지[47] 때문에 성령은 성부로부터만 나온다고 생각한 동방 교회에서는 거의 이단 취급 당했다.[48]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칼뱅도 이 유비가 과연 효과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칼 바르트는 피조세계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는 설명을 비판하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삼위일체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49] 서구 라틴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동방교회에서는 거의 이단 취급을 했다. 이러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점은 후에 동서교회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50] 여담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이 대단한 이유는, 그의 이론이 순전히 성경을 면밀하고 세심하게 해석해서 나온 결과였다는 점이다. 당시 동방교회에서는 아타나시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줌의 그레고리우스, 대 바실 같은 삼위일체론의 대가들이 존재했었지만, 전부 헬라어로 된 논문이 대부분이었고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 조금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헬라스어를 잘못했던 헬포자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동방교회의 업적을 바탕으로 삼위일체론을 연구하기 어려웠다. 그의 학식과 지력이 어느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51] De Trinitae(삼위일체론) 1.5.8.[52] 고백록 3.6.10.[53] 고백록 1.1.1: "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54] 고백록 7.10.16.[55] Soliloquia(독백록) 1.1.5.[56] 신국론 19.19.[57] 삼위일체론 8.7.10.[58] 고백록 7.10.16[59] 고백록 10.27.38. 이 부분은 원래 수려한 문장들이 많은 고백록 중에서도 수사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명문으로 꼽힌다. 최민순 신부는 이 부분을 "늦게서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서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로 번역하였다.[60] 어떠한 진리도 알려질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아카데미아 학파'를 반박한 책에서 나온 말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증을 천 년 정도 먼저 깨달은 인물이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에 데카르트보다 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