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중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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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 Dolchstoßlegende
영어 : Stab-in-the-back myth
한국어 : 배후중상(背後中傷)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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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현실4. 결과5. 매체에서6. 타국의 사례
6.1. 프랑스6.2. 일본

1. 개요[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 떠돌던 정신승리같은 음모론. 비수를 뒤에서 맞았다는 뜻의 비수 전설이라고도 한다.

독일은 사실 전투에서 지지 않았으나 유대인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병역기피, 탈영, 파업선동, 간첩질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음모론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잘 되면 내 덕! 망하면 네 탓!"[1]임은 어디서나 있는 말이라 색다를 것도 없지만 이 도시전설은 반유대주의, 나아가 나치당이 정권을 잡아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구체적인 어원은 1차 대전 전범인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전범 체포를 면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해서 가졌던 미국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그는 1차대전 당시 독일 육군 참모 차장이자 군수 총감으로 실질적인 독일군의 최고 지휘관이자, 상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황제 빌헬름 2세허수아비로 만들고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전권을 휘두른 독재자였다. 당시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며 "그렇다면 이것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Stab in the back?)는 뜻입니까?"라고 하자 루덴도르프가 "내 말이 바로 그거요!"라고 한 대답이 널리 퍼지면서 정착되었다.

2. 배경[편집]

이 전설이 나온 까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거시적인 상황'과 민중의 '미시적인 개인의 인식'의 괴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후대가 아는 전체적인 지식과 당시 개인의 삶 속의 지식은 차이가 있고, 그것 때문에 배후중상설이라는 괴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당시 동부전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에 개박살이 나면서 붕괴 직전이다가 탄넨베르크 전투로 한숨을 돌렸고 이후 1915년부터는 전과를 확대해서 오히려 러시아 제국 깊숙히 진격했다.

또한 서부전선은 독일군의 초기 전과로 알자스-로렌을 제외하면 프랑스, 벨기에 영토 안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서부전선이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지옥같은 참호전으로 변해서 4년을 질질 끌면서 독일의 모든 물자가 바닥나고, 1917년과 1918년 겨울에는 매일마다 아침 점심 저녁 순무만을 먹는 안습한 상황[2]이었다.

독일 제국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의 전투를 끝내고, 여기서 빼온 예비부대와 자원으로 1918년 서부전선에서 5번에 걸쳐서 대공세(춘계 공세)를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미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자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한계에 달한 독일군은 1918년 9월 발칸 전선에서 동맹국 불가리아가 붕괴해도 속수무책, 동부전선의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전쟁을 포기했고, 서부전선도 군데군데 숭숭 구멍이 나면서 탈영병이 속출,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긴 '힌덴부르크 선'까지 무너지면서 군부는 민간 내각에 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해달라고 통보한다. (사실상 항복)

당시 군부독재 체제였던 독일은 정보가 통제받던 탓에 내각총리조차 막장테크 탄 9월에 가서야 이런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 전까진 러시아의 항복 덕에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다(...) 연합국은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휴전 협상 선결 조건으로 전쟁 이전 독일 국경까지 군대를 자진해서 퇴각하며 전범으로 찍힌 군부빌헬름 2세 대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민간 내각하고만 협상하겠다고 통보했다. 황제는 퇴위하고 공화정을 선포했으며, 전쟁 전 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졸지에 군부가 싸놓은 똥을 치우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민간과 군부는 정보과 괴리되어있었고 중요한 점으로서 독일 본토는 전쟁터가 아니었다. 라디오 방송과 국가의 발표는 독일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거나 힘든 싸움을 하고 이겼다는 선전들로 가득했다. 허황된 거짓말이었지만 민간, 심지어 고위인사들까지 의심치 않은 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국민들 중 상황을 안 좋게 보는 이들조차 "독일 안에서 전투가 없네?? 우리가 아직 지지 않았군." 이라고 현실을 오판하고 있었다. 패배를 알만한 이들도 패배를 체감할 시간은 전혀 겪지 않았다. 소련군:또 그러실까봐 훗날 베를린 전투를 준비해드렸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전황이 좀 나빠졌지만 독일 내부상황이 아직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고, 휴전 요청하다가 갑자기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가 바뀌어 "우리가 졌다. 항복 선언하겠음." 이라고 나오니 국민들은 "아니, 항복이라니? 이보시오, 정부 양반.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격하게 반발했다. 국민들은 패배를 부정했고 내부의 배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만들었다고 아우성이었다.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국민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민간정부 내각이 이후 어떨지 심각하게 우려했고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정파의 이익보다는 독일을 위해 고민 끝에 결국 이 역할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는 연합국의 실수도 한몫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을 발효하고 나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군대는 휴전 협상 뒤 평화협정을 하기 전 독일이 딴 마움을 못 품도록 북해 항구를 봉쇄하고 지상군은 라인 강까지 진격했으며 소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1918~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사이 독일 국민들은 휴전 이전처럼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고 곳곳에서 바이마르 공화국부르주아 체제라며 거부하고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주장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공산주의자들의 봉기와, 이를 진압하려는 집권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 우익 민병대[3]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한 직후 1919년 1월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중도좌파)-가톨릭 중앙당(우파)[4]- 독일민주당(우파)의 흑적황 좌우 대연정은 76.2%의 지지를 얻으면서 독일에서도 민주 공화 체제가 정착한 것 같았지만[5]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을 통보하면서 전 국민적인 반발이 터져나왔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이 못 갚을 만큼 지나친 배상금을 요구하자 독일에서는 물론 연합국이었던 영국미국에서도 "이건 좀 심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독일 국민들은 휴전이라고 해서 프랑스에 알자스-로렌 정도 떼주고 합리적인 수준의 평화안을 체결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프랑스벨기에에 대한 영토 할양도 모자라서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었던 폴란드[6],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등에도 영토를 바치는 데다가 모든 전쟁 책임을 독일에 몰아붙이고, 독일을 거덜내며 몇 세대에 걸쳐 갚아도 모자랄 천문학적 수준의 배상금이 나오자 그만 정신줄을 놔버렸다.

사실 전쟁기간 내내 해상을 봉쇄당해 대다수 국민들이 순무만 먹고 살며, 어린이들은 의약품 부족으로 죽어가고 전선의 병사들은 영양실조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 픽픽 쓰러져 가는 판국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라면 독일이 이기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장군들조차도 진지하게 이 전설을 믿지 않았지만 휴전 직후 패전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정을 열려는 시도를 의회에서 제기하자 힌덴부르크가 직접 "우리는 전선에서 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한 까닭은 오직 후방의 반란뿐이었다." 고 주장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하여 법정의 성립을 무산시켰다. 게다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범 800명 인도 조항에 황제와 군부 인사들이 들었는데, 전쟁 책임이 컸던 군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중상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여기에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정신줄을 놔버린 일부 독일인들이 연합국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이 군부 인사들을 영웅으로 띄워준다.

그리고 정치계에선 우익세력이 독일 정치의 큰 축이었던 사회민주당(중도좌파)를 공격하려는 수단으로 썼다는 평가가 유력하다.[7] 전쟁 이전 구체제에서 주류였던 우익 세력은 민중봉기로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찬전/반전 논쟁 시기 이전에 독일 공산당과 같은 정파였던 사회민주당에게 초록동색이라고 몰아붙였다. 이 때 힌덴부르크 등의 군부 지도부나 보수파들은 헛소문에 휘둘린 쪽이 아니라 소문을 주도한 쪽이다. 실제로 힌덴부르크는 백일 전투 직후 독일군에게 재기의 여력이 없었음을 잘 알았다. 다만 군인으로서 항복과 패전의 책임을 지기가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각에 사실상 항복인 휴전 요청도 부관이었던 그뢰너 장군에게 위임시켰다.

독일은 1차 대전 이전에도 사회주의가 성행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항복하는 계기인 킬 군항의 반란은 농민들과 결합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셌다. 독일 혁명까지 시도했던 독일 공산당의 전신 스파르타쿠스단의 칼 리프크네히트나 여성 사회주의자로서는 가장 유명한 축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이 시기의 인물이다.[8] 결국 이들에게 전쟁의 원인이자 패전의 주역으로 몰릴 위기였던 보수우익들이 오히려 사회주의 세력에 건 역공이 바로 '등 뒤의 칼에 찔렸다!' 라는 이론이고 이 시기 거대 자본은 초기에는 전통적 보수파인 힌덴부르크를, 이후에는 나치를 지원하면서 좌파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러 노력한다. 좌파 세력도 급진파(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와 온건파(사회민주당)로 나뉘어서 온건파가 세력을 쥔 뒤 급진파들을 무력으로 탄압을 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저지하던 시점이라 효과는 만점이었다.

이 결과 1920년에 열린 총선에서 흑적황 좌우대연정의 지지율은 반토막 이상이 나 버렸다. 76.2%에서 35%까지 줄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첫 총선에서 4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으나 이후 20%대의 정체한 득표율에서 왔다갔다한다.

3. 현실[편집]

세계 넘사벽 경제력 1위였던 미국이 참전(2위 독일, 3위 영국, 4위 프랑스를 더한 것보다 컸고, 1917년 독일 제국의 GDP는 미국의 35.6%였다)하면서 전쟁은 거의 끝났다고 봐야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증원 병력과 물자가 쏟아지고, 동부전선에선 러시아를 패배시켰지만 동맹국들이 몽땅 털리면서 독일이 이길 방법은 아예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는 엄청난 인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나라가 거의 거덜이 났지만 미국 덕에 배는 곯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영국도 전비는 바닥이 났어도 미국 참전 전에도 이미 여럿에서 재정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영국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영연방 국가와 인도 등의 해외 식민지에서 병력과 물자를 충원하였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식민지 등에서 무제한적으로 병력과 물자를 징발해서 본국의 손실을 메웠다.

반면에 독일은 해외 식민지가 얼마 없었고 그나마도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했으니 식민지에서 독일 본토로의 인력과 물자 수송은 도 꾸기 힘들었다. 그나마 있는 식민지도 아프리카의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탄자니아와 태평양의 섬 몇 개정도로 뽑아먹는 것보다 유지비가 더 나가는 곳들이었다. 독일의 경제력은 거의 100퍼센트 국내의 공업 생산과 내수 시장으로 발전한 것이지, 식민지 수탈로 얻은게 아니었다. 역으로 보면 세계의 30퍼센트를 지배한 대영제국과 역시 식민지가 넘치던 프랑스가 연합해서 식민지가 거의 없는 독일 상대로 4년간 겨우 대등하게 싸우고 미국이 개입하고서야 승리를 했을 정도로 식민지의 효율이 개판이었고 독일의 내수 체급이 강했다는 뜻이지만.

거기에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안습한 외교는 독일의 고립을 심화시켰고 그나마 친구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은 상태가 나빴으며 이탈리아 왕국은 배신까지 때렸다. 사실상 독일은 가진 능력을 전부 발휘해 최선을 다해 싸운 축이다.

하지만 사방이 고립된 상태에서 장기간의 전쟁으로 독일의 식량 사정은 나날이 나빠져 전국민이 굶주렸고, 대전공업 생산은 한계에 달한 데다 극심한 병력 소모와 사기 저하로 군은 붕괴 직전이었다. 사실 일부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들의 전쟁이라면서 전시 협력을 거부하고 탈영 데모 파업을 했지만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미미했다. 무엇보다도 좌파사회주의 세력의 중심인 사회민주당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행위를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짓고 로자 룩셈부르크 등 강경파들이 뛰쳐나왔으나 대중적인 영향력은 적었다.[9]

독일 11월 혁명의 도화선인 킬 군항의 반란은 이런 상황에서 승산도 없으면서 상층부에서 내려진 자멸적인 출격 명령에 일선 수병들이 반발하고 여기에 굶주린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난 사건이었다. 만일 독일인들이 아직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 사건은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냥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지역의 반란이 겨우 이레 만에 전국을 휩쓸고 황제가 도망갔다. 11월 4일에 킬 군항 수병 반란이 있었고 11월 7일에 전국적인 공화국 선언이 있었으며 11월 9일에는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불과 1주일 만에 자연발생적으로 독일 전역이 뒤집혔다.

이미 전쟁을 포기한 것은 일반 독일 국민들의 분노가 한계에 다달아서였다. 즉 극도로 피폐한 생활을 연명하던 독일 국민들 역시 자신들이 전쟁에서 졌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순진한 독일 국민들이 배후중상이라는 도시 전설에 속아서 넘어갔다는 이야기는 독일 국민 스스로가 단체로 정신승리를 시전한 자기최면이다. 말하자면 배후중상이라는 도시전설부터가 자기최면을 통한 정신승리였고, 독일 국민들이 순진해서 배후중상설에 속아넘어갔다는 것 또한 자기최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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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중상설에 반박하여 대응한 유대인 단체의 포스터.

유대인들이 병역기피와 후방에서 뒷총질했다는 괴담도 사실과는 다르다. 이 음모론을 해명하기 위해 독일내 유대인 단체에선 독일 국민 평균보다 유대인의 참전율과 전사율이 더 높다고 홍보했다. 당시 독일의 인구 1% 미만인 60만 인구 중 10만명이 참전해 1만 2천명이 전사했고 78%가 전방에 갔다. 더구나 독일 제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유대인은 장교 입대도 불허했고 병사 입대만 허용했다. 그래서 당시 독일 제국군 내에 있던 유대인 출신 장교는 바이에른 왕국과 같은 다른 제후국 소속이었다. 한 예로 히틀러의 철십자 훈장을 추천한 유대인 장교로 이름이 알려진 휴고 구트만은 바이에른 왕국군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음모론자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히틀러 같은 인간은 "히브리인 1만 2천에서 1만 5천을 일찍 목 매달았다면 100만 명의 독일인은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란 정신나간 소리로 화답했다.

물론 킬 항에서 해군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독일이 항복하지 않았으면 항복은 더 늦춰지더라도 수백만의 연합군이 더 죽었을 것이다. 독일군은 전선에서 시시각각 밀리긴 했지만 그래도 1918년 말까지 프랑스의 현 전선을 유지했고, 미군 사상자도 본격적으로 불어나는 추세였다. 그러나 기껏해야 사람만 더 죽어나갈 뿐이다. 결국 연합군은 베를린까지 진군하였을 것이고 독일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진짜로 그렇게 하여 독일인들의 정신 상태를 강제로 뜯어 고쳐버렸다.

4. 결과[편집]

인지부조화도 이만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한 정신승리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해보면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독일 국민들의 믿음으로 발전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나는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눈물의 똥꼬쇼수도가 점령당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통해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물론 이번에도 독일은 서부 연합군 측에 휴전을 제안하는 등 1차 대전 당시의 행동을 반복했지만 이번에는 단단히 데인 연합국이 독일에서 헛소리가 다시는 못 나오게끔 휴전 협정을 거부했고 무조건 항복하던지 다 죽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했다. 결국 연합군 수십만과 독일군 및 민간인 50만여 명이 추가로 사망하고 독일 전토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연합군의 지배 하에 놓였다.

독일 국민들은 2차 대전에서 자신들의 고향과 국토가 불타 황무지로 돌아가고 가족과 이웃들이 적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 나서야 자신들이 그동안 정신승리 상태였다는 것을 자각했으며,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무조건 항복을 한 후 국가를 재건하고 오늘날의 독일을 세웠다. 냉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양 독일의 재무장이 필요한 미국과 소련이 "어제의 원한은 잊고 일단 써먹어보자"고 결정, 서독 모두 전쟁 배상금을 형식적으로만 물어도 되는 특혜를 받았지만, 배후중상설이 가장 심하게 나타난 프로이센은 상당수 영토를 영구적으로 폴란드에 넘겨 해체하는 등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10]

5. 매체에서[편집]

호이4에서는 독일의 국가 정신으로 구현되어 있다.

6. 타국의 사례[편집]

6.1. 프랑스[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에 6주만에 완패한 프랑스도 '배후 중상'을 믿었다. 즉 독일군의 승리가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반란[11] 때문이라 생각했고, 1942년 패전 책임을 묻는 재판정에 선 사람들이 모두 정치인이나 지식인이었다고. 비시 정부를 이끌었던 앙리 필리프 페탱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한 세기 이전에 이와 비슷한 인지부조화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까지 터졌다. 자세한 건 드레퓌스 사건 참조.

6.2. 일본[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뒤의 일본의 상황이 제1차 세계 대전 뒤의 독일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몰락 작전을 펴기 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결론적으로 일본 본토에는 연합군이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 실제 일본 내에서도 1차 대전 이후의 독일과 2차 대전 이후의 일본이 '패전의 실감이 없는 패전'으로 유사하다는 분석이 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계속되는 장기불황극우화 경향이 1930년대 독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그러나 1차 대전 당시에는 전선이 독일 영토 밖에서 형성되었고, 독일의 열세로 인해 전선이 뚫리기 전에 이미 전쟁이 끝났다.[12] 이 때문에 비록 독일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 경제적 피해는 입었지만, 정작 독일 본토 자체는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당시의 공군은 아직 초창기였기 때문에 후방지역이었던 독일 본토의 폭격 피해도 주목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또한 독일 제국은 비록 전쟁에서 열세였지만 어쨌든 독일인 자신들의 혁명으로 멸망했고, 곧이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들어서서 실권을 쥐어 가혹한 패전조약을 맺었으나 일본의 GHQ와 같은 실권을 쥔 외국군의 점령기관이 없었다.

이와 달리 일본은 지상군 상륙만 없었다 뿐이지, 도쿄 대공습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등의 엄청난 공습을 통해 본토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오늘은 어디어디 도시를 폭격할 것입니다, 민간인들은 대피하세요." 라고 여유로운 폭격 사전예고까지 하면서 그걸 그대로 실행하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저항의 의지까지 잃어가며 처절하게 짓눌리고 있었다. 특히 네이팜탄이나 원자폭탄의 무자비한 위력을 직접 겪은 일본인들의 연합군에 대한 공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에 대한 완패는 일본 내부에서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완전히 인정되어 있었고, 궁성사건과 같이 항복을 거부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별다른 저항없이 실권을 내주었다. 말하자면 워낙 깔끔한 자국 상황에 전쟁의 피해를 실감하지 못해서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진짜 실력으로 진 건 아닌거 같은데?" 라는 잠꼬대가 가능했던 독일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던 것. 게다가 내부의 적에게 책임을 돌리기에는 일본의 시망패망이 눈앞에 닥쳐왔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비롯한 2차 대전 전후, 특히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극우화는 이 독일의 배후중상설과는 거리가 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1] 사회과학에서는 지각(perception, 知覺) 과정에서의 '귀인의 오류'로 자존적 편견(self-serving bias)이라고 한다.[2] 빨리 자라고 싼 순무로 빵을 포함한 대용식을 만들어 먹거나 그냥 먹거나 했고 더 나아가서 순무로 알코올을 발효시켜 연료로 쓰거나 하는 등 순무를 무궁무진하게 썼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1차 대전기 겨울을 순무의 겨울이라 한다.[3] 태반이 제대군인이었고,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벌어진 우익 준동의 주역일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주요 지지세력이 된다.[4] 전후 중도우파 기독교민주연합을 만든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곳 소속이었다.[5] 1919년 1월 선거는 남녀 보통선거였다. 제2제국에서 선거권의 제한으로 노동계층의 정치참여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 영국은 이 당시 남녀 차별 선거권(남성 21세, 여성은 30세 이상), 프랑스는 1945년에야 여성투표권을 인정할 만큼 당시 독일의 선거는 선진적이었다.[6] 폴란드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참고.[7]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가 1918년 군수공장 파업에 연루된 의혹을, 반전세력인 공산당은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8] 당시 독일 공산당은 찬전/반전 갈등으로 사회민주당(SPD)에서 갈라져 나왔고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와 무관한 독자노선이었다.[9] 이 지점이 좌파의 역사에서 폭력혁명반대, 의회 선거를 통한 정권장악, 점진적 변화, 사유제/시장경제 인정 등을 내건 중도좌파와 여전히 민중봉기, 거리정치를 통한 전면적 혁명 노선을 고수하는 극좌파가 완전히 갈라서는 계기다. 2차 대전 이후 중도좌파 세력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폐기하고 케인즈경제학에 기반한 수정자본주의, 복지국가 노선으로 가게된다. 시간이 흘러서 상당수 극좌파 그룹들도 의회 선거에 참여하면서 개량적으로 변모한다.구호는 급진적이지만. 끝까지 선거를 거부하고 혁명을 주장한 극소수는 1970년대 이후 테러 조직이 되면서 사실상 망했어요.[10] 프로이센은 근대 독일의 시작점이었다. 즉 여기를 해체한 건 나치 독일은 물론이고 독일 제국과의 역사와도 단절하라는 경고도 포함하고 있었다. 현대 독일 자체가 합법적인 정부로써의 지위만 인정할 뿐, 기본적으로 두 제국과의 정신적인 계승은 부정하는 입장이니 상관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11] 일부 정신나간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동무와 동맹 맺은 히틀러 군대를 위해서 후방에서 이적 행위를 펴긴 했다.[12] 독일 국경 내로 연합군이 진입하긴 했지만 이는 독일의 사실상 항복 이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