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로딩중

부여

최근 수정 시각:

분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충청남도 소재의 부여군에 대한 내용은 부여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한국사 관련 정보

위서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

선비

부여

고구려

읍루

예맥

동옥저

마한

진한

변한


파일:3세기경 부여국의 세력권(강역) 추정도.jpg

존속 기간

기원전 2세기 ~ 494년

위치

쑹화강 일대 송눈평원

수도

북부여 예성(濊城) (북부여 초기 수도)[1]부여성(扶餘城)[2]
동부여 여성(餘城)[3]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王)

언어

부여어[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계제어 항목

종교

무속신앙

국성

해(解)

민족 구성

예맥[5]

성립 이전

성읍국가

멸망 이후

고구려

1. 개요2. 국호3. 역사
3.1. 전신3.2. 건국 신화3.3. 건국에서 멸망까지
4. 정치5. 사회
5.1. 언어
6. 경제7. 역대 국왕8. 종교와 문화9. 군사10. 부여에서 유래한 이름11. 기타12. 참고 자료
12.1. 연구 자료
13.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의 논란

1. 개요[편집]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 지방)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왕조.[6] 부여의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와 삼국시대 초반에 걸친다. 예맥족이 주축을 이룬 국가로, 한때 휘하에 읍루도 그 구성원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2. 국호[편집]

夫餘, 扶餘, 夫余, 扶余, Buyeo.

부여의 국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부여라는 이름은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부루'와 어원상 관련이 있다는 설과, 평야를 의미하는 한국어 '벌'의 고어형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그 밖에 왕족의 성씨해씨였으므로, 태양 숭배, 불 숭배와 관련하여 '불'이 어원일 거라는 설도 있으나 이 모두 명확한 사료가 없어 추측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현재 러시아에 편입된 몽골 계통 부족 부랴트(Буряяд)가 부여의 원음이라고도 주장한다. 참고로 부랴트는 부랴티아로 현존하는데, 러시아 바이칼 호 근처에 있다.

한자로 쓸 때 부여의 '부'를 夫로 쓰는 경우와 扶로 쓰는 경우, '여'를 余로 쓰는 경우와 餘로 쓰는 경우가 모두 있다.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는 대개 부여(夫餘)라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 비롯한 우리나라 사서에는 대부분 부여(扶餘)로 기술하고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夫餘와 扶餘를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애초에 餘는 余에서 파생된 글자이기에 전통적으로 餘의 약자로 余를 쓰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현행 표준 한자인 신자체중국간화자(간체자)는 餘를 폐지하고 余로 통합하였다. 단 余 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많기 때문에 중국 간화자의 경우 의미가 혼동될 우려가 있을 경우 '남다'라는 의미를 명시하고자 할 경우, 또는 본래 번체자(정체자) 표기에서 余가 아닌 餘였다는 걸 확실히 하고자 할 경우, 부수 飠(食)을 饣으로 치환한 馀로 쓰는 걸 허용한다. 그래서 중국어 간체에서 부여를 夫余나 扶余로 적는 게 일반적이지만 夫馀나 扶馀로 적기도 한다.

3. 역사[편집]

부여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 존재한다. 북부여, 동부여에 대해서는 정확한 실체 규명이 힘들고 수많은 학설이 난립하고 있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고구려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고구려가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나라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으로 보는 설이 있다. 또 남부여는 백제에서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 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 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대개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는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이들은 이후 국력이 점차 쇠퇴하고 고구려의 영향력에 들어가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쪽으로는 옥저, 숙신 - 읍루 - 물길과 접했으며 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되고 있다.

부여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 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는 그들의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부여의 지배층들은 전연, 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 5세기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 말갈,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부여는 5세기 말에 사라지지만 그 유산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남는다. 7세기에 속말 말갈의 수괴 돌지계가 수나라에게 부여후로 봉해진 것이나 발해 왕 대무예가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일본에 선언한 것이 그 흔적. 훗날 고려에서 자신들의 궁전 중 몇몇 건물을 부여궁이라 칭하고 금나라도 건국할 때 부여를 언급하기는 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해 있었던 듯하다.

3.1. 전신[편집]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 ~ 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7]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된다.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 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다.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등에도 부여가 언급되고 사기 화식열전을 보면 오씨과조에 진시황 때 오씨현 상인과 거래하던 상인 중에 부여 상인이 나온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국가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 시 일대에만 나타난다. [8]

3.2. 건국 신화[편집]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사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 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논형》 #


《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9]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훗날 상제(上帝)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북부여 #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동명제가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우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그 돌을 들추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는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아이가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서기 22년)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동부여 #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설화가 굉장히 흡사하다.

3.3. 건국에서 멸망까지[편집]

3세기 서적인 <위략>에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부여는 북만주 탁리국(다른 책에는 고리, 색리 등으로 기록)에서 탈출한 동명이 예맥의 땅에 망명하여 건국했다고 한다. 대체로 부여가 건국된 시기를 기원전 3세기로 본다. 위만조선이 건국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로 고조선과 동시대에 존재한 국가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원정으로 대소왕이 사망하면서 부여와 고구려 간에 관계에 약간의 흠이 생겼으나 어찌되었든 국력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부여가 우위에 있었다. 고구려 동천왕 시기에도 부여는 8만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만 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다. 고대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한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의 전부였기 때문이고,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 사회로써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 실제 부여는 선제 이래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을 자랑하던 강국이었다.[10]

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초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 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다. 게다가 부여는 최대 영토가 2천 리에 이르렀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동명성왕 ~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부여 세력을 부여 남부의 일개 대가 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잘 나가던 부여도 3세기 ~ 4세기에 선비족 모용부에게 대대적으로 털리기 시작하면서 쇠락기를 맞이했다.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공에 1만여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부여왕 의려가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한다.

모용외의 침공에 국가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 성 일대에서 농안지역으로 옮기나, 346년 결국 전연 모용황의 대공격에 부여왕 현을 포함, 무려 5만여 명이 끌려가면서 사실상 부여는 붕괴하게 된다.

이 때 끌려간 인구가 5만 명이 아니라 5만 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구당서신당서를 옮겨 적을 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던 것이 대표적인 예. 5만 호면 1호당 4명으로 잡았을 때 20만 명이다.

부여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410년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이것마저 맥이 끊겼다. 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 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부여 세력은 494년물길의 침입을 받고 완전히 멸망하여 494년 고구려 문자왕에 투항했다. 일부 세력은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한다.

4. 정치[편집]

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다.

정치는 귀족 정치로서 지배 계급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부여에서는 귀족이 개돼지 와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다.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지방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사가도(四街道)라고도 함)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 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은 지배 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전쟁 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식량 보급과 물자 운송을 담당했으며, 전쟁 시에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하였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고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과 비슷한 계층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하늘이시여 사실 이름이 "왕"이라서 오해를 살 뿐, 당대로서는 그냥 재해로 민심이 흉흉하면 책임 물기 위해 뽑는? 제사장 정도의 느낌. 제가들도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일조하였고, 왕 또한 제가들이 뽑았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으나, 다른 주변국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 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의 대표로서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이런 정치 제도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대소고구려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다시는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5. 사회[편집]

혼인을 할 때는 혼납금으로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는 경우에는 모두 죽였으며, 특히 부인이 질투하는 것을 나쁘게 여겨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했다. 만약 죽음을 당한 여인의 친정에서 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 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혼인 때의 혼납금을 반환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고구려와 같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인 형사취수가 있었다.

추수가 끝난 후 영고라 불리는 제천 행사를 벌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고구려동맹, 동예무천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영고는 유목 민족의 수렵제 성격이 남아 있어 동맹이나 무천과 달리 10월이 아닌 12월에 거행되었다. 덕분에 한국사 공부할 때 귀찮아지는 요소. 요즘 한국사 시험의 광기서린 난이도(...)를 생각하면 이것마저도 양반

노비 제도가 존재하였다. 순장은 대부분 노비로 채워졌다. 순장된 노비는 전쟁 포로 출신 뿐 아니라 형벌 노비와 부채 노비도 있었다. 때문에 변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노비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법에는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그리고 남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5.1. 언어[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계제어 항목

같은 예맥 계통인 고구려어와 비슷하였을 거라는게 대체적인 의견이지만 관련 자료가 워낙에 부족한 관계로 얼마나 유사성이 높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6. 경제[편집]

만주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농사를 주 산업으로 한 농경 국가였으나, 동시에 목축과 기마술에도 능한 반농 반목의 경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덕분에 당시 북방의 패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중국을 수출하기도 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 붉은 옥(적옥, 赤玉), 구슬 장식품(미주, 美珠), 담비나 돼지, 여우, 원숭이 등의 짐승 가죽이 있었다.

7. 역대 국왕[편집]

8. 종교와 문화[편집]

부여 사람들은 과격하고 크며,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몸가짐이나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할 줄 알고, 성품이 어질고 덕이 많아 도둑질하지 않는다. 여럿이 모일 때 공손히 서로 예의를 지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중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부여조의 영고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의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식 직전에 "맞이굿(迎神祭)"을 벌였다고 한다. 때문에 제천 의식에 기초한 샤머니즘 신앙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제천 의식을 행했는데, 이때 소를 죽여 그 굽을 살펴서 길흉을 점쳤다. 만약 굽이 갈라져 있다면 이를 흉조로 여겼고, 그렇지 않다면 길조로 여겼다.

또한 흰색을 숭상하여, 흰 옷을 즐겨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례 문화가 상당히 흠좀무했는데, 죽은 사람의 장례는 무조건 5월에 치뤘다. 만일 다른 달에 죽으면 5월까지 보존했고, 심지어 당시에는 귀한 얼음까지 팍팍 써 가면서 최대한 시체의 부패를 늦추었다. 다른 설로는 무조건 5월에 장례를 치른 게 아니라,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삼년상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이쪽이 더 현실적. 이런 장례 의식을 후장이라고 불렀다는 모양이다. (...)

파일:/image/076/2014/10/29/2014103001003746800236371_99_20141029183805.jpg
출처

2014년 10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이 공개한 일제가 수집한 유물 중 부여 금동 가면#이 발견되었다.

9. 군사[편집]

파일:attachment/부여/buyo.jpg
중국 지린 성 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부여의 철 찰갑과 철검. # 지금은 동북공정의 영향인지 사라졌다.
파일:attachment/부여/bus.png
부여 철검의 다른 사진.

북방 지역의 평원에서 기른 말과 기마술, 그리고 중기 이후 철기를 사용했다.

부여는 중국과 특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중국이 고구려선비족의 연계가 중국의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부여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주변 기마 민족들은 부여에 적대적이었기에 둘의 이해 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물론 몇 차례 중국과 부여의 충돌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매우 적었던 데다 충돌 시에도 부여의 군사력은 중국에 결코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평가하기를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에게 패해 본 일이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소위 한사군과는 2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111년에는 7천 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낙랑군을 공격하였고, 167년에는 부여 왕이 직접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위의 사례는 정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어서 왜 대립했는지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 직후에서 멀지 않은 120년과 174년에 부여에서 오히려 중국에 복속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단순한 약탈은 아니고 무언가 정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과 대립하는 관계 일변도는 아니었다. 후한서에서는 111년의 침공을 (부여의 침공으로서) '처음'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큰 대립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부여에 대해서는 굉장히 우호적으로 서술하여 식량이 모자라 주변을 털고 다닌다고 기술한 고구려와는 차이가 있으며,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부여에서 식량을 얻어가는 등 중국을 지원한 사례도 존재한다.

부여 왕이 사망할 때 부여에서는 후한 측에서 '옥갑(玉甲)'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일부 환빠들이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금루옥의(황금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한으로부터 조공받은 것이며, 부여는 따라서 황제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일단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부여가 중국에 속(屬)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부여가 현도군에서 옥갑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지 조공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당연히 황제국이 타국에 속할 리는 없는 노릇이므로 일단 관계 설정 자체가 거짓이다. 링크 참고

한편 금루옥의 관련해서는 규정이 있는 것은 <후한서> 예의지 하권이다. 여기서 인용한 <한구의>를 보면,

① 漢舊儀曰:「帝崩,唅以珠,纏以緹繒十二重。以玉為襦,如鎧狀,連縫之,以黃金為縷。 ② 諸侯王、列侯、始封貴人、公主薨,皆令贈印璽、玉柙銀縷;大貴人、長公主銅縷。(<후한서> 권 96 예의 하).


후한의 황제가 입는 수의로 규정된 것은 금루옥의가 맞지만(각주의 ①), 그 뒤에 등장하는 규정에 따르면 제후 왕 등은 은루옥의(은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대귀인과 장공주 등은 동루(옥의)(구리 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각주의 ②).

그러니까 실을 금으로 짜는 것이 황제의 규정일 뿐 실만 다르면 옥의는 제후 왕을 포함한 황제 이하의 여러 인물들이 입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물건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그렇다면 부여 왕은 형식상 제후 왕의 격식에 따라 수의로 은루옥의를 입었을 것이다).

따라서 환빠들이 부여가 황제국이라고 주장했던 옥갑 관련 사료는 오히려 부여가 후한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서 후한의 예법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고 후한에 제도상 복속해 있었음을 드러내는 사료이다. 물론 이런 것과 관계 없는 순수한 연구자라면 부여가 한 대의 국제 질서에 속하여 후한에 대해 제도적으로도 충분히 지위를 보장받았다고만 알고 넘어가면 된다.

10. 부여에서 유래한 이름[편집]

  • 부여와 백제의 왕성(王姓) 부여씨 - 백제에서는 부여 계승 의식에 의거하여 부여를 왕성으로 삼았다. 한국의 왕성 중 유일한 복성. 중국에서는 자기들 편의대로, 또는 오해해서 여씨로 줄여서 기록했다. 실제로 夫 자는 한문에서 그냥 별 의미 없는 발어사(發語辭)로 쓰는 경우가 많다. 고대 중국인들이 백제 왕족을 언급하는 문장에 적혀 있는 夫餘나 夫余를 복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발어사로 夫를 쓴 다음에 한 글자 성씨로 餘나 余를 기재했다고 오독했거나 혹은 중국식으로 한글자 성씨인 餘씨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부여의 '여'(餘 또는 余)와 성씨 서(徐)는 余를 구성 요소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의외로 선비족에 의해 요서로 이주된 이후의 부여 왕족들도 성씨가 부여씨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부여씨를 쓰는 사람은 없다. 이는 당연히 요서경략설과 관련해 무수한 떡밥을 낳는데 다만 그 후예는 현재 부여 서씨로 전해진다고 한다.

  •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 성왕이 세운, 백제의 도읍 사비성이 있었다. 한 때 강성했던 부여의 이름이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백제 성왕 대에는 잠시 백제 국호가 남부여로 변경되기도 했다. 다만 전통적으로 역사서에서 국호에 들어간 성씨, 방위 표시나 전·후 같은 수식어는 후대에 동명의 왕조들을 구분하기 위해 첨가하는 것이었지 실제로는 이런 수식어를 뺀 게 실제 국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실제로는 성왕이 국호를 그냥 '부여'라고 고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부여가 됐든 부여가 됐든 이 국호가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불명확하다. 성왕의 국호 변경 이후 시기를 기록한 역사 기록(중국측 기록 포함)에는 그냥 백제로 표기된다. 또한 후삼국 시대 견훤이 이 나라를 계승해 세운 나라의 국호가 백제(후백제)였지, 부여나 남부여가 아니었다. 따라서 성왕이 선포한 (남)부여라는 새 국호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 중국 지린 성 쑹위안(松原) 시 푸위(부여, 扶餘/扶余(번체 扶餘, 간체 扶余) 시 - 중국에도 부여가 현존한다. 본래 부여의 옛 땅이라 중화민국 정부가 1915년에 푸위현(縣/县)을 설치했다. 그 후 2013년 1월 23일 중국 국무원에 의해 푸위 시로 바뀌었다. 쑹위안 시 안에 푸위 시가 있는 형태이다. 오타 아니다. 중국의 행정구역 체계상으로는 두 도시의 등급이 다르다.

11. 기타[편집]

삼국전투기에서는 부여라는 나라 자체가 다스베이더로 패러디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위엄쩌는 전성기와는 달리 시기 자체가 몰락기라 위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고구려를 설명할 때 곁다리로 살짝 언급되는 정도다.

12. 참고 자료[편집]


12.1. 연구 자료[편집]

  • 강만길 외, 《한국사 2 -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한길사, 1995년

  • 백산자료원 편집부, 《고조선 부여사 연구》, 백산자료원, 1995년

  • 송호정, 《한국사.4 - 초기국가 고조선 부여 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8년

  • 서병국, 《동이족과 부여의 역사》, 혜안, 2001년

  • 박경철 외, 《고조선 단군 부여》, 동북아역사재단, 2004년

  • 김기섭 외,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8년

  •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년

13.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의 논란[편집]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여가 다양한 한국사 시험의 고난도 문제에서 교과서적 내용과 학술적 내용의 일부 충돌로 인해 논란을 빚어 왔고 이에 화가 난 작성자들에 의해 해당 문단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사례 1. 1책 12법은 (부여/고구려)의 풍습?

  • 형벌은 엄격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하면 1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도둑질과 관련된 내용은 소위 '1책 12법'이라고 하여, 부여를 설명해 놓고 보기로 자주 제시된다. 그런데 정상적인 출제 기관이라면 반대로 '1책 12법'을 설명해 놓고 부여와 고구려 중에 고르라는 유형의 문제는 나올 수가 없다. 둘 다 1책 12법이 있었다는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고구려를 제시해 놓고 '1책 12법'을 고르라는 문제도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법률에 대한 기록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서> 고구려전에서는 도둑질에 대해 10여 배, <수서>·<북사>·<신당서>에는 10배, <구당서>에는 12배를 내도록 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사료가 잘못된 것인지 시간적 변천이 있었던 것인지 역사학적으로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학술적인 문제고 점수를 가려야 하는 문제에서 고구려에 1책 12법이 있었는가에 대해 단순히 O, X 퀴즈를 내면 맞다고 볼 수도 없고 틀리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사료는 모두 6세기 이후 고구려의 상황을 다룬 사료이므로, 3세기의 상황(<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출처로 하는 기술)을 놓고 위에서 말한 '나올 수 없는' 유형의 문제를 내면 일단 부여-1책 12법을 찍어놓고 출제 기관에 항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사례 2. 우제점법은 (부여/고구려)의 풍습?
2017년 12월 16일에 치뤄진 9급 공무원 지방직 추가채용 시험에서 '우제점법이 부여와 고구려의 공통풍습이다 아니다'를 가지고 복수정답 논란이 생겼다. 일부 교재에서는 공통 풍습이라고 씌여있었고 심지어 몇몇 한국사 강사들이 사료까지 제시해가면서 고구려에도 있는 풍습이라고 이의를 제기 했으나 출제자 측에서 묵살(...)하였다. 다만 이는 조금 애매한 면도 있는데, 우제점법이 제시된 것이 정사25서가 아닌 한원이라는 점, (이런저런 사료 다 들고 오면 우제점법은 전세계에서 엄청나게 많은 지역에서 있었던 풍습이다.) 교과서적 내용과 실제적 내용이 충돌하는 부분은 고대사에서 수백곳은 된다는 점 등이 있다. (애초에 고조선으로 보자면 미송리식 토기니 고인돌이니 하는 내용은 모두 30년 전에 폐기된 학설이다)

사례 3. 부여 vs 동부여
2017년에 시행된 역사교사 임용고시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특정한 내용을 발췌해서 제시한 후에, 괄호 안에 들어가야 할 나라를 적으라는 문제가 나왔다. '부여'라고 적은 사람이 많았지만 정답으로 처리된 것은 동부여였다. 부여는 오답처리되어서 오답률이 극악무도하게 높았다고 한다.

[1]중국지린 성 지린시로 추정.[2]중국지린 성 눙안시로 추정.[3] 출처는 광개토대왕릉비문. 현 중국지린 성 둔화시로 추정.[4] 고구려어로 추정[5] 숙신, 물길[6] 보통 한국사에서 등장한 모든 국가들은 대부분 한반도와 불가분의 관계이나, 부여는 건국 이래로 단 한번도 한반도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으므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가 혈연적으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이고, 고구려는 시조 추모성왕의 시호를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 설화를 차용했을 정도이며, 특히 백제 같은 경우는 국호를 아예 남부여로 바꿀 만큼 중요시하였다. 그만큼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조상격 국가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7] 반농반목적 문화로 현재의 길림성 북부 쑹위엔 시 일대.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명왕신화의 '탁리국'와 연관시킨 적도 있다. [8] 위에도 언급했듯이, 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초기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또한, 남서부에는 초기철기를 개막한 이질적 문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초기 청동기 시대의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밖에 없다.[9] BC 59년[10]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위략에서는 '부여가 넉넉하고 풍성하여 선세 이래로부터 파괴를 겪은 적이 없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