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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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선종(宣宗) → 선조(宣祖)

시호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
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
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소경(昭敬)

본관

전주(全州)

능묘

목릉(穆陵)

균(鈞)[1] / 연(昖)[2]

출생지

한성 인달방 덕흥군 사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7길 부근)[3]

사망지

한성 정릉동 행궁(경운궁 석어당)[4]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

양부

조선 명종

양모

인순왕후 심씨

부친

덕흥대원군 이초(李岧)

모후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생몰
기간

음력

1552년 11월 11일 ~ 1608년 2월 1일

양력

1552년 11월 26일 ~ 1608년 3월 16일
(55년 3개월 20일, 2만 199일.)

재위
기간

음력

1567년 7월 3일 ~ 1608년 2월 1일

양력

1567년 8월 7일 ~ 1608년 3월 16일
(40년 7개월 9일, 1만 4,832일.)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60929163306.254.0.jpg


1. 개요2. 대중의 인식3. 생애4. 후대의 평가5. 기타
5.1. 창작물에서의 묘사5.2.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5.3. 목릉5.4. 선조 어필
6. 선조에 대한 음모론
6.1. 선조와 이순신6.2. 열등감?
7. 관련 서적

1. 개요[편집]

조선의 제14대 임금. 묘호는 선조(宣祖), 시호는 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휘는 연(昖). 전란기와 비전란기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지만, 임진왜란의 임팩트가 워낙 크다보니 대중들의 인식은 암군의 대명사나 다름이 없다. 이초의 아들, 명종의 양자.

조선 계보도를 보면 선조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계보도가 나눠진다. 선조를 시작으로 이후로 즉위한 조선 임금들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선조의 후손들이다.

백성의 3분의 1이 노비로 전락했던 중종, 명종때의 파행과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을 버텨내고 조선의 국운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든 지도자지만 전쟁중에는 떨어진 권위로 촉발된 병적인 의심으로 국난을 가중시키기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인터넷에선 임진왜란 이전의 선조를 능군, 이후의 선조를 암군이라고 칭하나 엄멀히 말해 주목할 만한 정책들은 임진왜란 후에 더 많다. 이이의 경장이 좌초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임진왜란 전에는 동인, 서인 가리지 않고 죄다 개혁이 비판적이라서 선조의 의지만으로만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고, 임진왜란 이후 이대로가면 망한다는걸 지배층이 인지하게 되자 비로소 재분배와 민생 개혁안이 선조의 지지아래 실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대중의 인식[편집]

대중적인 이미지는 역대급이라고 해도 좋을 암군이다. 선조입장에서는 운이 나쁘게도 한국인에게는 임진왜란이 역사 문제 존재감 끝판왕 중 하나다 보니 막장 중 막장인 연산군과 비교해서도 안 좋은 쪽으로 네임밸류가 안 꿀린다.[5]적어도 폭군 이미지는 없다는게 위안거리?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웅이라 불리는 이순신을 시기하고 박해했다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퍼져있으니 도저히 좋을 수가 없다. 특히나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순신 정도는 알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선조라는 존재 자체를 잘 모를지라도 "이순신 장군의 왕"이라고 한다면 "이순신 장군을 박해하고 여러모로 무능했던 왕"이라는 이미지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하지만 이 자의 존재(훗날 조선 16대 임금 인조, 선조에게는 첫 손자)로 인해 역사에 살짝 관심 있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편. 그리고 명군이 됄수있었던 아들 광해군의 인생을 망친 막장아버지라는 나쁜인식은덤

그래도 임진왜란 전이나 후나 재분배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실제로 정국은 시끄러웠으나 나라는 중종, 명종 때에 비해 잘 돌아갔다. 정국이 시끄러웠던 것도 선조가 각 당파 사이 갈등을 조장하되 그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사실 이게 당쟁의 의의이기도 하고 인재풀도 이원익, 류성룡, 이순신, 이항복, 이이, 이황, 정철, 이덕형, 이산해, 윤두수, 권율, 정인홍, 한석봉 등 엄청난데 이와 비견될 만한 인재를 가지고 국정을 운영했던 것은 세종대왕 정도다.[6] 한 무명장수를 사간원의 반대에도 임진왜란 1년 전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라며 하루 만에 '8계급 특진'을 시킨 것도 류성룡의 추천으로 바로 선조가 했다.

원균의 경상우수사 임명건을 들어 끊임없이 선조는 인재보는 눈이 없었고 이순신 기용은 운일 뿐이라는 악의적인 중상(선조는 자기자신 보다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하는게 성격이었다.)을 일삼는 이들이 많으나 원균을 고평가한 책임을 묻자면 이원익이나 정탁같은 선조대 명신들도 마찬가지다. 개전 초 경상도 전역이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와해된 부대가 많았던지라 원균의 경상 우수영 해체는 그렇게 큰 죄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순신과 함께 할 때는 슬쩍 묻어가며 수급을 열심히 바쳤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던 조정에선 자연히 행실에 불량하긴 해도 용맹하여 잘 싸우는 장수라고 오해했다. 게다가 칠천량 괴멸 이전까지는 크게 사고를 친 것이 없어서 당파 상관없이 조정 대신들과 선조에게 이미지가 좋았다. 조정에서 원균을 가장 안 좋게 봤던 이원익이나 이순신을 구명한 정탁조차도 원균을 용맹하여 전시에는 쓸만한 인물로 평할 정도였다. 왜란 이전 전라 좌수사 시절 사간원에 탄핵받고 얼마 안 가 경상 우수사로 전임되어 간 것을 두고 선조가 사람 잘못 봤다고 몰아붙이는 사람이 있는데 무관들이 평시에 불량한 행실, 행정능력 미숙 등으로 탄핵받는건 당대에 무척 흔했다. 식년무과 급제한 엘리트 무관이면서 행정능력도 정상급이었으며 꼬박꼬박 독서하고 독후감 쓰던 이순신은 당시 무관들 중에서 굉장히 드문 존재였다. 조정도 무관들에게 그런 쪽으로 기대는 많이 하지 않았고 전시에 싸움 잘하고 용맹하길 요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신립(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 1진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기마전+백병전으로 맞아 싸우다가 탄금대 앞 호수에서 부하와 함께 장렬히 전사.)이 있다.

전란 도중과 이후 이순신보다 원균을 치켜세우며 그를 복권시키려 노력했던 점은 정말로 원균을 고평가해서라기보다는 이순신의 거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원균[7]의 우상화를 통해 이순신 지지 세력을 견제하고 동시에 역모를 차단하여 왕권을 지켜 자신의 안위를 더욱 보존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 전란 속에서 세기의 성웅을 믿지 못한 불신과 국가 존립의 위기를 과소 판단한 것이 잘못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겼을 레벨의 잘못이란 건 넘어가자 선조 본인이 감정적으로 원균을 편애하거나 그를 고평가했다고 보기는 좀 어렵다. 단지 자신의 옥채 보존을 위해 이순신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당시 이에 이용하기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원균이었던 것. 물론 이것은 왕 개인의 인기와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위난시에 나라에 꼭 필요한 인재를 견제하고 무능한 자를 등용한 데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

3. 생애[편집]

종친 하성군으로 태어나 명종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짧게 거치고 문치에서 목릉성세의 중흥을 이룩했다.[8] 그러나 니탕개의 난과 뒤이은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바람 앞 등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파천으로 한성, 개성은 물론 평양까지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으며 환도 후에도 이순신을 시기질투하여 강제로 직위해제하고 역모죄로 몰아 투옥해서 나중에는 칠천량 해전을 빚으며 정유재란의 원인이 되었다. 전후에도 10여년간 재위하며 제도개혁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전쟁으로 크게 떨어진 권위때문에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해야 했다. 40년이 넘는 재위로 숙종 이전까지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로 남았다.

4. 후대의 평가[편집]

치세의 능군, 난세의 암군
자세한건 선조/평가 문서 참고.

5. 기타[편집]

  • 원래는 선종으로 묘호가 정해졌으나, 광해군 9년 선조로 변경되었다. 그 사유로 든 것이 종계변무였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부친이 이자춘이 아닌 고려말의 권신이자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은 공로다. 얼핏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왕가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로 태조 3년부터 200여년 간 추진된 외교 정책이었다. 여기에 광해군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반대를 무릅쓰고 조를 붙인 것도 있다. 일단 조(祖)를 붙일 때 실록 보면 선조의 공을 종계변무와 정응태의 무고를 해결한 것과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속시킨 공로로 돌리고 있다.

  • 선조 재위 시기에 민간에서의 조보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를 말하는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조보는 초서체로 필사하여 배포되었는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를 하여 배포하였는 바 이를 금지한 것. 명목상으로는 외국으로 국가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양반층의 정보 독점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재미있는 기사가 실록에 있는데, 선조는 조총을 보고 자기가 새로운 총을 설계하기도 했다! 1593년의 기사다.

    상이 류성룡에게 전교하였다.

    “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진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과인이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卿)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사관 : 옛부터 중흥(中興)한 임금들은 영웅(英雄)을 맞아 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쓰지 않았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本末)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兵革)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의 급무는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않은데도 대신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통탄스럽구나. 】원문[9]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1593년 11월 12일

    기록이 저것이 전부라 선조가 만든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 와중에 사관은 임금이 전시에 직접 무기를 만들고 살펴보는 걸 왕이 쓸데없이 공졸을 논한다며 까고 있다. 전쟁 발발 전에도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은 것을 보면 군과 국방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듯 보인다.

5.1. 창작물에서의 묘사[편집]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선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을 놓고 선조의 몸에 마수가 처박혔다는 판타지적 해석을 소재삼아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사실 원균도 같은 케이스로 설정되었다.

  • 김성한의 임진왜란 소설 7년전쟁에 당연히 등장하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임란도 임란이지만 정여립의 난 에피소드때 우의정 이양원이 이발의 팔십노모를 제대로 고문하지 않고 보고를 올리는데, 이때 이양원을 갈구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 임란 발발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 40년 8개월이라는 긴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데다가 재위기간 중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등 엄청나게 굵직굵직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군주라서 사극에도 대단히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

  •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대체로 전란과 당쟁 속에서 허둥대는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는 경향이 강한 편이나 광해군이나 이순신과 관련한 사극에 등장하면 이들을 의심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며 상대적으로 악역을 많이 맡는다. 단, 허준에서는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뭇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10][11] 그러나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사극이나 영화에서는 무능하거나 허둥대는 이미지는 거의 사라졌고 오히려 왕권 강화나 전란 중 왕좌 유지에 혈안이 된 소심해 보이면서도 정치판에서는 상당히 음험한 군주의 모습이 더 부각되어 묘사되는 경향이 커진 편이다. 2000년대 이전 사극과 이후 사극에 등장하는 선조들을 비교해 보면 묘사가 사뭇 다른 걸 볼 수 있어서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 칼의 노래에서는 무능하고 잔혹하게 표현되는 "칼로 벨 수 없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로 전쟁을 수행하며 유능한 지휘관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악인으로 표현된다.

  • 온리 콤판의 만화 YI SOON SHIN에서는 무능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심하게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온다.

    파일:attachment/fat_seonjo.png
    바로 이렇게…….

  • 간혹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 하지만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왜구네이터편에서 나대용이 이순신의 부하 나대용과 동일인물이며 시대도 임란 직전임이 밝혀져 사실상 선조가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선조의 인성과 능력을 뒤바꿔서 성격은 참 좋은데 무능한 왕이 되었다

  • 오성X한음에는 당연히 등장. 나름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 최근 연재분에서는 율곡 이이에게 일부러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들었고, 정여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바탕 피바람을 예고하는 등 인식이 좋지않다.

  •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이순신에게 한양을 내주고 함흥으로 퇴각한다. 이 때 정원군(인조의 친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진족을 끌어들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되려 여진족에게 살해당한다.

5.2.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편집]

5.3. 목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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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상술했다시피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곳으로 이장(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다. 이 능은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인데,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 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현 목릉이 조성된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 게 훨씬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참고로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지치)' 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조 치세에 백성들의 삶이 마냥 어지러웠던건 아니고 선조대는 세조가 씨뿌리고 연산군과 중종이 키워놓은 조선 중기의 사회모순[15]에 대한 보완과 개선노력이 시작되는 굉장히 의미있는 시기이다.

5.4. 선조 어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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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 / 추위에도 능히 홀로 피었네 /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 / 은은한 향기가 나오고 있음이어라.'(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여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한글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음력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 전문 현대어 해석은 이곳 #을 참조하자.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서예)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한석봉이는 액자(額字)가 비록 훌륭하지만 초서와 해서는 부족하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16]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비 인목왕후와 유일한 적녀(嫡女) 정명공주도 명필로 유명했다.

6. 선조에 대한 음모론[편집]

6.1. 선조와 이순신[편집]

임진왜란 전의 이순신을 선조가 어떻게 취급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로 여러 견해가 오가고 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 곤장)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자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순신과 동료 장수는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17]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ㅡ 선조실록, 22년 7월 28일자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자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전쟁이 발발해 이순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론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 대하듯 물어보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진짜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워서 의문을 가지는 거지 진짜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중반까지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이 승리할 때마다 승진시켜주기 바빴고, 오히려 신하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반대할 정도였다.

단 이순신의 명성이 너무 올라가버린 임진왜란 후반에 가면 이순신을 정말 싫어한 것이 확실하다. 파직 건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무리인 게 빤히 보이는 데도 잡아온 후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고 고문[18]을 한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결국 백의종군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원익정탁이 총대 메고 나서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어났을지는 상상에 맡긴다.[19] 선조는 실제로도 의병장 이산겸이 죄 없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산겸을 때려죽인 예가 있다.[20] 이순신이 전사했을 때 선조의 반응도 가관인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명나라 군대를 통해 알려지자 전해들은 선조는 무덤덤하게 뒷일은 내일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답해 소식을 전하는 신하가 도리어 놀랐다는 반응이 적혀있으며 훗날 명나라 장수가 선조를 마주하여 이순신 장군의 명복을 기리는 언사를 하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도 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구국의 영웅이 죽었는데 보인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차가운 반응이였다.

이것 때문에 이순신이 사실 전사한 것이 아니라 자살 혹은 은둔했다는 루머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6.2. 열등감?[편집]

선조 하면 자주 나오는 얘기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방계 출신으로 즉위한 것이라 정통성 문제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단 건데 선조의 정통성은 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명종에게 정통성있는 아들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선조가 왕이 된 이유가 명종의 후계자인 순회세자는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서손이지만 대비가 직접 선택해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명분상 이를 시비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시대 예법을 지금 기준으로 해석하는건 대단히 무리한 일로 그 시절에는 혈연 관계보다 종법계통이 우선이었기에 법적인 아버지는 엄연히 명종이었다. 양자로 입적된 이상 생부는 친척에 해당하며 덕흥군은 신하의 지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따라서 선조가 덕흥대원군 제사에 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혈연 관계로만 따져도 중종 7남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는 중종 아들 명종의 3촌 조카로 매우 가까운 촌수다. 서자 후손이라거나 혹은 혈통상 멀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져야 한다면 이후 국왕들 중에선 훨씬 더 먼 사람들도 많다. 숙종 서자 영조의 서자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적자였던 철종이나 종법으로야 사도세자의 직계지만 혈연으로 따지만 인평대군 후손이었던 고종 등. 그리고 그 왕들도 먼 방계출신임으로 인한 정통성 컴플렉스를 크게 가지고 있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왕이 승하한 당시에 남아있던 왕족들 중에선 가장 높은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계승법은 그런 상황까지 고려해놨기 때문이다. [21]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는데 망설인 건 광해군이 서자라서가 아니라 총애하던 인빈 김씨 소생 소생을 세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가 마음에 둔 신성군도 서자다 덕흥대원군에서 서술했듯이 생부 덕흥군의 추숭은 한 적도 없다. 즉위 초에 덕흥군 봉사손(자신의 큰형)을 1품 세습으로 하려다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고 한참 지난 즉위 39년차에 잠깐 얘기만 나왔던 게 다다. 서자를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자기의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적자가 아니라서 열등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왕실은 사대부와 다른 게 서자라도 승통이 가능했고[22]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적자로 입적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딱히 서자나 서손 출신이라서 열등감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다. 어디 조선 후기의 서자 출신 왕들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가. 서자 출신으로 승계하거나 세자가 된 왕, 왕세자가 조선 후기만 따져도 영조, 경종, 효장세자, 사도세자, 문효세자, 순조 등이 있다.[23]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를 계비로 들이고 영창대군을 총애한 걸 방계 콤플렉스의 증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아래 링크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상 왕비가 죽으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는것이 당연했다.[24] 그리고 선조는 영창대군을 광해군 견제 이상으로 활용하진 않았으며(영창대군 항목 참조) 당대 종법 해석상 광해군의 정통성이 영창대군보다 훨씬 우월했다. 1 2 광해군을 박대한 것은 더도덜도 없이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왜란 초반부터 전위를 요구한 유생과 신하들이 누굴 보고 그런 요구를 했겠는가?

7. 관련 서적[편집]


[1] 처음 이름.[2] 개명 후. 참고로 명종의 친 아들 순회세자의 이름이 이부(李)다. 선조가 법적으로 명종의 아들이 되었으니 순회세자의 이름을 따라 '날 일(日) 변'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이준경의 건의로 '경(曔)'·'연(昖)'·‘'요(暚)' 세 글자 중 '연(昖)' 으로 고른 것이다. 참고로 ‘경(曔)’은 정종이 본래의 이름인 방과에서 바꾼 휘(諱)이다. 애초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게 왕의 이름인 휘인데 새 왕의 휘 후보로 선왕의 휘를 올리다니 다른 왕 같았으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만으로 진실로 '경'을 칠 일이었다. 조선 왕실과 조정에서 정종을 진실로 공경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것이다. 당시만 해도 '공정왕'이라며 묘호도 받지 못했던 정종의 안습한 대우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3]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위치했었던 사직공원 근처다. 도정궁의 건물이었던 경원당은 오늘날 건국대학교 캠퍼스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4] 이 이름은 선조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다.[5] 마찬가지로 연산군 또한 막장성으로는 한 수 위였던 고려의 충혜왕이라고 하는 선배가 있지만, 한국 현대 바로 직전 국가였던 조선의 네임드 폭군이다보니 한국사에서 대중들에게 제일 유명한 폭군이다.[6] 이렇게 인재가 많은 이유는 쉽다. 명종 때까지 기 못 펴고 살던 사림파들이 본격 유입되고 있었는데, 선조가 세력을 조절해서 한쪽 당파만 강화시키는 일을 피해 그 인재들을 무난히 수용했기 때문이다.[7] 어째서 원균이 이순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느냐?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임진왜란때의 상황을 조금 악의적으로 표현하면 '조선수군전체'가 이순신과 그 추종자만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런 조선 수군의 현실에서 유일하게 이순신에게 반발하고 있는 장수가 원균이다[8] 선조 재위 전반기를 보고 연산군, 중종, 명종 대의 국정 난맥상은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틀렸다. 선조 이후 집권한 사림중에 임진왜란 이전 전면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한 사람이 율곡 이이(서인계열의 학자)밖에 없었다. 중종, 명종때의 훈구와 비교해도 개혁적이라 하기 힘든게 선조대 사림이었고 이 기조가 바뀐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임진왜란 덕분이었다. 미증유의 재난속에 자칫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의식이 생겼고 이때문에 그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전시재분배와 개혁정책들이 추진된다.[9] 쉽게 말하면 왕이 직접 신무기를 만들어 류성룡에게 베타테스터를 권하고 있다![10] 실제로 기록상에 선조는 허준에게 중인이라는 신분임에도 정1품 보국숭록대부라는 작위를 내리려다 실패하는 등의 허준을 총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후 허준이 사망했을 때 광해군은 비로소 정1품 작위를 추증하였다. 물론 허준이 정1품 작위를 받을 만큼 충분한 공적을 세운 것은 명약관화지만, 이순신이 당시 정2품 정헌대부에 불과했던 것을 볼 때 신하를 대함에 있어 편차가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11] 허준에서 선조 역을 맡은 박찬환 씨는 후에 불멸의 이순신에서 순천부사 겸 이순신의 심복인 권준 역을 맡았는데, 수시로 상관에게 왕은 절대 믿을 것이 못된다는 투로 이야기한다.자아비판[12] 당초 조민기가 선조 역이었으나 제작진과의 마찰로 하차 최철호로 변경되었다. 배우가 교체되면서 캐릭터의 성격도 꽤 달라졌는데 조민기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음험한 군주의 인상이라면 최철호의 선조는 말 그대로 찌질이.[13] 재미있게도(?) SBS의 일지매에서는 인조를 연기했다. 전란으로 욕 먹는 조선의 두 임금을 모두 연기한 셈.[14] 여기서도 권력욕에 불타는 암군으로 묘사. 정보석의 전작인 자이언트의 조필연 역과 비슷한 느낌이다.[15] 지배층의 모랄 해저드, 노비인구 증가, 토지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16] 인조와 효종이 선조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7] 단 극형만은 피했으나 중징계를 하긴 했다는 점에서는 조금 애매하다는 주장도 있다.[18]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출소 후 멀쩡히 말도 타고 대신들과 술을 마신 걸 보면 고문은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 곤장 몇 대 맞은 원균도 며칠을 누워 있었는데 고문을 당한 이순신이 그리 멀쩡할 수 있었겠는가? 투옥 당했을 때도 대신들이 면회를 오고 그런거 보면 가벼운 심문 정도만 받았다고 봐야 한다.[19] 정유년 3월 13일 실록을 보면 이순신이 의금부로 압송되자 선조는 죽어야 마땅하다며 이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고 명하는 부분이 나온다.[20] 물론 이산겸은 북인의 수장 이산해의 사촌이므로 북인에 대한 견제 조치로서 죽였다는 시각이 많다. 비슷한 예로 거론되는 김덕령의 경우 류성룡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도 '혐의가 너무 짙어서 살리지 못한다' 는 말을 할 정도였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소지가 있다. 선조실록 29년 8월 4일자 기사, 수정실록 29년 8월 1일자 기사를 참조할 것.[21] 물론 선왕의 적장자, 적자, 서자, 가까운 혈연, 먼 혈연 순으로 멀어질수록 정통성과 권위가 다소 낮아지긴 낮아지는건 맞다. 다만 계승법상 순위와 절차가 적절할 시엔 치명적이진 않다는 것.[22] 사대부조차도 정말 사정이 궁하면 서자도 제사를 받드는 게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가 박원종의 서자 박운.[23] 다만 경종의 경우 어머니 희빈 장씨가 당시에는 소의라 서자라서 송시열이 태클 걸기도 했다. 이는 왕가의 특수성상 '왕위계승=대종(왕가)계승'을 통해 왕위계승자=왕실적장자 되게 하는 것이 왕가의 종법이었는데, 송시열은 여기에 반대하는 '왕위계승≠대종계승인 특수한 주장을 펼쳤고 이는 전임 왕때 예송논쟁으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는 왕위와 종통의 계승 절차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므로 아무리 대유학자 송시열의 주장이라 해도 이런 왕가의 특수성을 무시한 주장을 공식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기에 장(옥정) 소의 어머니의 옥교사건으로 뿔이 나 있던 숙종 입장에서는 자신의 (당시에는) 외아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결국 송시열은 사약을 마시게 된다.[24] 영조도 66세 때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