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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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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渤海

파일:발해의 지도.png

공식 명칭

→ 발해

위치

함흥 이북의 한반도 동북부[1]+ 동만주, 연해주 일대.

수도

동모산[2]
중경현덕부[3]
상경용천부[4]
동경용원부[5]
상경용천부[6]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대왕(가독부)

국성

언어

발해어[7]

종족

예맥, 말갈, 위구르, 소그드인

종교

불교, 샤머니즘, 도교, 경교, 토착신앙 등

존속 기간

698년 12월 ~ 926년 1월 14일 (228년)

성립 이전

고구려, 말갈

성립 이후

발해, 통일신라

멸망 이후

고려, 여진, 동란국, 후발해, 요나라, 금나라


1. 개요2. 건국
2.1.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2.2.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동향
3. 국호4. 역사
4.1. 건국4.2. 영토 확장4.3. 혼란과 극복4.4. 전성기 (해동성국)4.5. 쇠퇴4.6. 멸망
5. 멸망 원인
5.1. 백두산 분화설5.2. 지배층의 내분설5.3. 수도 급습설5.4. 말갈과의 대립설
6. 멸망 이후의 정세
6.1. 발해 멸망에 대한 고려의 반응6.2. 발해부흥운동
7. 정치와 행정, 군사
7.1. 정치제도와 조직7.2. 행정구역7.3. 군대 편성
8. 지리9. 문화
9.1. 발해의 복식, 갑옷9.2. 발해 문학
9.2.1. 발해 언어
9.3. 융합된 문화9.4. 기타 문화9.5. 건축
9.5.1. 상경성
9.6. 발해의 음악과 무용9.7. 발해고분
9.7.1. 정효공주묘
9.8. 사상과 종교9.9. 식생활 문화
10. 외교
10.1. 발해와 일본의 관계
11. 한·중·일 역사 논란
11.1. 건국 주체 문제
11.1.1. 말갈 비칭
11.2. 역사 주체 문제11.3. 현재 한중일 3국의 발해 인식
12. 관련 문서13. 발해 관련 창작물14. 발해의 자주성1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남북국시대의 북쪽 축[8]
한민족 역사상 최대 판도를 자랑했던 국가[9]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후 고구려인과 말갈인 등 고구려 유민들이 지금의 중국 지린성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 한반도 북부와 현 중국의 만주 및 현 러시아연해주 지역을 장악해 통치했다. 건국자는 대조영이다.

을 '가독부(可毒夫)라고 칭했는데 이는 발해 말의 음차라고 한다. 그런데 정혜공주묘비에 '황상'이라는 표현과 '황후'를 사용한 묘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외왕내제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0]

상경성 제2궁전지는 당나라 황궁인 함원전보다 더 컸다고 한다. 다만 상경궁 유적지는 중국 정부에서 비공개로 작업하고 있으며 사진도 공개되지 않아 더 연구하고 공개해야 될 부분이 많긴 하다. 지금은 중국 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짤막한 발해 비문 정도를 통해 일부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11]

2. 건국[편집]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평양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옛 고구려의 땅을 지배하려 했다. 그 후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옛 고구려 남부는 신라에 편입됐고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요동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원 대륙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대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이진충의 난이라고 한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걸걸중상(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영주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위한 만든 영주성방 고구려라는 군사 조직의 지원과 함께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오며 요동에의 고구려의 유민까지 규합해서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걸걸중상이 죽으면서 그가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인수받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진국(震國 또는 振國)을 세웠다. 이진충의 난이 발해의 건국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건 사실적이지만 국제 정세와 역사적인 흐름 그리고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봤을 때 언제든지 발해 건국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요인은 있었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요서 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영주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했고 돌궐과 일본, 신라 등도 이후 발해를 자주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2.1.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편집]

발해 건국 이전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안정한 국제정세도 발해 건국의 요인 중 하나이다. 라싸 지역 중심으로 성장한 토번은 당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당에게 가장 위협이 되던 국가 중 하나였고, 쿠틀룩과 백초르의 봉기가 성공하여 당으로 부터 독립한 돌궐도 여러 번 당을 공격하면서 많은 위협을 주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당은 발해의 건국을 견제하기보다는 토번과 돌궐에 대한 방어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일으킨 이진충의 난으로 인해 영주에 잡혀있었던 걸걸중상, 대조영, 걸사비우 등이 영주를 탈출할 수 있게 되어 발해 건국의 환경을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 당은 측천무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내치에 전념하여 당 내부적인 안정을 도모하였으나, 외부팽창이나 이민족 견제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여러 국제정세적인 요인들과 고구려 유민들의 고구려 부흥 의지가 있었기에 발해 건국이 가능하였다. [12]

2.2.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동향[편집]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 형성하고있던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연합공격으로 668년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은 당과 신라, 일본, 돌궐 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먼저 당은 평양성을 깨뜨리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항복을 받은 후 고구려 영토에 대한 지배를 위해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전국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편제하여 중국인 관리를 파견하고 고구려인 중에서도 고구려 정보에 도움을 준 유공자들에게 도독, 자사, 현령 등으로 지역을 통치하게 하였다. 하지만 당의 의도와 달리 초창기부터 안동도호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669년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로 넘어갔고 요동(遼東) 지역에 있던 주요성들 가운데 신성(新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 상당수도 항복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당은 고구려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부흥 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지배층 및 부유하고 건강한 자들을 중심으로 2만 8천여 호를 뽑아 중국 내지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강압책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고 검모잠(劍牟岑)이 안승을 왕으로 옹립한 뒤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요동으로 번져 안시성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강제 사민의 여파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고구려유민들은 당에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부흥 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는 등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며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신라의 대당 투쟁과 결합되었는데 연달아 당군에 패하며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잦아들게 되었다.

당은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장안으로 끌고 갔던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하고 요동으로 돌려보냈고 당인의 직접 통치 대신 고구려인을 전면에 내세워 고구려 유민을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취해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가 겨우 안정되는 듯하였지만 천남생이 679년 정월 29일 안동부관사에서 병사했고, 보장왕이 680년 당의 의도와 달리 말갈족과 공모해 복국(濮國)을 도모하는 등 고구려 유민 통치에 많은 애를 먹고 있었다.

한편 안동지역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당의 지배를 거부하고 신라, 돌궐, 일본, 동만주 일대로 이탈해 갔다. 이 때문에 안동 근처에는 가난한 자만이 남고 고구려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평양과 요동 지역 일대는 허갈한 지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677년 요동성에서 신성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 역시 696년 거란인 이진충의 난을 겪으면서 돌밭(石田)으로 변해 버렸다. 안동도후부는 698년 안동도독부로 격을 낮추었고 704년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고구려 옛 땅에 대한 당의 지배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변화를 거듭했으며 시종 온전하고 확고한 통치를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해가 고구려 멸망 후 3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변방 지역인 동만주 지역에 비로소 건국된 것을 보면 고구려 핵심 지배 세력과 중심 지역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억압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부흥을 막기 위해 당이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한 덕분이었다. 2만 8천여 호가 중국 내지로 강제이동 당했을 때 이들은 황무지로 옮겼는데 고구려인들 특유의 강인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궈 냈다. 훗날 당 조정에서는 가장 훌륭한 복속민 정책으로 이를 거론하기도 하였는데 복국 도모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빈 터를 채우고 지역 개발도 하게 되었음은 당으로서 이중의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의 강인한 정신력과 우수한 체력 등을 바탕으로 이룩된 일이지만, 결국 고구려 유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다. 고구려에서 멀리 떨어진 당의 변경 각지로 흩어진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은 꿈도 꾸지 못한채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었고 이들은 3세대 4세대로 내려가면서 고구려인의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멸망 후 신라로 귀부한 고구려 유민도 많았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익산)에 안치하고 670년 8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금마저의 고구려국은 671년부터 682년까지 8차례에 거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는 강한 자주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영토 안에 건국된 고구려이기 때문에 자주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고구려국의 사신이 일본으로 갈 때 따라가 고구려국의 외교를 감시&감독했다. 이조차 682년 6월을 끝으로 금마저 고구려국의 대일본 외교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했다.

674년 9월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했다. 이는 고려국왕이란 칭호 자체를 부정하여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제거하고 신라에 복속된 소국으로 격하시키려는 조치였다. 뿐만아니라 680년 3월 안승과 신라 왕실의 여인을 혼인시켰으며 안승에게 소판이라는 관등과 왕성(王城)인 김씨 성을 하사하고 수도인 경주로 옮겼다. 안승을 독립국의 왕이 아닌 신라 왕의 신하로 만드는 조치들이었다. 684년 대문의 반란을 계기로 보덕국은 완전히 해체했다.

신라로 간 고구려 유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간 유민들과 달리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통일신라 말기의 분립기에 후고구려와 후백제로 나눠져 후삼국시기가 전개된 것이나,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고려 왕조가 성립된 것은 고구려 유민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요동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영주(榮州)에도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거주했다. 거란, 해, 실위, 말갈이 섞여 있는 기미주였는데 여기에 고구려 유민들도 많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을 전후로 개별적으로 흘러들어갔거나 669년 당이 고구려 유민들 집단적으로 내지로 데려갈 때 중도 낙오한 사람들이었다.

동만주 일대에는 오랫동안 고구려 주민으로 살았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백산말갈 그리고 고구려 영향권 아래 있었던 골돌, 안거골, 호실말갈 등이 고구려 멸망 후 미약해진 상태로 흩어져 있었다. 이들 말갈족 거주지에 당이나 신라, 돌궐 등이 가지 않은 고구려인이 섞여 살고 있었고 동만주 지역에 분산 거주하며 지금의 돈화 지방인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했고 고구려 고지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발해는 국초부터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했다.[13]

발해건국의 결정적인 원인은 고구려 부흥의지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유민들은 강제로 당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신라로 가기도 하였으며 돌궐, 몽골고원으로 또는 요동으로, 동만주나 일본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 전 인구를 69만 7천호 즉 약 348만명 삼국유사에는 21만호 즉 약 105만명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있다. 중국 학계는 당으로 강제로 옮겨진 고구려 유민의 숫자를 50만 까지로 보면서 발해국의 고구려계승성을 부인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패전국이자 멸망하게 된 고구려의 유민들은 여러 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지긴 하였으나 당시 고구려인들은 유목생활을 위주로 하였기에 자신이 살던 지역을 벗어나기에는 힘들었으며 때문에 그 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민들이 많았다. 또한 요동 지역의 유민들 특히 영주성방고구려로 기록된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고구려 계승의지는 발해의 건국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3. 국호[편집]

국호는 (震). 발해라는 의견이 있는데 발해란 명칭은 당이 진에게 내린 이름으로, 원래 이름은 진이 맞다. 진이라는 국호는 《신당서》의 내용에 의거해 측천무후는 속말말갈인 사리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회유하기 위해 각각 내린 진국공(震國公)과 허국공(許國公)이라는 작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대조영 세력이 먼저 자칭한 이후 당이 나중에 이걸 인정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 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게 되어 이 발해를 이후에도 국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즉 발해는 중국이 지어준 이름인데 이런 사례가 따로 없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조선 왕조 이름을 정할 때 명나라에게 화령과 조선 중에 골라달라고 했던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발해라는 명칭의 유래는 지금도 발해(渤海)라고 부르는 바다 보하이 해를 말한다. 참고로 조공 - 책봉 체제에서 국제사회에서 발해 국왕으로 승격한 것은 762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대조영이 진국 대공, 발해 군왕, 신라 대아찬 등 당대 주변 국가들로부터 여러 가지의 관작을 받게 되는데, 모두 한 나라의 국왕보다는 격이 낮은 관작들이다.

확실히 발해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자각이 있었으며 발해라는 이름만큼 고려라는 이름도 많이 썼다. 지배층이 옛 고구려의 잔존 세력이며 처음에 진국을 국명으로 표방한 것이며, 일본국에 발해 국왕이 스스로를 고려 국왕으로 칭한 것을 근거로 발해국이 고구려인의 귀족들과 다종의 말갈을 평민 계층으로 둔 후고구려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위치 논쟁 중인 남경을 제외한 수도들은 전부 고구려의 영역인 동시에 말갈계의 영역이다. 상경 유물들이 공개되어야 하는데, 중국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폐쇄적인 발굴 작업을 하는 이상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발해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당나라와 불편해지지 않지 위해 대 중국 외교용 국호이고 실제 내부 국호는 고려라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당나라만 발해라 부른 것도 아니고 고려의 용례에 비해 발해의 용례가 너무 많다.[14]

4.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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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건국자는 대조영이다. 대조영은 《삼국유사》에 고구려의 구장(舊將)이라고 나와 있다. 덕분에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연개소문의 노비 -> 고구려의 청년 장수 -> 비밀결사 동명천제단의 수장 -> 거란국의 객장 -> 발해의 건국 왕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사망 연도(719년)를 볼 때 고구려 멸망(668년) 후에 태어났거나 당시에 어리거나 20대의 젊은 나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사비우와 더불어 반 당 항쟁을 주도한 대중상(걸걸중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4.1. 건국[편집]

당나라평양성을 함락시킨 이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을 통치하였으며, 고구려의 유민 수십 만을 영주(營州)로 이주시켰다. 다만 호민이라고 칭했던 유력자들은 장안이나 서북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이정기는 이쪽에 포함되는 인물이다. 영주는 일종의 기미주로 이민족 집합소와도 같은 곳이었다.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과 말갈 사람들은 각자 걸걸중상걸사비우를 지도자로 하여 영주를 탈출, 고구려의 고토를 향해 이동했다. 그러자, 보통 당나라라고 하지만 사실은 주나라였던 중국의 신성측천황제가 군대를 일으켜 이를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걸걸중상은 먼저 사망하는데, 걸사비우가 당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도중에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대조영이 고구려 - 말갈 연합 세력의 지휘권을 쥐게 된다. 이후 대조영 집단은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지휘하는 당군을 격파하고, 동모산(東牟山) 지역에 이르러 마침내 나라를 세운다. 자세한 건 천문령 전투 참고

나라 이름은 처음에는 진국(震國)이라고 했지만 713년 당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이래 발해라는 이름이 동아시아 세계에 통용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발해라는 명칭에 대해 발해만에 대한 진출 의지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스스로는 고려(高麗)라고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수록된 문왕의 국서에서 자신을 고려 왕으로 칭했기 때문이다[15].

한국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주몽이 세운 나라가 끝까지 고구려라고 칭했고, 고려는 왕건이 나라를 세우면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고구려 스스로가 장수왕 즈음부터 정식으로 고려를 칭했다는 설이 상당히 인정 받고 있다. 그 때부터 중국 측 기록에 '고구려'가 사라지고 '고려'로만 기재되기 시작했고,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중원고구려비에도 국호가 분명히 '고려'로 기재돼 있다. 당장 궁예가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 이름을 흔히 '후고구려'라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라고 했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것은 사실 원상 복구인 셈이었다. 아무튼 '고려'는 왕건이 왕이 될 때 느닷없이 처음 등장한 이름이 아니다. 왕건의 나라를 고려, 궁예의 나라를 후고구려, 고주몽이 세운 나라를 고구려라고 구분해서 부르는 관습은 고려 시대 중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태봉 참고.

4.2. 영토 확장[편집]

1대 고왕은 최초 근거지의 주변 지역을 장악해 나갔는데,구체적인 세력 범위는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과 북만주에 대한 영토는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건국 초기 신라는 대조영에게 겨우 대아찬 관등을 수여하며 우호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 이 내용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16]에만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대아찬이라는 직위도 재미있는 것이, 6두품의 승진 상한이 6관등 아찬을 넘어서는 진골의 품계라는 점이다. 고구려 부흥 운동 시의 고구려 왕족에게 진골의 골품을 준 것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해가 문왕 때부터 고구려의 후계 국가임을 자처하면서 신라와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파악되며, 특히 721년에 신라가 강릉 방면에 장성을 쌓은 일은 발해를 경계한 행동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2대 무왕(대무예) 때는 흑수말갈의 귀속 문제를 두고 당과 갈등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발해 국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온건론자인 발해왕의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긴장이 고조되다가 결국 당나라를 침공하는 데 이른다. 무왕은 산동의 제1 교역항 등주(登州)에 장문휴(張文休) 제독을 보내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단 1회성 습격이기 때문에 곧바로 회군했다. 또 무왕은 해(奚)족과 연합해 요서 일대를 공격하여 마도산 전투에서 이겼으나 당군의 방비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회군했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연합으로 발해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이 때 신라군은 겨울에 북정(北征)을 감행한 탓에 교전은 하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애초에 발해는 신라 방면으로 본격적으로 확장 의지를 보인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까지 당나라와 대립하다 발해의 등장으로 겨우 화해한 신라 입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공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한편 신라도 발해에 그다지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고 보인다. 발해와 급격히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것이 그 이유다. 이렇게 당나라와 접전을 벌이는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발해의 당나라식의 주부현제 등 명칭에 대한 수입이 본격화되었고 발해 내에 지방 지역의 통치도 일원적인 주부현제로 편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4.3. 혼란과 극복[편집]

3대 문왕(대흠무) 사후 약 30년 간 4대 국왕인 폐왕부터 9대 국왕인 간왕까지 왕이 6번 바뀌는 혼란기가 지속되다가 10대 국왕인 선왕(대인수)이 즉위함에 따라 혼란기가 진정되었다. 선왕 자체가 고왕 대조영의 직계가 아니라, 그 동생 대야발의 후손이다. 발해 왕위 계승이 얼마나 복잡하고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어째 고구려의 초기(차대왕 ~ 신대왕)와 쇠퇴기(안원왕 ~ 양원왕)가 생각난다.

4.4. 전성기 (해동성국)[편집]

선왕은 정복과 내치에 힘썼으며, 당나라와 화친을 맺어 그의 치세동안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다. 이 시기에 흑수말갈이 비로소 발해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요동 지방을 지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이때 신라와 국격을 둔 논쟁이 벌어졌는데 빈공과 합격자 순위(등제서열 사건), 사신의 대우(쟁장사건)에 있어 발해와 신라간 경쟁이 일어났다. 밑에 나오는 최치원의 글도 그런 문제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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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주요 교역로


우리가 흔히 발해의 지방 제도에 대해 배울 때 보게 되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제도 선왕 때 완성된다. 그러나 행정 제도의 완비가 고구려, 말갈인들의 완전한 융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갈인들은 심지어 841년 일본에 파견된 사신에도 말갈 추장으로 추정되는 대수령 65인이 따로 동행할 정도로 독립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둘은 발해 멸망까지 끝내 융합하지 못했다. 이 대수령을 편입과 이탈을 반복하며 발해 멸망 후 여진족으로 재편성된 흑수말갈로 이해한다면 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실질적인 행정 구역을 의미하는 주현의 정확한 규모는 전해지지 않으나 일부 남아있는 이름으로 추정해 보건대 62주 아래에 약 200개 ~ 250여개 현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5. 쇠퇴[편집]

그러나 840년대부터 국력이 다시금 쇠퇴하기 시작해서, 위구르를 멸망시킨 키르기즈족보다 그 대접 수위가 아래로 내려간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위구르가 발해보다 국제적 위상이 높았는데, 그 위구르를 멸망시킨 키르기즈는... 어차피 키르기즈도 얼마 못 가 거란한테 망하여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10세기의 1/4을 간신히 넘기고 발해는 망한다.

4.6. 멸망[편집]

발해는 9세기 들어 당(황소의 대반란, 874년 ~ 884년)과 신라(후삼국 분열)의 몰락 분위기에서도 큰 쇠퇴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17] 15대 왕(인선)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파탄난다. 단 15일만에 요(遼)나라 요 태조 2번째 황자 야율요골(耶律堯骨)이 이끄는 기병대에 상경(上京)이 함락된 것. 다음은 《요사》의 발해 멸망 관련 부분이다.

天顯元年春正月己未, 白氣貫日。

12월 을해일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이른바 두 일 중에 하나는 마쳤지만, 발해와 대대로 원수 진 것만은 설욕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안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병력을 일으켜서 발해를 대대적으로 친정했다. 황후,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이 모두 따랐다.[18]

- 윤월 임진일에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를 올렸다.[19]
- 임인일에 오산(烏山)에서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20][21]
- 기유일에 살갈산(撒葛山)에 머물렀는데 귀전(鬼箭)을 쏘았다.[22]
- 정사일에 상령(商嶺)에 머물렀는데 부여부를 포위했다.[23]

- 천현(天顯) 원년(926년) 봄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24]
- 경신일에 부여성을 손에 넣고 그곳의 수비하던 장수를 죽였다.[25]
- 병인일에 석은(惕隱) 안단(安端), 전북부(前北府) 재상 소아고지(蕭阿古只) 등에게 명령을 내려서 1만 기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대인선 측 늙은 재상[老相]의 병력을 만나서 깨뜨렸다.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耶律堯骨), 남부(南府) 재상 야율소(耶律蕭), 북원(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사녈적(耶律斜涅赤), 남원(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질리(耶律迭裏)가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했다.[26]
- 기사일인선이 항복을 청했다.[27]
- 경오일에 홀한성(忽汗城)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28]
- 신미일에 대인선(大諲譔)이 흰 옷을 입은 채 새끼줄로 몸을 묶고 흰 양을 끌며 관리 300여 명을 데리고 나와서 항복했다. 황제는 두터운 예로 대하고 그들을 풀어줬다.[29]
- 갑술일에 발해의 군현에 조유를 내렸다.[30]
- 병자일에 근시(近侍) 강말달(康末怛) 등 13명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서 무기들을 수색하도록 했는데, 수비병에게 해를 입었다.[31]
- 정축일에 대인선이 다시 모반해서 그 성을 공격해서 깨뜨렸다. 성 안에 행차했다. 대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명령을 내려서 경비병들로 하여금 대인선 및 그 족속이 나가도록 했다. 제사를 올려서 천지에 알렸다. 다시 군중으로 돌아왔다.[32]

- 2월 경인일에 안변(安邊), 막힐(鄚頡), 남해(南海), 정리(定理) 등의 부 및 여러 도의 절도사, 자사들이 내조하자,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얻은 재물을 장병들에게 내렸다.[33]
- 임진일에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천현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사신을 보내 발해 평정한 일을 당에 알렸다.[34]
- 갑오일에 홀한성에 행차해서 창고의 물건을 검열하고 따른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내렸다. 해(奚)의 부장 발로은(勃魯恩), 왕욱(王郁) 및 회홀(回鶻), 신라, 토번(吐蕃), 항(項), 실위(室韋), 사타(沙陀), 오고(烏古) 등이 정벌에 따라서 공이 있었기에, 후한 상을 내렸다.[35][36]
- 병오일에 발해국을 동단(東丹)으로, 홀한성을 천복(天福)으로 개칭했다.[37]


『遼史』卷2「本紀」第二 ‘太祖’下


"병인일… 포위했다" "기사일… 항복"에 주목. 0병인, 1정묘, 2무진, 3기사, 딱 사흘 걸렸다.

발해의 허망한 멸망은 한국 고대 사학계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발해에 대한 기록 자체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에 강성했던 발해가 왜 그리도 허망하게 망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그 큰 나라가 단지 보름만에 멸망한 것을 두고 불가사의라 여겼는데, 일단 중앙 귀족층의 분열과 요의 기동성을 이용한 수도 공격을 이유로 삼았으나 사료 부족 등의 문제와 겹쳐 명확한 규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멸망하기 수 년 전에도 빼앗겼던 요동 지방을 되찾는 등의 모습으로 보아 귀족층의 분열보다는 갑작스러운 수도 공격에 멸망했다는 이론에 더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38]

국가 존속 기간이 228년으로, 한국사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속 기간이 짧은 편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왕조 평균 존속 기간이 대체로 긴 편이었던 한국사의 왕조치고는 짧은 것.[39]

5. 멸망 원인[편집]

5.1. 백두산 분화설[편집]

이 설은 일본에서 화산학자들이 일본의 지층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의 화산재를 발견하면서 이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기된 학설이었으며, 1990년대 말 ~ 2000년대 쯤 KBS에서 이에 대해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되기도 하였기에 인지도가 있던 학설이었다. 한때 학계에서는 몰라도 고대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수준에서는 꽤나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가설이다. 발해의 멸망 시기와 백두산의 대폭발 시기가 맞물린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힘을 얻기 시작했다. 실제로 발해의 5경이 모두 백두산에 인접해 있어 백두산 폭발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의 백두산 대폭발은 비공식적으로 역사 시대 이래 최대의 화산 폭발로 추정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분출된 화산재는 한반도 전역을 1m의 두께로 덮을 만큼의 양이었다고 한다. (출처 :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백두산 서부에서 대규모의 화산 쇄설류가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의 땅을 통치하지 않고 폐현시킨 것도 파괴의 정도가 심각하여 땅을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아서 이 학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해 사실상 기각되었다. 가장 큰 반론은 동아시아 3국 어디의 사서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서>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이기 때문에 은폐했을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화산 폭발이 발해 이민을 받아 준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전혀 기록이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한편 밑에 서술된 것처럼 대부분의 화산재가 동해와 일본으로 날아가 거의 영향이 없었을 수도 있다.)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전에 일어났더라도 실제로는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연구에 의하면 백두산 대폭발은 겨울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겨울에는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화산재 대부분이 동해와 일본으로 날아갔고 상경용천부 또한 백두산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에는 거리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최근 백두산의 화산재와 기록이 존재하는 일본 고대 화산의 화산재와 시간대 비교를 통한 연구에 의하면 발해 멸망이 926년 1월에 발생했는데 백두산 분화는 969년(± 20년)에 일어났다고 추정되어 이 학설은 더욱 힘을 잃었다.

물론 매우 젊은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그 정확도에 대해 아직 논쟁 중인 부분이 많아서, 아직 정확한 연대 측정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었으며, 그 근거로는 고정밀 연대 측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Ar-Ar 연대 측정법도 최근에 일어난 지질학적 시간을 기록하는 데 신뢰도가 비교적 낮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U-Th-Ra 비평형, Cl, He, Be 등의 노출 연대도 젊은 암석에 사용되지만, 각자 암석의 환경에 따라 문제점이 존재한다. 젊은 암석의 연대 측정은 오늘날 지질학의 연대 측정법의 화두 중 하나이다.

다만, 많은 정밀 연대가 926년 이후의 연대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의 멸망과 관련이 없을 것 같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말의 의심조차 잠재우는 최근 연구가 공개되었는데, 무려 오차를 3개월로 줄여버린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 공개한 추정 연대는 946년 말. 고로 발해 멸망 이후 20년 뒤에 화산 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관련 연구 기사
해당 문건 번역

이 분화로 인해 화산호(천지)가 형성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어쨌거나 발해 멸망 후 백두산 근방의 발해 잔여 세력들이 부흥 운동을 열심히 펼쳤다는 점에서도 발해 지배층의 장악력이 결정적으로 와해된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보다 약 20년 뒤라고 하지만 폭발 전 작은 지진이나 자연 재해, 이변들로 민심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발해의 왕위 계승도 혼란했고, 말갈과의 갈등도 추측되는 상황에서 발해의 중심지인 목단강, 두만강 유역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백두산과 그 인근의 징조들은 설상가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딱히 근거가 없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들, 그러니까 발해 부흥 운동, 거란의 만주 통치 장악력 미흡, 여진족의 침체기 등에는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추론하는 것은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몇 차례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하면서 그 뒤로 동만주에서 새 나라가 일어나기까지는 200여 년의 시간이 걸린 것도 화산 폭발과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도 강제 이주에 의한 것이든 자연 재해를 피한 것이든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

5.2. 지배층의 내분설[편집]

발해 왕들의 기록이 안습하기 때문에 추정에 그칠 따름이지만 왕가를 포함한 귀족층의 내분도 멸망 원인으로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발해 이전에 거의 나라가 망한다기보다는 세계 멸망을 맞이한 듯한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나라 공격 한참 전부터 고위층을 비롯한 망명 행렬이 이어지고 있음이 나타나는데, 이를 요동 전역이 장기간 유지된 후유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5.3. 수도 급습설[편집]

가장 유력한 설 중 하나로 제1 방어선으로서 발해의 전력이 집중된 요동 전선을 우회하고 발해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여부를 급습, 그곳을 함락시킨 다음 발해의 정규군이 전력을 정비하기 전에 상경용천부로 진격하는 속전속결 방식으로 그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며 개전부터 대인선의 항복까지 소요된 기간을 발해 멸망 기간과 비교해 보면 제일 그럴듯한 이론이다.

고대의 동아시아의 전쟁은 국경에서 곧바로 수도까지 진격하는 형태로 벌어졌기 때문에 방어 측의 병력 집결이 늦으면 그대로 끝나는 일이 왕왕 있었다. 고대의 왕정 중앙 집권제 국가에서는 수도에 권력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각지에서 걷은 재화가 모이면서 경제력이 집중되었다. 그러한 경제력과 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병사들을 동원하고 월급을 주던 수도가 털려버리면 군대 입장에서는 더 이상 왕실을 위해 싸울 명분도, 실리도 없어져 버리므로, 그때까지 집결하지 못해서 승산을 확보하지 못한 잔존 병력들은 설령 총 규모가 공격군과 대등, 혹은 그 이상일지라도 단숨에 공중 분해되거나 심각한 사기 저하, 탈영 등으로 와해되어 조직적 저항을 할 수 없게 된다.

고구려나 백제 멸망 때의 나당 연합군도 수도인 사비, 평양으로 어택땅 하는 경향을 보인다. 거란은 이 전술을 고려와의 전쟁 때도 써먹는다.[40] 고대 뿐 아니라 현대전에서도 행정, 군정의 수뇌부는 주로 수도에 위치해 있고 이곳이 급습당해 기능을 상실하거나 적에게 잡혀버리면 국가, 전쟁 운영에 매우 치명적이다. 즉,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란때 수도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정부가 통째로 퇴각해버리는 건 매우 유효한 전략이다. 유독 우리나라 대중들에겐 임진왜란 때, 선조의 도주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심하게 폄하되고 수도에서 죽을 때까지 싸웠어야 한다는 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런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 단 이러한 전략은 중앙 정부에게 이른 시간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대신 대다수 귀족층이나 지방 세력이 그대로 남아 점령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부흥 운동 또한 자주 벌어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는데, 실제로 발해의 유민들은 멸망 후 200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이른바 발해부흥운동을 펼쳐 나갔다. 패망 후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고구려와 백제도 이와 비슷하다.

5.4. 말갈과의 대립설[편집]

발해가 고구려 유민 + 말갈 + 기타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나온 설.

발해 말기 이들이 들고 일어나 안그래도 혼란한 발해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켜 최종적으로 발해 멸망에 지대한 기여(?)했다는 설이다. 말갈이 끝내 발해에 융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설. 다만 이 말갈을 국가 내의 하부층으로 인식해서 내부 분열로 보느냐, 아니면 사실상 소화 불량에 걸려서 자력으로 이탈한 흑수 말갈로 이해해서 배후의 위협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국가 구성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6. 멸망 이후의 정세[편집]

6.1. 발해 멸망에 대한 고려의 반응[편집]

고려는 거란 침입에 따른 발해의 구원 요청을 무시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발해와 고려가 적대적 관계를 맺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신라 때부터 발해와는 건국초기를 제외하면, 전쟁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고 삼국시대에 삼국이 얼마나 자주 전쟁을 했는지 감안해보면 두 나라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관계에 있었다.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에게 밀리고 간신히 휴전 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므로 발해에 군사를 파견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고려는 발해 멸망 이후 많은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이는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입은 엄청난 손해를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934년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바 있다. 실제 대광현은 왕씨 성을 하사받아 고려 최상위 귀족 계층으로 편입되었으며, 발해 왕가 후손인 대도수여요전쟁에서 활약한다.

한편 고려에서는 스스로를 고구려를 이었다고 하여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원수처럼 보았다. 실제 고려 태조 왕건은 그 나라를 '본래 우리와 친척인 나라(本吾親戚之國)'라고 표현할 정도로 발해를 친근하게 여겼다. 발해에 대한 동족 관념에서 비롯된 왕건의 반 거란주의는 거란의 사신이 가져온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전부 아사시키고, 사신들은 전부 유배보낸 것(만부교 사건)으로 극명히 표출되었다.[41]

이러한 고려의 대 거란 적대 정책은 발해에 대한 친근감이라든가, 자국에 투화한 발해 유민들을 국가 체제에 통합하기 위한 실리적인 목적 외에, 지배 계급의 화이론적 세계관이 적지 않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거란과 같은 북방 민족인 여진족인면수심이라며 경멸한 바 있고, 훈요 10조거란에 대한 경계를 당부한 부분에도 발해를 멸망시킨 사실에 대한 언급 없이 '짐승의 나라(禽獸之國)'라는 원색적인 비난의 표현만 나타난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발해 멸망 이후, 계속된 발해부흥운동에 대해서도 고려 내부에서는 도와주자는 의견과 무시하자는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등 통일되지 않은 성향을 보였고 결국 서너 차례의 유의미한 발해부흥이 있었음에도 고려는 단 한 번도 난민을 받는 것 이상의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고구려의 정통성 승계 문제에 현실적 국제 역학 질서, 막 통일된지 얼마 안되는 고려의 내부 통제 문제 등의 여러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

발해는 북방의 이민족인 거란에게 멸망하였고, 발해 스스로가 편찬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에 언급된 것을 제하면 한반도 국가의 관찬, 사찬 사서의 서술 범위 밖에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명되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에 이르러 체제에서는 자국사로 인식하지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사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빈도가 늘었다.

6.2. 발해부흥운동[편집]

발해 멸망 후 발해 부흥 운동을 일으킨 지역이 몇군데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대부분 진압당했다. 한편으로 이 점은 요가 중앙부터 공격해 발해를 무너뜨렸다는 근거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로도 200년간 부흥 운동이 벌어진다는데 의의가 있다. 항목 참조.

7. 정치와 행정, 군사[편집]

7.1. 정치제도와 조직[편집]

발해의 정치제도 성립기는 초대 고왕 때로 정치면에서 조직을 정비할 여유는 없었고, 당의 공격 등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안보적인 노력에 힘을 쏟고있었다. 본격 정비기인 제2대 무왕 대무예(719~737)때엔 군사적인 면에 집중하였으며 제3대 문왕 대흠무(737~793) 때를 걸치며 전국 5경 15부 62주, 발해국왕으로 책봉호 높아짐, 당과의 관계 호전, 내치에 전념으로 정치제도를 완비했다. 문왕 서거 후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제10대 선왕인 대인수(818~830)때 왕권의 안정을 되찾으며 정치제도를 완성시켰다.[출처]

발해는 관제를 편성(3성 6부 1대 7시 1원 1감 1국) 할 때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모방하였으나, 그 명칭을 바꾸어 그들만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각 관부의 기능은 실제로 당나라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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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3성(省)으로는 정당성(政堂省), 선조성, 중대성이 있다. 정당성은 당의 상서성에 해당하는 곳으로 발해의 모든 정령(政令)을 집행하는 최고의 행정 서무 기구였다. 3성이 형식상 분립되어 있지만, 정당성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3성은 기능상 평등하게 분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大內相)을 중심으로 당의 상서령에 해당하는 선조성 수장인 좌상(左相)과 중대성 수장인 우상(右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좌우평장사와 좌우사정사가 있고, 좌사정과 우사정이 그다음에 있었다.
좌사정과 우사정이 거느리던 6부(部)에는 충부,인부,의부/ 지부,예부,신부가 있다.충부는 인사관서이자 6부최고위치였고 인부는 재무 행정의 최고기구이며 의부는 의례,제사,과서,학교 대외관계 주관부서였다. 지부는 군사행정의 최고기구이며 예부는 최고 법률기구였고 신부는 행정부서였다. 발해 6부의 명칭은 충, 인, 의, 지, 예, 신 등 5행의 덕목 명을 따른 것이다.

1대는 중정대(中正臺)로 발해의 감찰 기구이다. 수장은 대중정(大中正) 1인이다. 그 다음은 소정(少正) 1인이다.
7시(寺)는 발해의 중앙부서이다. 전중시에서는 황제의 생활 (음식, 옷, 주거, 수례)을 보살폈고 종속시에서는황제의 친인척에 관한 직무를 맡았으며 태상시에서는 조정의 예의와 제사를 맡았고 사빈시는 외국 사신의 접대와 관리를 맡은 기관이다. 대농시는 전국의 창고와 곡식을 관리하였고 사장시와 사선시에서는 외국 무역품, 재화, 궁중 잔치, 의례 음식 관할하였다.
1감(監)은 주자감으로 귀족 자제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었다.
1국(局)은 항백국으로 왕실 후궁의 명령 전달 및 호위, 일상 생활의 시중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항백국의 수장은 상시(常侍)로서 환관만을 임명하였다.[출처]

7.2. 행정구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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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상경 / 중경 / 동경 / 남경 / 서경) 15부(상경용천부 / 중경현덕부 / 동경용원부 / 서경압록부 / 남경남해부 / 부여부 / 동평부 / 막힐부 / 철리부 / 정리부 / 회원부 / 안변부 / 안원부 / 솔빈부 / 장령부 /) 62주와 3개의 독주주로 구성되었다. 주 아래에는 100여개의 현이 있어 부 - 주 - 현의 3단계 행정 관리 체제를 갖추었다. 부에는 도독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을 두었다. 발해의 이러한 지방 행정 관리 체제는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7.3. 군대 편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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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군사 조직은 당의 16위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위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구체적인 중앙 군사 조직의 역할과 그 운영 원리에 대해서도 뚜렷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발해의 군사 조직은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 해석의 차이에 따라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로 이루어졌다는 10위설과 남좌우위, 북좌우위를 각각 하나로 보고 8위제였다고 보는 견해로 나뉘어졌다. 맹분위, 웅위, 비위가 궁성의 숙위를 담당하고, 남북의 좌우위가 각각 남위 금병, 북위 금병의 역할을 담당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각 위에는 대장군 1인, 장군 1인씩을 지휘관으로 두었다. 각 위의 장군 아래에는 다수의 지휘관이 있었다.

지방 군사 제도에 대해선, 촌장인 수령을 지휘관으로 촌락민을 병사들로 삼는 군사 조직이 촌락을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8. 지리[편집]


발해의 여러가지 지도. 사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고 발해사와 얽혀있는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맞는 지도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만 봐도 발해 연구사 초기에는 연해주 - 아무르강 하류 북만주와 겹치는 발해의 동북방 영역을 넓게 인식했으나 근래에 들어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연해주 -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의 역사를 발해보다 높게 평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꼭 러시아만 그런게 아니라 동북공정을 마무리한 중국, 자신들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연구했던 일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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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는 중국, 러시아의 일부에서 지지. 의외로 중국에서는 발해의 동북이 넓게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발해의 동북이 러시아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뻗쳐 있는 지도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 이유가 발해를 당의 도독부 정도로 보아서(…)이다. 중국은 어차피 발해를 말갈과 동류로 인식하며 말갈이 러시아 방면까지 넓게 퍼젔으니 발해도 도긴개긴이라는 식이다.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 지도는 일본에서 제작되었지만 저런 지도가 일본의 주류는 아니고, 일본에서는 주로 아래 지도에서 요동과 서북한을 제외한 지도가 주류이다. 일본의 교과서나 역사책을 보면 알수있다. 일본은 발해를 말갈의 역사로 보는 편이다.[44] 일제 시절에는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로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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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 현재 한국 교과서에 실려있는 지도.[45] 일부는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이라 하기도 하지만 국사 교과서를 위시하여 대체로 발해의 요동과 서북한 지역 지배를 인정하는 추세이다. 실제로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설정하면 당나라와 신라의 진격이 막힌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특히 요동 지역은 주요 거점이기 때문에 당나라, 발해, 후의 거란이 치열하게 군사적 대립을 벌인 지역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현재의 서북한 지역, 아무르강 유역을 직접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것으로 일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다만 요동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도 그렇고 선왕 이후로는 발해의 통치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발해의 정확한 영토를 판단할만한 사료가 없기도 하지만 당시의 발해가 근대국가와 같은 확고한 국경선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 자체가 매우 낮다. 특히 발해가 위치한 지역의 인구밀도 자체가 워낙 낮아서... 당장 해당 지역에서 중국과 러시아간의 국경조약이 맺어진 것도 청나라 시대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즉, 발해의 영토는 현대와 같이 선으로 구별되는 배타적인 면 형태가 아니라 중심부로부터 파급되는 지배력이 변경으로 갈수록 약해지는 형태였을 것이다. 사료가 발견된다고 해도, 명확한 국경 개념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해석하는 사람 편한 대로 그을 수 있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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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최근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이 발견되면서 영토 범위에는 큰 혼란이 따른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위치가 아무르강 너머의 블라고베셴스크 주변에 있기 때문.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발해인들이 서아무르 유역까지 진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으므로 아무르 강 너머까지 지배 범위가 확대될 수도 있다.[46]

다만 영문 위키피디아 측에서는 확정된 곳[47]만 계산해서 최대 면적을 80만Km2로 보고 있다. 단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40만km2 ~ 60만km2로 본다. 아마 최대 영토와 평상시 영토의 차이인 듯.

9. 문화[편집]

9.1. 발해의 복식, 갑옷[편집]

9.2. 발해 문학[편집]

발해가 ‘북국(北國)’이라면 신라는 ‘남국(南國)’이라 할 수 있다. 두 나라가 함께 있는 시대를 ‘남북국 시대’라고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 부분은 조동일 교수의 책을 참고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현대적인 해석이다. 당시에 발해나 신라, 혹은 당에서 두 나라를 남국과 북국으로 대응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최치원 등이 발해를 북국으로 칭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현대적 해석을 배제하면 사실 단순히 북쪽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남국인 신라에 대응되는 북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이유가 없는 것. 또한 발해 입장에서 신라를 남국으로 칭한 근거 역시 찾기 어렵다. 발해와 일본이 주고 받은 국서가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으며, 당나라 유학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 당나라 문인이 발해인에게 준 시 등도 소중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일컬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고 한문학의 수준을 자랑했지만, 거란족의 침공으로 문헌 자료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 문학 관련 사료는 외국에 전해진 시문과 고고학 발굴의 성과 뿐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발해에도 한자를 이용해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구당서>에서 발해에는 “자못 문자 및 서기(書記)가 있다”라고 한 말이 그 증거이며, 한자를 이용해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쓴 것이 거의 확실시되나 아직 해독되지 못했다. 발해 집터를 발굴했을 때 출토된 기와 등에 문자가 발견되었고 또한 중국 사료에는 당 현종 시절 발해가 보낸 외교 문서를 당 조정이 해독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다가 이태백이 겨우 해독해냈다는 기록도 있다.

발해 문인 중 오늘날까지 작품이 남아 전하는 경우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가 일본 문헌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들이다. 일본에 간 발해 문인들은 자리잡기 시작한 일본 한문학에 상당한 자극과 영향을 미쳤다. 양태사, 왕효렴, 배구, 배정 등의 시가 남아 있다.

사신의 일행에 동참한 승려들의 시도 몇 편이 남아 있다. 발해 문학 작품이 국내에 남은 것은 2편의 비문(碑文)뿐인데,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이다. 이 비문은 변려문의 형식을 갖췄으며, 감각과 표현을 최대한 세련되게 갖춘 귀족 문학의 기풍을 아주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두 비문은 고유 명사나 숫자 따위만 다르고, 다른 대목은 거의 같았다. 고정된 격식을 마련하고 필요한 대목만 고쳐 썼음을 알 수 있다. Ctrl-c, Ctrl-v 의 폐해 아름답게 표현하는 격식을 너무 존중한 나머지 창의력을 잃고 쇠퇴하는 폐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까지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 4판, 1권 참고) 다만 대상이 묘비란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실제로 묘제는 경직되어 있는데, 그게 시대적 차이가 없고 왕족 수준의 고위층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 문학사를 연구하는 교수들 중에서 발해 문학을 우리 나라 문학사로 다루는 이는 조동일 교수가 거의 유일하며, 그 이외는 발해 문학을 다루지 않거나 제외하고 있다. 이것은 발해 문학의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발해 문학 자체가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사에 편입된 공동 문학권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홍라녀 녹라녀 전설은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얼마 안 되는 발해의 전설이다. 영화 무영검의 모티프가 되었다.

9.2.1. 발해 언어[편집]


언어는 역사 문화의 계승관계 확인의 주요 기준이기 때문에 발해가 고구려어를 썼는지, 말갈어를 썼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발해는 그들의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로 불렀다는 신당서의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왕을 일컬어 가독부(可毒夫”) 또는 성왕(聖王) 또는 기하(基下)라 한다. 명(命)은 교(敎)라 한다. 왕의 아버지는 노왕(老王)·어머니는 태비(太妃) 아내는 귀비(貴妃)·장자는 부왕(副王) 다른 아들들은 왕자(王子)라 한다.”『신당서』권219, 북적열전 발해]
이 때 가독부란 최고 통치자를 일컫던 발해의 고유어일 가능성이 높으며 마치 신라의 거서간, 차차웅, 마립간의 호칭과 같은 예다. 그리고 발해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발해의 언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일부 중국학자는 한자의 변용이라고 주장했으나 구당서에 따르면 발해는 자못 문자와 서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 문자와 한자 경전과 서적이 있다는 뜻으로 발해 문자가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한 학자는 발해가 한자를 많이 사용했으니 당나라 말을 썼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 학자의 말을 가정하면, 동아시아가 공통적으로 한자를 사용했으니 모두 같은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그 당시의 유명한 일화를 예로 들자면, 당 조정에서 발해의 서신을 아무도 읽지 못했지만 유명한 시선(詩仙) 이태백만이 겨우 해석했다는 대목을 통해 당의 언어와 발해의 언어는 확연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발해 언어는 ‘말갈어’를 썼는가?
이 부분은 역사민족학적으로 발해 언어 계통을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구당서에 따르면 발해를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 및 서기도 상당히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그 나라가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 등이 있다. 이 밖의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대개 같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말갈을 동이로 보았던 북사에서는 거란과 말갈의 풍속이 같다고 기록했다. 그럼 기록에 따라 고구려와 거란, 말갈과 발해는 모두 같은 풍속인가. 먼저 고구려와 거란과의 관계는 정치와 종족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대부분의 말갈은 고구려의 변방인을 일컫는 말이었기에 고구려와 말갈의 풍속이 같다는 것은 당연한 소리다. 고구려와 말갈을 같이 보았기 때문에 기록에 발해와 고구려와 같은 풍속이라 기록되어 있지 말갈과 같았다는 소리는 없다는 것이 증거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발해 언어를 ‘말갈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때 말갈은 절대 흑수말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발해는 고구려어와 비슷한 풍속을 지녔기에(고구려를 계승했기에) 언어 또한 같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언어와 발해의 언어 사이에는 ‘구결문자’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구결문자는참고이미지] 한자를 쉽게 해독하기 위해 단어나 구절 사이에 들어가는 토로, 차자법 한자를 빌려 고유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런 구결문자나 차자법은 신라를 비롯해 삼국에서도 발견되는 고유어 표기로 발해가 우리 민족의 한 맥락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8]

9.3. 융합된 문화[편집]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토대 위에서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했으며, 말갈인의 토착 문화와 융화되어 이를 바탕으로 발해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는데, 외성과 내성, 주작대로를 갖추었다. 그 안에 궁궐과 절을 세웠는데 궁궐터에서 발견된 온돌 장치, 절터에서 나온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무덤을 보더라도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정혜공주묘는 굴식 돌방 무덤 양식으로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모줄임천장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보다 늦게 만들어진 정효공주묘는 벽돌 무덤으로 당과 고구려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내부의 벽화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발해 초기의 흙 무덤과 출토 유물을 통해 말갈족의 전통도 알 수 있다.

발해에서도 신라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행하여 주요 도시에 절을 세웠다. 수도 상경에서는 무려 10여 개의 대규모 절터가 발견되었고,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많은 불상이 나왔으며, 탑과 석등도 볼 수 있다. 탑은 당나라의 양식을 따라 벽돌로 만들었으며, 그 중엔 무덤 위에 세운 것도 있어 발해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절에 세운 석등 중에는 높이가 6m가 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도 있어 발해인의 힘찬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신라에서는 발해의 이러한 말갈적 특성을 영 좋지 않게 보았던 듯하다. 삼한일통의 자부심이 컸던 신라로서는 고구려의 사직 역시 신라로 통합되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 왕족 안승보덕국이 망한 후 신라에 망명하여 높은 관직과 국성인 김(金)씨를 하사받았고, 그 외에도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귀부하였다.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넘어가자. 때문에 발해에 대해서는 고작해야 오랑캐와 섞인 반(半)야만의 무리, 고구려 조정을 참칭하는 세력 정도로만 여겼다. 화이(華夷)적 세계관의 당대 동아시아에서, 발해와 신라 양국 간 동족 의식은 거의 미미하였던 듯.# 그런데 원래 과거에는 민족 개념이 희미했고 민족 의식을 형성하는 것에 실패하면 유전자상으로는 거의 일치해도 다른 민족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라틴족이나 게르만족 계열 민족들처럼 같은 민족이라도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결국 갈라지게 되어 있다. 심지어 같은 뿌리에서 나왔어도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벌이며 서로를 무자비하게 죽여댄 남슬라브계 민족들이나, 러시아인을 민족적으로 열등하다 생각하는 우크라이나인들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키예프 공국 드립으로 주를 이룬다. 그런데 현재 우크라이나는(...)

9.4. 기타 문화[편집]

부인들은 투기가 심하다. 대체로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의자매)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떼지어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기하는 것을 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창기(娼妓)가 있으며 양인 남자들은 첩과 시비를 두지만, 발해에만 없다.

<송막기문 발해국 中>


특이하게도 고대 국가이면서도 매춘이 없거나 몰래(...) 한 것으로 보인다.

9.5. 건축[편집]

9.5.1. 상경성[편집]

발해의 역사상 가장 오래동안 사용된 발해의 도성이다. 제 3대의 왕인 대흠무가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후 동경 용원부로 일시 천도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멸망때까지 계속해서 약 170년 동안 발해의 도성으로 이용되었다.

전체적인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며, 규모는 1965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동벽은 3,358.5M, 서벽은 3,406M, 남벽은 4,586M, 북벽은 4,946M로 전체 길이는 16,296.5M로 기록되어 있으나, 기록마다 수치가 조금씩 차이가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 기단부의 너비는 약 14M~18M, 상부의 너비 1M~3M 정도이며, 높이는 약 3.5M 이다.[49]
외성의 밖으로는 해자를 돌렸는데, 동벽과 북벽의 바깥쪽에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외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를 세웠던 흔적이 있다.
외성 내부에는 남북과 동서 방향의 도로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체가 바둑판 모양의 방(坊)을 이루고 있다.
중심 도로인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성 안을 동서로 양분하게 되며, 이외에 큰 도로가 남북과 동서의 구획으로 나누어 방을 구성하고 있다.
궁성은 북쪽 중앙 부분에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는 4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중심 구역에 궁전 건물들이 있고, 나머지 구역에 부속 시설들이 있으며, 궁전 건물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황성은 궁성 남쪽에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3개 구역으로 구성된 내부에는 관청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50]

9.6. 발해의 음악과 무용[편집]

1. 발해의 왕립 음악기관

『발해국지장편』에 따르면, 발해국의 음악과 무용을 포함한 공연 활동과 관련된 중앙행정기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의부’는 예의와 제사를 관장하는 육부 중 하나로, 의부의 관리로는 경 1명과 소경 1명이 있었다. 발해의 궁중 의식과 제사에는 의식 음악과 의식 무용이 반드시 포함되었는데, 이러한 공연활동은 의부의 산하기관이었던 ‘태상시’가 관장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상시의 경 1명이 교묘, 즉 하늘의 제사와 종묘의 제사를 관장했다고 전해지는데, 경 1명 이외의 나머지 태상시 관리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태상시는 신라의 음악서와 같은 발해의 왕립 음악기관으로, 제례악 외 발해의 궁중 의식과 궁중 잔치를 위한연례악 등의 공연 활동을 교묘와 더불어 관장하였다.


2. 발해금과 발해교방

1) 발해금

『송사』[51] 131권에서는 ‘발해금’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발해금이 어떤 종류의 현악기였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크게한국 음악 학자의 해석과 중국 음악 학자의 해석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한국 음악 학자의 견해를 보면, 발해금은 악기명대로 발해국의 금으로 해석된다. 옛날에는 악기 이름에 가야금, 신라금, 고려적, 백제적과 같이 국명을 앞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발해의 대표적인 현악기가 금이었다면, 발해금을 거문고로 보는 것이 순리에 맞는다. 거문고가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계속 연주되어 발해악의 대표적인 현악기가 되었으리라는 개연성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 근거이고, 거문고가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일본 조정에서 군후로 불렸으며, 군후를 가르친 고구려 악사와 백제 악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일본 『육국사』에 전해지는 것이 두 번째 근거이다.
하지만 중국 음악 학자 허창린은 발해금이 가야금이나 거문고처럼 현이 많은 치터류가 아니라 류트류인 3현 악기라고 주장한다.[52]허창린의 이러한 주장은 중국 『금서대전』의 험금과 흠금에 대한 기록과 『대악의』의 호로금과 발해금에 대한 간략한 기록에 의거한다.


2) 발해교방

『금사』[53] 39권에 따르면, ‘발해교방’은 발해국의 여자 기생들을 교습시키던 기관이었다. 이렇게 춤을 추는 여기를 교습하던 전문 기관에 발해 고유의 춤이 존재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에서 일본 조정으로 파견된 악사 4명 가운데 고구려 춤을 가르치는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을 만큼[54], 고구려 춤은 고려악의 중요한 공연 종목 중 하나였다. 고구려 유민들이 거문고를 전승해 발해금을 만들었듯이, 고구려 춤을 전승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이렇게 전승된 고구려 춤을 추는 발해국의 여자 기생을 보고 『금사』의 저자가 발해교방에 대해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춤을 계승한 발해 춤의 종목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의 궁중 음악인 아악의 고려악갈래 중에 말갈족과 관련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신말갈 및 고조소, 신조소, 자소리, 박모, 귀덕후 등과 같은 고려악의 무악곡이 발해 춤의 일면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추정은 앞으로 새로 발굴될 고분벽화의 고고학 자료에 의거하여 검증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발해 악기

파일:정혜공주묘 고분벽화의 악기 3종(박판, 공후, 비파).png[55]

1980년 중국 지린 성 화룡현 용수향 룽터우 산에서는 정효공주묘의 고분벽화가 발굴되었다. 정효공주는 발해국의 세 번째 왕인 문왕 대흠무(737~793년)의 넷째 딸이며, 그녀의 고분벽화는 학계에서 발해 악기의 정체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고분벽화에는 3종의 발해 악기가 나온다. 정인갑의 논문에 따르면, 서쪽 벽화에 그려진 그 3종은 ‘박판’, ‘공후’, ‘비파’이다. 정효공주의 비문을 보면 공주는 792년 사망했으므로, 8세기 후반 발해국에서 연주된 악기는 발해금 이외에도 3종이 더 있는 것이다.
정효공주묘의 벽화에 나오는 ‘박판’은 당나라의 속악기 중의 하나인 박판을 수용한 것으로, 주로 관현악이나 춤의 리듬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삼국사기』 악지에 나오는 통일신라악의 박판과 동일 계통의 타악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의 박판은 고구려의 악기를 계승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는 중국 『북사』나 『구당서』[56]에 기록된 고구려 악기 가운데 박판이 없음으로 뒷받침 된다. 즉, 발해의 박판은 당속악의 박판을 발해가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효공주묘의 ‘공후’는 연주자의 몸 쪽으로 안고 연주하는 악기로, 수공후의 일종이다. 다만 벽화상으로는 몇 줄의 수공후인지 알기 어렵다. 벽화의 수공후는 고구려의 수공후를 전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악기 중에 수공후가 있었다는 기록을 가진 『구당서』 29권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효공주묘의 ‘비파’는 벽화 상에서 목이 굽은 것으로 보아 곡경비파, 즉 4현짜리 당비파로 해석된다. 그러나 발해의 비파가 『구당서』의 고구려 비파를 계승한 것인지, 아니면 당나라의 비파를 수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구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비파가 곡경비파가 아닌 5현짜리 직경비파, 향비파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발해의 세 악기를 연주한 음악인들은 머리에 복두를 썼고 도포같은 옷을 입었으며, 허리에는 띠를 둘렀고 검은색 장화를 신고 있다. 발해악인의 이러한 복색은 『구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악공의 복색과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발해 음악인들의 복식은 고구려 악공의 화려한 복식을 거의 그대로 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발해 사신과 발해악

삼국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일본 조정에 파견된 외국사신을 위해 베풀어진 잔치에서 사신의 모국 음악을 연주해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도 그러한 관례에 따라 발해의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속일본기』에는 740년 쇼무 천황이 발해사신을 위해 본국악을 연주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쇼무 천황이 당시 발해 사신 이진몽을 위해 연주하도록 한 본국악은 글자대로라면 발해악으로 해석되지만,[57] 사실 그 본국악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발해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았던 고구려 음악인이 연주한 고려악이었다. 이를 볼 때,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연주되던 발해악은 발해국에서 온 발해의 악사와 악생들이 연주한 음악이 아닌, 삼국 시대 때 일본에 파견되었던 고구려 악사와 악생들이 일본에 남아 연주한 고려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발해악의 음악사적 의의

927년 문화 수준이 낮았던 거란족에게 정복당한 발해는 자국의 음악과 무용 등을 제대로 후대에 계승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이로 인해 발해 음악사는 한국 음악사의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발해국의 역사를 기록한 독자적인 문헌이 우리나라에 하나도 전해지지 않은 관계로, 중국과 일본 역사서의 단편적인 기록에 의거해 발해의 음악과 무용의 극히 일면만을 여기에서 서술할 수 있었다. 학계는 언젠가 새로이 발굴될 고고학 자료가 발해의 음악과 무용에 대해 더 알려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9.7. 발해고분[편집]

발해 고분은 첫 도읍지였던 중국 길림성 돈화 (中國 吉林省 敦化)를 비롯하여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중국에서는 57개 고분군에서 1,700여 기를 확인하고, 600기 정도를 발굴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함경도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21개 고분군에서 1,600여 기를 확인하고 100여 기를 발굴하였다. 또 연해주에서도 2개 고분군에서 5기를 발굴하였다(이상 1999년 기준). 주요 고분군으로는 돈화 육정산(敦化 六頂山) 고분군, 평안 삼능둔 대주준 홍준어장(寧安 三陵屯·大朱屯·虹鱒魚場), 장용 용두산 북대(和龍 龍頭山·北大 )고분군, 안도 동청(安圖 東淸) 고분군, 해림 산저자 양초구 (海林 山咀子·羊草溝) 고분군, 영길 양둔 대해맹 사리파 (永吉 楊屯 大海猛·査里巴) 고분군, 유수 노하심 (楡樹 老河深) 고분군, 북청 평리(坪里) 고분군, 화대 정문리(旌門里) 창덕 고분군, 청진(淸津) 부거리(富居里) 고분군, 연해주 아브리코스(Abrikos) 고분군 등이 있다.

무덤 양식에는 돌무덤, 벽돌무덤, 흙무덤이 있다. 돌무덤은 다시 돌방무덤(石室墓)·돌덧널무덤(石槨墓)·돌널무덤(石棺墓)으로 나뉜다. 그러나 돌방무덤과 돌덧널무덤의 분류에는 천장시설의 유무, 널길(羨道)의 유무, 4벽과 천장의 축조순서 등으로 연구자마다 기준을 달리하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는 3가지 돌무덤 전체를 막연히 돌무지무덤(積石墓)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쌓는 방식은 원래 고구려적인 전통인데, 특히 주축을 이루는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墓)은 고구려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혜공주 무덤이 있다.

  • 정혜공주묘
    정혜공주묘는 육정산 고분군에 위치하며 1949년에 발굴된 것이다. 육정산 고분군은 2개의 지역으로 구분되며 제1고분군에 30여 기, 2고분군에 약 50여 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들은 발해의 구국 전기 왕실의 무덤으로 인정된다. 정혜공주묘는 발해 왕실의 무덤군으로 추정하는 2고분군 내에 있다.
    약간 경사진 지면을 반반하게 고른 후, 지하에 묘실을 축조한 것으로 묘실, 연도, 묘도로 구성된 단실묘의 봉토석실분이다. 묘실의 형태는 길이 280~294cm에 너비는 260~274cm의 약간 길이가 긴 방형의 구조이고, 높이는 바닥에서 정중앙의 천정까지는 260cm의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축조는 현무암과 용암을 이용하여 벽면을 축조하였는데, 벽면은 위로 갈수록 약간 안으로 기울어진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천정은 평행고임의 형식으로 가구하면서 정부에 판석을 덮어 마무리한 형식이다. 벽면은 백회를 발랐으나 이미 탈락되었고, 바닥은 하단에 정방형의 벽돌을, 그리고 그위에 목탄과 모래를 깔고 있다. 연도는 남벽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길이 174cm, 너비 110cm, 그리고 높이 140cm이며, 연도의 천정은 평천정으로 판석을 덮었다. 연도 앞의 묘도는 길이 11m에 너비 245cm로 이루어져 있다. 정혜공주 묘의 굴식 돌방무덤 양식과 모줄임 천장 구조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58]


벽돌무덤은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8세기 후반 무렵부터 상층부에서 수용하였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효공주 무덤과 마적달(馬滴達) 무덤이 있다. 흙무덤은 발해 건국 이전부터 유행하던 말갈 전통에 따른 것으로서 발해 변방지역에서 지속되었다. 유수 노하심 고분군이나 영길 대해맹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한편,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이 결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것도 있으니, 정효공주 무덤은 벽은 벽돌로 쌓으면서 천장은 돌로 평행고임을 하였다. 상경성 부근의 三陵屯 1호묘도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축조하였다.

매장방식으로는 단인장(單人葬), 2인합장(二人合葬), 다인합장(多人合葬)이 모두 나타난다. 2인합장은 부부합장이 대부분이다. 다인합장은 발해 매장습속의 특색을 이루는데, 많을 경우에 17명까지 매장된 예가 있다. 왕릉급에 해당하는 三陵屯 2호묘에서 15인의 인골이 발굴되었고, 大城子 1호묘에서 1·2차장 인골 16인분이 확인되었으며, 동청 1호묘에서는 2차장 인골 17인분이 상하 양층으로 매장되어 있었다. 大城子 1호묘나 大朱屯 1호묘에서처럼 주종관계가 뚜렷이 드러나는 예도 있다. 배장자에는 주인공에 예속되었던 노비(奴婢)나 부곡(部曲)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순장(殉葬)의 유풍으로 볼 수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의 배치상태로 보아 1차장과 2차장이 모두 실행되었으며, 무덤 하나에서 2가지가 혼재된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2차장 인골은 추가장 된 것이다. 1차장의 경우에 나무널(木棺)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직접 묻은 예도 보인다.

초기에는 六頂山 고분군에서처럼 화장(火葬)도 유행하였다. 이것은 시신을 관에 넣은 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우는 방식이다. 이러한 풍습은 중기 이후에 점차 사라진다. 이밖에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서는 사람뼈와 함께 동물뼈들도 출토되었는데, 확인된 동물로는 말, 소, 개가 있다.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도 있었다. 삼릉둔 (三陵屯) 1호묘와 하남둔(河南屯) 고분에서는 봉토 위에서 주춧돌이 발견되었고, 육정산(六頂山) 고분군과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는 봉토에서 기와들이 다수 노출되었다. 무덤 건물은 불교가 성행하면서 탑으로 대체되었는데, 정효공주 무덤과 마적달 무덤은 승려의 무덤이 아닌데도 그 위에 벽돌로 만든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중국학자들이 말갈의 풍속을 계승한 것으로 주장하나, 고구려적인 전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발해왕릉

문헌출처[출처][출처][61][62][63][64]

9.7.1. 정효공주묘[편집]

발해 제 3대 문왕(발해)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756~792년)의 무덤은 중경 현덕부에 자리한 지린 성 화룡현 서고성(西古城)에서 13km 떨어진 룽터우산(龍頭山)의 왕족 묏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발해의 전축분[벽돌무덤]으로 2기의 고분이 벽돌로 축조된 것이 확인되었다.

룽터우산은 남에서 북으로 뻗으면서 약간 만곡된 산의 중간부에 서향으로 전개된 구릉이 있고, 고분군은 이 산의 말단부에 남향한 형태로 남아 있다. 정효공주묘가 위치한 지역은 인위적으로 평지를 조성한 약 2,000km²의 면적 중에 약 100m²를 주변보다 50cm정도 돌출된 형태로 조성하였다. 정효공주묘는 1차 조사 후 북한 학자들에 의해 추가로 묘도 부분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출처]

출토 유물 묘비와 함께 벽화견본기도판, 도용[67], 도금한 동식, 동모식정 등이 수습되었다. 인골도 수습되었는데 모두 31점으로 남녀의 것으로 구분되며 여성의 것이 5점, 남성의 것이 26점이다. 골격에 의하면 여성의 키는 156cm, 남성의 키는 161cm이고, 나이는 대략 25~45세로 추정된다. 여성의 경우는 정효공주로 36세에 사망하였다는 점과 일치하고, 남성의 골격은 발해 무덤이 부부합장이란 점을 근거하여 정효공주의 부군으로 추정한다.[출처]


1) 정효공주 묘의 구조형식

정효공주 묘의 구조 형식은 무덤 외관의 규모는 남북길이 15m, 동서너비 7m이며 방향은 남향으로 방향각은 170도이다. 무덤의 내부는 묘도(墓道), 묘문(墓文), 용도(甬道:복도), 묘실(墓室), 지상탑(地上塔) 등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탑은 이미 무너져 훼손된 상태로 현재 기단만 남아있다. 묘도는 남쪽에 위치하여 길이는 7,1m, 남쪽 너비 5.75m, 북쪽 너비는 3.3m에 이르며 동서 두 벽은 판축되어 있다. 묘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5.5m 떨어진 곳으로부터 계단 형태가 시작되는데 5층으로 되어있다. 묘도의 북쪽 끝에 있는 묘문은 비탈 식으로 길이는 1.6m이며 위에 백회를 발랐다. 묘문의 뒤는 복도로 전체 길이는 1.9m, 남쪽 너비 1.6m, 북쪽 너비는 1.7m이다. 복도는 두 부채형태의 돌문을 세워 경계로 삼아 앞과 뒤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 뒤에 위치한 묘실은 장방형으로 남북길이 3.1m, 동서 너비 2.1m이며 묘실 바닥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는 약 3.4m이다. 묘실의 지붕은 평행고임천정으로 쌓았고, 네 벽은 장방형 벽돌로 엇갈리게 쌓았으며 남쪽 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동, 서, 북의 세 벽은 모두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무덤의 묘실과 복도에서는 벽화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벽화는 12명의 인물을 주제로 하였으며 0.981.17m 크기로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안쪽 좌・우 벽에는 무사가 각 1명씩 마주보는 위치에 그려져 있다. [출처]


2) 정효공주 묘의 벽화

정효공주 묘의 벽화는 묘실(墓室:널방) 동·서·북 세 벽과 연도(羨道)[널길] 안에 그려져 있다. 모두 12인의 인물 벽화이다. 인물들은 그 직분에 따라 무사, 시위, 악기, 시종, 내시 등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연도 뒤편에는 무사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마주하고 있다. 그들은 붉은 술을 단 투구를 쓰고 고기비늘 무늬 갑옷을 걸치고 왼쪽 허리에 검을 차고, 오른손으로 철퇴를 잡아 어깨에 메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묘실 동쪽 벽에는 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머리에 붉은 머리띠를 두르거나 두 날개를 교차시킨 복두(幞頭)를 썼다. 손에는 철퇴, 구리거울, 봇짐 등을 들고 있으며 첫 번째 철퇴를 든 사람은 공주를 경호하는 시위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공주의 시중을 드는 내시들이다. 서쪽 벽에도 네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은 호위병이고 나머지 세 명은 공주의 시중을 드는 악사들이다. 북쪽에는 활을 메고, 화개(華蓋)로 보이는 양산을 들고 있는 두 명의 시종이 묘사되어 있다.


정효공주묘 벽화는 벽돌 위에 회칠을 하고 그렸다는 점과 시위도[71]를 중심 제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당나라 고분벽화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나 사신도, 병풍, 시녀 등이 등장하지 않는 점 등에서 중국의 벽화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시기 당나라 고문벽화가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정효공주묘의 벽화에서 발해인들은 그 형식을 독자적으로 소화해 표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출처]

3) 정효공주묘의 비문

정효공주의 묘지명은 발굴 당시 완전한 모습으로 크기는 높이 105cm, 너비 58cm, 두께 26c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묘비문은 모두 18행으로 728자이며 9자는 손상된 탓에 판독하기 어려웠으나 나머지 719자는 판별이 가능했다. 묘지문의 제 1행은 비문이고 제 2행에서 13행은 서문이며 제 14행부터 제 18행까지가 명문이다. 현재 이 묘지명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정효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유순하고 빼어난 용모를 가진 인물이다. 정효공주는 정혜공주와 마찬가지로 시서와 예악을 즐길 줄 아는 훌륭한 배필로 군자에게 시집을 갔으며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또한 역시 남편이 일찍 죽고 그 어린 딸도 일찍 사망하였는데 묘지명에는 이후 육행을 크게 갖추고 삼종을 지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공주는 대흥 56년(792) 여름 6월 9일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사망 후 정효공주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28일 기묘일에 염곡(染谷)의 서쪽 언덕에 배장되었으며 묘지명을 작성한 날짜는 기록되지 않았다.
발해제국의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묘지명이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서술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한정인은 문적원 같은 곳에 원본을 두고 개인적 신상에 관한 부분들만 수정을 하여 비문을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며 발해 특유의 묘지명 구성방식이 있었기에 아마도 당의 묘지명과 구성상 큰 틀에서는 유사한 형식을 보이지만 내용 구성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출처]



9.8. 사상과 종교[편집]

9.9. 식생활 문화[편집]


발해는 수렵과 목축업을 중심으로 하면서 지리적 조건에 따라 농업, 수산업도 발달하여 다양한 식재료 생산이 가능하였다. 발해의 서부·남부는주로 농업, 동부는 농업·어업·수렵·목축, 북부에서는 주로 어업·수렵·목축에 종사하였고 식재료를 얻기 위한 생산 방법이 이전 삼국시대보다 발전하여 이에 따라 발해의 음식 문화가 발전하였다. 즉 발해의 음식 문화는 삼국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으되 삼국시대보다 한층 더 향상되었다.『발해고(渤海考)』에는 “남해부 다시마, 책성부 된장, 노성 벼, 환도 오얏, 낙유 배, 태백산 토끼, 부여부 사슴, 막힐부 돼지, 솔빈부 말, 미타호 붕어”가 내용으로 농산물, 가축 및 어류 등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또 『신당서』 발해전 에서도 “풍속에 귀하게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새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메주,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육주의 햇솜, 용주의 명주, 입성부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가있다. 과실은 환도의 오얏(자두)과 낙유의 배가 유명하다.“를 통해서도 지역별 발해의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다. 이외에 발해는 활발한 대외 교류속에서 발해의 특산물을 사신 등을 통해 보내기도 했다. 3대 문왕이 일본 쇼무천황(聖武天皇)에게 보낸 국서에 “약홀주도독 서요덕을 통해 가죽과 인삼 30근, 꿀3곡”을 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인삼30근은 현재의 단위로 18kg(1근=600g), 끌 3곡은 541.17L(1곡=10말, 1말=18.039L)에 해당된다. 이는 발해가 상당한 분량의 특산물을 매번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생산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출처]

①식재료

1)육류

발해의 육류 획득은 넓은 삼림 지대에서의 수렵에 의한 것으로, 수렵은 고구려 시대부터 즐겼던 생활 방식이었다. 이러한 수렵을 통해 토끼, 매,꿩, 담비(貂), 사슴, 호랑이, 표범, 말곰(羆), 멧돼지(野猪) 등을 획득하였고, 이러한 획득물은 식용, 의료 등으로 사용했으며 그 외에 수출품으로도당나라와 일본에서 환영받았다. 발해인들은 돼지, 소 등의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특히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는데, 예전의 부여국 자리였던 발해 막힐부의 돼지는 유명했다. 이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돼지를 많이 길렀고, 이는 음식이나 의복재료로도 이용되었다. 『발해국지(渤海國志)』 흑수부에는 “그들은 돼지를 잘 길렀는데, 부유한 집에서는 몇 백 마리나 되었다. 그들은 돼지의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지어 입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발해의 소는 식용이나 농사를 지을 때 이용되었고 양은 938년 발해 후신인 동란국이 양 3만 마리를 남당(南唐)에 수출한 일이 있어발해에서 많은 양을 길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해 솔빈의 말이 우수하여 역사적으로 유명했다. 또 제5차 한·러 공동 연해주 발해문화유적 발굴조사단이 체르냐찌노2 주거유적 발굴 중에 생활 폐기물 유구에서 개고기의 뼈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5] [출처]



2) 농산물

발해의 농업은 서부의 쑹화강, 압록강, 무단강(牡丹江) 유역과 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비옥한 남부의 평야 지대에서 발달하였다. 곡식류는 지리적특징에 따라 달랐다. 기후가 낮고 무상기가 짧은 북쪽 지역은 보리,밀,메밀 등이 주로 재배되었고, 이 외에 조, 콩, 피, 수수 등이생산되었다. 반면기후가 따뜻하고 땅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남부 지역은 벼를 심었다. 책성은 유명한 된장 생산지로 좋은 된장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콩이 필요하였으므로 이 지역의 콩은 품질이 우수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이 시기부터 발해의 주식은 쌀이 되었는데, 노성에서 생산된 벼가 이용되었다.이때 쌀을 이용하여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요사(遼史)』에서 발해인들은 단오 때 쑥떡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발해 유적에서 시루가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발해인들이 떡을 쪄서 먹었음을 알수 있다. 과일은 발해 낙유의 배와 환도의 오얏이 유명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서 영고탑(寧古塔) 지방의 배가 작기는 하지만 맛이 아주 좋았다는 것을 통해서 낙유의 배가 유명했고 오얏은 자두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에서는 집 오얏과 산 오얏으로 구분하는데 집 오얏은 붉은색에 맛이 달고 산 오얏은 약간 시고 수분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채소, 인삼, 잣, 꿀도 생산되어 식생활 재료로 사용되었다. 발해의 채소류 중 유명한 것은 아욱으로, 발해 동북부 지역에서 아욱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책부원구(冊府元龜)』기록에 발해 사신이 925년 후당(後唐)에 인삼과 잣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고, 꿀은 발해 건국 이전부터있었던 것으로 『속일본기(續日本紀)』로 천평(天平) 11년(739) 7월 기록에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면서 꿀을 선물로 가져갔다고 하였다. [출처]

3) 수산물

발해는 동쪽의 바다와 쑹화강(松花湖), 무단강, 헤이둥 강, 우수리 강 및 징보호, 쑹화호 등 많은 강과 하천, 호수들이 있어 다량의 수산물 채취가가능하였다. 이 수산물들은 내수용이나 외국과의 무역품으로 수출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데, 『책부원구(冊府元龜)』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729년에 숭어, 730년에 물개가죽, 738년에 말린 문어를 당으로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대표적인 수산물은 다시마, 숭어(치어), 낙지(석거), 말린 문어, 방해(대게), 교어, 고래 눈, 대모 등이 있다. 다시마의 생산지는 남해(현 함경남·북도 앞바다)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함경도의 특산물로 미역, 다시마가 기록되어 있다. 숭어는 조수가 미치는 강하천의 하류에 사는 물고기로 발해의 동해, 남해, 서해 연안의 강 하류들에서 생산되었고, 방해는 동해에서 나는 붉은색을 띤 큰 바닷게 일종이었다.문어는 738년 발해에서 당으로 100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요 수출품임을 알 수 있다. [출처]

그밖에 수산물을 이용한 저장 음식도 발달하였는데, 포·젓갈이 그것이다. 이 음식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저장이 가능하여 계절에 관계없이 먹을 수있도록 한 것으로, 발해인들의 식생활 지혜를 알 수 있다.[79]


② 그릇


파일:발해의 식기(보시기, 쇠칼, 솥, 단지).png[80]
발해 유적의 집터와 그 주변에서는 발해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기가 다량 발견되고 있다. 돈화시(敦化市) 마권자고성(馬圈子古城),화룡현(和龍縣) 하남둔 고성, 청해토성(靑海土城) 터 등에서는 쇠솥과 쇠칼이, 송산리 무덤에서는 놋숟가락 등이, 상경 용천부에서는 보시기, 단지, 접시, 자배기, 버치, 사루 , 독 등의 질그릇이,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발해 건축터에서도 보시기, 단지, 독, 솥, 쇠칼, 방아확[81]이 출토 되었다. 이를 통해 발해인들의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다.[출처]

10. 외교[편집]

남쪽의 신라(통일신라)와는 그리 친하지도 않지만 삼국시대 때처럼 열심히 싸우지도 않는 평온한 관계를 200여년간 유지했다. 두 나라가 싸울 뻔 한 일이 733년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러 가다가 눈이 많이 와서 못 가겠다는 핑계로 그냥 포기하고 내려간 것, 그리고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때 일본이 발해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인데 이는 발해가 거절했다. 군사적 충돌은 거의 없었지만, 라이벌 의식 같은 건 있었는지 서기 897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하기도 하였고, 당나라에서 신라 유학생들과 발해 유학생들의 신경전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83]

발해 건국 후 발해는 일본과 국교를 맺으려고 하였다. 발해 건국 30년째인 727년 8월에 일본으로 처음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일본으로 가는 루트는 부산 쪽까지 내려가서 대한해협을 넘는 게 가장 가깝고 안전한 루트이다.[84]

발해 2대 무왕은 일본 사신에게 "이 땅은 옛 고구려의 땅이며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으니 발해를 고구려를 대하듯이 하라" 하였으며, 3대 문왕은 자신을 “고려 국왕 대흠무”라 칭했다.

이때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년 동안 발해사 34회, 견발해사 12회 등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다만 상술한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같은 건 거절하기도 했다. 발해 사신단의 주요 목적지는 노토 반도 등 카가 지방으로, 이 지방에서는 이사카와현 누가미마치 유적이나 고마츠 시 시바야마가타에서 발굴된 온돌이 포함된 집 등 발해인과의 교류 흔적이 나타난다. 다만, 상기했다시피 이 교류는 절대 녹록한 것이 아니었는데, 일본 측의 기록을 보면 발해와 왕래하다가 풍랑을 만나자 사람들이 절망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있다.[85]

당나라와는 초기에는 강경하게 나갔다. 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당나라는 발해 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발해의 건국 자체가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박살내고 비로소 성립한 것이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대무예 때에는 당나라 본토 산동성 쪽을 공격하기도 했다. 문왕 때는 평화적으로 문물 교류가 있었으며 서기 762년에 문왕을 발해 국왕이라고 불렀다.

10.1. 발해와 일본의 관계[편집]


발해는 서기 727년인 인안 9년 무왕 시기에 일본으로 첫 사신을 파견한다. 그 목적은 일본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리고 대외적으로 당과 흑수말갈에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일본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사신단은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 고제덕 등 24인의 무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신 파견의 목적이 군사적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신들은 표류하여 도착한 곳에서 일부가 살해되었고 12월에야 수도 헤이조쿄에 당도하여 728년 정월 쇼무 천황을 만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발해의 두 번째 대일 사신은 발해의 당나라 공격 이후 당나라와의 외교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발해 사절단은 선물을 교환하고 활쏘기 대사례에 참석하였으며 발해악을 최초로 일본에서 연주하였다. 이 사절단을 맞이한 통역관은 신라학어(新羅學語)라 불리는 자였는데 신라역관이 발해인들의 말을 일본에 통역하였다는 점에서 발해와 신라의 언어가 비슷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발해의 세 번째 대일 사신은 서기 752년 대흥 15년 문왕 시기에 보국대장군 모시몽을 필두로 파견되었다. 당시 일본은 과거에 고구려가 신하로써 예의를 취했다는 것을 근거로 발해가 일본에 신하로 칭하지 않음을 문제 삼지만 일본에 칭신하였던 고구려는 신라에 세워졌던 안승의 소국 고구려였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사신 파견은 758년으로 신라정토계획을 세우던 일본이 발해를 끌어들이기 위해 신라에 파견했다가 수모를 당하고 돌아갔던 오노노 다모리를 대발해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교류가 이루어졌다. 일본이 발해에 먼저 사신을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발해는 정사인 양승경과 양태사 등을 일본에 보내어 답방했다. 하지만 발해는 당나라의 안사의 난 이후 요동 안정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당나라 또한 발해를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책봉하는 등 발해와 화친하면서 동아시아에 평화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발해는 대일본 사신을 문관으로 교체하면서 신라정벌 계획을 포기는 것을 시사 하였고 일본은 신라정토계획을 주도하던 후자와라노 나카마로가 반란에서 패사하면서 신라정토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일본이 신라정토계획을 세우는 시기에 일본은 다섯 차례 발해는 네 차려 각기 상대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762년 왕신복의 일본 파견 이후 발해의 대일 사신 파견은 군사적 목적에서 경제, 문화적 목적으로 바뀌게 된다. 발해는 325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는 등 경제적 목적을 이루는데 적극적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대신 후지와라노 오쓰구는 발해의 사신을 ‘상여’ 즉 장사꾼 무리라 칭하면서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비판하였고 발해의 경제외교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발해의 사신단을 6년 내지 12년에 한 번씩 파견할 것으로 제한하였다. 하지만 이와같은 경제교류의 수혜를 받고 있던 발해의 수령들과 일본의 귀족들의 반발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발해는 경제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천손국이라고 칭한 것을 일본에 사과하기 까지 할 정도로 경제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발해사신이 가지고 온 모피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치품이었으며 일본 황자가 한 여름에 담비의 모피를 8장이나 껴입고 나타났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밀납, 인삼, 삼채호, 표범가죽을 구매하기 위한 돈의 꼬리표 등 일본과 발해의 적극적인 경제교류를 증명하는 다양한 증거들이 현재에도 전하고 있다.

문장에 탁월했던 발해 사신들과 일본간의 문화 교류도 활발했는데 일본 고유 문자인 가나로 쓰인 일본 대표 장편문학소설 겐지모노 가타리에서 한시에 뛰어난 발해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발해사신과 일본인들간의 문학교류는 발해사신이 오가던 쓰루가의 마쓰바라칸, 노토객원, 고로칸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시를 주고받는 청화라 불리는 연회가 있었다.

838년 견당사가 중지된 이후로 일본의 발해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더욱 깊어졌다. 발해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는 오악, 대당악과 더불어 일본 궁중음악에 포함되었던 발해악이 울려퍼졌다. 발해대사 오효신에 의해 전해진 선명력은 이후 800여년간 일본이 남아 사용되어진다.

11. 한·중·일 역사 논란[편집]

11.1. 건국 주체 문제[편집]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건국 세력이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발해의 족원(族源)을 따지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에서 대조영이 말갈 출신 내지 말갈과 연이 깊은 인물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의 기록은 이렇다. 참고.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의 기술은 이렇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 등은 고구려인이 아닌 속말말갈 출신으로 나중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된 집단에 속하는 것이 된다. 한국에서는 흔히 신당서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구당서의 기록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즉 구당서에는 "말갈족이 주축이 된 나라지만 건국자는 고구려인"이라고 사실에 충실하게 기록한 반면 신당서에는 "말갈족의 나라이며 지배층도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일관성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중 구당서 쪽이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구당서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중국 사학계는 구당서의 문장이 대조영을 '고려인'이라 하지 않고 '고려 별종'이라고 지칭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냥 '고구려인'이라면 굳이 '별종'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사학계는 '별종'을 '다른 종족(異種)'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한다. 백제나 고구려를 부여 별종이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계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수서에서는 백제를 고구려 별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도 충분히 증명되거니와 건국 설화 등을 볼 때 고구려 지배 세력이 부여에서, 백제의 지배 세력이 부여 혹은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최소한 아주 강한 친연성을 가진 일족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별종'으로 표현한 이유가 고구려와의 차별성을 강요하기 위한 표현이 아님은 확실하다.

하지만 구당서의 찬자가 대조영을 고구려의 '본류'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방계'로 취급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조영에 대해서는 단순한 계승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본래(本)' 고려 별종이라고 하여 건국 이전부터 대조영이 고구려와 분리시켜서 볼 수도 있는 어떠한 집단의 소속임을 강하게 시사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구당서의 같은 기사에서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후 모여든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도 '고려 별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최치원이 쓴 글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최치원이 쓰기는 했는데, 신라 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의 형식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臣謹按渤海之源流也。句驪未滅之時。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寔繁有徒。是名栗末小蕃。嘗逐句驪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孼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
발해(渤海)의 원류(源流)는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 만한 부락(部落)으로 말갈(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粟末) 소번(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및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 임조(臨朝) 때에 이르러, 영주(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일컬었나이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원류를 '말갈'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통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불렀다. 선천(先天) 연간[당나라 현종 임자년(서기 712년)이다.]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 서기 719년]에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하였다.


금사(金史)에서 등장하는 발해 관련 기술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
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涅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
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粟末靺鞨,其五部無聞。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績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爲渤海,稱王,傳十餘世。
금(金)의 선조(先)는, 말갈씨(靺鞨氏)에서 나왔다.
말갈(靺鞨)은 본래(本) 물길(勿吉)이라 불렀다.
물길(勿吉)은, 옛날 숙신(肅慎) 땅이다.
원위(元魏 / 후위後魏) 때, 물길(勿吉)은 7부(部)가 있었다.
말하길 속말부(粟末部), 말하길 백돌부(伯咄部), 말하길 안차골부(安車骨部), 말하길 불열부(拂涅部),
말하길 호실부(號室部), 말하길 흑수부(黑水部), 말하길 백산부(白山部)이다.
수(隋)가 말갈(靺鞨)이라 칭(稱)하였는데, 7부는 모두 같다.
당(唐) 초(初)에,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었는데, 그 5부는 듣지 못 했다.
속말말갈(粟末靺鞨)은 처음에 고려(高麗)에 부(附 / 붙음, 종속함)하였는데, 성(姓)은 대씨(大氏)다.
이적(李績)이 고려(高麗)를 파(破)하자, 속말말갈(粟末靺鞨)은 동모산(東牟山)을 보존(保)하였다.
후(後)에 발해(渤海)를 위(爲/다스림)하고, 왕(王)을 칭(稱)하였고, 십여세(十餘世)를 전(傳)하였다.


고려사절요 에서의 발해와 대조영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당 나라 무후(武后) 때에 고구려 사람 대조영(大祚榮)이 달아나 요동(遼東)을 지키니 당 나라 예종(睿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그 뒤에 스스로 발해국이라 일컬으며 부여(扶餘)ㆍ숙신(肅愼) 등 10여 나라를 아울러 다 차지하고 문자ㆍ예악(禮樂)과 관부(官府)의 제도를 세웠다.


고운집에서의 발해의 원류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를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본디 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부락에 불과하였는데, 말갈(靺羯)의 족속이 번성해지면서 율말(栗末)이라는 소번(小蕃)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일찍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따라 강제로 내지(內地)로 옮겨져서 살았는데, 그 수령인 걸사우(乞四羽)와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가 임조(臨朝)할 즈음에 이르러, 영주(營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 기회에 그곳에서 도주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차지하고는 비로소 진국(振國)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당시에 그곳에는 고구려의 유신(遺燼 유민(遺民))과 물길(勿吉)의 잡류(雜流)가 있었는데,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에서 악명을 떨치며 떼로 모여 강도 짓을 하는가 하면, 흑수(黑水 흑룡강(黑龍江))에서 사납게 구는 것을 의리처럼 여기며 기승을 부리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란(契丹)과 합세하여 악행을 조장하다가, 얼마 뒤에는 돌궐(突厥)과 서로 공모하였는데, 만리의 논밭을 김매고 있는〔耨苗〕 세상에서 요동(遼東)을 지나는 사신의 수레를 누차 막더니, 10년 동안 뽕나무 오디를 먹고서야〔食葚〕 뒤늦게 중국에 항복하는 깃발을 들었습니다.
이에 앞서 그들이 읍거(邑居)를 세울 적에 우리에게 와서 이웃으로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추장 대조영이 신의 나라로부터 제5품의 직질인 대아찬(大阿餐)의 벼슬을 처음 수여받은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 선천(先天) 2년(713년, 성덕왕 12년)에 와서야 비로소 대조(大朝)의 총명(寵命)을 받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해지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 역시 발해 건국 세력을 말갈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발해의 기록을 고구려 편이 아닌 "말갈과 발해" 편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新羅古記(신라고기)에, 高句麗(고구려)의 舊將(구장)[여기에서] 祚榮(조영)의 姓(성)은 大氏(대씨)니, 殘兵(잔병)을 모아 나라를 太伯山南(태백산남)에 세우고 國號(국호)를 渤海(발해)라 하였다 한다. 以上(이상) 諸記事(제기사)를 보면 渤海(발해)는 靺鞨(말갈)의 別種(별종)인바, 다만 開合(개합)함이 같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제왕운기는 최초로 발해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인식했다. 왜냐하면 상권은 중국의 역사를 읊었고, 하권은 우리 나라의 역사를 노래하였는데, 후백제 다음에 발해를 언급하여 발해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 분명히 넣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 범례에서 발해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渤海不當錄于我史, 而本爲高勾麗故地, 與我壤界相接, 義關唇齒, 故通鑑備書之, 今從之.
발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나, 본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우리의 국경과 상접하여 의리가 순치지세(唇齒之勢)이므로, 《통감》에서 갖춰 썼기 때문에 이제 그대로 따른다" 《동사강목》, 범례


지배층인 고구려계가 소수이고, 피지배층인 말갈계가 다수였다는 식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일본 사서인 유취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 재당학문승 영충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천명 개별 천황[87] 7년 고려 왕 고씨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그 후 천지진종풍조부천황[88] 2년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화동 6년에 당나라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이며, 주, 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土人)[89]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 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 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 和銅六年受唐冊立.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官驛, 虛虛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日都督, 次日刺史, 其下百姓皆日首領, 土地極寒, 不宣水田,俗頗知書.


사실 이 부분을 단순하게 봐서 그렇지, 이 부분만 봐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영충은 발해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는지, 어느 길을 지나서 왔는지 등이 문제가 된다. 단적으로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와 일본으로 직행하는 항구를 잇는 일본도는 말갈 부족 지역을 관통한다. 상경 용천부 자체가 속말부나 백산부같이 동화가 안된 말갈 지역 인근의 안정화를 위해서 세운 계획 수도이기 때문이다. 즉, 발해 무왕 시대 정도에 이 길을 통과했다면 당연히 보이는 것은 말갈 부족 뿐이다.[90] 아마 일본 사신인 영충이 본 발해의 풍경은 말갈인이 많이 거주하던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 즉 동부 발해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이 고구려 유민의 구성비도 대조영 시기, 문왕과 무왕 시기, 흑수 말갈을 흡수한 이후 등을 모조리 고려해야 한다.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추측해야 한다. 이 단계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유취국사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 중국의 동북공정의 연구 보고서는 고구려 인구를 거의 모조리 당나라로 잡아가서 과거 고구려 영역이 무주공산 지경으로 변했다는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다.[91]

여기에 말갈의 존재가 또 문제가 된다. 애초에 말갈이라는 말이 당대인들이 자신들을 일컬어 사용한 말이 아니라, 부르는 쪽에서 편한 대로 지어 부른 것이어서 범칭, 비칭 등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고구려 내부에서도 동화가 약한 이들에 대해서 말갈이라고 칭했다는[92]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 근거와 배경이 약하다. 그래서 최치원이 사용한 발해 말갈이라는 표현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평이 있다. 또 최치원이 쓴 글도 발해와 신라 사이의 자리 뺏기 논쟁 중에 쓴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나온 것이기에 발해를 깔고 들어갈 필요가 있기도 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영향력 속에서 움직인, 그래서 고구려인과 구별할 수 없는 이들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도 상존한다.

신 / 구당서에, 영주를 탈출할 때 걸걸중상이 걸사비우와 더불어 거느렸던 집단이, 말갈인들이 아닌 고구려 유민으로 나와 있는 것도, 걸걸중상이 말갈계가 아닌 순수 고구려계 사람이었거나 말갈계라고 하더라도 이미 고구려에 동화된 사람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萬歲通天年,契丹李盡忠反叛,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保阻以自固。

만세통천년(萬歲通天年 : 696년)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구당서의 기록에는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라고만 나와 있어 영주 탈주 당시 걸걸중상 - 대조영 계열 지도부의 통솔을 받았던 세력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舍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 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이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신당서에는 보는 바와 같이 그 대상이 고구려 유민(高麗餘種)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공동 지도자였던 걸사비우가 말갈 추장(靺鞨酋)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이끌었다는 해석도 있다. 구당서의 각자 거느렸다[各領]라는 표현을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이긴 하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중국 정사에서 걸걸중상이 이끈 것으로 확인되는 집단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유민이었지 속말 말갈이든 뭐든 말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상의 기록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1.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기 다른 고구려 유민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거나 2.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 집단을, 걸사비우는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거나 둘 중 하나이지, 걸걸중상이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신당서에서 걸사비우에 대해서만 굳이 따로 말갈 추장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걸걸중상이 그와 같은 신분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11.1.1. 말갈 비칭[편집]

위에서 언급된 말갈의 의미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말갈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중화중심의 역사관은 대부분의 이민족은 중국 왕조에서 붙여준 타칭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말갈의 최초 조상은 숙신으로 이들은 진 이전의 종족이다. 이들이 한대에는 읍루였고, 남북조시대 후위에는 물길 그리고 수·당대에는 말갈이라 불린 것이다. [93] 참고
한규철 교수는 말갈이란 종족적인 측면에서 기록상의 말갈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구려와 발해인을 의미하며 고구려와 다른, 현대에 인식되는 전통적인 말갈이란 흑수말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과 피지배계층이 말갈인이었다하여 발해는 고구려를 잇는 계승국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는 중이다. 여기서 대조영은 과연 말갈인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위의 항목에 나와 있는 구당서에서는 이미 대조영을 고려별종이라 칭하고 있듯이 그는 말갈계 고구려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가의 영향을 받아 중화중심의 화이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왕조중심적이고 도성중심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말갈이란 스스로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당이나 고구려 중앙에서 도성중심의 시각으로 고구려 변방인들을 멸시하는 뜻으로 이민족 명칭인 말갈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왕조시대의 국가관은 주로 수도중심이었기에 평양 사람의 입장에서 시골사람들을 이민족처럼 말갈로 불렀다는 것은 요즘 서울사람들이 지방사람을 촌놈이라 멸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당서에서 기록되어 나오는 대조영이 속말말갈이란 것도 그가 고구려 송화강 유역 출신의 시골사람이란 뜻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 도성중심 역사관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당왕이 안시성에 진군하여 치니,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아고구려군과 말갈병 15만을 거느리고 안시를 구하려 하였다. (중략) 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 6천 8백 명을 거느려 항복을 청하고 군문(軍門)에 들어와 엎드려 절하며 명을 청하였다. 당왕이 욕살 이하 관장(官長) 3천 5백 명을 가려서 (당의)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 사람 3천 3백 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상


여기서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고구려군이란 단순히 고구려의 군대가 아닌 평양사람으로 보아야 마땅한데 만약 저 고구려군이 고구려의 군대를 뜻하는 것이라면 "고구려"로 돌려보냈다고 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경순왕 9년, 신라를 고쳐 경주로 했다는 기록을 보아 신라가 곧 경주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 = 평양"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발해의 주민은 발해 건국 30년 전에 멸망한 고구려인들이 그대로 그 지역의 주민으로서 발해인이 된 것이고 그 당시 흑수말갈을 제외한 말갈인이라 불린 주민들은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 아닌 고구려 변방민을 멸시적인 호칭으로 부른 것이다.[94]

11.2. 역사 주체 문제[편집]

러시아와 일본 사학자들은 발해를 강제 이주한 고구려인들의 왕국이며 중국과는 독립적인 정치 체제로 간주한다.

Scholars from South and North Korea, Russia and Japan assert that Balhae was independent in its relations with the Tang Dynasty. Most Russian archaeologists and scholars describe Balhae as a kingdom of displaced Goguryeo people. They do admit that Balhae had a strong Chinese and Central Asian influence.『영어 위키피디아 Balhae 부분』


오히려 발해에 대한 연구 성과를 가장 활발히 내놓고 있는 나라는 좀 뜬금없지만 일본인데, 중국 다음으로 발해와 활발한 교류 관계를 가진 나라(신라는 발해랑 별 교류가 없었다)라는 점도 있겠지만 일본도 은근히 발해가 일본의 조공국이었다는 일본 고대 사서의 기록에 자극받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발해가 조공국일 확률은 거의 없다. 분명히 발해-일본 관계에서 더 적극적인 입장은 발해였지만, 이는 육지로 당과 신라의 국경선을 접하는 발해와 바다라는 장벽을 통해서 한 발 떨어진 일본의 입장 차이 정도였다.

한편, 2005년부터 중국은 옛 상경 성터 출입을 통제하고 발해의 궁성(宮城)을 복원하는 작업을 실시했는데, 2008년 복원이 완료된 상경의 궁성이 발해 궁성인지 당 장안성(長安城)의 궁성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물론 당시 장안성의 구조나 건축 양식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발해의 유물들 또한 당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드러나기 때문에 당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긴 하다. 발해 뿐만 아니라 신라의 금성이나 일본의 헤이안쿄도 당나라장안성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고구려인보다 말갈족이 주체였다고 하더라도, 발해는 중원 국가를 표방하지 않았고, 한족이 주체도 아니었던 나라였던만큼 중국사에 포함될 건덕지란 그냥 말갈족의 후손이 현대 중국의 소수 민족이라는 점 뿐이다. 그런데 말갈 및 그 후손들은 만주에만 잔존하다가 중국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연해주, 한반도, 몽골 지역에도 퍼져 나가 그곳을 영유한 국가의 구성원이 되었던만큼 "말갈은 중화 인민 공화국의 소수 민족인 만족의 선대 집단이므로 '말갈의 역사 = 중국사'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발해인 스스로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있고 설령 말갈족이 대다수고 소수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이미 발해가 한국사라는 논리가 될 수 있다. 당장 소수 지배층인 몽골족이 대다수 한족을 다스렸던 원나라를 몽골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사에도 포함되긴 한다. 또 발해는 유취국사의 내용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주민들이 말갈족이었다는 근거도 사실 매우 드물다. 관점의 차이인 것. 결론적으로 중국이 자국내 소수민족의 역사로서 말갈사를 다루면서 발해를 언급한다면 어느정도 논의의 여지가 있고 학술적 논쟁으로도 큰 문제가 안되겠지만, 애초에 중국사 편입을 노리고 '발해 =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전제하에서 일을 진행시켜나가다보니 논리적 오류가 상당히 많아 학술적으로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고로 한국 사학계는 동북 공정에 반대하며, 다음 사료들을 통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구당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갖고 있다… 고려 국왕 대무예는 감사하게도 열국에 당면하여 여러 오랑캐를 총괄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옛 영역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 받았다. 발해의 대 일본 국서』[95]

일본 천황은 삼가 고려 국왕에게 문안한다… 지금 보내온 글을 보니… 천손이라는 참람한 칭호를 써 놓았다. 속일본기』[96]

11.3. 현재 한중일 3국의 발해 인식[편집]

중국과 일본에서는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식하지 않는 듯하다, 특히 중국의 경우 민족구성을 연구한 논문까지 발표하며 발해를 말갈-여진-금-청 으로 이어지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있다. 다만 밑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봐도 보이지만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은 인정하는 듯하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한국사로 쳐주기도 했다. 그 시대를 '통일신라 시대 혹은 남북국 시대'라고 지칭했다[97].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상당히 중립적인 시각이며 한국과 중국에서 발해가 어느 나라의 역사인지 논란이 많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내용 자체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다만 한국식인 발해로 표기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한편, 중국 측에서 한국 학자들이 발해 유적지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한 일에 대해서는 송기호 교수가 여러 해에 걸쳐 쫓겨난 사례를 언급하는 등 비판했다.

이외에도 서구권이나 터키에서는 보통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보는가 반면, 동구권에서는 중국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중국의 역사로 보는 편이다.

예를들어 영어,프랑스어,독일어등 서구권에서는 발해(Balhae)로 표기하는 반면, 러시아,우크라이나등 동구권에서는 주로 발해의 중국식표기인 보하이(Бохай)로 표기된다[98].

발해는 말갈족 수령 대조영이 건국한 말갈족 나라이다… 일본과 교류 시 스스로를 "고려국"이라고 칭하였으나 학자들은 이 명칭이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고 있다. 중국 바이두 백과』[99]

8~10세기, 퉁구스계 말갈족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다. 일본 goo 사전[100]

퉁구스계 말갈족 대조영 고구려를 계승하며 건국한 나라이다. 일본 세계사의 창문』http://www.y-history.net/appendix/wh0302-088.html|출처]].][101]


다음은 중국의 대표적인 교과서 제작사인 인민교육출판사의 중학교 1학년(初一) 역사 교과서에서 발췌한 발해 관련 내용이다. [102]

파일:중국중학1년역사교과서발해1.png

매우 자연스럽게 발해가 중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밑의 석등탑은 한반도의 양식과 비슷해 보이는데 전문가의 의견 추가 바람

파일:중국중학1년역사교과서발해2.png

주요 내용: 말갈이 건국한 국가이다..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법 높은 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에 왕자를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수도인 상경부는 장안을 베껴 만들었다. 농업 등의 별 시덥잖은 이야기도 다 나와 있으나, 고구려나 한반도와의 관련성 및 계통성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언급이 없다.

일본의 교과서 자료가 있다면 추가 바람.

12. 관련 문서[편집]

13. 발해 관련 창작물[편집]

  • 대조영 - 2006년에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주인공이지만 발해 이야기는 정작 드라마 끝나기 거의 마지막에만 잠깐 나온다.

  • 대발해 - 소설 인간시장으로 유명한 김홍신 작가의 역사 소설.

  • 발해를 꿈꾸며 -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타이틀곡으로 발해를 꿈꾼다는 것은 발해의 땅들을 밟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는 것, 즉 북한과의 통일을 염원하며 만든 노래다.

14. 발해의 자주성[편집]

일반적으로 발해는 한국사의 영역에 속한다는 인식이 약한 편이다. 고구려의 경우는 압록강가의 졸본에서 건국되고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한때 한반도 중남부까지 진출했으며 후반기에는 아예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고, 삼국사기 등의 여러 역사서에서도 한국사로 여겨져 왔지만, 발해는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제외하면 한국사라는 근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발해는 고구려와 달리 남진정책은 대동강 이북까지 진출하여 신라와 접하는 선에서 그치고 신라를 공격하지 않아 한반도에서 발해의 영역이었던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은 당시 남녘 변방으로 취급되었고 발해의 5경 15부 중에서도 4경이 한반도에서 멀지는 않지만 엄연히 외부에 존재했고, 한반도에 속하는 곳은 남경남해부 하나뿐이다. 심지어 남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다.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도 발해는 그냥 방치한 것으로 보이며,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을때 평양성주 금용이 왕건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또 평양은 폐허가 되어 방치되어 있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리고, 유득공의 남북국시대 이후의 역사에서 발해가 한국사에 끼친 영향도 그다지 없었다. 다른 예를 들면 고대의 고조선과 부여도 영토를 되찾는다는 이념을 가진 국가가 건국되거나 훗날의 국가가 국호를 가져와 사용되는 등 재평가를 받았었고 고구려는 발해가 고구려의 '다물'처럼, 백제는 후백제가 옛 영토에 자리 잡으면서 명분상 국호를 따 와 계승하고 신라는 지리적으로는 고려가 계승했고 고려는 또한 고구려의 명칭과 북진에 대한 정신을 이어나갔으며 고려는 조선이 이으면서 또한 고조선의 이름에서 국호를 따왔다. 그렇지만 후대에 대대적으로 발해를 재조명한 국가는 없었다.

역사서에서도 발해를 한국사에서 포용하려는 사서도 있었으나 제외하려는 사서도 있었고, 당시 국민의 상당수가 말갈인이었고 건국자인 대조영 또한 순수 고구려인인지, 속말말갈인지, 순수 말갈인인지 그 혈통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어렵다. 즉, 결정적으로 발해를 계승한 관찬서를 간행한 한반도 정권은 없었고, 그 때문에 현재 발해에 대해서는 발해가 한국사라는 주장 외에 말갈사라는 주장이 대세인 것이다. 무엇보다 삼국도 기록이 적기는 하지만 삼국사기 등의 사서로라도 기록이 존재한 반면 발해도 비슷한 케이스로서 기록이 워낙 적어 어떤 나라였고 어떤 역사와 문화를 지녔는지 자세히 추론이 힘든 상황이다.사실 한국사의 스핀오프라 카더라

15. 둘러보기[편집]

[1] 요동 반도 일시적인 점령[2] (698년 ~ 742년)[3] (742년 ~ 756년)[4] (756년 ~ 785년)[5] (785년 ~ 793년)[6] (793년 ~ 926년)[7] 고구려어, 말갈어[8] 남쪽 축은 당연하게도 통일신라.[9]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문자명왕대의 영토보다 더 컸다는 것은 여러 정황 상 명백하다. 즉 한민족의 최대 판도 시대는 바로 발해와 신라가 존재했던 남북국시대였던 셈.[10] 다만 "대왕"이라는 표현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황상(皇上)만 갖고 발해 군주의 칭호가 황제였다고 볼 수는 없다. '皇'은 칭호가 아니라 단순히 왕과 관련된 것을 나타내는 용어에 쓸 수 있는 문자로 봐야 한다. 조선 시대에 국왕을 '주상(主上)'이라고 불렀다고 하여 국왕의 칭호에 '주'가 들어가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발해 왕에게 '皇'이 들어간 표현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제후보다는 황제와 비슷한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라의 금석문들에도 비슷한 용례들이 보인다. 국왕 본인은 대왕이나 태왕이라고 적어 놨지만 부인은 황후, 모친은 황태후로 적어놓는 식.[11] 한중사 편입 논쟁은 후술된 한·중 역사 논란 항목 참조.[12]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13] 발해의 역사와 문화 - 동북아역사재단 저.[14]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저[15] 다만 이에 대해서는 일본과의 외교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와의 계승성을 내보일 필요가 있어 이 때만 일부러 칭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발해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계승성은 그닥 느끼지 않았고 이 때 고려라고 한 것은 외교상의 수사에 불과했다고 보기도 한다.[16] 북국 = 발해에게 윗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는 표문. 발해와 신라 간 외교 분쟁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발해가 당나라에 자국을 신라보다 외교 의전 상 우위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 당나라가 거절한 것에 관한 내용이다.[17] 오히려 거란의 중심지 요주를 공략해 성공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기록이 적다는 발해 역사에서도 선왕 이후는 기록이 적어도 너무 적기 때문에 쇠퇴 징후가 있었어도 누락됐을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18] 十二月乙亥, 詔曰:「所謂兩事, 一事已畢, 惟渤海世讎未雪, 豈宜安駐!」乃舉兵親征渤海大。皇后、皇太子、大元帥堯骨皆從。[19] 閏月壬辰, 祠木葉山。[20] 壬寅, 以青牛白馬祭天地于烏山。[21] 丁巳, 次商嶺, 夜圍扶餘府。[22] 己酉, 次撒葛山, 射鬼箭。[23] 丁巳, 次商嶺, 夜圍扶餘府。[24] >天顯元年春正月己未, 白氣貫日。[25] 庚申, 撥扶餘城, 誅其守將。[26] 丙寅, 命惕隱安端、前北府宰相蕭阿古只等將萬騎為先鋒, 遇諲譔老相兵, 破之。皇太子、大元帥堯骨、南府宰相蘇、北院夷離斜涅赤, 南院夷離迭裏是夜圍忽汗城。[27] 己巳, 諲譔請降。[28] 庚午, 駐軍於忽汗城南。[29] 辛未, 諲譔素服, 稿索牽羊, 率僚屬三百餘人出降。 上優禮而釋之。[30] 甲戌, 詔諭渤海郡縣。[31] 丙子, 遣近侍康末怛等十三人入城索兵器, 為邏卒所害。[32] 丁丑, 諲譔複叛, 攻其城, 破之。駕幸城中。詔以兵衛諲譔及族屬以出。祭告天地。複還軍中。[33] 二月庚寅, 安邊、頡、南海、定理等府及諸道節度、刺史來朝, 慰勞遣之。以所獲器幣諸物賜將士。[34] 壬辰, 以青牛白馬祭天地。大赦, 改元天顯。以平渤海遣使報唐。[35] 甲午, 複幸忽汗城,閱府庫物, 賜從臣有差。以奚部長勃魯恩、王郁自回鶻、新羅、吐蕃、項、室韋、沙陀、烏古等從征有功, 優加賞賚。[36] 이 기록으로 인해 소수의 책에서는 신라가 거란을 도와 발해를 멸망시켰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의 신라도 발해만큼 혼란스러웠다. 경애왕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살해당하기 1년 전으로, 이미 경상도의 서쪽 절반 이상이 후백제 땅인 시기였다. 후삼국시대의 이전의 잦은 반란은 물론, 후삼국시대로 인해 더더욱 분열이 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상황을 생각하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더더욱 도왔을 가능성은 없다. (군사는 물론 무기나 자원을 보냈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바다 역시 이미 중국 해적은 물론, 신라의 해적, 왜구, 여진 해적 등으로 인해 바다를 통해 거란이나 중국, 발해 등으로 가는 방법도 어려웠다. 이 기록이 오류이거나 왜곡, 혹은 말로만 돕겠다고 하고 실제로는 돕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사신을 보내었을 가능성이 더 있다.[37] 丙午, 改渤海國為東丹, 忽汗城為天福。[38] 사실 고구려도 지배층의 분열이 심하긴 했어도 그래도 약 1년은 버텼다.[39] 예를 들어 중국사 왕조들과 비교하면(후한 이후) 1위 청나라 296년, 2위 당나라 289년, 3위 명나라 276년 다음으로, 4위 요나라보다도 긴 최상위권이다. 물론 송나라도 북송+남송 기간 다 합치면 300년이 넘긴 하지만.[40] 병자호란도 이러한 전술에 조선이 당한 케이스.[41]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중국에서 우호 사절과 함께 한국으로 보낸 판다를 청계천에 묶어 두어 전부 다 굶겨죽이고 사신들은 지방의 교도소에 투옥시키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출처] 42.1 42.2 42.18 42.19 42.25 42.27 42.28 42.31 42.32 42.33 42.35 42.36 42.37 42.41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44]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발해의 국명과 제위한 왕들의 항목을 보면, 영어판과 중국어판에도 한국어 표기가 병기되어 있는 데 반해(단, 중국어판에서는 현재 삭제됨.), 일본판에서는 전혀 적혀있지 않다. 고구려 관련 항목은 한글 표기가 포함되어 있고 한국의 역사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고구려나 현재 한국과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만주와 말갈족과의 관계만 강조하는 서술이 눈에 띄게 보이고 있다.[45] 왠지 대부분의 경우 발해의 북쪽 국경을 랴오허강, 쑹화강으로 삼는다.[46] 만약 이 일대를 영토로 삼은 게 사실이라면 선왕 시기였을 것이다. 선왕은 2년 간의 정복 활동을 하면서 최북단에 있던 흑수 말갈까지 복속시킴으로써 발해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지녔는데, 흑수 말갈 너머 더 북쪽에는 이렇다 할 강력한 집권 체제가 없이 퉁구스 계통의 부족들이 살았으므로 이 일대를 정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왕의 알려진 정복 기간이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인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아니면 흑수 말갈 자체가 알려진 것보다 원래부터 훨씬 북쪽에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정부 차원이 아니라 발해인들이 더 북쪽에 개척해서 이런 유물들을 남겼을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흑수 말갈까지 복속한 상태이기에 진출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47] 위에도 국경에 대해 서술되어 있지만 도시나 요새 같은 것들이 발견된다고 해서 무조건 영토로 포함시키는 것은 어렵다. 고려해야 할 게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 통일 왕조들이나 다른 여러 제국들의 영토도 대체로 비슷한 방식으로 표시한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엄격하게 따지면 지금 세계사 교과서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의 지도는 틀린게 된다. 그런데 중국 통일 왕조를 살펴도 당의 기미주 등은 대체로 영토 면적에서 빠질 때가 많다. 구체적으로 한나라를 보면 https://en.wikipedia.org/wiki/Han_dynasty 실제 통치 지역과 주변 국가나 이민족들을 멸하고 얻은 미묘한(?) 영토가 상당히 다르며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하이난 등은 포함되기도 하고 포함되지 않기도 한다. 다른 나라들 역시 저런 미묘한 영토들이 없는 건 아니니 학계에서 결론을 낼 문제다.[48]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 - 강의자료참고[49] 당시의 규모는 높이 6M, 하부 너비 16M~18M, 상부 너비 6~7M 추정[50]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51]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총 49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52] 이진여(2000), 삼현-발해금, 한국음악사학회,159~174p[53] 중국 이십사사 중 하나로, 금나라에 대한 역사책이다[54] 송방송, 한국음악통사, 일조각, 78p[55] 사진 출처 : 중국의 발해사 연구, 고구려연구재단 편, 353p[56] 중국의 이십사사 가운데 하나로, 당나라에 관한 역사서이다[57] 이진원, 한국고대음악사의재조명, 33~37p에서 본국악이 발해악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58] 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61] 출처 - 六頂山與渤海鎭-唐代渤海國的貴族墓地與都城遺址-(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編著,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7년)[62] 출처 - 발해돌방봉토무덤에 대한 고찰(박윤무, 발해사연구 2, 연변대학출판사, 1991년)[63] 출처 - 발해문화(주영헌, 사회과학출판사, 1971년)[64] 출처 - 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12.31)[벽돌무덤] [67] 陶俑:예전에 순장할 때 사람 대신 함께 묻던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널길] [71] 侍衛圖:무덤 주인을 지키고 호위하며 시중을 드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75] 출처 - 연해주 체르냐찌노 2 옥저·발해 주거유적 :제5차 한·러 공동 연해주 발해문화유적 발굴조사(정석배, 부여:문화재청, 2008)[79] 출처 -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94a), 『조선의 민속전통1(식생활풍습)』, 29p [80] 사진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81] 방앗공이로 찧을 수 있게 돌절구 모양으로 우묵하게 판 돌[83] 당나라 빈공과가 신경전이었는데 빈공과의 최초 합격자는 물론 합격자의 대다수를(자그마치 80%!) 신라가 차지했는데 점차 발해 출신의 합격자가 나오자 언짢게 생각했는데 급기야는 발해에서 수석을 배출하자 신라에서 "발해가 과거에 당나라랑 싸운 거 잊은 거 아니겠죠?"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가령 신라 유학생의 거두인 최치원은 발해를 매우 무시하고 발해에 뭐든지 질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발해 유학생 오소도와 신라 유학생 이동의 경쟁, 그리고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과 신라의 최언위의 경쟁 등의 사례도 있다.[84] 조선 시대의 조선통신사도 대한해협을 통해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날씨가 안 좋고 바닷길이 험해서 고생 고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동해 바다를 건너는 루트로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서기 727년 발해 무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했다.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라고 쓰여 있다.[85] 심한 사례를 하나 들자면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배에 외지인(발해인)이 타서 신이 노한 것이라며 물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었다.[여기에서] 신라고기가 언급되는 것도 주목할 만한데, 대조영을 고구려의 구장이라 표현하고 있다.[87] 덴지 덴노.[88] 몬무 덴노.[89] 한규철은 해당 구절에 대해서 사인(士人)이라고 적은 판본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토착민'이라는 의미가 있어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에 토인(土人)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자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이며, 이 경우 "말갈이 많고 사인이 적다"는 문구는 "피지배층이 많고 관인은 적다"로 말갈은 단순한 피지배층에 대한 멸칭으로 풀이된다고 주장한다. 말갈에 대해 특정 종족이 아니라 중앙의 관점에서 지방민을 촌놈이라는 뉘앙스로 비하해 불렀다는 것.[90] 후기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의 위치 자체가 지금의 흑룡강성 일대로, 새로운 복속 집단인 흑수부 말갈을 다분히 의식한 입지이다. 본래 발해의 초기 수도는 두만강 유역의 중경 현덕부로서 오래 전부터 고구려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91] 발해의 피지배층이 대부분 말갈인이었다는 논리의 가장 큰 반박거리로 꼽힌다. 상식적으로 한 나라의 멸망 이후 모든 피지배층이 적국으로 다 끌려가는 것은 말이 안 됨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문서에도 나와있듯 멸망 당시 추정 고구려 인구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지만, 이 사람들을 모두 당나라로 끌고갈 수도 없을 뿐더러 설령 끌고 간다고 해도 수백만의 난민이 갑자기 중원으로 유입되어 엄청난 혼란만 야기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 지역의 독일인들이 모조리 추방당한 사례가 있긴 한데, 이는 무력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 와서나 가능한 이야기다.[92] 주로 한규철이 말갈비칭설을 주장한다.[93] KTV 특별한 강의 150회 역사특강, 발해의 고구려계승성_영토와 종족. 한규철, 숙신읍루연구(백산학보38, 1988)[94] 참고문헌: 새롭게 본 발해사, 동북아역사재단, 2005[95] 번역본 출처.[96] 번역본 출처.[97] 고구려의 후계임을 자처하고 스스로 중원과는 거리를 두고 독자 국가임을 천명했으므로, 차라리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거나, 한국, 중국 그 어느 쪽의 역사도 아닌 것으로 보는게 더 합당한데, 이 나라를 무작정 중국사로 보는게 별로 신빙성있는 주장은 아니다. 중국 못지않게 역사왜곡 잘하는 일본도 발해사는 한국사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유가 이것이다.[98] 너무 섭섭해 할 것 없다. 러시아는 19세기 말엽까지는 우리나라와 국경조차 맞닿아있지 않았던 나라고, 동구권 국가들도 냉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한국과 아무런 인연도 없었으니, 중국어에서 차용한 '보하이'라는 명칭을 쓰는 건 당연하다. 당장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중국이나 돌궐에서 차용한 말로 유라시아 각국에 알려지면서 티베트에서는 중국어에서 기원한 말인 '케우리'라고 불렀고, 동로마 제국이나 위구르족들은 돌궐에서 차용한 말인 '뵈클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먼 옛날로 갈 필요도 없이, 지금 한국을 가리키는 말인 코리아고려 시대에 한국을 방문한 아랍인들이 부르던 말이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발해를 중국식인 '보하이'라고 부른다고 뭐라 할 건 없다.[99] 출처.[100] 출처.[101] 속말말갈은 신당서에서 고구려에 붙은 자들이라고 기술하고있고, 실제로 수나라 때에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패했다는 기록이 있다.[102]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