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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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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건국3. 대 오스만 전쟁 및 전성기4. 멸망5. 역대 황제6. 의의7. 역사보기 틀

1. 개요[편집]

근세 이란을 지배한 시아파 왕조[1]
(1501~1736)

사파비 왕조 국기(출처: 위키백과)

2. 건국[편집]

시아파 7대 이맘의 후손으로 일컬어진 이스마일 1세(재위: 1501~1524)에 의해 타브리즈를 수도로 하여 건국되었다.[2]

사파비 왕조의 뿌리는 이슬람 신비주의 수련조직인 수피즘 단체에서 시작되었다. 그 단체의 지도자 이름이 '사파비'였으므로 단체 이름도 사파비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일개 영적 수련단체였으나 교주 자리가 아들에게 세습되고, 교주의 호위무사들은 군대로 성장했다. 시아파로 개종한 후 페르시아 지역에서 핍박받는 시아파들을 자극하여 투르크족 영주들(수니파)에게 도전했고, 여기에 놀란 투르크족은 사파비를 토벌했다. 사파비의 지도자도 살해당했으나 그 아들인 이스마일이 살아남았다. 사파비의 잔존세력은 비밀 지하단체로 몸을 숨긴 채 어린 이스마일을 실질적인 지도자로 추앙했다. 세력을 재건한 사파비 일파는 자신들을 핍박했던 영주들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스마일은 이스마일 1세가 되어 사파비 왕조를 세웠다. 무협지 현실판

3. 대 오스만 전쟁 및 전성기[편집]

사파비 왕조 이전에 이란 고원을 지배하고 있던 백양 왕조, 중앙아시아의 무하마드 샤이바니의 우즈베크 왕조를 캐발살내고 위의 지도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부활시켜 전 중동을 시아파 제국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수니파가 아닌 시아파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바로 옆에 위치한 수니파 계통 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적대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사파비 왕조는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였던 맘루크 왕조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스마일 1세의 사파비 제국과 셀림 1세의 오스만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북부에서 찰디란 전투(1514)을 벌였다. 하지만 사파비조는 화약 무기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과 달리 구식 무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특히 동맹인 맘루크 왕조도 오스만에게 멸망하여 병합되다보니 수세에 몰린다. 이후 사파비 왕조는 동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확장 전쟁을 포기하고 방어전 모드에만 돌입해야만 했고 국가 중심을 아제르바이잔(타브리즈, 술타니야)에서 이란 내륙으로 옮겼으며 오스만 제국은 치킨의 시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쉽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3]

그런데다가 동쪽으로는 우즈베크족의 침입과 내분으로 인해 국가가 흔들렸지만 이후 사파비 왕조 최대의 명군인 아바스 1세(1587~1629)의 치세 이후 수도를 1555년 이후로 국가의 수도였던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천도(1597)하고 오스만 제국과 우즈베크족을 격퇴하였으며 다소 불안정하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4. 멸망[편집]

하지만 이후 다시 벌어진 내분과 외부와의 전쟁으로 국력은 약화되었으며, 결국 1722년 사파비 왕조의 가혹한 통치에 폭발한 아프간족(현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다수 민족)의 반란에 의해 수도가 일시 점령되었으며, 이후 1736년, 국가 내외의 혼란을 수습한 나디르 샤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5. 역대 황제[편집]

이스마일 1세

1501~1524

타흐마스프 1세

1524~1576

이스마일 2세

1576~1578

무함마드 호다반다

1578~1587

아바스 1세

1587~1629

사피

1629~1642

아바스 2세

1642~1666

술레이만 1세

1666~1694

술탄 후세인

1694~1722

타흐마스프 2세

1722~1732

아바스 3세

1732~1736

6. 의의[편집]

사파비 왕조는 기본적으로 시아파 국가이었다. 사실 이란 북부의 산지 지역은 이슬람의 중심지로부터 상당히 먼 지역이었고 지형도 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통치에 대해 자유로웠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의 도래 이후로 지금도 그렇지만 소수파였던 시아파가 많이 활동하였으며 이후 이란에는 몇 차례 시아파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다.[4]

하지만 이런 이란의 성향과는 달리 수니파 성향이었던 튀르크족의 도래로 인해 시아파는 다시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게 되었으나 이러한 튀르크족을 물리치고 세워진 왕조가 사파비 왕조였다. 이슬람의 도래 이후 이란에는 시아파 왕조가 몇 차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페르시아인들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즉 현재의 이란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 데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 또한 이들은 기존의 이란을 지배했던 이민족들과는 달리 이슬람적 가치보다는 고대 이란의 황제의 칭호였던 를 자칭하는 등 페르시아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란 역사에서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5]

실제로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란이나 시아파를 칭할 때 사파비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편이다. 사파비 이전에도 시아파 왕조로 파티마 왕조등이 존재했으나 시아파는 1~5% 남짓한 극소수였고 그 당시엔 다 같은 무슬림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종파간 대립이 격화되어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성립되었고, 이는 10% 가량에 달하는 시아파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으며 그 시아파 절반이 이란이다. 언제나 소수파로 존재할 줄 알았던 시아파가 수니파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신호탄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서쪽의 대제국과 힘에는 부치지만[6] 나름 호적수로 활약하면서 흡사 예전의 로마 VS 사산조 페르시아를 방불하게 하는 형세를 유지했다.[7] 물론 예전의 대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하곤 아예 비교가 불가능하고[8] 사산 왕조와 비교하면 서쪽 전선은 영 딸리지만, 동쪽 전선은 의외로 유목 세력에 대해서 상당한 우위를 자랑했다. 오스만 쪽 전선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긴 했지만, 이 부분은 군사적 역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지중해-페르시아의 역량은 로마 제국-파르티아, 비잔티움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사파비 페르시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력에서 열세다보니 이란권이 힘에 부쳤던 데다가 사파비 왕조는 창건자 이스마일 1세 사후 내전에 휩싸여 있었는데, 내전이 가까스로 수습되자마자 적국이 국경을 쳐들어온 꼴이었기 때문.

그러나 밀리긴 했어도 밀리는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군 또한 크게 고전해야만 했을 정도로 여전히 지중해 제국의 무시 못할 강적의 위치는 유지했다.[9] 또한 오스만 제국 초창기의 술탄들이 튀르크계 개국공신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쪽에는 튀르크 계통의 키질바시[10]에 의해 제국의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면이 강했으며[11] 인도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등 꽤나 강세를 보였다.[12] 그리고 적어도 오스만은 몰라도 중앙아시아의 우즈벡에겐 전반적으로 대단한 강세였다. 사산조와 비교해보면 전적이나 영역이 묘하게 동쪽으로 치우친 상황. 은근슬쩍 이란 종족주의와 사산조를 동경했어도 아바스조 칼리프 눈치 보느라 그러한 심정을 표출하지 못했거나 아예 몽골계였던 이전 페르시아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그러한 열망을 현실화한 최초의 페르시아 통일 제국이기도 하다.

7. 역사보기 틀[편집]

파키스탄의 역사
پاکستان کی تاریخ

펼치기

인더스 문명

상고대

외세 지배기

마가다

그리스 헬레니즘 - 스키타이 - 파르티아

대월지

P

금석병용기

아리아 인의 침입 - 철기 도입

간다라

다리우스 -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간다라

마케도니아 - 알렉산더

ox

마우리야 제국 - 아소카 대왕

마우리야 왕조

인도 - 그리스 왕국

탁실라

메난데르 대왕

탁슬라

인도

쿠샨 제국

쿠샨 제국 - 카드피세스

T

T

J

카슈미르

포루스

판찬난다

사칼라

북 사트라프

L

드라비다 인

모헨조다로

코트 - 디지

하라파

카케이

포루스

판찬난다

북 사트라프

H

아라코시아

M

파우라바

페이톤

아라코시아

인도 -

파르티아

인도 - 파르

파르

C

M

암리날

수드라

난다 제국

살라바

서사트라프

S

압히라

압히라

스키타이

K

원주민

페르시아

제국

왕조

원주민

제국

시빌티오스

셀레우코스

인도 - 스키타이

M

마크란 인

제국

티아

티아

인 - 파

Q

발루치 인

B

쿠샨 제국

사산 / 굽타 / 후나 제국

분열기

이슬람 도래

이란계 왕조들

가즈니 제국

K

장중 왕국

얄룽 왕국

토번 제국

야르칸드 / 라다크 왕국

P

쿠샨 제국 - 카니슈카 대왕

쿠샨 제국

카슈미르

후나

후나 - 에프탈

후나 - 에프탈 제국

카불 샤시

카슈미르

가즈니

가즈니 - 마흐무드

가즈니 제국

T

카슈미르

J

타까

불 샤시

샤시들

샤시들

L

H

사산

쿠샨 샤

쿠샨 샤

M

카이카난

자불

사파르

C

사산

굽타 제국

굽타

굽타 제국

신드

신드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신드

M

신드

S

압히라

신드

구자라

숨라

K

M

쿠샨

사산

제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 (이란 제국)

사파르 왕조

사만

제국

Q

G

B

쿠프

U

12세기

13세기 : 몽골

14세기

15세기

16세기 : 무굴 제국

17세기

나디르 샤

K

야르칸드 / 라다크 왕국

몽골

차가타이 칸국

동차가타이

티무르 제국

라다크 - 남걀 왕조

준가르

R

가즈니 왕조

카슈미르

라호르

호라즘

티무르

바부르

무굴 제국

수르 제국

무굴 제국

무굴 제국 - 악바르 대제

무굴 제국 - 샤자한

무굴 제국 - 아우랑제브

호타키 왕조

아프샤르 왕조 - 나디르 샤

P

일 칸국

카르트

J

가즈니

구르 제국

맘루크 왕조

델리술탄 - 킬지

델리 술탄 왕조

투글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

미슬

L

G

L

H

구르 제국

델리

맘루크 왕조

M

구르 왕조

가즈니

물탄

C

M



제국

제국

일 칸국

미라반 왕조

무자파르

왕조

헤라트

카불

무굴

Q

호타키

B

호라즘

사파비 왕조

사파비 왕조

M

S

숨라

숨라

왕조

숨라

아르군

무굴

신드

K

※ K는 카슈미르, P는 페샤와르, L은 라호르, M은 물탄, P는 펀자브 남부, S는 신드 지방, Q는 퀘타, B는 발루치스탄, M은 마크란

[1] 사실 이 영토는 전선기 때의 최대 영토이며 전반적으로 사파비 왕조 치세 상당수 동안 오스만과의 전쟁에 패하여 아나톨리아 동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긴 상태였다.[2] 하지만 정말로 이맘의 후손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며 실제 여기에 의혹을 가진 사람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현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튀르크어를 쓰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밝혀졌다.[3] 이 전투의 패배 이후로 당시 이스마일 1세는 큰 충격을 받아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하며, 찰디란에서 승리한 오스만 황제 셀림 1세는 그에 대해 언제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며 정사에는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4] 대표적으로 부와이 왕조.[5] 하지만 ''가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칭호인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페르시아 계열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슬람 국가에서도 샤라는 칭호가 두루두루 쓰였기 때문. 대표적으로 오스만 황제의 칭호 가운데 하나가 '파디샤', 즉 '왕들의 주인'이라는 점을 들 수 있지만, 오히려 이슬람이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샤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6] 오스만의 전성기 인구는 3천만인데 사파비는 천만도 안되는 500만에 불과했다. 특히 건국 초기에는 인구가 320만에 불과했다.[7] 하지만 사산조는 로마에게 8배나 열세였기 때문에 사파비보다 사정이 더 좋지 못했다. 특히 로마군의 공격에 수도가 2번이나 파괴되었을 정도였다. 물론 로마가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으로 비교 대상을 바꾸면 사파비와 달리 사산조는 호각 이상의 전적을 유지했다.[8] 실제로 사산 왕조와 사파비 왕조가 추구했던 것이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영토를 재건하는 것이었다.[9] 그렇다고 해도 전체적인 부분에서 밀렸던 것은 사실이다. 아바스 대제 시절에 빼앗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영토를 금방 다시 빼앗겼을 정도. 반면에 사산조는 오스만과 영역이 유사한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싸움을 선보였었다.[10]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튀르크 부족들의 통칭. 'Qizilbash'라는 말을 직역하면 '붉은 머리'라는 뜻인데, 이는 그들이 즐겨 쓰던 붉은 모자에서 유래했다. 사파비 왕조 창건 이전까지는 소수파였던 시아파를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창건자 이스마일을 군주이자 교조로 받들었다.[11] 다만 제국 후기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이 개국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데브시르메 제도를 도입하고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했듯이, 2대 황제인 타흐마스프 1세 때부터 키질바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맘루크를 등용하기 시작하였으며, 5대 샤인 아바스 1세 때에 결정적으로 세력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12] 하지만 후반기에는 아프간족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고 일시 점령당하기도 했다. 역관광? 그러나 이후 다시 나디르 샤가 본진으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복수해서 설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