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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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표적 반달리즘(시대순)

분서갱유
(기원전 212년 ~ 213년)

문자의 옥
(1660년 ~ 1799년)

문화대혁명
(1966년 ~ 1976년)


1. 개요2. 발생3. 원인4. 분서갱유는 과장인가?5. 결과6. 관련 항목7. 현대의 인터넷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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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焚書坑儒

본래는 기원전 212년과 213년에 일어난 별개의 두 사건을 묶어놓은 것으로,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묻음'이라는 뜻이다. 진시황이 저지른 사상 탄압으로 알려져 있는 사건으로, 진시황은 이전까지는 중국 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킨 유능한 왕이었다가 이 사건 하나로 인해 폭군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약 2,200년 후 근현대사에서 "진시황조차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할 정도의 규모인" 세계구급 스케일로 재현된다.[1] 어 그럼 문자의 옥은? 이건 스케일 면에서 문화대혁명한테 완전히 묻혔잖아

2. 발생[편집]

진시황 시대 분서갱유, 즉 전국적인 사상 탄압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기원전 213년 함양 연회에서 일어났다. 이때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벌이다가 참가자 중 한 명인 주청신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실행을 찬양하자, 다른 참가자인 순우월이 옛 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때 당시 자리에 있던 이사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 '의약 · 점술 ·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들과 (시경), (서경), 진을 제외한 국가들의 역사서를 불태울 것[2]'을 주장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것이 분서 사건이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진시황의 불로초 탐색을 놓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갱유로 불리게 된다.

3. 원인[편집]

이 사건은 대개 봉건제적인 질서를 옹호하던 유가가 군현제를 철저히 시행하려 하던 법가 통치에 저항한 시도로 보인다. 봉건제는 책봉을 받아 특정 지역을 대대로 다스리는 대리인을 필요로 하여 지방의 자치적인 질서를 용인하는 반면, 군현제는 전국 통치를 황제가 임명하는 지방관을 통해 철저히 황제와 직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질서 체계를 옹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써 존중받으며 통치자에게 충고를 보태는 봉건제적 신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법가는 신료로 임명받는 인물은 철저히 법에 의거한 실무 수행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법을 거스르는 신료의 자율성과 세습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혈연 관계 혹은 혈연 관계로 의제되는 인물을 각 지방의 제후로 임명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종법제도적인 질서가 왕과 제후 사이의 혈연의 거리가 멀어진 서주 시대 후반부터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하극상이 벌어진 것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 구조가 바로 군현제로, 세습되지 않고 철저히 군주에 의해 임명되는 행정 관료인 태수와 현령을 제후 대신 배치하여 고인 물이 썩는 현상을 방지하고, 예를 통한 막연한 통제 대신 법을 통한 철저한 통제로 이들을 제어하자는 이론이었다.

진은 4세기 상앙의 변법 이래 법가의 군현제 질서에 완전히 익숙해진 국가였으나, 10여 년 만에 급속한 통일을 이루면서 영토가 몇 배나 커졌고 당연히 각지의 기득권 세력이 표면 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언제 들고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전국을 36군으로 편성하여 군현제의 틀을 씌워는 놓았으나, 이전까지의 중국은 애초에 각지의 문화 자체가 철저히 달랐고 정치적인 의견도 완전히 달랐다.

이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 진시황은 문자 통일, 도량형의 통일, 도로 규격의 통일(당시 군사력의 중심이던 전차의 빠른 동원을 가능하게 하여, 군사와 행정에 큰 도움이 된다) 등을 추진하였다. 흔히 '통일 중국'의 첫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이러한 업적들과 같은 맥락에서 분서갱유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통일 중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과 '사상을 탄압한 폭군 진시황'은 전혀 둘로 나누어볼 인물이 아니다.

역사 저술을 불태운 것 또한 진의 정통성을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본래 역사서는 함부로 쓸 수 없는 책으로 철저히 관의 주도에 의해 쓰이는 책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으로 각국이 저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역사서가 존재하는 상황은 '세계 유일의 황제'를 추구하던 진의 입장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결과 분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선진시대의 역사서가 몇 안 남은 것(춘추, 국어, 죽서기년 정도)은 후세의 사가들에겐 탄식 거리지만.

4. 분서갱유는 과장인가?[편집]

춘추전국시대의 결정판이라 할수있는 제자백가의 서책들과 대부분의 역사책이 불타버려서 현재 전해지는것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며 분서갱유로 이름만이 남아있을뿐 아예 소실된 책들이 수두룩하다, 당시 사람들은 벽을 파고 책을 숨기는등 법을 피해 책을 지키려 필사적이였다. 참고로 이 무렵에 사용된 책은 당연하겠지만 간독이였다.[3] 분서갱유는 유가에 한한것이 아니라 역사나 문화 전방위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일각에선 분서갱유 과장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분서갱유 항목 그러나 출처가 불명확하여 지지하는 학자가 많은지는 알 수 없다. 위키백과 영문판의 Reasons for skepticism 단락 각주에 따르면 Martin Kern, Michael Nylan 등의 학자가 주장한 관점이다.

5. 결과[편집]

분서의 풍파 때문에 현전하는 중국의 고서 중에 기원전 3세기 이전의 것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진의 멸망과 전한의 건국을 거치면서 각지에서 고대의 경전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기억과 기록의 대립이었다.

기본적으로 간독은 필사본이고, 대부분은 외운 유학자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경전들이 복원되었다. 이 시대에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책 몇 권씩 외우던 것은 학자들이라면 다 달고 있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문서 참고. 심지어 고대 바드들은 문자 없이 자기 머리 속에 책 몇 권에 해당하는 지식을 우겨넣고 지식계층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결국 한나라 초기에는 4경이 모조리 복원되는데[4][5][6], 문제는 이게 안 맞는다는 데 있었다. 외운 사람들끼리도 다르고 숨겼던 책이 발견되면 또 달랐다. 실제로 인쇄술 발명 이전의 필사본의 시절에는 판본 자체가 다른 경우도 흔했다. 결국 이걸 정리해서 논리화 하는 학문이 필요했는데 이게 바로 한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훈고학이다.

이 훈고학으로 성립된, 사서삼경을 금문경이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으로 시경의 삼가시(노시, 제시, 한시)와 금문상서가 있었다. 이후, 시경과 효경, 예기, 춘추 등은 노공왕(? ~ BC 129)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과두문자로 쓰인 공자 대 원문이 발견되면서 원전을 보존하고 있다. 다만 고문경은 전한 시대에는 위서가 아니냐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금문경이 대세를 차지하고 동중서 등의 유가 정책도 이를 기반으로 시행되었으나, 전한 말 유흠이 고문을 정리하면서 권위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후에는 고문경의 권위가 더 높아졌다.

시경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6편이 실전되었고, 모형과 모장이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을 《모시》(毛詩)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 고문시경의 발견 이후에는 금문시경이 묻히는 바람에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한시만 본전이 아닌 외전이 10권 전한다. 반면, 상서은 오히려 금문경이 어찌어찌 현대까지 전해졌으나, 오히려 다른 책들과 같이 노공왕이 찾은 고문경의 원전이 소실됐다. 이후에 동진의 매색이 고문경을 다시 찾아서(?) 바쳤고 상당기간 진본으로 인정됐으나 후세에 위작임이 밝혀져 '위고문상서'라 하며 원전의 가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6. 관련 항목[편집]

7. 현대의 인터넷 용어[편집]

라이트노벨이나 만화책등을 읽고 그 내용에 분노한 독자가 책을 불태워서 인증하는 것. 즉, 서적에 관련된 상품파괴인증을 에둘러 말하는 표현이다. '갱유'에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하고 싶다면 작가를 납치해서 묻어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이건 범죄니까 그냥 분서라 하기도 한다.

[1] 이쪽은 말 그대로 문화에 관련된 모든 게 파괴됐으니... 거기에다 이 때 숙청된 사람들도 분서갱유 사건보다 족히 몇 배는 됐을 것이다.[2] 본래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마다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현존하는 해당 시대의 역사서는 없다. 흔히들 헷갈리는 사항인데 공자의 춘추는 원래는 역사서가 아니다. 공자의 춘추는 역사에서 예에 걸맞은 것 혹은 예에 어그러진 것을 지적하여 군주와 제후를 바로잡기 위한 목적을 갖고 쓴 책으로, 다만 하도 그 시대 기록이 남은 게 없어서 역사 기록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3] 종이가 발명된 것은 채륜이 활약하던 후한 시대다.[4] 흔히 5경이 복원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실제로 역경이라고도 불려졌던 주역은 애초에 점치는 책으로 분류되어 분서갱유의 화를 피했다. 그래서 실제로 주나라때와 한나라때의 주역은 큰 차이가 없다.[5] 다만 백서본이라고 해서 한나라 초기에 전해지던 또 다른 계통의 판본과 비교해 보면 글자가 조금 다르거나 의미가 좀 달리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6]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육경중에 한 축을 담당했던 악경은 발견되지도, 암송되지도 않아서 영구히 소실되었다.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