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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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관련 자료2.2. 박종철의 사망2.3. 검-경 대립과 부검
2.3.1. 언론에서
2.4. 수뇌부의 사건 은폐 기도2.5. 사건 축소 폭로
2.5.1. 개각 단행
2.6. 사건 이후의 관련자, 가해자들
3. 기념 및 추모 조형물4. 박종철의 죽음 이후
4.1. 전향한 인물들
4.1.1. 비판론4.1.2. 옹호론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5.2. 영화5.3. 그 외

1. 개요[편집]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길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길 바란다.

- 동아일보 1987년 1월 16일자 김중배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중에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1]가 한 말. 이후 장례식장과 시민들이 박종철을 추모할 때 쓰던 구호가 되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학생이던 박종철경찰에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2]에서 심문을 받다가 고문 때문에 사망한 사건.

2. 전개[편집]

2.1. 관련 자료[편집]

2.2. 박종철의 사망[편집]

10.28 건국대 항쟁 진압 이후 의기양양한 전두환 정권은 '반제동맹당 사건'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이하 ML당) 사건' 등의 공안조작 사건들을 만들어내며 소위 '얼음정국'을 조성하던 시기였다. 그런 혹한 속에서 떨고 있을 와중인 1987년 1월 14일,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피해자 박종철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수사관들은 1985년 10월에 터진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3]의 소재를 말하라고 추궁했고, 박종철은 모른다고 했다.

이에 과민반응한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반복했다.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올려 또 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결국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의식을 잃었다. 경찰 측이 부랴부랴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의사를 불러왔는데, 의사의 언론 증언에 의하면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한다. 당황한 수사관들은 사건 은폐를 위해 대공분실 부근의 용산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들은 박종철이 병원에서 숨진 것으로 조작하려 했으나,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기자였던 신성호 기자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데스크에 보고하여 그날 2단짜리 꼭지에 기사가 들어갔다.[4] 이날 기사는 "학생이 남영동에서 죽었다"는 단신이었고, 1면도 아니고 사회면 한구석에 있었는데, 석간 강판 이후 신문이 배포되자 모든 신문사에서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 진위를 물었다.[5] 이후에는 문공부에서 나와 중앙일보에 난입하여 깽판을 치고 갔다(...).

어찌어찌 소문이 퍼져나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 미사 때 내막을 폭로하는 바람에 은폐는 무위로 돌아갔고, 파문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경찰에서는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을 취조하던 중 사망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였다. 그러고는 증거를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려고 서울지방검찰청에 시신 화장 신청을 넣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물고문에 가담한 수사관들은 조한경, 강진규, 반금곤, 이정호, 황정웅 5명이었다.[6]

2.3. 검-경 대립과 부검[편집]

박종철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987년 1월 15일에 방송된 MBC 단신보도.[7]

어제 낮 12시쯤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21살 박종철 군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다가 숨졌습니다. 숨진 박 군은 서울대 민민투 책임자로서 수배 중인 사회복지학과 박종운 군을 숨겨준 혐의로 어제 오전 경찰에 연행됐었습니다. 지금까지 간추린 뉴스였습니다.

... 이어 10시 50분쯤부터 수사관의 심문을 받기 시작, 11시 20분쯤 수사관이 수배된 박모 군(서울대생)[8]의 소재를 물으며 책상을 세게 두드리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 갑자기 '윽' 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 경향신문, 1987년 1월 16일

신성호 기자의 취재를 통해 1월 15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최초로 보도되었다. 이후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달려들었다. 이에 치안본부장 강민창(1933 ~ 2018)은 박종철의 사망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고 거짓 시인을 하는 바람에 이것이 정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 최환의 JTBC 인터뷰.[9]

당시 발표문에 따르면, 박종철은 1월 14일 아침 8시 10분경에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되어 9시 16분경 아침식사로 나온 밥과 콩나물국을 조금 먹다가 입맛이 없다면서 냉수를 몇 잔 마신 뒤, 10시 15분경부터 박종운 군 소재에 대하여 심문 도중에 수사관이 책상을 치자 박종철이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정오 즈음에 사망했다고 한 것이다. 이어 강 치안본부장은 "내가 아는 한 가혹행위는 없었다"며 "먼저 가족들에게 경찰이 결백하다는 걸 납득시키고 부검 결과가 나오면 나중에 떳떳이 전모를 밝히겠다"고 하여 "박 군을 처음 본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오연상 교수를 지칭)가 박 군이 쇼크사로 숨진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물론 훗날 밝혀진 사인은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 더 정확히는, 물에 의하여 익사한 것이 아닌 물고문 와중에 목이 욕조 턱에 눌리면서 질식사한 것. 진짜로 澤(연못 탁) 치니 抑(누를 억) 하고 죽은 것이다. 당연히 이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믿은 사람은 없었다. 이걸 수습한다고 신임 내무부장관 정호용이 한 말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였다. 이걸 해명이라고 들은 여론이 들끓어 올랐다. 이 정호용의 발언이 웃긴 게,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의 최고위직인 특전사령관이 바로 이 정호용인데 그런 사람이 "사람을 어찌 치냐"고 했으니 굉장한 블랙코미디일 수밖에.

발표 전날인 15일부터 밤 9시 5분부터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검사 최환, 형사부 검사 안상수 등의 지휘 하에 부검의로 황적준[10]의 집도 하에[11] 노력으로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12] 이후 다음 날 강 치안본부장은 위와 동일한 기자회견에서 부검 결과 사체 외표검사에서 박종철의 왼쪽 무릎에 0.6cm의 찰과상이 있었고, 오른손 엄지, 검지 사이에 손등쪽에 작은 멍이 있었고, 내시경 검사 결과 오른쪽 폐에 탁구공만한 출혈반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강 치안본부장은 황적준 박사가 "출혈반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전기 충격요법 및 인공호흡을 해도 생길 수 있으며 특별한 치명상은 발견이 안 되었지만 목과 가슴 부위에 피멍이 있었다"고 말했다면서 부검 결과가 나오는 즉시 수사관들을 조사해 잘못이 드러날 시 엄중 처리하겠다고 밝혔으나, 고문 사실은 부인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발표는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의사 오연상[13]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박종철은 병원에 옮기던 때에 사망한 게 아니라 사건 당일인 14일 오전 11시 45분경에 이송 당시 사망한 상태였으며, 자신이 도착했을 때 박종철의 복부는 부푼 상태였고 청진기 진단 결과 복부 등 몸 속에 '꼬르륵'하는 물 소리가 났는데, 쇼크사는 심장마비 뒤에 호흡곤란이 생기므로 쇼크사는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또 그는 자신이 도착할 적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고, 자신은 진료가 아닌 사체 검안서를 썼다고 밝혔다.

아무튼 위와 같은 사건으로 전국민적으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공안부 최환 부장검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진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 것도 진상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최환 부장검사 지휘대로 소견서를 받고 실무를 처리한 것이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박종철 기념사업회 측은 오히려 이것을 부정하는 상황.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섰던 것은 최환 검사였고, 안상수 전 대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건 은폐를 일삼았다는 것. (2011년 3월 시사인 기사) 여하간 그는 96년까지 한겨레 등에 기고하는 등 인권 변호사로서 이름을 남겼으며 지금도 간간이 책을 내고 있다.

사실 검찰부검을 강행한 데는 경찰에 대한 악감정이 한몫 했다는 주장이 있다. 박종철 사건이 발생하기 6개월 전에 발생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때 검찰은 경찰의 요청에 따라 사건을 은폐해야 했다.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봐오던 사람들이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5공 때에는 경찰이 검찰보다 힘이 셌다. 군사정부는 발로 뛰고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접하는 경찰에 직통 연락을 한 탓. 당시에도 여전히 수사권 및 수사지휘권은 검찰에 있었지만, 전두환이 그랬듯이 법이 정직해봐야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독재정권 핵심부는 일선에서 반독재민주화세력을 때려잡는 경찰을 훨씬 총애했고, 검찰은 경찰이 송치한 사건을 뒤치다꺼리하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서 경찰, 검찰, 교정기관 등을 모두 배후조종하고 있었다. 이후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안기부(국정원)의 노골적인 정치개입과 검찰통제가 사라지고 경찰도 민생치안위주로 재편되면서 생긴 권력의 공백을 검찰이 치고 들어가면서 검찰권력이 현재처럼 비대해졌다.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이 관계가 묘하게 어느 정도 역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긴 하지만...

아무튼 검찰 입장에서는 성고문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경찰 뜻대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욕은 자기들이 다 먹었다는 분노가 일어난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분노가 박종철 사건에서의 부검 강행으로 이어졌다는 주장. 그런데 이 주장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환이다.

2.3.1. 언론에서[편집]

이 사건의 최초 보도는 중앙일보 1987년 1월 15일자 사회면에서 나온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하의 2단짜리 기사였다.

경찰에서 조사 받던 대학생 '쇼크死'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 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14]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 학교 측은 박군이 3∼4일 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한편 부산시 청학동 341의 31 박군 집에는 박군의 사망 소식을 14일 부산 시경으로부터 통고 받은 아버지 박정기씨(57·청학양수장고용원) 등 가족들이 모두 상경하고 비어있었다.
박군의 누나 박은숙 씨(24)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부터 박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최근 무슨 사건으로 언제 경찰에 연행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박군은 부산 토성국교·영산남중·혜광고교를 거쳤으며 아버지의 월수입 20만원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형편이다.


이게 어떻게 알려졌는가 하면, 신성호 기자가 취재거리를 찾기 위해 검사실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검찰청 직원이 "경찰들 큰 일이야"라고 운을 뗐고 사건의 냄새를 직감한 기자가 그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척 말에 맞장구를 쳐서 내용을 빼냈다고 한다. 자세한 비화는 이렇다.(출처: 박선욱 씨의 글)

1987년 1월 15일 아침, 대검찰청 공안4과장 이홍규는 실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공안부장 티타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 대학생이 경찰 수사를 받다가 죽었다는군.”
“네? 그게 정말인가요?”
“이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면 안 돼. 다들 입 조심해!”
공안부장은 팀원들에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가슴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매단 듯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회의를 겸해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은, 지나간 여느 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날만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속도감과 아득함을 동시에 느꼈다. 티타임이 끝난 뒤, 10층 사무실로 돌아온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양심의 소리가 격렬히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어린 학생의 죽음을 이렇게 덮어두어도 되는가? 그것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짓 아닌가?’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동안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봐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을 묻어둔 채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윗사람들의 결정에 그냥 따르기가 무척 괴로웠다. 오전 회의를 마친 뒤, 내내 서성이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1분, 1초가 흐를수록 진실의 무게가 태산처럼 자신의 존재를 압도해오고 있었다.
오전 9시 50분, 중앙일보 사회부의 신성호 기자가 찾아왔다. 이 과장은 차나 한 잔 하라며 자리에 앉혔다. 법조계 출입 6년차인 신 기자는 서소문동 검찰청사를 매일같이 드나들어 이 과장과는 오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경찰들 큰일났어.”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 과장이 불쑥 내뱉었다. 뭔가 긴급한 일이 터졌다는 느낌이 꽂혔다. 자칫 서두르다가는 줄기를 놓칠 수 있었다. 그는 상황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경찰들이 요즘 너무 기세등등했거든요.”
신성호 기자는 이날 그가 딥 스로트(deep throat), 즉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익명의 고발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과장은 어제 경찰 조사를 받던 학생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서울대생이라지, 아마? 그 대학생이?”
이어지는 그의 말이 천둥처럼 들렸다. 하지만 신 기자는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디서 죽었대요?”
“남영동이라던가?”
말을 마치자,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바윗돌 하나를 덜어낸 것처럼 후련해졌다.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신 기자의 눈에 언뜻, 살아 꿈틀거리는 기사의 몸통이 보였다. 남영동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의미했다. 남영동은 이 사건의 뇌관이었다.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게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여기에 뇌관을 집어넣으면 어마어마한 메가톤급 문장이 되었다. 그 후폭풍의 범위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었다. ‘남영동에서 조사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것은 곧 ‘고문에 의한 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군사독재 시절의 은유가 직유로 바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신성호 기자는 대검찰청을 나온 뒤, 데스크인 이두석 사회부장에게 곧장 전화했다.
“이 부장,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갑자기 죽었답니다.”
“뭐라고? 그거, 큰일이군. 이봐, 신 기자. 중앙수사부와 서울지검에 가서 고문 사실 여부와 사망자 인적 사항을 철저히 확인해봐.”
전화 통화를 끝낸 두 사람은 바삐 움직였다. 이 부장은 서울대 출입기자와 부산 주재기자에게 각각 학적부 조회, 가족관계 확인을 지시했다. 신 기자는 곧장 중앙수사부 1과장 이진강 부장검사에게 달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이 부장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사받던 대학생이 죽었다는데, 고문 아닐까요?”
“가능한 일이지만 속단할 수는 없지.”
“다른 데도 아니고 남영동이잖아요.”
“경찰이 쇼크사로 보고했다잖소. 조사를 더 해보면 알겠지.”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진강 부장검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비치며 말꼬리가 처졌다. 중앙수사부 사무실을 나온 신 기자는 서울지검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지검은 공안사건 보고를 받고 처리하는 곳이었다. 그는 최명부 1차장 검사를 만나 따지듯이 물었다.
“젊은 청년이 쇼크사했다는 걸 믿을 수 있어요? 노인도 아닌데요. 고문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검찰이 직접 수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최 차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사실 확인을 해주는 대신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당신, 조금이라도 기사를 잘못 쓰면 곤란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걸.”
신 기자는 쐐기를 박는 듯한 최 차장의 말을 어깨로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전 11시 30분, 그의 다음 행선지는 서울지검 공안부 김재기 검사실이었다. 신 기자는 취재수첩을 펴들고 사망한 학생의 인적 사항 확인에 들어갔다.
“검사님, 경찰 조사를 받다 사망한 서울대생 이름이 뭔가요?”
김 검사는 신 기자가 이 사건에 대해 거의 다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박종, 뭐라고 했는데…….”
“학과는요?”
언어학과 3학년.”
그는 숨 가쁜 오전 취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의 손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진실의 조각들이 쥐어져 있었다. 서둘러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데스크에도 각 주재기자와 출입기자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학생의 이름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이었다. 부산 가족들과도 통화가 이루어져 가족관계 확인도 마쳤다. 가족들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떠난 뒤라서 부재중이었다. 이제, 신성호 기자의 머릿속에는 조각조각 나뉜 진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는 기사를 작성한 뒤 데스크에 전화했다.
“신 기자, 시간 없으니 기사 쓴 것 지금 불러줘.”
그가 기사를 불러주자 데스크가 받아 적기 시작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이날 하오(오후)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데스크에서 기사를 모두 확보한 시간은 오후 12시, 점심시간이었다. 편집국에 비상이 걸렸다. 석간 초판 인쇄는 이미 끝난 뒤였고, 이제 막 돌판(1.5판) 인쇄가 돌아가고 있었다. 인쇄소 안에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 같은 규칙적인 기계음이 가득 했다.
“윤전기 세워!”[15]
금창태 편집국장대리가 인쇄소에 직접 가서 지시했다. 윤전기가 일시에 멈췄다. 그는 신성호 기자가 쓴 속보성 기사를 사회면에 2단 기사로 집어넣었다. 윤전기를 돌리라는 그의 지시에 따라 윤전반의 기사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가동을 다시 시작한 윤전기에서 거친 쇳소리가 들렸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3시 30분, 가판대에 쏟아져 나온 《중앙일보》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특종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활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원문]
주먹만 한 제목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 기사는 바야흐로 온 세상을 폭풍 속으로 휘몰아갔다. 국내 신문들이 다투어 후속 보도를 내보내는 사이, 《AP》《AFP》 등 서울발 외신의 긴급 타전이 이어져 박종철 군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신문이 가판대에 깔린 뒤, 편집국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기사 당장 안 빼?”
맨 먼저 문공부 홍보조정실 담당자가 금창태 《중앙일보》 편집국장대리에게 전화해 대뜸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했다. 문공부는 ‘보도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정권의 나팔수였다.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뒤이어 전화를 걸어 핏대를 세웠다.
“그 기사 오보야, 오보!”

하지만 진실을 언제까지나 은폐할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경찰은 긴급 대책회의를 연 뒤, 오후 6시에 대국민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그 뒤 중앙일보는 후속 보도에 소극적이었다. 동아일보가 보도지침을 어기고 고문 근절 특집 기사를 사회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공론화 되었다. 1월 15일 MBC는 단신을 통해 이 사건을 내보냈는데 당시 담당앵커였던 신경민은 통상 15~20초면 읽는 단신문장을 30초 이상 길게 끌었다는 일화가 있다.[17] 당시 MBC 보도국에서는 "신경민이는 끝도 없이 단신을 하냐"는 이야기가 나왔었다고. 1월 16일부터는 대다수의 언론에서 이 사실을 보도했다.

2.4. 수뇌부의 사건 은폐 기도[편집]

보도 다음 날인 1월 16일경에 치안본부 특수수사대가 해당 사건의 수사에 착수했고, 경찰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위에서 서술한 대로 직접 기자회견에 나와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시인을 했으나 이내 언론의 추적이 시작된 것이다. 5공의 주무기인 보도지침도 이때만큼은 통하지 않자 사건의 진상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심이 폭발하자 정권은 겨우 4일 만인 19일 2차 수사결과에서 강 치안본부장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견해를 뒤집고 고문이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발표 결과 박종철은 조한경 등 두 경찰에 의해 목 뒷덜미와 양손이 잡힌 채 두 번이나 욕조에 머리를 처박히다 목 부분이 욕조에 눌려 경부압박으로 질식사했으며, 부검 결과 사망 시각이 14일 오전 11시 20분경이고, 복부팽만은 수사관들의 인공호흡 및 초진 의사의 호흡기 주입으로 공기가 위장에 들어가 생긴 일시적 현상이며, 폐 조직검사 결과 수분이 검출되지 않았으며, 폐 기공 현상은 박종철이 과거에 앓았던 폐결핵으로 인한 폐 손상 흔적이고 왼손과 머리 부위에 입은 타박상은 저항으로 생긴 부상이며 부검 내용 중 경부압박 외의 사항은 박종철의 사인과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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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경찰은 발표 직후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 경찰 2명을 구속하여 서대문경찰서로 이송했는데, 구속 당시 경찰은 수감되는 동료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똑같은 잠바를 뒤집어 쓴 경찰관 10여 명과 같이 승합차에 태웠다. 결국 이들이 차 안에 웅크리는 모습은 신문과 방송에 실려 경찰의 제 식구 감싸기를 고발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위와 같은 모습을 찍어놓고도 신문에 싣지 않았는데, 1989년 6월 8일자 <조선노보> 호외에 의하면 이러한 일이 일어난 당일 해당 사진에 대해 "당신들은 동료가 구속되면 감싸주는 인정도 이해하지 못하냐?"는 간부들의 질책으로 인해 신문에 싣지 못했다고 나왔다.

이후 20일에 해당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 측은 경찰 수사결과와 검찰이 그 동안 벌인 관련 참고인 10여 명에 대한 방증조사 내용 및 사체 부검결과와의 상충점, 직접적 사망 원인인 물고문 외에 다른 고문이 있었는지의 여부와 연행 시간을 밝히는 데 수사의 초점을 두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은 비공개 현장검증 다음날인 24일에 수사결과 발표와 더불어 고문 경관들을 구속/기소한 사실을 밝히며 박종철 시신의 외상 소견과 부검 감정서 등으로 보아 전기고문은 없었으며, 당시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은 2명 뿐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발표 내용에 따르면, 당시 박종철의 몸에서 전기고문 흔적은 없고 15군데의 상처는 박종철이 수사 도중 저항하다 생긴 것이었으며, 왼쪽 사타구니에 난 3개의 상처는 박종철이 자술서를 빨리 쓰지 않아 조한경 경위가 볼펜으로 3번 찔러서 난 상처이고 오른쪽 검지 끝에 난 멍자국 역시 반항하다 생긴 흔적이며, 연행시간은 경찰이 2번 발표한 대로 14일 아침 8시 10분경이 아닌 새벽 6시 40분경이며, 폐 속에서 나온 혈반은 박종철의 지병인 폐결핵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정 검사장은 확신에 찬 듯 "검찰은 할 만큼 조사를 다했다. 공소 유지에 필요한 직접적 범죄사실 외에도 여론으로부터 제기된 의문점에 대해서까지 조사를 했다"고 밝혀 검찰의 축소은폐 의혹까지 불러일으켰다.

그 증거로 검찰은 박종철의 연행 시간이 경찰 발표보다 1시간 30분 빠른 오전 6시 40분이라 하였으나, 박종철에 대한 조사시간은 경찰과 동일한 오전 10시 50분 ~ 11시 30분까지 30분 간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2차례나 자술서를 쓰고도 추궁당한 뒤 물고문을 2차례 걸쳐서 받는 데 30분이나 걸렸다는 점은 납득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또 박종철의 시신은 살해된 현장에 보존한 뒤 검사의 지휘를 받아 처리하여야 함에도 검사 지휘 없이 이송되어 부검 뒤 서둘러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하였다. 박종철의 어머니 정차순은 화장에 반대하다 기절했지만 당국은 정차순을 어느 병원에 떨어뜨려 놓고 화장을 강행했다. 또 박종철 사망 소식을 심장마비 쇼크사로 1단 기사로 내도록 보도지침을 내린 사실이나 부검의인 황적준이 부검 전후 대공 5차장과 밀담한 것, 부검기록 및 부검사진 비공개 등은 정부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국민들의 의심을 샀다.

이후 경찰은 2월 7일에 김종호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물러났다. 이 와중에도 일선 경찰들의 의욕이 너무 앞서서 벌어진 과잉행동으로 물타기하면서 고문에 가담한 경찰과 지휘계통을 축소은폐하였다. 그리고 후임 내무부장관으로 군 출신 강경파로 정권핵심인 정호용을 임명해서 이 사건으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2.5. 사건 축소 폭로[편집]

하지만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훗날 열린우리당 의장)이 사건이 축소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휴지에 적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 정말 우연히도 이부영이 수감된 교도소 옆방에 2명의 고문경찰관인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가 들어온 것이다. 이부영의 증언에 따르면 옆방에서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려서[18] 친분이 있는 교도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사실은 고문경찰관이 더 있는데 우리만 잡혀왔다. 자기들만 모두 뒤집어쓰게 됐다.' 라는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관련기사

당시 군부독재 정권시절에는 교도소에 들어온 반독재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인 교도관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19] 특히 교도관과 경비교도대원들의 폭압적 통제가 기승을 부렸던 1986~87년 당시 상황에는 더더욱 그랬다. 대놓고 표현은 못 해도 이런 교도관들이 은근히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고. 그리고 이런 교도관 중에 한 명이 사건이 축소은폐됐다는 것을 이부영에게 알려주었고, 이부영이 은밀하게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문서는 또 다른 교도관 1명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김승훈 마티아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이부영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사람들을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고 표현했다. 이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비밀에 부쳐지다가 모두 정년퇴직한 2012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처음 이부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귀띔한 사람은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20]였으며, 문서를 외부로 운반한 사람은 교도관 한재동이었다. 이 2명은 2012년 박종철 25주기 추모식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또한 당시 검안의였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오연상 교수는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숨졌다고 조작하여 은폐하려는 경찰의 음모를 알아채고 중앙대학교병원 측에 시체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당연히 같은 죽음이라도 고문실에서 사망과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 중 사망은 뉘앙스 자체가 다르다. 결과적으로 박종철의 시신은 경찰병원에서 사망판정을 받는다.

경찰은 이후 오연상 교수에게 수사관 3명을 붙여 감시하였고, 그 다음 날(15일)에도 감시했으나 오 교수는 화장실에서 잠입하고 있던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를 불현듯 만나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음을 알렸다. 소리소문없이 은폐될 수도 있었던 박종철 사건은 한 의사의 양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을 알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 이후 고려대 법의학과 교수로서 박 씨 시신을 부검했던 부검의 황적준도 "사인을 심장쇼크사로 하라" 는 외압에 시달렸지만 불의에 타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 라는 부검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오 교수의 검안을 확증하였다.

하지만 오연상 교수는 이후 신길동 특수수사 2대(당시엔 신길산업으로 가장하였음)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그 옆에서는 비명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는데 박종철을 고문하던 수사관들을 조사하는 소리였다고 한다. 오 교수는 "참 이상한 세상이다. 박종철 군을 고문해서 죽이고 이번엔 그 수사관들이 고문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하였다.

경찰 및 안기부 상층부는 이들이 고문치사에 책임을 지고 구속되는 것에 불만을 품자 상관인 박처원 치안감을 통해 5,000만 원이 들어있는 예금통장 4개, 즉 2억을 준비해 2개씩 주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2개씩 1억 원을 주고 곧 가석방으로 꺼내주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21] 이 돈의 출처를 묻자 경찰 동료들이 조금씩 모았다고 했다. 누가 봐도 안기부 자금이었다. 믿을 사람은 없었지만 밝힐 사람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더불어 정권 내 알력이 이것의 은폐를 막았다는 견해도 있다. 10월 유신 이후 최종길 교수나 장준하의 의문사, 더욱이 1985~86년에도 기혁, 우종원, 신호수, 김성수 등이 당한 의문사들이 어둠에 묻혀져 경찰은 고문을 마음대로 자행하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당시 2인자이기는 했으나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후계자 경쟁을 해야 했던 노태우 세력은 내각제를 추진해 주도권을 쥐려 했고 장세동 측은 이에 고문사실을 흘려 이를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려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파문이 크게 번지면서 오히려 장세동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대국민적 저항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려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앞서 발표된 2명 이외에도 3명의 고문 경찰이 더 있었다는 사실은 이부영의 비밀서신을 통해 세상에 은밀히 전해졌고 이를 공개한 사람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1987년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나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처음엔 5공 정권은 보도지침과 언론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고 했다. 현재 네이버의 옛날 신문에서 1987년 5월 19일자 신문을 검색하면 아주 조그맣게 기사가 나온다. 서울대교구주보에도 나왔다.자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하면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에야 87년 5월 22일, 동아일보 1면에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내면서 비로소 크게 보도가 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날 동아일보를 찾아보면, 김승훈 신부의 폭로로 드러난 고문가담 경찰 은폐관련 보도로 신문의 3분의 1 이상이 채워져있다. 그만큼 충격적인 뉴스였다는 이야기.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하자,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한다. 덮을 생각이 없었고 3명의 사법처리를 타진하고 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의 판단은 알아서.

결국 5월 22일, 경찰은 공동정범 3인을 스스로 연행해 서울지검으로 데려왔고. 공동정범 3명(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이 구속되고 그 뒤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한 박처원 치안감(당시 치안본부 5차장), 유정방 경정(당시 대공 수사2단 5과장), 박원택 경정(당시 대공 5과 2계장) 등이 추가 구속된다. 이에 검찰은 사건 당일인 1월 14일 오후 5시경 치안본부 대공사무실에서 조한경 등 고문경관 5명이 모여 박종철 사망 사건에 대한 <동행피해자 변사사건 발생 보고서>를 쓰면서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이 범행한 것으로 축소키로 하고 유 경정의 지시에 따라 박 경정이 은폐 조작을 지휘한 뒤 고문경관 5명에게 예행연습을 시켰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강 전 치안본부장에 대해선 사전 조작에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하여 돌려보냈다.

수사 주체를 지검에서 대검으로 격상시키기까지 해서 집중수사를 편 검찰은 "검찰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의 의문은 없다"고 밝혀 여전히 의문만을 남겼다. 이 중 가장 큰 의문은 박 치안감이 조작 각본의 총 연출자인가 하는 점과 일개 치안감이 엄청난 사건을 수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혹이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박종철 사망 1주기인 1988년 1월 14일에 당시 담당 부검의와 수사 담당검사의 증언으로 점차 드러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이 부검 과정에서 경부압박 질식사로 판명되어 보고했으나 강 치안본부장이 부검소견서를 변경하고 외상 부분을 빼라는 외압이 있었다고 증언했고, 당시 수사검사인 안상수 역시 박종철 사건을 검찰에서 직접 수사하려 했으나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초동수사를 경찰에 맡기기로 하면서 사건 조작의 여지를 주었다는 충격적 발언을 하면서 또 반전되었다. 이 두 분의 증언으로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서면서 1월 14일에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자진 출석케 한 뒤 다음날에 구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강민창이 국과수 소장에게 100만원을 주며 회유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고, 황적준은 조직에 해를 끼쳤다며 국과수를 떠난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못한 점이 더 있다. 특히 가장 의문시 된 것은 사건 전개과정에서 치안본부장이 최고 사령부로써 독자적 권한을 발동해 사태를 수습/무마했느냐는 의문이었다. 이는 안상수가 증언한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더 의혹이 증폭되었으며 초동 수사과정에서 검찰의 명예를 걸고 즉시 수사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던 검찰이 태도를 바꿔 경찰에 수사토록 한 점, 송치 4일 만에 조한경 등 2명에 기소명령이 떨어진 것과 조한경 본인이 심경 변화로 옥중 폭로를 했는데도 3개월 간 수사를 미룬 점도 한몫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법무부 고위 관계자가 조한경 등이 수감된 영등포교도소(현 서울남부교도소)를 방문하고 3월 초에 이들이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된 경위 역시 의혹이 더 불어나기도 하였다. 또 박종철의 폐에 나타난 출혈반으로 보아 전기고문이 있었는가 등의 의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2.5.1. 개각 단행[편집]

무고한[22] 대학생을 고문해서 죽이고도 모자라, 진실을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일반인조차 분노에 들끓었고, 따라서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23],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이영창 치안본부장 등 관계자기관장 전원을 '문책 인사' 형태로 경질하는 개각까지 단행하기에 이르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후 6월 항쟁이 발발, 제5공화국은 그 명을 끝마치게 된다.

2.6. 사건 이후의 관련자, 가해자들[편집]

피고인들이 경찰에 봉직하면서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대공분야에 헌신했고 유죄판결 자체만으로도 그동안 쌓아올린 공로에 치명상을 입게 된 점을 참작,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 집행유예로 석방하면서 내린 판결문.#


정권이 무너져도 당시 경질된 고위인사들은 지금까지도 호위호식한다.

  • 김성기 법무장관은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 주택은행 이사장으로 출세했다.

  • 사건 은폐축소를 시도했던 정구영 검사장은 노태우 정권에서 23대 검찰총장을 역임했고 진로문화재단 이사장이다.

  • 이를 진두지휘했던 서동권 검찰총장은 안기부장으로 3년 6개월간 재직하고 이후로도 대통령비서실에 있으며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하였다. 전직 안기부장들이 흔히 당하곤 하던 구속은커녕 불구속 기소조차 당하지 않고 편안한 노후를 보냈다.

  • 정호용도 13대, 14대 모두 대구광역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 이영창 치안본부장도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이사장을 역임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북 경산-청도에서 당선되었다.

  • 박처원 치안감은 같이 구속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함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가 대법원에서 집행유예(8개월. 집유2년) 판결을 받고 출소한 후에 고문경찰관들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이근안의 은신도피를 지원했다. 물론 진심 어린 사죄는 조금도 없었다. 이후 카지노에서 10억여원을 빼돌려 이근안 등의 고문경찰관들에게 지원했다. 범인도피 혐의로 다시 법정에 섰으나 고령과 당뇨병 등의 이유로 다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다. 이후 노환으로 사망.

  •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위에 적었듯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후 은둔생활을 해 오다가 2018년 7월 8일에 향년 85세로 사망.

  • 고문치사사건의 담당검사였던 박상옥은 2015년 대법관 후보자로 내정되었고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결국 박종철 군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건 말단 경찰관들 몇 명뿐이다. 그 경찰관 5명마저도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 만기부터 최고 7년 3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1998년 6월 8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에서 그 문제의 경찰 세 명이 경찰 산하 기관에 취직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각각의 판결 날짜 등은 시사인에서 잘 정리해 두었다. 참조# 특히 경찰의 지휘라인 인물들을 그림으로 정리해두었다.

3. 기념 및 추모 조형물[편집]

박종철의 묘소는 따로 없었는데, 1987년 1월 16일 아침에 벽제화장장(현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 후 임진강에 산골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9년 초혼장을 치룬 후 산골한 곳의 흙을 관에 담아서 가묘를 만들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24]에 이 가묘가 있다. 대신 그를 추모하는 조형물이 몇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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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그게 박종철 기념비인지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 사실 대다수의 학생은 관심도 없을 것이다. 일부 단과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으로 학교 탐방을 할 때 꼭 지나가는 코스이기는 하다.

당시 총학은 NLPDR계열이 주로 장악했었기 때문에 NL계열의 '열사'들만 추모비를 크게 건립하고 박종철은 사안이 중요함에도 PD계열이라 작게 건립했었다는 카더라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카더라로 서울대학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서울대 총학은 NL이 약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나 기념비가 제막된 97년 총학생회는 21세기 진보학생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전에도 PD와 21세기가 총학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CA의 규모가 작다고 해도(사실 별로 작은 것도 아니지만) 4.19탑을 제외하면 다른 민주화 관련 추모비는 돌에 이름과 추모사를 적은 단순한 것이 많으며 흉상까지 있는 것은 '박종철 열사 추모비'뿐이다. 또한 길가에 있는 추모비는 '박종철 열사 추모비' 뿐이라 접근성으로 치면 4.19 탑보다 월등하다. 애시당초 박종철은 NL도 PD도 아니었고, 굳이 계파를 구분하자면 지금은 사라진 CA(제헌의회 또는 민민투)에 속한다.[25]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도 2002년에 펜촉 모양의 기념비가 신관과 본관 사이[26]에 세워졌다. 박종철 본인 항목의 관련 기사를 참조해보면 알겠지만, 이 기념비가 세워지는데도 동기회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사건 초창기에는 박종철 이름만 꺼내도 교사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겨우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2002년 경이라 그때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인데, 초기안은 흉상이었으나 학교의 반대로 현재 기념비 정도로 타협한 거라고 한다.

2018년 1월 13일, 31주기를 하루 앞두고 그가 지냈던 하숙집 골목 앞 길이 '박종철 거리'로 제정되었다. 녹두거리 대학5길에 박종철 거리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으며, 인근 도덕소공원 담장에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다. #

4. 박종철의 죽음 이후[편집]

관계기관대책회의나 그 구성원들이 사건에 위법하게 개입한 점이 확인되는 바, 국가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국가형벌권 행사의 법적 장치를 넘어 정치적으로 검찰의 수사권을 침해한 점과 검찰이 외압에 굴복하여 헌법과 법률로 부여된 수사권을 적절하게 행사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유족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 검찰 또한 헌법에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었음에도 권력층의 압력에 굴복하여 진실왜곡을 바로잡지 못한 점에 대하여 사과할 필요가 있다.

민주화 이후 1989년에 박종철 군의 유가족들은 국가와 고문치사 사건 관련 경찰관들을 상대로 1억 2천만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그 결과 1995년 11월에 대법원은 국가와 고문경찰관 다섯은 연대해서 1억 4천 7백만 원을, 그리고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 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박 군의 유가족들은 이자를 포함해 총 2억 4천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수령했다.

안상수는 당시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고, 이후 문민정부 하에서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으로 자신이 주동적으로 사건 은폐를 막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조국 서울대 교수는 안상수가 아닌 그의 상관인 최환 부장검사가 박종철 시신의 부검을 지시하여 이 사건의 은폐를 막았다고 반박했다.

가끔 이 일을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이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 일만은 정말 이근안과 무관하다. 당시 이근안은 경기경찰청 대공분실장으로 경기도경찰국 소속이었고 이 사건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27]에서 일어났다.

2012년, 한겨례에서 25주년을 기념하여 그때 그 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한 기사가 나온 바 있다. 위에 정리된 내용과 거의 유사하지만 참고하자.# 또한 최근 이 사건을 밝히는 데 일조한 검사 최환과 부검의 황적준이 30년 만에 만났다.#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열리고 박근혜"도대체 어쩌라는 거냐?"라는 식으로 책상을 쿵쿵 내려쳤다는 반응을 보이자, 이 사건이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다.

2018년 3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원에 있던 故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씨(89)를 만나 31년만에 고문치사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직접 사과한 것은 처음있는 일 #

검찰이 사건 축소했던 것에 대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4.1. 전향한 인물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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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운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가 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16대~18대 총선에서 내리 연속으로 3연패를 하면서[28] 정계를 떠난다.# 그 후 극우 언론사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이 되었다.## 비록 전향했지만 매년 박종철의 기일(1월 14일)과 생일(4월 1일) 때가 되면 그가 묻혀 있는 마석 모란공원을 찾는다고 한다.

  • 오현규
    박종운에 가려져서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문서 최상단의 2번째 사진에서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박종철의 후배로,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이었던 오현규다. 그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해운대구의원에 당선되었다. #

  • 금창태
    정권의 외압에도 불구하고 뚝심있게 최초 보도를 내보내서 사건을 세상에 알렸던 그는 1990년대부터 홍석현 대표 아래서 전무, 사장, 부회장 등의 요직을 지내다가 2001년에 중앙일보를 퇴사하고, 2003년에는 동료였던 심상기 서울문화사 회장의 부름을 받아 계열사인 시사저널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일선 기자들에게 삼성그룹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지 말라는 압력을 가하고, 결국은 기사를 일방적으로 삭제하는 폭거를 저질러서 시사저널 기자단 전원이 파업하는 사상 초유의 '시사저널 사태'를 촉발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시사in 항목 참조.

  • 김두우
    신성호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탐사했던 중앙일보 법조계 출입기자이다. 당시 김두우는 서울대 학적부를 뒤져 박종철의 정확한 이름, 소속 학과와 주소를 찾아냈다. 이 특종 보도로 1987년 당시 신성호, 허상천 기자와 함께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2004년 한나라당의 총선 공천을 받아 퇴사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다시 회사측에 반려를 요청해서 조용히 복직했다. 이후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까지 지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홍보수석까지 맡아 'MB 정부의 오른팔'로, 'MB의 입'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후 부산저축은행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박근혜 퇴임 이후에는 이명박 정부 시절 언론인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를 받고 있다.

4.1.1. 비판론[편집]

이들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들이 과거 독재정권이나 독점재벌과 연관되었다고 본다.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의 정당이었던 민주정의당한나라당(지금의 자유한국당)의 전신임을 고려했을 때, 한나라당에 들어가 정치활동을 하거나 했던 박종운과 오현규의 행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싸운 금창태가 재벌의 눈치를 보며 재벌을 비판하는 기사를 막으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본인들은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박종운, 오현규 같은 사람들의 행적은 유족 입장에서 심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박종운에 대해서는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의원이 2018년 1월 썰전에 출연하여 나나 박종운씨에겐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즉 고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그쪽을 선택하면 안 되었다고 말하며,[29] 박종철의 유족들도 박종운의 선택에 매우 힘들어했다고 직접 밝혔다.

4.1.2. 옹호론[편집]

썰전에서 박형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국민들의 투쟁에 의해서 완성된 사건이지 그것이 사회주의를 지향한 사건은 아니였다.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답게 하자'는 취지에 전 국민이 동참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달성한 뒤에 민주화 운동 세력의 노선은 분화가 되었다. 모두 자신들의 생각과 신념에 따라 분화를 한 것이다. 그 과정에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모두 분열을 한 것이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수용하며 보수쪽과 손을 잡으면서 이쪽에 손을 잡은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대표적인 예로 민주화의 비밀병기였던 김정남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교육문화수석으로, <민중과 지식인>을 지은 한완상 교수도 통일부총리로 재직하기도 했고, 운동권들의 사상적 스승이던 리영희 교수도 문민정부 초기에 김영삼을 지지하기도 했다. 즉 이러한 분화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무엇이 바람직한가?'의 생각 차이일 뿐이지, 지금 민주당계 정당이나 진보 정당에 계속 참여하고 있으면 변절/전향을 안 한 거고, 보수 정당 등 비 민주/진보 정당을 갔으면 변절/전향 했다는 식의 판단은 옳지 않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5.1. 드라마[편집]

  • 제5공화국 - 37, 39회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 자이언트 - 53회에서 비중 있게 나온다. 물고문 도중 사망한 장면, 유찬성이성모에게 "대학생 한 명이 물고문 도중 사망했다"고 몰래 알리는 장면, 황태섭천주교 측에 자료를 넘기는 장면 등.

  • MBC 기획특집드라마 순수청년 박종철 - 2002년 6월 24일 2부작으로 방영했다.

5.2. 영화[편집]

  • 변호인에도 박종철의 추도 사건이 등장하였다. 주인공인 송우석과 박진우가 박종철의 영정사진을 들고 최루탄을 맞으며 추도행사를 하는 장면은,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 이후 송우석은 사람들을 선동한 혐의로 구속되지만, 부산에 있는 변호사 142인중 99명이 전부 출석하여 송 변호사를 변호하기로 한다. 이 사건은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있었던 사건이다.[31]

  • 영화 보통사람 후반부에서 동료 기자들이 추재진 기자의 영정을 들고 다니는 모습도 실제 박종철 영결식 행진 장면과 6월 항쟁 때 모습을 섞어놨다.

5.3. 그 외[편집]

김광석의 유작 노래로 발표되어 유명해진 정호승부치지 않은 편지는 박종철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쓰여졌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훌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탁 치니 억 죽고 물 먹이니 얼싸 죽고 사람이 마분지로 보이냐?

- 크라잉넛, ‹지독한 노래›의 가사 중에서.

크라잉 넛의 노래인 지독한 노래에 나오는 가사 "탁 치니 억 죽고 물 먹이니 얼싸 죽고 사람이 마분지로 보이냐"는 이 사건을 비꼰, 아니 깐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가 사용한 기사문이라고 하는데…

파일:external/www.ahnsoojin.com/stereo_L.jpg

미디어아트 작가 안수진은 자신의 작품 <스테레오 수조>로 이 사건을 풍자했다. 2004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발표된 작품. 수조에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Mister Sandman>[32]과 고문당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스피커[33]에서 나오는 "몰라, 몰라" 하는 목소리가 대비되는 것이 압권.

2018년, 사우디 아라비아 기자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배후로 지목되는 사우디 당국이 '카슈끄지가 용의자들과 주먹다짐 끝에 우연히 죽었다'고 성명을 발표하자 대한민국 내에서는 유사한 사건이었던 박종철 사건이 다시금 회자되었다.

[1] 1997년에 (사)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을 지낸 바 있다. 2018년 7월 28일 새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2] 이 건물은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곤 하는 김수근의 '작품'이다. 외관상으로도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고문 당하는 사람에게 빛이 적게 가도록 5층 창문을 작게 설계한 것부터 시작해서, 고문자/피고문자끼리 마주치지 않도록 방문을 교차 배치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가히 실용적으로 악랄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아름답도록 설계한 하나의 마스터피스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경찰 인권센터로 사용 중. 인권센터가 자리잡은 배경에는 경찰의 인권유린을 반성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상세한 것은 대공분실 항목 참조. 갈월동에 소재하나, 남영역과 가까워서 남영동으로 더 많이 불린다.[3] 당시 서울대 민민투 위원으로 수배 중인 1986년 11월 23일에 박종철 군의 하숙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사건 엿새 전인 1987년 1월 8일에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박종철의 하숙집을 다시 찾았다. 경찰은 박종운을 주모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그를 체포하기 위해 이를 알고 박종철을 연행했다.[4] 현재 신문은 5단 체계이다.[5] 지금도 강판 시 나오는 신문은 다른 신문사에도 배달이 된다. 정보 공유.[6] 왼쪽 팔을 황정웅, 오른쪽 팔을 반금곤, 다리는 이정호가 잡았고 강진규가 박종철의 머리를 욕조에 담갔다. 조한경은 고문을 지휘했다.[7] 녹화된 테이프의 상태가 좋지 않아 화면이 좋지 않다. 보도국에서 기사를 전하는 사람은 신경민 현재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며 당시 MBC 기자다.[8] 당시 언어학과 4학년 박종운[9] 영화 1987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역할로, 그 당시의 짤막한 스토리를 들을 수 있다.[10] 황적준 박사는 한국 최초의 법의학자인 문국진 교수의 제자이다. 당시 한양대학교 의료원에서 부검이 진행되었다.[11] 이때 박종철의 삼촌 박월길, 한양대학교 의료원 마취과 박동호 등도 입회하였다.[12] 안타깝게도, 양심을 선택한 검사들은 다음 인사에서 모두 좌천되었다.[13] 사건 이후 연말에 동아일보에서 '198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내다 지금은 조용히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다.[14] 오후[15] 여담으로, 자신의 특종이 돌아가던 윤전기를 정지 시키는 것은 기자로서 최고의 명예로 친다.[원문] <警察에서 조사받던 大學生 "쇼크死”>[17] 위의 유투브가 그 단신이다. 당시 첫 전파보도[18] 특히 강진규 경사의 경우 아버지가 '정말 네가 사람을 죽였느냐, 그렇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다그쳤다고 한다.[19]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의 경우도 경찰의 박종철 사체 화장 요청을 거부하고 시신보존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직위를 걸고 알려야만 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그는 이후에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등에 관여하며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20] 사건 이후 인천구치소 부소장, 청송제2교도소장, 청송교도소장, 서울지방교정청장 등을 역임.[21] 참고로 80년대 당시 가장 비싸기로 소문난, 그리고 지금도 유명한 압구정 현대아파트 50평대의 매매가가 1986년 기준 1억 정도였다. 기사참고[22] 당시 박종철은 박종운의 소재를 묻기 위한 참고인으로 소환됐고 범인도피죄 혐의도 없었다. 즉 현재는 물론이요 당시 기준으로도 무고하다는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23] 후임 고건 장관[24]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민주 열사들의 묘들이 있는 곳이다. 전태일, 조영래의 묘지도 이 곳에 있다. [25] 1986년부터 1987년까지는 NL(자민투) vs CA(민민투) 구도였고, 88년이 지나면서 CA가 해체되고 NL vs PD 구도가 된다.[26] 정확히 말하면 신관과 연결된 본관 출입구 앞[27] 건축가 김수근이 만든 그 건물 맞다.[28] 박종운에게 3연패라는 불명예를 안겨준 사람이 학과는 달랐지만 서울대학교 운동권의 대선배이자 풀무원의 창업주이며, 민선 2~3기 부천시장을 지냈던 2017년 현재 5선 국회의원 원혜영이다.[29] 우상호는 박종철과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대신 이한열과 같은 학교였기에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30] 김윤석은 실제 박종철의 부산 혜광고등학교 후배다. 이외에도 후배 오달수가 이 영화에 출연했다.[31] 노무현 전 대통령 본인이 박종철 추도 행사를 진행한 건 아니다. 다른 사건에 관련해서 재판을 받았다. 참고로 99명의 변호사를 불러모은 사람은 당시에 동업자로 일했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32] 미스터 샌드맨은 잠요정을 뜻한다.[33] 평상시에는 물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 관람객이 와서 뒤에 달린 발판을 밟으면 고개를 들고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