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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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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60617_경기도BI_메인이미지.jpg


파일:대한민국 정부기 (구).png 대한민국 보건복지부 장관

문민 정부

제32대
이성호

제33대
손학규

제34대
최광


파일:United New Democratic Party logo.png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초대
오충일

제2대
손학규

해산
통합민주당


파일:external/www.gwangjuin.com/49938_88_4540.jpg 통합민주당 대표

신설합당
신당·민주당

초대
손학규
·박상천

당명변경
민주당


파일:democraticparty2008logo.jpg 민주당 대표

비상대책위원장
박지원

제3대
손학규

해산
민주통합당


파일:국회상징.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광명시)

제14대
윤항열[1]

제14대
손학규

분리
남궁진[A]
손학규[B]

통합
남궁진[A]
조세형[B]

제16대
손학규
[6]

제16대
전재희

파일:국회상징.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광명시 을)

분리
손학규[7]

제15대
손학규
[8]

제15대
조세형

파일:국회상징.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을)

제18대
임태희[9]

제18대
손학규

제19대
전하진


파일:external/info.nec.go.kr/100120967.jpg
덕산이형

이름

손학규 (孫鶴圭, Sohn Hak Kyu[10])

출생일

1947년 11월 22일 (70세)

출생지

미군정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11]

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학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신체

170~1cm, AB형

종교

개신교(장로교)

가족

배우자 이윤영
장녀 손원정, 차녀 손원평

소속 정당

바른미래당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4, 15, 16, 18

현직

바른미래당 상임고문

경력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12]
제14대 국회의원(경기 광명시)
제15대 국회의원(경기 광명시 을)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
제16대 국회의원(경기 광명시)
제31대 경기도지사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통합민주당 공동대표
민주당 대표
제18대 국회의원(경기 성남시 분당구 을)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
국민의당 상임고문


1. 개요2. 일생3. 손학규 징크스4. 2016년 정계 복귀 이후의 행보
4.1. 20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지원요청 거부4.2.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전 정계 복귀4.3. 거국중립내각 총리 후보론4.4. 국민의당 입당4.5. 송파을 출마 선언4.6. 또 다른 징크스
5. 평가6. 선거 이력7. 저서8. 가족9. 기타


공식사이트
팬카페 학규마을
페이스북
블로그
트위터

1. 개요[편집]

"타이밍의 마술사"


허핑턴 포스트#[13]


한국정치인. 전 학생운동가, 민주운동가, 교수.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과 제31대 경기도 도지사를 지냈고, 과거 민주당 대표를 역임하기도 한 거물급 정치인이다. 사실상 대통령, 국무총리 빼고 어지간한 자리는 다 해 봤다. YS키즈의 일원 중 한 명.(이명박, 이재오 등의 인물들도 이에 포함된다.)[14]

17대 대선, 18대 대선 모두 민주당계 정당의 유력 후보였으나 두 차례 모두 당내 경선 패배(2위)로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대 대선에서 당적을 변경하여 대선후보 경선에 나갔지만 탈락하며 대선 주요 후보로 거론된 11년, 3회의 대선 동안 한번도 후보도 되지 못한 정치가가 되었다. 경선 삼연이다 역대 없는 기록(...) 1997년 15대 대선 이래 야당 인생만 20년에 또 5년을 추가하게 되었다.[15]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강진군 만덕산에서 은둔하며 지냈으나, 꾸준히 복귀설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붙여진 별명이 '만덕산'이다. 이전까지는 만덕산으로도 들어올 수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가 되었다.

2016년 4월 총선 직전 더불어민주당의 공식 복귀 요청으로 정계복귀가 유력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결국 이후 복귀 타이밍을 못 잡았다. 더민주 총선 대패 후 당의 구원자포지션을 잡으려 했으나 총선승리를 하는 바람에... 그러다가 2016년 10월 20일, 공식적인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동시에 더불어민주당탈당하였고, 개헌론을 언급하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거국중립내각이 거론되자,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탄핵정국으로 인하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타이밍 관련 이슈는 아래에 별도로 정리된다.).

민주당(2008년)손학규계를 이끄는 정치계 리더 중 한명이기도 했다. 바른미래당 내에서는 사실상 고문 역할을 맡고 있으며, 정병국 등과 함께 민주계 보수의 핵심 인물로도 활동하고 있다.

갈짓자행보로 많은 비판을 받기는 해도 인성이나 능력면에서는 반대편 진영에서도 인정할 정도. 거꾸로 말하면 큰 인성 결함이나 논란이 될 사건이 없는데도 인기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2. 일생[편집]

항목이 길어져 분리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3. 손학규 징크스[편집]


파일:external/fe152d57d83c22000b7438810c9ecbb3bf612a37d3ea388a1beba38051b82b8a.jpg
파일:자타공인 타이밍의 마술사.jpg
정치 행보를 보일 때 심사숙고를 하는 편이다. 심사숙고 자체는 문제가 안 되는데, 결정을 내리는 시점을 전후해서, 더 큰 일이 터져서 행보 자체가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장고 끝에 둔 악수'가 하도 잦다 보니, 아예 '손학규가 움직이면 나라에 큰일이 터진다'고 할 정도까지 돼버렸다. 징크스를 넘어서 시류를 읽지 못하는 시류맹의 모습이라는 평가도 있다.

4. 2016년 정계 복귀 이후의 행보[편집]

4.1. 20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지원요청 거부[편집]

손학규의 정계 복귀 전략이 완전히 망가진 최대 원인

2014년 7.30 재보선에서 떨어진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아파트 대신 전남 강진군에 있는 만덕산 모처의 초막에 칩거하며 '말로만' 정계 은퇴를 한 것이라는 메세지를 남겨두었으나 20대 총선 당시 민주당의 선거 지원 요청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자신은 정계를 은퇴한 사람이라서 유세 지원 등 정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주변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총선에서 민주당국민의당이 표 분산으로 인하여 참패를 하게 되면 당시 야권의 대선 후보들이 대선 행보에 크게 타격을 입고 사실상 이 대선 후보 자리는 무주공산이 될 테니 그때 본인이 등장하여 사실상 추대에 가까운 형태로 당시 야권의 새로운 유일 대선 후보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 세간의 중론이다.

하지만 20대 총선은 우리나라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 편의 반전 영화였다. 100석 이상만 얻어도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열악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렀던 민주당수도권에서 압승하고 낙동강 벨트에서 크게 선전한 덕분에 123석을 얻어 원내 제1당에 등극하였고 국민의당도 38석을 확보, 목표치에 거의 근접한 성적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이 총선에 명운을 걸었던 문재인안철수의 입지가 더욱 더 탄탄해지는 결과가 나와버린 것이다.

만약 손학규가 본인의 본거지인 경기도, 그리고 더 나가서 수도권에서 열심히 선거 지원 활동을 했다면 수도권 압승의 공은 손학규가 상당히 차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손학규가 연고가 있거나 정치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수원 5개 지역구와 분당 갑/을을 민주당이 싹쓸이 하는, 상상하기 힘든 결과를 얻었는데 만약 손학규가 이 지역에서 열심히 유세 지원이라도 해줬더라면 이러한 엄청난 성과에 숟가락이라도 올려볼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즉, 손학규가 민주당 비대위가 보낸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문재인처럼 전국 지원 유세를 돈다거나 아니면 본거지인 경기도, 수도권 집중 유세를 했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당시 야권 후보들의 후보 단일화를 중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면 아마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은 문재인 단독 1강 체제가 아닌, 주류 진영이 지지하는 문재인과 비주류 진영이 지지하는 손학규의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이 소속되어 있었던 정당의 미래에 눈을 감고 개인의 정치적 진로만을 먼저 생각한 그의 판단이 결국 그가 2014년부터 짜온 모든 정계 복귀 계획을 망치고 대권을 향한 그의 길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어찌보면 인과응보로 불러야 할 일일 것이다. 자기가 몸담은 정당의 이익과 판세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한 스탠스를 취하다가 스스로 넘어져 앞길을 망친 셈이니까.

4.2.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전 정계 복귀[편집]

제20대 총선에서 야당의 승리로 정계 복귀의 타이밍은 제대로 꼬여버렸고, 2016년 10월 20일에 만덕산이 내려가라고 한다며 개헌론을 꺼내들고 정계 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런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24일에 최순실의 태블릿 보도가 터지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만덕산이 잘못했네 이 때부터 손학규의 별명은 만덕산이 되었으며, '만덕산'이라는 명사는 '무슨 결정을 하면 바로 큰일이 터져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말하는 정치적 용어가 되었다. 만덕산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4.3. 거국중립내각 총리 후보론[편집]

본인의 행보는 아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박근혜 대통령을 국정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박 대통령 대신 사실상 국정 전체를 지휘할 거국중립내각의 구성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힘입어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며 이에 자신의 소명이 있다면 총리직을 수락하겠다고 하였으나...

박 대통령이 이러한 사실상의 2선 후퇴 요구를 걷어차 버림에 따라 여론이 '그럼 탄핵을 시켜서 억지로라도 박근혜가 국정에서 손을 떼게 하라'는 쪽으로 바뀌면서 거국중립내각 이야기는 사라지고 여론의 관심 대상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4.4. 국민의당 입당[편집]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탄핵 정국이 되자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는 행보를 하며 새로이 입당할 당을 타진하였다. 손학규는 민주당을 나온 뒤부터 사실상 국민 투표를 통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긴 글렀으니, 차선책으로 그간 국가 지도자를 국민 투표를 통해 뽑아왔던 우리나라의 직선 대통령제 체제를 이원집정부제내각제로 바꿔서 대권을 잡자는 생각이었는지 '제7공화국론'을 펴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개헌론을 주창해 왔던 소위 '제3지대'에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때마침 손학규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내왔던 국민의당 호남계도 간선제 개헌을 주창해온 터라 이들의 러브콜을 받아서 국민의당으로 향하느냐 자신의 독립 세력을 구성하느냐가 관심을 모았다. 국민의당의 호남계 의원들은 당내에 안철수에 대항할 만한 대선 주자로 또한 안철수계에서도 경선 흥행을 위한 카드로서 손학규를 1순위 영입 대상으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2017년 2월 초 손학규는 '국민주권개혁회의'라는 조직을 창립하고 의장으로 취임한 뒤 2017년 2월 17일 국민의당과 합당하였다. 이것은 신당 창당에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던 안철수가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민주당과 합당하는 모양새로 민주당에 입당한 것과 비슷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에 의해 구속, 수감 되었다. 게다가 어차피 며칠 전부터 북한에서 미사일을 날려보내고 김정남이 죽어버리는 등 북한발 말썽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여론은 손학규에게까지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

국민의당에 입당해서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했는데 경선 룰을 가지고 안철수 측과 설왕설래가 있었다, 어쨌거나 다들 예상하는대로 3월 25일 국민의당 텃밭인 광주 전남 제주 권역 경선에서 안철수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면서 대권의 길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룰조차도 본인의 강력한 요구대로 현장투표가 반영되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안철수가 후보가 되어 그는 다시금 쓴잔을 들이켜야 했으나 그가 경선 중간에 제기한 이른바 독수리 5형제 프로젝트, 안철수 측 차떼기 의혹은 안철수가 대선후보에 오르면서 이른바 '조폭 차떼기 의혹'으로 불붙어 안철수를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이쯤되면 사실상... 내가 국민의당에 입당한 것은 더민주 승리를 위해서다!!!

4.5. 송파을 출마 선언[편집]

2018년 5월24일 국회의원보궐선거 바른미래당 송파을 후보 공천에서 안철수계 손학규와 유승민계 박종진을 두고 당내 치열한 싸움이있었고 손학규는 자신이 죽는다[16]는 마음으로 출마할 것이다고 하고 강력하게 출마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24일 미 트럼프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북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성명때문에 전격 취소한다고 밝혔다.[17] 트럼프 기자회견

그리고 26일 손학규는 당내에 싸움이 너무 일어나는거 같다며 불출마선언을 했다. 그런데 그날 또 트럼프대통령이 북미회담을 그래도 할것이라는 투의 메세지를 던졌고, 그 다음날 판문점 북측 구역 통일각에서 2018 2차 남북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또다시 묻혔다.

4.6. 또 다른 징크스[편집]

민주계 정당으로 옮긴 후 대선 후보 경선에 3회 참여했는데, 자신은 경선에서 탈락하고 경선에서 손학규를 이긴 후보는 본선에서 낙선하는 징크스가 있다.

이 정도면 경선에 참여하는 게 더 큰 일 같다

5. 평가[편집]

"자신만의 브랜드를 보여주기에 부족했다”

2007년 1월 10일 경향신문 "손학규 인터뷰 평가"#

경력이나 능력은 출중한데, 정치적 감각이 떨어지는 편이다. 총리나 장관 등 임명직 관료에 맞는 사람이 선출직을 노리다 보니 생기는 비극(?)의 주인공. 사실 민주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만큼 보수층으로의 확장성도 있고,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도지사를 역임했다는 점에서 수도권에서의 득표력도 기대해볼 만하며, 도지사장관 재직 경험을 통해 행정 능력까지 입증했다는 점에서 '저평가 우량주'로 평가받아왔다.

손학규는 대선을 3번 도전했으나 3번 모두 실패했는데, 진짜 기회는 2007년과 2012년의 두 번이었다. 2007년에는 보수계 정당에서 이명박 박근혜 양강구도에서 밀리고, 다시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여 유력 주자로 부상했으나 황당하게도 친노계도 아닌 조직표를 끌어모은 정동영에게 밀려버렸다. 2012년의 경우는 더욱 허망한데, 2008년 총선에서 충북의 승리 등 '질서있는 퇴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재부상한 친노계에게 장외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2010년~2011년 민주당 대표를 지내며 2011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험지' 분당을 당선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11월 재보궐 선거에서 안철수가 후원한 무소속 박원순 후보와, 장외에서 세를 끌어모은 친노계에게 모두 주도권을 내주므로서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에도 불구 문재인에게 큰 폭으로 밀려버리고 만다. 마지막 시도에서는 2016년 국민의당 창당과 총선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므로서, 대권주자로서의 존재감이 실종되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초창기부터 합류해서 창당 주역으로 활동하는 게 대권 주자로서의 레이스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18]

당을 두 차례 이적하면서 당내 세력 기반이 강한 편이 아니어서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손꼽힌다. 썰전에서 이철희 소장이 말하기로는, 손학규는 대통령감이지만 정치에 무른 편이라고 한다. 이유는 너무 신사라서 즉 정치 투쟁에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 20년 있었던 사람에게 신사라서 투쟁에 밀린다는 말은 결국 칭찬이 아니다.[19] 제대로 말하면 당내의 여론을 주도하는 코어 지지층에 인기가 부족한 스타일이다. 이제 70을 훌쩍 넘은 고령이라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보수층과 수도권에서 먹히는 강점이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2014년 7.30 재보궐 선거새누리당의 신인 김용남 후보에게 깨졌다는 점[20]에서 실제 확장성에 의문이 있기는 하다.

이상하게 본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화제를 일으키는데 실패하는 사례가 매우 많다. 20대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를 거둔 뒤에야 정계 복귀를 시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나마 손학규를 두둔하는 입장에서는 민주당 시절에도 사실상 이적생 신분이었으며, 너무 거물이라 호남계한테 이용만 당하고 견제를 심하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적생' 손학규에게 선택지는 원래부터 적었다.

잦은 수준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두 차례 양대 정당을 떠났기 때문에, 신뢰를 얻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일명 경포대 발언)으로 비판하고는 정작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민주당 최대지분의 친노계를 자극했다는 것이다.[21] 어쩔 수 없이 건너온 철새정치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 교체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가 점점 오르고, 사망 이후로는 거의 절정으로 오르면서 "노 전 대통령께 결례를 범했다"고 사과를 했지만, 근 8년 간의 꾸준한 행보에도 국민의 당으로 이적 할 때까지 친노계의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명박도 권좌에서 내려온 뒤에, "그 사람도 참.. 한나라당에 남았으면 대권후보까지 되었을 건데.. 괜히 옮겨가지고.."라는 말까지 했다.[22] 다만 한나라당에서 나올 당시의 손학규는 이명박의 친이계와 박근혜로 대표되는 TK보수파 양쪽 모두에게 적대당하며 한나라당 내에서 정치적으로 끝장난 상태였다. 일례로 이명박은 손학규의 탈당에 대해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라고 냉소했을 정도. 그러므로 훗날 이명박이 한 말은 "나한테 숙이지, 왜 탈당했느냐."' 정도의 조롱으로도 볼 수 있다.[23][24]

20대 총선 이후 최악의 타이밍만 밟는 행보를 거듭하면서 정말로 정치판에서 아무 것도 아닌 수준으로 급전직하했다. (당시 적극적으로 유세를 안 한 이유가 패배 시 그 책임을 문재인안철수한테 뒤집어씌우고 다시 돌아오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박근혜 탄핵 이후에는 "촛불은 개헌촉구. 반대자는 권력에 눈멀었다."같은 개헌을 계속 주장했으나, 국민의당에 기웃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반기문까지 만나는 등 지나친 갈짓자 행보 때문에 이미지는 물론 존재감까지 크게 사라졌다.

2017년 대선을 앞둔 국민의당 후보 경선에 참여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인 당의 지휘자인 박지원 대표에 의해 페이스 메이커로 발탁된게 아니냐는 의심을 했는데, 경선룰 재조정 주장이나 안철수 차떼기 의혹 제기 등의 행적을 보면, 본인은 실제로 국민의당에서 진심으로 한번 부딪혀 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이스메이커로 나온 거라면 저런 폭로성 비방을 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그나마 총선 직후에는 언론에서 20대 총선 이후 더민주 계파분석을 통해 손학규계는 14명[25] 정도가 꼽혔다. 실제로 손학규 쪽은 자신이 탈당하면 자기를 따라 민주당을 나올 정치인이 한 10명에서 20여명 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의 엇박자로 실제로 탈당한 손학규계 현역 정치인은 이찬열 의원과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두 명 뿐이었고, 일부 손학규계 인사들은 이제 문재인 대선 캠프에 잔류해버렸다. 안정적으로 기반이 다져지고 여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할 확률은 애초에 적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당내 결속을 위해 손학규계를 대폭 끌어 안았고#,결국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끝이 나면서 사실상 손학규계는 와해되었다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능력이나 청렴성에서는 비판을 받지 않는다. 친문 지지자들 일각에서조차도 그가 줏대없이 왔다갔다 하지만 않았어도 문재인 정부 내 요직(총리 등)을 맡을 수 있었을 거라면서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 손학규는 여러 차례 거국 내각의 총리 등으로 거론되었으나 실제로 그 기회가 오지는 않았다. 먼저 정계 은퇴한 서울대 후배 유시민 말 따라 아파트에서 편안히 살면서(...) 정치외교학 교수나 원로로서 존경받으면서 명예롭게 사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할지도. 하지만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선대위원장으로 적극 정치행보에 임하는 것을 봐서는...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3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광명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41,683 (44.9%)

당선 (1위)

[26]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광명 을)

신한국당

31,544 (42.65%)

당선 (1위)

[27]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한나라당

1,303,340 (45.69%)

낙선 (2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광명)

한나라당

65,887 (47.35%)

당선 (1위)

[28]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한나라당

1,744,291 (58.37%)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통합민주당

31,530 (44.76%)

낙선 (2위)

2011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성남 분당 을 국회의원)

민주당

41,570 (51.67%)

당선 (1위)

[29]

2014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수원 병 국회의원)

새정치민주연합

27,979 (45.04%)

낙선 (2위)

[30]

7. 저서[편집]

8. 가족[편집]

큰 딸인 원정 씨는 서강대 영문학과를 나와 연극을 하고 있고, 둘째 딸 원평 씨는 서강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해 영화감독을 하고있다.

9. 기타[편집]

  • 친러적이다. 미국, 중국 등에 치중된 한국 외교에서 러시아와의 친교도 필요하다고 모스크바에서 주장했었다. #

  • 정계의 잠룡 혹은 거물이라고 불리는 인물답게 고정적인 지지층이 있으며 지지자들의 손학규를 향한 마음은 일편단심이다. 매 경선에서 고배를 마셔도 '우리의 가슴 속 영원한 대통령은 손학규 의원님'이라며 위로와 응원을 할 정도.

  • 디시인사이드 설립자인 김유식에게 지지를 받기도 했다. 현재도 지지하는지는 불명이다.

  •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에 공식 초청을 받아 참석했었다.

  • 이명박 前 대통령 및 이재오 늘푸른한국당 대표와 6.3 항쟁때부터 알고 있어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오히려 같은 신한국당-한나라당 시절에는 이 세 사람 모두 상호간에 허물이 없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 이재오는 이명박을 도우면서 친이계의 좌장이 됐고, 손학규는 민주당계 정당의 당적으로 이동하면서그러나 다시 보수정당 소속이 되었다 예전보다 사이가 멀어졌지만 이명박과 이재오도 손학규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상당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파일:LMB-LJO-SHG.jpg

  • 손학래 철도청장, 한국도로공사 사장과는 항렬이 같긴 하나, 친형제는 아니다. 의외로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 듯.

  • 5월 21일 (2018) 바른미래당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 및 전국 공천자 대회'를 열었는데, 바른미래당 중앙선대위원장을 맡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이날 문재인 정부 경제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는 일장 연설을 했는데, 바른미래당이 아닌 바른민주당이라는 발언을 했다.


  • 훤칠한 외모에 반해 시골 이방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또 이분 목소리와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1] 임기 중 작고[A] 2.1 2.3 광명시 갑[B] 3.1 3.3 광명시 을[6] 의원직 사퇴[7] 광명시[8] 의원직 사퇴[9] 의원직 사퇴[10] 손학규는 표기상 이니셜이 HK가 되어야 하나 본인은 HQ를 쓴다. Kyu /kju:/와 발음이 같은 Q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HackQ SONA-Q 때문에 안티들에게는 아Q정전에서 따온 '하Q'라는 멸칭으로도 불린다. 반면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규형, Q형, Q아재(...) 등으로도 불린다.[11]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12] 당시 시험문제로 대한민국 정치에 관해 논하여라를 출제하여 학생들의 멘붕을 이끌었다.[13] 무언가를 발표할 때마다 그보다 강한 사건이 잇달아 터지며 묻혀 생긴 반어적 별명이다.[14] 다만, 노무현, 손학규, 이명박, 이재오, 이회창은 김영삼이 발탁하긴 했으나, 이들은 김영삼 직계보다 외부 영입인재로 분류돼기에 상도동계가 아닌 YS키즈로 분류한다. 김무성 외에는 강삼재, 김덕룡 등이 대표적인 상도동계 인사이다.[15] 대통합민주신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입당하지 않아, 엄밀한 의미의 여당이 아니었다.[16] 사즉사의 마음으로 나간다고 표현했었다[17] 트럼프 기자회견에서 언급된 최근 북한의 성명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나온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성명이다.[18] 손학규가 만덕산에서 칩거하지 않고 초창기부터 국민의당 창당 주역으로 활동했다면 안철수에게 지지율이 밀리더라도 크게 밀리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19] 비슷한 시기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정세균 전 국회의장의 사례도 참고할 만 하다. 정세균 역시 누구에게나 알려진 정계의 신사로서 여야 어느 쪽에서건 적을 만들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국회의원 최대 영예인 국회의장 직을 지내고도 관례인 정계은퇴에 나서지 않고 계속 정치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정세균의 지역기반이 호남이며, 정당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사'형 정치인의 생존 방식은 결국 대통령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20] 물론 상술한 대로 수원 병 선거구는 남평우 - 남경필 부자의 근거지였던 곳이라 어느 야당의 인물이 출마했어도 이기기 힘든 지역이었다. 게다가 뜬끔없는 전략공천도 겹치고. 그러나 새누리당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다른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후보가 당선되며 마침내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입성하게 됐다.[21] 노무현 대통령 본인도 회고에서 "한나라당에서 나를 가리켜 경포대라고 했다. 나도 예전에 사실을 잘못 알고 비판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고의로 사실을 왜곡해서 남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을 한 분이 당을 옮겨 이쪽으로 건너왔다. 할 말이 없었다"라고 대놓고 비판을 가했으며, 2007년 대선 당시에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 나선 유시민은 손학규를 "보따리 장수"라고 비판했다.[22] 실제로 이명박은 박근혜에게는 탄핵 소추 가결 직후, '본인이 뭐라고 하든 전 국민들이 다 알고 있으니 순리대로 따르면 된다' 고 비아냥대며 박근혜를 비난한 바 있지만, 손학규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드러내면서 상당한 아쉬움을 표현했다.[23] 물론 손학규가 탈당하면서 이렇다할 비박 주자가 사라진 이명박으로서는 박근혜에서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아쉬웠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정말 손학규가 대권 후보가 될 수 있었느냐는 다른 문제.[24] 만약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아었다면, 2007년 대선 경선에서 4위로 사실상 꼴찌를 했던 홍준표의 현실이 손학규의 미래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에도 차기 대선 주자로 이재오와 정운찬같은 본인과 성향이 잘 맞으면서 친밀한 최측근을 지지했던 만큼, 손학규가 홍준표처럼 친이계와 같은 배를 탔다고 해도, 손학규가 실용정부말기 인기도가 떨어진 친이계와 강력한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친박계 사이에서 투쟁하면서 본인의 확고한 지지층을 만들어 차기 대선주자로서 입지를 강력하게 확보하지 못했다면, 한나라당의 차기 대권주자가 돼기는 커녕 계파도 만들지 못하고 당시 당 대표 체제가 무너지며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차기 대권 주자의 꿈을 접었던 홍준표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나중에 홍준표가 대선에 나가고 다시 당권을 잡긴 했지만 그건 보수 진영 자체가 궤멸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의 일이니...[25] 해당 링크는 일요시사 기사지만 그외 언론 기사들에서도 손학규계의 숫자는 엇비슷했다.[26] 전임자 윤항렬 의원 작고[27] 1998.4.6 사퇴 (경기지사 선거 출마)[28] 2002.5 사퇴 (경기지사 선거 출마)[29] 전임자 임태희 청와대 대통령실장 임명으로 사퇴[30] 전임자 남경필 의원이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로 사퇴. 이후 정계 은퇴 선언[31] 이 "저녁이 있는 삶"은 상당히 성공적인 구호였으나 역시 후보 본인의 이미지 상승에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