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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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俄館播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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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19세기 즈음의 러시아 공사관, 오른쪽이 현존하는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1]


1. 개요2. 내용

1. 개요[편집]

군주가 대궐을 비우고 다른 나라의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상 유일의 사태.
대한제국 일본 식민지화를 불러 일으킨 고종의 결정적인 실수

조선의 외교 판도를 확 바꾼 사건. 좋으나 싫으나 한국사에서 중요도가 높은 사건이다.[2] 잠정적으로 병신파천(丙申播遷)[3] 또는 러시아를 한자로 '노서아(露西亞)'라고도 하기 때문에 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2. 내용[편집]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 간 고종과 세자였던 순종경복궁(건청궁)을 떠나 어가를 아라사(俄羅斯) 공사관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아관파천 당시에는 '파천'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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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친일 세력에게 자신도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낀[4] 고종은 당시 일본과 대립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전제적 군주정을 행사하는 국가이기도 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심야에 러시아 해군의 호위하에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였다.[5] 이는 단발령에 반발해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김홍집 내각의 조선군은 물론 일본군까지 지방으로 내려가 수도가 빈 상태에서 이범진 등의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이 사전이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6]

고종은 옮긴 당일 내각총리 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외부대신 김윤식, 내부대신 유길준, 탁지부대신 어윤중, 군부대신 조희연, 법무대신 장박, 정병하, 김종한[7],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했다. 이 때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가 군중에게 살해되고 유길준 등은 망명하였다. 특히 신 제도에 대한 지식이 높았으며 내각의 중심에 있었던 김홍집이 죽은 것이 큰 타격이 되었으며 더구나 김홍집은 망명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군중들 앞에 나아갔던 만큼 안타까움이 더한다. 사실 김홍집의 경우는 얼굴마담이라서 죽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다만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는데, 정병하는 초기에는 온건개화파였으나 다른 온건개화파들이 다 그렇듯 급진적인 개혁세력, 더 정확하게는 친일로 전향한 인물이다. 이걸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을미사변 시기에 일본 낭인들이 침입한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거짓 보고를 한 것과 단발령이 나올 당시 고종의 머리를 직접 자른 것 등을 들 수 있다. 어윤중의 경우는 고향으로 도망가다가 죽었는데, 이 역시 춘생문 사건 시기에 고종의 탈출을 막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유길준의 스승이라는 점도 문제. 이들을 제거한 것을 고종이 그냥 싫어해서라고 하는데, 이정도 급이 되면 고종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8] 뭐, 이들이 군중에게 죽은 이유는 고종의 지시라거나 하는 부분 보다는[9] 이들이 일본과 엮여있었다는 것이 당시 일본을 정말 싫어했던 군중에게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고[10], 무엇보다 어윤중은 개인적 원한을 산 사람에게 죽었지만 말이다.

이 사건 이후 일본군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찾아가서 환궁을 요구했으나[11] 실패했고, 이후 조선에서 세력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때문에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개전 이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거할 때까지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극단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이후 한동안 한반도는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러시아는 재정, 군사 고문단 파견과 한-러은행 개설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러시아는 경원군경성군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 사실 러시아의 요구는 독립협회에서 과장해서 반대해서 그렇지, 일본을 견제한다는 목적 하나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문제는 다른 국가들과 체결해 놓은 최혜국대우조항 때문에 러시아에 하나 내주면 다른 곳에도 자동으로 하나씩 넘어갔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부담이 몇 배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자체가 고종의 작전이었단 말이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열강들에게 일부러 골고루 이권을 나누어 줌으로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려 할때 반발할 방패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했다고 가정하면 엄청난 돈만 날린 대실패한 작전이었다. 여담으로 당시 독립협회도 똑같은 주장을 공언했는데, 이 경우는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을 포함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더 멍청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에 일본과 가까워지며, 한반도보다 만주에 집중하자는 노선 변경으로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는다.[12] 여기에 독립협회 등이 중심이 된 환궁 청원 운동도 있어 1897년 2월 18일,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 고종은 이틀 뒤인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고종이 1896년 10월에 궁전에 설치된 전화기김구를 살려줬다고 하는데, 하지만 고종이 적극적으로 나섰을리는 없고 아마도 백범의 과장이 섞이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13][14]

2016년부터 서울특별시청은 당시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길을 재정비하고 러시아 공사관도 복원시켜 왕의 길이라는 모습으로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지만, 이것도 역사로 기록해야한다는 취지가 담겨있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난 곳도 시청 바로 건너편인 중구 정동이다.

[1] 당시의 건물은 6.25 전쟁으로 거의 다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 부분만 남아 있다.[2] 개화파 숙청 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김홍집이 상당히 아쉽기는 하지만 을미개혁과 을미사변의 책임이 김홍집에게 몰리면서 김홍집이 죽고 사는 문제를 떠나서 정계에서 버틸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3] 1896년이 병신년이라서 그렇게 불리지만, 어감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보여서 잘 쓰이지 않는다.[4] 독살 위협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에비슨과 같은 외국 선교사들이 보내준 연유 통조림과 삶은 계란 몇개로 연명할 지경이었다. 실제로 이후 김홍륙독다사건(커피에 독을 탔으나 미수에 그쳤다.)이 터지면서 고종의 걱정이 기우만은 아니란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그 김홍륙은 아관파천 때 활동했던 친러파... 나중에 나라를 말아먹은 이완용도 이 무렵에는 친러파였다.[5] 그 전에도 춘생문 사건과 같은 구출시도가 있기는 했다. 이 때는 이범진, 이재순 등의 친미파 고관들과 미국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할 의도였다. 여기에는 영국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아관파천의 베베르도 관련되어 있는 등 그야말로 다국적적인 시도였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위대장인 이진석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춘생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은 뒤에 고종의 신임을 얻게된다. 앞서 언급한 독다사건의 김홍륙이나 이완용도 여기에 포함된다.[6] 미리 러시아 해군 수병 117명, 대포 한 문을 인천에 입항해 있던 순양함에서 차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배치하여 경비를 강화(당시의 많은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재외 공관의 경비와 방어는 해군이 수행했다.)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7] 그렇지만 김종한은 면직되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 고위직에 머물렀다.[8] 그외에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 때, 온건개화파를 살려줬는데 고종이 온건개화파를 다 죽였다는 서술까지 있었는데, 갑신정변 때 죽은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조영하 등의 인물이 온건개화파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이들을 외척 혹은 왕족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9] 고종이 죽이려고 했다면 이건 정식으로 처형되지, 군중 손에 죽지는 않는다.[10] 가장 문제는 을미사변을미개혁으로 인한 단발령이었다. 이 경우에도 을미사변을 책임지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김홍집은 정말로 억울하겠지만, 일본의 영향으로 을미개혁의 대표로 떠오른 유길준과 조희연은 이 경우 돌 맞을만 했다고 할 수 있다. 정작 죽은 것은 김홍집뿐인 것이 역사의 비극이지만.[11] 관련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자료는 이태진 교수에 의해서 군대해산 즈음의 자료로 평가되었다.[12] 사실 일본은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고 38선(!)의 분할점령을 제안했으나, 결국 완충 지대로 남겨둔다는 형태로 협정이 이루어졌다. 니시-로젠 협정에서도 양국은 조선 내정에 대한 불간섭을 합의하였기 때문에 이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조선에게는 최상의 상황이었다. 물론 자기 능력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후에 러시아가 뤼순다롄을 점령하는 뻘짓으로 국제적 왕따가 된 다음에는, 러시아가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고 38선 분할을 주장했으나 이번엔 일본의 거절로 무위로 돌아갔고 러일전쟁이 벌어진다.[13]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고종은 아관파천 시기 러시아 공사관에 발이 묶여 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궁과 러시아 공사관을 오가면서 그 기간을 보냈다. 애초에 조선의 궁궐은 왕의 거주지인 동시에 국가중앙행정실무기관이기 때문에 이걸 완전히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리하는 것도 어렵다.[14] 그리고 서울-인천 간 전화선 연결은 1898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고, 서울-인천간의 대중전화가 개설된 것은 1902년이지만 고종의 집무실이 있었던 덕수궁에서 인천으로 연결하는 전화는 김구의 사형집행 3일전에 개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