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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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2월 창당되어 국민의당과 합당한 정당: 국민회의

  • 새정치국민의당의 이름을 사용한 정당: 친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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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정치국민회의

영문 명칭

National Congress for New Politics (NCNP)

약칭

국민회의

창당일

1995년 9월 11일

해산일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개편)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5-4

대통령

김대중

국회 의석수

103석 / 299석(15대 국회, 새천년민주당으로 개편 직전)

당 색

녹색(#00AA7B)

이념

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

공식 사이트

홈페이지
1997년 당시 웹사이트


1. 본문2. 창당3. 총선 부진4. DJP 연합과 대선정국5. 당선과 여당화6. 현 민주당계 정당의 직계(중간) 조상?7. 역대 선거결과8. 관련 문서

1. 본문[편집]

파일:새정치국민회의.jpg

1995년 9월 5일, 당시 김대중의 주도 아래 민주당(1991년)에서 분당하여 창당한 중도개혁노선의 정당으로, 약칭 국민회의로 부른다.[2]

1987년 11월 창당한 평화민주당의 구성원과 그 해 12월 대통령선거 때 김대중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취했던 진보적 재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하였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ncnp.or.kr', PC통신 접속 명령어는 'go ncnp'였다.

2. 창당[편집]

일반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넬슨 만델라가 주도한 아프리카 민족회의에서 아이디어를 딴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2012년 출간된 <김대중, 다시 정권교체를 말하다> 에서는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가 이끌던 중도 민족주의 정당 "인도 국민회의"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3] 통일주체국민회의 와는 상관없는 이름이다

김영삼의 "신"한국당, 1992년 대선에서의 "'한국병'의 치료사"라는 이미지와 대비되는 "새"라는 조어를 붙인 정당. 일단 평화민주당의 분위기를 빼는데는 성공했다는 평이 당시에 있었다.[4]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패배를 계기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1995년 7월 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자신의 계파를 중심으로 민주당(1991년)을 탈당한 뒤 창당한 정당으로서, 창당과 동시에 동교동계('내외문제 연구회(최대 57석)')를 중심으로 원내 의석 53석을 차지해 제1야당이 됨으로써, 정계는 1여 3야(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1995년))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대통령 중심제(= 의원 내각제 반대)와 중소기업의 육성, 여성부 신설, 국가보안법의 민주질서보호법으로의 대체, 남북연합통일방안 등을 강령으로 삼고, 중산층과 서민 대중을 위한 국민정당을 표방하면서, 보수 중산층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중도보수노선을 채택하였다. 동시에 이는 90년대 후반 대두된 영국 노동당토니 블레어미국 민주당빌 클린턴의 "신진보주의(신개혁주의)" 노선(소위 제3의 길)의 수용이기도 했다. 대놓고 비례대표를 사학 재단 이사장을 1번으로 하질 않나... 같은 시기 신한국당은 개혁을 앞세우며 혁신공천을 내세웠다. 사실 이때는 양당이 모두 중도로 달려갔던 시기. 어찌보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은 철새 국회의원의 대량 생산 원인이 되었다.

3. 총선 부진[편집]

하지만 창당 다음해 치러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회의는 야권분열로 말미암아 79석으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얻었다. DJ 개인은 자신이 전국구 의원이 되는데 고작 1번 차이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이 14석이 늘었고, 여당은 26석이 줄었다"[5]라고 위안했지만, 사실상 100석 이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패가 맞았다. 반면 여당인 신한국당은 대통령의 임기 말임에도 개혁공천을 바탕으로 (예상인 155+a보다는 저조했으나) 139명이나 당선 되었으며,[6] 기어이 무소속과 자유민주연합 의원 4명을 모아 157석으로 과반을 달성하고 만다.[7]

이런 패배에는 민주당계 야권의 분열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실제로 새정치국민회의통합민주당의 표분산으로 신한국당이 어부지리로 당선된 지역구가 30군데가 넘었으며, 특히 서울 강북과 경기 남부 등 기존 민주당계 정당이 강세를 보이던 수도권에서 이런 일이 많이 벌어졌다.[8][9] 총선 결과 민주당계 야권 전체 의석은 98~95석에서 94석(79+15)으로 오히려 줄었다. 이 모든게 김대중의 "대통령병" 때문이라며 은퇴번복과 분당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더욱이 이 해 말에는 신한국당의 '제3자 개입'을 막는 등의 내용을 추가한 크리스마스 노동법 날치기가 일어나면서 아쉬움이 커졌다. 이 상황에서도 국민회의는 강경한 장외투쟁을 하지 않음으로서 진보에겐 불신을 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보수 표심 달래기 행보를 지속한다.

한편 자유민주연합은 충청, TK, 강원에서 "녹색 바람"으로 2배로 팽창, 25석을 늘려 50석을 만들면서 제3당 사상 최대의석을 달성한다.[10] 이런 형국은 DJ가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필연적으로 손을 잡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의원 내각제 개헌에 동의하게 된다. 결과는 아시발쿰

4. DJP 연합과 대선정국[편집]

대선 초기부터 DJP 연합을 바탕으로 줄곳 1위로 앞서가던 DJ였다. 한나라당의 후보들은 대선 경선에서 박찬종, 이인제를 필두로 "9룡"이랄 정도로 각축을 벌였으며, 결국 허주 김윤환의 이회창 옹립에 따라 이인제가 패배했다. 그러나 아들의 병역의혹이 불거지면서 이회창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인제가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서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한다. 보수 성향의 이인제가 제3후보로 출마하면서, DJ측은 더더욱 호재를 맞게 되었다. 거기에 1997년 외환 위기가 겹치면서 김영삼 정부에 대한 지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회창의 끈질긴 추격은 계속되었다. 1997년 10월 총선 참패후 살길을 도모하던 조순의 통합민주당(1995년)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이인제 뽑으면 DJ가 된다"는 논리로 이인제의 지지율을 계속 빼왔다. 이회창 후보는 기어이 1달 전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을 빼앗으며 2위를 탈환했지만, 추격전이 너무 늦어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김대중은 39만표(1.6%) 차로 대선 4수만에 간신히 당선되었다. 이 승리는 기존 야당 고정표 + DJP 연합에 따른 충청표와 일부 중도보수표 + 이인제 분열효과 + 경제위기에 따른 정권 교체 열망 + 권영길(국민승리21) 후보와의 연대를 차단함으로서 얻은 중도표[11] + 권영길에서 이탈한 '비판적 지지'의 진보표 + "병풍"으로 인한 군복무 병사들의 지지를 누룽지 긁듯 긁어모아 얻은 아슬아슬한 승리였다는 평이 많다. (거꾸로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권 교체는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대선 1년전부터 여론조사 내내 1위였으며, 1위에 대한 밴드웨건 효과 등과 조순 등 반DJ 민주계가 모조리 3김정치와 정치공학에 반대한다는 논리로 여당에 참여하는 등의 사례도 많았다는 점에서 "김대중이 신승한게 아니라 이회창이 석패했다"라는 시각도 있다.

여하간 이 선거는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New 김대중"을 내세운 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과 달리 이미 96년부터 지속했던 "준비된 대통령"을 기반으로 한 안정 전략의 승리였다. 그 대표적 광고가 DJ DOC의 노래를 패러디한 "DJ와 춤을"#인데, 지금도 노무현기타 연주, 이명박국밥 먹방(...)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대선광고의 예로 꼽힌다. 이 광고에서는 노무현이 직접 등장하고,[12]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연상하는 장면이 나오기에 "5년 후를 예언한 광고"라는 드립도 있다. "행복한 가정, 안정된 사회, 강력한 국가!"라는 아무리 봐도 보수적이고 여당스러운 선거 구호가 제대로 먹혔다. 거기에 더해 광고에서 김대중은 젊은 층들에게는 딱딱할지도 모르는 정권 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준비된 자신에게 꼭 한번 기회를 달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이른바 '구호(프레임)의 연성화') DJP 연합 강조를 위해 김종필박태준 등 자민련의 보수인사들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웃집 할아버지 이미지나 신세대적 감각의 원곡, 당 소속 연예인(정한용, 손숙)의 등장 등.. 가히 가장 모범적이고 집약적인 선거광고랄까.

반면 이회창의 선거 구호는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 "3김 정치 해소"를 주장하는 아무리 봐도 진보 성향의 야당에게나 어울릴법한 구호를 내세웠다. 처음 실시된 TV토론 역시 DJ의 지지율을 높이는데 한몫 했다.

5. 당선과 여당화[편집]

그렇게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40.3%의 득표율로 당선됨으로써 헌정 사상 처음으로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였고,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면서 여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동의함으로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의원들을 협박 회유하고 뒤에는 이인제, 이만섭의 국민신당과 합당하는 등의 방식으로 기어이 억지 과반 의석을 만듦으로써(소위 "의원 빼오기") 집권 이래 국민의 개혁욕구를 소화하는 데 실패하는 한편, 지역정당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3] 이에 '개혁정당'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TK, PK에서도 의석을 내는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한다는 차원에서 2000년 1월 20일, 새로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에 합당되는 형식(신설합당)을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과반에 또다시 실패한다.)

6.민주당계 정당의 직계(중간) 조상?[편집]

현 민주당계 정당의 직계 정당을 논할 때, 사람에 따라서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새정치국민회의부터 직계 조상이라 보는 견해가 강하다.[14] 현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스스로가 정당 연혁 직계로 새정치국민회의를 표시하고 있다. 민주당계 정당의 성향이나 구성원들의 성향도 이때부터 확립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때 들어올 사람은 들어오고 나갈 사람은 나갔다는 얘기. 다만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민주당계 정당에서 항상 등장하는 "중산층과 서민"을 지지기반으로 내세운 강령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사실상 시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5]

7. 역대 선거결과[편집]

8. 관련 문서[편집]

[1] 참고로 단풍잎처럼 보이지만 비둘기와 새싹을 합성한 사진이다. 비둘기는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 때도 쓰던 로고였다. 또한 이 정당을 끝으로 2012년 민주통합당 시절까지 민주계 파란색 계통은 끊어졌다가 2013년 다시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부활한다.[2] 본래는 임시로 새정치회의라는 약칭을 썼었다(예: 당시 보도1 / 당시 보도2). 그랬다가 이후 약칭을 국민회의로 확정했다. 훗날 천정배가 이 국민회의라는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하다가 나중에 안철수의 국민의당과 합쳤다.[3] 이 책은 김대중의 비서 출신으로 민주당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정치평론가 장성민과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김종혁이 공동집필하였다.[4] 평화민주당은 서울과 호남에 너무 치우친 까닭에 지역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짙었다.[5] 혹은 "예상 의석에서 26석이 늘었다."[6] 임기말이어도 대통령의 지지율이 여전히 낮은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과반은 무리더라도 이 정도 의석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몇 석 씩은 차이가 나겠지만..[7] 이 때 국민회의에선 서울 송파구김진명을 공천한 바 있다. 당연히, 그리고 다행히 낙선했지만. 해당문서 참조.[8] 자민련도 수도권 여러 곳에 후보를 내보냈지만, 애초에 지역기반이 별로 없던 지역이라 득표율이 저조한 관계로 신한국당이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9] 이명박 당시 후보도 이때 민주당과 국민회의의 분열 덕에 종로구에서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 복귀에 성공한다. 다만 선거법 문제로 연루되어 자진 사퇴했다. 김영삼 정권의 공정선거 정책의 시범타라는 말도 있다.[10] 1988년 통일민주당(59석)의 경우엔 제3당이라고 보기엔 지지율도 평민당보다 높고, 성향도 평민당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단순히 야권의 지역분열에 따른 것으로 3당 합당(민주자유당 창당)에 따라 짧은 기간 존속했으므로 제외하자.[11] 97년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진보정당이 외면받고 멸시하는 풍습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NL의 막장짓만 빼면...[12] Dj와 춤을 대선광고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로 나오는데 나오는 장면이 공교롭게도 '"16"'초다. 그리고 한술더떠 광고 중간에 나오는 지구본은 1999년 지구멸망설을 부정한 것이라고 한다.[13] 사실 의원 빼오기, 합당하기는 과반에 미달한 여당의 전통이었지만(3당 합당이라든가), 새 정권에 대한 기대를 하던 국민들에게 정권교체한 세력도 별수 없구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히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그리고 의원 빼오기는 새천년민주당의 16대 총선 "의원 꿔주기"와 함께 정치공학의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14] 물론 한국민주당 혹은 평화민주당으로 거슬러 가야한다는 주장도 만만찮지만.[15] "확연하게 두터워진 중산층을 잡아야 한다", "중도까지 지지층을 넒혀야 선거에서 이긴다"는 정치공학적 판단으로 선거의 촛점을 중산층에 두기 시작한게 이때부터이다. 당장 선거를 앞두고 과거라면 기득권층이라면서 외면했을 관료, 군인, 기업인, (친기업성향) 변호사 등을 대거 영입하면서 인적 구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이전 평화민주당 - 통합민주당 시절에는 강령도 훨씬 진보적이었고, 실제 노동계나 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도 많았다. 젊은 피 수혈의 대상도 학생운동권, 노동운동가, 인권변호사 일색이었다.[16] 대표적인 DJP 연정의 위력과시로 강원, 영남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민회의 + 자민련(충청 + 인천광역시의 4명)이 광역자치단체장에서 승리했다. 인구가 적은 강원만 승리했다면 그야말로 영남을 제외한 전국을 석권할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