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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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역대 황제

황제 책봉

초대 공종 강덕제 푸이

왕조 멸망

파일:attachment/Xuantong.jpg[1]

묘호

헌종(憲宗)[2]
공종(恭宗)[3]

시호

만주식

-

중국식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예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4]

한호

거훙거 요소 한
(:ᡝᠯᡥᡝ ᡨᠠᡳᡶᡳᠨ ᠾᠠᠨ, Gehungge yoso Han)

칸호

휴브트 요스 칸
(:ᠧᠨᠺᠬ ᠠᠮᠭᠠᠯᠠᠨ ᠻᠠᠭᠠᠨ, Хэвт Ёс Khaan)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푸이
(愛新覺羅 溥儀, 애신각라 부의)

연호
(청)

만주어

거훙거 요소

중국어

선통(宣統)

몽골어

-

연호
(만주국)

만주국 집정

대동(大同)

만주국 황제

강덕(康德)

생몰 기간

양력

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5] (62세)

재위 기간
(청나라 황제)

양력

1908년 12월 2일 ~ 1912년 2월 12일 (3년 72일)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11일)[6]

재위 기간
(만주국의 집정)

양력

1932년 3월 9일 ~ 1934년 2월 28일 (1년 357일)

재위 기간
(만주국 황제)

양력

1934년 3월 1일 ~ 1945년 8월 15일 (11년 170일)


1. 소개2. 생애
2.1. 3살배기 황제2.2. 복벽과 실패2.3. 괴뢰국 황제에서 평민으로2.4. 사망
3. 개인사4. 대중매체에서

1. 소개[편집]

영화 마지막 황제를 통하여 그 드라마틱한 삶이 알려지며 유명해진 인물. 중국사 최후의 군주.

신해혁명으로 축출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의 초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만주족의 마지막 군주.[7] 불과 우리나라 나이 3살에 즉위했다가 불과 3년 만에 퇴위했다. 성인이 되면서는 괴뢰국의 군주로 옹립되어 있다가 종전 후 전범으로 몰려 옥살이도 했다.

정복 왕조의 황제였지만, 그가 할 줄 아는 만주어는 '일어서'라는 의미의 '일리' 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청나라 황족이나 귀족 계급인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묘호2004년에 공종(恭宗)으로 결정되면서 비공식적으로 복위되었다. 중국에서는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황제는 다음 왕조가 묘호 등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폐제로 인정되어 공식적으로는 황제 취급을 하지 않는다. 청나라 다음의 중국은 다들 아시다시피 공화국을 기반으로 한 중화민국이었고,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선통제의 묘호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실 자금성에 선통제를 살려둔 이유 자체가 청나라의 황제를 외국 황제로 둔다는 명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시호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8]라고 부른다.

한호(만주식 군주 칭호)는 거훙거 요소 한.

는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 溥儀, 애신각라 부의). 만주어 발음으로도 푸이고 중국어 발음으로도 푸이이다.[9][10]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도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푸이의 이복 동생 푸런(溥任, 1918년 8월 17일 ~ 2015년 4월 10일)은 이름을 한족식 이름인 진유즈(金友之, 김우지)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 씨로 함께 바꾼 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

연호는 만주식으로 거훙거 요소, 중국식으로 선통(宣統). 만주국 시대의 연호는 강덕(康德)

한때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경우도 있었지만, 한 개인으로 보자면 거대한 제국의 황제에서 일개 정원사가 되어 자신이 살았던 자금성에서 근무하는 등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일생동안 신해혁명, 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용케 살아남았다.(…)그냥 목숨이 끈질긴가 보다

2. 생애[편집]

2.1. 3살배기 황제[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0px-PuYi_1909.jpg
아버지 순친왕과 선통제(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어린이)

청나라의 11대 황제였던 광서제의 이복 동생인 순친왕(醇親王, 1883년 ~ 1951년) 아이신기오로 짜이펑(愛新覺羅 載豊)의 아들로 태어났다. 흥미로운건 순친왕의 생몰년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도 중화인민공화국국공내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 중화민국에 선양한 사실상의 주체였고, 만주국을 반대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도 협조했기에 대접받은 편이었다. 1924년까지는 사실상 자금성의 가장 웃어른으로 예식을 처리했고, 톈진으로 잠깐 옮겼다가 이후 쭉 베이징에 살았다. 이 때문에 일제에게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태후에 의해 3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서 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 급사했기 때문에 섭정은 아버지인 순친왕과 광서제의 황후인 효정경황후 예허나라씨(孝定景皇后 葉赫那拉氏)가 선통제가 집권하면서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되어 공동으로 맡았다. 여담으로 어린 나이인 그가 긴 즉위식을 지루해하며 칭얼거리자 그를 품에 안고 있던 순친왕이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라고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청나라가 곧 망한다"는 말과 발음이 비슷했는데 그 말대로 그의 제위는 오래가지 못하고, 1911년신해혁명으로 1912년 2월 12일 위안스카이가 푸이의 퇴위를 재촉하며 제시한 조건에 태후인 융유 황후가 서명을 하는 것으로 폐위된다. 민심의 혼란을 우려한 것인지 한동안은 협약 내용에 있던 대로 황제의 예우는 그대로 유지되었기에, 푸이는 궁전인 자금성 안에서만 청나라의 황제로써 지내게 된다.

2.2. 복벽과 실패[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7px-Puyi_%281922%29.jpg
중화민국 시절의 푸이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4년 11월 23일 복벽 정치 징치령을 통해 복벽파를 탄압하다가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급사했다. 이후 남방에는 탕지야오, 루룽팅 등의 군벌들이 할거하고 북방에서는 직계와 환계가 위안스카이의 빈자리를 놓고 물어뜯고 싸우면서 푸이의 운명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1916년부터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 격화되자 장강순열사 장쉰, 전 국무총리 쉬스창 등은 선통제를 복위시킬 것을 주장했는데 1917년 5월, 돤치루이 탄핵으로 내전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인 급박한 상황이 되자 장쉰이 정치를 중재한다는 목적으로 베이징으로 상경, 국회와 약법을 해산한 다음에 장훈복벽을 단행하여 1917년 7월 1일 선통제를 복위시켰으나 국무총리 겸 토역군 총사령관 돤치루이)의 반격으로 얼마되지 일수로 12일 만인 7월 12일에 도로 퇴위했다.

1924년 9월,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직예군벌 소속이었던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북경정변을 일으켜 국민군 1군 사령관에 취임, 베이징을 점령하고 핍궁사건을 일으켜 <수정청실우대조례>를 체결하고 청황제의 존호를 폐지하여 푸이와 청황실을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이 결정으로 중국은 돤치루이, 장쭤린 류의 푸이 복위파와 폐위 찬성파가 격렬한 대립을 벌였다. 어쨌거나 베이징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도 딱히 푸이를 도로 자금성에 데려오진 않았다. 푸이는 순왕부로 돌아가 기거하다가 1925년 2월 25일 텐진의 일본 공사관으로 이주했다.

1928년 6월 8일, 국민당의 2차 북벌국민혁명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어 1928년 7월 3일부터 7월 11일까지 장쭝창의 부하 출신인 군벌 쑨뎬잉(손전영)은 국민혁명군에게 투항한 직후 베이징 동쪽에 위치한 동릉을 대대적으로 도굴했다. 이 사건으로 푸이는 격노했고 일본과 손잡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건에 대해 자세한 것은 # 이후 1931년 11월까지 톈진의 조계지에 거주하였으며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한 이후 일본에서 푸이를 옹립하여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장제스는 1931년 11월 2일 톈진에 거주하던 푸이에게 과거 북양 정부와 청나라 황실이 맺었던 협약을 다시 이행하겠다고 제안했다. 다시 자금성에 살게 해주고 품위 유지 비용을 대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난징 국민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었던 푸이는 이를 거절하고 11월 8일 톈진사변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틈을 타서 11월 10일 톈진을 떠나 일본에 합류했다.

이 시기 선통제에 대한 여론에 대해 기록한 저술들은 좀 엇갈리는 게 많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 따르면 베이징 시민들은 폭죽을 쏘며 푸이의 추방을 기뻐했다고 하는데, 청실 복고론자였던 레지날드 존스턴은 중국 내부에서 군주정의 인기가 드높았다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 당시 중국 남방과 북방의 분위기도 다르고 시각도 워낙 치열하게 대립해서 상충되는 기록이 남아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남방의 공화주의자들은 푸이를 처형해야 한다는 둥 과격한 주장을 일삼았고, 레지널드 존스턴은 만주국 건설조차 동방의 여명 운운하며 찬양할 정도로 좀 과도하게 군주정을 지지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uyi_and_Wanrong.jpg
톈진 망명 시절의 푸이와 완룽 부처

2.3. 괴뢰국 황제에서 평민으로[편집]

파일:external/images.china.cn/00016c8b41770d0bcc2859.jpg

1934년 3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푸이


이후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집정(執政, 최고 통치자)이 되었다가 1934년부터 황제가 되었다. 물론 철저한 일본의 꼭두각시였다. 한 예로 푸이 개인은 전통적인 청나라 황실 출신답게 불교를 숭상했음에도 일본의 강압으로 신토가 만주국의 공식 국교가 되었다. 다른 예로 도쿄에 가서 히로히토 덴노를 만났을 때는 날씨가 맑은 것도 덴노 덕분이라는 식의 찬양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의전상으로는 여하간 만주국은 일본의 가장 친한 우방으로서 의전 역시 일본 덴노 다음이었다. 일부 묘사처럼 일제에게 아주 핍박을 당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하간 푸이는 꼭두각시였고, 그 역시 그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실제로 푸이는 전범 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여 이 사실을 그대로 밝힌 바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Puyi-Manchukuo.jpg
만주국 황제(강덕제) 시절의 푸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에 따라 만주국도 사실상 붕괴하게 되자, 푸이는 피난길에 오르면서 통화시 부근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을 해산했다. 흔히 이곳이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곳이라는 말도 하는데, 그와는 다른 곳이다. 후금이 세워질 때 수도인 허투알라는 랴오닝 성이고 통화시는 지린 성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가 누르하치의 조상인 건주위 여진족의 땅에 속할 뿐. 만주국을 억지로라도 청나라의 후신이라고 볼 경우 국조가 창건한 나라를 후손이 공식적으로 해산한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은 일본인도 만주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피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45년 8월 17일에는 소련군에게 붙잡혀서 전범 대우를 받았다.

소련군에 체포되었을 당시만 해도 푸이는 공포에 떨었지만, 소련은 한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타국의 황제 포로[11]에 대해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그가 수감된 모르카프카 수용소의 소장은 그를 위해서 작은 파티를 열어주고, 그에게 어떤 요구 사항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이후의 생활도 푸이와 그의 일행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소련 측은 그들을 요양자처럼 대했다. 음식에 있어서 그들은 매일 4끼[12]를 배급했다.
음식 뿐만 아니라 거처에 있어서도 푸이는 라디오가 있는 독방을 받았고, 소련 측은 그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피아노도 거처에 가져다 주었다. 다른 수감자들이 노동을 할 때 그는 산보를 하거나 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엔 수용소 밖을 나가 등산을 하거나, 강가나 숲으로 산책을 했다. 오히려 이 시기 움직이는 범위는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할 때 보다 넓었으며, 하고 싶은 일도 자유롭게 했다. 푸이는 하루 종일 불경을 읽거나 좌선수행을 하고, 점도 치면서 놀았다. 그리고 함께 수감된 시종들에게 황제로서 문안 인사를 받았다.
이후 하바로프스크의 수용소[13]로 보내져 공산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일행도 청소와 식품 수령 등의 노동에 참가했지만, 푸이는 여기서도 일은 하지 않았다[14]. 이후에 45특수전범수용소로 이송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우대 조치는 계속 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호의에 대해 푸이는 몹시 의외로 여기고 고마워했다. 나중에는 중국으로 송환 되는 것을 걱정해서[15] 소련군 관계자에게 자기 소지품으로 갖고 있던 금품이나 시계 등을 뇌물로 주고 중국 송환을 막아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16].

이렇게 지내다 1946년 도쿄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 만주국 황제 때의 일을 증언한 뒤 1950년 중국으로 넘겨졌다. 처음 중국에 송환 되었을 때 푸이와 그의 일행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바로 처형 당할 거라 예상했지만, 중공 정부는 그와 그의 일행을 교화시켜 선전용으로 삼으려 했다. 위해는 없었지만, 소련에서 누리던 특혜는 없었고, 영화 마지막 황제에 나온 대로 모든 일을 시종들의 도움 없이 자신이 해야 했다. 이때 푸이는 수감자들 사이에서 생활력이 없다고 맨날 까였다. 푸이는 푸순 전범 교도소에서 10년 동안 지내다 마오쩌둥의 특별 사면령으로 출소 되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시민이 되어 자금성의 정원사로 일했다. 거기다 중공 정부의 소개로 항저우 출신 간호사인 리슈씨엔과 1962년 4월 30일 결혼한다[17]. 1964년 '전국 정치 협상 회의 문사 자료 연구 위원회'로 전출되어 자료 전문 위원을 역임하였고, '인민 정치 협상 회의 전국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한 것. 물론 이는 새로이 중국의 지배 세력이 된 중국 공산당이 구 세력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신체제의 안정성을 과시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측면도 크다.

파일:attachment/baton_touch.jpg
후임 왕조태조와 찍은 사진.

마지막 황제치고는 후한헌제오대십국시대 후주의 공제(북송태조 조광윤에게 양위)에 버금가는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새로 들어선 정권들이 대체로 이전의 지배층에게 매우 가혹했던 것을 보면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새 정권은 기존 정권의 독재 정치에 분연히 떨쳐 일어난 혁명에서 출범하였으니 당연히 주적으로 삼았던 기존 정권의 인사들에게 가혹할 수 밖에 없다. 러시아프랑스 등 유럽에서도 혁명 이후 각각 로마노프 왕조 일가와 부르봉 왕조 일가가 숙청당했다.

하지만 중국은 청나라 왕조가 망하고 바로 공산 정권이 들어선게 아니고 최악의 혼란기를 거친 후에야 공산 정권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청나라 왕조에 대한 민중의 원한이 다 씻길대로 씻겨나갔다. 청나라가 제대로 망조가 제대로 드는 1850년대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2연타를 통해 청나라는 제국으로 작동이 점차 중지되다가(사실 건륭제 말기 니오후루 허션이 깽판칠 때부터 이미 청나라는 '사실상 몰락'에 많이 근접한 상태였다.) 제대로 식물 인간 선고를 받게 되는 청일전쟁이 1895년에 끝나며 실제 멸망일인 1912년까지 남은 17년을 청나라는 사실상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의 중국 통일이 1948년 즈음이니, 청나라에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도 거의 다 죽었거나 너무 어렸을 때라서 가물가물한 수준이었다. 또한 새로운 정권의 주된 경계 세력인 전 왕조의 추종자들도 거의 남지 않았으니[18] 결국 중국 공산 정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이나 장제스 등 때문에 청나라가 상대적으로 묻힌 것. 그리고 어차피 일본이나 국민당에게도 관용을 베푸는 판국에 청 황실에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또한 민중의 반감을 부를 공산이 컸기 때문에 이왕 포용하기로 한 거 화끈하게 해줘서 청의 정식 계승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또한 만주국 황제라고는 하지만 말뿐이고 실제로는 일본의 꼭두각시였으며 전범재판 당시 일제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증언하는 등 협조적이었다는 점. 국외로 도망가지 않은 점도 참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4. 사망[편집]

하지만 그가 병으로 죽어갈 무렵은 문화대혁명 때라서 어수선했는데, 그가 교도소에 갇혀있을 때 그를 반동이라고 하면서 계속 핍박하던 교도소장이 나중에 풀려난 푸이 앞에서 홍위병한테 끌려가서 반동분자, 수정주의자라고 쳐맞고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비참한 꼴이 된 소장을 동정한 푸이가 홍위병들에게 착한 사람이라며 풀어주라고 말하지만 홍위병들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 교도소장은 푸이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새 삶을 찾기를 바라며, 푸이를 무조건적으로 몰아붙이는 다른 정치국원들로부터 그를 보호해주고 있다. 교도소장은 작중 좋은 인물이며, 푸이가 홍위병으로부터 그를 변호하는 것은 '동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보인다. 일례로 푸이는 홍위병들에게 "그는 좋은 선생님(teacher)"이라고 항변하다가 밀쳐 넘어진다. 또한 홍위병들이 교도소장을 고발하는 죄목은 제국주의자, 반동 분자, 배신자인데 이는 바로 푸이가 과거 고발당한 죄목이다. 영화속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해당 죄목은 교도소장의 이러한 성향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19].

(신장암)으로 죽어갈 때 제대로 치료도 못받을 뻔 하다가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그의 집에 웬 여성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는 네놈이 만주국 허수아비 황제 시절에 궁녀였는데, 그때 너에게 강간 당했다!!"면서 보상하라고 날뛰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홍위병 표식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그걸 본 진짜 홍위병이 오더니만 욕을 퍼부으면서 끌고가더니 그가 보는 앞에서 패 죽였다고 한다. 당시 가짜 홍위병도 판쳤기에 이렇게 길거리에서 대놓고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진짜 홍위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차피 홍위병이라는 게 정부에서 정식 인가받은 조직도 아니고 그냥 붉은기 들고 붉은 완장 찬 무리 혹은 개인들이 스스로 칭하고 다니던 거라 진짜, 가짜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는 없었다. 그냥 쪽수 많고 목소리 큰 것들이 원조다. 나중에 다른 여성들이 찾아와 궁녀였다고 발악하며 돈을 요구해 돈을 받아가기도 했는데, 다른 여자들이 몰려와서 우리도 돈을 내놓으라느니 난리를 부렸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름시름 앓다가 혼수 상태에 빠진 뒤 제대로 유언도 못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저우언라이의 배려 덕분인지 병상 위에선 나름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베이징의 인민 납골당, 베이징 팔보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등을 전전하다가 1996년에야 사후 28년 만에 청 왕조의 두 능구 중 하나인 허베이성 이셴(易縣)의 청서릉(清西陵)[20]으로 이장하였다.

3. 개인사[편집]

궁정 시절에는 자금성의 부패한 내무부에 대해서 개혁을 시도했을 정도로 궁정 내 부조리를 개선하려고 애쓰려고 했고 톈진 시절에는 씀씀이가 매우 헤프고 사치스러운 한량이었다고 한다. 하긴 청나라 황제에 올랐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였고, 만주국에선 일본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사치 외에는 따로 할 것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을지도. 베트남 제국 마지막 황제이던 보대제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평생을 5번 결혼하고 까지 포함해 6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후손은 없었다. 특히 황후인 효각민황후 고불로씨(孝恪愍皇后 郭布羅氏)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효각민황후 고불로씨는 푸이와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이름인 '완룽'으로 부른다. 풀네임은 고불로 완룽(郭布羅 婉容). 영어 이름은 엘리자베스(Elizabeth).

1935년 완룽이 완룽의 오빠의 음모로 일본 군관과의 사이에서 사생아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푸이는, 완룽이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다. 황후는 그 아이를 자신의 오빠가 키우는 줄 알고 양육비를 건네기도 하였다 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그와 다르게 아이는 완룽이 푸이의 운전사와 사통해 아이가 생긴 것이고, 그 사실을 일본군도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선 완룽이 "당신을 위해서 했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만주족이에요!"라고 하자 푸이는 일을 덮기 위해 "황후가 수태를 했소. 만주국의 후사가 생겼소."라고 둘러댔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1891년 ~ 1945년. 일본이 2차 대전에서 참패하자 권총으로 머리를 날려 스스로 끝냈다.)는 "네. 여기에 아이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운전사의 이름을 보여준다. 그리고 푸이는 하얗게 질려서 완룽의 손을 뿌리치고 식당을 나가버리고 아마카스는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며 온 아시아는 일본의 영토다!라고 의기양양해한다. 그 결과로 황실의 명예를 위해 운전사는 총으로 즉결처분.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의사가 주사로 죽이는 걸로 묘사된다. 실제로 푸이가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인 사실은, 초판 자서전에는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기록되지 않았다.

완룽은 1946년 아편에 빠져 병사할 때까지도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완룽의 아이가 죽은 이유는 푸이의 질투 뿐 아니라, 아이가 일본에 정략적으로 이용당할까봐 죽여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황후와의 부부 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했는데, 황후의 정신병 등이 원인이었다. 아이를 두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제수가 되는 사가 히로는 푸이가 게이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했는데, 1962년 재혼한 부인 리수셴(李淑賢)은 게이설을 부정하고 발기부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푸이는 (현대) 중국 최초의 공식 이혼남이다.

완룽은 거란족의 후예라는 설도 있는 몽골계의 소수 민족인 다우르(達斡爾, Daur)족 출신이다.

또, 2번째 부인 숙비 어르더트씨(淑妃 額爾德特氏)가 유명하다. 숙비 어르더트씨는 몽골족 출신으로 풀네임은 어르더트 원슈(額爾德特 文繡). 완룽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원슈라고 부른다. 원슈는 중간에 푸이와 이혼하고 떠났다.

1살 터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제(愛新覺羅 溥傑; 우리식 발음으로는 부걸)는 일본 귀족인 사가 히로와 결혼하여 2녀를 두었다. <유전의 왕비, 최후의 황제>에서는 사가 히로와의 결혼으로 인해 푸이와 푸제가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화해하고 사가 히로 또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 푸이는 일본 여자와 결혼한 동생을 평생 일본 스파이로 의심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이복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런(愛新覺羅 溥任)은 성을 진(金)씨로 바꾸고 이름을 '유즈(友之)' 로 바꾸었으며, 현재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수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푸런의 아들 진위장(金毓嶂)은 자신의 다음 대부터는 성을 다시 아이신기오로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푸런은 만주국 황실의 전임 왕위 요구자로 2015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만주국 황실과는 별개로 청나라 황실 수장은 다른 인물이 맡으며 현재 청나라 황실 수장은 아이신줴러 헝전(爱新觉罗·恒镇)이다. 그는 선통제의 양자 아이신줴러 유얀(毓喦)의 장남이다. 다만 현재 왕위 요구자/아시아 항목에서는 합의에 따라 청나라와 만주국의 왕위 요구자가 삭제된 상태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와 인연이 있다. 1942년 3월 23일 만주국 소재 육군 군관 학교를 졸업할 때, 만주국 황제 푸이가 우등상과 함께 금으로 된 시계를 하사한 것이다.

여담으로, 죽기 직전에 치킨라멘이 먹고 싶어 했다고 사가 히로가 회고전에서 말하였다. 트리비아의 샘에서는 이걸 다루고, 제작진이 직접 선통제 무덤에 가서 치킨 라멘을 조리해서 바쳤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영화 <마지막 황제(L'ultimo imperatore, 1987년)>는 그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에 저술된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문판 제목은 <황제에서 시민으로(From Emperor to Citizen)>. 이 자서전은 중국 공산당 밑에서 교화 생활을 하던 중에 썼던 <나의 죄악의 전반생>이라는 후덜덜한 제목의 자아 비판서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영화는 배경이 중국이고 대부분의 등장 인물이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배우가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연기하는(…) 희한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한 9개상을 석권했고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여기서 푸이 역을 열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존 론은 나중에 괴작 영화들에만 주연(...)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다크 히어로 영화인 "셰도우"에서 칭기즈 칸의 마지막 후예인 쉬안 칸 역을, 러시아워 2에서 최종 보스로 나온다. 사실 이건 아시안 배우에게 악역, 조연만 시키는 헐리우드의 차별과 한계 탓이 컸다. 버터플라이 M에선 여장 남자로 나와 제레미 아이언스와 연기하는 등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했지만 별 빛을 보지 못하고 이후로는 중국 쪽으로 아예 노선을 돌려 중국 사극 드라마에 주로 출연했다. 중국에서도 '마지막 황제' 이미지가 강한 탓에 주로 왕으로 나온다. 사극만 찍기 싫어서 중국에 왔는데 여기서도 사극만.. 중국의 최수종...

<마지막 황제>가 유행할 때, <말대 황제>이라는 사극을 KBS가 수입을 하여서 방영을 하였는데 [21], 이 중국 드라마는 전반적으로 선통제를 찌질한 양반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본 다음에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분들은 꽤 충격을 받았는데, 어른이 된 푸이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강희제국>에서 열연한 진도명이다. 이 드라마 후반부에 영국인으로 분장해서 한국전쟁을 참회하는 연극 장면이 거의 그대로 나왔다. 진도명은 강희제, 장제스(!?), 진시황[22], 월왕 구천, 한고제 등의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성군 연기를 주로 하는데 이 작품에서 <강산풍우정>의 천계제와 함께 찌질한 암군 역으로 활약한 작품이고 둘 다 잘 어울린다. 성군과 암군을 모두 소화할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

일본의 동인 음악가인 BITPLANE[23]의 다른 뮤지션 명의 중 하나가 선통제의 만주어 이름 한자가차를 딴 愛新覚羅溥儀(애신각라부의)였다. 딱히 연관성은 없어보인다.

파라독스의 전략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 만주국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최근 Waking for Tiger DLC를 출시하며 만주국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추가 되었다. 특히 만주국청나라를 거쳐 중화제국을 선포할 수 있는 선택지가 추가 되었다.[24]

북두신권의 저자 하라 테츠오가 쓴 창천의 권에서도 등장. 여기선 나이가 먹은 모습으로 등장했으며 시도때도 없이 암살의 공포에 반쯤 정신이 나간 찌질이로 등장한다. 상하이에서 범죄조직을 박살낸 '염왕'이라는 자를 찾아 자신의 보디가드로 삼기 위해 그 염왕이 잠시 몸을 담은 청방이란 조직에 소속됐었던 어느 노인을 독 검시관으로 삼고 이를 이용해 염왕을 찾아내려 했으나 정작 그 밀명을 받은 부하들은 염왕 목에 걸린 상금에 눈이 멀어 검시관을 죽이려 들었다가 끔살당했고 이로 인해 염왕의 진노를 사게 된다(...) 이후 자신을 찾아와 두들겨 패는 찾아온 염왕에게 그깟 하찮은 독 검시관을 위해 자길 죽이려드냐고 찌질거리지만 '황제든 독 검시관이든 난 단지 의리를 위해 움직인다. 그게 친구야.'라는 염왕의 말에 자신도 그런 친구를 갖고 싶었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이후 갑자기 작화가 업그레이드 되어(...) 자신은 이제 중원의 허수아비 황제지만 자신도 남자인만큼 죽을거라면 싸우다가 죽고 싶다며 보검을 들고 덤벼들었다가 한큐에 비공을 찔려 쓰러지고 그대로 죽나 싶었지만 의외로 목숨을 건지고 이후로는 별 등장이 없다.

[1] 위의 사진은 1917년 장쉰의 복벽 사건 때 찍은 사진이며, 게임 Victoria에서 게임을 종료하면 나오는 국가별 점수 및 지도자의 초상화가 나오는 화면에서 중국계 국가 지도자는 이 사진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2] 1967년 대만에 있는 종친들이 올린 묘호.[3] 2004년[4] 1967년에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양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襄皇帝)였던 것을 2004년에 고쳤다. 즉, 딱 한 글자(도울 양襄 ->근심할 민愍)가 바뀌었는데, 시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5] 혹은 16일에 사망했다고도 한다.[6] 정사복벽[7] 만주국의 황제 직위를 인정을 안하면, 마지막 황제는 중화제국위안스카이. 만주국을 인정한다면 위안스카이는 마지막 한족 황제가 된다.[8] 참고로 이 遜이라는 한자는 겸손하다, 사양하다, 양위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못하다, 뒤지다, 뒤떨어지다, 달아나다 등의 부정적인 의미도 같이 담고 있는 한자이기도 하다.[9] 표준중국어의 모태가 된 북경어는 만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0] 봉투에 쓰는 '부의'의 한자는 '賻儀'이다. 부수 하나 차이이다.[11] 알려진 대로 소련은 자국 황제 일가는 모두 총살시켰다.[12] 아침은 빵과 과자, 커피, 차 등을, 점심은 요리 2개와 탕 1개, 오후 3, 4시 경에는 오차로 간단한 간식을 주고, 저녁은 서양식으로 와인이나 사이다 등이 나왔다.[13] 여기서 푸이 일행은 2층 건물을 따로 받아 사용했는데, 1층은 시종들이, 2층은 푸이가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수용소는 철거되고 휴양지로 바뀌었다.[14] 다만 수용소장이 정원에 농사를 짓도록 허용해 시종들이 풋고추와 토마토, 가지, 강낭콩 등을 심어 길렀는데 이들 채소들이 쑥쑥 자라는 게 신기했던 푸이가 직접 물을 주고 관리했다고 한다.[15] 국민당이 이기든, 공산당이 이기든 일제 부역자인 자신은 처단 될 것이라 보았다.[16] 러시아어를 아는 동생 푸제를 시켜 스탈린에게 감사와 함께 소련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받지 못했다.[17] 5년 후 푸이가 사망하기까지 그들은 꽤 다정하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미망인인 리슈씨엔은 1997년 사망했다.[18] 조선 건국 초기의 왕씨 청소를 보면 알겠지만(물론 이는 도가 지나쳤다는 논란이 많지만) 역성 혁명 이후의 전대 왕실 척살은 단순한 감정적 보복이 아니라, 구 세력이 명분으로 내세울 구심점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목적도 있었다.[19] 실제 푸이를 교화한 조선족 김원은 이 시절 숙청되었다가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북경대 교수를 지내다 1990년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푸이에 대해 "순박한 사람이고 인간적으로 동정하지만, 그가 저지른 역사적인 죄과는 용서할 수 없다"고 밝혔다.[20] 화룽황가묘역(華龍皇家陵園)의 푸이묘. 별칭은 헌릉(獻陵).[21] 마지막 황제를 의식해서 국내 방영시 <마지막 황제 부의>란 제목을 붙였다.[22]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과 중국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를 모두 맡아봤으니 중국에서 약 2000년 동안 이어진 황제 중심 중앙 집권 체제의 알파와 오메가를 담당한 셈이다. 중국의 황제 중심 중앙 집권 체제는 진도명으로 시작해서 진도명으로 끝났다. 거기다가 이 사람역까지 맡았다는...[23] 예전에 주로 process 2.3.1이라는 명의로 활동.[24] 중화제국 선포시 아이신기오로 푸이에서 선통제로 국가원수의 이름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