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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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비구니 캐릭터4. 백석의 시 '여승'

1. 개요[편집]

불교승려, 즉 스님의 일종. 여자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남자 승려는 "비구"라고 한다.

"걸식하는 여성"이라는 뜻의 말 "비크슈니(bhiksuni)", "비쿠니(bhikkhuni)"의 음역으로, "니(尼)"로 번역된다.

슈도다나 왕이 죽은 후, 석가모니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자신도 출가하게 해달라고 3번 호소했으나 거절당하자, 석가족 여인들 수백 명과 함께 화장과 장식을 치우고 삭발하여 노란 가사를 입고 맨발로 걸어와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호소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난다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석가모니에게 여성 출가를 허가해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아난다가 "이 길을 따르면 여성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석가모니는 "여성도 깨달을 수 있지만 세속의 애착[1]이 깊고 정법이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라고 대답하면서 8가지 법[2]을 지킨다면 출가를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마하파자파티 역시 8가지 법을 평생 범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이후, 야쇼다라 부인을 비롯한 석가족의 부인들도 이를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비구가 계급을 따지지 않고 출가를 받아들였듯이, 석가족 말고도 다양한 계급 여성들이 비구니가 되었다.

당시 불교 승단 내부에서 비구니를 받아들임은 반발이 굉장히 컸다. 경전의 기록에 따르면 마하가섭이 어떤 비구니에게 심하게 모욕받자 "악녀야! 나는 네가 아니라 아난다를 책망한다."라고 답했다. 석가모니 열반 후 아라한이 된 승려들이 모여 결집할 적에 아난다가 참석하자 마하가섭은 아난다의 잘못 10가지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는데, 그중에는 석가모니가 비구니를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는 것도 있었다. 마하가섭의 이런 반응을 보아, 당시 비구 승단의 상당수는 비구니 승단이 생김을 굉장히 꺼렸음을 알 수 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비구니계가 중도에 단절된 탓에 비구니가 없어져 버렸다. 비구니계를 주기 위해서는 스승이 되는 다른 비구니가 필요한데, 전승하던 도중에 전멸(…)하는 바람에… 태국이나 미얀마 불교에는 정식 비구니는 아니지만 그 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 불교 수행자는 있다. 다만 미얀마의 경우 비구승과 여성 수행자간차별이 심하다.

현대에 들어 상좌부 불교에서 비구니 승단을 복구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996년 12월에 한국이나 대만 등 북방불교 쪽 비구니들이 불교 성지 중 한 곳인 인도 공화국사르나트(녹야원) 사원에서 상좌부 불교권 여자들에게 계를 전했다. 하지만 이때 수계한 비구니 대부분은 본국에 있던 비구 승단이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사람들이 배척하여 어려움에 처했고, 오직 스리랑카에서만 이렇게 받은 계를 인정하여 비구니 승단이 정착했다.

정말로 상좌부 율장에 따라 비구니 승단을 복구하려면 반드시 남자 승단, 즉 비구 승단에게 인정받아야만 한다. 상좌부 율장에서 비구니 계맥에 대해 먼저 수계 여성이 선배 비구니로부터 비구니계를 받고, 비구 승단에 가서 다시 한 번 비구니계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즉 비구들이 비구니계를 전해주지 않는다면 설령 대승 비구니 계맥을 받음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반쪽짜리 전수가 된다. 하지만 주요 상좌부 불교권 국가 승단 중, 대승 비구니 계맥을 받음을 인정하여 승단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스리랑카뿐이었다. 스리랑카에서도 원로 비구들 중에서 인정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수용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비구니 승단이 복구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성 비구처럼 대다수가 머리를 삭발한다. 다만 일본의 경우 모든 경우에 삭발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귀족 출신 여성들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는 경우에는 머리를 어깨선쯤까지 자르는 정도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 경우는 정말로 수행을 쌓기 위한 전업(?) 비구니가 아니라, 남편이나 아들 등이 죽은 뒤의 관례적인 출가가 많았다. 삭발까지는 아니어도 일단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게 관행인 듯 하다. 그리고 수녀 비슷하게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하얀 천을 머리에 두르는 경우가 많이 보여서, 사극 같은데 보면 출현이 잦다.[3] 물론 일본에서도 종파에 따라[4] 삭발한 비구니 역시 존재하며, 유명한 예시로는 세토우치 자쿠초가 있다. 다른 직업을 겸할 경우[5] 평소에는 가발을 쓰고 다니다 절에서 법회 할때만 맨머리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천태종 비구니는 머리를 자르기만 해도 된다. 허리까지 기르는 것은 안되고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모자를 이용해 가린다. 사실 경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음양을 구분하기 위한 유교의 영향 때문에 그렇다. 천태종의 비구니가 머리를 자르는 정도에 그쳐도 되게 한 원인은 상월 스님[6].

한국에서 1984년 김지미 주연으로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으나 영화 촬영 중 실제 비구니들이 영화제작 반대시위를 하면서[7] 결국 영화 자체가 엎어지고 말았다. 아울러서 당시 촬영분도 어른의 사정으로 필름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한동안 잊혀졌던 이영화는 남아있던 필름을 복원한뒤 33년뒤에 CGV전주고사에서 공개되었다. 이제는 세월이 흐르고 불교계에서도 단지 기생이 비구니가 된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반대할 명분이 아니다, 상처받은 이들을 살피던게 종교 모습 아닌가? 라고 반발도 누그러들었다.

비구니들 중에는 사찰 음식에 능통한 이들도 많다. (당연히 모두 채식이다.) 사람들에게 사찰 음식을 가르치거나, 책을 내거나, 방송에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사찰 음식을 홍보한다. 사찰 음식으로 유명한 비구니로는 대안 스님, 선재 스님 등이 있다.

2. 역사[편집]

제1기는 초기단계로 기원전 6세기후반부터 시작된다. 불교 교단이 확립되고 아쇼카왕이 후원하면서 널리 전파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초기에 여성 교단을 허락하였다. 당시 사정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비구니 교단은 번성하고 있었고 여러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출가하였다. 상좌부 불교에 전하는 게송집인 테리가타(Therigata)에 의하면 많은 뛰어난 비구니들이 자신들의 영적 자유를 찬탄하고 있다.

제2기는 아소카왕부터 기원후 250년경까지의 시기로 남쪽의 사타바하나 왕조와 북쪽의 쿠샨 왕조가 있었다. 이시기는 인도전역에 불교 교단이 있던 시기로 비구니 승단도 많았다. 당시 세워진 비문들이 비구니 승단의 번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3기는 3세기 이후로, 인도에서 비구니 승단은 점차 축소되어 갔다. 이시기는 불교 교단이 전체적으로 점차 쇠퇴하던 시기이다. 이당시 비구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몇 개의 비문만이 존재한다. 의정(義淨)의 기록에 의하면 비구니들은 사찰 밖에 다닐 때 두명씩 짝을 지어 다니고, 재가 신도 집을 방문할 때는 4명씩 다니는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의 비구니와 다르게 걸식하고 탁발하면서 몹시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고 사찰에서 그들을 위한 특별한 식량 공급도 없었다. 당시 남자승단에 비해 시주가 적어 경제적인 여러움에 봉착한 것이다.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은 비구니 승단의 유지를 어렵게 하였고 출가 수행자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것이다. 더구나 불교가 번성한 여러지역에서 힌두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대중적인 기반이 쇠퇴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낸시 아우어 포크, 왜 인도에서 비구니가 사라졌는가

3. 비구니 캐릭터[편집]

4. 백석의 시 '여승'[편집]

여승(女僧)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리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승의 남편은 집을 나갔고, 하나 밖에 없던 어린 나이의 딸은 일찍이 죽어 별다른 것 없는 돌무덤에 묻혀 완전히 무너진 가정에서 여자는 머리를 깎고 출가를 선택해 세상에 단절된 곳으로 귀의한 여승의 서러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리고 수능특강에 나오면 수험생들이 어려워서 눈물을 흘린다 가끔 시를 네등분 한 후 시간순서대로 배열하라는 문제가 나올때가 있다. 시간의 순서는 2-3-4-1연 순이다.

작품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일반적으로 일제에 의한 수탈과 그로 인한 가족 공동체의 해체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린 리얼리즘 작품으로 해석된다.

[1] 모성애, 자식에 대한 집착 등 세속의 애착.[2] 이 법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비구니는 비구에게 순종하고, 비구보다 더 오랫동안 검증을 거쳐서 정식 승려가 되고, 죄를 저지르면 더 오랫동안 참회해야 하며, 비구니는 비구의 죄를 들어 말해서는 아니 되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죄를 들어 말할 수 있다'는 것.[3] 그런데 모 일본 영화에서는 이런 천을 두른 비구니가 등장해서 으레 머리가 있겠거니 예상했는데, 천을 벗었더니 삭발머리여서 나름 비주얼적으로 충격을 주었다.[4] 일본에서 반드시 삭발을 요구하는 종파로는 선종과 천태종이 있다.[5] 일본에서는 승려가 다른 직업을 겸직하는 경우도 흔하다.[6] 공식 호칭은 상월원각대조사. 현대에 들어서 천태종단을 재건한 스님. 다만 현 천태종단이 고려 시대로부터의 맥을 그대로 이은 것은 아니고 직접적인 맥은 일본에 가 있다. 그리고 현행 천태종단은 유교적 질서의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는 편이다. 불교에 관심 많은 외국인이 교환학생으로 와서 저거 유교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다.[7] 기생이 비구니가 된다는 스토리에 불교계가 들고 일어났다.[8] 둘 다 장발이다[9] 삼장을 잊기 위해 머리를 밀어버리고 불교에 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