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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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역사 속의 백정
1.1. 개요1.2. 고려시대의 백정 1.3. 조선 시대의 백정1.4. 구한말~일제강점기의 백정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2. 비유적인 표현
2.1. 스포츠에서의 의미
3. 석가모니의 아버지의 이름
3.1. 신라 26대 진평왕의 이름
4. 네이버 웹툰 의 등장인물

1. 대한민국 역사 속의 백정[편집]

한자어 : 白丁 (백정)

1.1. 개요[편집]

현대의 인식으로는 옛날에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했었던 사람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최하급 계층이었으며 대개의 경우 현대에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도축, 발골, 정형을 담당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린 것은 조선시대 세종 이후의 일이었다. 그전에는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조선시대 이후 다른 뜻으로 바뀐후에도 백정이라고 전부 도축업자인 것은 아니었으며 다른 직업도 포함되어 약간씩 달랐다.

본래 어원은 중국 수(隨)나라에서 온 말로 당시 뜻은 그냥 일반 백성을 말하였을 뿐이다. 국가에서 군인이나 향리 등의 직역을 부여한 집을 정호(丁戶)라 불렀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집을 백정호(白丁戶)라고 불렀다. 여기서 백은 하얗다는 의미가 아니라, '00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1.2. 고려시대의 백정 [편집]

고려시대에 백정이란자기 조상 대대로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 짓는 농민 즉 자영농을 칭하는 말로 의미가 조선시대의 백정과는 천지차이로 다르다. 고려시대에 백정이 어떤 계층이었는지를 알기위해서는 고려시대의 사회제도를 알아 볼 필요가 있는데, 고려시대 양인이라는 계층은 생각보다 많은 계층이 포함되어 있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그 이유가 고려는 신분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까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세습귀족들은 고려초 광종의 개혁[1]에 따라 많은 귀족들은 물론 왕족들까지 정치에 배제되었다. 상류층으로는 정부의 고관들과 그래도 지방에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대지주에 속하던 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중류층으로는 하급관리와 초기에는 지방의 향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층간의 결혼까지 엄격하게 제한되던 천민 계층을 제외한다면 이 이외의 계층은 모두가 양인으로 분류되던게 고려사회였다. 그러나 지방의 향리들은 전까지 중앙관리였던 귀족들이 중앙에서 실권을 잃고 대거 낙향하고 중앙에서 지방관들이 파견되기 시작하자 지방에서 영향력을 잃고 점차 양민으로 격하되었으며 그 전까지는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어 천민취급을 받던 향,소 부곡민들이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위치가 점점더 올라가 양인에 속하게 되었다.[2] 이처럼 일반적인 고려시대 양인은 꽤 폭넓은 계층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백정이라 불리던 자영농들은 양인들 중에서는 그리고 고려신분제 전체를 통틀어서도 중산층이라고 불릴만한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었으며 실질적으로 고려를 떠 받치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당시 우리가 흔히 아는 백정은 양수척(楊水尺), 수척(水尺), 화척(禾尺), 무자리 라고도 불렀다.[3] 일반적인 의미로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떠돌아다니며 천업에 종사하던 천민계층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시대나 일제시대에는 도부, 또는 도한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최하급 계층으로 분류되었으며 천민으로 국가에 대한 조세부담을 지지 않았고 같은 계급이었던 노비와는 달리 어디 한 군데에 매여살지도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사냥, 축산, 도축/고기판매업(화척), 무두질/가죽제품 제작(양수척 = 조선시대엔 갖바치로 불림), 고리[4], 예악/배우, 망나니 활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고려사에 보면 후백제 정벌시 굴복하지 않아 압록강 밖으로 쫒아보낸 자들이 시초라고 나온다. 이 외에 국가의 부역과 호적에도 제외된 방랑인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기녀들의 시초라는 기록도 나온다. 그리고 북방 민족 출신으로 포로로 잡힌 거란인의 후손이나 동북면에서 흘러들어온 여진인 등, 귀화했으나 정착 생활에 적응하지 않고 방랑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집시?[5] 유목민인 거란인이나 수렵민인 여진인들이 고려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지킨 것. 버드나무 고리를 잘 만든 것도 가재도구가 이동에 편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익숙해진 것이다. 사냥과 축산, 도축 및 고기판매업도 유목민 출신인 이들이 이것을 농경민들보다 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마을을 만들어 살던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 사회적으로 고려와 반체제적 문제가 있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초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반농반목의 생활형태였으며 고구려의 경우 다수의 말갈족, 거란족을 지배하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고구려와 이민족들 사이는 계급상의 차별이 있었지만 그들을 생활방식으로 차별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간의 차별은 존재했지만 짐승을 잡아 도축하는 걸로 차별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뭐 당연한 게 고구려는 초기 국내성에서 출발해 부여,옥저,동예,숙신,거란,선비(연)과 겨루며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한 제국이다. 고구려의 영역 아래 다수의 이민족이 있었으며 그주에는 유목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거란은 고구려민들과의 접점은 거의 없었고 말갈은 이미 이 당시에도 농업과 유목 수렵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근거지 없이 떠돌아다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고구려의 전쟁에 많이 동원되어서 고구려에서는 일부 지위를 인정받는 측면이 있었다. 그 중 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올린 자들은 그들에게 벼슬을 주는 고구려의 풍습대로 고구려 지배계층에 편입된 사례도 있었다.[6]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말갈이라는 말이 여진, 만주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고구려 지방민을 통칭하는 단어라는 연구도 나와 있다. 각설하고 수렵과 목축의 전통이 남아있던 고구려는 무덤에 수렵도가 말하듯 양인이상의 성인 남성이라면 사냥과 도축등은 당연히 할 줄 알아야 되는 일이었다. 즉 고구려에서 짐승을 사냥해서 해체하는 일이 성인 남성이라면 당연히 할줄 알아야 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 모두 왕권강화를 목표로 불교를 도입하고 농업을 장려하게 되고 소고기는 먹기 힘들어진다는 말이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국교로 자리잡게 되고, 원효와 같은 고승들이 활약으로 불교의 사상이 민간으로 깊숙히 스며들게 된다. 따라서 고려에 자리잡았던 대승불교의 가르침중 핵심인 자비와 불살생의 사상이 사회 깊숙히 자리잡고 사냥과 육식을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잡자 자연히 도축관련 업종을 천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7] 근데 도축작업이 천시되 수척들이 전담하게 된건지 아니면 천한 계층이었던 수척들이 도축업을 도맡게 되자 천시된건지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진 않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몽골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몽골의 영향을 받아 육식이 권장되고 목축이 장려되던 기간을 거치면서 다소 희석되었다.[8] 여튼 통일 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한국으로 유입된 외국인들이 이런 직업을 전담했다.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우선 전쟁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동안 우리와 관계를 맺었던 여진, 거란족들, 고려시대에 벽란도를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들어왔던 중동인들(아랍계, 이란계 등), 몽골과 항전을 벌이면서 몽골 밑에서 용병으로 뛰었던 타타르족이라 추측되는 색목인들까지 여러 민족이 고려에 들어와 있었다.이와는 별개로 애시당초 고기를 늘상 먹을수 있었던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고기를 먹을수 있는건 귀족이거나 부자거나 해야지 먹을수 있었다.

이런 반체제적인 사상을 가지고 고려에 유입되지 못하고 겉돌던 이들은 왜구를 가장해 노략질을 하거나 거란의 침입시에는 길잡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백정이 조선시대에 천민으로 취급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는 셈이다.[9] 한국에 유난히 백정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백정 대다수가 이민족 후예였고 한국 문화에 융합되지 않은채 틈만나면 민족의 전통을 시도했던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기소비량이 적아서 그런건가?

1.3. 조선 시대의 백정[편집]

조선초 세종은 국가체제 정비 과정에서 양수척 등을 양민화시켜서 국력을 증진시키고 동화시키려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양수척 화척을 백정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적극적인 정착유도정책을 꽤하였는데, 문제는 양수척 화척의 생활상이 일반농민들과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직업적으로 여자까지 말을 타고 유랑하던 집단을 강제로 정착을 시키니 농사일은 익숙하지도 않고(....) 말을 타던 버릇이 있으니 강도짓의 유혹에 빠지고, 고기를 먹고 살았으니 소고기 금지령에 대놓고 반하고 싶고, 기존의 거친 생활상으로 인하여 범죄에 대한 거부감도 약한 편이었으니, 이로인해 기존의 농민들과 신백정들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세조 시절에 왕 앞에서 논쟁을 벌인 안효례와 최호원 사이에서 욕설로 '백정의 자손' 패드립이 시전된다. 여기서 시전자는 상민이고, 역으로 반박한 이는 양반으로 전신분에 걸쳐서 백정이 욕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앞서 세종이 양민화를 시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화이다.[10] 상인(常人), 혹은 상민(常民)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등장한 것이다. 세종 전만 하더라도 백정이라는 말은 고려시대처럼 일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나, 세종 때는 양수척도 백정으로 편입하려고 하자 일반 농공상인부터 양반들까지 다 반대한 탓에 생겨난 현상.

결국 양민화는 실패했는데 세조 대에는 백정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묻는 내용이 과거 시험 문제인 책문으로 출제될 정도였다. 하지만 중종 때에 한양 인근에 백정 도적떼가 출몰해 토벌 논의가 벌어질 정도니 해결은 요원했다. 죽어라고 말을 안들어 처먹으니 결국 별도 거주지에서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특별한 허락까지 필요한 말 그대로 요주의 대상으로 굳어버린다. 그 정도는 심각하여 과거시험에서 강도의 8~9할이 백정과 재인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살인 강도범 380명을 조사하니 과반수가 역시 백정과 재인 무리(....)

이건 조선 조정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백정의 문제였다. 조선조정은 전근대 왕조국가치고는 이례적으로 보일 정도로 강한 인내심으로 어떻게든 안고가려 노력했다. 유럽에서 집시나 유대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보면 그와는 비교도 안될 어마어마한 민폐를 끼친 백정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굉장히 온건했다. 조정에서는 어떻게든 이들을 일반 백성과 동화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유랑생활을 하면서 수렵까지 하던 그들은 칼을 쓰는데는 일가견이 있었고 말도 잘탔기 때문에 조선에서 겉돌며 걸핏하면 산적으로 위장해 농민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관가까지 털었다. 조정이 추진한 양민들과 통혼, 동화는 양민들 뿐 아니라 백정들도 거부했다. 당시 조선 백정집단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느냐면 강도들을 잡으면 다 백정, 살인범의 절반은 백정, 가축훔친 흔적을 조사하면 죄다 백정마을로, 방화범을 잡으면 반은 백정, 마적단을 잡으면 모두 백정(...)정말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검거도 쉽지가 않은게, 관리가 몇번이나 우마를 잃고 그 흔적을 따라가니 백정마을 앞이었으나 남녀 구분없이 말타고 활쏘는 집단이다보니 백정마을에 들어가기 무서워서 처리를 못한 정도였다. 백정 마적단의 난리는 세종, 문종, 세조 내내 골치거리였다가 중종대에 수그러들고 명종대에 임꺽정이 난리 한번 터트린걸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후의 백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지며, 임진왜란기에는 기존의 서술과 달리 활도 못쏴서 군인으로 쓸모가 없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로 변화하였으나, 사회전반에 뿌리내린 적개심을 재고시키기엔 지난 백수십년간 백정들이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았다. 조선 초 100여년간 트러블은 백정과 양민 사이에 뿌리깊은 불신을 야기시켰다. 즉 간단히 말하면 유럽의 집시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지독한 유랑 범죄집단이 조선전기의 백정이었다는 말이다.

현대매체에선 백정과 전혀 상관없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백정을 연결짓는다고 설치는 바람에 이러한 백정의 악행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일방적인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백정의 이미지인 도축업은 다른 이유로 백정이 전담하게 되었는데, 성종기까지는 양인들도 도축업을 하였으나 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양에서 도축업을 금지시키면서 양민 도축업자들은 몰락했다. 허나 그 때에 백정들은 사실상 법을 무시하는 법외의 존재들(....)이며 고기먹고 싶다고 수시로 소와 말을 훔치던 존재(....) 강력범죄를 일으켜도 관군이 출동할 급이 되어야 처리하던 이들이라 마치 금주법시대 마피아들처럼 도축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백정차별이 심해진 이유는?
조선전기 백정 개판기(...)
대백정군사작전
조선전기 백정을 보는 시선은 이렇지 않을까.
백정에 대한 썰 추가

임꺽정이 백정 출신으로,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 이들은 어느 일정한 곳에 모여 살았으며, 이런 마을엔 양민이나 포졸들조차 가까이 하길 꺼려했다. 심지어 양반과는 같은 길에서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야기를 하려면 길 밑으로 내려가서 이야기를 한다던지.

하지만 성균관에 소속된 특수집단인 반인(泮人)들은 성균관에 제사용 및 식용으로 육류를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도축 일을 함께 해야 했는데 이들은 공자님이 드실 고기를 바치는 몸이라고 오히려 세력과시를 했다고 한다. 양반집 자제들, 궁에서 일하는 별감들과 함께 한양의 유흥가를 주름잡던 물주들 중 하나. 이들이 살던 반촌(泮村)은 이러한 세력+성균관 출신 고위층의 비호로 인해 사실상 치외법권 유흥가 지역이었다.

전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대신 납세의 의무가 적었으므로 생활이 곤란해지면 양민이 일부러 백정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능력만 있으면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원래 도살업은 이익이 많이 남았다. 특히 소는 예나 지금이나 허가된 소 외에는 잡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몰래 잡는 경우 더욱 이익이 많았고[11], 이들은 주로 양반이나 잔치 등의 대형 행사에 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더욱 수익이 많았다. 이처럼 수익이 많은 반면에 옷차림이나 집에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돈이 나갈 구멍이 없었다. 때문에 곳곳에서 백정 부자들이 등장했고 이후 신분제 폐지 등으로 백정들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이 형평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예전에 KBS에서 저연령층 대상으로 방영하던 모 역사프로에서 나온 역사적 일화 중에는 조선시대 한 늙은 백정의 장례에 백정들이 관에서 꽃상여를 빌려 쓰려 할 때 양민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자, 백정들이 남아도는 돈으로 더 좋은 꽃상여를 만들어 양민들을 기죽이는 일화도 있었다. 물론 양인들이 들이닥쳐 꽃상여가 바닥에 떨어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등 난장판이 일어나는 내용이 후술된다. 당시 백정은 따로 떨어져 살아야했고, 옷차림만으로도 구별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창옷(?衣)이라 불리던 중치막이나 비단옷은 입지 못했고, 머리에는 이 아닌 패랭이를 써야 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백정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7종 천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라는 말과 함께 백정들이 쓰는 패랭이, 또는 평량갓를 벗겨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여기에 결혼할 때 말이나 가마를 못타고, 죽은 뒤에도 상여를 못 쓰는 것이 당시 법도로 취급받았다. 당연히 천민 취급이므로 평민의 아이들에게 존대해야 하고, 서당은 당연히 못 간다. 신분은 양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천민인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는 점에서는 고려시대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12]

여담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 청으로 끌려간 백성들을 환향시킬때 일부 환향을 거부한 조선백성들이 있었는데 그들중에는 백정도 있었다. 농경사회로 백정을 천시여기는 조선과 달리 유목사회의 특징이 있었던 청의 만주족들 입장에서는 백정은 고급기술자라 우대받았고 이는 청에 끌려간 백정들도 마찬가지로 우대받았기에 조선으로 돌아가길 거부한 것이다. 임진왜란 후 조선으로 돌아가기 거부한 사기장이들을 예와 같다.

1.4. 구한말~일제강점기의 백정[편집]

구한말~일제강점기에는 형평운동이라는 것을 벌여 그들의 권리를 더 받으려 했었다. 이때 일제는 주민등록부에 도부라 적고 붉은 점을 찍어 여전히 차별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해 1920년대 무렵에 일어난게 형평사 운동이었다.[13]

강점기에 형평운동을 벌인 인물중 장지필(張志弼)은 백정 부호인 장덕찬의 아들로 백정의 아들이기 때문에 양민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 도부라고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내가 백정이라니! 형평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편견이라는 게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이후에도 실질적인 대우는 계속 그대로 이어졌다.[14] 일본의 민족분열정책에 따라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어느 정도였냐면 백정들은 농민에게 자신이 이야기할 때도 그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농민이 말할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학교진학이나 직업도 도축분야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백정에 대한 천대는 형평 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예천 형평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분사의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인 예천청년회장 김석희가 한 말[15] 때문에 형평사 임원과 김석희간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 장외에서 관람하던 일반인이 그것을 백정들이 버릇이 없어졌다로 인식하고 그들을 박멸하자고 주장하여 며칠동안 형평사를 공격하거나 형평사 임원의 집을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하는 일을 벌였다. 이에 평소 조선의 사회운동을 아니꼽게보던 일본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한동안 예천이 무정부상태가 되기도 했었다.[16]

파일:yZnOI1i.jpg
이런 형평운동에 대한 대립을 보여준 것이, 백정 관련 풍습으로 잘못 알려진 소위 '백정각시타기'이다. 이규태는 생전 이 에피소드를 들어 조선시대부터 그랬다라고 허위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규태의 글도, 그 외의 다른 글에서도 풍습이라기 보다는 사건 사고에 가까웠고, 언급된 대표적 지역이 다름 아닌 예천이다. 실제로 관련 글의 구조를 보면 모두 '백정의 아내가 동네 행사에 참여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구도'인데, 조선시대라고 가정하면 사는 곳부터 달랐기 때문에 이런 사건 자체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심리상 양인이나 양반은 특히 공공장소에서 백정과의 접촉 자체를 굉장히 꺼렸는데 각시를 타고 말고 하는 보편적 풍습이란게 생길 수도 없고. 즉, 형평운동으로 대표되는 백정들의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 있고, 이에 대한 저항이 충돌하면서 벌어졌던 사건이 해당 일화인 것이다. 이런 사건사고급 일화들을 몇몇 인물들이 일반적인 풍습인 것처럼 글을 쓰고, 이걸 박경리의 토지 등에서 인용하면서 널리 퍼진 것이다. 여기에 섹드립이 포함된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인터넷상에서 유행한 결과 존재하지 않았던 풍습이 나타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쇠좆매의 잘못된 유행과 비슷한 감이 있다.

실제로 초기 항일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신분차별이 있었고[17], 백정출신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물론 후기로 가면 신분 같은 것을 신경쓰면서는 독립운동이건 항일독립투쟁이건 할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약해진다.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편집]

백정에 대한 차별은 1950년 6월까지 이어졌으나[18]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족보가 소실되거나 백정마을이고 뭐고 다 해체되고 사라졌으며 더욱이 사회 분위기가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게 용납되는 사회로 바뀌면서 백정이나 노비 출신을 천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상당 부분 희석되게 된다.

현대에는 도축업자 등을 직접적으로 백정이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뿐더러 그렇게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되는 표현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무엇보다 이 분들의 노고가 없이는 아무도 고기를 먹지 못한다.

비칭이 되다시피한 '백정' 대신 '육가공 기술자', '정형 기술자'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활동하는 지금에 와서도 아직까진 본인의 직업이나 직장 등에 대한 공개를 꺼린다고 한다. 외부인에 의한 작업장의 오염과 열악한 작업환경 문제도 있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치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던 점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듯. 이 부분이 집중적으로 묘사된 작품 중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조금 오래되긴 했으나 허영만의 만화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편의 13화 대분할 정형 에피소드와 15권 돼지고기 열전 편의 두당 에피소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해당 편의 취재일기, 후일담에서 작가의 탄식으로 극명히 드러난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문서에 소개된 일화들을 참고.


-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대분할 정형」, p. 205

성찬 - "정형 기술자가 칼을 잡지 않으려는 이유가 뭡니까?"
조경기 - "정형 기술자? 아니야! 우린 백정이야! 암. 백정이고말고!"

-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대분할 정형」, p. 198

김학도 - "사장님께 따님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더니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표정… 아직도 눈에 선해. 마치 나를 개돼지 보듯 경멸하는 표정으로 내뱉는 말. 『주제도 모르는 백정놈!』 칼을 잡고 짐승의 배를 가르는 내가 백정이라면 고기를 파는 사장님은 뭐가 다르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 식객 15권 돼지고기 열전, 「두당」, p. 97


식객 3권의 해당 에피소드를 일례로 들자면, 상술한 바와 같이 예비 사돈댁이 문자 그대로 지랄육갑을 하며조선 시대의 법률가는 무슨 양반인 줄 아나?[19] 혼삿길을 파토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름난 육가공 기술자였던 '무사' 조경기는 칼을 놓고 대형 음식점에서 화부 업무에만 전념하게 된다. 이후 조경기는 자신을 찾아와 정형 기술자로 대하는 성찬에게 자기와 같은 사람은 백정이라며 자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습[20] 더불어 15권의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최고의 도축 기술을 선보이며 두당으로 일하던 김학도가 어느 고깃집 사장의 딸과 서로 사랑하여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고, 아이까지 임신해서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사장의 멸시와 분노 등으로 일이 그르쳐져 딸은 자살하고 '돈아(豚兒)'라 이름붙였던 복중의 아이 역시 죽어버리는 등의 비극을 맞이했고, 이에 독기와 한을 품게 되었다.[21]

그래도 2010년대 들어서 EBS 극한직업편에서 육가공공장에서 정형사와 발골사들이 실명과 얼굴을 보이며 떳떳하게 그들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 방송되는 모습을 보면 그 인식은 상당히 개선된 편이다. 물론 여전히 기피하기는 하나 이는 백정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닌 3D직종으로서의 문제이다. 육가공사가 왜 극한직업으로 다뤄지는 건지 한번 생각해보자. 축산물단지 육가공사 초임 월급이나 임금 수준은 바닥을 기는 수준이고 일이 힘든건 덤이다. 3D라는 인식이 만연하기 때문에 근로조건이나 환경 등의 개선이 매우 더디고, 초과나 연장근로, 휴일근로에 대한 체계적인 연장수당에 대한 것이나 철저한 근로시간 준수따위도 잘 안 지켜진다. 사회의 인식조차도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공부해서 공무원되거나 회사들어가"라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처럼 멸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개선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블루칼라는 무식해서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는 인식을 바꿀 차례다 지금은 베테랑 도축업자들은 자기 건물이나 점포를 가져 엄연히 사장님 대접을 받는다. 오히려 도축업자 집안에 시집장가가면 사장님 집안으로 시집장가간다고 좋아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밖에 일부 비하적인 말로 쓰이는데 한 네티즌은 부모가 보신탕집을 한다고 적었더니만 개빠들이 개백정이라고 하여 어이없어하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론도 많았고 개빠들을 가리켜 '개빠답다.', '그러는 놈들이 정작 정육점이나 일반 식당에 가서 돼지백정, 소백정,닭백정이라고 이렇게 말하지도 못하지, 지들이 처먹고 그 개에게 먹일테니까' 라고 신나게 욕하며 비난하는 글도 많았다. 역관광 이런 놈에게는 고기를 팔지 말자

2. 비유적인 표현[편집]

흔히 악독한 독재자살인마에게 인간백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인간인 백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을 가축처럼 도살하는 백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으로 불렸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다. 다만 스탈린의 경우에는 그가 죽은 다음에야 재평가를 통해 그런 별명이 붙었다. 왜냐하면 그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시절에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이 사용하는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혀 숙청되었을 테니까. 돼지 보고 '돼지야' 하면 그 돼지 기분이 어떻겠는가?

서구에서도 비슷한 뜻인 듯 하다. 백정과 뜻이 비슷한 영어 단어인 butcher(도살업자, 정육업자 란 뜻)엔 "잔인한 살인자"란 뜻도 있다. "Ah~ Fresh~ Meat!" 그러나, 이 butcher는 사람 성으로도 쓰인다. 이 쪽은 smith(대장장이) 등과 같이 조상의 직업이 성으로 붙은 경우.

라틴어로는 Carnifex. 어원이 참 깔끔하다. Carn(고기) - i(발음을 위해 첨가된 음운) - fex(만드는 자). 아울러 Lanius라는 말 또한 백정이라는 뜻이며, 폴아웃2의 등장 노예상인 메츠거Meztger또한 독일어로 백정이라는 뜻이다.

야구선수 정대현의 별명이기도 하다. 돼지이대호 전담 투수로 불릴 만큼 이대호를 잘 상대하기 때문.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한편 같은 야구선수인 백정현은 이름 때문에(...) 백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 상에서 직업을 비하하는 의미로, 의사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약사한의사들이 사용하는 멸칭인데 보통 의사하면 칼(메스)를 들고 사람의 몸을 갈라 수술하는 이미지때문인 것 같다. 애초에 의사의 본분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돌팔이 의사에게나 사용할법한 괴이한 표현이지만 신경쓰면 지는거다다만 진짜 백정출신의 의사겸 독립운동가가 존재하므로 함부로 비하해선 안될것이다.

정형기술자, 도축업자 들을 멸칭할때도 쓰이는데 본인들에게 "백정"이라고 부르면 절대 좋은 꼴은 못본다. 식객에서도 자주 소재로 다룬 부분이다.

그 밖에 인간흉기, 사기 캐릭터들을 지칭할때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바키 시리즈에 등장하는 오로치 돗포가 젊었을 적 별명이 인간백정이었단 언급이 나온다.

학원도시흑자라는 백정이 있다 카더라[22]

2.1. 스포츠에서의 의미[편집]

스포츠에서의 백정은 주로 소속 선수들을 마구 혹사시켜서 끝내는 부상으로 나가 떨어지거나 안 좋게 퇴단하게 만드는 지도자를 주로 꼽는다. 특히 야구의 경우가 이게 가장 심한데, 이유노예(야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한 마디로 손쉽게 선수 한명의 커리어를 작살낼 수 있는 권한을 가졌기 때문.

3. 석가모니의 아버지의 이름[편집]

슈도다나 문서 참조. 백정(白淨)은 동아시아로 불교가 넘어오면서 한자로 표기한 것.

3.1. 신라 26대 진평왕의 이름[편집]

김백정. 위의 석가모니의 아버지에서 따 왔다. 거기에 왕비의 이름은 마야부인, 동생에겐 김백반, 김국반 등 석가모니 삼촌 이름을, 딸 덕만 등에게도 석가모니의 누이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만약 아들이 태어났다면 석가모니의 이름을 붙이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부처님의 노여움을 샀는지 정작 석가모니가 될 왕자가 태어나지 않아 진평왕 다음으로 선덕여왕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4. 네이버 웹툰 의 등장인물[편집]

백정(탈) 참조.

[1] 특히 과거제도실시[2] 그러나 향,소,부곡의 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양인에 속해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인계층이였던 향리나 군,현민들과는 확실한 격차가 있었던걸로 보여진다. 이들은 외거노비 만큼은 아니지만 서양의 농노와 비교될정도로 군,현 민보다는 훨씬더 강도높은 세금과 역등을 부과받았다.[3] 이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사실 그대로 불렸다.[4] 버드나무 가지나 지푸라기를 엮어 갖가지 물건을 만드는 것. 일명 유기[5] 실제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다만 백정이 민폐나 어그로가 훨씬 심했다. 세종, 문종 실록에 수록된 백정의 범죄기록과 전국 감옥의 살인, 강도범 절반이 백정이다. 조선 전기까진 남녀 구분없이 말타고 활쏘며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이었고 이민족들이 농경민족에게 행해온 약탈도 그대로 저질렀다. 집시도 유괴나 절도, 구걸로 악명이 높지만 이쪽은 강력범죄라는 점에서 훨씬 심하다.[6] 발해를 세운 걸걸중상, 걸사비우, 그리고 대조영 등은 말갈계로 추측되기도 한다.[7] 그러나 일본과는 달리 고기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왕이 불국토를 부르짖건 말건 귀족들이나 상류층은 계속 고기를 먹었으며 불국토 사상에 심취한(혹은 왕권강화를 목표로) 고려시대 왕들이 왕명으로 육식을 절제시키고 심하게는 농사짓기 힘들다고 도축금지시켰지만 그래도 먹을사람은 다 먹었고 하다못해 왕들이 고기 그만먹으라는 말은 안할테니 좀 적당히 쳐먹어 하고 말한 기록이 많다. 이규보 같은 사람은 허구헌날 술먹으며 고기먹는 자신이 싫어서 금주와 금육을 실시했는데 눈앞에 고기가 보이자 아무생각없이 먹게 되더라 라고 자아성찰을 담긴 글을 남기기도 했다. [8] 이후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끊어질 뻔했던 한국 고기요리의 명맥은 어찌어찌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어찌됐건 살아남게 된 일본은 불교의 영향력이 더 강해져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고기요리가 사실상 멸종되다시피했다.[9] 물론 다른 국가에도 백정에 대한 편견은 있었으나 한국만큼은 아니었다. 고대 중국에서부터 제례에 바치는 희생은 군주에 의해 주관 및 분배되었고 포인이라고 불렸던 왕실 요리사들은 직접 도축을 집행했으며 심복 대우를 받았다. 직업차별이 아니라 다른 차별이 있어서 그렇지 정복국가인 금, 원, 청은 백정을 우대하는 유목민족 특성상 백정을 기술자로 존중해주었으며 서양에서도 일부 계층이 안 좋게 볼 뿐이지 사회 전체 분위기는 백정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되었고 유태인의 경우에는 종교적으로 깨끗한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종교 가르침 때문에 종교 지도자인 랍비가 백정을 하는 일도 있었다. 고기를 정형하고 배분하는것은 승자 혹은 강자의 권위와 권리로 인정되어왔고 이러한 면면이 집안 남자들이 주도하는 BBQ 파티 등에까지 남아있어왔던 것이다.[10] 이건 게이하고도 좀 비슷한 게, 게이들도 "호모라고 하지 말고 '즐거운 사람(gay)'이라고 불러다오" 했는데 이제는 게이가 동성애자를 지칭하게 되어버린 것처럼.[11] 현대에도 이러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안해도 된다. 현대 한국은 소고기가 썩어날 정도로 공급량도 많고 수요도 많아서 몰래 불법 도축하느니 그냥 허가받은 대로 하는 게 더 이익이 크다. 거기다가 엄격한 등급 매기기 과정때문에 불법으로 도축한 소가 섞일 가능성도 없다. 그러니 위키러들은 괜한 걱정말고 먹고싶은 대로 먹자.[12] 대표 천민인 노비도 백정을 천하게 보았단 것으로 보인다. 오마이뉴스에서 노비와 백정에 대해서 서술했는데, 백정은 옷이나 그런 것에 모두 제약이 있었던 반면 노비는 겉만 보면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백정은 노비를 함부로 뭐라하지 않았지만, 법정 싸움에 들어가면 양인 백정이 유리했다고 한다.[13] 사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천민에 해당하는 부라쿠민들이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으론 차별받는 것이 사회 문제가 되는 일이 있다.[14] 드라마 "제중원" 실존인물이 황정도 백정출신으로 많은 차별을 당했는데, 1920년대 서울에서 의료강의를 하다가 일부 학생들이 그가 백정 출신인 것을 문제삼아 수업을 거부한 사태가 있었다.[15] '지금 새삼스럽게 형평사를 내세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것이니 그보다 백정의 실질적 향상에 힘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16] 김희곤 외 4인, '경북독립운동사 5', 청솔, 2014, p238~240[17] 평민의병장이 양반에게 즉결처형 당하던 것이 초기 의병의 모습이다.[18] 1950년 6.25 전쟁 전 당시 국군에 필요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장교 임명을 앞둔 학생이 부모가 백정 출신으로 밝혀져 장교임명은 취소되고 강제퇴학당했다는 야사도 있다고 전하니(...).[19] 조선시대에 법률만 다룬 것은 중인들이 보던 잡과의 하나인 율과로 선발했다. 덤으로 외무고시도 조선시대 기준이면 역시 잡과 중 역과에 속한다.[20] 다행히 조경기의 딸은 도축업자에 대한 편견과 천시가 없는 남자와 만나 잘 되었다. 그 말을 듣더니 좋은 고기를 원없이 먹을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고. 조경기 역시 이 말에 기운차려서 다시 칼을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어찌보면 나름 해피엔딩.[21] 작중에서 그 한을 추적하는 중심 소재가 되었던, '돈아'가 새겨진 발골칼을 회수한 김학도가 자살한 옛 연인의 넋 앞에 칼을 바치며 해당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 조경기 때와는 다른 새드 엔딩.[22] 시라이 쿠로코를 한자식으로 읽으면 백정흑자(...) 물론 흰우물의 의미란 시라이 쿠로코(白井黒子)다.흰우물 검은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