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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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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발생일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유형

붕괴, 부실공사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

좌표

북위 37° 29′ 53″
동경 127° 00′ 46″

사망자[1]

502명

실종자[2]

6명

부상자

937명

피해 금액

약 2700억원[3][4]


파일:attachment/삼풍백화점 붕괴사고/sampoongc.jpg

三豊百貨店崩壞事故 / Sampoong Department Store Collapse

1. 개요2. 붕괴사고 이전의 삼풍백화점
2.1. 어마어마한 규모와 화려했던 이미지2.2. 부지 용도2.3. 부실 공사2.4. 부실 관리
2.4.1. 붕괴의 치명타 에어컨
3. 전조 현상4. 사고 당일 일지
4.1. 붕괴 당일 오전4.2. 대책 회의 그리고 영업 강행4.3. 붕괴4.4. 붕괴 직후
5. 언론 보도6. 구조 작업
6.1. 최후의 생존자 3인
7. 재판과 손해배상
7.1. 국가배상 부정
8. 사고의 여파
8.1. 안전 평가 실시8.2. 건축계에 미친 영향8.3. 소방 방재에 미친 영향8.4. 의학에 미친 영향
9. 대중문화에서10. 사고 이후
10.1. 남아있는 흔적들
11. 사고 관련 영상 자료
11.1.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 백화점, 예고된 붕괴(Deadly Design, 2005)"11.2.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 참사의 진실(Superstore Collapse, 2007)"11.3. 디스커버리 채널 : Blueprint for Disaster(재앙의 청사진)11.4. MBC 뉴스데스크11.5.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4회
12. 최후 생존자 3명의 구조13. 괴담14. 같이 보기

현재 모습(다음 로드뷰)

1. 개요[편집]

탐욕의 종말 삼풍 대학살 - 1995년 7월 13일 한겨레21 제67호 표지 문구


한국에서 일어난 참사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500여명) 최악의 사고

세계 건물 붕괴 관련 참사 중 사망자가 10번째로 많은 참사 위키백과[5]

1995년 6월 29일(목) 오후 5시 57분에 발생한 한국 역사상 최악의 건축물 붕괴사고. 6.25 전쟁, 또는 8.15 광복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안긴 사고이기도 한데,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지면서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오죽하면 이 사고가 발생한 직후 원인을 알기 전까진 전 세계의 모든 건축가들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외부의 충격이 없이' 붕괴된 모습이 이렇게도 처참하다니 말도 안 된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연장선상에서 사고 직후 영국 언론에서는 외부의 충격 없이 건물이 저런 형태로 완전히 붕괴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북한에 의한 테러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원인이 부실공사로 밝혀져 여러모로 더더욱 충격을 주었다.

당시 구조에 힘썼던 소방 대원들이 20주기를 계기로 한 자리에 모였다.

2. 붕괴사고 이전의 삼풍백화점[편집]

삼풍건설그룹의 회장 이준은 60년대 중앙정보부의 인맥으로 강남 서초구의 군용지를 불하받았다. 이 땅은 70~80년대 강남개발열풍에 급격히 발전하고 이준은 그동안 건설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때 지은 건축물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이준은 그동안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1980년대 후반 서초구 외인주택단지를 철거한 부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삼풍아파트를 건설하고 아파트 단지 내 근린상업지구 개념으로 삼풍백화점도 함께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후술하다시피 단순 근린상업지구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역대급.

2.1. 어마어마한 규모와 화려했던 이미지[편집]

파일:attachment/sampoong10.jpg


붕괴 전의 삼풍백화점 내부 모습을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영상자료이다. 한눈에 봐도 넓고 쾌적한 실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여러번의 새단장을 통해 훨씬 고급스러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참고로 3분 이후 음량이 갑자기 커지면서 붕괴 이후의 모습이 나오니 주의.


이 광고 23초쯤에 나오는 여자어린이는 배우 김민정이다.

1990년 당시의 광고(CF)에 쓰인 음악은 존 윌리엄스의 "올림픽 정신(The Olympic Spirit)" 으로 19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링크

파일:attachment/samp91.jpg

파일:attachment/sampoong11.jpg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개장했는데 당시 전국 2위 규모의 단일매장이었다.[6][7] 하얀색 바탕의 기존 백화점 건물 디자인을 탈피하여 외형 색상을 분홍색으로 채택했고[8] 콘크리트와 유리의 조화로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초호화 쇼핑몰의 컨셉으로 출발한 삼풍백화점은 지금 기준으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각종 명품 브랜드들을 대거 입점시켜 1980년대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던 강남구, 서초구 지역 고객들을 쓸어모으게 된다. 이게 어떤 수준이었냐 하면 현재의 압구정 현대백화점 본점이나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조차 당시의 삼풍백화점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9]

삼풍백화점은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매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게 된다. 중앙홀 4층에 있던 아트홀은 서울시내 유명 공연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곳에서 데뷔하기도 했다. 또 인테리어 또한 당시로서는 고급스러웠었다. 또 수입품과 사치품을 많이 판매했는데, 이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10] 그 유명한 페라가모를 직수입해 판매하기도 했으며,[11] 이외에도 다양한 직수입브랜드들을 들여왔다. 물론 이 브랜드들은 붕괴 이후 국내를 떠난 경우가 많다. 또 B동에 수영장같은 문화공간을 만들어 손님들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 문화전과 이태리 문화전같은 행사를 통해 해외 문화 및 브랜드들을 소개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붕괴 당시에는 프랑스 문화전을 준비 중이기도 했다. 그리고 94년에는 탤런트 최명길을 모델로 대대적인 광고에 나서기도 했으며[12], 영국에서 욕실용품브랜드인 넥타, 이태리에서 의류브랜드인 마리나리날디를 직수입해 별도의 매장을 직접 운영하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생활용품 전문점인 아프레미디를 자체론칭해 백화점과 압구정동에 매장을 열기도 했다.[13]

당시 층별구성을 보면, 1층에는 로비와 수입품매장, 화장품 매장이 있었는데, 삼풍이 당시 수입브랜드 유치에 의욕적이었던지라[14] 일반인들은 이름도 못들어봤을 브랜드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로비는 많은 사람들이 중앙홀이라고 불리던 공간에 있었는데, 정문쪽에는 분수대가 있었고, 연결통로와 행사매장이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2층에는 여성복 매장이 있었는데 비싼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메이저급 브랜드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름 날리던 디자이너들은 왠만하면 이곳에 매장을 냈었다고 한다. 3층은 남성복과 캐주얼, 스포츠전문점이 있었는데, 이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4층가정용품 매장은 더 심했는데 온갖 수입 가구와 장식품, 가전제품을 팔았으며, 심지어는 쓰레기통이나 수세미까지 비싼 수입품을 판매했다고 한다. 완구매장에는 레고 같은 요즘기준으로도 만만치 않은 완구들은 판매했었다고 한다. 5층에는 고급 식당들이 즐비했는데, 당시 방문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콩나물국밥집이 유명했었다고 한다.[15] 당시 이태리 음식점에서 근무했던 사람에 따르면, 인기 연예인이나 아나운서들도 자주 볼수 있었다고 한다. 지하 식품관도 비싼 식품들을 많이 팔았는데, 당시 국내에서 고급 식품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점을 고려하면, 부유층이 많이 다녔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물론 B동쪽 슈퍼마켓은 논외.지하에는 웬디스 햄버거 매장이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대중적인 이미지였던 뉴코아를 제외하면[16] 서초동에서 거의 유일한 고급백화점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거주하던 부자들은 자주 들르는 장소였다.[17] 다만, 이러한 고급화 전략과 단일매장 전략[18] 때문에 타 백화점보다는 매출이 부진했고 유동인구를 제대로 흡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19]

이렇게 크고 파격적인 외관을 갖고 있었던 삼풍백화점은 사실 최악의 부실 건물이였고 훗날 붕괴 이후, 외국의 건축 전문가들은 이따위로 지어놓고도 6년이나 버텼던 사실에 놀라워했다. 원래대로라면 1년 안에 무너져도 결코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 후술할 무량판 구조 공법의 강점 때문에 그나마 버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2.2. 부지 용도[편집]

파일:삼풍 백화점 실제 사진.jpg


사고 원인에 앞서 설명할 것은 삼풍백화점 시공 계획이 세워지기 전 본래 이 부지는 주거용이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삼풍백화점이 들어선 부지는 삼풍건설산업에서 지었던 외인 주택 단지의 일부였고 주거용 건물만 세울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삼풍백화점은 본래 그 자리에 지어질 수 없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풍 측은 이 외인 단지를 허물고 삼풍아파트와 함께 백화점을 짓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부지 용도를 변경하여 공사를 하게 되었다. 때문에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매우 가까운 거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까딱 잘못되면 아파트의 연쇄 붕괴로 인하여 수십 배의 사상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부지 용도 비리를 두고 붕괴 직후에는(부실공사가 붕괴 원인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는) 허약한 지반 때문에 건물이 붕괴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21] 비록 삼풍백화점의 붕괴 원인은 지반이 아니었지만, 삼풍백화점이 건설 시작부터 철저하게 비리의 온상인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3. 부실 공사[편집]

파일:attachment/삼풍백화점 붕괴사고/Sampoong.jpg

위 설계도는 진짜 건설되었어야 했었던 설계도로, 1987년 우원건축사무소가 설계한 것이다. 이렇게만 성실하게 지어줬어도 삼풍백화점은 지금까지 건재했을 것이다. 물론 저대로 안 짓고 이곳저곳에서 푼돈 몇 만원 아끼다가 다 무너졌으니 이제와서 의미는 없다.

원래 삼풍백화점은 '삼풍랜드'라는 이름으로[22] 바로 옆에 있던 삼풍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대단지 종합상가[23]로 설계되어 우성건설[24]에서 시공을 맡는 것으로 최초 발주가 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거의 완공에 가까워질 무렵 건축주인 이준 회장은 건물 용도를 백화점으로 변경하고 시공사에 원래 4층이었던 설계에 1층을 더 얹어 도합 5층으로 건물을 시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시공사인 우성건설 측은 붕괴 위험성을 이유로 증축을 거부했고[25], 결국 이준 회장은 우성건설과의 시공 계약을 중도 파기시키고는 자사 계열사인 삼풍건설산업이 시공을 이어가게끔 한다. 사실 백화점과 같은 복합 건물은 설계 변경 시에 구조 전문가의 검토가 필수적이나[26] 이준 회장이 수익을 위하여 건물의 안전성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구조 설계를 변경한 게 문제였다.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이런 사고는 절대 발생하지 않았다. 정말 "나는 미치도록 층수를 올리고 싶다! 무조건 층수를 올리고야 말겠다!"라는 심산이었으면 아예 깨끗하게 다 헐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지었어야 했다. 후술하겠지만 이 구조의 건물은 절대 고층으로 지을 수가 없다. 즉, 고층을 견딜 수 없는 구조다.

무량판 설계도

무량판 종류

적절히 시공된 무량판

그리고... 삼풍백화점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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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판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

게다가 건설 자체도 막장이었다. 삼풍백화점은 무량판(Flat-Slab) 구조로 대들보가 없이 바닥이 직접 기둥으로 하중을 전달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설계 상으로는 기둥과 위층 바닥 사이에 하중 전달을 보조하는 지판이 하나 더 설치되어 바닥 철근과 기둥 철근이 잘 연결되도록 했으나 실제로는 지판 두께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일부 기둥은 지판 자체가 없어서 바닥과 기둥의 철근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거기에 무량판 구조 또한 원래는 바닥 끝쪽 철근도 "ㄱ자"로 꺾여 있는 형태로 시공해서 건물 상판의 침하로 인한 연쇄 붕괴가 일어날 경우 이 철근의 끝부분이 일종의 갈고리 역할을 하여 기둥이나 내력벽에 교차해 있는 다른 철근을 잡아채어 버티는 것으로 건물의 연쇄 붕괴를 차단하거나, 적어도 붕괴 속도를 늦추는 제동장치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은 그런 것도 전혀 없었으며 백화점이 붕괴할 당시 마치 발파 방법으로 철거될 때처럼 아무런 제동 없이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도 바로 이 철근의 끝부분을 ㄱ자로 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큐에 나온 교수가 실험을 통해 이 지판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나무 젓가락 여러 개를 세운 뒤 그 젓가락 위에 둥근 종이 스티커를 붙이고, 위에 또 얇은 알루미늄 호일을 바닥으로 만든 층을 하나 얹은 뒤 위층에 물을 부어 하중을 가하는 실험이다. 여기서 나무 젓가락이 기둥, 종이 스티커가 지판 역할을 하는데, 물을 꽤 많이 부어도 호일 바닥이 뚫리지 않는다. 심지어 기둥을 하나 제거해도 잘 버틴다. 그러나 종이 스티커를 제거한 뒤에 물을 부었을 때는 가차없이 바닥이 뚫린다.

이것도 모자라서 삼풍백화점은 몇몇 기둥들을 제거했으며 남은 기둥들의 지름을 25% 정도 깎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본래 1987년 우원건축사무소(당시 대표이사 문정일)가 설계한 삼풍백화점 설계도에는 기둥이 32인치였으나 건축은 23인치로 이루어졌다.[27][28] 또한 에스컬레이터에 방화벽을 설치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부분은 기둥의 4분의 1을 아예 잘라버렸다!

또한 삼풍백화점은 준공검사도 무시하고 가사용 승인만으로 개점하였다. 즉 개점일이었던 1989년 12월 1일에도 법적으로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이었다는 뜻이다! 준공 승인을 받기 전까지는 개점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임에도 삼풍그룹은 이를 과감히 무시했다. 심지어 4층과 5층은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이 층들은 90년 봄 새 단장을 맞아 오픈하게 된다. 삼풍백화점이 정식으로 준공 승인을 받은 것은 개점 9개월이 지난 1990년 8월의 일이었다. 거기다가 붕괴 8개월 전인 1994년 10월에는 기초 부분인 지하 1층에 구조 변경 공사를 했고 다음 달인 11월에는 위법 건축물 판정을 받았다.

건축 용도와 다른 용도의 철근을 사용하여 결과적으로 건물의 붕괴 속도가 가속화되어 버리는 등 당시 부의 대명사였던 삼풍백화점은 실상 옹졸한 아낌과 계산 착오로 뒤범벅이 된 건축물이었다. 이쯤되면 전문가들이 말하듯 무너진 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무려 6년을 버틴 것 자체가 오히려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4. 부실 관리[편집]

그 후 삼풍백화점 운영진은 백화점 운영업자라기보다는 '건물 철거업자'에 가까웠다. 그냥 6년간 조금씩 철거되고 있었다고 하는게 맞다. 보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내구도를 깎아내리고 있었으니 이런 참사는 예고된 것이었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인터뷰한 당시 청소부의 증언에 따르면 휴점일에도 매장을 재배치하고 공사를 하느라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삼풍백화점 층별 시설도 출처

A동 (백화점)

중앙광장, 아트홀(4,5층)

B동 (근린시설)

옥상

옥상

5층

전문식당가

5층

삼풍스포츠맥스, 수영장, 사우나, 이발소

4층

문화, 가정용품, 혼수용품

4층

삼풍스포츠맥스

3층

남성의류, 캐주얼, 스포츠

3층

문화센터, 갤러리, 업무시설, 상가

2층

여성의류

2층

업무시설 (증권사), 상가

1층

잡화, 해외수입브랜드, 화장품

1층

업무시설 (은행), 약국, 상가

지하 1층

슈퍼마켓, 식품관, 주방용품, 유아용품, 서점(B동)

지하 2층

지하주차장, 창고

지하 3층

지하주차장, 직원식당, 미화원 대기실

지하 4층

기계실


부실공사도 문제였지만, 건물의 상가 배치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문제였다.

당장 불법 증축으로 추가된 5층에 처음에는 비교적 바닥 하중이 가벼운 롤러스케이트장을 설치하려 했으나, 경영진들이 이런 건 백화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다시 생각을 바꿔 롤러스케이트장 대신 대형 음식점을 유치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정부 기관의 승인도 받지 않고 시행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법이었다. 식당가 특성상 무게 괴물인 냉장고는 필수이며 무거운 주방 기기들과 세라믹 식기들을 항상 잔뜩 쌓아두고 책걸상까지 들여놓는 등 하중의 부담이 상당히 높아 매우 위험한 지경이었는데, 거기에 덧붙여 '한국은 오래 앉아서 밥을 먹기 때문에 바닥에 온돌[29]을 설치해야 한다'는 거지같은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온돌 난방 시설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런 방식으로 식당가 설계를 할 경우 난방 장치의 중량만 해도 건물 3층 정도를 쌓는 정도의 엄청난 하중[30]이 가해지기 때문에 오늘날의 백화점에는 한식당이라고 해도 난방 장치는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백화점 푸드코트들이 대부분 지하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31] 최근에는 공법과 설계기준의 상향평준화와 동선분석의 변화로 푸드코트를 지하에, 고급식당가를 최고층에 놓고 있다. 하지만 최근 백화점들은 온돌을 설치하지 않고 부득이한경우에만 전기난방을 하며, 한식당 역시 모두 의자와 테이블을 사용하도록 바뀌었다.

게다가 여기에 건물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킨 사업이 또 있었다. 붕괴하기 약 1년 전인 1994년 1월, 삼풍백화점은 2층에 '삼풍문고' 라는 이름의 서점을 들여놓았다. 당연히 책들은 무게가 상당히 나간다.[32] 이듬해 3월 서점은 철수하기에 이르나 가뜩이나 약했던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던 구조물들에 가해진 엄청난 권수의 책의 무게는 건물의 붕괴를 앞당겼을 것이다.[33] 참고로 정부대전청사는 4동에 대해서는 특별히 강도를 높여 설계했는데, 특허청의 서류 양이 방대해서 이를 보관하기 위한 목적이라 한다. 책이나 서류를 한꺼번에 많이 보관함은 건축설계에서도 특별해 고려해야 할 요소임을 방증한다.[34]

B동 또한 붕괴 위험이 컸다. 4층과 5층에 운동 시설과 수영장을 설치한 점이다. 운동기구 역시 책 못지 않게, 또는 책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무게가 나가며, 수영장은 물이 톤 단위로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다. B동이 같이 무너지지 않았음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일 B동까지 무너졌다면 더 큰 피해가 일어났을 것이다.[35] 따라서 A동 붕괴 후 B동을 철거한 것은 어쩔 수 없고, 또한 올바른 선택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옥상에 있던 수영장을 모조리 밑으로 내려보내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IMF 직전인 1996년경에 문을 닫은 수영장이라면 100%.

실제로도 이 사고 이후 만들어지는 대한민국의 모든 백화점들은 물론, 대다수 상가건물에서 푸드코트나 서점 등 하중이 무겁게 실릴 만한 시설들은 모조리 지하에 설치한다. 2017년 현재 시점에서도 상대적으로 고급인 식당들이 상층부에 올라가는 경우는 있어도 푸드코트가 고층으로 올라가는 일은 없다. 흔히 볼 수 있는 배치는 아예 몽땅 지하에 있거나, 지하에 푸드코트, 최상층부에 고급 식당가. 이런 식이다. 물론 거의 예외 없이 이 상층부의 식당들은 들여다보면 식탁과 의자로만 배치하였다.

2.4.1. 붕괴의 치명타 에어컨[편집]

가뜩이나 약해진 삼풍백화점 건물에 치명상을 입힌것은 에어컨 냉각탑으로, 삼풍백화점은 에어컨 냉각탑이 3대 있었는데, 이 냉각탑 3개의 자체 무게만 해도 36톤에 냉각수까지 채우면 무려 87톤에 달하는 엄청나게 무거운 물건으로 옥상이 견뎌낼 수 있는 하중의 4배가 넘는 무게였고, 때문에 개장 초기부터 미세한 진동과 물이 새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 냉각탑의 이동으로, 처음에 냉각탑은 삼풍백화점 옥상 동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냉각탑이 가동된다면 소음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바로 옆에 있던 삼풍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경영진들은 89년 12월부터 90년 정식 개장 전까지 이 냉각탑들을 반대편 우면로 측으로 옮겼다. 설계 변경으로 하중을 한참 넘기던 상황에서 이 냉각탑은 삼풍백화점의 치명타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냉각탑은 사실상 삼풍백화점 붕괴의 결정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파일:attachment/rooftop-weight1.jpg

파일:attachment/rooftop-weight3.jpg

파일:attachment/rooftop-weight2.jpg


거기에 이준 일당이 냉각탑을 옮긴 방법도 문제였다. 이런 무거운 물건은 대형 크레인을 사용하여 공중으로 들어서 옮기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삼풍 경영진들은 돈이 아까워서 냉각탑 아래에 롤러를 장착하여 옥상 상판 위에서 천천히 끌어가며 반대쪽으로 옮기는 되도 않는 행위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결국 대당 12톤이나 되는 그 무거운 걸 이동하는 동안 옥상 바닥과 지지 구조물에 엄청난 부담이 가해졌고 건물 붕괴의 단초 부분이었던 5E 지주 부분에 견디지 못할 하중이 가해졌다.(위 첫, 두 번째 사진) 특히 이동 후에 계속 작동되는 에어컨 실외기의 진동은 불안정한 옥상을 비롯한 5층 구조물에 그대로 전달되어 이들이 견딜 수 있는 한계점을 초과하기 시작했다.(위 세번째 사진)
한 마디로 옥상에 균열을 쫙 깔아준 것이다.

3. 전조 현상[편집]

사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붕괴 전부터 건물 전반에 위험 신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설계 후 초기 단계에서도 건물 내부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미세한 균열이 보이는 등 붕괴의 징후를 여러차례 보여왔었다. 붕괴 2년 전인 1993년에는 삼풍백화점 옆 레포츠 센터 2층에 있었던 금융동[36]을 1층으로 옮기고 내부 공사를 한 후 삼풍문고라는 대형 서점을 들여놓았고 1994년 1월 5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그러나 대형 서점의 특성 상 무게 괴물인 책장에다 또 엄청나게 많은 권 수의 책들이 들어차는 바람에 건물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을 초과하기 시작했다.[37] 그 때문에 레포츠센터와 중앙홀 지역에서도 균열이 1995년 사고 때까지 1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늘었다. 결국, 삼풍백화점 총관리부는 서점을 입점한지 1년 2개월 만인 1995년 3월 2일에 삼풍문고를 전격 철수시켰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균열이 점점 늘어났으며 중앙홀과 B동의 건물에 균열과 뼈대 구부러짐 현상이 일어나자 백화점 건물 전체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며 붕괴일인 6월 29일경에 최고정점에 이르렀다.

또 붕괴 2개월 전인 1995년 4월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발생했다. 5월부터 이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 관계자들을 비롯해 상당수가 이러한 붕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변변한 자가진단조차 없었다. 5월에 들어 균열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자 관리자는 5층을 폐쇄하고 토목 공학자들을 불러 기본적인 검사를 한 결과 "건물의 붕괴 위험이 있다" 는 당연한 결론이 나왔고. 상식적으로 이쯤 되면 건물 전체를 폐쇄하고 접근 금지령을 내려야 정상인데, 이준 일당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붕괴 당일, 붕괴의 가능성을 눈치챈 경영진들은 백화점에서 달아났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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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1995년 6월 28일, 즉 사고 하루 전에 촬영된 것으로, 펀칭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백화점 옥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펀칭은 무량판 구조의 건물에서 바닥과 지판이 기둥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중을 넘어서면서 바닥이 처지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현상으로, 건물 기둥과 지판의 결속 구조가 무량판 구조물 안전성의 핵심임을 감안하자면, 당시 삼풍백화점 건물은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서 건물이 본격적으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위의 실험에서 나무젓가락이 알루미늄 포일을 이미 뚫었음을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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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 균열과 바닥이 침하된 5층 식당가의 모습. 이 사진 역시 사고 하루 전에 촬영되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오른쪽 사진의 탁자가 정말 대놓고 기울어져 있음을알 수 있다.

사고 전날부터 이미 지붕에 철근이 올라왔고 5층 음식점 일부 부분이 내려앉는 것이 목격되었으며, 사고 당일 아침 5층 식당가의 춘원 전주 비빔밥 전문점에 있는 기둥과 상판 사이에 10cm 되는 균열이 발견되는 등 건물은 이미 거의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으며, 이는 사실상 건물 붕괴가 눈 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결국 붕괴 당일 식당가는 폐쇄되었다. 균열로 인해 떨어진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식사에서 나오고 천장에는 금이 많이 갔기 때문. 또한 귀중품 판매 매장의 물품들을 1층 등 저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5층에 식당가와 같이 있던 상품권 매장도 1층 로비로 이동했다.

4. 사고 당일 일지[편집]

4.1. 붕괴 당일 오전[편집]

사고 전날부터 이미 지붕에 철근이 올라오는 펀칭 현상이 목격되면서 사실상 이 때부터 붕괴는 시작되었다. 이한상 삼풍백화점 대표이사를 비롯한 경영진들이 이에 대한 '대책'이라도 짜려고 했던 때는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었다. 그들은 이날 5층에 있었던 일을 보고 비상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 날 오전 9시, 5층 식당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주인 김서정 씨한테서 긴급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 내용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집에 바닥이 돌출부분이 2m가 생겼고 천장이 조금 내려왔다. 빨리 와서 보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5층 기둥에 무려 20cm나 되는 균열이 발견되었고 천장이 뒤틀려 내려앉아 있었다. 이는 곧 이미 거의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으며, 이는 사실상 건물 붕괴가 눈 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바로 옆에 있는 우동 전문점인 '현지'에서는 천장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냉면 전문점 '미전'의 천장도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출근한 A동(북관) 4층 상품의류부 직원(당시 31세)도 건물 4-5층에서 들려오는 '뚝뚝, 드르륵' 소리와 함께 약 3분간 무거운 진동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이한상 사장은 오전 11시쯤 이영길 시설이사 및 건축과 이완수 차장과 함께 5층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1시간쯤 뒤 우동집과 냉면집의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게 되었다. 또 균열로 인해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음식에 떨어져서 식사를 하러 왔던 손님들의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 5층의 식당가 영업이 전면 중지되고 출입이 통제되었다.

또 붕괴 5시간 전에 5층에서 큰 파음이 몇 차례 들려왔다. 파음은 옥상의 에어컨 진동 때문에 난 것으로, 이 진동 때문에 삼풍백화점의 균열들은 더욱 심각하게 벌어져갔다. 파음을 들은 몇몇 고객들이 이에 대해 신고하자 백화점 시설과장인 이영길 이사는 이 파음이 옥상의 에어컨 실외기의 진동으로 인한 붕괴 조짐을 오래되지 않아 눈치채었는지, 사고 당일 오후부터 에어컨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조치를 취하고 백화점 측에서는 에어컨을 끄게 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옥상의 균열은 이미 10cm나 벌어진 상태였다.

사고 당일이었던 6월 29일은 서울에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때였는데[39] 에어컨을 갑자기 꺼버렸으니 당연히 백화점 안은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열기로 인해 순식간에 찜통이 되었고 그래서 당일 쇼핑을 온 쇼핑객들은 백화점에 들어서면서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덕분에 사고 발생 직전에 너무 더워서 쇼핑을 그만두고 백화점을 빠져나간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다.

한편, 삼풍백화점 측은 낮 12시 무렵 건물 설계 감리 회사인 우원건축에 연락하는 한편, 옥상의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지시켰다. 또한 귀중품 판매 매장의 물품들을 1층 등 저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5층에 식당가와 같이 있던 상품권 매장도 1층 로비로 이동했다.

4.2. 대책 회의 그리고 영업 강행[편집]

오후 3시, 그러니까 붕괴 약 3시간 전에 우원건축에서 임형재 소장과 이학수 구조기술자가 삼풍백화점에 도착했다. 4시에는 임원회의실(당시 삼풍백화점 남관 3층)에서 이준 회장 주재로 2차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임형재 소장은 칠판에 건물 구조도를 그려가며 "점검 결과 건물의 안전에 중대한 이상이 발견되었다. 그러니 속히 영업을 중단하고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한다."고 경영진에게 권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경영진들의 정신나간 뻘짓거리가 작렬하였다. 매장을 폐쇄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것이다. 즉, 당장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큰 그림을 못 보는 멍청한 짓거리가 벌어진 셈이다.

거기다 이 회의에서 이학수 구조기술자는 신공법으로 보수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진행되던 침하는 현재 멈췄다.고 하여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하며 고객들을 대피시키라고 조언했던 임형재 소장과는 다른 소리를 하는 실책을 범했다. 결국 이준 회장은 "큰 위험은 없으니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 공사를 하자."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회장이 영업 강행을 결정했으니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래도 이영길 이사가 나머지 이사들과 함께 최종 결정권자인 이준 회장에게 상황을 알리고 즉각 고객들을 대피시킬 것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이준 회장이 경제적 피해를 생각하여 대피 조치에 노발대발하며 반대했고 이에 나머지 경영진들도 따랐다.

회의 이후 1시간이 넘게 구체적인 보수 계획에 대한 논의가 되는 한편, 임 소장은 설계 도면을 찾으러 서초동에 있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후 삼풍 측은 중앙홀 2층의 행사전을 모두 스포츠센터 1층으로 옮기고 2층은 통행을 금지했다. 결국 그렇게 사고의 피해를 최소할 골든 타임을 놓쳤고 영업은 강행되었다. 만약 이때쯤 이라도 영업을 중단하고 대피를 실시했다면, 건물과 기자재만 날라가는 선에서 피해가 최소화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3. 붕괴[편집]

이 무리한 영업 강행의 대가는 참혹했다. 붕괴 약 1시간 전인 오후 5시 경, 4층의 천장까지도 가라앉기 시작하자 직원들은 고객들이 4층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백화점은 붕괴 50여 분 전에도 고객들로 시끌벅적했고, 관리자들은 일부 상품들을 저층으로 옮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계속 영업을 강행했다. 그리고 붕괴 17분 전인 오후 5시 40분, 이영철 시설부장에게서 임원실 회의장으로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내용은 "현재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보고였다. 이 전화가 오자마자 이준 일당은 회의를 중단하고 백화점에서 다급히 도주했다. 물론 이 때에도 고객들에게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자기네들 몸뚱아리만 빠져나왔다. 그것도 지하 1층에 이준의 큰며느리까지 내버려 둔 채로. 다행히 큰 며느리는 나중에 구출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삼풍 측은 중앙홀 1층의 통행과 영업을 중지하고 2층도 영업을 중지시켰지만, 이윤을 위해 영업을 계속하였다. 당시 삼풍 측은 침하를 막기 위해 백화점 4각 구간에 뼈대를 세워서 가까스로 막았으나 1층의 침하 현상이 멎자 5층의 천장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1, 5층과 지하 1층에 막대한 균열이 생겼다. 경영진이 도주하는 동안에도 백화점 매장 안에서는 1,000여 명이 넘는 고객들이 여전히 쇼핑에 열중하고 있었고 종업원들도 마찬가지로 영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고 발생 불과 7분 전인 오후 5시 50분에 경영진들에 의해서가 아닌 삼풍백화점 직원들의 고함이 5층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긴급히 대피하라"는 소리였고, 건물이 우르릉하면서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몇몇 고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대피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지하에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를 듣지 못했다. 직원들이 비상 벨을 울리고 고객들을 뒤늦게 대피시키기 시작했으나 무슨 수로 이 넓고 복잡한 백화점에서 1,000여 명도 넘는 사람들이 고작 7분 안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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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은 땅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위 사진은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인근에 있던 어느 시민이 우연히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의 콘크리트 먼지 구름의 형상이 붕괴 전 건물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붕괴 직후 촬영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40]

건물의 남쪽 A동의 옥상이 무너져 그 곳에 있던 에어컨 실외기가 5층으로 떨어졌으며 이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나머지 아랫층들의 상판들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불과 20초 만에 지하 4층까지 모조리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백화점 안에 있던 고객들을 비롯한 1,500여 명 대부분이 A동의 붕괴와 함께 그대로 매몰되어 사망하거나 다쳤으며 그 중 일부만이 건물이 내려앉는 도중에 겨우 빠져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41] 그리고 지하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과 함께 주변을 지나가던 차량 수백 대가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렸다.
생존자는 대부분 지상 1~2층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며, 그 때 당시에 지하 1층 식품관에 있었던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그 사람들이 거의 사망했다고 보면 된다. 지하 2층과 3층은 주차장이라 사람이 있을 일은 드물다.

사진 속에서 보이듯 A동이 붕괴된 다음에도 B동은 멀쩡했으나 "B동 역시 붕괴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폐쇄 조치된 후 1998년 10월에 철거 공사에 들어가 1999년 1월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붕괴 사고 사흘 후 실시된 현장조사 결과 B동도 마찬가지로 설계 강도보다 모자란 강도로 지어진 것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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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들은 실제 사진이 아닌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CG로 재현한 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4.4. 붕괴 직후[편집]



붕괴 사고 직후 공중파 3뉴스 속보. 당시엔 저렇게 큰 건물이 부실공사로 인해 그대로 무너졌다는건 생각치도 못했다. 이 참사와 가장 비슷한 유형이었던 1993년에 발생한 청주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도 부실공사가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LP가스 폭발이 건물 붕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삼풍 참사로부터 불과 2개월 전에는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도 발생했기에 참사 직후 초기에만 해도 테러 혹은 가스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건물이 붕괴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대세였다.

그러나 이는 곧 MBC김은혜 기자[42]의 활약으로[43] 부실공사로 인한 붕괴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곧 대한민국 전체가 분노했다. 사실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처럼 한국의 부실공사로 인한 폐단이 하루이틀의 문제도 아니었지만 삼풍백화점은 그 정점을 보여준 것이다.



▲ 백화점 붕괴 직후 소방관 및 기자들이 출동하여 촬영한 영상. 붕괴로 인한 먼지 폭풍에 휘말린 주차 차량이 뒤집혔으며 가운데 유리창도 모두 깨져나갔다. 오죽했으면 뉴스에서 직접적으로 지옥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반면 사고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 않은 지나가던 시민들은 그냥 삼풍이 무너졌다는 투로 무덤덤하게 말하고 의료진과 구조진 그리고 취재진들이 출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태연히 근처 마켓에서 쇼핑을 했다는 목격담이 있다고 한다. 피해 규모를 잘 몰랐고, 이 때까지만 해도 사망자가 수백 명이 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기에, 붕괴 직후에는 북한의 폭탄 테러라고 생각한 주민들도 많았으며, 저 큰 건물이 저절로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주민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사고 당시 현장에서 약 400m 떨어진 아파트 주민들은 땅이 울리는 느낌에 지진이 난 것으로 착각하고 경비실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하니 그저 '백화점 공사 현장에서 골재들이 무너졌나 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관공서의 전화는 시민들의 신고 전화가 폭주하면서 불통이 됐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못 믿고 건물에 금 정도 갔겠지 했으나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최병렬 서울특별시장과 이틀 전 지방선거로 당선된 조순 서울특별시장 당선인도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오죽하면 최병렬 시장은 한동안 너무 기가 막힌 듯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하기사, 임기 마지막 날에 목불인견의 대형참사가 일어나고, 그 현장을 보게 되니 여러모로 처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작년에 서울 한복판에서 다리가 무너진데 이어 이제는 대형백화점까지 주저앉았으니 오죽했겠는가.

그 외에도 YTN의 취재로 당시 백화점 내부 또는 그 주변의 CCTV 사진으로 보이는[44]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 사고 현장에서 옷들을 훔쳐 유유히 달아나는 어느 여성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고 지금도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 상당히 오래된 보도 사진이지만 대형 참사가 난 뒤 잔해를 뒤지며 물건을 훔쳐 달아난다는 점에서 소름끼친다는 반응이 많으며 짤방으로도 가끔 쓰인다. 이외에도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저 사람처럼 백화점 물건을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 이를 개탄하는 기사나 사설도 쏟아졌다.

붕괴 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 상태였고 이런 참사에 대하여 사전에 마련된 대응 수칙도 없었기에 초기 대응 단계에서 사고 현장의 통제는 불가능했다. 당시의 붕괴 현장을 찍은 CCTV나 취재 동영상들을 관찰하다 보면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 붕괴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은 B동의 슈퍼마켓 계산대를 털거나 A동의 무너진 잔해 더미 속을 파내며 희생자들의 소지품들을 뒤지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추태를 보여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5. 언론 보도[편집]

이 사고를 먼저 보도한 곳은 YTN이었다. YTN은 저녁 6시 뉴스를 시작한지 3분만에 앵커의 멘트로 사고소식을 전한데 이어 4분쯤 사고현장 인근 삼호가든아파트 주민의 제보전화를 연결, 사고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이 사고를 최초로 보도한 이상순 YTN 기자가 사고 20년 뒤 YTN 뉴스 인에 출연해 이를 회고했는데 당시 초년병 기자였던[45] 그는 백화점 바로 앞인 서울가정법원[46]이 출입처였다. 그날도 가정법원실에 모여 기자들과 같이 판결문을 보고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 6시 즈음 바깥이 웅성거려 복도 쪽 창을 보니 백화점 건물 한 쪽이 없어져 있었다. 그 길로 바로 회사에 "삼풍백화점 반이 날아갔습니다"라고 전화를 건 뒤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뉴스 진행자인 호준석 앵커도 이야기를 전했는데, 당시 조순 민선 1기 서울시장 당선자의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교통공사) 방문을 따라갔다가 회사의 연락을 받고 사고현장으로 차를 몰고 갔는데, 하필 무너지지 않은 B동 쪽으로 들어왔다가 "어? 멀쩡한데요?"라고 회사에 전화했다가 온갖 욕을 다 들었다. 물론 그 욕을 들어가며 코너를 돈 직후 한쪽이 없어진 걸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같이 참석한 경광숙 당시 도봉소방서 구조대장[47]은 같은 날 휴일이어서 책자 발간을 위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사고소식을 듣고 나오던 중, 마침 사이렌을 울리며 출발하는 동아일보 취재차량을 얻어타고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광화문 일민미술관(당시 동아일보 사옥)에서 사고현장까지 거리는 보통 20~30분이 걸리나, 이들이 찍은 시간은 불과 7분.

YTN의 사고보도에 이어 정규방송인 SBS가 오후 6시 4분 만화영화 <명탐정 셜록하운드> 방송도중 자막으로 사고소식을 전했으며, KBS1은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를 방송하던 6시 5분에, MBC는 <개구쟁이 테즈>를 방송하던 6시 10분에 사고발생을 보도한 뒤 KBS, SBS, MBC 3사 모두 사고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사고현장 화면을 가장 먼저 내보낸 곳은 KBS였다. KBS는 사고발생 소식을 접한 뒤 뉴스중계차를 파견했으나 중계장비 설치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현장화면을 녹화한 다음 오토바이로 테이프를 수송해 6시 30분쯤 현장화면을 방영했다. 이어 MBC, YTN, SBS의 현장화면 보도가 각각 10~20초 간격으로 잇따랐다. 각 방송사는 4~8대의 중계차를 사고현장및 병원에 대거 동원, 6시 40분쯤부터 구조현장을 생중계했다. 위 개요란에 나와있는 뉴스특보 방송영상은 사고 직후인 7시 전후에 방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방송3사는 사고 직후부터 이튿날인 30일 저녁까지 만 하루 동안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사고현장을 중계했다. 이 당시에 여기저기서 벌어졌던 대형사고 보도치고는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두 달 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당시 축소보도 시비에 시달린 점을 의식한 방송사들이 오명을 벗기위한 자구책으로 풀이되었다. 대구참사 당시 공보처[48]의 불허와 뉴스 비중 미달을 이유로 연장방송을 하지 않았던 MBC의 경우 공보처에 신고를 생략하고 연장방송을 자체 결정해 대조를 보였다. 또한, 주말예능들도 이 주간에는 줄줄이 결방되었다. 특히 MBC와 SBS는 각각 토요일(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vs.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 광주)과 일요일(삼성 라이온즈 vs. LG 트윈스, 잠실)에 예정되어 있던 프로야구 중계까지 취소하기도 했다.

사고당일 밤 뉴스속보 시청률은 동시간대 평균시청률 41.0%를 훨씬 뛰어넘는 58.8%의 시청률을 보였다. 방송시작 30분만인 오후 6시 45분 44.3%(평균 시청률 28.7%)로 치솟은 이 날 시청률은 밤10시 70.7%(평균시청률 49.3%)로 절정을 기록했다. 또 평소 시청률이 0.8%에 불과한 새벽 1시 15분에도[49] 21.1%의 시청률을 보여 적지않은 국민들이 밤새 사고방송을 지켜봤음을 증명했다.

한편 이 사고를 세상에 처음 알린 YTN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광고방송을 일절 중단하고 사고방송만 내보냈다. 이 당시 실종자 현황을 당시 서울시 대책본부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YTN 독자적으로 집계했고, 기자가 취재하러 잔해더미에 들어갔다 생존자를 사고 7시간 만에 구출해내는 등 여러 성과를 거두어냈다.[50] 또 최후의 3인 중 두번째인 유지환 양의 생존속보를 먼저 보도하는 등 개국한 지 석 달 만에 뉴스채널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대기하고 있던 서울교대 체육관에 YTN을 틀기 위해 긴급하게 케이블TV망을 뚫기도 했으니 말다했다. 이런 개가에 신난 당시 YTN의 주인이었던 연합뉴스는 매일매일 홍보성 기사를 작성하며 그 치적을 남겼다. 20년뒤 당시 YTN 취재진의 회고

이번 사고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장비는 로봇카메라였다. 직경 50mm, 길이 2백m짜리 케이블 끝에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발견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한 이 카메라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29일 밤에만 백화점 지하 1층에 깔려 있거나 갇힌 생존자 10여 명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구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TAP 전자산업이 제작 운용했던 이 장비가 구조현장을 생생히 보여주자 현장에 접근하지 못한 각 방송사들은 이 화면을 그대로 받아 생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 선점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당연히 이 또한 문제가 되었다.

이번 방송에서는 현장을 한눈에 보여주는 항공촬영도 한몫했다. KBS는 지난 3월 새로 구입한 항공촬영용 신형 헬기로 가장 안정된 화면을 방송할 수 있었다. 기종은 벨230으로 동체 전면에 특수카메라 웨스캄을 탑재했다. MBC 역시 자체 헬기로 항공촬영을 했으며 SBS와 YTN은 경찰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현장의 모습을 전했다.

이 당시 재난방송은 "랜턴, 절단기, 곡괭이, 들것 등이 필요하다"는 안내방송, 추가붕괴에 따른 인근 아파트주민 대피령, 헌혈지원 등을 속보로 방송한 것이 실례며 자원봉사자, 주민들의 복구지원·구호활동을 수시 방영해 시민정신을 북돋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등 그동안의 재난방송들보다 한 단계 진일보했다는 평과 함께 발빠르고 성실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문제도 만만찮았는데, "갇혀있던 생환자가 밖으로 나오면 눈이 부셔 실명케 돼 담요로 감싸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화면에는 생환자 얼굴에 눈부신 조명을 비춘다거나, 구조작업을 벌이는 비좁은 공간에서는 산소가 부족하기 마련인데 거기까지 취재진들이 들어왔다거나, 구조대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마이크를 들이대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 위에서 얘기한 지나친 항공취재 경쟁에 따른 헬기의 소음으로 후속 붕괴가 우려되기도 했으며 구조대원들의 목소리나 생존자들의 구조 외침이 소음에 묻혀 구조활동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소방헬기로 저건 물을 뿌려야 된다", "저 사람은 산다, 못산다" 등의 예단도 있었고, 심지어 구조대원들 보고 "생방송중이니까 비켜주세요"라고 말하는 기자도 있었다. 하지만 초기에 생환자들이 어느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필요정보는 충분치 않았다.

포털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검색어를 이용해 오래된 기사 순으로 검색하면 그 당시 연합통신(現 연합뉴스)에서 출고된 기사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고현장의 시간별 상황이나 피해자 구조·치료 현황, 자원봉사 현황, 사고 원인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기자들이 출입하던 정부 부처의 분위기를 다룬 스케치 기사, 사고 직후 PC통신에 올라온 글들도 기사화했다. 기사가 올라온 시각을 보면서 읽다 보면 당시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6. 구조 작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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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생존자 중 한명을 구조하는 모습[51]

이런 대형사고에 반드시 필요한 구조 작업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사고에는 초기 구조가 중요한데,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붕괴 사태가 일어날 줄 미처 몰랐으며 체계적인 대규모 구조 작업의 개념 역시 부족하여 구조 작업 자체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후속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많은 허점까지 드러났다. 당시에는 이런 대형 긴급 사고에 대비한 매뉴얼도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대형긴급사고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나 그만큼 대응 체계가 후진적이었다. 사고 이후 소방서경찰과 인근 군부대 그리고 특전사를 비롯하여 지역주민과 민간 자원봉사자, 해병전우회, 심지어는 주한 미군까지 수많은 기관과 인원들이 사고 현장에 몰렸고, 이 와중에 소방본부와 경찰과 서울시 그리고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체계적인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청와대가 개입해서 소방본부가 현장지휘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여러 기관들과 유족들 그리고 민간자원봉사자들 사이에 각종 불협화음이 속출했다. 아래에 서술된 각종 앞뒤 막힌 뜨뜻미지근한 상황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구조대 인원 통제나 운영 등이 거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고 구조 장비 관련 절단기 등의 기본 장비가 미리 확보되지 않아 구조 작업이 지연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일을 계기로 국가적 재난에 대비해 1995년 중앙 119 구조대가 창설되었다.

게다가 사고 당일 매몰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차를 이용해 진압 시도를 했는데 붕괴 사고로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주변 옥외 소화전이 작동을 하지 않아 진화작업이 지체되기도 했다. 사실 이 불은 자동차 엔진오일과 휘발유에서 난 불로 판명되어 구조대의 잘못된 대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진 속의 구조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물이 붕괴되면 어디에서 어떤 원인으로 화재 났는지 확실히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며 눈 앞에서 불이 나고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무작정 구조대를 비난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므로. 당시 실제로 붕괴된 A동의 북쪽 엘레베이터 타워가 서서히 붕괴된 A동 파편 위로 기울고 있다는 진단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초기에 활발했던 구조손길도 안전 장치를 위한 H빔 설치로 인해 잠시 지연되었다. 매몰 52시간 만에 24명의 환경미화원들이 구출되었다.

참고로 화재로 인한 열기와 진압을 위한 소방수로 인한 생존자들의 희비도 엇갈렸다. 지하 1층에서 70여시간 만에 구조되었다가 이송 도중 사망한 이은영은 몸에 2~4도 화상을 입고 왼쪽눈이 파열되어 청색증에 시달린 채 발견되었고, 그 다음에 발견된 생존자인 최명석의 근처에 있던 다른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은 구조대원들이 뿌린 물 때문에 익사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으며, 유지환과 박승현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초기에는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소방수 덕분에 수분을 섭취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과 더불어 사고 당시 줄기차게 나왔던 1967년 9월에 발생했던 충남 청양의 갱도 붕괴사고의 16일 만의 생존자였던 광부 양창신의 인터뷰가 계속 방송이 되었는데 그 인터뷰 내용은 그가 무너진 갱도안에서 물만 마시며 16일을 버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소방수에 의해서 11일차에 발견된 최명석이나 13일차에 발견된 유지환 씨 그리고 17일차에 발견된 박승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방수(水)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당시 지하주차장까지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지하에 붕괴된 콘크리트 더미 어딘가에 있는 차량의 화재로 발생하는 연기를 소화하기 위한 목적과 매몰자들의 생존을 위한 식수, 그리고 당시 여름의 더위로 인해 혹시나 있을 생존자의 탈진을 막기 위한 온도 조절용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히 철거시 발생한 먼지를 줄이기 목적에 의한 소방수 살수는 당시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지하 3층 구조물까지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철거작업만을 위한 사람이나 장비가 투입되지 않았으며, 모든 작업은 구조 작업 위주로 돌아갔었고 철거작업은 그에 의한 부수적 결과일 뿐이었다. 당시 이러한 논쟁중의 하나가 포크레인의 투입이었다. 굴삭기가 혹시나 있을 생존자를 부상 혹은 사망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굴삭기가 작동할 때 굴삭기의 삽 부근에서 구조대원들이 생존자 및 희생자의 확인도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최명석의 발견도 굴삭기를 이용한 해체작업 중 발견된 케이스다.[52]

당시 몇몇 가지 구조 장비와 행위를 열거하자면, 모든 구조행위를 일시 멈추고 실종자들의 삐삐 번호로 일괄적으로 전화를 해서 삐삐 소리로 생존자 구조 시도를 여러 차례했고 미군에 의해 생존자 발견에 사용된다는 음파를 이용한 구조 장비인 스톨스(STOLS)가 하와이에서 공수되었지만, 이 장비에 의해서 발견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53] 방송 밑 구조자 탐색을 위해서 직경 5cm 정도의 시추공 탐지카메라가 다수 투입되었다.

붕괴사고 며칠 후 자원봉사자들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철수했으며 구조대원들은 건물 붕괴 위험으로 생존자 수색조차 잠정 중단했고, 사고 초기 서울시는 실종자를 200여 명으로 집계하다 결국 400여 명으로 2배 정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정을 보여주었다. 붕괴사고가 단일 사고 최다 인명피해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종자 접수 하나 제대로 못하는 서울시에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더하여 팔다리가 잘려 나간 시신들이 건축 잔해물과 뒤섞여서 유가족의 거센 항의도 있었다. 게다가 당국에서 팔 2개+다리 2개+머리+몸통=시체 1구로 피해자 인원을 추산하여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겨우 찾아낸 시신의 팔다리가 맞지 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자 그제야 잔해를 갖다버린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서 142구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당시 난지도에서 알바 했던 사람의 경험담

유가족들은 거리 시위를 하는 등 격노했으며, 특전사와 민간인 그리고 유가족 등 50여 명이 사비로 절단기 등을 구입해 생존자 구조에 박차를 가했으나, 현장 지휘소에서는 이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으며 재진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초기에 우왕좌왕하던 구조본부도 시일이 지나며 체계를 갖추어 삼풍백화점 건너편 삼풍주유소를 구조본부로 삼고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 구조본부는 일정 시기 이후에는 자원봉사자를 모두 철수시키고 전문 구조대원만으로 구조활동을 전개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으며, 이에 전문 인력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구성했다. 이러한 이유는 자원봉사를 핑계로 삼풍백화점 내에서 절도 및 취득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으로 가장 큰 문젯점은 자원봉사자에게 나눠주는 물품을 취득하려는 목적으로 유족을 사칭하여 자원봉사하려는 사람들이었으며, 더하여 백화점 내의 절도행위였다. 더하여 유족들에게 접근하여 사체 발굴 이유로 금품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구속된 경우도 있다. 애초에 그런 일에서는 일사 분란한 지휘 체계에 의해서 인력과 장비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인력/장비 이동 등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비효율이 발생한다. 따라서 자원봉사자 등의 일반인은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다르게 사회 각 계층에서 온정이 전해졌다. 근처 군부대 장병들은 혈액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헌혈을 했고 위에도 서술 되어 있듯이 건너편 삼풍주유소는 영업을 중단하고 사무실을 서초구 재해대책본부로 내놓았으며 인근 부녀회원들이 컵라면과 빵 등을 작업자에게 배식했다. 경쟁업체였던 현대백화점도 30~50명의 직원을 사고 즉시 파견해 구조대원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제공하면서 "비록 경쟁업체이지만 같은 백화점업계끼리 이럴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은 운영하던 뷔페 직원들과 사고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 외국계 호텔에서도 음식을 내놓았다. 또한 용접도구가 필요하다는 방송을 듣고 용접공 수십명이 달려왔고, 한 업체에서는 최신식 조명도구를 설치하여 현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부상자 응급처치를 도와주기 위해 수녀들이 왔었고, 한 상인은 수백장의 우의를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

한편 미국, 러시아, 프랑스가 사고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으나, 정부에서는 자체 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 이들의 제의를 사양했고 위에 나와 있듯 일부 주한미군 병력이 구조를 돕는 것로 일단락되었다.[54]

6.1. 최후의 생존자 3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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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최후의 생존자 3인 - 유지환, 최명석, 박승현.

최후의 생존자 3인은 각각 최명석 씨(남, 사고 발생 11일만에 구조)[55], 유지환 씨(여, 사고 발생 13일만에 구조)[56], 박승현 씨(여, 사고 발생 17일만에 구조)[57][58]이다. 이후 최명석 씨는 박승현 씨의 고교동창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으며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을 살려 GS건설에 재직중이다. 유지환 씨는 결혼 후에 조용히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박승현씨는 사고 직후 근로복지공단에 특채되어 '삼풍 참사 최후의 생존자' 라는 타이틀로 산업재해 지원을 담당했으나, IMF 사태 때문에 계약직으로 전환당하면서 2000년부터 그만두게 되었다. 2005년 근황

최명석 씨는 답답하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자기 주변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 기차를 발견하고는 이를 가지고 놀면서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가지고 노는거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고통을 잊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하게 해준 물건이었을 것이다.

7. 재판과 손해배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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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영길 시설이사[59], 이한상 사장[60] 이학수 구조기술사[61], 그리고 뻔뻔하게도 어떠한 사죄의 표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모가지를 빳빳이 세우고 고개를 팍 쳐들고 있는 이준 회장.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사에 국민들은 분노를 쏟아내며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전해인 1994년 10월에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그 해인 1995년 4월에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터지는 등 근래에 유사한 대형 참사가 이미 두 번이나 있었던 데다 이번 사고는 그 둘보다도 압도적으로 참담했다. 또한 앞의 두 사고와는 달리 건물 붕괴 조짐이 사전에 감지되었던 데다 고객들을 대피시킬 기회 또한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경영진들이 경제적 피해로 사실을 묵살하고 영업을 강행하다가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62] 따라서 이준 회장을 비롯한 백화점 경영진들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의 수준연쇄살인범에 대한 비난 수준 이상[63]으로 엄청났으며, 철저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엄중한 처벌을 하라는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었다.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에게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 6개월이 확정되었으며, 삼풍백화점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각각 징역 10월에 추징금 3백만원과 징역 10월에 추징금 2백만원이 확정되었다. 전 서울특별시 상정계장 정상기, 우성건설 형틀반장 김수익, 전 서초구청 주택과장 김재근 등 피고인 10명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백만원에서 선고유예 및 추징금 1백만원의 원심형량이 확정되었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삼풍백화점 사장 이한상(회장 이준의 차남) 등 12명은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최종 확정되었다.[64]

당초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검찰은 수사 결과 고의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당시 이 사고의 살인죄에 대한 미필적 고의 여부를 증언해줄 수 있었던 시설부장이 삼풍백화점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그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저것만 입증될 수 있었다면 그 설계를 승인해준 구청장까지 살인죄로 넣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무죄추정의 원칙형사소송법에 의해 여러 죄로 해석될 수 있는 사고에서 특별히 중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행위자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수사기관이 직접 밝혀내지 못하면 중한 죄로 처벌을 못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업무상 과실치사죄(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가 적용되었다. 판단 기준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쉽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했다면 미필적 고의, '사람이 죽지야 않겠지' 라고 생각했다면 인식 있는 과실, 즉 과실범이다.

거기에 뇌물공여죄까지 적용되었으므로 경합범 가중(1/2배 가중)하면 사실 이준이 선고받은 징역 7년 6개월은 원칙하에서 법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처벌이었다. 이후 그는 2003년 4월에 만기출소했고, 그 해 10월 4일 사망.

한편 삼풍백화점의 사장이었던 이한상은 그보다 앞선 2002년 10월 출소했다. 2000년 당시 이준 회장의 부인, 그러니까 이한상의 모친이 대한민국 법무부에다 가석방을 탄원했지만, 당연히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후 "삼풍 사고로 상처받으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삼풍 사고가 영적인 전쟁의 한 사고였다고 믿는다. 저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 많은 분들의 고난과 헌신이 귀하게 쓰여 하나님 이루시는 일에 진보가 있다면 감사할 뿐" 이라는 인터뷰와 함께 몽골선교사로 출국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교도소에서 겪은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했다는 포교를 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그가 한 말 중에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사죄의 말은 단 한 마디도 찾을 수 없고 자세히 살펴보면 엄연히 자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를 하나님이 일으킨 일인마냥 표현하여 단순 사고의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로 자신들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다친 참사였기에 이준 일가는 법에 쓰여지건 말건 아주 당연히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형벌은 솜방망이었지만 벌금은 매우 강했는데,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이준 일가는 전재산을 추징금 + α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서울특별시에 헌납하고 손해배상 처리를 서울시에 일임했다. 징역의 기간이나 벌금의 액수는 형벌이라 법에 써 있는만큼만 부과해야 하지만 손해배상금은 민사재판의 영역이라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끼쳤음'이란 사실만 인정되면 법관의 판단 하에 일정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부과할 수 있다.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손해배상액은 재벌인 이씨 일가 전재산으로도 부족했으므로 결국 서울시에서 모자란 금액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망자 1인당 3억 8,000만원씩 지급되었으며, 배상금 총액은 3,317억원에 달했다.

그래도 금융권 부채를 탕감하고 난 후 추정되는 삼풍그룹의 나머지 자산이 3,000억원 정도는 되어서 보상액의 거의 대부분을 책임진 셈이기에 무임승차로 나 몰라라 한 것까지는 아니었으며, 애초에 삼풍의 부실공사를 눈 감아준 정부와 서울특별시청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서울시 입장에서는 부족분을 책임지는 게 억울하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정부가 부담하는 그 결손액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책임을 물린 것이나 다름 없는 꼴이 돼버렸다.

붕괴사고가 발생할 당시까지만 해도 지방자치제가 아닌 관선 체제였기에 서초구청 공무원이 뇌물을 받아먹었으면 서초구청장만의 책임으로 한정 짓지 않고 정부와 서울시의 직접적인 책임까지도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런 놈을 중앙정부가 직접 서울시장으로 앉힌 거니까. 관선제 시절의 전임 서울시장과 서초구청장이 싸지른 똥 때문에 민선으로 선출된 후임 서울시장과 서초구청장이 고생하게 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서초구청장이었던 조남호 씨는 유족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65]

그가 서울특별시에 헌납한 재산 목록 중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여미지 식물원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제주도에 소재한 관광 명소를 서울특별시 시설관리공단에서 경영하는 괴상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민간 기업에 매각된 상태다.

이 사고 이후로 1996년 대기업이던 삼풍은 흑역사를 남긴 뒤 사실상 공중분해됐으며, 사고와 그로 인한 후폭풍으로 인해 1,100여개의 중소기업들이 부도 처리되면서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삼풍에서 일했던 직원, 관련 중소기업 직원 등도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해 길바닥에 내몰려야 했다. 특히 삼풍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일반 직원은 물론 고위직들마저도 이 사고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직장을 잃어버린 또 다른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니던 회사 자체가 국민들에게 악의 축으로 찍히는 바람에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다. 삼풍그룹 다닌게 죄인가? 저건 오히려 삼풍그룹직원이었다고 욕하는 자체가 잘못된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닥쳐 온 1997년 외환 위기와 함께 삼중고를 겪으며 다른 곳에 가서 취직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람을 실제로 희생시키고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도 여럿 못살게 만든 셈이다.

7.1. 국가배상 부정[편집]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붕괴사고와 서초구청 소속 공무원들의 직무의무 위반행위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1999년 12월 21일 대법원 판결에 의해 국가배상이 부정되었다. 인과관계가 부정된 이유는 부실시공,설계,무계획적 건축에 대해 건축법령상 서초구가 관리,감독 할수 있거나 해야 하는 부분이 법령상 거의 없기 때문에 직무의무위반으로 인해 붕괴사고가 발생할 개연성 자체가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공무원의 직무범위 관련해서 사경제작용 제외하고 다 적용되는 광의설을 취하는 국가배상 청구소송이 저런 이유로 인과관계를 부정해서 국가배상을 부정했을 리가 없다. 사실 인과관계가 당연히 있지만 이 사고에서 국가배상을 인정하면 물어줘야 할 것이 너무 엄청나서 부정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8. 사고의 여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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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7월 1일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을 찾은 김영삼 대통령.
그 왼쪽에는 이인제 경기도지사와 김덕룡 민주자유당 국회의원[66] 이 있고,
오른쪽에 노란 모자를 쓴 사람은 조순 서울특별시장[67].


사고 후 김영삼 정부는 붕괴 장소를 사상 최초로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으며,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김영삼 정권시대의 정점을 찍은 사고다.

물론, 김영삼 때 지어진 건물이 아니니 그에게 직접적 책임은 없다고 볼 수도 있으며 실제로 성수대교 붕괴사고 때 YS가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지원 의원이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이냐?"라고 응수하면서 한 큐에 침묵시켜버린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성수대교는 부실공사 그 자체로 사고가 터진 것과 달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부실공사와 이후 운영주체의 마개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므로 일방적으로 건설 시기만을 탓할 수는 없다. 어쨌든 문민정부의 연이은 사고의 피날레는 1997년 외환 위기 사태로 장렬하게 마감을 해주셨다.

이 때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은 "언제까지 당해야 하나"였다. 해당 사진

전 세계가 고층 건물의 설계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으며 설계부터 확실하게 하자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전후로 터진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함께 20세기 말 가장 충격적이고도 비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안전에 대한 의식을 심어준 사고라 할 수 있다. 대중이 부실공사를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짓' 이 아니라 진짜로 사람을 죽이는 짓임을 똑똑히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사고가 끼친 긍정적인 영향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부실 공사의 근본 원인이 공사비 착복과 해당 공무원들의 비리라는 점 때문에 사람들이 이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나름대로 비리 척결에 한 몫 했다.

사고 발생 이후 한국의 건축기술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서 해외공사 수주율이 뚝 떨어졌지만[68] 그 뒤 공짜나 다름없이 지어주면서 위기를 넘긴 다음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해외의 공대생 혹은 건축과 학생들 앞에서 한국인이 한국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자랑하면 어김없이 그들 입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떡밥으로 튀어나와 데꿀멍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서 해외에서 잊혀질 가능성도 별로 없는 게 이 사건은 21세기에서도 심심하면 최악의 참사를 꼽을 때 순위권 안에 들어가는 사건이고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즉, 앞으로도 심심하면 관련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방영될 만큼 비중이 큰 사건이다. 이러한 두 사건 때문에 나라망신을 제대로 당한데다가 애꿎은 다른 건설회사까지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8.1. 안전 평가 실시[편집]

붕괴 사고 이후 삼풍이 지어진 것과 비슷한 시기인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공포와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에 대한 안전 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충격과 공포였다.

  • 전체 고층 건물의 1/7(14.3%)은 개축이 필요한 상태였다.

  • 전체 건물의 80%은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었다.

  • 대한민국 내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당산철교를 비롯한 여러 구조물이 철거된 다음 다시 지어졌다.[69] 특히 당산철교의 경우 제2의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엉망진창 상황이라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최일구 앵커의 기자 시절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이걸 고발해낸 것.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건물이 조금만 오래 되어도 철거하고 다시 짓는, 그것도 2~30년 주기로 빨리 재건축하는 관행 역시 이 사건으로 부채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기후적 요인으로 인해 한국에서 건축물이 다른 선진국과 동급으로 100년 이상 버틸 순 없겠지만 말이다.

8.2. 건축계에 미친 영향[편집]

삼풍백화점은 이른바 무량판 구조로 지어졌다. 이것은 기둥과 바닥 사이에 보가 없이 바닥이 기둥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실내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의. 하중과 바닥 구조체의 무게가 기둥으로 직접 전달되는 방식이다. 삼풍 백화점의 붕괴 사고 원인은 무량판 구조 그 자체가 아니라 각종 착복과 비리를 위한 무리한 설계변경삥땅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량판 구조 자체는 제대로만 설계한다면 별 문제가 없기에 해외에서는 아직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2005년에 제작된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삼풍 백화점, 예고된 붕괴' 에 출연했던 미국 구조 전문가는 "오히려 삼풍백화점 건물이 무량판 구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무리한 설계변경에다 설계 하중의 4배가 넘는 무게를 올려놓는 등의 각종 뻘짓에도 불구하고 5년이나 넘게 버틸 수가 있었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국내 건설업계에서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의 무량판 구조는 일종의 금기가 되면서 건축주나 설계자가 꺼리게 되었다. 상술했듯 삼풍의 부실시공은 건축의 "ㄱ자"도 모르는 이준 회장이 멋대로 설계에 간섭하여 발생한 일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미친놈 하나가 어설프게 대충 구현하고 사고친 것 때문에 멀쩡한 건축공법까지 억울하게 몰매를 맞은 격이다.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 시간이 흐른 뒤로는 다시 절찬리에 운용중이며, 기둥에 주두나 지판은 물론 철근 정착까지 해당 사항이 구조기준에 명시되어 있고 2방향 슬래브 전단강도 산출 공식도 도입되어 뚫림전단 파괴를 방지하고 있다.

그리고 삼풍백화점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모든 건축물은 부재를 탄성상태로 보는 허용응력 설계법(WSD)으로 설계했으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이후 콘크리트 건축물은 극한강도 설계법이나 한계상태 설계법으로 설계한다. 삼풍백화점이 부재의 역학적 해석방식까지 바꿔버렸다 카더라.

실제로 극한강도 설계법(USD)과 한계상태 설계법(LSD)이 학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사고 당시 기준으로도 40~50여년 전부터 였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70~80년대 부터 이미 구조기준에 해당 설계법을 도입한 상태였다.[70] 우리나라의 콘크리트 구조기준은 2000년 전후로 그간 논의를 거쳐 극한강도 설계법을 전면 도입하고, 균열이나 처짐 등에 한정하여 허용응력 설계법을 운용하고 있다. 한계상태 설계법의 경우 도로교 설계기준에 도입되었는데 2015년 개정 기준으로 그 전에는 재량적으로 도입하였다가 그 후부터 기준에 전면도입 되었다. 한계상태 설계법은 차치하더라도, 극한강도 설계법 도입에 삼풍백화점 사고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사고 발생 후 해외의 건축물 발파 해체 공법 종사자들이 다 몰려와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을 보고 발파 공법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더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전해진 것은 오직 건축공법 뿐이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는 안전불감증으로 시공불량에 의한 대형 안전사고는 끊임없이 발생했고 그 때 마다 담당자들과 관련 기관들의 부실하고 허술한 대처가 그 사고의 피해를 키우는 패턴은 다시 터졌다.

8.3. 소방 방재에 미친 영향[편집]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까지는 이런 대규모 재난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가 사태가 발생하자 경찰, 소방서, 군,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달려오긴 했으나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구조활동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주한미군이 도우러 와서 지휘본부가 어디냐고 물어도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구조활동은 말그대로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다가 며칠 후에서야 청와대에 의해 소방본부가 중심이 되어 현장지휘본부를 꾸렸다.

그 당시 달려온 소방대원들은 열심히 구조활동을 펼쳤으나, 이런 대규모 재난사태에 대한 대처메뉴얼이나 구조에 관한 의학지식이 없어서. 구조자들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현장에서 죽어가기도 했다.


경상자들을 바로 옆이나 근처의 병원 응급실로 바로 보내서, 막상 중상자들을 치료하러 먼 병원 응급실로 보내는 중에 사망하거나, 붕괴된 잔해에 깔린 구조자를 위해 무턱대고 잔해를 치워보니 쇼크로 구조자들이 사망... 잔해를 무턱대고 치우면 쇼크로 구조자들이 사망한다는 내용이 일선소방관들에게 전해지고, 구조방법을 바꿔보라는 방침이 전파. 이번에는 잔해를 살짝 들어올리고 구조자들을 끌어당기는 식으로 구조방법을 바꿔보니 잔해에 깔려있던 구조자들의 다리나, 팔 부분이 그 과정에서 절단당하고. 먼 거리의 응급실까지 가는 도중에 과다출혈로 사망...


하지만 이 사태를 계기로 중앙119구조본부가 창설되어 부족하나마 국가적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고, 이 때의 구조활동에서 얻은 노하우도 이후의 크고 작은 구조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전까지 사람들은 소방서라고 하면 화재시 불꺼주는 곳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 사태 이후로는 유압식/전동식 장비들이 적극 활용되면서 사람을 구조해주는 곳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생겼다. 이후 이 노하우들을 가진 119구조본부는 해외의 대규모 재난(지진 등)발생시 현장에 파견되어 활동하는 등, 국제적인 구조 활동도 돕고 있다.

또한 당시 119구급대로 활동하는 구급으로 채용된 소방공무원이 있었지만 간호조무사나 군 의무병 전역자를 특별채용 하는 등 소방공무원의 의학적 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였다. 제대로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도 없었고 구출이후 사진을 보면 경추고정대나 척추보호장비 없이 단순히 사람이 직접 들어 옮기거나 들것에만 옮겨지고 있는 사진만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의학계에서 응급의료체계가 대두되면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의 응급의료기금을 통해 119구급대에도 제대로 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 자동심장충격기 등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되기 시작한다.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되면서 인력도 간호사, 응급구조사를 채용하게 되었다.

8.4. 의학에 미친 영향[편집]

아이러니하게도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항상성 보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과정' 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저런 '굶어 죽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을 만큼 극심한 기근을 겪는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한지라(아프리카 내전국들처럼) 안정적인 모니터링이 어렵고, 반대로 안정적인 모니터링이 쉬운 국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적인지라 저런 극심한 기아가 일어날 일이 없기 때문에 관찰이 어려웠는데 이 사건이 발생함으로 인해 기존에 보기 힘들었던 사례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의 아이러니와 맥락이 닿는다.

삼풍백화점 붕괴 후 11일만에 발견된 최명석씨는 구조 후 갑작스런 과다한 영양섭취로 인해서 간에 손상을 입고 자신보다 나중에 구조된 유지환, 박승현 씨보다 더 오랜 기간 병원 생활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전에 지하 갱도 붕괴나 기타 여러가지 사유에 의해서 장기간 기아 상태의 환자가 갑작스런 영양소 과다 섭취에 대한 신체반응에 대한 국내의 연구나 임상이 전무해서 벌어진 일화. 오래 굶주린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먹을걸 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기본 상식이었다. 단지 이게 오직 경험에 근거한 지식이었던 관계로 과학적으로 왜 그런건지는 검증된 적이 없다 보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압좌 증후군(Crush syndrome)이 재조명 받기도 했다.[71]

또한 이 사고를 계기로 대형 재난 시 부상자들의 치료를 담당하는 응급 의료체계의 개편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붕괴사고로 인한 부상자들은 경상자와 중상자의 분류 없이 사고 현장과 가까운 대형 종합병원인 강남성모병원(현재의 서울성모병원)과 영동세브란스병원(현재의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했다.

하지만 사고의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예상보다 너무 많은 환자가 몰린 덕분에 두 병원은 큰 혼란을 겪었다. 두 병원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병원이라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경상자들이 몰리는 바람에 이를 모두 해결하지 못했고 때문에 중상자 응급처치, 수술이 늦어지거나 일단 두 병원으로 이송했다가 다른 병원으로 재이송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응급의학 및 응급의료체계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95년에 응급의학이 전문 진료과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년뒤 96년부터 응급의학전문의가 배출되기 시작한다.

9. 대중문화에서[편집]

  • 윤종찬 감독은 이 사고로 아내를 잃었으며, 이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와 한국 사회에 대한 절망적인 시선을 2001년작 <소름>이라는 공포 영화로 풀어냈으며 한국 공포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 가수 김광석KMTV 주최 소극장 라이브 공연 실황 CD에는 김광석이 청중들에게 "뉴스 못 보셨어요? 삼풍 백화점에서 사고 났다던데." 라고 말하자 청중들이 웅성거리는 부분이 그대로 녹음되었다. 김광석의 부인도 당일 삼풍에 갔다가 붕괴되기 전(3시 반[72])에 나오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이날 공연 도중 이 소식을 들은 김광석은 원래 예정된 곡 대신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는 노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불렀다. 이 때, 관객들과 김광석이 웃는 것을 보고 500명이 죽은 사고인데 웃음이 나오냐며 김광석과 관객들을 질타하는 댓글들이 많다. 하지만 공연 도중에 관계자로부터 붕괴 소식만 전해들었을 뿐, 뉴스를 직접 시청할 수도 없는 공연장인데다 현재처럼 개인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대형참사가 터졌는데 동시간대 공연장에서 가수와 관객이 웃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 녹색지대의 2집 수록곡인 '끝없는 사랑'은 작곡가 이성환이 이 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편의 사연을 담아서 만든 노래라고 한다. 음악이 시작될 때 전화 소리와 앰뷸런스 소리, 그리고 생명유지장치 소리가 삽입된 것이 특징.

  • 1996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주기를 앞두고 6.29 그날 오후 - 삼풍시계는 멎었는가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 가수 강산에가 1996년 발표한 앨범 《삐따기》의 3번 트랙 〈태극기〉의 가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바람이 부는데야 어쩔 수 없겠지만
절대로 삼풍은 또 불지 않았으면

  • 서태지와 아이들4집 수록곡인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는 이 사고에서 모티브를 따서 사회 전반에 팽배한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노래로 유명하다. 뮤직비디오 영상에서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 보도 영상이 삽입되었다.

  • N.EX.T는 95년 발표한 The Return of N.EX.T Part 2 : World 수록곡 중 '세계의 문 Part 2. - The World We Made' 에서 성수대교 붕괴와 함께 묶어 그동안 겉으로 드러나는 발전에만 치중해온 세태를 깠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전략)무너진 백화점, 끊겨진 다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순 없다 우리 모두 공범일 뿐
(중략)아득한 옛날엔 TV는 없어도 살아갈 순 있었다
그나마 그때는 천장이 무너져 죽어가진 않았다
(중략)발전이란 무엇이며, 진보란 무엇인가?
누굴 위한 발전이며, 누굴 위한 진보인가?(후략)

  • 미생 만화가 윤태호는 삼풍백화점에서 모티브를 얻어 야후라는 만화를 그렸다.

  • 만화가 박흥용의 데카메론식 작품 <경복궁 학교>에서는 건물 붕괴로 인해 화자들이 지하 슈퍼마켓에 고립된 것으로 구성되었다.

  • 웹툰 만화가 호랑이 연재하던 구름의 노래에서 주인공인 재희는 이 사고로 어머니를 잃는다.

  • 소설가 황석영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중심으로 하여 강남의 개발을 그린 소설 <강남몽>을 썼다.

  • 시인 황지우는 2004년 삼풍백화점에 매몰된 남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물질적 남자'라는 이름의 희곡을 썼으며 그 뒤 2013년 '마이너스 그라운드(작 황지우 연출 윤정섭)'라는 이름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재공연했다.

  • 2006년 개봉한 영화 타짜(영화)에서 고니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다룬 뉴스를 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하자, 평경장이 세상이 아름답고 평등하면 우린 뭘 먹고 사느냐며 연습이나 하라고 다그친다. 이 다음, 정마담의 독백 나레이션은, "다음 해에 서울에서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고니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어요."

  • 판타지 소설 <서기명지담>과 <케이>의 주인공들은 삼풍백화점 사고의 충격으로 시공이동을 하거나 환생하게 된다.

  • 2010년 말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자이언트에서는 삼풍백화점 사고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 나온다. (#스크린샷) 마지막 화에서 조필연만보프라자라는 건물이 붕괴하는데 높이가 5층이고 건축 당시 붕괴 원인이 되는 기둥 인치수가 거의 똑같다는 점[73], 건축 과정에서 건축비를 부정횡령한 점, 붕괴 당시 시대상도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때와 거의 일치했다. 특히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의 이력이 조필연의 이력과 유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아들을 백화점 사장으로 두어 경영 일선에 앉혀놓고 있으며 사업가로서의 경력 외에 6.25 전쟁 통역장교를 거쳐 3공부터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의 창설 멤버가 되는 등 녹록치 않은 정부 관료 경력도 가진 나름 실세였고 1970년~1980년대에 건설붐과 부동산 투기로 재벌이 되었다는 점도 매우 비슷하다. 게다가 극중 만보건설의 로고도 삼각별 모양인데 삼풍백화점의 로고와 구도가 정삼각형으로 같다.

  • 2006년 개봉한 유지태, 김지수, 엄지원 주연의 영화 가을로에서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전후의 순간들을 극중에서 직접 재현했으며, 유가족과 생존자의 후일담을 기초로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다. 영상 "영화를 촬영하며 삼풍백화점 자리에 다시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걸 보고 한탄을 했다." 라는 제작보고회에서의 유지태의 발언이 화제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사실 참사 현장에 추모비 하나 세우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의 뜻을 유지태가 소신 있게 밝힌 것이나 듣는 사람에 따라서 현재 삼풍백화점 부지에 들어선 주상복합 입주자들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는 의미로 와전될 수도 있어서 논란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 입주자는 많지 않았는데, 이유는 밤에 에어컨을 틀 수 없기 때문이라고.

  • 2012년 6월 29일 사고 17주기에 소설가 문홍주가 "삼풍 - 축제의 밤" 이라는 장편소설을 출판했고 이 작품을 원작으로 2013년 5월 10일부터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웹툰 삼풍(각색 손영수/그림 한상훈)의 연재가 시작되었다. [74] 당시 사건을 파헤쳤던 김은혜 기자의 관점으로 각색된 듯한 이야기 전개방식을 보인다. 가상의 인물들을 주제로 하지만 그곳에 나오는 장면들은 대부분 실화다. 대표적으로 이준 회장이 조사중 기자 앞에서 대놓고 한 말인 '여보쇼, (백화점이) 무너진다는 것은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다시 말해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라는, 도무지 인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인간쓰레기의 대사도 나온다. 다행히 이 악마는 지금 지옥에 떨어졌다. 이 위키에서도 볼 수 없는 정보가 많이 있으니 한번 보면 많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 2012년 9월 발매한 가수 레이니의 앨범 '이별말의 뮤직비디오' 에서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 2013년 11월 29일 방영된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 12화에서 이 비극적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다뤘다. 영상 사고 소식을 모르던 사람들의 무선호출기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행히 지하 1층 음반매장에서 테이프를 고르고 냉면을 먹으려 했던 칠봉이는 5층 식당[76]이 문을 닫으면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으나 쓰레기가 맡았던 환자의 남편[77]은 결국 명을 달리했다. 또한 위에 언급된 김광석KMTV 공연도 등장했다.[78]

  • 김성모는 탑툰에서 대털 더 클래식이라고 대털의 세번째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첫화의 내용이 왕풍백화점 붕괴사고이다.

  • 2014년 8월 개그맨 장동민팟캐스트 '꿈꾸는 라디오' 방송중 삼풍백화점 최후 생존자 3인중 한명에게[79] "오줌먹는 동호회 사람들이 있어. 그래가지고 옛날에 삼풍백화점 무너졌을때, 뭐 21일만에 구출된 이 여자도 다 오줌 먹고 살았잖아. 그 사람이 창시자야" 라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이 2015년 4월에야[80]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해당 생존자가 장동민을 모욕죄로 고소했고, 결국 옹달샘 전원이 사과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 2015년 주말특별기획 내 딸, 금사월에서는 보금건설 회장 강만후의 보육원 부실공사로 인해 보육원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렸는데 작중 배우 손창민이 맡은 강만후가 그 이준과도 비슷한 행위를 했다.

  • 테러맨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2016년 4월 서울문화재단 메모리人 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팀에서 '1995년 서울, 삼풍'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사고 당시 생존자, 구조팀, 봉사자 등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을 다시 채록하여 이 사고가 망각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한 때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사오정 시리즈에서 미스터 손, 저팔계와 같이 장풍 대결을 하던 사오정이 건물을 무너뜨리자 무슨 장풍이냐고 물어보니깐 사오정이 "삼풍"이라고 대답한 걸 유머랍시고 올라온 적이 있다. 희생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개념없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 영화 터널에서 붕괴된 터널에 갇힌 주인공 이정수가 곧 구조된다는 소식에 기자가 "아깝다, 1일만 더 버티면 삼풍 때 기록 깨는 건데..."라고 말하자 이를 들은 구조대장인 김대경이 기자님이 한 번 기록 깨보라고 일침을 놓는다.

  • 이 사고를 계기로, 같은 이름의 패션회사는 아예 회사명으로 주력 패션 브랜드명을 택했다.[81]

  • 더욱 더 안타까운 소식이 하나 더 있는데 사실 저 부지에 대해 삼풍백화점 말고 또 다른 기업이 있었다. 바로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동생 유특한 회장이 창업했던 유유그룹. 이 사람은 전두환 정권시절 정치자금을 단 한푼도 상납하지 않아서 국제그룹처럼 무너뜨려버리겠다고 세무조사를 했지만 유한양행처럼 너무 깨끗해서 당황한 나머지 포기한 전적이 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삼풍백화점을 지었다면 이런 참극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반면 해태유업[82]에서 내놓은 고칼슘 우유 광고에 배경사진을 붕괴된 삼풍백화점을 넣고, '뼈대가 튼튼했더라면...'이라는 문구를 적어 광고했는데, 지금 봐도 고인드립 수준에 유족들에게 소송당해도 할말 없을 모욕적인 광고였지만 당시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아서 유야무야 넘어간듯 하다. 이후 해태그룹이 IMF로 휘청이던 1998년, 해태유업은 해태그룹 계열이 아니었지만 (해태유업의 모체는 해태그룹이 맞다. 다만, 1980년대에 계열 분리가 된 것이다.) 유사한 이미지 덕에 대타격을 받았고, 1999년에는 법정관리, 2004년에는 증시 상장이 취소고 2006년에는 동원그룹에 매각되어 동원데어리푸드가 되었다. 2014년에 동원F&B와 합병하여 유제품 사업 부문으로 재편되었다.

  •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가 하마터면 이 붕괴사고에 말려들 뻔했다고 한다. 사고 당일 붕괴가 일어나기 몇시간 전, 에어컨 가동이 중지되어 백화점 내부가 유난이 더웠는데, 성격이 급했던데다 더운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일행들에게 빨리 나가자고 재촉해서 백화점을 나왔는데 그 후에 백화점이 붕괴하면서 운좋게 화를 면했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일행이 후배 개그맨인지 부인인지는 불명이다. 그리고, SBS 호기심 천국에서 상황극 재연에서는 후배 개그맨이라고 나왔고 무릎팍도사에서는 이상해의 부인이자 국악인 김영임이 "사고를 겪기 전에 남편이 더우니까 나가자고 재촉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 영화배우 김상경이 특전사로 군생활을 할 때 구조 활동에 투입된 적이 있다고 황금어장에서 밝힌 바 있다.#

  • 도시전설 창작물인 SCP 재단 한국어 위키에도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한 문서가 있다. 하단의 '괴담' 부분에서 삼풍백화점 종이가방을 든 아주머니가 목격된다는 부분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 2017년 12월 방영 중인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한 듯한 '에스몰 붕괴사고'가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 사건으로 나온다. 남녀 주인공들은 해당 붕괴사고로 인해 상처받았고 1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PTSD에 시달리는 피해자들로,해당 작품은 그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10. 사고 이후[편집]

1995년 9월에 A동의 잔해가 먼저 철거되었으며 B동은 3년 넘게 남아 있다가 결국 안전진단에서 위험성이 대두되자 입점업체들을 내보내고 1998년 10월 경에 철거가 시작된 뒤 1999년 1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MBC 뉴스데스크 영상)

삼풍백화점 인근의 서초동강남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 중 한 곳이라 고급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긴 했지만, 워낙 악명 높았던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던 곳인 만큼 매각이 잘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으나, 1996년 11월 대상그룹이 서울시의 부지 매각 공개입찰에서 2만 2천 7백여 ㎡ (6천 8백 70여 평)의 해당 부지를 2052억 4300만 원에 낙찰받아 1999년 8월에 낙찰가 및 지연금을 모두 완납하여 최종 인수하게 되고, 이후 시공사로 대림산업을 선정해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04년에 501명이 몰살당한 바로 그 자리에 아크로비스타라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500명이 참사를 당한 자리에 업무용이나 상업용 건물도 아니고 주거용 건물을 올렸으며, 위령비고 뭐고 하나도 안 세우고 말이다.[83] 그때쯤 되면 센트럴 시티신세계백화점이 들어서니까 백화점은 패스.[84]

파일:삼풍_참사_위령탑.jpg
삼풍백화점 사고 위령탑

삼풍 사고 위령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긴 한데, 그 장소가 엉뚱하게도 양재시민의 숲이라 그런 것이다. 그나마도 먼저 지어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위령비에 밀려 한쪽 구석에 쳐박혀 있다.[85] 그 옆에는 자그마한 정자도 하나 있다. 주로 서울 코믹월드 때 쉬는 장소로 자주 쓰인다.

서초동에서도 요지 중의 요지인 삼풍백화점 터가 아크로비스타의 착공 전까지 5년이 훨씬 넘도록 어떠한 건물도 들어섬이 없이 거의 폐허와 같이 방치된 것은 단순히 참사의 이유로 매각을 꺼린 상황에서 비롯된 게 아닌 것이 이미 사고 1년 뒤에 경매에서 대상그룹이 낙찰을 받았기 때문으로, 대상그룹이 부지 경매에서 낙찰받고 금액 납부를 3년 씩이나 지연해서 공사가 늦춰진 것이다. 대상그룹이 미원등으로 식품산업에서 유명한 재벌이긴 해도 당시 2,000억 원[86]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기업 규모나 시가총액 수준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던데다 IMF 외환위기 등의 경제적 위기 상황까지 감안하면 낙찰가 납부를 위한 자금 마련이 내부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이 반면교사가 되었는지 2011년 7월 5일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가 생기자 즉시 손님과 상인들이 철수하고 대책회의를 열며 급히 문제 분석에 들어갔다. 근데 건물주 측은 빠른 움직임을 보인데 반해 입주 상인[87]들과 어느 대형 입점업체는 돈 한 푼이라도 벌려고 바로 철수 안했다.

한반도 최악의 참사로 사고 구조과정에서 지하 바닥이 드러나기 전까지 생존자가 간간히 구조되어 거의 보름간 뉴스에 삼풍 구조 소식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지 몰라도 상당수 사고들이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는 반면에 상당수가 기억하고 가끔씩 얘기하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해 몸서리치곤 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최악의 참사다. 그래서 이 사고에 대해 적혀있는 현대사 책도 있다.

실제 삼풍 참사가 발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기에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에서 영업 중 정전 사고가 났는데 쇼핑하던 고객들이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거나 기둥을 붙잡는 등 건물의 진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불안감을 표출하는 반응들을 보이기도 했으며, 위에서도 언급한 2011년 발생한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 진동 사고에서도 건물에 있던 사람들이 마찬가지의 불안감을 표출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대표적 역대급 참사임에도 이런 사고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교육 현장에서는 언급되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말도 있다.[88] 그나마 대학교 공학윤리 과목에서는 필수소재가 되어 있으며 외국 교재에서도 자주 인용될 정도이다.[89]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준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7년간 교도소에서 살았고 재산은 압류당하고 지인들도 관계를 끊었으며 신장병까지 걸렸다. 결국 출소 6개월만에 죽었다. 당시 가족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데 그의 장례식에 놀랍게도 큰며느리가 왔다고 한다. 불쌍하게도 이 사람은 자기도 피해자인데 사건 후 가해자인 이준 대신에 사과했다고 한다(...) 여론은 이 사람도 피해자였던지라 동정했다고 한다.

10.1. 남아있는 흔적들[편집]

사고 당시 대책본부가 설치되었던 삼풍주유소는 2011년에 문을 닫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식당으로 이루어진 빌딩이 들어섰다.

B동에 있었던 조흥은행 지점은 붕괴사고 이후에 백화점 밖으로 빼고 현재까지도 영업중이다. 옛 삼풍백화점 뒤쪽(삼풍아파트 후문)에 있는 신한은행 삼풍지점이 삼풍백화점에 있던 지점의 후신이다.

백화점 뒷편의 삼풍아파트의 단지 내 안내도(#사진)에는 2011년경까지 삼풍백화점이 표시되어 있었으나 안내도가 교체되어 사라졌다.[90] 삼풍아파트의 측면에는 아직도 풍(豊)자가 남아있고 삼풍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한 반포미도아파트 1차, 2차에는 아직도 삼풍백화점 마크가 새겨져 있는 쓰레기통이 존재한다.

쓰레기통은 1994년, 그러니까 붕괴 1년 전에 백화점 측에서 홍보용으로 아파트에 설치한 것이다.

파일:삼풍1.jpg
2018년 5월 현재는 아크로비스타로 제대로 표기되어 있다.

11. 사고 관련 영상 자료[편집]

11.1.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 백화점, 예고된 붕괴(Deadly Design, 2005)"[편집]

2005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붕괴 후 17일간 생존하여 구조된 박승현씨의 사례와 인터뷰를 중심으로 붕괴 상황을 설명하며 미국인 구조 전문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원인 분석이 이루어지며 당시 붕괴사고 조사단장이었던 단국대학교 건축공학과 정란 교수의 인터뷰도 비중있게 들어가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다룬 첫 다큐멘터리여서 그런지 몰라도 기승전결의 구성도 보이지 않고 원인 분석 또한 다소 겉도는 느낌으로 완성도가 비교적 떨어진다. 특히 건축 구조학적인 설명에 너무 치중하여 유사한 다른 참사들의 분석같은 불필요한 부분까지 할애한 탓에 상대적으로 삼풍백화점 붕괴 원인 및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정황에 대한 정보가 부실하다. 건축공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경우라면 관련 이론 및 사례에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기에 추천할 만한 다큐멘터리이지만 대형 참사를 소재로 한 일반적인 다큐멘터리로는 비교적 부족하다. 참사 원인 및 과정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더욱 상세히 알고 싶은 경우라면 이 다큐멘터리 보다는 아래 문단에 있는 2007년에 사상 최악의 참사 시리즈로 제작된 "삼풍 참사의 진실" 을 시청하는 것을 권장한다.

11.2. 내셔널 지오그래픽 - "삼풍 참사의 진실(Superstore Collapse, 2007)"[편집]

2007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은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사상 최악의 참사를 통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다시 한 번 다뤘다. 같은 방송사에서 만든 2005년작의 다큐멘터리의 구성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생존자를 대표하여 인터뷰에 응한 유지환씨의 당시 정황 및 생존 과정에 대한 경험담, 그리고 피해자 가족을 대표하여 인터뷰에 응한 생존자 박승현씨의 친구인 서혜진씨[91]의 사고 당시의 심정 및 관련 에피소드 등을 중심으로 하여 다큐멘터리가 전개된다. 원인 분석에 있어서는 미국 구조 전문가의 인터뷰가 중심이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단국대학교 정란 교수의 원인 분석 인터뷰가 거의 단독으로 중심이 되어 인용되고 마지막 부분에 생존자 박승현씨의 인터뷰도 살짝 들어가 있다.

세계적인 참사를 소재로 하는 사상 최악의 참사 시리즈 특유의 시간에 따른 설명 및 기승전결이 돋보이며 전작 다큐멘터리의 불필요한 관련 사고 인용을 없앤 대신에 사고 원인에 대해 한층 자세하고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생존자의 경험담 및 피해자 가족들의 사연들도 나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참사에 대해 상당히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중에서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 2005년에 제작된 전작의 경우 설계 오류 및 오랫동안 이루어진 하중 과도와 냉각탑을 굴려 옮기는 바람에 구조물이 약화되어 건물이 결국 무너졌다는 식으로 건축 구조학적인 원인 분석으로만 결론을 내버리지만 이 작품에서는 단순히 부실시공이라는 원인 이전에 북한의 테러, 가스 폭발 등의 조사 초기에 거론 되었던 다양한 원인 및 가능성들에 대해서도 분석적으로 접근을 시도하면서 자세히 파고 들어가 말미에 냉각탑의 이동 후에 진동에 의한 구조물의 약화 과정까지 상세하게 묘사하여 사고의 원인과 전반적인 정황 및 현상에 대해 기승전결을 가지고 차분하게 설명하여 완벽히 이해를 시켜준다.

전작에서 재연 배우의 어색한 발음 및 연기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이번에는 생존자 대역부터 사고 관련 책임자 및 기타 주변 인물들 대역까지 모조리 오리지널 한국인 재연 배우들을 투입시키고 필요한 장면들은 한국 현지 장소에서 촬영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개선을 했으나 한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되었을 때에 영어 나레이션과 유지환씨나 정란 교수 등의 인터뷰에서 나오는 한국어는 전부 영어 더빙 처리된 상태에서 한국어 더빙 편집을 전혀 하지 않고 자막만 집어넣어 방송되었고 심지어 해외 방송분에서는 버젓이 있는 일부 붕괴 과정 장면들과 유지환씨와 박승현씨의 일부 인터뷰 내용들이 임의로 편집되어버리는 등[92]의 문제점 때문에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참고로 2년전에 실외기를 옮긴 게 아닌 개장 전에 옮겼다.

다큐 보기.

11.3. 디스커버리 채널 : Blueprint for Disaster(재앙의 청사진)[편집]

링크

Discovery 채널의 다큐멘터리. 과거 국내에도 몇번 방영된적이 있다. 사고 당시 생존자와 구조대원, 사고 원인을 조사한 박사들과의 인터뷰가 전부 실려있고, 다른 국가에서 일어난 붕괴사고와 비교하면서 사고 원인을 자세히 알아본다. 단점이 있다면 재연배우가 한국인이 아니라 발음이 어색하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후 한국의 다른 케이블 채널에서도 방영되었다고 한다. 다만 거기선 정식으로 허가얻어 방영은 했지만 디스커버리 채널의 마크 등은 나오지 못한 듯.

11.4. MBC 뉴스데스크[편집]

영상 1 영상 2, 영상 3

마지막 영상은 7월 9일의 뉴스로, 최명석씨가 구조되는 장면이 담겨있다.

11.5.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4회[편집]

2015년, 삼풍 20주기을 맞아 제작되었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 사고 7분 후에 공개된 구조대원이 촬영한 영상 공개와 유가족들의 증언, 난지도 매립장에 잔해를 버린 것,그리고 최후의 3인 중 유지환씨를 인터뷰했다. http://www.youtube.com/playlist?list=PL5qRfk4DowRCfif0iHtbMPjrTtq4loxB1

12. 최후 생존자 3명의 구조[편집]

삼풍 백화점 붕괴 이후 3명의 최후 생존자가 있었다.

당시 구조 본부는 사고 발생 후 10일 이상이 지난데다가 더이상 생존자가 없을 것으로 보아 구출 작업을 중단한 상태였으나 기적적으로 생존자의 소리를 듣고 붕괴 11일 만에 생존자를 구출하게 되었다. 첫 생존자는 11일째 최명석군(당시 만 20세 남자) 였고, 이로 인한 희망으로 좀 더 구조 작업에 집중하여 13일째에는 유지환양(당시 18세 여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17일만에 박승현양(당시 19세 여자)까지 구출되었다.

총 3명의 최후 생존자 중 2명의 여성들은 모두 평범한 가정 주부로 생활을 있고(당시에는 대부분의 2030여성들이 사회활동을 하지 않을 때다.), 당시에 건축설비과 학생이었던 최명석씨는 현재 GS건설에서 일을 하고 있고 매몰당시의 악몽이 아직까지 가끔 되살아 난다고 하며, 지금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기사

13. 괴담[편집]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이에 관련된 괴담들이 도시전설로 은근히 번져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지 11일째 되던 1995년 7월 10일 그날은 유난히도 천둥번개가 심하게 치고 폭우가 쏟아졌는데 공교롭게도 백화점 엘리베이터 타워에 낙뢰가 떨어지는 장면이 MBC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이를 두고 억울하게 숨진 피해자의 원한이 담긴 게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주상복합 아파트아크로비스타지하상가는 물론 지하주차장에서 여전히 괴음성과 귀신의 목격담이 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 덕분에 초기에 경비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요새는 좀 잠잠해진 모양.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자리 바로 위에 건설된 주상복합 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 A동의 지하상가(#사진)에서 오래 살아본 주민에 따르면 지하만 내려오면 오싹한 한기가 느껴진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때문에 교회나 절에서 엑소시스트가 정기적으로 온다고 하며, 특히 영안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같이 원한이 가득한 귀신들이 잔뜩 보인다고 했다. 이 곳 주민들은 물론 지하상가 점주들에게 삼풍백화점 관련 얘기만 꺼내도 진짜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곳 지하상가에 입점한 점주들도 심야 영업을 꺼려서 늦은 밤에 대부분의 상가가 영업을 종료한다고 한다. 심야 영업을 떠나 늦은 밤에 저러한 장소에 있다는게 오싹하다는 듯.

당시 삼풍백화점 사고 현장에서 전경으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새벽에 방패 옆에서 졸고 있는데, "드르륵" 소리에 눈을 떠보니 웬 아주머니가 (사고 현장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거예요. "이런 곳에서 웬 유모차?" 라고 다시 눈을 붙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지하 슈퍼 아주머니들이 카트를 끌고 다녔던 게 생각이 나는 거예요.


원래 이렇게 대형 사고가 발생한 곳은 경찰청 또는 검찰청이나 감사원, 국세청 같이 권력이 강한 국가 기관을 세워서 그 기를 눌러앉혀야 한다는 무속인들의 말이 있다.[93]

어머니와 아이가 백화점에 갔는데 아이가 너무 울어서 백화점에서 나와 아이에게 왜 그렇게 우냐고 다그치니 아이가 '엄마는 검은 옷 입은 사람들 못 봤어?' 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제법 유명한 괴담. 그리고 이야기 마지막에 "그 백화점은 삼풍백화점이었다" 가 붙어있다. 아이가 "검은 옷 입은 사람" 을 보고 어머니한테 떼를 써 백화점을 나오는데 나오자마자(내지는 뉴스에서)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버전도 있다. 이 '검은 옷 입은 사람'은 저승사자란 말도 있고 위기를 알아채고 경고를 준 조상님이었다는 말도 있다.#

사고 후 삼풍백화점에서 유출된 쇼핑카트(#사진)를 옛날 근무자가 주워 서류 운반용으로 어떤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회사원들 사이에서는 저 카트가 있는 창고에서 잠을 자면 가위가 눌린다거나 악몽을 꾼다고 한다. 당시 사무실에 근무한지 얼마 안 된 필자가 이 쇼핑카트가 있는 서고에서 점심시간 낮잠을 잤다가 30분 동안 악몽을 꿨다[94] 는 도시전설 및 경험담이 아햏햏 시절 디시올라온 적 있다.

三豊百貨店
Sampoong Department Store

서울特別市 瑞草區 瑞草4洞 1685-3[95]

가까운 지하철 역에서 삼풍백화점 마크가 그려진 쇼핑백(#사진)을 든 아주머니가 아이와 함께 지하철을 탄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괴담이 아닌 오히려 매우 있을 법한 일이다. 알뜰한 아주머니들은 보통 백화점 쇼핑백들을 버리지 않고 잘 모아두고서 이웃 아주머니나 누군가에게 전해줄 음식이나 물건 따위를 담는 용도로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삼풍백화점 쇼핑백 또한 실제 인근 주민들이 사고 후에도 이런 용도로 많이 사용했을 것이고 실제로 붕괴사고가 난 지 10년이 넘은 후에도 이런 경로를 통해 삼풍 백화점 쇼핑백을 입수했던 어느 블로거가 사진으로 올린 적도 몇 개 있다. 거기에 교대역은 삼풍백화점 인근이기도 하지만 삼풍백화점을 애용하던 주변 아파트 단지 주민들도 많이들 이용하는 지하철 역이기에 이런 풍경은 어찌 보면 귀신이라기 보다는 그냥 있을 법한 일이 괴담으로 와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는 환각을 겪었을 수도 있다. 한국인의 경우 정서상 사건/사고와 관련된 물건이나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물건을 사용하거나 만지는 것을 불길하게 생각하여 꺼린다. 만약 누군가가 물건을 쥐어 주면서 사건 사고에 관련이 되었다던가 누가 생전에 쓰던거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사고와 관련된 물건을 쓰는 것을 불길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물건을 보면서 사건사고가 일어났던 것이 떠오르고 이것이 뇌리에 남아 환각을 겪었을 것이다.

검사 결과 2%의 건물들만이 안전한 상태라는 충격적인 결과로 전국 각지의 건물들이 대대적인 개보수와 재건축에 들어가는 괴사태가 나왔는데 이때 대기업이나 정부 건물들은 확실히 안전하게 재건축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건물들은 돈이 없어서 개보수를 하지 못해 여전히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괴담도 있다.

2010년 11월 3일에는 아직도 삼풍스러운 백화점이 지어지고 있다는 괴담이 돌았으나 사실관계에 맞지 않아서 괴담으로 끝났다. 다시는 삼풍백화점 같은 건물을 지으려는 시도가 절대로 있어선 안 될 것이나 국내에서도 실제로 제2의 삼풍백화점을 지으려던 시도가 발각되었으며 결국 2013년 해외에서 삼풍을 넘어선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가 터지면서 제 2의 삼풍 사태가 터졌다.

2010년 스레딕 괴담판에 1995629557[96]이라는 스레가 세워졌다. 공책을 주웠는데 내용이 이상하다,라는 흔한 내용이였지만 공책 내용이 삼풍백화점 사고와 관련 있다고 한다. 스레딕 괴담이 네이버와 유튜브에도 전파가 되었다.기괴하니까 경고함. 1995629557 1편(네이버 블로그 링크),1995629557 1편(유튜브 링크) 참고.

14. 같이 보기[편집]

[1] 시신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갑작스러운 붕괴로 건물 더미에 시신이 훼손되어 그대로 증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발견된 시신 중에서도 50여명은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2] 아직도 실종된 상태로 사망자와 진배없지만, 사망자는 시신이 없더라도 사망이 인정되었지만 이 경우는 사망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다. (현재는 15년이 넘었으므로 사망 처리) 이쯤되면 죽었는데 시신이 유실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3] 삼풍백화점은 7월 초에 대규모 세일 행사를 열 계획이었다. 세일 때 팔 물건이 대량 입고됐기 때문에 면적당 피해액이 일반 백화점보다 더 클거란 업계 예상이 있었다. (이때 이렇게 말한 업계 관계자는 "인명피해가 엄청난데 어떻게 물적 피해를 논할 수 있겠냐"고 덧붙이기도 했다고.)[4] 만약 7월 초에 대규모 세일 행사를 열때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면 아마 사망자는 600~700명은 넘었을 지도 모른다.[5] 테러와 재해로 일어난 붕괴는 제외하며, 상업건물로 한정하면 2위 그대로이나, 1802년 스페인에서 있었던 댐 붕괴로 인한 홍수 등을 추가해서 10위로 밀렸다. 그리고 테러와 관련된 붕괴 사고 사망자 수 1위는 9.11 테러세계무역센터이며, 테러를 제외하면 2013년 4월 24일 발생한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다.[6] 1위는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이었다. 이 롯데 본점의 규모는 90년대 초반 규모 측정 당시 구관 바로 옆에 새 건물로 지어진 신관이 구관과 내부까지 완전히 이어 붙여진 상태에서 파악한 규모다. 따라서 별도의 증축이나 확장 없이 단일매장 규모로서는 삼풍백화점이 1위였던 셈이다.[7] 삼풍백화점의 연면적은 73,877㎡, 롯데월드몰 연면적은 428,934㎡으로 롯데월드몰이 훨씬 크다.[8] 오픈 당시에는 위 사진처럼 하얀색으로 도색했다가 중간에 분홍색으로 바꿨다.[9] 당시에 갤러리아는 사실 지금의 명품관이미지가 아닌, 강남 오렌지족과 신세대를 위한 백화점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가의 물건을 많이 판매한건 사실이다. 하지만 넓고 세련된 매장과 수입브랜드를 두루 갖춘 삼풍에는 밀렸다.[10] 심지어 로비에 부가티 EB 110이 전시된 적도 있었다. 이 차량은 부가티 베이론의 아버지뻘 되는 차량이다. 이 어마무시한 차를 수입할 정도니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현재 하남 스타필드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메르세데스 AMG 프로젝트 원을 생각하면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11] 아예 94년부터는 삼풍에서 브랜드를 직접 운영했었다.그리고 붕괴이후에 페라가모코리아가 설립되었다.[12] 이 때문에 붕괴 당시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13] 해외에서 생산된 생활용품을 수입업체를 통해 수입해와 아프레미디 상표를 붙여서 파는 방식이었다.[14] 수입업체와 독점계약을 맺었을 정도.[15] 응답하라 1994에서는 냉면집이 언급되지만, 당시에는 냉면이 그랜드가 더 유명했었다고 한다.[16] 당시 뉴코아는 가격파괴를 캐치프레이즈로 사실상 내새울 만큼 싼값의 국산제품을 많이 판매 했었다. 말이 백화점이지 지금의 마트나 아울렛정도의 이미지였다고 생각하면된다.[17] 당시 스포츠센터 회원은 백화점 회원으로 자동 등록 할수있게 되어 있었는데, 붕괴 이후 스포츠센터 회원 명단을 보니, 이름대면 누구나 알만한 고위층들의 이름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18] 원래는 수도권과 지방에도 지점을 추가로 내려고 했으나, 사업과정에서 난관이 많아서 착수 기한을 미룬 상태였다.[19] 그런데 타 백화점보다 그랬다는 것이지, 절대로 파리날리는 백화점은 아니었다.[20] 그러니까 당시에 돗대기 시장마냥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롯데나 뉴코아랑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20] 차라리 파리 날리는 백화점이었다면 이정도로 인명피해가 심각해지진 않았을 것이다.[21] 실제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에서도 나오듯 약한 지반이 계속적으로 무게를 지탱하면 결국 무너지게 되어있다. 물론 그 전에 부실공사도 한 몫 했지만.[22] 1988년 당시 삼풍랜드 말고 신문 광고에 삼풍쇼핑이라는 이름으로 광고를 낸 바가 있는데 신문 광고에 냈던 건물 샘플은 이 문단의 첫 번째 자료 사진으로 나와 있다.[23] 대단지 종합상가의 크기나 개념을 쉽게 알기 어려운 위키러를 위해 첨언하자면 대치동은마아파트에 있는 종합상가를 생각하면 쉽다. 은마아파트의 종합상가는 크기는 백화점보다는 작지만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되어있으며 A데크와 B데크로 나뉘어 운영할 정도로 크다. 게다가 옆의 하이마트 본점 및 본사보다 부지도 더 넓다.[24] 다만 우성건설도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로 같이 망하기는 했다.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신도시 건설로 일감이 크게 늘어나면서 무분별하게 사업확장을 했다가 콘도와 백화점 사업이 별로 수익을 거두지 못한데다가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에 들어가면서 미분양 물량이 쌓여서 이를 감당하지 못한것이지만 삼풍시공 사실이 알려진것이 이미지에 타격이 가해진건 사실이었다. [25]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 지하로 내야 한다.[26] 알다시피 백화점이라면 일반 가게나 슈퍼마켓과는 다르게 서점, 가전제품, 가구 등 적게는 수천 킬로그램에서 많게는 수백 톤의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을 진열하기 때문에 증축할 때는 당연히 안전을 확인해야 하며, 한다고 해도 고층에는 무거운 짐을 올리지 못하게 하도록 되어 있다.(그래서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 식당가가 거의 대부분 지하에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렇지 않은 건물들은 아래설명처럼 그걸 염두해두고 더욱 보강을 해서 짓는다 그러나 이를 아예 무시하고 5층에 수영장과 물을 이용한 온돌이 돌아가는 식당가를 지었다. 물의 경우 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인데, 거기다가 무거운 냉장고와 가스 시설에 물을 이용한 보일러까지 올렸다. 한 마디로 나무 젓가락 위에 수백 킬로 짜리의 물건을 올린 셈이다.
물론 옥상 수영장과 같은 고층 수영장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도 수영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애초부터 수영장이 들어가는 것을 상정하고 설계하여 지어지는 게 원칙이다. 기존 건물에 새로 수영장을 만드는 경우라도 사실 상 신축 수준으로 리모델링이 이루어지거나 정말 제한적인 소규모 수영장으로 지어진다. 고층 수영장은 매우 까다롭게 따져가면서 설치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이 전무했던 것이고 심지어 내부 공간 확장을 위해서 하중을 받칠 기둥마저도 삭제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를 보고 무너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1년 이상을 버텨온 게 용하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27] 이는 공사 관계자가 공사 비용을 착복하기 위해 자재를 줄였기 때문으로 밝혀졌다.[28] 말이 25%지, 원의 단면적은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한다. 즉 실제로는 기존 설계와 비교해서 0.75의 제곱인 고작 56.25% 정도의 하중 밖에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29] 한국인들은 '온돌'하면 돌을 깔아넣는 전통 방식만 생각하지만 흔히 '보일러'라고 부르는 바닥 아래에 깔린 호스로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 바닥을 덥히는 난방장치가 바로 온돌의 직계후손이다. 바리에이션으로 물 대신 전기 열선을 이용한 전기 온돌도 있고, 이는 무게가 훨씬 가볍고 설비도 간단한 편이지만 이게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2000년대 이후이다.[30] 물 때문에 하중이 엄청나게 늘어난다.[31] 1990년대 초반까지는 백화점 고층에 식당가(푸드코트)가 위치하는 게 흔했다. 지하 1층 식품매장, 1~4층 매장, 5층 식당가 형태가 보편적이었으나 삼풍 사고 이후에 모두 바뀐 것.[32] 특히 한국 책들은 더 하얗게 하려고 종이에다 돌가루를 많이 넣고 표지도 두꺼운 골판지를 사용해서 외국 책보다 훨씬 더 무겁다. 오죽하면 이삿짐 센터에서는 책을 벽돌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책을 꽂을 서가의 무게도 고려해야 하는데 이 또한 만만치 않다.[33] 2009년 정해진 구조 설계 기준에 따르면 백화점 2층 이상의 설계 하중은 단위 면적당 400 kg, 서고는 750 kg이다. 용도변경으로 인한 실하중이 초과될 경우 반드시 진단 및 구조검토를 거치고 보강 등 조치를 해야 한다.[34] 따라서 지금도 대형 서점은 대부분 건물 지하층이나 1층에 위치한다. NC웨이브 전주점이 그 예인데, 지하에 문구점인 핫트랙스와 교보문고가 있다. 교보문고는 애초에 지하에 위치한다. 물론 층수가 높은 곳에 서점이 입점한 건물도 꽤 많지만, 이런 백화점들은 당연히 관련 규정을 철저히 지켜서 건축하였다.[35] 당시 건물이 이상해서 B동으로 간 사람도 있었고 붕괴 당시 B동으로 대피한 사람도 있었다.[36] 당시에 한미은행조흥은행, 서울은행, 한진투자증권 이 입점해 있었다.[37] 실제로도 실제 도서관이나 서점 설계에서는 1mm^2에 평균 6g 정도의 하중을 견딜 수 있게 설계하는데 이는 일반주택의 두배정도 되는 수치다. 그런데 삼풍은 일반주택보다 못한 하중설계에 거기다 서점까지 입주시켰으니 한계점을 넘어도 한참 넘은상태였다.[38] 2018년 7월 12일자 CBS 김현정의 뉴스쇼 '탐정 손수호' 코너에서 해당 내용을 다룰때 확인 결과 붕괴 1시간 전부터 4층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경영진들이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붕괴 17분전인 5시 40분에 당시 시설부장으로부터 붕괴가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준회장과 그일당들은 하던 대책 회의도 중단하고 먼저 튀었다고 한다. 이것이 진실이면 경영진이 이미 붕괴를 몰라서 전관 방송을 하지 못했다고 하기가 어려운 부분[39]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1995년 6월 29일 당일 서울의 최고기온은 섭씨 29℃에 육박했고 안개가 낀 날씨였다고 한다. 다들 알다시피 안개가 끼면 날씨는 더 뜨거워진다.[40] 저 거대한 먼지 구름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서초구, 강남구 전체와 잠실 일대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저 때가 하필 초저녁 시간대라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하늘 멀리서 웬 먼지 폭풍이 날아오더니 아파트 단지 전체를 휩쓸자 놀란 엄마들이 황급히 달려나와 아이들을 도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해하다가 나중에 이유를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41] 부상자들은 붕괴 초기에는 "뿌드등"하며 건물이 한 쪽으로 쏠리다 갑자기 밑으로 떨어졌으며, 이에 놀란 쇼핑객들이 여기저기서 "악!", "사람살려!"라고 소리치며 사고의 순간을 전했다.(출처: 96' 기자가 본 100대 뉴스, 한국편집기자회. 471 페이지)[42] 전 청와대 부대변인. MBN에서 앵커로 다시 활약중이다.[43] 119 구조원 옷을 빌려입고 붕괴 현장에 들어가 건물의 설계도를 꺼내 왔다. 2018년 7월 10일 확인결과 한국에서 볼 수 없도록 시청금지를 걸어놨다. 미국vpn 등으로 우회해서 보면 된다.[44] 1990년대 중반임에도 CCTV 영상 화질이 너무 좋다는 점 때문에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다. 1995년 당시 CCTV의 화질로 사람의 이목구비와 표정, 들고 있는 물건까지 확실히 나오기는 어렵다. 카더라에 의하면 이 사람은 40대의 삼풍백화점 직원이고 추가 붕괴로 인해 사망했다고 하는데 정확하진 않다.[45] 동년 5월 1일에 입사했다고 한다.[46] 사고 당시에는 서울가정법원이 현재의 서울중앙지방법원 1별관 내에 있었다. 2012년에 양재동으로 이전.[47] 최후 생존자 3인 중 첫 테이프를 끊은 최명석 씨를 구출해 낸 분이기도 하다.[48]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 본부 산하의 국민소통실. 단, 방송관련 업무는 현재의 방송통신위원회로 이관되었다.[49] 당시 지상파 평일방송은 밤 12시에는 끝이 났다.[50] 이때 무너진 백화점 주변의 옷들을 훔치면서 웃는 아줌마의 모습도 포착됐는데, 그 웃음이 상당히 섬뜩하여 지금도 종종 언급되고 있다. 보는사람에 따라 공포감이 느껴질수 있으므로 주의하고 볼 것.#[51]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보유 사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52] 반대로 이걸 안 하고 그냥 싹 밀어버려서 그 '불상사' 가 발생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차우셰스쿠 집권기에 부쿠레슈티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였는데, 구조작업 때문에 복구 속도가 더뎌지자 그냥 무시하고 잔해를 다 싹 밀어버리라(!!)고 지시해서 실종자가 몽땅 사망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잔해 속에서 실종자들의 분해된 신체 일부분(...) 이 빈번하게 발견되었던 것.[53] 미세한 소리를 탐지하는 장비의 특성상 최대한 조용한 환경을 위해서 탐지하는 동안 구조활동을 멈춰야 하는데,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구조활동을 하는게 낫지 않겠냐는 실종자 가족들의 의견에 미뤄지다가 우여곡절 끝에 구조활동을 멈추고 탐지를 했다. 하지만 역시나 붕괴현장의 잡소리가 너무 많아서 의미있는 탐지는 해내지 못했다.[54] 실제로 다국적 구조대가 편성되면 명령의 주체가 흐려질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힘들어 사망자나 체계적인 구조가 힘들어진다. 이러한 구조대는 삼풍과 같은 국지적인 재난보단 광역적인 재난에 효과를 더 발휘한다.[55] 최명석씨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는데 차차 구조 열기가 식어가면서 물도 뿌리지 않아 갈증에 시달리던 중 장대비가 쏟아져 빗물을 마셔 연명할 수 있었고, 그 다음날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던 중에 굴착기 기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여성도 갇혀 있어서 같이 살아나가자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25세의 직원 이승연과 다른 한명의 중년 여성은 콘크리트에 깔려 부상이 심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56] 유지환 씨는 구조 후에 상당히 유쾌한 모습을 보였는데 구조된 직후의 소감으로 "구조대원 오빠데이트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고 또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약간 엉뚱한 말을 해서 소소하게 웃음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초대형 참사를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인데다가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혼이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거나 할텐데 저렇게 유쾌한걸 보니 상당히 정신력이 강하신듯하다.[57] 이는 1967년 청양 구봉광산 매몰사고 생존자 김창신 씨(앞의 양창신과 동일 인물이다.)의 16일 생존 기록을 10시간 깬 것이다. 특히 김창신 씨의 경우는 매몰된 상태에서 외부 연락이 가능했던 반면(매몰 지점에 광산 전화가 있었고 다행히 전화선이 두절되지 않았다) 박승현 씨는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고립 상태에서 17일을 생존했다. 박승현 씨가 국내 최장 기록을 깨면서 김창신 씨도 잠깐 화제가 되었는데 MBC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학생이 장하기 그지 없다면서 자신의 기록은 얼마든지 더 깨져야한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마지막 생존자였다.[58] 최명석은 75년생, 유지환은 77년생, 박승현은 76년생이다.[59] 그래도 이 사람은 건물의 붕괴 조짐을 인지하고 이준 회장에게 적극적으로 고객들의 대피를 요청했으므로 적어도 인간 쓰레기는 아니다.[60] 현재는 몽골에서 선교사로 살고 있다. 이 사람도 잘못이 있는 게, 붕괴될 것을 알고도 이준 회장과 함께 탈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이준 회장 아들이다. 그래서 사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가 있었다.[61] 앞서 나왔듯 신공법으로 보수공사나 하자고 한 인물 그래도 옆에 있는 이준보다는 낫다. 의견을 잘못 낸거로 결정은 이준이 했고 결정적으로 이준과 비교해서 보면 이쪽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다.[62] 반대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의 경우에는 사고가 순식간에 벌어진데다 대구백화점보다는 표준개발 쪽의 잘못이 더 컸고 게다가 대백 회장이었던 구본흥회장이 직접 무릎꿇고 사죄를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회사가 남아있는 것.[63] 특히 이준 회장의 뻔뻔한 태도와 피해자 중에 이준의 며느리가 있다는 것 때문에 (심지어 죽을 때까지 죄송하다는 말조차 안했다.) 더더욱 욕을 처먹었다.[64] 다만 바로 아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이 처벌은 당시 법령에서 가능한 최고 형량으로 처벌한 것이다.[65] 조남호 구청장은 민선으로 당선되기 전 관선으로 서초구청장을 역임했고, 1993년 8월 삼풍 백화점에 지하 주차장 증축과 용도변경을 승인해 준 경위 관련으로 조사를 받기도 했기에 유족들 입장에서는 사고와 무관하게 볼 수 없었던 부분도 있다. 다만, 수뢰등의 혐의는 모두 무혐의 처리 되었다.[66] YS의 분신같은 존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삼풍백화점이 지역구(서초 을)에 위치해있었다.[67] 이인제와 조순의 경우 사고 발생 당일에는 당선인 신분이었다가 저 사진을 찍은 날 각각 경기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했다.[68] 참고로 말레이시아에서 스팡에 신공항을 지었던 당시 한국 기업들은 거부당했었는데, 이러한 부실공사 관행으로 말레이시아측에서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69] 근데 사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책임을 안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전두환 정부이다. 5공 때 잘못 지어진 게 대부분이기 때문. 물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이러한 위험을 인식 후 대대적인 수리를 했었더라면 이런 일들은 없었겠지만. 근데 다 뜯어버리고 다시 지은 건 잘한 거긴 하다. 5공이었다면 그냥 내팽개치고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이랬을 테니까(…).[70] 미국의 경우 1956년에 강도설계법을 부록 기재, 1963년에 허용응력 설계법과 같이 본문에 기재, 1971년 허용응력 설계법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본문에 강도설계법을 기재하였다. 부록 기재부터 치면 까마득하게 늦게 도입된 셈이다.[71] 압좌 증후군이란? 무거운 잔해에 짓눌려 있는 동안 조직이 괴사해 독성물질을 품고 있다가 구조된 후 그것이 혈액을 타고 온몸에 퍼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72] 붕괴 2시간 25분 전[73] 32인치에서 23인치로 줄임.[74] 작가들의 후기를 보면 웹툰이 먼저 기획되었으나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소설 집필이 선행되었다고 한다.[75] 공교롭게도 사고 18주기가 되는 날이다.[76] 바로 사고에 큰 역할을 한 온돌 바닥의 5층 한식당으로 '사고의 원인'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닥과 지붕이 심하게 꺼지자 사고 당일은 문을 닫았다. 이때 점원으로부터 지하 웬디스 매장을 추천받았을 때 안 간 것이 천만다행이다. 웬디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생존 가능한 공간 없이 완전히 매몰된 구역이기 때문이다.[77] 퇴원을 앞둔 아내를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만두를 사러 갔다 변을 당했다.[78] 참고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광석이 삼풍 사고 언급 직후 불렀던 노래는 "사랑이라는 이유로"가 아니라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였다. 왠지 안 맞는 것 같지만 비상식적인 현실을 비꼬는 노래라는 점에선 맞는 노래다.[79]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80] 장동민이 무한도전 6번째 멤버로 거론되자, 과거 여성혐오 발언이 발견되어 시끄러웠을 때였다.[81] 그 대표적인 예가 캠브리지. 1995년 이후에 회사명을 주식회사 삼풍에서 주식회사 캠브리지로 바꿨다.[82] 원래 해태그룹 계열사였으나 1990년 독립 후 벨기에 Milco 사와 제휴해서 우유를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는 동원그룹에 인수되어 동원데어리푸드를 거쳐 동원F&B에 흡수된 상태다.[83] 미국의 경우에는 9.11 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부지에 프리덤 타워 외에도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박물관이 들어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후관리의 차이를 알 수 있다.[84] A, B동은 건물 자리였고 C동은 주차장 자리였다고 한다.[85] 성수대교 붕괴사고,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와 같이 이런 참사가 터질 때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겠다며 추모비를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사고 장소 근처도 아니고 엉뚱한 장소에 세우는 것도 모잘라 정작 세워놓은 위령비조차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이다. #[86] 단순 물가 상승률 대비 2014년 현재 7,000억 원 수준이다.[87] 특히 보석가게 상인들은 혼란을 틈타 자기 가게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생길까봐 철수를 안했었다.[88] 2015년은 삼풍백화점 붕괴 20주기이다.[89] 세계 제3위의 건물 붕괴 사고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외의 소재가 되는 것은 챌린저호 폭파 사고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고 정도.[90] 이 지도에는 쇼핑센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참고로 이 지도에는 지금의 e편한세상 아파트와 유원아파트 자리에 경복여상(현 경복비즈니스고)도 표시되어 있는데, 이미 삼풍백화점이 개장하기 직전에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전하였다. # 즉, 삼풍아파트 입주 당시에 제작된 지도인 듯.[91] 무슨 가족도 아닌 친구가 피해자 가족들 대표로 나오냐 의아해 하겠지만, 서혜진씨는 박승현씨의 절친으로 사고가 날 당일 박승현씨와 만날 약속을 잡고 있었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와 승현씨의 부모님과 함께 승현씨가 구조될 때 까지 여느 피해자 가족 수준으로 절박함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 인터뷰 내용도 보면 붕괴사고 당시 현장으로 바로 달려가 아무 생각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잔해를 파내기도 하고 끔찍한 시신 사진들을 뒤져보며 이들중에 친구인 박승현씨가 있는지 찾아 돌아다녔던 후일담이 주로 나오기에 당시 피해자 가족들이 처했던 상황과 심경을 대변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92] 마지막 엔딩 크레딧 직전에 "내 가족이 쓸 거라 생각하고 건물을 짓고 관리하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유지환씨의 뼈가 있는 중요한 인터뷰 내용도 한국 방송분에서는 삭제되었다.[93] 현재의 서초동 대법원, 대검찰청은 1995년, 그것도 사고 이후인 10월 27일부로 서초동으로 건너왔다. 그 이전에는 서소문 쪽(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고 사고 당시에는 서울고등법원 및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중앙지검과 서울고검만 서초동에 있었다.[94] 시끄러운 백화점 한가운데에서 여성의 하이힐 소리,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나 가격을 물어보는 소리가 들리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며 잠에서 깨어났다고 한다.[95] 지금으로서도 특이하지만 당시에도 삼풍백화점은 범현대그룹과 함께 특이할 정도로 한자로 표기를 많이 했었다. 이 때면 대한민국 레전드 기업인 三星도 현재의 CI를 사용할 정도.[96]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 붕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