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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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무라이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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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무장한 사무라이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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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무장한 사무라이의 전신 사진 신체 비율이 이상하다[1]

1. 개요2. 역사
2.1. 초기2.2. 전성기2.3. 말기
3. 문화4. 부레이우치5. 그 외에6. 실존인물7. 관련 항목8. 대중문화에서

1. 개요[편집]

(さむらい)

일본 봉건시대무사 계급을 일컫는 말. 그 일컫는 범위와 위상을 생각하자면 유럽기사에 해당된다. 그들은 양민들보다 높은 신분으로서 을 차고다닐 권리가 있는 특권계급이었다. 전쟁에서 활약하는 무사(부시, 모노노후)와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다. 문관도 사무라이를 자처하며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런 면에서 무사(부시 武士)와 사무라이(侍)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무로마치 시대에 무사(부시)는 귀족 계급이었고, 이들 귀족들을 시종드는 일종의 경호원 겸 군인 장교들이 사무라이였다.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들 무사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하급계층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면서 다수의 평민 출신들[2] 다수의 지역 토호들이나 사무라이들이 새로이 무사 계급('센코쿠 다이묘')이 되었다. 이렇듯이 신분 체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관리들을 칭하는 용어가 사무라이가 되었고, 전쟁을 업으로 삼는 무관들은 모노노후로 불렸다. 사무라이는 문관과 무관의 총칭이 된 것이 전국 시대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전쟁을 업으로 삼는 부시, 모노노후는 의미가 없어지고, 평민을 다스리는 지배계급 사무라이만 남게된다.

이들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는 추신구라(忠臣藏)하가쿠레(葉隱) 이야기가 대내외적으로 특히 유명하다. 일본도화려하게 장식된 일본식 갑주 및 뿔 장식이 달린 투구는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할복 항목도 참조. 사무라이들은 일본인들에게 인식이 매우 좋은데 닌자와 함께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존재이기도 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한 인지도가 있다. 덕분에 와패니즈 관련 매체들이 많이 써먹으며, 사무라이를 다룬 각종 매체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 흔히 서양의 관점에서 중국쿵푸가 있다면, 일본에는 이 닌자사무라이가 있다고 한다. 다만 동양 전통 의상 입고 칼 들면 다 사무라이인 줄 아는 사람이 자주 보인다. 일본에서도 전국시대를 그린 역사물이 늘어나고 관심이 증가하면서, 점차 모노노후와 사무라이를 분리해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아졌다. 전국 시대의 모노노후는 칼을 도구로 여기는 실용주의적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는 칼을 명예로 여기고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형식주의적인 모습이다.

2. 역사[편집]

2.1. 초기[편집]

사무라이의 기원은 덴노를 중심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였던 아스카 시대가 끝나가고 점차 세력을 키운 귀족들의 지방 분권 체제가 확립되었던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명문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덴노를 제치고 중앙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이전까지 덴노의 왕권에 의해 통치되었던 일본의 질서는 무너져갔다. 이에 따라 10세기 초부터 일본의 율령제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 집권 질서가 무너지자 중앙 기관은 더 이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쇠약해진 중앙 기관은 지방 세력의 세력가들인 '고쿠시'들에게 중앙 기관을 대신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내려주었다. 이들 고쿠시들 역시 자신들의 영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통치하게 위해서 유력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사업을 맡겼는데, 이들을 '다토'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토들이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경작지를 만들고는 스스로 영주라고 자처하면서 다토와 고쿠시 간에 권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고쿠시에 비해 비교적 세력이 미약했던 다토들은 중앙권력자에게 자신의 땅을 바쳐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번져갔다. 다토들은 싸움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무력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무력집단의 일부가 중앙귀족의 눈에 들어 귀족의 사병으로 종사하는 시종(侍從)이 되는데, 이 시종에서 나온 것이 사무라이(侍)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헤이안 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는 귀족의 경호원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무사들까지 통틀어 이르는 말로 변질되었다.

2.2. 전성기[편집]

이후 12세기에 겐페이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무사 계급은 더욱 발달하였고, 일본 다이묘들의 으뜸격인 쇼군막부를 세우고 덴노를 대신하여 일본을 통치하는 시기가 찾아오면서 사무라이들의 격이 좀 더 높아졌다.

오늘날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무라이 문화가 형성된 시기는 흔히 말하는 전국시대, 곧 센고쿠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그나마 중앙의 질서를 유지하던 막부의 힘마저 유명무실해져서 일본 각지의 다이묘(영주)들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사무라이들은 다이묘들의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사무라이들은 다이묘로부터 보호받고 영지를 하사받는 대신에 다이묘들을 주군으로 섬기며 그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병력을 고용해서 전장에 나가 싸웠다.

바로 이 시기에 일명 '무사도'가 생겨났으며, 사무라이들 역시 단순한 무사에서 영지를 받고 싸우는 준귀족 계층으로 신분이 상승함에 따라 사무라이 특유의 문화도 더욱 발달하였다.

이때의 사무라이는 엄밀하게 말하면 전쟁에 나갈 때 말타고 나갈 자격이 있는 중급 기마(기바)무사이고 그 밑에 하급 도보(카치)무사가 있었다. 사무라이의 다음 계급은 '아시가루'가 있다. 출판물에 따라 최하급 사무라이로 번역하기도 하며, 농민과는 엄연히 신분이 다른 무사의 일종이다. 우리가 임진왜란 하면 생각하는 삿갓맨들이 바로 아시가루.

아시가루처럼 걸어다니기는 하지만 무장도 좀 좋아보이고, 삿갓 대신 투구다운 것을 쓰고 있으면 카치 사무라이, 말타고 있으면 기마무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바, 카치, 아시가루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 것이 상급 무사라고 할 수 있는 하타모토이다. 고쿠다카(석고)가 200석[3] 인 하타모토에서 9000석[4] 인 하타모토까지 다양하다. 고쿠다타가 1만석이 넘으면 다이묘라고 칭한다. 도식화 해보면 아시가루<카치<기바<하타모토<다이묘 순이 된다.

2.3. 말기[편집]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 시기에 들어서도 사무라이들은 명맥을 이어나갔다. 다만 사무라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센고쿠 시대의 지방 분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무라이들의 문화도 중앙 집권 체제에 맞도록 변질되어 갔다. 또한 한편으로는 일본 내에서 전쟁이 거의 사라지고 일본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서민 계층의 죠닌 문화가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 그 위세가 크게 줄었다.

사무라이들의 역사는 메이지 유신 시기에 종결되었다. 사무라이들의 계급을 유지시켜주었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토지 개혁 정책에 따라 사무라이들에게 지급되던 영지가 사라지자 당연히 큰 반발이 일었다.

사무라이나 그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신식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번번이 실패하였다. 결국 1870년대에 들어 사무라이라는 존재 자체는 거의 소멸했고 현재는 과거의 명문가 정도로 남아 있다. 이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바로 라스트 사무라이.

그러나 사무라이들이라고 해서 영화에 나온 것마냥 신식 군대에게 갑주입고 칼을 휘두르며 싸운 것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사무라이는 칼에 특화된 게 아니라 단지 군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사계급이었고, [5] 그들 역시 신식 군대처럼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몇 년 사용법 교육받는 평민과는 다르게 10년 이상 사격술을 갈고 닦고, 그 시대 총기사용에 가장 중요한 대열과 사기에서도 굉장히 뛰어났다[6]. 정부에서 무기 입수를 방해하지 않는 한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서 유럽1선급 무기를 들여오는 일도 많았다. 즉, 이들은 단지 구체제인 막부체제와 이념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전쟁을 한 것이였다. 무진전쟁, 서남전쟁 항목 참조.

3. 문화[편집]

서양의 기사 문화의 발전사처럼, 최초의 사무라이들은 대개 싸움을 잘하는 무사들을 모아 귀족들을 경호하는 수준에 그치는 단순한 무사 집단 정도였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로 접어들어 다이묘 정권이 들어서고 400년 넘게 거의 서양의 기사와 가까운 계급으로 뛰어오르게 되면서 당연히 그 격과 수준도 높아졌다. 때문에 그 오랜 기간 동안 이들이 이끌어온 일본의 문화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단, 사무라이들의 교양의 수평은 지방별로 큰 격차가 있었으며 어떤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언어를 필두로 하는 외국어 서적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 정도의 교양이 있었던 반면, 어떤 사무라이들은 한자로 제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과거제도를 위시한 유교가 조선만큼 보편화되지 못한 대신에 경제력과 군사력의 치중에 중요시 한 점도 있었다. 애초에 일괄적으로 사무라이라고해도 1만 석 이상의 다이묘와 다이묘의 시종이나 다름없는 하급 사무라이들 간에는 큰 격차가 존재했고 다이묘들끼리도 가문의 위세나 성향에 따라서 큰 격차가 있었으니 일괄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일부 다이묘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뽐내기 위하여, 혹은 권력다툼에 패하여 할 일이 없어서, 혹은 그냥 취미생활로 교양을 쌓았으며 이 과정에서 선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차문화와 독특한 화풍 등을 활발하게 발달시키기도 하는 등 제법 높은 교양과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명 하이쿠라 불리우는 문학도 이 시대에 꽃을 피우게 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와 유교의 이론에 깊이 감화된 사무라이들이 일부 늘어나면서 그 전성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말 극도로 꺼리는 왠지 사무라이답지 않은 사무라이들도 늘어났다(...). 사무라이들이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례도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난세인지라, 사무라이들이 환상을 품던 승려들은 직접 나기나타들고 난폭하게 설쳐대거나, 무뢰배들을 모아 승병을 만들었다. 물론 그런 쪽하고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는 종파도 있었다.

각종 픽션에서는 주군에 대한 충과 의를 다하는 것처럼 묘사되며 실제로 그런 충의로운 사무라이들도 많았지만 많은 경우 주군이 함부로 행동하거나 가진 영토에 비해 군주로써 다스릴 능력이 미약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독립하는 등 배신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는 동양에서 드물게 서양과 같이 개인주의문화가 발달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조건에 안맞으면 독립해 나가는 문화가 생김으로써 사회발전과 선진문물의 흡수가 당연히 조선과 중국보다 빨랐고 부국강병과 선진화 또한 동양에서 제일 빨랐다. 충과 의를 중시하는 무사도는 후에 에도시대에 중앙집권적인 에도막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강조된 것이고 전국시대에는 적이 방심하면 등 뒤에서 찌른다거나 배신을 하거나 동맹을 깨거나 하는 일도 몹시 흔한 편이었다,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무사도에는 유교 사상[7]의 영향이 크다. 유럽에서 기사의 시대가 지나고나서 기사도 로망이 유행하며 기사도가 발생한 것처럼[8] 무사도 또한 무사의 시대가 지난 에도 시대에나 발생한 개념이다. 현대에 알려진 멋진 무사도는 사실 옛날을 동경하던 에도 시대 공무원 사무라이들이 유학사상과 버무려낸 통치계급적 내용에서 직접 유래했고, 메이지 시대의 니토베 이나조가 무사도라는 그의 저서에서 작성한 내용도 있다. 문제는 이걸 일본제국일본군이 절대의 국시이자 이데올로기로 삼아버렸다는 것. 결국 일제시대의 맹목적이고 부정적인 무사도 숭배로 악용된 적도 있었다.

실제 센고쿠 시대의 무사들은 현대의 인상과 달리 엄밀히 말해 철따라 조건 따라 직장을 옮기는 샐러리맨에 가까웠다. 보통 이들은 전공을 세우면 적극적으로 그리고 마구 부풀리기까지 해서 주군에게 보고했고, 주군은 칸죠라고 불리는 "감사장"으로 보답했다. 이 감사장에는 해당 무사의 무공이 적혀 있어, 이를 타 가문에 임관할 때 이력서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인 토리이 모토타다는 "나는 도쿠가와 가의 귀신이 될 것인데, 타 가문에 임관할 때 쓰이는 감사장이 무슨 소용인가?"하고 감사장을 대놓고 거부했다고 한다.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후세의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해진 이유는 녹봉과 대우 등에 따라 주군을 옮기는 것이 보통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주가에 대해 전설로 남을 만한 의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당 가문을 대대로 섬기는 오랜 가신들은 원로 대접을 받으며 후다이라고 불렸고 중용되었다.

하지만 흔한 경우가 아닌지라 보통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다이묘 자신의 친족이었지만 센고쿠 시대쯤 되면 비해 친족들 사이에도 밥먹듯이 배반행위가 저질러졌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 또한 배신의 역사가 없지 않았다. 당나라의 현무문의 변, 고려의 위화도 회군,조선의 왕자의 난이나,명나라의 정난의 변 등의 사건등은 비교적 중앙집권화된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일어난 일들이라 그렇지만 일본은 지방분권이라 그러한 사건이 중국과 한국에 비해서 많았다.

게다가 이들은 후세인의 인상처럼 칼에만 목숨을 거는 단순 한칼잡이들도 아니었다. 일본에선 유럽과 달리 장거리 공격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고[9] 헤이안 시대만 해도 사무라이 간의 단기접전이란 서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의미했고, 검을 쓰는 것은 활쏘기로 승부가 나지 않았을 경우에 한정되었다. 총포가 도입된 이후에는 전투의 첫 포를 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는 환경적인 요인도 있는데, 일본에는 양질의 철광이 드물어서 사철을 주로 사용했는지라 제련이 까다로워 전금속제 갑옷은 마련하기 힘들었고, 유럽에 비해 훨씬 습하고 더운 날씨에서 중무장은 오히려 전투력을 저해시켰을 것이다.[10] 덕분에 투사 무기가 유럽에 비해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교육에도 많은 힘을 썼던 모양인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549년에 로마에 보내었던 보고서엔 대학 비슷한 교육시설도 있었던 모양이며 사무라이의 자제는 8살부터 19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져 온다. 치열한 센고쿠 시대에도 이랬으니 에도쯤 되면 더욱 사무라이에게는 단순한 전투력이 아니라 정치력, 지력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본디 전투원인 사무라이들은 평화가 찾아오자 그 성격이 변하기 시작하는데, 에도 막부 때의 사무라이라는 이들은 전투에 나가는 이들이 아니라, 다이묘 밑에서 그 지역을 다스리는 관리직이 주된 임무였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이 일평생 칼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아예 칼을 휘두르는 법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것은 시대가 지날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성 하나에 제대로 실전 경험이 있는 이는 외부에서 고용해온 검술 조교 딱 한 명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전 분위기만이라도 맛보겠답시는 중2병스러운 발상으로 츠지기리도장 깨기 등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사무라이들도 나왔을 정도면 에도시대의 일반 무사들이 얼마나 전투로부터 멀어져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거친 무사들의 풍습이었던 할복도 진짜 배를 가르는 것에서 아프니까 에도 막부에서는 귀찮았는지 그냥 참수형에 처해 버린 다음 보고만 할복으로 처리해버리는 사례도 많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사민평등을 실현한다는 기치하에(사실은 구 무사계급의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칼을 빼앗는 "폐도령"이 내려졌고,페도령이 아니다 칼과 신분을 잃은 구 무사계급은 대부분 "화족"으로 편입되었다.

본래는 관리, 군인등의 공무원처럼 계급에 맞는 본업을 제외한 부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에도 시대 하위권 사무라이들은 가난하여 먹고 살기 어려워서 암암리에, 혹은 대놓고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상층부도 뻔히 다 알고 있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 묵인했다. 조선과 달랐던 것은 직업에 귀천의식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크게 부흥된게 상업과 대를 잇는 장인문화였다, 그로인해 기술이 섬세해져 프로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기업문화로까지 발전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필사, 도장이나 서당의 선생부터 우산,도자기,일본도,목공예품 등을 만드는 수공업, 라면과 같은 식당 문화, 땅을 가졌다면 농사를 지었다. 간단한 예로 일제시대 일본의 우산은 조선인들이 만든 것이 따라갈 수가 없어, 조선인들 사이에서 사치품 중 하나로 통했으며, 일본도 등은 조선의 환도 등과 비교해서 그 기술의 섬세함과 강함이 다르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기술이다.

4. 부레이우치[편집]

해당 항목 참조. 일본의 에도시대에 사무라이계급에게 허용되었던 특권의 하나.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きりすてごめん)이라고도 한다.

5. 그 외에[편집]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위의 기록처럼 보통 검에 죽고 검에 산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초창기에는 오히려 "활 없이 말을 타지 않는다"고 얘기할 정도로 활을 중시했다. 거기다가 소위 말하는 일기토도 본래는 서로 말 타고 달리면서 활 쏘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사무라이를 궁수(유미토리)라고도 표현하며, 사무라이의 무력을 궁술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활들은 조선에서 쓰던 활과는 달리 길이가 1.8m나 되는 장궁이었다. 그리고 활로 승부가 나지 않으면 일본도를 쓰기도 했지만 주 무기는 4.5m 정도 되는 창이었다.

주인이 없으면 로닌(낭인)이 된다. 이들은 보통 주가가 망하거나 처벌을 받거나 해서 규모가 쪼그라들어 더 이상 부양할 수 없자 내쳐진 일종의 실직자인데, 출세를 위해서 전쟁에 목이 말라 있는 호전광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암적 존재이기도 했고, 가끔 충성스러운 로닌들은 떠돌아 다니며 주가의 복수를 하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는 단순한 전사 집단이었지만, 무로마치와 전국을 거치면서 에도 막부 시기에는 일종의 사대부가 되었다. 도쿠가와 치세에 사무라이들은 유학과 병법 외에 난학이라 하여 서양문물도 수학하였을 정도다. 실제로 대다수가 관료와 학자 등으로 활약하였다. 각각 오오카 타다스케나 오규 소라이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사무라이의 문사적 측면은 자주 조명되지는 않는 편이다.

국내에서 선비란 용어가 유행함에 비견되어 일본에서는 씹선비 비슷한 의미로 꼰대 기질을 보이는 일본인을 조롱할 때 쓰이기도 한다. 씹무라이

기록상으론 서양 사람이 진짜 다이묘에게서 이름과 검을 하사받고 사무라이가 된 경우도 있다. 16세기의 영국인 선원 윌리엄 아담스와 그의 동료 독일인 로뎀슈타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정식으로 이름과 영지를 받고 사무라이가 된다. 도쿄역 야에스 출구 일대(!)가 그곳으로, 이것은 로뎀슈타인의 일본식 이름 야요우스를 잘못 읽은 것이다. 만약에 그 봉토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땅값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 사람의 일대기에 영향을 받은 소설이 쇼군. 사실 이전에도 오다 노부나가가 모잠비크 출신의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 야스케란 이름을 주고 부하로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싸울아비'가 이 어원이라거나 여기서 발전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싸울아비란 말은 근대에 들어 생긴 조어다. 즉, 사실이 아니다. 싸울아비 항목 참조. 이 오해를 널리 퍼트린 요인 중 하나가 사무라이 스피리츠 2 하오마루 지옥변의 국내판인 진 싸울아비 투혼이라고 하기도 한다.[11]

일본과 관련된 표현이 많다. 일본 자본 시장에서 외국 기관이 발행하는 채권을 사무라이 본드라고 부른다. 사무라이 자본, 사무라이 블루를 비롯한 여러 표현만 봐도 답이 나온다. 전자는 말 그대로 일본계 자본, 후자는 일본 축구 대표팀을 뜻한다.

6. 실존인물[편집]

밑에 기재된 인물들 말고도 일본에서 다이묘나 무사라고 알려진 인물 대부분이 사무라이다.

7. 관련 항목[편집]

8. 대중문화에서[편집]


[1] 이는 현대에 비해 열악 했던 당시의 영양 상태가 원인이다. 그리고 일본인신장(신체)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현대 이전 일본인의 키는 지금보다도 더 작았다.[2] 당장 전국시대 일본 영주들 대다수 중에 확실한 평민 출신은 지극히 적다. 제대로 파악하고 적도록 하자. 히데요시가 괜히 특이케이스 자수성가자로 불리는게 아니다. 최소한 토호급은 되던 기반있는 사람들이 슈고 다이묘 영주들을 무너뜨리고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것이다. 평민이 다이묘가 될 수 있는 경우는 정말 지극히 적었다.[3] 하타모토의 하한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하로 꼴랑 카치 1명, 창병 아시가루 1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짐꾼으로 3명을 대동한다.[4] 이 정도면 부하로 기마 무사만 11명에 카치 14명, 아시가루 64명을 거느리는 집단의 대장이다. 깃발잡이와 종자, 짐꾼등을 합쳐 총 189명을 거느린다. 다시말해 사무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무라이가 아니다.[5] 전국시대 유파를 보면 칼 말고도 활, 창, 나기나타, 봉 같은 다양한 무기술을 배운다. 전쟁에 나가야 되니까 동, 서양을 막론하고 당연한 이야기. 그러다가 막부 평화기에 전쟁 할 일이 없어지고 칼만 차고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칼에 특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다만 나기나타나, 활, 총은 실전에서도 사용하기는 좋았으으므로 여전히 이를 수련하는 유파가 많이 있었고, 이들이 개화기 시대에 이르러서 무진전쟁이나 서남전쟁 같은 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6] 하지만 개화기 때에는 고위급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도검제일주의가 성행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아시가루 같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이 뒷날 태평양 전쟁 때의 병맛나는 무사도 드립으로 이어졌다.[7] 당대 일본에서 가장 유행한 유학은 임진왜란 후에 전해진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설이다. 이들의 성리학은 도쿠가와 막부가 가장 원했던 것으로써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8] 서양에서 흔히 중세 시대하면 떠올리는 중세 전성기(11세기 이후)는 기사계급의 준귀족화가 진행되며 기사도가 생겨나고 있었고 기사의 시대가 끝나기까지는 그 후로 몇백 년이 더 흘러야 했기 때문에 기사시대가 끝나고 기사도가 생겼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기사계급이 처음부터 기사도와 함께 생겨난 계급이 아니라고 하면 맞겠지만.[9]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초기까지 장거리공격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국가가 꽤 있었다.[10] 반면 서양에서는 귀족과 부자들은 비싼 철갑주를 마련했고 경무장하고 투사무기를 쓰는 병사는 보통 평민출신이 많았다.[11] 사실 싸울아비를 동양무사풍의 직업으로 묘사하는 것 자체는 의외로 자주 있어왔다. 물론 그런 작품들이 모두 싸울아비=사무라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닐 것이다.[12] 주인 없는 사무라이인 로닌 컨셉이다.[13] 인간이 아닌 로봇이라는 점만 빼면 사무라이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