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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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선덕여왕 김덕만.jpg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안치된 선덕여왕 어진.[1]

시호

선덕왕(善德王)

칭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연호

인평(仁平)

성씨

김(金)

덕만(德曼)

아버지

진평왕

어머니

마야부인

묘지

낭산(狼山)

생몰년도

음력

? ~ 647년 1월 8일

양력

? ~ 647년 2월 17일

재위기간

음력

632년 ~ 647년 1월 8일

양력

632년 ~ 647년 2월 17일 (15년)


1. 개요2. 즉위 과정3. 즉위 이후4. 죽음5. 평가
5.1. 긍정적 평가5.2. 부정적 평가5.3. 대외적 압박을 받은 이유5.4. 총론
6. 삼국사기의 기록7. 가계8. 관련 설화들
8.1. 선덕왕지기삼사
8.1.1. 당태종모란꽃8.1.2. 옥문지의 개구리8.1.3. 자신의 죽을 날을 예지
8.2. 영묘사 건축과 두두리8.3. 첨성대8.4.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한 이유8.5. 지귀 설화8.6. 밀본 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8.7. 선덕여왕의 남편8.8. 선덕여왕의 화주
9. 선덕여왕릉10. 각종 매체에서의 선덕여왕
10.1. 삼국기의 선덕여왕10.2. 연개소문(드라마)의 선덕여왕10.3. 드라마 선덕여왕의 선덕여왕10.4. 대왕의 꿈의 선덕여왕10.5. 점프의 선덕여왕10.6. 외국 서브컬쳐에서의 선덕여왕
11. 기타

1. 개요[편집]

신라의 제27대 왕. 기록 상으로 확인되는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다. 연호는 인평(仁平). 진평왕마야부인의 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인 태종 무열왕이모이기도 하다.

사실 역사서에서는 모두 '선덕왕'으로 기록하는 데도 선덕여왕으로 부르는 것은, 37대 왕인 선덕왕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될 것이다.[2] 삼국유사 기이 제1의 '선덕왕지기삼사'에서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라는 표기도 나오는데, 같은 내용에 '善德王'이라는 표기도 혼재돼 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대왕'이란 대단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존칭 같은 건 아니다. 삼국유사는 진성여왕의 이야기에도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하나 그 안에는 '위홍, 잡간 등 서너 명의 총애 받는 신하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부려서 정치가 흔들렸다. 그러자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등 말기의 혼란상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기록만이 남아 있고, 고려에 항복한 마지막 왕 경순왕의 경우에도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고 표기하며 '대왕'의 칭호를 사용하는 등 왕의 업적과는 무관하게 '대왕'이라는 표기를 사용하였다.

불교를 대단히 밀어줬던 왕으로, '선덕'이라는 시호도 불교적인 호칭이다.[3] 선덕왕지기삼사 등의 설화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왕실과 밀접한 불교 세력이 왕즉불 사상을 전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퍼뜨린 일종의 프로파간다 등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선덕여왕을 상대로 일반 대중이 곧잘 떠올리는 일화들과 더불어 '지혜로운 여왕', '성군'이라는 이미지들은 대개 이러한 설화들로부터 비롯된다.

서동 설화의 내용을 생각해보자면, 조카가 계속 신라를 침략하는 바람에 싸워야 하는 구도가 성립하는데, 설화에 따르면 선화공주의 아들인 의자왕은 선덕여왕의 조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동 설화 역시 신빙성 논란에 휩싸여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선덕여왕이 여러 매체에서 젊은 여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30대의 이요원이 선덕여왕 역으로 나온다든지. 사실 선덕여왕은 즉위 당시에 젊은 여왕이 아니었다. 아버지 진평왕은 김동륜의 아들이었는데 김동륜은 572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에겐 아우 국반 갈문왕이 있었으니 572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고 632년 승하할 당시 춘추는 최소 62세라고 봐야 한다.[4] 그 점을 고려하면 선덕여왕은 즉위 당시엔 최소 40대 초반의 중년 여성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사촌 동생인 진덕여왕도 마찬가지다. 한국 역사 속에서 젊은 여왕은 10대 후반 ~ 20대 초반에 즉위한 51대 진성여왕 단 1명 뿐이다.

2. 즉위 과정[편집]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장녀였다고 전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와의 위아래가 뒤집혀 차녀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차피 이건 이미 주류 사학계에선 환단고기와 마찬가지인 위서 즉 소설인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난 상태이므로 무시해도 좋다. 남편은 삼국유사에서는 음갈문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김용춘, 흠반, 을제 3명의 남자가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써 있다. 다만 화랑세기는 앞서 언급 했듯이 역사적인 가치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신라골품제의 나라였으므로 다른 골품 및 외부의 혈통이 전혀 섞이지 않은 성골들만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성골이 계속 줄어들다 보니 성골끼리의 근친혼으로 겨우 대를 잇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 이미 다른 남성 성골들이 모두 대가 끊긴 상황에서 진평왕마저 아들이 없어서, 남성 중심 사회였던 고대 동아시아 환경에서 여성이었음에도 성골이란 이유로 그녀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신라가 개방적인 사회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골품제가 심한 폐쇄적 사회였기 때문에 발생한 여왕 즉위라는 특수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년인 진평왕 재위 53년의 여름 5월에 대규모 반란 기도가 있었는데, 바로 칠숙·석품의 난이었다. 이 시도는 진평왕에게 적발당해 칠숙은 동쪽 시장에서 목이 베어졌고 구족을 멸족당했다. 아찬 석품백제로 도망가다가 처 자식을 보고 싶다며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오던 중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헤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는데 들통나서 붙잡히고 역시 처형당했다.

이것이 단순히 진평왕에 대항한 반란인지 아니면 여성인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것을 반대한 반란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진평왕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았을 때 이미 고령의 진평왕이 몸이 좋지 않았고, 후계자로 선덕여왕이 지목된 상황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632년, 진평왕이 붕어한 뒤 덕만공주가 보위에 오르니 곧 선덕여왕이다.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선덕여왕은 선왕이자 부왕인 진평왕이 딸인 선덕여왕을 위해 준비한 왕권 강화 및 안정 정책들을 토대로 안정된 왕권이라는 유산을 바탕삼아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평을 받으며, 바지사장이나 얼굴마담이라는 식의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3. 즉위 이후[편집]

선덕여왕이 정확히 몇 살에 왕위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선왕이자 아버지인 진평왕이 굉장히 오래 재위한 것과 조카태종 무열왕603년생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를 역산하여 보았을 경우,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를 아무리 젊게 잡아도 50대 이상의 장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위 당시 국인들이 선덕여왕에게 바쳤다는 '성조황고(聖祖皇姑)'에서도 선덕여왕을 칭송하는 미칭에 굳이 '할머니'를 뜻하는 姑[5]자를 쓴 것을 지적해서 이 칭호도 선덕여왕이 즉위했을 때 고령이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를 두고는 단순히 존경의 의미에서 굳이 姑자를 썼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밖에도 삼국사기의 편찬 총책임자 김부식 역시 선덕여왕 기사의 사론에서 선덕여왕을 '늙은 할미'로 묘사했으므로, 그런 소리 들을 정도의 고령이었다는 주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고령이었기 때문인지 즉위 5년(서기 636) 3월, 임금이 병이 들었는데 의약과 기도가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즉위한 뒤 기록으로 남을 만한 대사면을 단행하여 자신이 왕이 된 것을 널리 알리게 된다.

나라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여러 재해가 끝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선덕여왕 즉위로 촉발된 귀족들의 대립으로 대규모 반란 사건까지 있었으니 선덕여왕은 매우 혼란스러운 나라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 3년(634)에는 분황사를 건립했다.[6]

같은 해 당나라사신을 보내 "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인정 받았다.

선덕여왕 7년(638)에는 고구려가 칠중성(오늘날의 파주 적성면)을 공격했으나 대장군 알천이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한다. 재위 8년(639)에 고구려와 접한 하슬라주(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를 북소경으로 삼고 군사를 배치하는 등 북부 전선을 보강하였으나, 재위 13년(644), 연개소문이 직접 나선 공격을 받아 끝내 성을 2개 탈취 당했고 회복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재위 11년(642)에는 위기가 가중되었다. 백제 의자왕의 역습으로 미후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성을 빼앗겼고, 낙하산 인사인 김품석[7]의 실책이 맞물려 윤충에게 대야성이 함락되었다. 이 해의 가야 전역은 최대 50개에 육박하는 성들과 서부 최대 핵심 요충지 대야성이 걸린 전역이었다. 대야성이 함락당한 이후로는 압독주[8]가 대야성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신라는 수도인 경주까지 적에게 노출되게 되었다.[9]

엎친데 덮친격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공격으로 당항성까지 공격당해 사실상 당나라와의 외교라인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에 마지막 수단으로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으나,[10] 당태종"나의 사촌을 보낼 테니 신라의 국왕으로 삼아 섬겨라."라고 말했다(...). 이놈 봐라?[11]

비록 나라가 위기에 몰리기는 했지만, 선덕여왕은 나름의 자구책을 내놓았다. 바로 김유신이었다. 선덕여왕 13년(644년) 가을에 김유신이 알천을 대신해 대장군이 되어 백제 변경을 쳐 일곱성을 빼앗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백제가 쳐들어오자 김유신은 두 차례나 가서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당나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이자 3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치는 등 나름 군사적 행동을 단행했다. 문제는 이 틈을 타 백제가 일곱성을 빼앗았다는 것(...).

사실 그 직전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견제하려는 시도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연개소문보장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는다는 댓가로 죽령 이북의 땅을 요구했다. 즉 진흥왕대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사실상 동맹을 거절하는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김춘추는 이런 제안에 "차라리 나의 목숨을 가져가라"며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며, 보장왕은 김춘추를 별관에 유폐하였다. 김춘추가 위기에 빠지자 선덕왕은 김유신에게 명을 내려 구출하도록 하였다.[12] 김춘추는 구토지설을 빌려 땅을 주겠다 거짓말하고 몸을 빠져나왔다. 2년 뒤 연개소문이 직접 신라의 두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13]

이 사건 이후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조정의 양대 거물이 된다. 김유신은 대장군이 되어 백제를 치고, 선덕여왕이 "나라의 운명이 김유신에게 달려 있다" 하였을 정도였다.

재위 14년(645)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신라삼보의 하나가 되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의 선덕여왕은 신하들의 반발을 이기기 어려웠는지 그해 11월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지만 재위 16년(647)에는 비담염종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비담의 난)[14], 이 반란은 김유신에 의해 제압되나 선덕여왕은 그해 세상을 떠났다.

4. 죽음[편집]

왕성의 성벽을 사이에 두고 근왕군과 반란군은 10일이 넘도록 대치 상태를 이루었는데(김유신 열전), 왕의 군대는 일단 월성의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에 돌입했다. 유성이 떨어지는 사건이 터지자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하였으며,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김유신이 연을 띄우는 기지를 발휘해 전세를 뒤집었다.[15]

선덕여왕의 죽음에 대해선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선덕여왕이 죽은 날을 1월 8일이라 기록하고 있고[16], 진덕여왕조에선 "비담이 1월 17일에 목이 베어졌다"고 말한다.

이 기록의 내용으로 본다면 선덕여왕이 반란 도중 난의 주동자인 비담 일파에 의해 시해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나이가 많이 들었고 약과 기도도 효험이 없었다는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노환으로 죽을 날이 다가오자 이를 노리고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충격을 받아 승하했다는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비담과 염종이 화백회의에서 선덕여왕의 퇴위를 결정하자, 자신의 입지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김춘추가 정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17] 실제로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분이 "여왕이 무능하다"라는 것이었으니, 잇단 나라의 혼란으로 귀족 세력들이 선덕여왕을 퇴위시키고 비담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5.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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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긍정적 평가[편집]

선덕여왕은 즉위 초부터 혼자 살아 갈 수 없는 자들을 위로하고 구제했다. 선대 진지왕, 진평왕 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이어서 다음해에는 조세를 면제해 주는 등 백성들의 부담을 완화 시키켰다. 그리고 수품과 용춘을 보내어 주변을 위로하는 등 민생을 챙겼다.

황룡사 9층 목탑으로 상징되는 불교 문화를 융성시킨 왕이다. 경주하면 떠오르는 첨성대, 분황사, 영묘사 등이 바로 선덕여왕 때의 작품이다. 숭불 정책은 신라 왕실의 불교 진흥책의 정점이자 왕즉불 사상의 완성으로서 장기적으로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에 기여하였다.

영묘사를 비롯하여 여왕의 재위 15년 동안 확인되는 바로만 무려 21개의 들이 신라 각지에 건립되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신라 중고기 때 창건된 절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와 금석문 등 여러 자료들을 통틀어서 전해지는 것들의 숫자가 대략 45개 정도이니, 선덕여왕 시대 15년 동안에 지어진 사찰의 수가 그중 절반 가까이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만 국가주도보다도 주로 민간의, 특히 유명한 스님들의 주도, 혹은 귀족 등 유력자들의 후원으로 지어진 것이 더 많았다. 선덕여왕은 신라십성(10명의 고승) 중 하나로 추앙 받는 자장율사를 후원하여 당나라유학 보내는 등 불교 후원에 아낌이 없었다. 이러한 불교 후원은 왕권 강화와 대민 통제, 민심 안정 등을 위한 작업으로서 예로부터 행해져온 일들의 연장이었다.

16년 치세 동안 초반 3분의 2에 해당하는 초기 10년간은 대체로 평화를 유지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패는 대체로 백제가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온 말기 5년 정도에 집중된 일이다.

선덕여왕은 외교적 고립 상태를 당나라와의 친선 관계 유지 및 강화로 대응해 나가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기반 하에서 당나라 국학에 유학생 입학을 요청해 최초로 유학생을 보내는 등, 선진문물을 받아 들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통일 신라를 건설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김춘추, 김유신을 외교와 군사의 두 축으로 중용했던 것도 선덕여왕 때부터였다.

일부 학자들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선덕여왕의 20살 때의 모습을 본딴 것이라 추정한다. 신라의 왕즉불 사상과 더불어 추측해 본다면, 덕만공주(선덕여왕)를 보살에 비유한 것은 진평왕의 후계 작업이라는 추정인 것이다. 진평왕은 똑같은 모양의 목상을 스이코 덴노(여덴노였다)이 지배하던 일본으로 보냈으며, 그것이 현재 국보 1호인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세한 것은 반가사유상 문서를 참조.

불교 문헌에는 선덕여왕에 대한 우호적 평가가 많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모두 나와있는 이른바 3대 예언이라는 '지기삼사' 설화이다. 모란꽃 설화는 외교와 문화에 대한 식견을, 여근곡 설화에서는 군사적인 재능을, 자신이 죽을 날을 알았다는 설화에서는 초탈한 느낌을 표현했다. 지귀 심화 설화에서는 선덕여왕이 미녀라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여러 위기 상황 속에서도 적어도 일부 백성으로부터는 선덕여왕이 무시할 수 없을만한 인기를 누린 임금이라는 점을 시사한다는 주장도 있다.

상당히 많은 수의 대공사들이 무리없이 진행될 정도로 왕가의 권위는 충분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가 강해졌다는 부분도 진평왕 시절의 기사를 보면 즉위 40년대 부터 고구려와 백제가 맹공을 가했으며, 특히 백제는 신라 변경을 쳐서 주요 성을 함락하고, 백성을 300명 가량 잡아 갔다는 기록도 있다. 당나라에도 고구려의 침공으로 길이 막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는 이미 이전부터 이어지고 있던 공세였다고 볼 수도 있다.

5.2. 부정적 평가[편집]

선덕왕지기삼사 같은 불교발 설화들은,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시피 프로파간다, 용비어천가일 가능성이 높다. 도리어 지기삼사의 내용을 제하고 보면, 선덕여왕의 치세, 특히 말년은 신라 최악의 내우외환시기 중 하나였다. 비담의 난 역시 이런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암군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신라시대의 박근혜)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남성 중심 문화는 여왕의 권위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국왕의 권위는 이전보다 약해졌고 내외적으로 음해의 대상이 되었다. 주변국의 예를 들면 부여 같은 경우는 가뭄이 들면 '이게 다 왕 때문이다'라고 왕을 죽이기도 할 정도였으니, 유례없는 여왕이란 존재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씌우기도 좋았다. 우선 바깥에서는 백제고구려가 여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만만하게 보고는, 신라에 대한 정치군사적인 압박을 개시, 강화한다.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재위할 당시 정계의 실권자는 진골 중에선 그나마 혈통이 성골에 가까웠던 김용춘, 김춘추 부자일 가능성이 있다.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성골에게만 왕위 계승권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실권은 김용춘이 갖고 있었다는 것. 참고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성골의 수를 늘리기 위해 남편을 3명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김용춘이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에서도 김부식이 선덕여왕을 비판할 때 "어찌 늙은 할머니들이 안방을 나와서 정사를 단행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선덕여왕이 꽤 나이가 들었을 때 즉위했기에 대놓고 '늙은 할머니'라고 적을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라시대 때는 지금보다 평균수명이 짧아서 나이 50만 되어도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 들을 때였다.

서영교 교수는 저서인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등에서 선덕여왕을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는 데에 실패한 채 불사에만 치중한 암군으로 묘사하였다. 노태돈 교수는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이 비담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18].

정관 17년 계묘(서기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불상, 승복과 폐백 등을 가지고 귀국해서 탑을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여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였다.
“백제에게 장인들을 청한 이후에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장인을 부탁하였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는 나무와 돌을 다듬었고...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중.


신라 말년에 엄청난 공력이 드는 황룡사 목탑을 세운 것 역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황룡사 찰주본기에 따르면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선덕여왕 재위 14년(645)의 일이고, 찰주를 세운 게 그 해 4월 8일의 일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달인 5월, 선덕여왕은 여당전쟁에 당나라를 도와 병사 3만을 내어줬다가 상술한 바와 같이 실패했고, 김유신이 기껏 뺏은 성들도 7개 중 단 하나도 건지지 못한 채 도로 다 백제에게 빼앗겼다. 공사는 재위 15년까지 계속되었고, 다음해 비담의 난이 일어났다.[19] 이희진, 은예린 등 역시 저서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 등에서 이렇듯 무리한 불사를 두고 "신라 시대판 전시행정"이라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조원숙은, 신하들이 백제에 장인을 청하라는 주청이 실제로는 탑을 짓지 말자는 반대의 의미로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20].

5.3. 대외적 압박을 받은 이유[편집]

“우리 임금께서는, 일의 형편이 궁하고 계책이 다하여, 오직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12년(643), 신라 사신이 당태종에게 구원병을 간청하며


선덕여왕의 치세가 혼란했던 이유는 고대 국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한림대 인문학부 김명준 교수는 2013년 논문을 통해 선덕여왕 대를 군사적, 외교적, 내부적 위기의 시기로 규정하고, 여왕이 불교치국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고 규정한다.

"선덕여왕 대는 삼국 간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로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군사적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여성’ 군주가 갖는 한계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한에 이르게 하였다. 당 태종의 꽃씨 선물에 담긴 희롱, 대리 통치 요구와 대내적으로 비담과 염종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당대 긴장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축적된 위기의 유산과 여성 군주로서의 한계를 가졌던 군왕이라 할 수 있다. 여왕은 이러한 위기와 한계를 ‘불교치국책’으로 극복하려 했다."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2200359

기존 주보돈, 노태돈 교수의 연구 역시 여왕의 말년을 심각한 위기로 규정하고 있고,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 것과 비담의 난을 발발 4년 전 당태종의 여왕 비하에 이어지는 맥락으로 규정하는 것도 비담의 난을 바라보는 학계의 양대 설 중 하나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108 그러나 비담의 난을 당태종의 비하와는 상관 없이 진덕여왕의 계승을 막으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으로 보는 시각도 있어서 주의를 요한다.

노태돈 교수 “고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과 한일관계(2010)”에서 선덕여왕의 군사적 실정이 비담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당의 동진이 저지된 상황에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시달리는 형편이었으며, 백제와 연결된 왜의 동향도 우려의 대상이었다. 아울러 신라 내부에선 645년 전쟁에 직접 참전하였다가 실패로 끝난 정책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논란이 조정 내에서 있었던 것 같고,[원문주석] 후사가 없는 여왕의 후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선덕여왕의 치세가 혼란했던 이유는 고대 국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고대 국가의 왕은 뛰어난 장수이기도 해야 했는데, 문제는 당시 신라의 왕이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여자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김유신이 고대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파워를 지닌 실세로 성장한 것은 왕을 대리하여 총사령관으로 전투에 출장한 경력이 쌓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의 통치시기 때 비교적 백제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특히 선덕여왕 5년에 개구리 소리를 득고 필탄과 알천을 보내 백제군을 격멸시킨 이야기는 비교적 유명하다. 그리고 칠중성 전투에서 천지가 흔들렸다는 것은 그만큼 고구려가 맹공을 펼쳤다는 것인데, 이를 알천을 보내 막아내고, 오히려 반격하여 많은 고구려군을 죽이고 생포했다는 기록에서 단순히 여왕이 직접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후 신라가 하슬라주의 군사력을 배치했다는 기사가 있기에 칠중성 전투로 신라가 군사력을 고구려와 대치중인 북쪽에 집중시켰다.

서두의 중원 왕조를 향한 청병 기록 자체는 선대인 진평왕은 물론이고 백제 위덕왕이나 무왕 또한 고구려를 상대로 했던 바 있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선덕여왕 시대 이후 신라의 절박함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강대국을 상대하는 것이 신라로서 상당히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고구려가 나제동맹의 힘에 밀려 점차 국경선을 뒤로 물린 것이나, 아버지 근초고왕을 도와 백제의 전성기를 도모한 근구수왕이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에 여러 번 북진의 좌절을 맛보았다. 한 나라가 두 나라를 맞이해 싸우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5.4. 총론[편집]

나무위키 선덕여왕 문서는 2016년 이래 여러 논란이 있었다.

2016년 10월 이후 수정된 나무위키의 선덕여왕에 대한 비판적 주장은 독자연구의 혐의가 높으며, 고대 여성역할에 따른 태생적 한계를 무시하고, 선덕여왕기의 위기를 여왕 본인의 실정으로 몰아가는 논조가 팽배하였다. 심지어 선덕여왕을 같은 시기 탄핵 된 대통령 박근혜와 같은 암군으로 동일시하는(!) 시각까지 나타났다.

선덕여왕 시기의 군사적 위기를 국가적 위기가 아니라고 주장한 학설은 박승범(2014) 등에서 제기된 반면, 선덕여왕기를 내내 실정이었다고 평가하는 주장은 논문에서 발견된 바가 없다. 특히 서영교 교수의 경우 자신의 주장을 에세이로 제기했을 뿐 논문의 형식으로 밝힌바가 없다. 이희진(역사학자)은 유사연구가로 악명이 높다. 이렇듯 선덕여왕기를 여왕의 실정기로 규정하는 행태는 대중적인 주장으로서 2016년 10월 이후에야 불거지기시작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선덕여왕 시대가 분명한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실정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고 보는 학설은 지금까지 제기된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신라의 위기는 이전의 진평왕 대부터 지속된 위기였으며, 선덕여왕 대에 새롭게 불거진 위기는 없었다. 이런 위기는 진덕여왕 시기인 649년 도살성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고 나서야 한풀 꺾였으며 위기 그 자체는 고구려가 망하고, 나당전쟁이 끝나서야 사라졌다.

특히 선덕여왕 암군설은 당대의 당태종의 여왕 비하나 비담의 선전 구호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입지가 사실은 고대부터 이어진 여성혐오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을 볼 때는 그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고려하고 봐도 명군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시절 신라는 매우 고통받는 시기였으며, 영토도 많이 상실하였고, 즉위 말에는 왕이 나라를 다스릴 힘이 없다고 반란이 일어나기 까지 하였다. 업적이라고는 불교를 융성시켰다 정도지만 사실 이당시가 안정된 시기였다면 모를까 혼란한 시기에 불교에 이렇게 투자를 한것은 비판의 여지가 충분하다. 종교라는것은 국민들은 한데 묶는 효과가 분명히 있는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국방력이나 백성의 삶의 질 향상에 직접적인 투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말년에 계속 전투에 패한점은 이런 위기상황에 불교에 투자를 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이런 면모 때문에 상술하였 듯이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는 데에 실패한 채 불사에만 치중한 임금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런상황에서 명군였으나 상황이 안 좋았다라고 해석하기는 무리가 따른다. 명군이라는걸 입증할만한 증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단지 암군이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았다 정도 뿐이 단서의 전부이다. 그러니 그것보다는 딱히 모자란 군주는 아니었으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라고 해석하는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6. 삼국사기의 기록[편집]

一年春一月 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대신 을제가 정치를 총괄하다
一年夏五月 가물다가 비가 왔다
一年冬十月 백성들을 진휼하다
一年冬十二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七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秋八月 백제가 침략하다
三年春一月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다
三年 분황사가 완성되다
三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四年 당나라에서 왕을 책봉하다
四年 영묘사가 완성되다
四年冬十月 이찬 수품을 보내서 위문하다
五年春一月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왕이 병이 들다
五年夏五月 옥문곡에서 백제의 군사를 치다
五年 자장이 당나라에 들어가다
六年春一月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삼다
六年秋七月 알천을 대장군으로 삼다
七年春三月 큰 돌이 저절로 옮겨갔다
七年秋九月 누런 꽃이 비처럼 내리다
七年冬十月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七年冬十一月 알천이 칠중성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우다
八年春二月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삼다
八年秋七月 동쪽의 바닷물이 붉게 되다
九年夏五月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을 청하다
十一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一年秋七月 백제가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다[21]
十一年秋八月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빼앗으려 하니 당나라가 상리현장을 보내 만류하여 물러나다
十一年秋八月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다
十一年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빌려달라고 청하나 이루지 못하고 모욕을 당하다
十一年 김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삼다
十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二年春三月 자장이 돌아오다
十二年秋九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빌려달라고 청하나 이루지 못하고 모욕을 당하다
十三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春正月 고구려가 북쪽의 성 2개를 빼앗다[22]
十三年 당태종상리현장을 고구려에 보내 신라를 향한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나 고구려가 무시하다
十三年秋九月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백제를 치게 하여 7성을 빼앗다
十四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十四年 김유신이 백제의 침입을 막다
十四年春三月 황룡사 9층 목탑을 창건하다
十四年夏五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니 여왕이 3만 군사를 모아 지원하였으나 패배하고, 김유신이 빼앗았던 7성은 백제에게 도로 다 빼앗기다
十四年冬十一月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六年春一月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켜 왕성을 두고 대치하다
十六年春一月八日 반란군과 대치하는 와중에 왕이 죽다

선덕여왕부터 삼국사기 5권이 시작된다.

당장 삼국사기에 남은 실지의 기록만으로도 잃어버린 성만 무려 대야성 포함 최소 44개에서 최대 52개. 반면에 회복한 성은 단 한 1개도 없음. 신라가 전례 없는 대위기에 봉착했음이 여과없이 드러난다.[23][24]

7. 가계[편집]


*부 : 진평왕
*모 : 마야부인
*자매 : 천명공주
**조카 : 태종 무열왕
*동생 : 선화공주

8. 관련 설화들[편집]

선덕여왕과 관련해서는 많은 설화들이 존재하고, 이들 설화들은 거의 대부분이 특히 불교와 연관되어 있다. 선덕여왕과 불교가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불교가 신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8.1. 선덕왕지기삼사[편집]

아마 선덕여왕이라고 하면 곧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과 관련해서는 '선덕왕지기삼사' 즉 '선덕왕이 미리 안 3가지 일'이라는 설화들이 유명하다. 삼국사기가 편찬될 때도 꽤나 유명한 설화였던 모양인지,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정사라는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으므로 둘 다 기술한다.

8.1.1. 당태종모란꽃[편집]

첫째,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3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는데,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하였다. 그 꽃이 피었다 지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첫째.

앞의 임금[25] 때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였다.
"이 은 비록 아주 아름답기는 하지만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덕만이 대답하였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을 그리지 않았기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히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꽃씨를 심어보았는데,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덕만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이를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대답하는 부분도 있다. 그건 아래의 '옥문지와 개구리' 참고.

8.1.2. 옥문지의 개구리[편집]

둘째, 영묘사의 옥문지에서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일 ~ 4일 동안이나 울어대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인 알천(閼川)ㆍ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천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반드시 적군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서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숨어 있기에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또 포위하여 활을 쏘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병사 1,200명이 왔지만 역시 쳐서 죽였으니, 단 1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둘째.

여름 5월, 개구리가 궁궐의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개구리의 성난 듯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경에 지명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웃 나라 병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리고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려고 무장한 병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습격하여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5년(636년).


일단 정사인 삼국사기에 실린 이야기가 이렇다. 이 기사를 정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으며, 여왕이 첩자를 부렸다는 설, 혹은 여왕이 방어에 성공한 다음 불교계가 퍼뜨린 프로파간다라는 설 등이 있다. 어쨌든 막아낸 건 잘한 일이었다.[26][27]

삼국유사에는 '여근곡', 삼국사기에는 '옥문곡'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 지역을 두고 삼국유사 등을 기반으로, 경주시 근처에 지금도 실제로 있는 지형인 '여근곡'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위치의 문제도 그렇고 당시 나제의 상황도 그렇고 특히 '독산성을 치려고 하였다'는 정황을 보았을 때 경주 근처 여근곡은 말이 안 되며, 그냥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서부 전선의 어딘가로 보는 게 옳다.

신종원 등의 주장에 따르면 '옥문(玉門)'과 '여근(女根)'이 둘 다 여성의 음문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일연이 그냥 여길 여근곡이라고 대충 비정해버린 듯하다고 한다. 실제 이 아래의 기사는 그러한 주장에 신빙성이 더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위의 모란꽃 일화와 개구리 일화를 두고 신하들이 선덕여왕에게, 어떻게 그걸 미리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덕여왕의 대답이 다음과 같았다.

"은 그렸지만 나비는 없었소. 그래서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은 것이오.
개구리가 화가 난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요.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남근여근 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 그래서 쉽게 잡을 줄도 알았소."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왕의 성스러운 지혜에 탄복하였다.
3가지 색깔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일까?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이들이다. 당나라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둘째.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모란꽃 일화의 경우, 실제 역사 속 당나라에서는 모란꽃과 나비가 같이 그려진 그림을 선물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로 여겨졌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모란꽃을 부의 상징으로, 나비를 '영원하지 못함'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모란꽃과 나비가 한 그림에 같이 그려진 것은 '영원하지 못하고 머지않아 고갈될 부'였으며, 선물을 할 때는 반드시 나비를 뺀 모란꽃 그림을 선물했다. 결국 위의 설화가 사실일 경우, 모란꽃 설화는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니라, 사실 그러한 문화 차이를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서 "저놈이 나 노처녀라고 씹는 거지?" 라고 오해한 이야기라는 것.

그런데 선덕여왕에게는 남편이 있었다는 게 다름 아닌 같은 책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즉위할 무렵에 이미 고령이었다는 점을 보면, 원래 남편이 있기는 했으나 당 태종이 그림을 보낼 당시에는 사별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기록 상의 충돌은 없어진다.

8.1.3. 자신의 죽을 날을 예지[편집]

셋째, 왕이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 지내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다시 어디인지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다."
그 달 그 날이 되자 왕은 과연 세상을 떠났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의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때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 중 선덕왕지기삼사 셋째.


이 설화는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사기에는 다만 '낭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사천왕천의 위쪽을 이야기한다.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릉 밑에 세웠으니, 선덕여왕릉은 도리천이 되는 셈. 일각에서는 문무왕이 사천왕사의 권위를 높이려고 지어낸 이야기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8.2. 영묘사 건축과 두두리[편집]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선덕여왕 시대에 영묘사를 건립할 당시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영묘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역시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엄청난 규모의 대역사였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편이다.

또한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 마지막 부분에도 영묘사 건축이 언급되는데,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양지사전은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는 불명이다.

8.3. 첨성대[편집]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 마지막 부분 따르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별기(別記)에 전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별기 또한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아서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8.4.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한 이유[편집]

황룡사 9층 목탑과 관련해서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승려 자장율사가 당나라의 태화지 옆을 지나가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서는, "신라여왕이 다스리니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나의 맏아들인데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가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다. 고국에 돌아가거든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워라. 그리하면 이웃 나라들이 모두 항복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장이 그 말을 듣고는 선덕여왕에게 가서 9층탑을 지어야 한다고 했고, 선덕여왕이 이 말을 믿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었다. 추가적인 이야기는 황룡사, 아비지 항목 참조. 그리고 몇 백년 후 고려 시대에 몽골군에게 불쏘시개로 태워진 것은 덤이다.

8.5. 지귀 설화[편집]

삼국유사 제4권 의해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공이 영묘사의 몇몇 곳에 새끼줄을 둘러치고 3일 후에 풀라고 하였다. 과연 3일 만에 선덕여왕이 영묘사에 방문했을 때, 지귀가 탑을 불태웠으나 혜공이 새끼줄로 맨 곳은 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지귀'라는 귀신과 영묘사 탑의 화재 사건만 살짝 언급할 뿐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조선 시대 책인 '대동운부군옥'에 지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선덕여왕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지귀가 선덕여왕이 불공 드리는 절에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탑 아래에서 지쳐서 잠이 들자, 선덕여왕이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팔찌를 지귀의 가슴 위에 놓고 갔다. 지귀는 너무 기쁜 나머지[28], 가슴부터 온몸이 불타올라 탑까지 태우고 결국 불의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지귀주사(志鬼呪詞)를 짓게하여 지귀의 화재를 방비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의 선덕여왕은 즉위 당시 이미 50살이 넘은 고령이었고, 당시 기준으로는 그냥 할머니였다.

이 설화의 유래는 중국 불교 설화인 술파가설화로 추정된다.

8.6. 밀본 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편집]

삼국유사 신주 편에 기록된 이야기. 선덕여왕이 병에 걸리자 흥륜사의 스님 법척을 불러서 병 간호를 하게 했는데 낫지 않았다. 그래서 밀본 법사를 불러 경을 읽게 했고, 밀본은 경을 읽은 뒤 막대기를 침실로 던졌다. 그러자 늙은 여우 1마리와 법척이 찔려 쓰러지고 왕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8.7. 선덕여왕의 남편[편집]

선덕여왕의 국서(여왕남편)는 삼국유사 왕력 부분에는 음갈문왕(飮葛文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음(飮)을 반(飯)의 오기로 보아서 진덕여왕의 아버지인 갈문왕 김국반이 선덕여왕과 혼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8.8. 선덕여왕의 화주[편집]

선덕여왕은 화주(火珠)라고 하는 수정 돋보기를 가지고 있었다. 햇볕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어 화주라고 불렀다. 삼기팔괴 중 하나로 꼽힌다. 삼기팔괴, 분황사 문서 참고.

9. 선덕여왕릉[편집]

파일:external/www.ttearth.com/tomb_queen_seondeok00.jpg

해당 문서 참고.

10. 각종 매체에서의 선덕여왕[편집]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는 이미 최소한 40대 후반, 많으면 할머니에 해당하는 나이였는데 대체로 각종 매체에서는 너무 젊은 모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30대 초반에 사망했으나 늘 중년 아재 배우들이 캐스팅 되는 연산군과 같은 사례.

10.1. 삼국기의 선덕여왕[편집]

김혜정이 선덕여왕 역을 맡았다. 아마 선덕여왕이 나오는 드라마 중 연개소문과 같이 역사 속 선덕여왕과 비슷한 연배의 배우를 캐스팅한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김혜정이 전원일기의 복길이 엄마로 유명한 배우다 보니, 시골 아줌마가 갑자기 공주여왕이니 하며 나오는 것에 당황하는 시청자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진평왕의 첫째 공주로 등장한다. 아버지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서 총명한 첫째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하지만, 여자가 즉위하는 것에 거부감 느끼는 귀족들 때문에 선덕여왕으로서는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깊고 인내심 강한 인물이라 그런 상황에 조바심 내기보다는 조용히 자기 세력을 키워나간다. 즉, 정계에서 주변 인물로 취급받는 조카 김춘추[31] 및 신흥 세력 김유신[32]에게 은근히 힘을 실어주며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진평왕의 승하로 마침내 즉위하지만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역사에 기록된대로 여왕이라는 점 때문에 귀족들은 은근히 반발하고 당나라 황제는 자기 친척과 결혼해서 왕위를 그 친척에게 넘기라고 하며 대놓고 비웃는 등 수모를 겪는다. 그런가하면 조카인 백제 의자왕마저 즉위하자마자 이모네 나라 신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빼앗는다.[33]

차츰 노쇠해가던 중에 비담염종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하자 병석에 누운 채 유폐된다. 다행히 김유신이 보낸 장수와 병사들이 비밀 통로로 궁궐에 들어가 선덕여왕을 구출하고 반란도 진압된다. 그러나 그렇잖아도 병들어 약해진 상태에서 반란의 충격을 극복 못 하고 결국 승하한다.

10.2. 연개소문(드라마)의 선덕여왕[편집]

배우는 배미자. 역대 선덕여왕 중에 가장 고령으로 등장한다. 정치에는 아예 관심을 놓고 불사에만 치중하는 전형적인 혼군, 암군으로 나온다. 모든 대소사는 화백회의에서 관장하고, 선덕여왕은 얼굴 마담(…) 정도로 묘사된다. 심지어 연개소문도 신라의 상황이 개판이라고 말할 정도로 나라 꼴이 말도 아닌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실제 사료에 기록된 내용 중 부정적 평가를 근거로 만들어져, 배역을 제외하면 삼국기와 함께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등장 인물이다.

10.3. 드라마 선덕여왕의 선덕여왕[편집]

10.4. 대왕의 꿈의 선덕여왕[편집]

배우는 박주미홍은희(아역 : 선주아). 진평왕의 차녀이자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공주의 여동생이다. 김유신과도 외사촌 사이이다. 그래서 작중에서 김유신을 부를 때, 공식 석상이 아닐 때는 격의 없이 "유신아"라고 이름을 부른다.[34]

항상 나라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신중하고 사려깊은 행동으로 아버지인 진평왕으로부터 무한 신뢰를 받고 있으며, 백성들로부터도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광기를 보이는 삼촌인 국반 갈문왕과의 혼인도, 본인의 안위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는 생각에서 결정했던 것. 진평왕이 덕만공주가 아들이 아님을 한탄할 정도. 또한 극중에 진평왕이 덕만공주의 자문을 구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된다.

극 초반의 모습만을 봤을 땐 청순가련형의 캐릭터 같았지만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나, 그 누구도 꼼짝하지 못했던 증조 할머니 사도태후 앞에서 자기 할 말을 다하는 등, 상당히 강단 있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해당 역할을 맡고 있던 박주미가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하차가 불가피해지면서 담당 배우가 홍은희교체되었다.

그러나 즉위 전후로는 비담의 이간질에 순간적으로 흔들리거나, 다소 어긋난 애국심과 지나친 혈기로 독선적인 행보를 보이는 비담을 통제할 엄두도 못 내다가 화가 쌓여서 성질을 내는 등, 미묘하게 무능한 인상을 준다.

홍은희박주미에 비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주미가 일찍 하차하게 된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다소 있다. 박주미 본인도 의욕이 있었는지 이 배역에서 하차한 것을 아쉬워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0.5. 점프의 선덕여왕[편집]

남녀차별에 대해서 다룬다. 유빈이는 남자에 대한 문제점을 발표하다가 이 일로 남녀 아이들이 크게 다투고 말았다. 그 후 가산점 폐지 반대 시위를 하러 온 할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는데 학교에서 친구 세진이를 다치게 하였고 이 계기로 갈등이 폭발되고 집에 뛰쳐나오다가 차차웅의 힘으로 선덕여왕이 된다.

처음에는 당황하는데, 이 때 궁녀가 첨성대의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를 관리가 빼앗는다. 이를 본 손녀는 발끈해서 이를 처벌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하는 등 많은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무리수를 해서 오직 가사노동을 남자만이 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펼친다. 이러자 남자들의 반발이 심하고 특히 비담은 아이를 돌보고 있다.[35]

그런데다 백제의 침공 때문에 당나라의 외교적 도움을 청하는데 역사대로 온갖 모욕을 당한다. 이러자 여왕에게 불만이 많은 신하들이 여자라서 비웃는다고 하면서 불만이 폭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남녀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는 손녀는 주위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남자들을 모두 배제해 버리는 무리수를 범한다. 이러자 도성을 지킬 군사들이 없어져 버린다. 이럴 때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자 막을 군사가 없어져 버린다. 다만 여왕을 이해하던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비담을 쳐 막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유성이 떨어져 사기가 꺾기자, 김유신은 일단 도망치자고 하나 선덕여왕은 이 때 연을 매달아 사기를 올린다.[36] 그리고 비담은 김유신의 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손녀는 왜 자신을 도왔는지 물어보자, 김유신은 남자와 여자는 싸우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돕는 사이라고 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한다.

다시 현대로 돌아왔는데, 이 때 밤 늦게까지 손녀가 오지 않자 걱정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유빈이는 다가가자 할아버지는 "추운데 뭐하냐"고 타박하면서도 입고 있던 장갑과 목도리를 주면서 되려간다. 결국 할아버지도 손녀를 걱정하는 분이었다.[37] 그 후 아이들도 서로 화해했는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이좋게 지낸다.

시즌 2 김유신 편에서도 선덕여왕이 나오는데 이 때는 일반적인 여왕의 모습으로 나오지만 김유신과 김춘추를 좌청룡 우백호라고 칭해 김유신이 열폭하게 만든 인물로 나온다. 다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은데 드라마에서 김유신이 펼친 낭비성 전투는 진평왕 때 일이다.

선덕여왕이 김유신이 된 광복이의 엄마와 생김새가 비슷한듯.. 때문에 김유신은 보자마자 엄마라고 불렀다.

10.6. 외국 서브컬쳐에서의 선덕여왕[편집]

놀랍게도 WOD 시리즈의 제작사인 화이트 울프 사의 Exalted와 werewolf :The Appocalypse에 등장한다. Sondok, Queen of Silla로써... 물론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창작 캐릭터로 변신여우 종족의 여왕이다.

10.6.1. 영걸전 시리즈[편집]

외전 시리즈에 해당하는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고대 무장 데이터로 존재한다. 무장 이름은 본명을 따라서 '김덕만'. 병종은 책사 계열.

10.6.2. 햄버거 상품[편집]

드라마의 붐을 타고 등장한 햄버거 상품. 희한하게도 햄버거 빵 부분이 고로케로 되어 있다. 덕분에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기름이 뚝뚝 떨어진다고 한다. 캐치프레이즈는 드라마의 그것을 패러디한 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시대의 몸짱이 된다.

10.6.3. 디아블로 3[편집]

2.1 패치로 등장한 전설 보석 신속의 곡옥에 그녀의 언록[38]이 쓰여 있다.

10.6.4. 문명 6[편집]

성우서유리. 한국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특히 공식 트위터의 예고에서 개구리, 모란꽃, 불타는 연의 그림과 함께 '전설적인 통찰력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특징이었다'는 트윗이 올라왔는데 제작진이 자료 조사를 하면서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설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1. 기타[편집]

의외로 발음하기 상당히 어려운 이름인지라 발음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헷갈린다. [선더겨왕]이라고 읽는 사람이 많지만, 국어 사전을 보면 [선덕녀왕 → 선덩녀왕]이라고 한다.

'선덕'과 '여왕'이 합쳐진 합성어에서, 앞의 말에는 받침이 있고 뒤의 말이 [ㅣ]나 반모음 [j]로 시작할 때 연음을 막기 위해 일어나는 'ㄴ' 첨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석한 것.

[1] 1990년대에 전각을 다시 지으면서 유황(당시 경북대 교수)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것이다.[2] 본 문서는 한자가 德王이고 37대 왕은 德王이다.[3] 선덕이란 이름을 쓴 사람은 불경에 여러 명 나오는데 그 중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4] 국반 갈문왕이 유복자였다고 해도 632년에는 61세가 되기 때문이다. 진평왕은 국반 갈문왕의 형이므로 그보다 많은 62세 이상으로 잡아야 한다.[5] 일반적으로 '시어머니'를 뜻한다. '고부갈등' 할 때의 고가 바로 이 글자를 쓴다.[6] 절 이름부터가 향기로운 임금의 절(芬皇寺), 즉 선덕여왕을 염두에 둔 이름이다.[7] 고타소와 결혼했는데,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었다.[8]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 압량주라고도 한다.[9] 다음 대인 진덕여왕 시대에 신라가 빼앗긴 성의 수는 총 20개나 되었고, 무열왕 시대에 빼앗긴 성의 수는 총 33개나 되었다.[10] 아버지 진평왕도 수나라의 요청하여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고 하였다.[11] 당태종이 여왕인 것을 조롱했다는 모란꽃 설화는 이런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12] 이것이 선덕여왕조 기록에서 김유신의 첫 데뷔.[13] 당나라는 그 해에 고구려에게 신라를 치지 말라고 상리현장으로 하여금 교섭하게 했는데,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말한 것처럼 수나라랑 전쟁할 때 가져간 땅 5백 리를 내놓으면 가능하다고 했다. 당 측에서는 지나간 일을 왜 지금 와서 따지냐고 항의했다.[14] 주도본, 노태돈은 진덕여왕의 계승에 반발을 품고 승계를 저지하기 위해 반란을 꾀했다고 해석했다.[15] 한국사상 최초로 연(장난감)이 문헌 상에 등장하는 순간이다.[16] 덕여왕이 8월(月)에 죽었다는 말이 인터넷 상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8일(日)의 오기를 보고 잘못 해석한 것이다.[17] 다만 만장일치가 기본인 화백회의이기에 선덕여왕의 세력인 알천이 반대했을 수 있다.[18] 노태돈, 古代 東아시아 國際秩序의 再編과 韓日關係 (2010)[19] 박순교, 善德王代 政治運營과 毗曇의 亂(Ⅰ)-선덕 16년간의 對內外政을 중심으로- , 淸溪史學 14, 1998. 주보돈, 毗曇의 亂과 善德王代 政治運營, 李基白敎授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1994. 박순교, 황룡사 9층탑의 역사적 허실. 2000, p578. 조원숙, 新羅 善德王代 度僧 施行과 佛敎政策, 2009.[20] 조원숙, 新羅 善德王代 度僧 施行과 佛敎政策, 2009.[21] 40개라는 게 아니라, 최소 41개에서 최대 49개라는 소리다.[22] 고구려 본기 보장왕 3년조에 나온다.[23] 기록만 본다면 선덕여왕의 치세는 후반부에 극단적으로 나빠진다. 즉위 원년과 다음 해의 백성을 돌보고 조세를 탕감해 준다. 그리고 알천을 대장군을 기용해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고 당나라의 국학에 신라인들을 유학 보내는 등 무난하게 치세를 보낸다. 그런데 의자왕의 대규모 공세의 허망하게 패배하고 동시에 김품석의 실책에 맞불려 신라 서쪽 변경이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당나라에 요청한 말을 들어보면, 백제의 침공은 신라 자체의 존망을 흔들리게 만들만큼 엄청난 일이었다는 소리다. 김유신 등장 이전까지 선덕여왕의 창과 방패는 알천이었다.[24] 알천은 무왕의 기습 전을 막았고,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낸 장본인이다. 그리고 대장군에 임명 되었는데, 갑자기 백제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했다는 것은 어떤 배경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단순 선덕 여왕의 무능일지 아니면 이면에 작용한 문제가 있는지[25] 진평왕이다.[26] 이는 무왕 본기에도 나온다. 군사 500명을 보내 독산성을 함락하려 출병한다. 그런데 잠시 쉬고 있는데, 알천이 기습해 전멸시키고 장수를 사로잡았다고 한다.[27] 여기에서 군사 500명으로 함락 될 만큼 성의 규모가 크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28] 혹은 만나지 못한 것을 원통해하며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9] 이요원은 결혼을 아주 일찍 했다.[30] 배우 유준상의 아내. 원래 선덕여왕 배역을 맡았던 박주미가 교통사고로 하차하면서 대신 투입되었다.[31]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이기 때문에 은따 당함[32] 신라에게 망한 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은따 당함[33] 이 드라마에서는 진평왕의 셋째 공주이며 선덕여왕의 여동생 선화공주백제 무왕과 혼인하여 의자왕을 낳은 것으로 설정됨.[34] 진평왕과 만명 부인은 아버지가 다른 남매(이부형제) 사이다. 진평왕은 만호 부인과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 태자 사이에서 낳았고, 만명 부인은 진흥왕의 남동생인 김숙흘종 사이에서 낳았다. 잠깐, 그럼 얘들은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거야.[35] 아이를 돌보는 것은 천한 일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남존여비 영향으로 좋게 보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 세금 감면의 좋아하던 백성들이 여왕의 정책에 불만을 표하기 시작한다.[36] 실제 역사에서는 이와 반대다.[37] 어떤 의미로는 선덕여왕의 치세를 잘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즉위 10년 가까이 큰 문제 없이 나라를 잘 이끌어 오다가 갑자기 백제의 공격에 위기의 몰리고, 동시에 반란까지 일어나는데 그 이유를 선덕여왕의 독선이라는 것으로 잘 표현했다. 자세한 자료가 없어서 그렇지만, 선덕여왕 후반부에 백제의 침공에 맥없이 당해야 했던 이유가 있을 것 이다. 그것이 선덕여왕의 독선일지 기습의 당했을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선덕여왕의 독선이 원인이었다고 설명하는데 다른 사극의 비해 말이 맞다.[38] "두뇌와 신체가 적보다 빠르기만 하다면, 적보다 강할 필요는 없다." - 선덕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