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최근 수정 시각:

독일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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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1대

플렌스부르크 정부

총통 직책 신설

아돌프 히틀러

총통 직책 폐지

독일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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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1대

2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아돌프 히틀러

카를 되니츠

독일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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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24대

25대

쿠르트 폰 슐라이허

아돌프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3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1938

파일:external/www.history.ucsb.edu/391-02hitlertime.jpg
[1]

장제스, 쑹메이링
1937

아돌프 히틀러
1938

이오시프 스탈린
1939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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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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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지도자 겸 총통

본명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3]

출생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라우나우암인

사망

1945년 4월 30일 (56세), 나치 독일 베를린 총통엄폐호

정당

독일 노동자당 (1920년~1921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당 (1921년~1945년)

재임기간

총통 :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총리 :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시민권

오스트리아인 (~1925년 4월 7일)
독일인 (1932년 2월 25일~)

신체

173cm, A형

종교

히틀러와 종교 단락 참조

배우자

에바 브라운[4]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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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3. 사상
3.1. 정치 사상
3.1.1. 영향 받은 학설들
3.2. 인종주의
3.2.1. 유색인종에 대해서
3.3. 아돌프 히틀러와 종교
4. 인간 아돌프 히틀러
4.1. 예술적 취향4.2. 아돌프 히틀러와 미술4.3. 성격4.4. 식습관4.5. 동물보호
5. 재산6. 평가7. 전쟁 후 결과로 본 아돌프 히틀러의 영향8. 나치 추종자들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발언9. 아돌프 히틀러의 라이벌10.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11. 각종 음모론12. 각종 매체의 아돌프 히틀러
12.1. 역사서12.2. 창작 부문
13. 기타
13.1. 유럽 및 영미권 13.2. 아시아
13.2.1. 아시아계 오덕 커뮤니티13.2.2. 아시아 인터넷 커뮤니티13.2.3. 대한민국13.2.4. 일본
14. 어록

1. 소개[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 나치 독일의 총통.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이라는 도시에 살던 평범한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난 화가 지망생이었다. 상업 미술가 활동을 하던 아돌프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인이지만 독일 제국군에 자원하여 입대하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고, 이후 일어난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경제적 파탄 상태에 빠진 바이마르 공화국 하의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우연히 나치당에 들어가 정치활동을 시작했는데, 숨겨져 있던 자질인 굉장한 연설과 선전능력이 발휘되어서 그가 들어가기 이전에는 동네 소수정당이였던 나치당을 제1당으로까지 일으켜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는 총리직과 새로 얻은 대통령직을 합쳐 제3제국퓌러(Führer: 총통, 영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 뒤 아돌프 히틀러는 군국주의적 정책을 펼치며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군수산업을 확충하며 레벤스라움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주변국을 자극하는 팽창주의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은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연합국의 소극적인 반응에 힘입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무혈로 독일에 병합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안일한 생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가 생각보다 강경한 태도를 보인 연합국의 맞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게 되었다.[5]

전쟁 초기에는 참신한 전술연합국의 삽질로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을 정복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기껏 얻은 군사적 우위를 독소전쟁 같은 기행에 가까운 전략적 실책과 일본의 실수로 잃어버린다. 그와 동시에 점령지에서도 아리아족 우월주의에 입각한 인종말살 행위를 주도하고 각종 전쟁범죄를 방치하고 조장함으로써 점령지의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이런 각종 실책을 벌인 끝에 결국 판도를 완전히 잃고 몰락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패색이 짙어지기 전에는 독일인들에게 거의 신으로 숭배받는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종전 후에는 유럽에서나 전세계적으로도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나치즘에 입각하여 전쟁 중 점령지의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는 등 숱한 전쟁 범죄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한 홀로코스트같은 인종 학살을 주도했고 T-4 프로그램 같은 장애인 말살 정책을 펴기도 했다.

남미의 칠레, 아르헨티나는 친독 국가였다. 다만 이들은 부득이한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치의 남미 도주 항목 참조. 중동, 아프리카인도 등지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이다. 일부는 대놓고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들은 영국,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에게 시달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스웨덴이나 핀란드(계속전쟁 당시 나치와 동맹을 맺고 협력했다.), 아이슬란드, 발트 3국 같은 국가도 마찬가지. 스웨덴, 핀란드, 발트 3국 등은 나치독일의 후원자였다. (핀란드, 발트 3국은 소련에게 많이 시달려 부득이하게 나치와 손을 잡았긴 했다) 아이슬란드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0세 때문에 화가 났던 아돌프 히틀러가 독립시켜줬기 때문이다. 단 발트 3국을 제외하면 이들 나라들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으로 여기진 않는다.

매우 악랄한 정치노선과는 달리 매우 평범하고 소박한 사생활을 가졌기에 의아심을 품게 한다. 어떻게 보면 악의 평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제정한 선구자라는 점은 컬쳐 쇼크 수준. 어쨌든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서양에서 아돌프 히틀러 만세-는 철저히 금지된 수사다. 네오나치들은 '아돌프 히틀러 만세'를 '탄압받는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2. 생애[편집]

/생애 문서 참조.

3. 사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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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 14일 타임지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유럽은 멸망하리라."라는 식의 염세주의, 변질된 니체주의에 입각한 우생학인종주의, 사회진화론과 독일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기반한다.

거대한 영향력에 비하자면 사상 체계는 빈약하고 체계성이 없어 상호모순적인 측면도 많았다. 나의 투쟁이 출판 후 정권을 잡자 책과 모순된 정책으로 비웃음을 샀다. 심지어는 나치즘의 이론조차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 세운 게 아니고 그레고르 슈트라서가 세웠는데 막상 슈트라서는 장검의 밤 때 숙청당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정치, 인종 사상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편의상 이하는 별도로 다룬다.

3.1. 정치 사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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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국민 - 하나의 국가[6] - 하나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전은 독일인들이 '인류 문명의 수호'라는 슬로건을 내건 연합군을 이길 사상적 무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생학,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등 온갖 자극적인 소스를 무질서하게 혼합한 나치즘을 내세운다. 빈약한 사상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독일인들의 관념 깊숙히 파고들 수 있었다. 그가 주장했던 독일민족의 생존권 영역은 이미 독일 제2제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독일 민족의 영역 확장 개념에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식의 사회진화론적 주장을 도용한 결과물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1905년에서 1914년까지 빈에서 보냈다. 이 시절은 '나의 투쟁' 초반부에 잘 나타난다. 아돌프 히틀러는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단순한 룸펜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각 정파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계에는 기독교,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범게르만주의 세력이 주요 정파들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대중주의를, 기독교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반유대주의를, 범게르만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독일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사해동포주의나, 기독교의 엘리트주의나 그리고 범게르만주의의 반가톨릭주의[7]를 배격했다. 이렇게 각 정파의 장점만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자신만의 사상을 발달시켜 나갔다. 또한 거리의 부랑아 숙소에서 동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면서 연설을 발달시켰다. 그를 기억한 한 부랑자가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이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1차 대전의 허무한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으로 인한 민족주의적 분노는 아돌프 히틀러가 득세하는 토양이 되었다. 프로이센 시절부터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독일 제국의 패배는 일반 민중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1차대전 말기에는 독일 민중도 이미 전쟁수행능력이 바닥났음을 인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뒷공작으로 인해 부당한 패배를 당했다고 현실도피를 시작했다. 연합군이 독일 영토 내로 진격하기 전에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항복했다는 사실은 망상을 부채질했다. 때문에 전간기 독일인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은 무너져버린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인정함으로써 패전을 합리화시키는 그럴듯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윈스턴 처칠과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유럽과 세계를 지배할 야망과 "마스터 플랜"이 있다고 믿었다. A.J.P. 테일러는 이러한 설에 반박했다. 그는 영국인 학자로 1970년대 <2차대전의 기원>을 발표한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를 뿔 달린 괴물이 아닌 유럽 정치환경과 연합국의 온정적인 정책과 기타 여러 삽질들이 겹쳐진 결과라고 본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뚜렷한 계획은 없었으며 세계의 정세를 잘 탄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이는 당대의 주류 의견과는 반대였기에 큰 반감을 샀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유력한 주장 중 하나로 꼽힌다. [8]

"독일 민족"조차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파괴도구"로 여겼다. 그리고 독일이 한계에 도달해 패배가 확정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자체와 함께 자폭하려 했다. 마지막 순간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도취적인 파멸의 미학에 빠져서 가능한 한 많은 인간과 문명이 자신과 함께 파멸하도록 모든 힘을 다했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 민족은 패배자니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면서 사회기반시설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는 "독일 민족은 약한 걸로 판명되었어. 나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어"라는 멘붕성 드립도 남겼다. 이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사회진화론에 물들어 있는지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독일 민족은 전쟁에서 졌으니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불태우라고 했던 파리는 불타지 않았으며,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각종 파괴 및 살육을 저질렀던 파리의 독일 주둔군 사령관 콜티츠가 되려 선한 사람으로 둔갑해서 각국의 도덕 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베를린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절친한 친구였던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 방어전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지켜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멸망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와 소련이 대립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동쪽에서 온 자들(소련)이 세계를 지배하리라고 예측했다. 서구권의 민주주의는 나약하여 소련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에 맞설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불안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 기인했다고 여겨진다.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전반기 전 세계를 휩쓴 파시즘의 광풍도 종말을 고했고,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기나긴 냉전에 돌입한다. 그러나 절멸전쟁이 남긴 참혹한 폐허와 홀로코스트는 양 진영 모두에게 나치즘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가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차별적 사고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반성은 종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종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급격히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3.1.1. 영향 받은 학설들[편집]

아르투어 딘터는 아리안인과 타인종의 결혼을 반대하며 인종의 순수성 보존을 주장했던 사상가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실하다. 아르투어 딘터는 1925년부터 나치당 튀링겐 대관구장을 지냈다가 "나치당안에 입법부를 만들자!"라고 아돌프 히틀러의 권위에 홀로 도전하다 1928년 쫓겨난다.

루돌프 헤스의 스승이었던 하우스호퍼 교수의 게르만족의 동부생활권(레반스라움)도 <나의 투쟁>에서 차용했다.

당대 독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힌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의 <19세기 독일사>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가방끈이 짧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읽진 않았어도 당시 유행했던 사조로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서구의 몰락에선 총통주의 슈펭글러의 다른 저서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1920년)에서는 민족 전체가 독재자 아래 일치 단결하는 초계급적 국가사회주의가 요구되어 있다.

3.2. 인종주의[편집]

아돌프 히틀러는 권좌에 오르기 전부터 죽는 순간까지 '유대-볼셰비즘'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지금으로선 우습지만 당시 우익 진영에선 유대적이란 말과 볼셰비즘이 동일한 개념으로 통하긴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고립과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유대인과 연관지어 독일인의 증오를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부 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양면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공격을 결심한 이유도,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비이성적인 증오가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소련의 고위직에는 몰로토프 이전 외무장관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 등 유대인도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스탈린이 유대인을 딱히 배려하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 받는 탄압 이상의 차별도 없었다.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의 관점에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거치면 소련은 '유대인'과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악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다.[9]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은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이 아닌 인종 투쟁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인종성을 순종으로 유지하지 않고 잡종이 돼버린다면 그 민족은 망한다는 것이다. 흑인이 독일말을 배우고 독일말에 익숙해졌다해도 독일인이 될 수도 없고 유대인들도 기독교로 개종해도 절대 독일인이 될수 없다고 한다. 반대로 독일말을 잊어버리고 2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10]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독일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구분이 문화나 언어가 아닌 인종이다. 민족성 강조도 인종주의에 기반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는 1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톨릭 교육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그가 살던 빈 내 과격파들의 유태인 척결론,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독일 내 부각되었던 여론을 따랐던 것이 가장 크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반유대주의 성향은 1905년에서 1914까지 빈에서 지냈던 시절부터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 시장은 카를 루에거(Karl Lueger)[11]라는 반유대주의자로 1897~1910년까지 선거로 뽑힌 자이다. 당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카를 루에거가 사회복지와 연방주의를 주장해서 좌빨로 생각하고 2년이나 임명을 거부한 전력도 있다. 누가 유태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라는 유명한 드립을 쳤다. 이는 빈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안심시키고 혹은 냅두고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내려온 코가 크고 검은 머리에 독일어를 못하고 튀는 외모의 유대인들만 탄압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는 연설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하고 차별을 정당화하고 인기를 얻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당시 자신은 남는 시간을 "독서"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읽는 책들은 주로 인종주의적인 팜플렛이거나 혹은 과격한 정치단체의 선전물들이었다. 이때부터 그가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반유대주의는 이 시대 유럽의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가 살던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12]

반유대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도 상당했다. 가톨릭 교회의 세가 강한 남유럽, 이탈리아, 스페인은 더 심했다. 끝판대장격은 제정 러시아 제국으로 조직적인 유대인 탄압과 학살(일명 '포그롬')을 펼쳤다. 폴란드발트 3국도 러시아와 사정이 비슷했다. 차르 시대에 대한 반감과 빈부격차 등 사회모순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선동꾼들도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은 반유대교육을 실시했으며, 정부는 이를 방조했다. 게토 지역에는 살인, 약탈, 강간, 방화 등이 빈번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탄압이 적은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 오스트리아로 많이 이주했다. 이주 유대인들은 빈의 골목 지역에 주로 살았는데,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 수준과 언어 장벽 때문에 뒷골목에서 매춘, 소매치기, 구걸 등으로 연명하는 하층민들이 증가한다. 이들의 유대인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으며, 반유대주의 선동까지 더해져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유대인은 부유하다는 편견 때문에 당시의 상황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도 부유한 사람은 소수다. 서방 금융권에 유대계의 비율이 높긴 하나 그 수많은 유대인 인구가 다 금융계의 거물들일 리 만무하다. 미국 뉴욕에만 해도 유대인 마을은 브루클린에 있다. 브루클린은 개발되고 치안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가난한 동네였다. 록밴드 U2도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공연했던 적이 있다. 청나라가 개막장일 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차이나타운과 아일랜드가 감자대기근을 겪을 때 이주해 온 이들이 세운 헬스키친도 위치는 맨하탄에 있다. 부유한 사람은 해외로 이주하는 등 발빠르게 행동했으며, 그들 중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자들도 최후에 그 자리에 갔다. 언제나처럼 가난한 자들이 먼저였다.

'헤르만 뢴스' '디터 에크하르트' '빌헬름 폰 폴렌츠' 등은 반유대적인 농민소설을 쓴 작가다. 이들은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 가축상인, 중개인 등으로 묘사했다. 20세기 초반 40쇄를 찍을 정도로 엄청나게 팔린 '테오도어 프리치'의 <반 유대주의 문답서>는 후에 나치에서 위대한 교사라 칭할 정도였다. 이런 작품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독서 취향이었다.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1916년 독일에 귀화한 영국인이다. 영국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났고 영국 육군원수 네벨 체임벌린의 조카뻘이 된다. 반유대주의자 프랑스인 고비노 백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의 사위가 된다. 그는 게르만빠로 반 유대주의자였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1927년 체임벌린이 임종시엔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손에 입을 맞춰줄 정도였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어 아버지와의 불화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가 유난히 유태인을 싫어했을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일부에선 어렸을 때 유태인한테 강간당했다느니, 혹은 어머니가 유대인과 바람을 피웠느니 아버지가 실은 유태인이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못 살게 굴었다느니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반유대주의는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유럽에 보편적인 정서였다. 아돌프 히틀러도 독자적인 반유대주의를 창시했다기보다는, 수천년동안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주로 금융업과 보석세공업에 종사하며 여기저기 이주하였던 유대인들이 돈줄을 쥐고 유럽 도시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금융자본주의 담론은 이미 18세기부터 어느 정도의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숙자로 살던 시절에 주로 거래하던 화상(畵商)이 유대인이었고, 심지어 이후 겪게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우 중에 유대인이 있었으나, 그와 사이는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그때 받았고 이후 그가 평생 자랑하던 철십자 훈장을 주도록 추천해줬다는 설의 주인공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후고 구트만도 유대인이었다. 후고 구트만 역시 아돌프 히틀러 집권한 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다행히 부대 전우들의 청원으로 석방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진짜인지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빈으로 상경하기 전엔 유대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물론 이는 사실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학교 동창 증언으론 빈으로 상경하기전에 이미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고 린츠와 아돌프 히틀러가 다닌 학교에서도 유대인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언 커쇼의 연구 등을 종합해본다면 빈 상경 이전~빈 체류 시절에 아돌프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어느 정도 빠져 있긴 했지만 당시 유럽 전반에 유행하던 반유대주의의 흐름을 고려할 때는 특출나진 않은 편이었다.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유대인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멘젤스존을 비롯한 유대인 예술가들을 호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유럽과 소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슬라브 민족은 게르만 민족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인종적 검사'를 통해 '가치'가 판명된 슬라브인들에 한해 간단한 셈법과 교통 표지판을 알아볼 정도의 기초적인 교육만 시켜서 독일인들의 노예로 부려먹고, 나머지는 우랄산맥 밖으로 추방하며 굶어죽든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구상을 했다.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볼 인세지옥이 실현된다. 막상 독소전이 개시되고 아리안인의 후손들이 동장군에 고생하자 나약함을 질타하고 열등했다고 주장했던 슬라브인들의 "인종적 강인함"을 찬양하는 등 오락가락 맛탱이가 갔다.[13]

반면 서유럽북유럽에서는 그나마 온정적이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영국에 '저런 하등한 인종 돕는다고 서로 싸우지 말고 우월한 우리들끼리 잘 살아보자'며 화해 의사를 피력했다. 물론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이를 거절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또한 북유럽에 속하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벨기에의 플라망 지역(네덜란드어 사용지역)은 인종적 가치가 독일 민족과도 비슷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한때 독일계 민족국가의 영토였던 벨기에의 오이펜-말메디,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19세기 독일 연방에 속했던 룩셈부르크 지역의 거주자들은 조부모 중 두 명 이상의 혈통이 확인되면 '명예 아리아인' 인증을 했다. 독일군 입대시 독일 국적도 부여했다.

물론 모든 논리적 전개는 독일인은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다른 민족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일 민족과 얼마나 많은 유사점을 가졌는가"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일례로 프랑스는 골 족과 게르만 족의 피가 섞인데다 라틴 민족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만큼 더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 《몰락》(한국판: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에서 구체적인 사상은 존재치 않고 오직 파괴와 증오만 존재하였다고 간략하게 그의 사상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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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벌리 코니시는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서적을 발표한다. 여기서 린츠에서 자랄 때 학생 시절의 유대인 급우이자 훗날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충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는 같은 학교 동기라는 외에는 충돌할 지점이 적었다. 실제 학교만 같지 학년은 달랐다.

3.2.1. 유색인종에 대해서[편집]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론에 따르면 다른 민족들은 아리안과 유대인 사이에 위치한다. 그 당시 서양의 흔한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백인은 다른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기본. 아돌프 히틀러에 따르면 아리안은 인류 문명의 모든 가치있는 것을 만들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다른 민족들은 아리안인을 뒤쫓기 바빴으며 유대인은 문명을 파괴하기에 바빴다는 설명이다.

"아리아인의 문화가 없다면 일본이나 중국은 다시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며 동양인보다 아리아인이 위대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기는 했지만 일본과 추축동맹을 맺은 후엔 독일에 사는 일본인들을 명예 아리아인이라 선포하고, 심지어는 여러번 동양과 접촉하고 나서는 "아시아인의 고대 문명이 우리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믿는다" 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이 전부 진실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동맹인 일본을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실제론 전쟁 중에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곤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영국이 자기랑 동맹만 맺었어도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면서.

독일이 전유럽을 제패해나가자 일본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일본 교과서 만큼이나 엄청나게 인쇄되며 팔려나갔다. 일본인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으며 감명받고 일본도 독일처럼 행동해서 아시아를 정복하고 미국과 영국을 밀어내야한다고 주장하며 궐기대회까지 열며 아돌프 히틀러 본받기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판매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일본인에 대한 아돌프 히틀러 본인 스스로도 이불킥적인 안 좋은 이야기가 검열된 후반본 책이다.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일본 번역판에서 검열된 초반본 부분.[14]

일본인은 미개하고 추악하지만, 서구문명이라는 빛을 얻음으로써 일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빛이 없으면 그림자 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인종이다.
스스로의 창작성이 부족한 열등한 인종이다.
하지만 손재주가 좋고 일처리가 빠르니 독일의 하인으로 이용하기에는 좋다.


독일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단계적 계획이론의 4단계 상황, 즉 독일민족의 위대한 독일 제국이 해외에서 세계제국 건설에 나서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제국 독일과 동맹국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돌프 히틀러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일본 양국이 내렸던 중요한 결정들을 보면, 양국의 불신이 극명했다. 애초에 동맹을 맺기 전, 중일전쟁 때는 중국에 무기를 계속 수출하고 전쟁고문들도 계속해서 파견해 일본군이 독일제 무기와 독일의 고급인력들을 상대하면서 궤멸되어 가는 일본군의 상황이 연출됬었고 동맹채택도 중국 or 일본 중에 꽤나 고민했었다. 또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을 일본에 비밀로 했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된 진주만 기습 결정에 대해서 독일에게 알리지 않았다.

1942년 1월 18일에 독일-일본 양국이 비밀 군사회담을 통해서,시베리아와 인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동경 70도를 기점으로 동반구에서의 각자의 작전반경을 나누었지만, 베를린과 도쿄는 어떤 군사 협정도 체결하지 않았다. 두 추축국은 보급상의 난관을 무시하고, 인도양 일대를 공동 작전지역으로 설정했다.

양국간의 군사 협력이 구체화되지 않은 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일본이 무지막지하게 태평양과 유럽의 식민지들을 강탈하고 여러가지 성범죄나 학살같은 전쟁범죄에 대해서 일본을 견제할 생각이 있었다는 추정이다. 이와 관련해서, 폰 하셀 von Hassell 이 일본이 싱가폴을 함락시킨 직후인 1942년 3월 22일에 적은 일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의 엄청난 성공에 크게 열정적이지 않았고, 그는 영국이 그 일본 황인종을 격퇴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영국에게 20개 사단을 기꺼이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출처- Milan Hauner, Did Hitler Want a World Dominion? 중

다만 흑인종에 대해서는 그때 당시의 전 유럽이 좋게 생각하지 않았듯이 비슷했다.# 나치 독일 내에서 흑인들 또한 이런저런 못볼 꼴을 많이 당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나오고 있다. 특히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라인란트 지방이 벨기에, 프랑스군에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군 중에 식민지 출신 흑인 부대(외인부대)도 주둔했고, 그 흑인 프랑스군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500여 명의 아이가 생겨났다. 이들은 "라인란트 사생아(Rhineland Bastard)"라고 불리웠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불임 수술을 통해 이들을 사실상 멸종시켰다.

당시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매우 저 아래'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깔려있던 시기라서[15] 굳이 흑인을 타겟으로 잡고 사냥해봐야 별다른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16] 즉, 흑인에 대한 처분은 유대인처럼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서방열강들처럼 마구 탄압하던 것도 아닌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보면된다.

참고로 당시 유럽의 유색인종(흑인, 황인 등)은 식민지를 통해서 유입되었으나, 독일은 식민지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색 인종이 적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 당시 독일 본토에 살고 있던 흑인의 수는 2만 5천 명 정도로 전체 인구 6500만 중 0.04%에 불과했다. 이렇게 유색인이 적다보니 유색인의 존재감은 독일 내에서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스 또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나치당에서도 확고한 정책 기준이 없었다.

그나마 유럽국가 지도자들에 비해 우호적으로 대접했다.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제시 오언스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거나, 태국 국왕 라마 8세 아난타 마히돈이 독일에 오자 직접 공항까지 가서 마주한 것[17], 그리고 1938년 네팔 국왕에게 차를 선물한 것 등이다. 또 중동의 국가원수들과 회담을 하고 슬라브계인 크로아티아불가리아와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소련과도 불가침조약 이후~독소전쟁 이전까진 온갖 덕담이 오가며 경제협력도 크게 늘리는 등 훈훈한 분위기가 오갔다. 더 거슬러가면 뮌헨협정 시기까지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애초에 아돌프 히틀러는 일개 당수 시절부터 독일 총통으로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 전쟁을 벌일 때까지 상대방을 기만함으로 일종의 뒷통수를 쳐서 그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다. 즉 상대방을 현재 상황에 맞게 이용해 먹은 것뿐, 나치가 진짜 견제할 국가 없이 세계 패권을 쥔다면 어떻게 변했을 지 알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치적으로 필요했었다면 이념이고 줏대고 간에 인종을 떠나서 이용할려고 했다는 걸로 보면 되겠다.

3.3. 아돌프 히틀러와 종교[편집]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관은 아주 좋은 떡밥이며, 기독교인이나 유신론자는 아돌프 히틀러가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반기독교주의자와 무신론자들, 그리고 일부 반가톨릭적 성향이 강한 개신교인들은[18] 아돌프 히틀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꼭 가톨릭에 한정된 건 아니고 다른주장으로는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개신교에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19] 물론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이었던지 무신론자였던지 그 사실이 기독교유신론, 혹은 반기독교주의나 무신론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종교가 걸려있기 때문에 오늘도 논쟁이 끊일 날이 없다.

아돌프 히틀러는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가톨릭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다.[20][21] 그리고 연설 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나 이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볼셰비즘으로 낙인 찍던 시대이다. 현재도 유럽은 덜하지만 미국에서 정치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면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는데,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고, "가톨릭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가톨릭을 정치적으로도 자주 써먹었다. 당시엔 "무신론 = 공산주의"라는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였으니 무신론자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도 당연히 서슴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위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인지, 다른 종교인인지, 무신론자인지 알 수 없지만,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가 어떻게 가톨릭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 보여주는 문구이다.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특별히 각자 자기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단지 피상적으로 신의 뜻을 얘기하는 것을 중단하게 하고 실제로 신의 뜻을 실행하게 하여 신의 말씀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만들 성스러운 의무를 지닌다. 왜냐하면 신의 말씀은 인간에게 그 형체와 정수와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의 작업을 파괴하는 자는 주님의 피조물, 그 성스러운 의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일깨워, 원한다면 각자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누그든 그 활동에 있어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의 종교 적인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것을 일차 적이고 가장 성스러운 의무로 삼게 하라.
(중략)

따라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유대인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랄프 만하임 역-먼소류 한국어 역


이것저것 길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론만 따지고 말하면, 자신의 반유대주의가 종교(혹은 신의 의지)에 의해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총통께서는 최종 해결책의 임무를 맡은 자들에게 살해가 가능한 한 인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알렸다 이것은 해충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하라는 신의 명령에 봉사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로마 교회의 계급을 혐오하면서도 여전히 로마 교회의 평판 좋은 회원인 그는 유대인이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그들의 가르침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말살 정책은 따라서 비개인적으로 잔인하지 않게 행해지는 한은 그가 단지 신의 복수의 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었으므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John Toland (Pulitzer Prize winner), from "Adolf Hitler", pp 507, talking about the Autumn of 1941.


이것도 마찬가지. 아돌프 히틀러는 세간의 비난을 받기 쉬운 학살을 정당화 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인들은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고 매도했고, 그 매도를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의 기록이다. 유대인을 예수를 살해한 자라고 비난한건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은 아니다. 이들에게 예수 또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어릴 적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형식적인 천주교인이었으며 유럽의 보편적인 기독교 문명에 대놓고 반대하지 않았고 좀 불만이 있었어도 독일 민족이 2000년 동안 기독교에 동화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봤다. 힘러처럼 대놓고 반교회적 성향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는 아니었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위해 적어도 형식적 가톨릭인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자주 보여줬다. 연설에서 시도때도 없이 쓰는 네덜란드식 감사 기도[22]라며 공식석상에선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측근과의 대화에서나 1927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나치당 강령을 두고 회의시엔 "당 강령은 안바꾼다. 성경은 모순 덩어리지만 기독교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라고 못박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수많은 신부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을 틀려먹은 종교(Wrong Religion)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23][24] 개신교의 경우에는 가톨릭에 비해서는 덜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25] 반나치 성향 고백 교회 목사들 700명을 게슈타포가 체포해서 수용소로 보내기도 한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거슬리지 않는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로 보인다. 가톨릭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 나치당 내의 개신교도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였고, 심지어 나치와 개신교의 충돌을 막고자 "게르만 기독교 신앙운동"을 열기도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 점이 독립된 종파이며 중앙 조직이 없다는 점인데 가장 크게 반발했던 부분이다. 세례받은 유대인을 탄압하거나 서로 교리가 다른 개신교 종파를 억지로 "독일 민족 교회"라고 해서 개신교를 하나로 묶어서 국가에서 관리하고자 할 땐 개신교에서도 크게 반발했다. 이는 독일 개신교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독일 개신교 내에서 반나치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고백교회를 이끌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이다.

또한 다른 나치 추종자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고 본다면 돌격대 깡패들과 (SA) 친위대는 가톨릭 사제들을 "로마의 첩자," "남색집단"이라고 폄하했고 괴벨스는 가톨릭 사제들을 가리켜 "검은 무뢰한"들이 동성애적 성향으로 독일 청소년들에 성적인 폭력을 동반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난했으며, 힘러와 친위대는 신비주의와 실체도 없는 게르만 민족종교나 찾아다니는 등 반유대-반기독교성향이 뚜렷했고 총통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은 "국가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수 없다",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당한 인종학자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독일이 살아남으려면 십자가가 떨어져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도 가톨릭 장학금만 먹튀하고 신앙은 일찍 버린다.

논란이 갈린다 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통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전 작가 이안 커쇼는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의지와 운명만을 믿었다라고 평가했고 아돌프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한 <독재자들(Dictators)>을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아돌프 히틀러는 교회를 파괴하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으로 독재체제 내에서만 허용되었다"라고 평가한다. 종국에는 소련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는 종교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돌프 히틀러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힘러와의 사적 대화에선 "기독교 교리는 과학이 진보하기 전에 낡아버렸다"라고 평가했다. 독일이 기독교 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적극적인 탄압은 없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 및 독일 개신교 교단의 성향상 나치의 종교정책에 대체로 순응했으며 반나치성향의 고백교회를 제외하고 적극 이용당하고 소극적으로나마 협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교도라는 주장도 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이교, 즉 게르만족의 전통 믿음인 북유럽 신화에 관심을 보이고 독일의 신앙을 기독교에서 이교로 갈아치우려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실제로 나치는 크리스마스 때 산타가 아니라 오딘이 선물을 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26]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나치 고관들인 루돌프 헤스하인리히 힘러와는 달리 신비주의적이나 이교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헤스나 힘러는 기독교 이전 시대의 아리안족 고유신앙을 재구성 한답시고 문자가 새겨진 비문들을 수집하거나 인도나 페르시아의 고대 종교들을 연구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오히려 이러한 행동들을 비웃었다. 실제로 힘러가 1938년에 "아리아인의 뿌리를 찾겠다"며 SS 단원들로 탐사대를 꾸려서 티베트로 보낸 적이 있는데 이게 아돌프 히틀러 귀에 들어가자 예산을 함부로 낭비했다는 일갈이나 들어야했다. 슈페어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리안 드립은 쳤지만 고고학적 발견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유물로는 돌도끼 같은 것이나 발굴되면 쪽팔리니까 그만두자는 것이었다. 힘러와 후에 나치 내에서도 정신상태가 맛이 갔다고 여겨지던 루돌프 헤스는 프리메이슨과 가톨릭 예수회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국제유대인 조직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단다. 힘러의 친위대에선 휴스턴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아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아인이었단 주장까지 펼쳤다.

나치당이 집권한 후엔 심지어 일본신토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숭배하는 위대한 종교라고 추켜올리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공자석가모니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역시 해석은 제멋대로에 엉망이라서 인도에 자리잡았던 아리아인들은 북부 독일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세웠던 지배인종이며 샤캬족도 그들의 후손이라는 개드립이나 치는 수준이었다. 이슬람이 진정한 아리안의 신앙인데 망할 카롤루스 대제가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가 모국의 종교로 자리잡게 됐다"는 발언을 했다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27]

파일:아돌프 히틀러 이슬람 관련 발언.png

내가 유일하게 존중해주는 종교는 이슬람이며,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지자는 무함마드이다.
-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위 발언처럼 이슬람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발언도 하였다.

물론 일본의 신토 관련으로 발언한 것과 같이, 이 또한 외교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남긴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대전이 진행되면서 독일은 예루살렘의 大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 휘하의 팔레스타인계 아랍 민병대들을 꼬셔다 반영 반란을 부추기려고 노력했다.[28]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예수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목사 및 신부 탄압과 기독교 탄압이 "자신을 예수로 인정해주지 않아서" 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를 "재림 예수"처럼 꾸며낸 일등공신은 괴벨스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서 친숙한 성자나 구세주적인 이미지를 쓴 것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서 유교 드립 친다고 해서 상투 틀고 갓 쓰면서 청학동에 사서삼경 외우는 사람이 아니듯이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기독교적 소도구를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저 루머는 목사와 신부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가 실패하고 탄압했다는 것이 와전되어서 생긴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돌프 히틀러가 종전 후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계획했다는 설도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 자료

아래는 위 내용을 대충 간추려서 번역한 글이다.

앨런 불록(Bullock)은 “전쟁이 끝난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뿌리뽑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고 썼다. 미첼 페이어(Phayer)는 “1930년대 후반기까지 교회 관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다른 나치당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말살에 있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 국민들의 절대 다수가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목표는 나치의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장기적 목표가 되어야만 했다.”고 적었다. 1999년 Julie Seltzer Mandel은 뉘렘베르크 프로젝트의 문서들을 연구하던 도중 도노반 (William Donovan) 장군이 나치의 전쟁 범죄를 문서화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집한 한 세트인 150권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도노반은 미국 검사팀의 수석요원이었으며 나치당의 교회 박해에 대한 많은 양의 증거를 모았다.

108쪽의 개요문서인 “나치당의 종합 계획” 에서 전략팀은 (office of strategic service) 나치 정권은 조직적인 박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보고서에서는 “국민사회당(national socialist party)의 주요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말살과 순수하게 인종에 근간을 둔 종교로 대체하는 이러한 상황을 반겼을 것이라고 서술되었다. 가장 유력한 근거는 “박해 그 자체가 가지는 조직적 본성” 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동유럽 독일화 계획에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안배는 전혀 없을 것이었다. 그때까지 당분간은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교회 문제에 대하여 느리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가장 반-교회 성향이 강하고 공격적인 인사 중 하나였던 괴벨스는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문제는 전후에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고, 이는 즉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와 독일 전통 이교 신앙 사이에는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불록은 “전쟁이 끝난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뿌리뽑겠지만,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신중함을 유지하기로 스스로 다짐했다.”라고 적었다. Yad Vashem에 기고한 글에서 역사학자 미첼 페이어는 1930년대 후반까지, 교회 관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장기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멸절” 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수석 설계자였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새 베를린 초안을 구상할 당시 그가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에게 가톨릭과 개신교 관계자들에게 교회의 위치에 대하여 논의하였다고 하자 보어만은 짧게 “교회들은 건물 위치를 배정받지 못할 것” 이라고 알려주었다.


나치가 기독교 말살을 계획했다는 주장 자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상당한 근거를 들어 제출된 바가 있고 (본문에서 언급되는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이 재판에서 제출되었다.) 첫 문단에서 인용하고 있는 앨런 불록의 <Hitler: A Study in Tyranny>나 미첼 페이어의 <The Catholic Church and the Holocaust> 등에도 실려 있다.

이렇게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공통된 사실이 있다면 아돌프 히틀러의 주장에서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29] 아돌프 히틀러는 종교인인지 무신론자인지 이전에 아돌프 히틀러가 제대로 된 사상을 갖추지 못한 선동가였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의 행동과 사상, 언행에는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리멸렬 그 자체였다. 종전 직전의 발언이나 행보, 프로이센의 전통에 대한 증오, 문화에 대한 반달리즘은 아돌프 히틀러가 정말로 독일을 사랑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기라성 같은 독일군 장교들이 연합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갈려나갔으며 전쟁 활동을 수행할 군수산업 체계와 군대는 나치의 권력 장악에 의해서 엉망이 되어버렸다. 따지고 보자면 그 나치즘이라는 것도 사상적인 기반을 마련한 당원들은 거의 다 정권 초기에 갈려나갔다.[30] 애초에 독일 자체도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거진 망했다.

4. 인간 아돌프 히틀러[편집]

아돌프 히틀러의 사악한 이미지에 비해 이후 연구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면모들은 종종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인간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당시 독일 내외의 표면적인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였다. 금주, 금연, 금욕[31]채식을 했고 동물을 사랑하는 이미지였다. 케이크나 단 빵 종류를 엄청 좋아했다는 미식가 일면도 있다. 실제로 나치 집권후 아돌프 히틀러는 금연 캠페인을 벌였으며, 나는 이미 독일과 결혼했다는 말을 했다.

오늘날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과장된 면이 있다. 영화처럼 평소에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눈알을 뒤집으며 거품을 물지 않았다. 그는 소시민 계층 출신으로 소박한 면도 많다. 그가 독일 국민들로부터 선풍적인 옹호를 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농부의 아들이며, 노동자 출신이라고 홍보하였는데, 이는 거짓이었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소박한 생활을 동경하여 잠시 그러한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러나 고된 일과 형편없는 생산성에 질려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세무서장으로 활동하여 충분한 자산을 가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가문은 충분한 유산을 소유하여 독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청년기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지망생으로서 그림 엽서나 홍보 그림을 그려서 팔던 프리터였다. 돈 안 되는 화가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20대 중후반에 1차 대전에 참전한다. 그는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여러 참호들을 오가며 통신역할을 맏은 연락병으로서 자신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함과 정말 열심히 싸웠고 그 대가로 부상까지 입어서 철십자 훈장 두 번 수여받았고 전상장을 받은 것을 자부하였다.

아돌프 히틀러 광기어린 모습은 전쟁 말기의 전쟁영화들에서 유래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주변인들에게 예의가 바르고 다정했다고 한다. 정치인이 되기 전 그는 한량이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으므로, 터프가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사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연설할 때처럼 카리스마와 화려한 논변술로 사람들을 압도했다거나 성질을 부려 사람들을 위축시켰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2002년에 사망한 아돌프 히틀러의 여비서이자 타자수였던 트라우들 융에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에게도 평소에 다정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2013년에 사망한 로후스 미슈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하여 언제나 친절했던 최고의 보스였다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몰락(다운폴)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아돌프 히틀러가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대신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영화는 아돌프 히틀러를 미화한 작품이 아니냐?'라는 대한민국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벼랑 끝에 몰린 아돌프 히틀러가 반쯤 실성하여 울부짖는 모습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운폴 항목을 참조.

4.1. 예술적 취향[편집]

잘 알려지듯 뛰어난 예술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화가로서 활동하였던 만큼 그는 예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예술 중 으뜸은 음악과 건축이라고 꼽았다. 예술품을 모으는데도 관심이 많았다. 전쟁 중에 그는 러시아의 호박방을 비롯한 고전 시대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까지 전 유럽에서 예술품을 강탈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총통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여겼던 린츠를 전면적인 문화수도로 개조하려 했고, 직접 설계한 린츠 박물관에 수집한 예술품들을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모은 예술품들은 전쟁이 끝나고 주인이나 각국정부로 반환되었지만 상당수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를 두고 스위스 비밀금고에 처박혀 있다, 나치 잔당들이 들고 튀었다 등 수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아돌프 히틀러는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건축의 꿈을, 젊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루기를 기대하고 총애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한다. 이전에는 트로스트가 건축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건물은 물론 실내 장식이나 가구 배치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았다. 슈페어 발탁 후에는 건축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어 세세한 치수나 가구의 재질까지 신경을 쓰면서 다른 일을 소홀히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 취향에 대한 고집이 셌지만, 전문가가 진지하게 주장하면 마지못해 따랐다고 한다. (출처-알베트르 슈페어 회고록) 자세한 내용은 알베르트 슈페어 항목을 참조.

일부 건축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은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마인크래프트에 가까웠다. 대리석 같은 최고급 재료로 건물을 짓자고 해놔서 재료 수급이 불가능했고, 크기가 너무 거대하여 수십 년은 지나야 겨우 완공할만한 수준이였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의 망상이 극에 달한 게르마니아 계획은 만약 이루어졌다면, 베를린 지반이 약해 수년 안에 도시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 덕분에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를 설득하거나 조금이라도 현실적인 설계를 하느라 자주 머리를 싸매야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도안이 실현된 건축물은 베를린 경기장과 총통관저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총통관저는 베를린 전투 때 거의 파괴되었고, 소련군이 나머지 건물을 폭파하여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반면 연극은 스스로의 장점없이 남의 습성을 흉내내기 좋아하는 유대인의 예술이라고 여겨 탄압했다고 알려진다. 음악 취향은 고전시대보다는 낭만주의 이후 음악이었다. 그는 바그너 광팬이었으므로 빈 시절부터 바그너의 공연이라면 빼먹지 않고 오페라하우스를 꼭 찾아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장 좋아한 작품은 프란츠 레하르의 '즐거운 과부'였다. 더불어 바그너의 초기 작품보다 게르만 신화가 나오는 후기작품을 편향적으로 좋아해서 바그너의 작품을 순수하게 좋아했다고 여기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있지만 음악적으로 바그너 후기 작품이 훨씬 깊이있고 바그너 음악의 정수를 담고 있어 아돌프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경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 작품 가운데서 가장 좋아한 것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바그너의 전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신화가 사용되지 않은 작품이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쉬운 곡을 쓰지 못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바그너가 의도적으로 평이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하여 작곡한 곡으로,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부인(코지마 리스트)은 아돌프 히틀러의 후원자이면서 추종자이기도 했다. 안톤 브루크너[32]는 두번째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세번째로 좋아했던 음악가였다고 알려진다. 슈트라우스는 나치 독일에서 제국음악회장을 하면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정작 최고의 독일 음악인인 베토벤이나 바하의 작품들의 경우에는 좀 젊을 때는 구색 맞추려고 듣다가 만년에야 좀 즐겨 들었다. 1920~30년대 유럽에서 유행한 재즈를 아돌프 히틀러는 몸이나 베베 꼬고 돌리는 열등한 깜뚱이 음악으로 폄하했다. 게다가 인종차별정책에 따라서 슬라브인들을 열등민족으로 여겨 그들을 탄압했지만, 정작 아돌프 히틀러 자신은 슬라브인 음악가인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슈나벨 등의 레코드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베르디의 경우에는 어쩌다가 듣기는 했지만 베르디의 1급 음악보다 바그너의 2급 음악이 100배 낫다는 식으로 폄하했으며 황실 오페라 극장의 베르디 공연보다는 동네 극장의 바그너 공연을 들었다. 길거리 악사가 베르디의 여자의 마음을 연주하는 걸 보고 바그너의 음악이라면 저런 천박한 자가 연주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베르디를 좋아하던 친구에게 너의 베르디도 참 안되었다고 혀를 찬 일도 있다고 한다. 일본의 군가인 군함행진곡을 듣고 만족했다고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동 시기 유럽의 지도자들 중 예술에 가장 많은 노력을 쏟았던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였으나 예술적 소양 면에서 가장 떨어지는 인물 또한 아돌프 히틀러였다는 것이다. 우선 그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처칠의 경우, 피카소가 '처칠이 다른 일을 안 하고 그림만 그렸어도 꽤 넉넉하게 살았을 것.'[33] 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로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 문학적인 소양도 출중하여 젊은 시절 그가 종군기자로서 참전했을 때 겪었던 일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으며, 비록 논란은 있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정도이다.[34] 스탈린 또한 의외로 대단한 문재의 소유자였는데, 그는 시인으로 정식 등단한 경력이 있으며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이 그루지야의 문학 교과서나 귀족들의 선집에 실렸을 정도였다.[35] 드 골 또한 30대 중반부터 책을 썼던 문장가였으며, 심지어 같은 추축국무솔리니도 전쟁 전인 20대에 이미 편집장을 맡을 정도의 문장가이자 대단한 달변가이기도 했다.[36]

다만 비교 대상들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던 것이지, 아돌프 히틀러의 예술적 재능만 따져본다면 나름대로 뛰어난 편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빈에 거주하던 시절 매우 가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부업삼아 그리던 그림엽서가 나름 잘 팔려서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진 않았다.", "뮌헨에서는 광고판 등을 그렸으며 평 또한 나쁘지 않았다."는 기록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아돌프 히틀러가 그림만 그려도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의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37], 이 정도면 당연히 미술 방면의 재능이 일반인 수준은 확실히 넘었다고 보는 게 옳다. 다만 당시의 유럽 지도자들 중 이상할 정도로 예술적 재능과 소양이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고, 그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달리 예술에 별다른 노력을 쏟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아돌프 히틀러는 예술적 재능이 형편없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4.2. 아돌프 히틀러와 미술[편집]

앞에서 서술했듯이 아돌프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파리로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는 건축물을 묘사한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사람을 잘 그리지 못해 인물화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풍경화에서도 배경의 사람들은 간략하게만 묘사하였다. 후기작에서는 간간히 사람을 그렸지만 중심은 건물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남긴 그림을 보면 평범한 구도에 특별히 미적인 독창성이 없으며 어긋난 원근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색감도 단조로운 편. 일부 평론가들은 기술은 괜찮았지만 예술적 성향보다는 건축조감도 느낌이 난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의 정치적 행보와 엮어서 '아돌프 히틀러는 인간을 무의미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지워버렸다' 식의 심리학적 추론이 종종 보이지만 제대로 된 근거는 없으며 단순한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풍경화 취향에 따른 것을 수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미술적 취향은 자신의 그림 만큼이나 다소 고전적이었으나 훗날 알려진 것처럼 처음부터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롤모델이었던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초기 모더니즘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나치당 역시 초기에는 모더니즘 건축 등에 관심을 보였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게르만의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하던 나치당의 인사들에 의해 고전 예술이 게르만적이라고 정의되고 모더니즘이 타락한 예술이라고 정의된 이후부터 거기에 편승했던 것. 마침 독일의 기성 미술계도 이런 비슷한 보수적인 시각이 있었기에, 차츰 입체파 스타일 등을 시도만 해도 화풍이 '유대적으로 물들었다'라고 판명하고 제국 예술협회에서 쫓아내고 활동을 금지했으며, 현대미술 작품에는 퇴폐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37년에는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퇴폐미술전>이라는 전시회를 여는데, 퇴페미술전에 에밀 놀데, 마네 등 오늘날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기형아, 장애인의 사진과 비교를 하면서까지 '옳지 못한 예술, 옳지 못한 신체'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주입하려고 애썼다. 반대로 <위대한 독일미술전>은 아카데믹한 회화나 조각이 주를 이룬 전시회였고, 아리아 인종의 신체를 찬양하는 교과서적인 누드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작 내세웠던 위대한 독일미술의 기원은 그리스-로마 조각상, 르네상스 이탈리아 회화다. 또한 <퇴폐미술전>은 나치의 기대와는 달리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건축적인 취향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를 통해 나치 제국의 수도 계획인 게르마니아로 구체화된 바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배타적인 예술관에 대한 일화가 있다. 괴벨스는 300만 제국 마르크를 들여 초호화 제국선전장관 관저를 지어놓고 집들이 겸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도 초대되어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경악하며 인사도 없이 돌아가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괴벨스가 선전부 예산과 영화계 뇌물로 흥청망청 초호화 저택을 지어서도 아니고 국립미술관의 그림들을 선전장관 개인 저택에 제멋대로 걸어놔서도 아니었다.이유는 장식용이랍시고 걸어둔 입구의 수채화 그림이 천박해서였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몰래 베를린에서 개최하는 미술작품 전시회에 '몰래' 분장을 하고 갔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비서인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스스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롱코트를 입고 미술 전시회에 따로 개인적으로 갔다고 한다. 그렇게 분장을 해서 간 이유는 전에 한번 그냥

갔다가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계속 "총통각하 만세!"를 외치는 바람에 작품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라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세계의 모든 사람이 내 작품을 보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고 이는 실현 되었다. 작품 상당수가 인터넷에 올라가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클릭한다.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란 악당이 그림을 그렸다는데, 과연 어떤 그림일까' 같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총통 시절에야 나치당원들이 아부한다고 비싸게 사기도 했다지만, 현대에도 비싸게 거래된다. <바다의 야상곡> 이란 그림은 2012년 슬로바키아의 온라인 경매에서 32,000유로(5천만원)의 가격에 낙찰되었다. 다른 작품은 뉘른베르크의 한 경매장에서 130,000유로(한화 약 1억8000만원)에 낙찰됐다. 이에 나치 피해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그린 그림도 나치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단 그림뿐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의 지구본, 자동차, 그의 친필사인이 담긴 들은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된다.

4.3. 성격[편집]

아돌프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의 평가는 다정다감하며 친절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절대다수가 그와 친분이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존한 탓도 있지만, 최소한 그가 저지른 온갖 만행과 전쟁범죄와는 무관하게도 주변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다정하고 소탈하게 대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본래 아무리 악명을 떨친 사람이라도 의외로 주변 인물들에게는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대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이런 면모는 아돌프 히틀러의 말년에 그의 여비서로 근무했던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녀는 노년의 인터뷰에서 비록 아돌프 히틀러가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애초에 아돌프 히틀러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이다보니 모든 면에서까지 악마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수많은 죄악을 정당화할수는 없다는 것 정도만은 알아두도록 하자.

2013년 96세로 사망한 로후트 미슈 전 SS 통신중사[38]의 증언은 아돌프 히틀러의 사생활을 연구할 때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는 독일 슈피겔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최고의 상사라고 평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하는 사람들의 직책을 부르지 않고 일일이 이름을 불렀으며 절대로 까먹는 일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요리사 만치를르아니는 총통 전속 채식 요리사였다. 그는 영화 몰락에서도 등장한다. 조상 중 유태인이 있던 사실이 밝혀져 해고됐지만, 그가 연금 수령 및 재취업에 불이익이 없도록 주민등록상 순수 게르만으로 등재토록 아돌프 히틀러 개인이 조치를 취해 줬고, 전쟁 말기에는 아예 다시 불려들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비서 트라우들 융에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돌프 히틀러는 '나는 결코 가정에 충실할 그런 가장이 못되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측근이 총통 관저에서 자신을 위한 음악회를 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하나 때문에 예술가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전속 사진사 호프만의 증언에 의하면 1933년 총리가 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들 중에서 집회나 공식석상이 아닌 평소에 아돌프 히틀러에게 '총통 각하(Mein Führer)'나 '하일 아돌프 히틀러!' 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아돌프 히틀러 씨라고 불렀으며 낯을 많이 가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주절주절 수다를 떨기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다운폴) 초반에서 묘사했듯이 한 친위대 장교에 의하면 "총통 사령부에 새로 부임받은 장교들이나 병사들은 총통을 만날 때마다 깍듯이 열정에 차서 "하일 아돌프 히틀러"라고 경례를 한다. 하지만 총통은 공적인 자리도 아닌 이런 곳에서 너무 그러지 말라며 그냥 인사만 하라고 맨날 달래신다. 실제로 총통 사령부에서 좀 오래 있던 사람들은 그냥 총통을 만날 때 "좋은 아침입니다. 총통각하." 라고만 인사한다." 라고 한다 동류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어눌할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또 인간적으로 몹시 소탈해서 선물을 받으면 상이군인 병원이나 양로원 등으로 보냈다고 한다.

친구처럼 지낸 알베르트 슈페어에 증언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무 말도 없이 둘이 몇 시간씩 산책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식사도 친한 사람 몇 명과 하거나 혼자 했으며, 친분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괴벨스가 검열로 자르거나 수입 금지된 헐리우드 영화 작품까지 특별히 들여와 밤새도록 감상했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즐겨 보았으며 자신을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는 포르투갈을 통해 입수해 두 번이나 감상했다. 덧붙여서, 미국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월트 디즈니의 만화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동복 여동생인 파울라는 오빠가 그렇게 악랄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녀와 아돌프 히틀러의 사이는 좋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돌프 히틀러가 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에드워드 블로흐는 어머니를 사망 직전까지 치료해줬던 가족 주치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특별히 그를 프랑스로 떠나도록 배려했다.

독일 제국 육군 보병대위 출신인 휴고 구트만은 과거 아돌프 히틀러가 1급 철십자훈장을 받도록 추천서를 써준 사람이다. 그 인연으로, 유대인이었던 그가 체포되자 아돌프 히틀러가 지시를 내려 석방했다.

전우이자 상관이었던 에른스트 헤스도 살려뒀다.

눈물이 많고 은근히 감수성이 풍부해서 전장에서 나쁜 소식이 들려오면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39] 오랜 동지가 탈당을 선언했을 때도 그를 만류하며 세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눈물을 흘릴 때마다 1차대전 때 독가스 공격 때문에 그렇다고 핑계를 대곤 했다.

슈코르체니와 한나 라이치는 카미카제와 비슷한 자살 폭탄 공격을 기획한다. 아돌프 히틀러와 괴링은 이에 반대했고 기각된다. 이 계획은 카미카제와는 달리 탈출과 후퇴 수단이 있긴 했다.

4.4. 식습관[편집]

게다가 맥주의 나라인 독일 총통인데도 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게다가 담배는 평생 피우지도 않았다. 근데 다른 애들도 자기 앞에서는 못 피우게 해서 부하들이 싫어했다[40]. [41]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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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치당에서의 금연 캠페인 포스터이다.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내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사교예절을 가르치고 숙청되기 전 미국으로 망명한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후에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석방되고나서 와인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다가 점차 배가 나오는걸 경계해서 육식과 술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고 구술했다. 그러니 술을 아예 안 마신게 아니다. 맥주홀 폭동 당시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아돌프 히틀러는 돌격대 앞에서 맥주를 완전히 들이키고, 잔을 바닥에 던짐으로서 모든게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그 후로도 어떤 비장한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는 종종 맥주를 들이키고 그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외에도 여기저기서 필요한 상황이라면 한두 잔 정도의 가벼운 음주를 한 기록은 발견된다.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이 밝히기로는 맥주집 폭동으로 수감하고 나서도 술은 조금 마셨다고 한다. 나중에 집권 후에도 알려진 것과 달리 식사 때는 소화를 돕기 위해 알콜 냄새는 지독히 싫어해도 코를 쥐어막고 '꼬냑 한 잔' 정도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한다.

또 채식주의자로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일반적인 이미지에 비해 의외의 면이 많다. 다만 금주, 금연한 것은 약간의 정신병적인 '건강 염려증' 때문이었으며, 채식은 사실이나 최고급의 아스파라거스를 주로 즐겼고, 단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육식을 완전히 끊은 건 조카딸 겔리 라우발이 1931년 자살하고 나서라고 알려졌다.(그 전까지는 비둘기를 보양식으로 먹는 등 약간의 육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방에서 권총 자살했는데 육식할 때마다 그 이미지가 떠올라서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음식 검시관으로 고용되었었던 마르고트 뵐크의 말에 따르면, 주로 아스파라거스나 피망같은 채소에 파스타나 쌀을 곁들여서 먹었다고 한다.

일단 이것들만 본다면 의의로 소박하고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 듯 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식사 시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일례로 2차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사령부 중 하나인 볼프샨체에서, 루돌프 슈문트(아돌프 히틀러의 수석 부관)가 국방군 지휘참모부의 장교 중 한 명이 매일 아돌프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동석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젊은 장교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그 규정의 발안자인 슈문트가 매일 저녁식사에 참석할 장교를 강제로 지정해야 했다. 식사할 때 주로 혼자 떠들어대고 주위 사람은 인내심을 갖추고 들어야 했는데, 대화 주제로는 '개를 길들이는 방법' '(로엔그린이나 파르지팔 같은 게르만족의 영웅이 나오는)바그너 오페라 이야기'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나 '채식의 우월함' 따위였다. 게다가 혹여라도 정치적인 화제라도 나올라치면 분위기를 개작살내기 때문에 절대로 정치 이야기는 금지였다.

앞서 말했듯이 일단 아돌프 히틀러가 소싯적부터 규칙적인 생활과는 한참 떨어진 니트적인 생활을 했으므로 저녁 시간이 일상인의 리듬과 전혀 맞지 않은데다가, 아돌프 히틀러의 식단은 채소뿐이고[43] 식사 자리에서는 금연이었으며, 전선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지기라도 하면 분위기는 금방 심각해졌고 저녁식사 후 아돌프 히틀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동석한 장교들을 앞에 앉힌 채 혼자서만 말을 해댔기 때문이다.[44]

아돌프 히틀러에게 결벽증이 있었다는 말도 흘러다닌다. 근데 정작 케이크를 무지 좋아해서 치아 상태는 별로였다고 한다. 그나마 3조각 이상은 절대 먹지 않았던 젊은 시절, 중년 시절과는 달리 노환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병적으로 케이크를 찾기 시작해 3접시를 한꺼번에 해치웠다. 덕분에 자주 복통에 시달렸다.[45]

아돌프 히틀러가 케이크를 좋아했던 이유가 평소 식사를 채식위주로 했기 때문일 수 있다.[46]

물론 채식주의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채식주의자였음을 부정한다.

4.5. 동물보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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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론디와 아돌프 히틀러

막상 동물 애호가였다. 심지어 나치치하에서 근현대 최초로 동물보호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47][48] 심지어 미국, 유럽, 아시아 등 현대의 다수국가 동물보호법은 나치가 만들었던 동물보호법을 기초 틀로 하고 있다.[49] 나치의 동물보호법은 수렵을 제한하는것 외에 '동물 꼬리 자르기 금지', '동물을 이용한 생체실험 금지'등의 조항도 있었다. 이것은 사람과 동물이 같다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은 사람 동물은 동물- 즉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란 개념인 셈.

동물 중에서도 특히 애견가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셰퍼드 블론디(Blondi)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단짝과도 같았다. 물론 블론디 이전에도 개를 여럿 키웠다. 또한 1차대전 당시 종군할때도 전우들과 거의 친교하지 않았던 병사 아돌프 히틀러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대상도 적진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넘어온 푹슬(여우라는 뜻)이라는 화이트테리어 개였다. 이 개는 영국군의 군견이었는데 길을 잃어 아돌프 히틀러네 소대가 있던 참호로 뛰어들어 왔다고 한다. 푹슬은 매우 영리하고 붙임성이 있어 비사교적이던 아돌프 히틀러마저도 푹슬에게는 마음을 열었다고 하며, 1차대전 종전 후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애견으로 함께 하였다. 그런데 어느 기차역의 역장이 푹슬을 탐내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개를 팔 것을 종용하다 거절당하자 (아돌프 히틀러의 말에 따르면) 푹슬을 훔쳐가버렸다고 한다. 이 일로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슬퍼하고 분노했다고 하는데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 일이 훗날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간이 완성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2차대전 말기에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던 그는 자살하기 전 폭풍같이 밀려오는 소련군이 그의 애견을 잡아먹을 것을 두려워하여 주치의로 하여금 독극물 투여로 블론디를 죽이게 하였고, 얼마 뒤 자기자신도 목숨을 끊었다.[50]

반대로 고양이를 그리도 싫어했다. 고양이는 이기적이고 충성심이 없기 때문이라나.

5. 재산[편집]

빈 시절만 해도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받은 유산과 매달 25크로네씩 나오는 고아연금이 있었고, 본인도 포스터나 극장 간판 그림 알바 등으로 상당한 추가수입이 있었다. 그러나 오페라나 전시회 관람 등 취미생활에 돈을 쏟아붓는 통에 이내 거덜이 났고 그림 알바도 막혀[51] 엄청나게 쪼들리게 되어 노숙자 숙소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좀 정신을 차려서 바이에른 시절에는 웬만한 은행원보다 수입이 좋았지만[52], 빈곤했던 시절의 기억을 못 잊어 이후 돈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나치당 시절에는 당으로부터 받는 활동비와 본인이 끌어모은 후원금 중 일부를 당에 집어넣지 않고 횡령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대부분 장부에도 없이 익명에 현찰로 받았기 때문에, 좋은 집과 옷에 자가용[53]까지 굴리는 그를 세무서가 작정하고 털려고 해도 '다 공무용으로 마련한 것이고 내 수입은 없다'며 버티는 통에 결국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나.

1920년에는 파산해서 매물로 나온 신문사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와 프란츠 에어 출판사(Franz Eher Nachfolger)'[54]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인수한 뒤 직접 사장 자리에 앉았다. 표면적으로는 당 선전기관 쯤으로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 홍보수단에 가깝게 이용했고, 그 수익금도 개인이 차지해 버렸다. 이 외에도 워낙 독선적인 아돌프 히틀러에 반발한 당 수뇌부가 그의 당내 권한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탈당 소동을 일으키는 등 크게 반발하자 결국 아돌프 히틀러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당이 회계권까지 쥐어주는 등 이전보다 더 큰 권한을 넘겨주게 됐다. 이후 프란츠 에어에서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출판하면서 아돌프 히틀러가 15%의 인세를 가져가게 됐는데, 초기에는 별 인기가 없었던 책이 집권 후 거의 반강매로 전 국민에게 돌려지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안겨줬다.

집권 전의 아돌프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아이돌로서의 인기가 높았고, 심지어 그의 사진이 담긴 사진이나 머그컵 같은 상품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사진 찍히는 걸 워낙 싫어한 탓에 그의 사진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었는데, 무명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이 미국 신문사로부터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 돌격대원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아돌프 히틀러는 웬일로 흥미가 동했는지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눴고, 그에게 자기 사진을 독점적으로 찍을 수 있는 파격적인 권리를 약속하고 대신 그 수익 중 10%를 받게 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대박을 터뜨려서 본인도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축재(蓄財)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그렇게 전속 사진사가 되고 나서 아돌프 히틀러는 호프만과 둘이서 연설 퍼포먼스를 연구하기 위한 사진을 찍으며 연설연습을 하곤 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 중 상당수가 바로 호프만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후 호프만은 아돌프 히틀러의 취미인 미술품 수집도 도맡게 되었는데, 워낙 금전감각이 없었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림 값을 부풀려 받아내는 것으로 역시 짭짤한 이득을 챙겼다. 아돌프 히틀러 사진의 인기는 곧 우표에도 실릴 정도가 되었는데, 호프만은 당시로서는 생소하게도 우표에도 초상권을 주장해서[55] 인세를 받아냈다. 우표값이야 대단치는 않았지만 워낙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이걸로 호프만은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수상 취임과 동시에 '내 급여는 전부 순직한 돌격대원 유족들의 연금으로 돌리겠다'고 발표해 큰 호응을 얻어냈다. 물론 인세와 초상권만으로도 그깟 월급 안 받아도 될 정도의 부자였지만. 위에서 쓴 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부터 온갖 핑계를 대어 단 한 푼의 세금도 안 내고 있었는데, 이 때쯤 국세청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기 힘든 그의 지갑사정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한 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국세청과 접촉한 재무차관 라인하르트는 협상에 성공하여 '국사에 바쁜 지도자가 세금 문제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자 카드는 국세청에서 말소되어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의무는 사라졌고, 그는 수상 급여를 도로 자기 계좌로 돌려버리게 된다.

이 시기 아돌프 히틀러의 돈 관리를 담당한 것은 은행원 출신의 막스 아만(Max Amann)이었다.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후원자인 디트리히 에카르트와의 연줄로 아돌프 히틀러에게 소개받은 그는, 탁월한 금전감각을 발휘하여 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재정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판사 인수를 비롯해 온갖 빚 독촉을 연줄로 무마하거나 후원금을 울궈내 돌려막는 수완을 발휘했고,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원내총무 및 출판사 대표 등을 역임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역시 자기 돈주머니 챙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결국 자기 회계관리를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심복인 마르틴 보어만에게 맡겼다. 보어만은 워낙 철두철미하고 입이 무거우면서도 돈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아돌프 히틀러의 큰 신임을 얻으면서 나치당의 실세 중에 한명으로 떠올랐다.

패망이 가까워지자, 아돌프 히틀러는 유서에서 당과 독일 정부에 전 재산을 헌납하고 주변인들에게도 얼마씩 나눠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유서를 집행할 보어만은 탈출 중에 전사했고[56], 대부분의 재산은 전후 수립된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부에 각각 환수되었다. 반강제로 빼앗긴 미술품 등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졌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것은 바이에른 주정부가 인수했다. 그가 쌓은 어마어마한 재산은 결국 독일 패망과 함께 이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6. 평가[편집]

문서 참조.

7. 전쟁 후 결과로 본 아돌프 히틀러의 영향[편집]

나치독일 항목 참조.

8. 나치 추종자들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발언[편집]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양심이다.

그는 하느님이다! 메시아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위대한 인간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곧 독일이고 독일이 곧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9. 아돌프 히틀러의 라이벌[편집]

  • 이오시프 스탈린 - 아돌프 히틀러는 집권 후 소련과 우호적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교방침을 뒤엎고 소련을 위협하면서 디스했으나, 본격적으로 서유럽에서 영-불과의 대결이 임박해지자 잠시 적과의 동침에 이르러 소련과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이렇게 손잡은 동안은 사이좋게 폴란드나눠먹고, 독일은 서유럽에서 신나게 프랑스-영국과 싸우는 동안 소련은 보이지 않게 동유럽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챙겼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서유럽에 그치지 않아서 드넓은 소련땅까지 꿀꺽하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소련을 침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세기의 독재자로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가장 치열하고 결정적인 전투는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는건 두 독재자는 서로를 '존경'했다. 스탈린은 1934년 나치당 좌파와 돌격대 국방군 내 반대세력을 숙청한 '장검의 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아돌프 히틀러도 독소 불가침 조약 전후로 '스탈린은 볼셰비즘에서 국제 유태적인 요소를 많이 청산했다'며 덕담을… 전쟁 중에도 소련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의 대리인으로 스탈린을 세워야 한다고(그보다 러시아인을 잘 통치할 사람은 없다나?), 1944년 7월 20일 암살 위협을 넘기자 스탈린처럼 군부를 가차없이 숙청했어야 되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두 독재자는 쌍둥이처럼 유사성이 많은데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 참조.

  • 윈스턴 처칠 - 아돌프 히틀러 자신이 인정한 최대의 라이벌. 초창기부터 마지막까지 처칠과 아돌프 히틀러는 적이었으며, 처칠의 최대 업적 중 하나가 아돌프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것이니 설명이 필요없다.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는 처칠을 부정적으로 여겨서 처칠을 알콜 중독 "저질" 선동가이며 전쟁광이자 국제 유대 자본에 굴종한 금권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물론 '저질 선동가' 아돌프 히틀러의 인물평이니 신경쓸 가치도 없는 평가.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아돌프 히틀러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최종보스. 다만 아돌프 히틀러는 유럽에 신경을 쓰느라 그를 신경쓰지도 못했고, 그를 전쟁에 끌어들인 건 독일이 아닌 일본이었지만, 그가 뉴 딜 정책으로 복구시킨[60] 미국이 아니었으면 처칠은 마음 놓고 싸울수 없었을 것이다. 루즈벨트는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해에 집권해 같은 해에 재임 중 눈을 감았다. 여담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루즈벨트가 소아마비가 아니라 매독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루즈벨트가 죽은 뒤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이 소련과의 대치를 우선시하여 전쟁을 멈출 거라고 기대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물론 그의 예상이 맞긴 했지만 트루먼이나 스탈린이나 그 전에 아돌프 히틀러부터 때려잡고 그 다음 서로 적대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샤를 드 골 - 아돌프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눈엣가시로 알려졌으며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고 드골이 런던으로 망명하면서 나치를 프랑스에서 몰아내자며 프랑스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자 아돌프 히틀러의 라이벌이자 적이 되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프랑스인들에게 고하는 성명에서 우리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를 몰아내어 자유를 되찾자는 호소를 하였다. 사실상 아돌프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적대지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아돌프 히틀러라지만 정작 수장인 드골은 잡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을만 하겠다.

  • 백장미단 - 나치 독일에 유일하게 항거했던 독일의 대학생 단체. 한스, 죠피 숄 남매를 중심으로 1942년에 결성되었다. 나치의 악행을 비판하고 나치의 패망을 선언하는 전단지를 뿌리면서 극악무도한 독재자와 그의 수하들에게 대항했지만, 1943년 체포되었다. 한스 숄, 조피 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첫 재판 이후 사형되었으며 나머지는 두번째 재판 이후 사형당했다.

10.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편집]

  • 베니토 무솔리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을 추축국에 끌어들였고 본인 역시 아돌프 히틀러와 애증관계에 그를 추종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자 같은 추축국의 수장으로서 유럽 침략에 뜻을 같이하는 등 같은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전쟁중에는 입장이 바뀌게 되어서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의 돌출적인 행동에 불만을 품었고 1943년 이탈리아가 조기에 패망하고 패전국 수장으로 전락하면서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국가원수로서 추축국 가입과 무솔리니의 개전을 허가하는 등 위험한 행동을 벌였으나, 무솔리니가 전쟁을 초반부터 줄줄이 말아먹기만 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국왕 권한으로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전쟁을 중단한 덕분에 전범으로써의 처벌을 면했다. 그러나 결국 왕정을 유지시키지 못했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던 스페인의 수장이었지만 사실은 나치 독일이탈리아의 협력을 가졌고 프랑코 본인도 아돌프 히틀러와 우호적인 성향을 보였던 편이라 사실상 협력자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대체역사물(추축군이 패배했다는 실제의 거시역사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및 히스토리 픽션에서는 프랑코 정권 역시 추축국으로 참전하는가 하면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으로 나치 잔당이 도망간다는 설정으로 응용되기도 한다.[61]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말로를 맞았다.[62]

  • 호르티 미클로시 - 국왕이 없던 헝가리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내륙국의 해군 제독이라는 참으로 괴이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총리인 기울라 굄뵈시(Gyula Gomboss)를 시켜서 추축국 구성안을 내놓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가 추축국 준 메이저급의 대우를 받게 한다. 그러나 이후 전세가 기울자 헝가리 나치당이라고 할 수 있는 화살십자당 당수였던 살러시 페렌츠(Szalasi Ferenc)를 잡아 가두고 연합군에 항복하려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인간병기 오토 슈코르체니에게 그의 아들을 납치하도록 해서 저지시킨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와 페렌츠에 의해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해외로 쓸쓸히 망명해야 했다. 그 결과 부다페스트는 소련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함락당했고 헝가리 여성들은 베를린에서 자행되었던것과 같은 수난을 겪어야했다.

  • 이온 안토네스쿠 - 루마니아의 총리로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루마니아에 진출하자 아돌프 히틀러의 충실한 개가 되어 독일에게 석유를 마구마구 퍼준다. 이후엔 독소전쟁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소련의 맹공으로 국토가 점령당하고 안토네스쿠는 잡혀서 사형당한다.

  • 앙리 필리프 페탱 - 아돌프 히틀러가 장악한 프랑스의 장군이지만 사실은 친(親)아돌프 히틀러, 친(親)나치파에 속하여 나치의 꼭두각시인 비시 프랑스의 수장이 되어서 아돌프 히틀러와 협력관계를 맺었다.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에 충성을 바치며 지내다가 종전 때 프랑스가 회복되면서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게 되자 그도 자유 프랑스에 의해 심판을 받아 옥 중에 죽었다.

  • 도조 히데키, 고노에 후미마로, 쇼와 덴노 - 우선 고노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을 추축국에 끌어들인 장본인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총리인 도조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적극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협력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도조를 환상의 파트너로 여겼다. 하지만 실상은 최악의 파트너에 가까웠다. 아돌프 히틀러는 도조가 소련을 공격해 주길 원했는데 도조는 미국을 공격했고 거기서 잡은 손을 뺐으면 좋았을 텐데 아돌프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버렸다. 결국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자폭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히로히토는 고노에가 주도한 추축국 가입과 도조가 주도한 태평양 전쟁을 국가원수로서 허가한 인물이였기 때문에 적극적인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다.

11. 각종 음모론[편집]

유명한 인물이고, 워낙에 악명이 높은 지라 온갖 별의별 음모론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여자설, 생존설, 유대인설이나 외계인설, 타임슬립설 등 온갖 해괴한 음모론들이 많은데 그에 관련한 음모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실 그는 자살하지 않았으며 충성스런 나치당원들 및 일부 병사들과 함께 남극으로 도피해 비밀기지를 세우고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설이다. 또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UFO는 이 나치 잔당의 작품이란 설도 유명. 전쟁 이후 보고된 아돌프 히틀러 목격담이나 남미 도피설도 존재한다. 이래서 나치는 멸망 뒤에도 오래도록 음모론 필수요소에 수록되는 영광을 얻으셨다.

영국 현지시각 2016년 1월 7일 영국 대중지인 '더 선'과 '익스프레스' 등은 최근 기밀 해제된 700쪽짜리 FBI 자료를 미국의 전문가가 검토한 결과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은 자작극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 아래 음모론 항목의 남미 은신설과 일치한다. 더 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의 대표적인 황색언론발 기사이므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아돌프 히틀러 여성설'도 있는데 죽은 아돌프 히틀러의 시신을 발굴했더니 성인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골반뼈 등이 발굴되어서 남성적으로 생겼지만, 사실 여자 아니냐는 것. 하지만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자살 후 화장과 매장을 한 자리에 해버렸기 때문에 뼈가 섞여서 생긴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남자 골반뼈는 발견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는데, 분노에 찬 러시아 병사들이 발굴작업 때 포격이 진행되는 도중 참호파듯 삽질을 막 해댔기 때문에 골반뼈가 훼손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부정확한 정보이다.

2009년 9월, 당시 소련군이 아돌프 히틀러의 벙커에서 수거해간 아돌프 히틀러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에 구멍이 난 두개골이 여성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보도에 의하면 이 두개골의 연령이 20~40대의 여성이라고 보도된 것을 볼 때, 에바 브라운의 유골을 아돌프 히틀러의 것으로 착각하여 수거한 게 아닐까 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겠지만 좀더 두고봐야 할 듯. 에바는 알려지기로는 청산가리 자살이다. 과연 이 사실이 비밀을 풀 열쇠가 될까?

청산가리 자살설은 영화 몰락을 보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아돌프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는 이미 죽고 없었고, 그녀가 쓴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책자는 혼란, 바로 옆에 있었던 만큼 미화된 면 등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방식은 입에 청산가리 캡슐을 물고 깨물면서 동시에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의의로 권총으로 자살하는 경우 순간적인 반사행동 등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중상만 입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실패시 고통이 상당하고, 빈사상태에서 적에게 잡히는 일도 많다. 이런 이유로 인해 확실하게 하려면 차라리 수류탄을 사용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그래서 청산가리 캡슐도 동시에 깨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NKVD(소련 KGB 전신)에선 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믿지 못하자, 아돌프 히틀러 벙커의 부관 참모 요리사 관리 청소부까지 죄다 잡아서 4년 동안 심문하고 보고서 작성했는데(영화 '몰락'에서 나온 꺾다리 부관 오토귄셰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63] 결론은 자살이다.

그 외에도 남미 은신설이나 숨겨둔 자식이 남미로 도주했다는 설 등의 음모론이 있다.

남미 은신설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측해서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수송기를 타고 스페인카나리아 제도에서 그 비행기를 고의로 격추시킨 뒤 거기부터 잠수함을 타고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뒤 마르텔플라타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후 아돌프 히틀러는 아르헨티나에서 여생을 보내고 1962년 2월 13일에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자연사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남미은신설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 아돌프 히틀러의 시체를 조사한 소비에트 연방 측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들은 성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사인이 일치하지 않다.

  • 자신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모든 장교들에게 나가라고 지시한 뒤 그의 시체를 본 독일 장교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한 몸매에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나있었고 이를 아돌프 히틀러라 생각하며 불에 태웠다는 점을 보아 자살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아닌 그의 대역이었다.

  •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몸에 7200만 달러의 보험을 들고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그의 여동생 파울라 아돌프 히틀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돈을 찾아가지 않았다.

  • 아돌프 히틀러가 찍힌 마지막 모습이 뉘른베르크에서 SS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 1950년 3월경에 아르헨티나에서 아돌프 히틀러로 추측되는 사람이 목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독일의 신문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에 생존했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 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 사후인 1946년에도 그를 찾아내서 제거하라는 명령을 NKVD에 내렸다.


생각해보면 한때는 세계정복을 꿈꾼 야심가가 전쟁에 질 것 같다고 그렇게 쉽게 자살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 말년의 희스테릭한 심리상태와 자기파괴적 광기를 보면 후일을 도모 했으리라는 생각은 자연스럽지 않다.

사실 이런 음모론이 퍼진 이유는 상위 항목 중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에도 서술되어 있듯 스탈린은 나치 잔당들이 누구 한 명을 구심점으로 모여서 일을 벌리는 것보다 아돌프 히틀러의 흔적을 찾다가 힘이 빠지도록 아돌프 히틀러는 살아있다고 거짓으로 소문을 퍼트렸다.[64] 이는 효과적이여서, 이제는 나치 잔당이고 뭐고 없는 현대에도 수많은 음모론을 낳게 했다.

심지어 그를 재현한 밀랍인형에서조차 도시전설이 나돌았었다. 아돌프 히틀러/기타 창작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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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아래 사진은 헤어까지 비슷해서 정말 아돌프 히틀러와 닮았다.

12. 각종 매체의 아돌프 히틀러[편집]

12.1. 역사서[편집]

  •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은 현재 한국에 정발되어 있다.

  • 아돌프 히틀러 사후 포로로 잡힌 아돌프 히틀러의 전속부관인 오토 귄셰와 하인츠 링에를 심문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의 순간을 재구성한 '아돌프 히틀러북'이 존재한다. 이는 스탈린의 개인 문서로 분류되었다가 소련 붕괴 이후 해금되었고 2003년 독일 현대사연구소의 마티아스 울과 헨릭 에벨레가 이 파일을 찾아내어 출판하였다. 한국에는 2008년 루비박스가 정발하였으나 2017년 현재 절판되었다.

  • 생각의 나무에서 2008년 정발한 독일 역사학자, 저널리스트 라파엘 젤리히만의 아돌프 히틀러: 집단애국의 탄생이 있다. 2017년 현재 절판 상태다.

  • 요아힘 페스트의 아돌프 히틀러 평전이 1998년에 1권, 2000년에 2권이 정발되었다. 나치 시대에 대한 의도주의 연구의 결과물로 이언 커쇼의 아돌프 히틀러 평전이 나오기 전까지 아돌프 히틀러 평전의 대표적인 물건으로 거론되었다. 그외에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다룬 요아힘 페스트의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도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영화 몰락의 원전이 되었다. 후자는 2005년 교양인에서 정발했으나 2017년 현재 절판되었다.

  • 이언 커쇼의 아돌프 히틀러 평전이 존재한다. 2010년 1월 교양인에서 정발한 걸작으로 나치 시대 전반에 대한 기능주의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인데 권당 5만 씩, 2권에 1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치 시대와 아돌프 히틀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저서.

  • 이언 커쇼에게 큰 영향을 미친 마르틴 브로샤트 교수의 아돌프 히틀러 국가 역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12.2. 창작 부문[편집]

아돌프 히틀러/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3. 기타[편집]

  • '아돌프'란 이름은 2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에서 가장 흔했던 이름이었다.

  • 대단히 뛰어난 웅변가다. 나치 독일이 성립될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이 사람의 연설이었으며, 그의 연설을 직접 들어본 사람의 말로는 "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은 한번 내뱉었다 하면 그를 미워하는 사람조차 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마술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 라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아돌프 히틀러의 웅변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준다.

  • 이 웅변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지망생 시절 길거리 노숙자들을 불러모아 빵과 음료수 등을 사주고 그들에게 환호성 질러달라는 주문을 한 뒤 연설연습을 했다. 이게 쌓여서 아돌프 히틀러는 웅변의 달인이 된 것이다.

  • 사적인 지인에게는 자기가 뭐하는 인간인지 단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동생인 파울라 아돌프 히틀러조차 자기 오빠가 뭐하는 인간인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참고인 자격으로 끌려가서야 알았다.

  • 모닝구 무스메가 진행하는 일본의 한 프로그램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를 세계의 위인으로 소개해 물의를 빚기도 하였으며,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마재윤이 본좌 시절에 불렸던 별명 '마틀러'도, 당시 서양 팬들 사이에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 아돌프 히틀러의 조상이 유대계, 슬라브계와 흑인계였다는 설이 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의 유골조차 제대로 회수가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니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너무 진지하게 믿지 말자.

  • Epic Rap Battles of History에서는 다스 베이더와 세번이나 랩 배틀을 벌인다. 그런데 시즌 1에서는 카보나이트에 갇히고 시즌 2에서는 랜코어 핏에 떨어진다. 게다가 시즌 3에서는 광선검으로 반으로 베인다. 시즌 4 예고에서는 유령으로 부활하고 자신이 날수있다며 히히덕거리다가 고스트 버스터즈에게 걸려서… 사실 서양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안 좋은 취급받고 있으니 어찌 보면 대우 차이가 당연할 지도.

  • 유명한게 마약 허용이다. 대표적으로 마약 때문에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미친듯이 제공해준 인물이 다름아닌 헤르만 괴링. 원래 이런 인물이 아니다.[66] 아무리 우울증 때문이라지만 마약을 너무 오래 한 나머지 1차대전때의 건강했던 정신이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 전범 재판때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살도 빠졌다. 이건 독일군이 볼때는 기적[67]이나 다름없지만 이미 전쟁은 끝나 있었다는 가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아돌프 히틀러도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데, 이 사실을 장군들이 전혀 절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도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것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해서 처방 받은 약이 바로 마약이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총통 정신상태가 더 악화되어서 며칠전에 전멸한 부대가 아직 있다고 믿는거나 안그래도 재배치돼서 저 먼 서부전선에서 뼈빠지게 연합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부대를 동부전선에 있다고 생각하는 등.

  • 여담으로 대한민국 교육과정중 6차에서는 사회책에 그가 설명돼 있었으나 7차에서는 그는 거의 언급이 없고 2차 세계대전 페이지에서는 무솔리니만 나와서 기묘하게되었다. 그후 2007 개정에서 다시 아돌프 히틀러가 부활했으나 2009 개정에서 사라진 걸로 알려져있다.

  • 러시아에서는 '기틀레르(Гитлер)'라고 발음한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어에서 인명이나 지명의 h를 /g/ 발음의 г로 썼기 때문. 이 자음은 역사적으로 /h/ 발음에 가까웠고, 현재 우크라이나어에서는 이 발음이 여전히 ㅎ 발음이다. 물론 요즘의 인물이나 지명은 Х로 적는 경우가 많다.

  • 그의 이름 아돌프는 서양 사회에서는 거의 나쁜 이름을 넘어 금지어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웬만한 역사인물들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에게 지어주는 것이 보편화된[68] 서양이지만 아직 '아돌프'라고 이름 된 남자아이는 나온 일이 거의 없다는 것만 봐도 잘 알수 있는 일이다. 아돌프, 아돌프 히틀러 두 단어 모두 독일에서 흔한 이름이었으나 이후 전화번호부를 보면 그 흔했던 이름들이 싹 사라진다. 새 아기한테 지어주지 않는 건 물론, 멀쩡히 그런 이름을 가졌던 사람들도 다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의 유품은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 이에 대한 찬반여론이 엇갈리는 중.

  • 아돌프 히틀러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폭행당해 실명된 고양이도 있다#.

  • 소문으로만 들리던 아돌프 히틀러의 고환이 하나라는 이야기가 연구끝에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링크 소문이라고 쓴 것은, 당시 독재정권하에서의 독일이 위대한 총통각하가 짝x알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을 리가 없으므로. 의학검진 자료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의 이러한 신체적 결함은 후천적인 것이 아닌 선천적인 특성이었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뒤틀린 여성관과 지나친 마초성의 추구가 어쩌면 본인의 신체적 결함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69]

  • 제 1 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에서 연합군과 대립을 하였는데 영국 군사 한명이 그를 죽일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13.1. 유럽 및 영미권 [편집]

서구권에서는 아돌프 히틀러, 나치에 대한 반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대한민국김씨 조선, 김씨 일가에 대해 가지는 반감보다 훨씬 크다.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유럽 국가는 더욱 그렇다. 물론 과거 독일 식민지였던 나미비아나 탄자니아 같은 아프리카의 국가들 역시 과거 식민지배국의 독재자였다는 이유로 엄청난 반감을 품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국제적으로 묻히는 편.[70]

동유럽권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히'도 꺼내지 못하도록 하며, 화두에 오르더라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일관한다. 미화를 했다간 문자 그대로 맞아죽을 수 있으며 고소까지 당할 수 있다. 희화화도 제정신으로는 불가할 지경이다. 이 지역이 독일에게 직접 피해를 받았고, 20세기 중반의 국제세력구도에 작용했던 복잡한 국제정세가 개입된 탓이다. 일부 밀덕후들이 한국에서 하듯 '히총통님 간지네요' 같은 소리를 했다간 그자리에서 현지인에게 두들겨 맞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놈들 중에 집에 욱일기 걸어두고 일본군과 무사도에 하악대는 등신들이 많다는 것도 또 웃긴 점이다. 의외로 서양에선 구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면서 동양의 나치빠들에 대해서는 거품물고 난리를 피우는게 등신들끼리 잘 놀고 자빠졌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나 체코, 폴란드등에서는 아예 나치 관련 상징을 기재하는 것부터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루마니아와 헝가리, 불가리아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추축국 편에 서던 나라들도 있었지만[71] 정작 이들 국가들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나치, 스킨헤드 같은 족속들이 아니고서는 대개는 영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 국가들에서조차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전범 내지 학살자로 비난받는 실정이다.[72][73] 실제로 동유럽 지역을 여행갔던 한 서방국가의 관광객은 불가리아의 흑해 휴양지 바르나에서 니네 나라 아돌프 히틀러 나치놈들이랑 손잡고 깡패짓했잖아.라고 말했다가 현지인에게 멱살 잡혀 '우리나라 역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깡패라고 입 나불대지 마라',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 사람들 학살하고 잔혹하게 착취한 주제에 니들이 제2차 대전때 나치 강압에 끌려간 우리나라를 비난할 자격이 되느냐?', '앞으로 그 살인자 이야기 꺼내지마라. 우리도 그놈한테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아픈 역사 있다.' 라며 욕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이 관광객은 심지어 현지민에게 말을 잘 못해 욕을 얻어먹은 뒤 이후 바르나를 떠나 벨리코투르노보와 소피아 등 불가리아 다른 도시에 가서 제2차 세계대전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했어도 그 곳의 불가리아 현지민들조차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를 비난하거나 살인자, 야만인이라고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불가리아는 나치의 압력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추축국에 합류해 피해를 입은 것과는 별개로 제2차 대전 초기에 나치독일의 지원으로 제2차 발칸전쟁에서 루마니아로부터 빼앗긴 도브루자 지역을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실익을 얻기도 했었지만, 여기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나치나 스킨헤드등 나치즘 밎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일부 현지의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학살자, 전범으로 비판받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찾아볼 수 없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한 목소리를 내며 비난하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이 진영은 2차대전 시절에 독일이랑 죽어라고 싸우기도 했다.

라이온 킹스카의 캐릭터송인 Be prepared에서도 이 인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와서 독일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독일버전이 문제의 그 장면을 가장 진지하게 연기했다. 자세한 것은 Be prepared 항목으로.

트랜스포머의 여주인공이었던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의 감독 마이클 베이를 "아돌프 히틀러 같은 인간"이라고 비난했다가, 이게 언론에 알려져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단칼에 짤렸다. 아무래도 트랜스포머의 제작자가 유태인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니 그 발언에 대한 분노가 더했던 듯. 물론 굳이 스필버그가 아니었다고 해도 아돌프 히틀러 욕은 상당히 심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짤렸을 것이다.[74]

애초에 이 사람(혹은 그를 필두로 형성되었던 단체)에게서 비롯된 말도 못하게 많은 사정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지하게 민감한 소재다. 심지어 위에 언급된 동화책 '깊은 밤 부엌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은 어린이가 어른이 모두 잠든 밤중에 부엌에서 모험을 펼친다는 유쾌한 이야기이고, 아돌프 히틀러 얼굴을 한 요리사들도 사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음에도 미국의 여러 공공도서관에서 비치 금지 조치를 당했다.

영국SF 드라마(영드) 닥터후 뉴 시즌 6 에피소드 8 제목이 "Let's Kill Hitler"라는 거창한 거라서 팬들을 설레게 했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쩌리 취급당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 죽은 역사 속 악인을 처단하는 미래의 시간법무부에 의해 죽을 뻔했다가 집무실로 날아든 타디스 덕분에 간신히 살았지만 닥터가 널 구한 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라고 하질 않나, 권총이라도 뽑아서 총질하려니까 200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안면을 정면으로 강타당한 후 벽장에 갇히질 않나. 그리고 갇힌 채로 그냥 잊혀졌다. 그런데 이건 '스티븐 모팻이 의도적으로 SF 세계의 오랜 클리셰를 차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이 있다. 해당 게시물 참조 바람

영국의 코미디 집단인 몬티 파이선에서도 미스터 힐터라는 이름으로 희화화를 한적 있다. 이 에피소드의 방송은 1960년대이다. 2차대전 끝난지 30년도 채 안되던 시기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딸이라는 호주 작가의 작품에서는 딸이 패전후 호주로 떠나게 된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딸을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냉대한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답이 없다.

Hearts of Iron III의 튜토리얼에서는 이상한 콧수염을 가진 그림 못 그리는 체구가 작은 사람이 나온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튜토리얼에서의 대사를 보면 본 항목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벙커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튜토리얼이 끝나면 그가 다른 방으로 이동한 후 총소리 한 발이 들렸다고 나오고, 정말 못 그린 그림만 남았다고 나온다.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지금에 와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배경에 대한 연구서들 중에서 고전 대접을 받는 서적이지만 초간본이 나온 1962년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진지하게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영불 양 국가에 퍼진 독일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전쟁기피 분위기를 활용하여 공갈외교로 독일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저런 소리를 했으니 당연히 폭풍까임.

13.2. 아시아[편집]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비교적 덜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이 제대로 독판을 쳤기 때문에 역시 시선이 영 곱진 않다.

일부에서는 부 또라이들에 한해서 취급이 자유롭다.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독일이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전쟁을 치뤘던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폴란드, 체코등 다른 연합국 서방 국가들에서는 악당 취급하고 있는 인간인데, 이상하게도 이역만리 떨어진 동방의 네오 나치에게들은 대접이 괜찮다. 같은 제국주의 식민열강이었으나 전후 전쟁을 주도했던 권력층 세력들이 연합국의 전범재판으로 처단되거나 새로운 지도부들로 교체된 독일과 달리 승자인 연합국의 죄악은 냉전등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의해 흐지부지되어버리고 열강들이 비록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세계의 주 세력으로 건제함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인지 서양보다는 그에 대한 희화화 내지는 미화에 대해 관대한 것이 현실. 그래도 대놓고 했다가는 경을 치지만. 주로 연합국을 깨부쉈던 화려했던 안티테제과 극우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데 쓰인다. 사실 한국에서도 취급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 물론 워낙 악명이 높다 보니 일반적으로는 '악인'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의외로 별다른 주의 없이 가볍게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상품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제작되는 광고의 소재로 쓰일 정도니까 말 다한 셈. 사실 한국 사회는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에 대해 직접적인 인식이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토록 치를 떠는 일본 제국이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믿겨지지 않는 일이지만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 내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를 미화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주변에서도 '나쁜 놈이었지만 딱히 우리가 당한건 없으니까...'라는 생각으로 크게 신경 안 쓰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서구권의 악질 와패니즈들이(특히 북미권) '우리도 일본에게 당한 적은 딱히 없으니까...' 하고 일본의 극우사상에 동조하는 것과 같다.)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13.2.1. 아시아계 오덕 커뮤니티[편집]

의외로 오덕 계열에서의 출현이 잦다. 주로 밀리터리 관련으로 등장하며, 그의 정치적인 관점이나 행적보다는 독일군폭풍간지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정도의 비중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도 상당히 위험한 짓이기에 대개는 대행 캐릭터(사상이 거의 일치하는)를 내세우거나 악역의 포지션을 맡는다. 정치적, 인종적 의미가 없다고 하겠지만 애초에 이 사람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극심한 논란을 일으킬수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아돌프 히틀러 코스튬을 입은 아시안들 사진이 많이 돌아다닌다. 당연히 인터넷에서는 엄청난 동양인에 대한 인종적 모욕과 비웃음을 사며 대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저럴 수 있냐고 비판 받는다.

13.2.2. 아시아 인터넷 커뮤니티[편집]

동양권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아돌프 히틀러를 나쁜놈 취급하지만 민간적인 차원에서, 특히 인터넷에서 그 추종자들이 보인다. 물론 인구가 많은 만큼 그 행태도 다양하다. 단순하게 정치와 무관한 밀덕이나 희화화도 있고 추축국 결성 이전 한정이지만 항일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였으며 자국의 항일전쟁에 기여하였다고 믿는 부류들[75], 그리고 현대 서구식의 가치관에 의문을 품는 케이스 및 침략과 팽창, 식민주의에 대해 로망을 품고 있는 약육강식주의자 혹은 동양판 환빠들 등이 있다.[76]

http://tieba.baidu.com/p/4912353589[77]

13.2.3. 대한민국[편집]

https://uncyclopedia.kr/wiki/%EC%88%98%EB%B0%95

한국은 독일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받지 않은 관계로 전성기 시절의 마재윤이 마틀러로 미화되는 등[78] 취급이 자유로운 부분이 일부 있다. 하지만 해외교류, 특히 영미, 유럽과의 교류가 잦은 관계로 의외의 치명타를 맞을 수 있다. 사실 말이 자유로운 취급이지, 단순히 홀로코스트 등의 만행 문제뿐만 아니라 앞서 얘기한대로 한국을 식민 통치한 일본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만큼 한국에서도 좋은 취급을 받기는 힘들다.[79] 하지만 의외로 일제강점기에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의 정치인이다보니 꺼림칙한 부분은 다 검열돼서 카리스마있는 애국자[80]로 여겨졌으며, 특히 분열된 독일을 하나로 통일시켜 외세에 맞섰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 대학생들이 나의 투쟁을 읽기도 했다고. 물론 그 실체가 드러나고 난 다음엔 그런 거 없다. 뭐 여하간, 한국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위상은 대략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범죄자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것에는 노골적인 옹호나 미화가 없으면 크게 문제삼지 않고, 농담의 영역에서는 거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81]' 정도인데, 상기된 바와 같이 영미권이나 유럽권에서는 설령 사용자에게 악의가 없었다 해도 이런 취급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82]

나무위키도 아돌프 히틀러 미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엔하위키 - 리그베다 위키 시절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그나마 낫네, 아돌프 히틀러가 천사로 생각될 정도로 일본군이 잔혹했다 등의 서술이 여기저기 있다.[83] 사실 엔하위키 및 리그베다 위키는 독빠 성향이 강해서 아돌프 히틀러 미화서술이 발견되는 건 필연적이다.

2차 대전 베를린을 모델로 나치 깃발과 의상을 활용한 술집(신촌에 있었다)/카페가 주한 독일 대사관과 이스라엘 대사관의 항의를 받고 컨셉을 수정한 사건도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나치 깃발로 도배한 호프집 사진이 국내 인터넷으로 퍼진 바 있는데…

90년대 초반 KBS에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 '쇼 비디오자키'에서는 심형래가 출현하는 '병사 심틀러'라는 코너가 있었다. 심형래가 독일군 병사(옷을 입은) 심틀러로, 조금산, 김학래등과 열연. 물론 얼간이 군대로 나와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를 비꼬는 것이라 그런지 독일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선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더불어 적군으로 나오는 존재들이 베트남 저항군이라든지 미국 원주민들로 나오는데 이들에게 된통 당하는 게 많았다.

KBS2의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양동근이 자신이 만들었던 유행어 "한 턱 쏴!"를 설명하면서 게스트와 방청객들까지 한번에 로마식 경례를 했다. 자막까지 "아돌프 히틀러도 했던 로마식 경례"라고 넣으면서. 사실 나치식 경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로마식도 아니고 분명한 나치식 경례였다. 나치 미화 의도가 아니라 어조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해외 사람들이 이걸 봤다간 난리날 거다.

아돌프 히틀러 희화화에서는 약간 벗어난 이야기지만, 어느 인터넷 소설에서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주변 사람들을 다 죽이자 "장하다 김아돌프 히틀러"라고 산부가 말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라서, "장하다 김XX"라고 하는 밈이 있다.

13.2.4. 일본[편집]

일본의 경우 나치는 주로 특촬물 악역에 쓰인다. 가령 쇼커 전투원의 경례가 나치식 경례인데 "하일"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이 이거리기만 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설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네북이다.

또한 특촬물 악역 중에서는 아예 나치 간부를 형상화하기도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불가사리 아돌프 히틀러이다. 물론 나치 이미지를 많이 써먹고 이용해 먹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인공들한테 맨날 얻어터지는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에 독일 대사관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아무 소리도 없다.

14. 어록[편집]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은, 빵과 서커스있으면 된다.

"모든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나의 투쟁

여자는 약한 남자를 지배하기보다는 강한 남자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성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포와 힘이다.

독일의 운명은 나에게 달려있으며 나만이 독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삶이란 뭐요? 삶은 곧 국가요. 개인은 어떻든 죽어야 하지 않소?[85]

우리는 우리 앞에 독일이 있음을 알고, 독일은 우리와 함께 행진하며, 독일은 우리를 따른다.[86]

우리의 사회복지제도는 그저 단순한 자선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제발 가난한 사람들에게 뭔가 주시죠"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 국민 여러분 서로 도우십시오. 모두가 도와야 합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항상 당신보다 더 불행한 상황에 빠진 (독일)사람이 있어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독일인으로써 같은 동포인 그 사람을 돕고 싶어해야 합니다."[87]

누구나 전쟁에서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살아남아서 죽은 전우들을 묻게 될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88]

승리한 군대라도 죽은 병사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89]

내가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바로 항복이라는 말이다.
우리 도이칠란트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온 세계에 선언하노라.

나의 불멸의 업적과 나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임을 알고 나는 기쁘게 죽을 것이다.[90]

국가의 권위는 절대 스스로 종결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폭정이라 하더라도 불가침화되고 신성화된다. 만약 국가의 권력수단이 민중을 폐허로 인도한다면, 저항은 모든 개개인 시민의 권리일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 나의 투쟁 중.

결사 항전하라. 후퇴는 용납되지 않는다. 철수란 이쪽에서 맞게 될 멸망을 저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91]

[1] 자세히 보면 사람 시체를 커다란 쳇바퀴에 매달고 그 아래서 히틀러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매우 엽기적인 일러스트다. 그림이 잘 안보이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확인하자. 부분부분 확대해 놓았다.[2] #[3] 사실 아버지의 성은 본래 시클그루버였으나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성을 히틀러로 바꾸었다. 그래서 정적들은 그를 놀릴 때에 시클그루버로 불렀으나, 그들은 당연히 게슈타포에게 끌려갔다.[4] 어차피 자살 직전에 혼인신고를 한거라 사실 별 의미는 없다.[5] 그런데 후술할 부분을 읽으면 알겠지만 사실 아돌프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같은 큰 전쟁을 일으키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상정했던 것은 이전까지의 전쟁처럼 적당한 국지전 정도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강경한 대응을 보임으로써 스케일이 매우 크게 확장된 것. 물론 폴란드 침공을 영국과 프랑스가 묵인했다면 폴란드를 점령하고 힘을 더 길러서 영국과 프랑스 쪽에 화살을 돌렸을 확률이 컸지만, 폴란드 침공 당시에 있어서 영/프와의 전면전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어서 완전히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6] 라이히 참고.[7] 당시 게르만주의 정당은 교황청의 독일 교회의 간섭을 배격하고 있었다.[8] 세계정복은 별 관심없고 전유럽의 정복까진 아니여도 유럽의 패권 혹은 주도권, 동유럽 레벤스라움화가 궁극적 목표이긴 했다. 단지 폴란드 침공때 생각과 달리 영불의 개입으로 양면전쟁이 터져서 일시적으로 멘붕했을 뿐이지[9] 재밌는 것은 스탈린은 아돌프 히틀러가 죽은 뒤인 1950년대 초반부터 시오니즘 음모론에 집착하면서 유대인에 대해 전보다도 더 적대적으로 돌아서 JAFC를 비롯한 유대인 기구들을 탄압하고 유대인에 대한 공공연한 증오를 드러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도 소련과 사이가 좋던 시절에는 소련 인민과의 피로 맺은 우정 운운하면서 유대-볼셰비즘 대신에 미국과 영국의 '유대 자본주의'를 까댔다.[10]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독일 루터교도들이 러시아로 많이 이주했다. 스탈린 시대 볼가 강 지역에 50만명의 독일계 주민이 남아 있었다.[11] 철자로 인해 '뤼거'로 표기되기도 하나 독일어 발음은 '루에거'에 가깝다.#[12] 오죽하면 마르크스주의자 중에도 반유대 인종주의자들이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유대인이었다. 아버지 때 기독교로 개종해서 본인은 자각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마르크스도 유대인 출신 사회주의자를 유대인 드립으로 디스했을 정도였다. 당시는 유대인은 천민이나 욕으로 통했다.[13] 한 가지 아이러니한것은, 당시 나치 고관들 중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그토록 깠던 슬라브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나치당 교육부장이었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러시아계 독일인이었고, 바르샤바 봉기에서 봉기 진압을 맡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폴란드계였다.[14] 이 검열 부분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언급 된다.[15] 전 유럽사회와 KKK단이 합법적으로 판치던 미국도 마찬가지였다.[16] 또한 나치즘은 반서방주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들과 차별을 두기위해서이다는 측면도 있었다고 보여진다.[17] 아난타 마히돈은 선왕의 조카였기 때문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유학생활을 한 아버지를 따라다녔는데, 192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파리, 스위스 로잔, 보스턴하버드 대학을 거쳐 아버지의 요절 후 귀국해 1934년 쿠데타로 열 살에 즉위했다. 하지만 스위스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 했는데, 1945년 귀국 후 1년만에 아끼던 총기의 폭발로 사망했다.[18] 나치 집권 당시에 가장 나치가 유화적인 종교는 다름아닌 개신교였다, 나치는 루터를 보고 교황의 속박에서 독일을 해방시킨 영웅으로 선전하기도 했으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에리히 코크(고위 나치당원)는 아돌프 히틀러와 마르틴 루터를 비교하면서, 나치가 루터의 정신으로 싸운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는 나치가 독일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비판해왔다. 이를테면 1931년엔 나치의 지도자층을 단체로 파문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3분의 2가 개신교 신자들이었다.[19] http://www.antinews.or.kr/bbs/board.php?bo_table=102&wr_id=939[20] Norman H. Baynes, ed., The Speeches of Adolf Hitler, April 1922-August 1939. Vol.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2[21] 아돌프 히틀러가 헌신적인 신자라고 말한 기사들은 다음 2개다. John Toland, Adolf Hitler. New York: Anchor Publishing, 1992, p. 507 / Michael, Robert (2008). A history of Catholic antisemitism. New York: Macmillan, p. 111[22] 연설 말미에 "주여 우리를 자유롭게 하소서!"라는 문구로 끝낸다.[23] 웃긴 건 아돌프 히틀러가 그렇게 싫어한 공산국가도 종교를 엄청 싫어했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처럼 헌법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경우도 많았지만.[24] 참고로 아돌프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 말엽 교황 비오 12세를 납치하여 총살시키고, 바티칸을 불태우려는 계획까지 세웠다는 설도 있다. 자세한 건 비오 12세 항목 참조[25] 나치의 주류들은 가톨릭세가 만연한 바이에른(남부 독일) 출신이 많았지만, 남부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자들은 로마의 속박이라면서 반 가톨릭적 성향이 뚜렷했다.[26] 혹은 예수의 출신을 북유럽의 영웅으로 조작했고 이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제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7] Speer, Albert. <Inside the Third Reich: Memoirs>. New York: Simon & Schuster, 1997[28] 실제로 슈페어에게 "아랍인들은 아리아인들보다 한 수 아래다"라는 발언을 직접 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총통이 그러면서도 아랍인들의 일사불란한 군사 문화에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는게 슈페어의 회상이었다. 실제로 힘러에게도 친위대 내부에 무슬림 분과를 마련해놓으라고 했다는 증언도 있다.[29] 나치나 아돌프 히틀러 관련하여 공신력 있는 서적들에서도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는 둘째치고 독실한 종교인이었다고 서술한 서적은 없으나 종교 탄압은 꼭 한 챕터씩은 다루고 있다. 페스트 <아돌프 히틀러 평전>, 이안 커쇼 <아돌프 히틀러>,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 일상사>, 귀도 크놉 <아돌프 히틀러의 뜻대로>, 마르틴 브로샤트 <아돌프 히틀러 국가>, 슈테판 마르크스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 간접적으로 다룬 책들중에 폴 존슨 <모던 타임즈>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등이 있다.[30] 그렇다고 나치즘이 좋다는 건 절대 아니다.[31] 이 때문에 무성애자라는 이야기가 많고 실제로 나무위키 무성애 항목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이 올라가있었지만 금욕과 아예 성적 지향성무성애가 다르다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다.[32] 아돌프 히틀러가 사랑한 오스트리아 린츠가 브루크너의 고향이다.[33] 처칠의 손녀 에드위나 샌디스의 증언.[34] 그의 작품들이 노벨상감에 해당되는 가에 대한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오늘날의 영문학계에서 처칠의 문장은 영국 문단 특유의 간결하고 논점을 확실하게 주장하면서도 군데 군데 의미심장한 임팩트를 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며, 또한 영어 작문의 교과서적인 미덕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즉 적어도 문장의 기교면에서는 확실하게 학계에서 인정받는다는 얘기다.[35] 대숙청이 두려워서 억지로 교과서에 수록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스탈린의 시가 교과서에 실린 것은 대숙청은 고사하고 소련이 건국되기도 전의 일이다. 스탈린의 시가 수록된 교과서의 저자 이아코브 고게바슈빌리(იაკობ გოგებაშვილი)의 생몰년도는 1840-1912년이다.[36] 무솔리니의 글은 파시즘에 대해서 상당히 논리적으로 썼다는 평을 받고 있다. 나의 투쟁파시즘나치즘의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1차 사료이긴 하지만, 글 자체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주장을 모아 놓은 수준의 글'이라는 평을 받는 것과 대조된다.[37] 뮌헨 시절 아돌프 히틀러의 소득은 월 100크로네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은행원들의 평균 월급 70크로네보다도 높은 액수이다. 설령 월 25크로네의 고아연금이 합쳐진 금액이라 가정하더라도, 이 시기 아돌프 히틀러가 이런저런 상업용 그림 알바만으로 어지간한 은행원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가 적어도 그림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만한 수준의 미술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38]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마지막 경호원이자 80년대 이후 생존한 몇 안 되는 사람으로 적잖은 사회의 관심과 집중을 받았다. 한 달에도 여러 번 네오 나치뿐만 아니라 전기작가나 역사가 심지어 학교 교사나 동화작가로부터의 만남 요청을 받았다. 아예 그를 소재로 해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까지도 존재할 정도. 그가 죽었을 땐 그의 친척과 이웃들을 비롯하여 수백명의 사람이 참석했으며 슈피겔지에서도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까지 자신의 SS 경력을 반성하지 않았고, 자신은 나치즘이나 아돌프 히틀러를 위한 게 아니라 반공주의에 입각해 유럽을 지키고자 SS에 들어간 것이라고 변명했다. 사후 성당에서 장례식이 치뤄지길 원했지만 로마 교황청은 친위대 병사에게 그럴 순 없다며 거부하였다. 그의 사망 기사.[39] 쿠르스크 전투 때 독일군 전사자들의 사진을 보고나서 엄청난 멘붕에 걸려 방어태세를 주문했지만 만슈타인 장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해야 승산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공격을 해야 승산이 있었던 만슈타인의 장군의 말이 맞은 것이 안습...[40] 참고로 당시는 지금처럼 흡연의 위험성 개념이 매우 약했던 시대(물론 건강의 해악성 자체를 몰랐던 건 아니다)라 남성 흡연률이 매우 높았고 여성 흡연률도 높았던 시대다. 신앙이 깊거나 한 소수 경우 제외하면 고위공무원급이라면 거의 다 담배를 피웠고 계급 구별없이 같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회의하는 경우가 흔했다. 금연자가 비주류 취급받던 시절.[41]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의하면 한 일화중에 정치회의 중에 휴식시간을 가졌을 때였다. 한 정치인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담배를 권하며 "총통각하, 담배는 우리의 몸을 소독시키는 역할을 하는 건강에 이로운 물건입니다. 라고 말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흡연자들의 이빨이 누렇게 변하고 맨날 가래가 끓으며 운동 할 때마다 폐활량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입술과 피부는 죽은사람 시체처럼 어둡게 변하게 만드는데 전혀 건강에 이로워 보이지도 않네, 게다가 담배가 이롭다는 과학적 근거도 없네만" 이라고 팩트폭행을 날렸다.[42] 당시 전쟁의 폐허로 화폐가 가치를 잃었을때 화폐대용으로 사용된 물품중 하나가 담배였다. 김영옥 대령의 일화중에 이탈리아 전선에서 휴가를 보낼때 식당에서 술이나 음식값으로 담배 몇갑을 주는 이야기도 나온다.[43] 극단적인 채식도 건강에 안 좋다.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다.[44] 출처: 제프리 메가기, 김홍래 역, <아돌프 히틀러 최고 사령부 1933~1945: 사상 최강의 군대 아돌프 히틀러군의 신화와 진실>, P.319, 서울: 도서출판 플래닛미디어, 2009.[45] 생모가 위암으로 죽은 가족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46] 채식은 맛이 없기 때문에 맛을 내기 위해서 단 것을 많이 찾는다. 메이지 유신 이전, 채식 중심의 일본은 후식으로 단 음식이 발달했고 현대 채식주의 조리법 중에는 버터나 설탕을 들어부어서 맛을 내는 경우도 있다.[47] 법안을 결제한 아돌프 히틀러 친필 사인이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대통령 겸 총리에 수권법이라는 법까지 만들어 그 외 수많은 추가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상 황제와 다를바 없었고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게 사실상의 입법권이 있었다. 누가 뭐라하건 그가 결재하면 법이 되는 것이었다.[48] 엄밀히 따지자면 인도아소카이 만든 동물보호법이 세계 최초이다. 무려 2400여년전쯤에 시행했다![49] 참고로 현대의 세계 다수국 법률의 전체적인 기본틀은 나폴레옹 법전을 기초로 발전시킨 형태를 가지고 있다. 동물보호법만 나치 동물보호법을 기초틀로 할 뿐.[50] 영화 몰락에서 블론디에게 직접 독약 캡슐을 먹이고선, 끙끙대며 죽어가는 블론디를 차마 처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나서 블론디가 죽자 완전히 영혼이 나간 얼굴로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51] 그림 판매를 도맡았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진 게 원인.[52] 당시 은행원 평균 월급이 70크로네 정도였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연수입은 1200크로네 정도였다. 즉 월 100크로네 정도로, 어지간한 중산층 수준은 됐다는 얘기.[53] 업무용이라고 우겨서 당에서 뜯어낸 돈으로 중고차를 하나 샀지만, 워낙 낡아 금방 되팔아 버리고 자비로 새 차를 샀다. 대신 운전수는 당비로 고용해 달라고 우겼는데 결국 들어줬다고.[54] 에어 출판사는 집권 후 독일 최대의 출판 재벌이 된다. 나치당이 대주주다.[55] 당시 우표에 자기 얼굴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명예로 여겨져 따로 돈을 받는다는 개념이 드물었다고 한다.[56] 행방불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신이 확인되어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다.[57] 귀도 크놉 著 <아돌프 히틀러의 조력자 '2인자 괴링'편>[58] 괴벨스의 일기에서[59]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기록영화 의지의 승리에서[60] 물론 미국 경제에 뉴딜 정책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61] 실제로도 그랬다.[62] 다른 협력자들의 말로는 대부분 비참했다. 무솔리니는 암살당했고 페탱은 옥사했고 도조, 이온 안토네스쿠, 살러시 페렌츠는 처형당했다. 쇼와 덴노호르티 미클로시는 천수를 누렸지만 호르티의 경우 실권과 지위를 모두 잃고 해외로 망명해야 했고 히로히토는 덴노로서의 지위는 보전했지만 실권을 포기해야 했으니 행복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또한 처벌은 전혀 받지 않았지만 결국 왕정을 유지하지 못했다.[63] 책 제목은 <아돌프 히틀러 북>으로 국내에도 발간되었다.[64] NKVD나 KGB에 아돌프 히틀러를 찾으라던가 죽이라고 거짓으로 지시한 것도 스탈린 본인이다.[65] 이 사건은 노벨 평화상의 맹점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인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 가지 업적에만 치우쳐서, 심지어 현지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는 외부인의 추천으로 주어진다는 점이다.말그대로 후보만 오르는 것이다. 당연히 실제 수상은 검증을 통해 수여되는 것이다. [66] 이래 보여도 1차 대전때 공군 에이스다.[67] 지휘관이 마약이나 해대고 있는데 갑자기 마약 끊고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정상적인 업무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아무리 전쟁 전선상태가 막장이 된다 해도 부하들은 눈물나게 반가울 것이다.[68] 이라기보다, 서양은 동아시아에 비해 사람의 이름이 제한적인 편이다. 특히 '기품있는 이름' 과 '하층민이나 쓰는 이름' 이 대체로 구분되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헨리 아버지 헨리, 헨리 아들 헨리' 식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주니어, 시니어 개념이 여기서 나오는 것.[69] 강한 마초성을 내보일수록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케이스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헤밍웨이로 그는 음경왜소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외적으로는 남성적인 이미지와 성격을 자주 표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70]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지배하던 해외 식민지들을 몽땅 잃었다.[71] 하지만 불가리아는 좀 논란이 있다. 추축국의 합류 과정도 나치독일에 의한 위협에 의한 반강제적인 합류인데다 제2차 대전 당시 추축국 시기 전쟁터에서 학살, 인권유린까지 저지른 루마니아, 헝가리와 달리 잔학행위도 많이 저지르지 않았는데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에 참여를 거부하며 유대인들을 보호한 전적도 있었기 때문인데 자세한건 상임이사국, 추축국, 홀로코스트, 뮌헨협정 항목 참고.[72]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폴란드, 체코는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군이 자기 국가들에게 저지른 전쟁 피해들을 이유 삼아 독일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강경 반대하고 있다.[73] 하지만 루마니아는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에 협력한 이온 안토네스쿠를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다. 음?[74] 소설 1초 후에서는 식량을 직책에 따라 차등 분배하겠다는 결정에 반발한 여성이 '하일 아돌프 히틀러!'를 외치며 나치식 경례를 한다. 나치식 경례를 상대를 아돌프 히틀러 같다고 표현하는 모욕으로 쓸 수도 있다.[75] 여기에 더해서 아돌프 히틀러가 친동양적이라는 루머까지 퍼뜨린다.[76] 이 두 부류의 경우, "역사는 승리자가 기록한 것이다"라는 드립을 지겨울 정도로 입에 달고 다닌다. 어떻게 보면 역덕들이 근래의 역사 인물 재평가 분위기에 무작정 편승하여 주화입마한 케이스.[77] 사진 속 학생들은 중국 본토가 아닌, 대만의 어느 한 학교 학생들이다.[78]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스캔들 이후 마틀러는 굴욕적인 의미로 바뀌게 된다.[79] 당장 욱일기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를 동일시하며 배척하니 말 다한 셈.[80] 당시 신문기사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나라없는 애국자라고 불렀다.[81] 마틀러나 최틀러 같은 별명을 붙이는 것에 크게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니까[82] 실감이 나지 않거든 한국에서 인공기 도안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듯?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 비판을 목적으로 욱일기 도안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해의 형태로 만든 낙일기를 사용하는 것도 상당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을 정도니까.[83] 하지만 국내에 수많은 사람들이 편집자로서 활동하는 나무위키 특성상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미화서술을 찾아서 지워내기란 상당히 힘들고 재자리 걸음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아돌프 히틀러 미화서술을 지웠는데 누군가가 다시 복구했다던지, 아니면 아돌프 히틀러 미화서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정해야할 필요를 못느끼는 사람들이 국내에는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는 굉장히 여러운 작업이 될것이다.[84]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 중에 했던 말로, 일련의 침략 행위에 담겨 있는 목적을 보여주는 그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Stärke liegt nicht in der Verteidigung sondern im Angriff). [85] 독소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장군들에게 한 말.[86] 아돌프 히틀러 유겐트 연설 '의지의 승리' 중[87] 사상으로써 국가사회주의를 가장 화끈하게 보여주는 발언. 당연히 유태인은 독일인, 아니 같은 인간으로 쳐주지 않았다.[88] 그나마 1차세계대전의 전쟁 베테랑 다운 말[89] 아돌프 히틀러가 했다고 믿겨지지 않지만 진짜로 아돌프 히틀러가 한 말 맞다! 기 사예르의 회고록 잊혀진 병사에도 위 구절이 나온다[90] 자살하기 전 남긴 말.[91] 라인강의 독일군을 철수시키자고 장군들이 건의하자 한 말. 이 말을 하니 독일 장군들이 비로소 총통도 전황을 직시하고 있다고 믿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