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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호랑이/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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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백두산호랑이에 대해서는 시베리아호랑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 항목은 한반도에서 서식했던 시베리아호랑이의 역사에 집중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http://ecotopia.hani.co.kr/files/attach/images/69/483/043/1.jpg
근엄

1. 개요2. 한국 문화에서의 지위
2.1. 설화 속에서의 모습
3. 영광과 수난4. 생존?5. 복원?

1. 개요[편집]

http://www.bucheontimes.com/news/photo/201202/19322_55295_2132.jpg
백두산호랑이, 조선범 또는 한국호랑이는 한반도의 거의 전 지역[1] 에서 살았던 시베리아호랑이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베리아호랑이 자체가 호랑이라는 종의 한 아종으로, 한국호랑이는 별도의 아종으로 분류될만큼 다른 유전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한반도에 서식하는 시베리아호랑이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는 백두산 및 개마고원 일대에만 소수 개체가 서식하고 있으며, 남한에서도 서식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백두산호랑이라는 명칭은 물론 호랑이가 백두산 인근에도 서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직 백두산에만 살아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험한 산이 백두산이니만큼 그 산에 사는 호랑이를 한반도에 사는 호랑이들 중 대표격으로 치다 보니 나온 이름이다. 그 외에 설화 속에서는 "금강산호랑이"나 "지리산호랑이"도 제법 명성을 누리고 있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호랑이들은 산보다 습지나 섬등 물이 많은 곳을 서식지로 선호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물이 많은 강가나 호수둥지에는 식생이 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노루나 고라니등 발굽동물의 밀도가 높았고 그래서 호랑이들이 강가등지에서 많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미 멸종한 호랑이 아종인 카스피호랑이와 유전자 DNA가 거의 같다고 한다.

2. 한국 문화에서의 지위[편집]

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이 으레 그렇듯, 한국에서도 무기가 발달하기 전까지 호랑이는 공포의 존재로 경외시되거나, 신적인 존재로서 숭배되었다. 과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던 시절에는 호랑이와 사람들과의 접촉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한 인명피해도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산신령 내지는 산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호랑이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은 각종 소설이나 시, 민화, 전승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맹혹한 거대 포식자라는 점 때문에 주로 지배계층에 비유되기도 했으며, 그에 따라 풍자적이거나 해학적인 모습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맹수라는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어 친숙한 동물 이미지도 많이 박힌 편.

2.1. 설화 속에서의 모습[편집]

맹수답지 않게 옛날 이야기 속에서는 굴욕아이콘이다. 천적은 토끼, 곶감, 썩은 동앗줄, 꼬마, 사기치는 가짜 인간동생 등이 있으며, 을 좋아한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과 함께 인간이 되기 위해 100일동안 동굴 안에서 마늘만 먹기를 자청했으나 호랑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고 한다.[2]

물론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은 사람에게 매일같이 사냥감을 주고 대신 제사를 지내거나, 자신이 잡아먹은 청년의 어머니를 대신 봉양하는 등의 훈훈한 에피소드도 있다[3].

호랑이의 눈썹은 인간으로 변장한 동물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신기한 도구 내지 약으로 이용되었다. 그 예로 작중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죽으려던 가난한 총각은 호랑이가 준 눈썹 덕에[4] 요리집을 차려서[5] 대박을 내거나[6][7] 어머니의 약재인 호랑이 눈썹을 구하러 온 효자에게 자신의 눈썹을 떼어준 호랑이 얘기 등이 있다. 그 외에도 호랑이 설화는 생각보다 많다.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자. 사실 우리나라엔 유독 호랑이 얘기가 많은데, 호랑이가 애증의 대상이어서 그랬던 듯. 시인 최남선은 '조선은 호담국(虎談國)'이라 한 바 있고, 중국의 대문호 루쉰도 조선사람을 만나면 꼭 '알고 있는 호랑이 이야기를 해 달라'며 졸랐다고.

동화에서의 이미지를 보면 꽤나 골초였던 모양으로,[8] 트라우마에서는 단군신화에서 호랑이가 처럼 참지 못한 것은 담배금단증상 때문이었다는 해석을 선보였다. 물론 한국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호랑이 담배 필 적'은 아무리 길어도 400년 미만인 것을 기억해두자.

3. 영광과 수난[편집]

3.1. 고대[편집]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져 있다. 그 시절에도 사냥감이었다는 이야기.

단군 신화에 등장한다. 웅녀가 될 에게 져서 한민족의 시조가 되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배하던 부족이 을 숭배하는 부족에게 밀려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주류가 아닌 다른 단군 설화에는 환웅이 백호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도 한다.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문무왕, 혜공왕, 문성왕, 헌강왕 때 등 여러 차례 호랑이가 경주에 출몰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무용총에 있는 수렵도 벽화에서 말을 탄 무사들이 활을 겨누며 호랑이를 추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호랑이를 고구려인들이 사냥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3.2. 고려시대[편집]

강감찬이 남경(지금의 서울)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을 때 인왕산에 서식하는 호랑이들을 모두 위협해서 쫓아내 버렸다는 설화가 있다. 그만큼 호랑이가 번성하고 호환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보고 1년의 반동안 호랑이를 무서워하며 지내며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의 제사를 지내며 남은 반을 보낸다고 평했다고까지 한다.

3.3. 조선시대[편집]

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호랑이가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심지어 세조 때는 창덕궁 후원까지 들어온 기록이 있다. 인왕산,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을 타고 들어온 것. 게다가 궁궐 후원은 사람이 쉽게 드나들 수 없으면서 나무까지 우거져 있어서, 그 안에서 새끼까지 낳아 길렀다고 한다. 17세기 초까지, 매년 잡히는 호랑이와 표범의 수가 1천 마리 내외일 정도였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는 서식환경이 점점 달라진다. 인구증가 및 면포 수요의 증가 등으로 인해서 농경지 개발이 늘어난다. 15~16세기에는 강변의 습지가 농토가 되고, 17~19세기에는 고원 평지나 완경사지가 화전의 대상이 되었다. 야생동물이 서식할 환경이 파괴되자 먹이를 잃은 호랑이들은 굶어죽거나 사람이나 가축을 덮치게 되었다.

헌데 호랑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고려시대와 달라졌다. 불살생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를 숭상한 고려와 달리 유교를 국가적인 바탕으로 하다보니 백성을 해치는 호랑이를 해로운 동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국가가 호랑이 사냥을 권장하게 된다. 서식지 파괴와 사냥으로 인해 호랑이 수가 감소하면서 1724년에는 호표피를 진상하는 제도가 폐지되었다.

헌데 이때 사냥 풍속을 보면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아오면 일단 관아로 끌려가서 형식적인 곤장을 3대 맞았다고 한다. 왜냐면 호랑이도 엄연히 산군(山君)인데 괘씸하게 왕을 잡았다 해서. 물론 풀파워로 때리는 건 아니고 톡 건드리는 수준. 그리고 나서 포상금을 받았다.

또한 국가적으로도 사냥을 했다. 조정이 직접 관리하는 호랑이잡이 특수부대, 착호갑사가 존재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고을에서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고을 수령이 장정들을 소집[9]해서 군대를 편성하고 호랑이를 추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호랑이 사냥을 위해서라면 고을 간 경계를 넘어서 군사를 움직여도 처벌받지 않을 정도였고, 인조반정에서 실제로 반정군이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력을 움직이기도 했다.

가죽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난이도 때문에 호랑이 사냥은 대부분 독이나 벼락틀, 함정을 사용해서 이루어졌지만 현대에 와서 임팩트가 강한 조선시대 호랑이 사냥법은 조총을 사용한 사냥이며, '백호'라 해서 흰 호랑이가 아니라 100관(=375kg)짜리 왕대범들이 간혹 잡혔다는 기록도 몇 있다.

1900년대 초 영국인 사냥꾼 포드 바클레이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고 뒤이어 화기를 몰수하기 이전에는 호랑이의 사냥이 잦았는데, 인접한 마을들의 활동적인 남성들이 대략 대여섯 명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더 많은 숫자는 창으로 무장해 하루에서 이틀 정도 인접한 야산들로 몰이를 나갔다.”고 한다. 구한 말 러시아 사냥꾼들도 조선 일대에서 호랑이를 사냥했는데, "조선의 포수들은 16세기식 구형 화승총으로 호랑이를 잡는다."라는 글을 남겼다. 적어도 구형 조총으로 호랑이를 잡는 것이 심각하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난이도는 절대로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4. 구한말[편집]

1800년대 말에 개항이 이루어지고 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후장식 라이플총이 들어오고, 신무기로 무장한 사냥꾼이 증가하면서 호랑이가 격감하게 된다. 게다가 일제가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면서 이국의 맹수인 호랑이에 욕심을 내고[10], 일본인들이 스포츠로 호랑이를 사냥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3.5. 일제시대[편집]

http://www.iusm.co.kr/news/photo/201202/237733_75183_2810.jpg
해수구제사업으로 종 존속에 치명타를 받는다. 이 시기에 유명했던 호랑이 사냥꾼으로 야마모토 타다사부로가 있다. 야마모토 정호군 참조.


3.6. 현대[편집]

1945년 해방 시점에서는 이미 잔존한 호랑이가 거의 없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이미 20년 이상 호랑이 목격 보고가 없었고, 북한 지역에도 만주와 인접한 평안북도나 함경도에만 일부 잔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남아 있는 호랑이가 있다고 해도 살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운좋게 현재 6, 7마리는 백두산 일대에 아직도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백두산 일대에만 서식하지 않고 압록강 너머 만주 지역까지 드나들 것이 확실하므로 그 점은 감안해야 한다. 한반도 내에 서식하던 호랑이는 소멸하고 그 뒤에 만주에서 유입된 호랑이일 수도 있는 것.

실제 일제 강점기 시대 사냥꾼들은 "만주범"과 "조선범"을 구분했는데, 만주범이 강을 건너 조선땅에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만주로 돌아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4. 생존?[편집]

남한 지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1918년 강원도 춘성군 가리산에서 수컷 1마리, 1922년 경상북도 경주시 대덕산에서 수컷 1마리,1924년에 강원도 중부지방에서 한 마리가 잡혀 사진이 찍힌 것이 남한 지역에서 잡힌 마지막 호랑이다. 북한 지역에서는 1946년 평안북도 초산에서 1마리가 잡혔고 그 이후에도 가끔 포획되거나 백두산 일대에서 생존이 확인되고 있다.

그 이후에도 1969년 충북 영동에서 호랑이가 출몰해 주민들이 공포에 떤다는 신문기사가 나는 등 불과 40년 전까지도 주변에 호랑이가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일부 나이 드신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직도 가야산이나 봉화군 등에 생존해 있다지만 확증이 없는 풍설에 불과하다.

호랑이가 아직 있다고 생각하고 찾으러 다니는 동물학자들이 있기는 한데, 간혹 산속에서 호랑이 배설물 같은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발자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 이상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호랑이 생존을 주장하는 쪽에서 증거로 제시하는 사례로 1989년에 DMZ에서 활동 중이던 미군이 레이더 촬영을 통해 야생 호랑이를 포착하여 지역 근무자들에게 호랑이를 조심할 것이라고 당부한 사실과 2000년, 러시아 전문가가 강원도 화천과 구룡령 계곡에서 호랑이의 생존 가능성을 확인한 뒤, 그 해 5월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 이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다는 일화 등이 제시된다. 여기에 강원도의 깊은 산골은 인적도 드물고 대형 고양잇과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꾸준히 나오는 곳이므로 생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가 야생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영역과 먹이의 양을 생각하면 이제까지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목격 사례나 호환 사례, 사진이 없을 수가 없다. 크게 양보해서 60년대 말, 70년대 초까지 생존한 호랑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번식을 통한 개체군 유지가 불가능한 단독 개체였을 공산이 크고, 2010년대 중반을 넘어선 현재까지는 다 늙어 죽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환경부가 호랑이를 '멸종'이 아닌 '멸종위기 1급 포유류'로 분류하고 있는 상황을 호랑이 잔존의 증거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승리일 뿐이므로 근거가 될 수 없다. 호랑이가 완전히 멸종되었다고 선언하는 행동은 호랑이를 국수로 여기는 민족감정을 건드리는 행위가 될 뿐더러 북한 지역에 남아 있는 호랑이는 우리 호랑이가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북한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영토권을 부정하는 정치적인 행위로도 해석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냥 뭉뚱그려서 "어디 한 마리쯤 있을지도 모르지"로 넘어간다고 보는 것이 옳다.

5. 복원?[편집]

이미 앞서 시행되었던 지리산반달곰, 소백산여우 복원과 같은 맥락으로 호랑이를 복원하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는데, 다른 동물들과 달리 호랑이는 활동범위가 매우 넓고 등산객과 주민에게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호환의 대부분은 발굽동물의 수가 적은 곳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데 순다르반스 같은 곳이 그 중 하나이다. 그곳은 45~50kg 이상 되는 동물의 수가 적고 물소나 삼바사슴이 멸종되어 먹이가 부족한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멧돼지가 요즘 많아져서 충분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호랑이가 정말로 나타나 살게 되면 일대의 멧돼지가 모조리 인접 지역으로 도망쳐버릴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수렵 시즌이 되면 수렵장이 설치된 시군 지역의 멧돼지는 얼마 안 가서 사냥꾼을 피해 인접 시군으로 도망간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사냥꾼의 경우 총을 쏘면 소리가 커 멧돼지들이 달아나는 범위가 크지만 호랑이의 경우 조용히 다가가서 사냥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준으로 달아나지 않는다.

일단은 같은 종인 시베리아호랑이를 들여와서 번식시키고, 광릉 수목원과 같이 잘 관리되는 넓은 숲에 일부 개체를 풀어놓아 관리하는 형태로 추진하고 있다.

2017년 1월, 한·중 산림협력회의를 통해 산림청이 중국에서 기증받은 호랑이 두만이와 금강이가 국립공원에 방사되었다. 추후 10마리 더 방사할 계획이라고 하며, 호랑이 방사지 인근 5000헥타르 가량에 펜스를 설치하여 주변 피해가 없도록 호랑이 서식지를 제한하였다. 관련 기사

2017년 2월, 방사되었던 금강이가 대전 오월드 동물원에서 백두대간 수목원으로 옮겨진 지 9일 만에 폐사했다. 사인은 만성신부전증으로 밝혀졌다.관련 기사 만성신부전증을 앓는 상태에서 대전에서 경북 봉화까지 장거리 이동하는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건강상태가 악화돼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날 금강이와 함께 옮겨진 두만이는 건강한 상태로 새 서식지에 적응하고 있다.

[1] 삼국사기에는 신라 서라벌 궁궐에 호랑이가 들어왔던 기록이 있고, 20세기 초에는 서남쪽 끝인 목포 인근에서도 포획된 사례가 있다.[2] 당연한 거지만 호랑이는 육식성이다. 대부분이 잡식성인 곰보다 오래 버티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다.[3] 전래동화에서 '효성스런 호랑이'란 재목으로 유래되었다.[4] 잡아먹지 않은 이유는 총각이 진정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5] 호랑이 눈썹 덕에 인간으로 변장한 동물의 본 모습을 알고 그 동물의 입맛에 맞게 요리를 내는 것.[6] 또는 가난한 사내가 호랑이에게 죽으려다가, 호랑이가 준 눈썹 덕분에 바가지를 긁는 아내가 돼지가 변신한 것임을 알아보고, 호랑이가 주선해주어 또다른 진정한 인간인 과부와 살림을 차려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7] 일본에서는 동일한 설화에 호랑이 대신 늑대가 등장하기도 한다.[8] 일단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필 적에'부터…[9] 조선시대 지방 수령은 자기 관할구역 내에서 행정권, 징세권, 재판권, 군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10] 당시는 물론이고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일본에는 야생 호랑이가 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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