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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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는 창간일자 순.
국가 | ||
창간 | ||
설립 | ||
본사 소재지 | ||
대표자 | 고광헌 | |
임원진 | 대표이사 사장, 편집·인쇄·발행인 고광헌 부사장 안용수 | |
업종명 | 신문발행업, 정기간행물출판업 | |
상장여부 | 비상장기업 | |
기업규모 | ||
임직원 | 344명 (2018년 12월) | |
매출액 | 769억 5,143만 원 (2018년 연간) | |
영업이익 | 40억 365만 원 (2018년 연간) | |
순이익 | 2억 1,580만 원 (2018년 연간) | |
최대주주 | ||
사이트 | ||
1. 개요[편집]
2. 사옥[편집]
3. 역사[편집]
3.1. 대한매일신보 시대[편집]
3.2. 매일신보 시대[편집]
3.3. 서울신문 시대[편집]
8.15 광복 후 한동안 좌익계열의 사원자치위원회가 운영하다가 미군정과 갈등을 빚어 1945년 11월 10일 군정 당국이 정간처분을 내렸다. 정간크리와 함께 '매일신보' 제호는 없어지게 되었고, 위창 오세창 사장, 하경덕 부사장, 성재 이관구(1898~1991) 주필, 홍기문(1903~1992) 편집국장[2] 등의 경영진과 필진을 새로 구성하여 '서울신문'이란 이름으로 변경해 1945년 11월 23일자 석간부터 속간하였다. 지령은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를 모두 계승하여 1만 3738호로 발행하였다.
이후 여러 번 기사내용을 시비로 공보처의 간섭과 감독을 받게 되어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의 어용신문으로서 자유당을 적극적으로후빨지지하다가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시위대들이 사옥과 시설을 홀랑 불태워 버려 수많은 희귀 자료들이 손실되었고, 이승만 퇴진 이후 허정 과도정권기 들어 한국일보 출신인 석천 오종식(1906~1976)이 사장직에 부임했으나, 당연하게도 이후 독자층이 대거 이탈하면서 재정난 크리에 빠져 1961년 5월 9일 휴간되었다. 5.16이 일어난 후인 12월 22일에 주 36면 석간 단간제로 다시 속간되었고 독재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나팔수 노릇을 계속했다. 매일신보 시절에 버금가는 흑역사 시절. 참고로 이 시기인 1959년 3월 23일부터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 시기의 지령을 폐기하고 '서울신문' 제호로 창간한 시점부터의 지령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앞선 두 신문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한겨레보다 앞서 한글전용을 실행한 전력이 있다. 1958년과 1968년에 한글전용판을 발행하였지만 호응이 시원치 않아서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국한문혼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문 발행에 있어서 글자배열이나 편집체제, 문장 등을 한글판에 맞도록 연구하는 등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20년 후 창간하는 한겨레의 한글전용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셈.
또 1983년부터 국내 일간신문 최초로[3] 신문 제작방식의 주류인 납활자판을 버리고 컴퓨터 제작 시스템(CTS, 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을 도입하여 프레스센터 준공 후인 1985년 신정부터 실시해 타 언론사보다 먼저 신문제작의 전산화를 꾀하였다. 이를 1988년 한겨레신문, 국민일보, 1989년 세계일보, 1992년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1993년 한국일보, 1994년 동아일보가 뒤따르게 되었다.
이후 여러 번 기사내용을 시비로 공보처의 간섭과 감독을 받게 되어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의 어용신문으로서 자유당을 적극적으로
한겨레보다 앞서 한글전용을 실행한 전력이 있다. 1958년과 1968년에 한글전용판을 발행하였지만 호응이 시원치 않아서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국한문혼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문 발행에 있어서 글자배열이나 편집체제, 문장 등을 한글판에 맞도록 연구하는 등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20년 후 창간하는 한겨레의 한글전용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셈.
또 1983년부터 국내 일간신문 최초로[3] 신문 제작방식의 주류인 납활자판을 버리고 컴퓨터 제작 시스템(CTS, 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을 도입하여 프레스센터 준공 후인 1985년 신정부터 실시해 타 언론사보다 먼저 신문제작의 전산화를 꾀하였다. 이를 1988년 한겨레신문, 국민일보, 1989년 세계일보, 1992년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1993년 한국일보, 1994년 동아일보가 뒤따르게 되었다.
3.4. 민주화 이후 현황[편집]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노동자 대투쟁은 서울신문의 역사를 전환케 했다. 1988년 4월에 권영길 외신부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1989년 9월 사원지주제, 사후평가제, 제작 3개 국장 임명동의제 관철 등을 목표로 26일간 파업을 벌여 부분적으로 관철시켰다. 1995년에는 '서울신문 뉴스넷'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신문 서비스를 개시하고 1996년부터 가로쓰기로 바꾸었다. 1997년에는 세계 최초로 구동축이 없는 '타워형 샤프트리스 윤전기'를 도입해 가동시키고 전면컬러 제작이 가능한 '5세대 CTS'를 가동시켰다.
위와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전에는 친정부 언론의 대표주자였다. 군사독재정부 시절 중앙일간지 가운데서는 친정부 성향으로는 경향신문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1990년 경향신문이 한화그룹에 인수된 이후에는 지존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편파보도로 까였던 조선일보를 이 점에서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능가했고, 1992년 대선 당시 송정숙[4] 논설위원이 쓴 논설은 노골적인 YS찬양때문에, "YS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친여적인 자사의 기자들에게도 까였을 정도.본격 로동신문 남한(?)판(...)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야당을 공격하고 여당쪽을 두둔하는 보도를 일삼았다. "계도지"라고 해서 서울신문을 관공서나 통장집에서 정부예산으로 구독했고, 이렇게 정부예산으로 구독을 해주니 논조가 어떨진 뻔한 내용. 뭐 그렇긴 해도 문민정부 이후로는 노조도 있어서인지 노태우 정권 이전보다는 논조가 완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도 저런식의 보도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DJ당선 후에 사장을 비롯해 경영진, 편집국이 대폭 물갈이되면서 그 편파성이 1998년 이전보다는 훨씬 완화되었고 제법 공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면도 있다. 더 나아가 주필제를 2년만에 부활시켜 진보 역사학자 김삼웅을 주필직에 앉혔다.
그리고 1998년 11월 6일에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라는 제목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는 칼럼을 실은 뒤 동월 10일자부터 제호를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사명은 '(주)대한매일신보사', 제호는 '대한매일'로 각각 변경하고 도메인도 'www.kdaily.com'으로 바꾸면서 매일신보 기간을 제외한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합산하기 시작했고[5], 이후 한겨레, 경향신문과 함께 조중동에 맞서는 좌파신문 트로이카 '한경대'로 불리기도 했다.DJ 큰 그림
1999년에는 스포츠서울 부문을 '스포츠서울21(주)'로 독립시켰고, 2000년부터 편집국장 선출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2002년부터 본사 사원들로 구성된 우리사주조합이 지분을 인수해 대주주가 되어 사장 선출방식을 공모제로 바꾸었다. 2004년 1월 1일을 기해 다시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했지만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계산하고 있다.
2009년 이동화 사장 취임 이후 편집국장 선출방식이 9년만에 임명동의제로 바뀌면서 논조가 예전의 관보 수준으로 후퇴할까 싶었지만, 정부 비판 기사가 나오는 등 나름 독립적인 색채를 유지하려고 노력중이다.
2017년부터 이덕일에게 연재 지면을 주면서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덕일은 해당 지면에서 최소한의 사료 검증도 안된 자신의 망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중(...).
2018년 7월부터는 토요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다. 주52시간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종합일간지 신문사[6] 중 최초로 주 5일 발행을 하게 되었다. # 대신 평일판의 지면수가 늘어날 예정이다.
2019년 6월 포스코의 지분전량(19.4%)을 호반건설이 매입했다. 이에 서울신문사 구성원들은 언론을 민간건설 자본에 넘기지 않겠다며 ‘1대 주주 지위 회복’을 위해 노력중이다. # 아울러 호반건설의 언론사 대주주로서 가져야 할 도덕성 여부를 검증하는 측면에서 호반건설의 편법 승계 의혹을 취재하였다. ## 또한 전 지분 소유주였던 호반건설과 포스코를 정면비판하는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서울신문이 최근 호반건설의 승계 문제나 포스코에 대한 사건사고를 연속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언론의 사유화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비판하는 것은 언론사가 회사 이익과 직결된 심사를 두고 무리하게 보도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다.
위와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전에는 친정부 언론의 대표주자였다. 군사독재정부 시절 중앙일간지 가운데서는 친정부 성향으로는 경향신문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1990년 경향신문이 한화그룹에 인수된 이후에는 지존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편파보도로 까였던 조선일보를 이 점에서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능가했고, 1992년 대선 당시 송정숙[4] 논설위원이 쓴 논설은 노골적인 YS찬양때문에, "YS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친여적인 자사의 기자들에게도 까였을 정도.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도 저런식의 보도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DJ당선 후에 사장을 비롯해 경영진, 편집국이 대폭 물갈이되면서 그 편파성이 1998년 이전보다는 훨씬 완화되었고 제법 공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면도 있다. 더 나아가 주필제를 2년만에 부활시켜 진보 역사학자 김삼웅을 주필직에 앉혔다.
그리고 1998년 11월 6일에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라는 제목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는 칼럼을 실은 뒤 동월 10일자부터 제호를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사명은 '(주)대한매일신보사', 제호는 '대한매일'로 각각 변경하고 도메인도 'www.kdaily.com'으로 바꾸면서 매일신보 기간을 제외한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합산하기 시작했고[5], 이후 한겨레, 경향신문과 함께 조중동에 맞서는 좌파신문 트로이카 '한경대'로 불리기도 했다.
1999년에는 스포츠서울 부문을 '스포츠서울21(주)'로 독립시켰고, 2000년부터 편집국장 선출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2002년부터 본사 사원들로 구성된 우리사주조합이 지분을 인수해 대주주가 되어 사장 선출방식을 공모제로 바꾸었다. 2004년 1월 1일을 기해 다시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했지만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계산하고 있다.
2009년 이동화 사장 취임 이후 편집국장 선출방식이 9년만에 임명동의제로 바뀌면서 논조가 예전의 관보 수준으로 후퇴할까 싶었지만, 정부 비판 기사가 나오는 등 나름 독립적인 색채를 유지하려고 노력중이다.
2017년부터 이덕일에게 연재 지면을 주면서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덕일은 해당 지면에서 최소한의 사료 검증도 안된 자신의 망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중(...).
2018년 7월부터는 토요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다. 주52시간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종합일간지 신문사[6] 중 최초로 주 5일 발행을 하게 되었다. # 대신 평일판의 지면수가 늘어날 예정이다.
2019년 6월 포스코의 지분전량(19.4%)을 호반건설이 매입했다. 이에 서울신문사 구성원들은 언론을 민간건설 자본에 넘기지 않겠다며 ‘1대 주주 지위 회복’을 위해 노력중이다. # 아울러 호반건설의 언론사 대주주로서 가져야 할 도덕성 여부를 검증하는 측면에서 호반건설의 편법 승계 의혹을 취재하였다. ## 또한 전 지분 소유주였던 호반건설과 포스코를 정면비판하는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서울신문이 최근 호반건설의 승계 문제나 포스코에 대한 사건사고를 연속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언론의 사유화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비판하는 것은 언론사가 회사 이익과 직결된 심사를 두고 무리하게 보도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다.
4. 역대 사시[편집]
4.1. 1965~1998: (구)서울신문의 다짐[편집]
- 나라의 이익을 앞세운다
- 정치를 바른길로 이끌어준다
- 경제를 뻗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 사회를 밝게 하는 횃불이 된다
- 문화를 꽃피우는 샘터가 된다
4.2. 1998~2003: 대한매일의 다짐[편집]
- 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
- 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 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 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
4.3. 2004~ : (신)서울신문의 다짐[편집]
- 바른 보도로 미래를 밝힌다
- 공공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선다
5. 지배 구조[편집]
6. 역대 임원[편집]
6.1. 명예사장[편집]
- 오세창 (1945~1946)
6.2. 회장[편집]
이승만 정권기 시절에는 공보실장이 회장직을 겸하였다.
- 이철원 (1952~1953)
- 갈홍기 (1953~1956)
- 오재경 (1956~1959)
- 전성천 (1959~1960)
- 최치환 (1960, 불취임)
- 이관구 (1960~1963)
6.3. 대표이사 사장[편집]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문 시절 사장 목록은 해당 항목 참조. 11~19대까지는 한국신문협회장을 자동 겸임하였다.
- 초대 오세창 (1945)
- 2대 하경덕 (1945~1949)
- 3대 박종화 (1949~1954)
- 4대 정등운 (1954~1956)
- 5대 장기봉[7] (1956)
- 7대 김법린 (1958~1959)
- 8대 손도심 (1959~1960)
- 최정우 (1960, 불취임)
- 9대 오종식 (1960~1962)
- 10대 양순직 (1962~1963)
- 사장대행 김창엽 (1963~1964)
- 사장대행 이상조 (1964)
- 11대 김여원[9] (1964~1965)
- 12대 장태화[10] (1965~1972)
- 13대 신범식 (1972~1974)
- 14대 김종규[11] (1974~1980)
- 15대 문태갑 (1980~1984)
- 16대 이우세[12] (1984~1986)
- 17대 이진희 (1986~1987)
- 18대 이광표 (1987~1988)
- 19대 서기원 (1988~1990)
- 20대 신우식 (1990~1992)
- 21대 윤형섭 (1992~1993)
- 22대 이한수 (1993~1995)
- 23대 손주환 (1995~1998)
- 사장대행 김문진 (1998)
- 24대 차일석[13] (1998~2001)
- 25대 전만길 (2001~2002)
- 26대 유승삼[14] (2002~2003)
- 27대 채수삼[15] (2003~2006)
- 28대 노진환 (2006~2009)
- 29대 이동화 (2009~2012)
- 30대 이철휘 (2012~2015)
- 31대 김영만 (2015~2018)
- 32대 고광헌[16] (2018~ )
6.4. 부사장[편집]
- 하경덕 (1945~1946)
- 홍천 (1961)
- 김창엽 (1963~1964)
- 이상조 (1964~1965)
- 윤흥렬[17] (1999~2002)
- 김행수 (2002~2003)
- 안용수 (2015/2018~현재)
- 윤여권 (2015~2018)
7. 주요 간부[편집]
7.1. 주필[편집]
- 이관구 (1945~1946/1946~1947)
- 홍기문 (1946)
- 김무상 (1947)
- 이건혁 (1948~1949)
- 오종식 (1949~1952)
- 정인봉 (1954~1956)
- 전홍진 (1956~1958)
- 김영진 (1958~1960)
- 주원 (1964~1966)
- 이종극 (1966~1973)
- 한태연 (1973)
- 남재희 (1977~1978)
- 이진희 (1979~1980)
- 주영관 (1980~1982)
- 이우세 (1982~1984)
- 이한수 (1987~1988)
- 이동화 (1993~1996)
- 김삼웅 (1998~2002)
- 임영숙 (2003~2005)
- 박재범 (2009~2012)
- 이경형 (2015~2018)
7.2. 논설주간[편집]
- 이한수 (1986~1987)
- 이정연 (1991~1992)
- 이재근 (1992~1992)
- 김호준 (1997~1998)
- 임춘웅 (1998~1999)
- 우홍제 (1999~2000)
- 손성진 (2017~2018)
7.3. 논설위원실장[편집]
- 이정연 (1988~1989)
- 박화진 (1993~1996)
- 김호준 (1996~1997)
- 우홍제 (1997~1999)
- 임영숙 (2000~2001)
- 이경형 (2001~2003)
- 최홍운 (2003~2004)
- 김영만 (2004~2005)
- 신연숙 (2005~2006)
- 염주영 (2006~2008)
- 최태환 (2008~2009)
- 박재범 (2009)
- 이목희 (2009~2010)
- 구본영 (2010/2012~2014)
- 오병남 (2010~2012)
- 곽태헌 (2014~2015)
- 손성진 (2015~2017)
- 문소영 (2018~)
7.4. 논설고문[편집]
- 주영관 (1984~1988)
- 반영환 (1993~1996)
- 송정숙 (1994~1997)
- 장윤환 (1998~2002)
- 구본영 (2014~2016)
- 곽병찬 (2018~)
- 손성진 (2018~)
7.5. 편집국장[편집]
- 이관구 (1945~1946)
- 홍기문 (1946)
- 김무삼 (1946~1947)
- 정우홍 (1947~1948)
- 이건혁 (1948~1949)
- 우승규 (1949~1952)
- 최상덕 (1952)
- 고제경 (1953~1954/1956~1960)
- 조동훈 (1954~1955)
- 유완희 (1955~1956)
- 김광섭 (1960~1961)
- 김용장 (1961~1962)
- 김현제 (1962~1963)
- 박창수 (1963~1964)
- 조기홍 (1964~1965)
- 조용중 (1965~1966)
- 전민호 (1966~1968)
- 이자헌 (1968~1972)
- 남재희 (1972~1977)
- 이우세 (1977~1981)
- 이한수 (1982~1986)
- 함정훈 (1986~1987)
- 김문진 (1987~1989/1990~1991)
- 이정연 (1989~1990)
- 서건일 (1991~1992)
- 최광일 (1992~1993)
- 이동화 (1993)
- 김호준 (1993~1996)
- 우홍제 (1996~1997)
- 장정행 (1997~1998)
- 정신모 (1998)
- 황병선 (1998~1999)
- 이경형 (1999~2000)
- 최홍운 (2000~2002)
- 김영만 (2002~2004)
- 최태환 (2004~2006)
- 강석진 (2006~2008)
- 오병남 (2008~2010)
- 이목희 (2010~2012)
- 손성진 (2012~2013)
- 곽태헌 (2013~2014)
- 오승호 (2014~2016)
- 김균미 (2016~2017)
- 박홍기 (2017~2018)
- 박찬구 (2018~)
7.6. 편집위원실장[편집]
- 임동수 (1982~1984)
8. 특징[편집]
리즈시절엔 나름 이름이 있던 신문사였다. 그러나 현재는 조중동이나 한경오 등에 밀려 인지도는 한국일보와 같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며 현재 재정상태도 크게 좋은 편은 아닌 듯, 1970~80년대를 주름잡은 그 유명한 '선데이서울'을 비롯하여 퀸, TV가이드, 뉴스피플, 파르베 등 많은 잡지가 이 신문사 소속이었지만 지금은 <퀸>을 빼고 모두 폐간되었다. 요즘 독자들에게는 서울신문 자체보다는 해외의 기상천외한 토픽 및 가십들 위주로 공급하는 인터넷 신문 브랜드 '나우뉴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정부가 운영하던 공기업이었으나 2002년 1차 민영화 이후 최대주주는 본사 사원주주조직인 우리사주조합(39%)으로 바뀌었으나, 그 외에는 KBS, 기획재정부, 포스코 등이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포스코는 2002년 이후 민영화되어 정부지분이 아니다.
서울신문에서 창간했던 스포츠서울의 경우 1999년 12월 자회사로 분사된 이후 2007년 5월 서울신문에서 보유한 주식을 모두 매각했다. 그러나 2016년 현재까지도 자매지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성지인 <Queen>이 있다.
정부기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무원 시험등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들 대부분은 이 신문을 거쳐 민간에 발표된다. 수험생이라면 주목할만한 부분.
그 외에도 최우수 교도관을 뽑는 교정대상과 우수 청년농민을 뽑는 농어촌청소년대상을 1981년부터 시상해오고 있으며, 1959년부터 2003년까지 패왕전이라는 프로바둑기전을 개최한 바 있었다. 2002년부터 서울 상암에서 '서울신문 하프마라톤'을 매년 개최중이다.
과거에는 정부가 운영하던 공기업이었으나 2002년 1차 민영화 이후 최대주주는 본사 사원주주조직인 우리사주조합(39%)으로 바뀌었으나, 그 외에는 KBS, 기획재정부, 포스코 등이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포스코는 2002년 이후 민영화되어 정부지분이 아니다.
서울신문에서 창간했던 스포츠서울의 경우 1999년 12월 자회사로 분사된 이후 2007년 5월 서울신문에서 보유한 주식을 모두 매각했다. 그러나 2016년 현재까지도 자매지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성지인 <Queen>이 있다.
정부기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무원 시험등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들 대부분은 이 신문을 거쳐 민간에 발표된다. 수험생이라면 주목할만한 부분.
그 외에도 최우수 교도관을 뽑는 교정대상과 우수 청년농민을 뽑는 농어촌청소년대상을 1981년부터 시상해오고 있으며, 1959년부터 2003년까지 패왕전이라는 프로바둑기전을 개최한 바 있었다. 2002년부터 서울 상암에서 '서울신문 하프마라톤'을 매년 개최중이다.
9. 자회사[편집]
10. 관련 문서[편집]
11. 관련 문헌[편집]
[1] 이외에도 한국방송공사가 지분 8.98%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42.84% 정도를 정부 관련 기관에서 소유하고 있다.[2] 벽초 홍명희의 장남. 1948년 월북.[3] 1975년부터 코리아헤럴드가 먼저 CTS를 도입하였으나, 한글 신문으로는 서울신문이 처음이다.[4] 이 양반은 이때의 공로인지 1993년 3월에 YS에 의해 보건사회부 장관이 되었다가 1994년에 장관직을 내려놓고 본사 논설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1997년 15대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여 물의을 빚고 결국 그해 말에 논설고문직을 내려놓고 퇴사하였다.[5] 그러나 매일신보 기간을 도려낸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6] 스포츠신문은 2013년 초 무렵부터 토요일자를 발행하지 않았다.[7] 1980년에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신아일보의 창업주이기도 했다.[8] 1957년에 생긴 한국일간신문발행인협회 초대회장도 겸임.[9] 전 민주공화당 중앙상무위원.[10] 전 중앙정보부장 고문, 민주공화당 의장고문.[11] 전 한국일보 사장.[12] 이후 한국언론회관 및 한국언론인금고 이사장 역임.[13] 전 국민일보 사장.[14] 본사 최초의 민선(공모제) 사장. 중앙일보 논설고문 역임.[15] 전 금강기획 사장,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 회장.[16] 전 한겨레 사장.[17] TV광고 감독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