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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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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Sanctus Maximilianus Maria Kolbe
폴란드어: Święty Maksymilian Maria Kolbe(앞의 폴란드어 시비엥티(Święty)는 번역시 '성(聖)'이라는 뜻의 한국어다.)

1. 개요2. 생애3. 체포4. 순교5. 시성6. 그 외
6.1. 관련문서


파일:external/www.stfccm.org/0814Saint%20MAXIMILIAN%20KOLBE%205.jpg

1. 개요[편집]

1894년 1월 8일 폴란드 즈둔스카 볼라 출생, 1941년 8월 14일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선종.

본명 라이문트 콜베(Rajmund Kolbe). 가톨릭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프란치스코회)의 수사신부[1]이자 순교성인으로 축일은 8월 14일. 저널리스트, 정치범, 아마추어 무선(HAM), 약물중독자, 가족, 낙태근절 운동의 수호성인이다.

미디어를 활용한 선교의 선각자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910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했고, 1911년 첫 서원을 했다. 1914년 로마에 유학을 가서 종신서원을 하고 성모신심을 표현하고자 수도명에 '마리아'를 덧붙였다. 1912년 로마 대학에서 철학, 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했으며, 1915년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프리메이슨에서 반 교황 캠페인을 벌이자 이에 대항하여 6명의 동료 수사들과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소책자와 월간지를 출판하여 그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이때 콜베 수사와 그의 동료 수사들은 교리문답과 짧은 기도 소책자, 23만 부수의 일간지, 백만 부수가 넘는 월간지[2]를 출간하였기에 이것이 저널리스트의 수호성인의 근거가 된다.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9년 폴란드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라디오 방송국과 출판 사업에 참여하여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 1930년 동양 선교를 위해서 일본을 방문하여 6년간 머물렀다. 귀국한 뒤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3. 체포[편집]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c/Kolbe-szombathely.jpg/600px-Kolbe-szombathely.jpg

1939년 폴란드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었다. 이 때문에 콜베 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콜베 신부는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유태인을 포함한 전쟁 난민들을 숨겨주는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1년 2월 17일, 콜베 신부는 다른 4명의 신부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나치는 유태인만이 아니라 폴란드의 유력 인물[3]도 체포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소장은 네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서 퇴회한 前 수도자의 명의로 제출된 것이었지만, 그는 독일어를 읽을 수도 없는데도 고소장은 게슈타포가 위조하여 독일어로 써 있었다. 前 수도자는 강압을 받아 억지로 사인만 한 것이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죄수 번호는 16670.

4. 순교[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rl_Fritzsch_at_Auschwitz.jpg
카를 프리취 사진.

1941년 7월 말, 이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나오자 수용소 지휘관이자 SS중위인 카를 프리취[4]는 14A동 블럭 사람들 중 10명을 무작위로 끌어냈다. [5]그리고 그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이 10명 가운데 폴란드군의 중사였던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Franciszek Gajowniczek)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요브니체크는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는 "나는 가톨릭 신부이며, 가요브니체크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라고 자청하여 나섰다. 프리취 중위는 이를 승락했고 콜베 신부와 9명의 죄수가 지하감옥(일명 '13호 감방')에 갇혔다.

프리취는 그들을 즉시 처형하지 않고, 물과 음식을 일체 주지 않고 아사하도록 계속 가두어 두었다. 일반적으로 아사형에 처해지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감방이니 그야말로 상상초월인 상황. 그러나 콜베 신부는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때때로 감옥의 모습을 보러 온 통역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성가가 들려, 마치 감옥이 성당처럼 느껴졌습니다."라고 증언했다.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범죄자 보프를 시켜서 독약인 페놀을 주사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팔을 뻗었습니다. 나는 보다 못해,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밖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감시병과 보프가 나간 뒤 다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벽에 기대앉아 눈을 뜨고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의 증언

 
콜베 신부의 시신은 성모승천대축일 날짜인 8월 15일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다. 희한한 점 한 가지는, 콜베 신부는 생전에 "성모승천대축일에 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5. 시성[편집]

1971년 10월 10일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선언되고 시성되었다.

성공회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20세기의 순교자 10인의 조각상 가운데 1명으로 선정되었다.(여담으로 그 10인 중에 어쩐지 아프리카인이 많다. 심지어 중국인도 1명 있다. 정확히는 묘족.)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가요브니체크는 1944년 8월 25일 까지 아우슈비츠에 있었고, 다른 캠프로 보내졌다가 연합군에게 해방되어 생존자가 되었다. 그의 아내 엘레나는 살아 있었지만, 아들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소련폭격으로 사망했다. 가요브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9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콜베의 사랑과 영웅적인 행동이 알려지도록 세계 각지에서 강연했다. 시복식과 시성식에도 참여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시복 시성과 관련된 기적은, 1948년 7월 결핵을 앓던 안젤라 테스토니와 1940년 8월 정맥 석회화 경화증을 앓던 프랜시스 라이너가 콜베 신부에게 전구를 청하여 병이 치유된 일이다.

6. 그 외[편집]

1930년 일본으로 가기 전 부산광역시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동생에게 편지를 남겼다.

(전략) 한국은 내가 전혀 모르는 나라였다. 그 경치를 구경하고 또 구경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부산은 한국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여기서 놀라운 일을 알게 됐다. 기차를 내려 배에 오르기 전에 4시간이나 자유로운 시간이 있어서 미사를 드리고 싶었으나, 성당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순경이 한국에 성당은 3개밖에 없고[6] 부산 시내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6개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서는 그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거룩한 당신 아들의 나라를 세우실 것인가!

1930년 8월 3일,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이원복의 만화 사랑의 학교(만화)의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다만 오류가 많으므로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6.1. 관련문서[편집]


[1] 수도사제, 성직수사라고도 한다.[2] 1922년 처음엔 5,000부로 시작한 잡지가 3년만에 1만부, 또 2년이 지나 5만부, 13년만인 1935년에는 70만부를 거쳐 1940년 체포 직전에는 100만부나 발간되었다.[3] 유태인이나 집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비단 유력 인물들 뿐만이 아니라 성직자 등의 종교인, 교사, 기자, 학생, 학자 등의 인텔리들도 당시 단체로 살해당했다. 웃긴 것은 '금발의 푸른 눈', 즉 당시 나치가 홍보하던 전형적인 아리아인의 모습을 한 아이들은 유괴당해 나치에 충실한 독일인으로 길러졌다는 것이다. 이 당시 이런 저런 이유로 살해당한 사람은 폴란드 인구의 무려 15%. 그래서 전후 폴란드는 독일을 그야말로 씹어먹을 듯이 증오했다. 빌리 브란트바르샤바의 위령비 앞에서 무릎 꿇기 전까지는. 하지만 지금도 폴란드의 독일 인식은 좋은 편이 되지 못한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러시아-폴란드-독일은 상당한 앙숙 관계였으니. 영락없는 중국-한국-일본 관계다.[4] Karl Fritzsch 1903~1945. 이전 버전에서는 이 자가 연합군에 체포되어 찌질하게 굴다가 처형당했다고 쓰여져 있었으나, 재조사 결과 프리취는 5월 2일 이후로 실종된 것으로 처리된 상태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사망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나 소련 측에서는 영국 정보부 MI6이 그를 노르웨이로 끌고 갔다고 주장하였다. [5] 당시 프리취의 처벌 방식이었다. 탈주자가 생긴 동의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세우고 10명을 내키는대로 골라 처형장에 보냈다.[6] 사실 이것 자체는 사실과 다르다. 이미 부산에는 범일동에 부산 본당이란 한 성당(부산진 본당)이 존재했다.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공소도 상당했다. 다만 명동성당 같은 규모의 알려진 성당이 많지 않다는 의미였거나, 부산진 본당이 관리하는 지역 내에서 본당이 거제시 옥포, 밀양시 삼랑진 셋 뿐이라는 것이 잘못 전해졌을 수는 있다. (울산광역시의 언양(현 울주군) 본당은 별개 분리.) 여하간 범일동 성당이 걸어서 최소한 45분 거리(3km 내외)로 떨어진 만큼, 주어진 시간 동안 콜베 신부 일행이 미사를 드리기는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성공회 성당인 대청동 성당이 부산역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용두산)에서 키 큰 '관광명소' 역할을 하고 있었던 점도 가톨릭 성당의 존재감을 낮추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