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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최근 수정 시각:

1. 고대 그리스의 광장2. 서울대학교의 랜드마크3. 포털 사이트 Daum의 서비스4. 영화
4.1. 비판

1. 고대 그리스의 광장[편집]

Ἀγορά / Agora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에서 자유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던 장소. 아고라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집결지'(Gathering Place)이다. 아고라가 정확히 언제부터 폴리스에서 구현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기를 파악할 수 없지만, 폴리스가 그리스 전역에 걸쳐 형성되던 기원전 9~7세기 무렵에 시민권 보유자들이[1] 병역을 위해 집결하거나, 혹은 참주/위정자들의 연설을 듣기 위하 모인 것이 시초이다. 후에는 시장, 운동 경기와 같은 문화행사도 열렸다. 광장공포증(agoraphobia)라는 말에 남아 있다.

2. 서울대학교의 랜드마크[편집]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건물 앞에 있는 조그만 광장. 광장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작은 공터에 가깝다(…). 유래는 1의 아고라. 대학본부 - 중앙도서관 - 학생회관 사이의 큰 광장이 아크로폴리스로 불리는 것에 대응하여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학생 자치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회대 내 각종 공식/비공식 행사에 대한 플래카드가 걸리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2010년 9월 학교 측에서 후생관을 철거한 자리에 아시아연구소를 지으면서 아고라까지 같이 없앨 계획을 세웠으나, 사회대 학생들의 반대로 현재는 부분유지가 결정된 상태이다.

3. 포털 사이트 Daum의 서비스[편집]

4. 영화[편집]

파일:external/imgmovie.naver.com/53052_P01_210231.jpg

떼시스, 오픈 유어 아이즈, 디 아더스를 연출한 스페인 출신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2009년 영화. 레이첼 바이스가 주연으로 출연한다. 2009년 칸 영화제에서 첫 시사회를 가졌다.

아메나바르 감독의 초기작들을 보면 스릴러가 여러편 있고, 그나마 다른 장르에 눈을 돌린게 바로 전작인 <씨 인사이드>였기 때문에 그가 시대극을 찍었단 사실을 의외로 받아들인 팬들이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아고라의 궤적은 최근작 리그레션으로 이어지고 반종교 내지 종교비평적 주제에 대한 감독의 일관된 호감을 보여준 셈.

시대적으로는 서로마 말기, 지리적으로는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사극. 당대의 걸출한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의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유대교, 이교 등이 뒤얽힌 종교적 광기를 에둘러 까는 내용[2]인지라 우리나라에선 2009년작인 영화가 2011년은 되어야 겨우 개봉이 논의될 수 있었고 국내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 귀추가 주목된 적은 있었지만... 결국 아예 개봉이 불발되어 버렸다. 실제로 몇몇 배우들은 민감한 주제로 인한 부담으로 캐스팅을 고사했다는 설.[3]

덕분에 인지도가 안습함에도 불구 아메나바르 감독 및 레이첼 바이스의 팬덤이 제법 두텁다 보니, 어둠의 경로를 통해 관람한 사람들이 많고 영화 자체의 평가도 상당히 좋다. 헬레니즘에 근간을 둔 고대 문명과 헤브라이즘에 근간을 둔 중세 문명의 교차를 뛰어난 영상미와 연출로 잘 그려냈다는 평.

4.1. 비판[편집]

사실 히파티아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영화에서 나온 기독교인들의 폭동은 히파티아가 밑에 들어갔던 알렉산드리아 총독[4]의 기독교 탄압이 원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즉 영화에선 정치적 싸움에 가까웠던 실제 역사를 종교적 반지성주의에 의거한 것으로 왜곡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 영화에서는 역사적 사실조차 왜곡하고 있는데,키레네의 주교 시네시우스는 히파티아를 배신한 적이 없고, 실제 역사에서는 히파티아 사망이전에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5] 사실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이교 숭배에 무관심했고 종교적 분쟁이나 논쟁에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녀와 그녀의 제자들이 당시 세라페움에 있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키릴루스의 경우 총독 오레스테스와만 갈등이 있었고 히파티아와는 접점이 없다. 심지어 히파티아가 여자라서 당했다는 관점마저 보이는데 사실 중세에도 여자들이 가르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히파티아의 죽음을 그리스-로마 문명의 종말처럼 그리고 있는데 [6] 히파티아가 죽음으로써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행하였고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여러 학자들이 계속해서 그리스의 수학과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반대로 중세 기독교 철학자들이 그리스-로마 철학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1]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권 보유자라는 표현은 바꿔 말하자면 자유민 성인 남성이라는 것이다.[2] 히파티아가 과연 그러한 '종교적 광기'의 피해자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수정주의 기독교도들은 주장한다. 히파티아 항목 참조.[3] IMDB 아고라 관련 트리비아 참조.[4] 그런데 기독교인이란 주장이 있다?!?[5] 그녀의 강의에는 지배계층과 부유한 자제들이 많았으며 적잖은 기독교 신자들 역시 그녀의 강의를 들었다. 그녀는 지배계층의 존경을 받았고 제국과 도시의 고관들과 부유하고 좋은 혈통, 세력있는 학생들에 둘러 싸여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문화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6]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의해 이런 관점이 생겼다. 참고로 칼 세이건은 엄연히 종교학자였던 브루노를 과학의 순교자처럼 말해서 뭇 사람들의 오해를 만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