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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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근혜초상화.jpg
공식 초상화[1]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이름

박근혜(朴槿惠, Park Geun-hye)

출생일

1952년 2월 2일 (65세)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1가[2]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안골길 12

현재지

경기도 의왕시 안양판교로 서울구치소

본관

고령 박씨

부모

아버지 박정희, 어머니 육영수

형제자매

박근령, 박지만

학력

서강대학교 전자공학 학사

종교

영세교 무종교[3]

소속 정당

자유한국당[4]

재임 기간

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5]

신장

162cm

혈액형

B형

별자리

물병자리

십이지

토끼띠 (신묘년)[6]

약칭

, GH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rk_Geun-hye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
2.1. 정치활동 이전2.2. 대통령 이전 정치 경력
2.2.1. 선거 이력
2.3. 제18대 대통령 선거2.4. 박근혜정부2.5. 탄핵, 그리고 구속2.6. 2017년
3. 평가와 비판4. 기타
4.1. 어록4.2. 각종 타이틀4.3. 대중매체에서4.4. 자택
5. 선거 이력6. 저서7. 관련 문서8. 틀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박정희대통령육영수 여사의 1남 2녀 중 장녀이며[7],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 퍼스트 레이디 권한대행[8]을 지냈다. 1998년,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의 전신) 소속으로 제 15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제 15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제 16·17·18대는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제 19대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문재인 후보를 이기고 당선되어 이듬해인 2013년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처음으로 2대(父-女)에 걸쳐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례[9]이며, 첫 미혼 대통령이다. 첫 이공계 출신(전자공학과)의 대통령이며[10] 직선제 도입 이후로는 처음으로 과반 득표율(51.6%)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동시에 전무후무한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를 일으킨 혐의를 받고 있는 주요인물이자, 부패 행위와 협박·뇌물수수 혐의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검찰에 입건된[11] 범죄 피의자이기도 하다.[12]

2016년 12월 9일 오후 4시 10분,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으며,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탄핵되어 파면된 대통령이 되었다. 탄핵됨에 따라 의전 및 예우, 연금, 비서관, 기념사업추진비, 사무실 제공 등의 모든 예우가 박탈되었다.[13] 그리고 2017년 3월 31일 새벽 3시,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헌정 사상 3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박근혜의 원래 만기퇴임일은 2018년 2월 25일이지만 탄핵으로 인해 대통령 자리에서 파면되었으므로 임기기간 중 1년 2개월 15일(443일)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14]

2. 생애[편집]

2.1. 정치활동 이전[편집]

박근혜의 삶에 대한 요약.

1952년 대구 출생. 아버지 박정희서울 신당동에 집을 마련한 1956년 4월 전까지, 군인인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곳저곳 이사를 다녔다. 출생지는 대구 삼덕동 5번지였지만 첫 돌은 광주 동명동 셋방에서 맞았으며#, 1953년 여름엔 서울 동숭동으로 이사했지만 1954년 10월엔 다시 광주로 가 1955년 7월 아버지 박정희가 사단장을 달기 전까지 자랐다.# 본인의 정치적 고향인 TK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대구 방언보다는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살짝 섞인 서울말을 구사하는데, 이는 충청북도 옥천군 출신인 육영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울장충초등학교[15] - 성심여자중학교 -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이 중 중학교 진학 때 특혜를 받은 것이 알려졌는데, 박근혜는 1964년 3월 성심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입시를 치러 중학교에 진학했었고, 전 과목 모두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박근혜가 중학교 입시를 치를 때는 2과목(국어, 수학)만 보았고, 박근혜는 성심여자중학교에 합격했다. 이듬해부터는 다시 전 과목 모두 시험 보는 것으로 바뀌었고, 중학교 입시는 1969년에야 폐지되었다.#

또 박근혜가 서강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하면서 누군가의 힘으로 종합대학서강대학교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서강대학교 종합대 인가는 1969년 12월에 이뤄졌고, 박근혜는 1970년 1월에 서강대 시험을 응시했다. 종합대학교로서의 개교는 신학기 시작에 맞춰 1970년 3월에 이뤄졌다. 박근혜의 입학과 동시에 종합대학교로 변한 것이다.

학부 졸업 시 학점은 4.0 만점에 3.82로 상당히 높았다.[16] 그러나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라고 잘못 말하거나 센서 달린 신발을 인공지능의 사례로 혼동하는 등 과학기술에 무지해 보이는 박근혜의 발언들을 보자면, 아무래도 대학 시절에 배운 지식을 모두 망각한 듯. 물론 불성실한 대학 생활에도 불구하고 학점 특혜를 받았던 정유라의 사례를 보면, 망각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배운 게 없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 게다가 박근혜의 학점은 3학년 1학기까지 대개 A를 받으면서 B, C가 더러 섞여 있었으나, 유신 이후부터 전 과목 A를 받는다. 그 밖에 박근혜를 수석 졸업자로 만들기 위해 졸업하던 때에 수석 졸업자 선정 방식이 바뀐 정황도 존재한다. 다만 이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

서강대 졸업 후 프랑스어학연수를 떠났으나[17], 재학 도중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하자 귀국, 만 22세의 나이로 공석이 된 퍼스트 레이디를 대행했다. 퍼스트 레이디가 되기 전인 중학생~고등학생 시절부터 대통령의 딸로서 여러 외교 행사에 참가해, '소녀 외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전여옥 전 의원에 의하면, 박근혜는 퍼스트 레이디 시절 이미 권력의 단맛에 취한 상태였다고 한다. 어느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박근혜에게 "퍼스트 레이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충고하자, 박근혜는 벌떡 일어나 김옥길 총장을 노려보며 "무슨 말씀이세요? 이 나라와 국민을 두고 외국에 가라니요? 퍼스트 레이디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 줄 모르세요?"라고 소리치며 인사도 없이 나가버렸다고 한다.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의 피살 이후, "육영수 여사가 나에게 빙의되어 '딸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주장하는 최태민과 인연을 맺었다. 다만 여동생 박근령과 제부 신동욱 부부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는 육영수 여사 피살 전부터 최태민과 알고 지냈다고 한다. 최태민이 발족시킨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를 맡았으며, 이후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를 바꾸고 영세교의 최태민, 구원파의 유병언과 함께 사회운동 '새마음 운동'를 주도했다. 이 과정 중에서 최태민의 5녀인 최순실과도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18]

그러던 1979년, 아버지마저 10.26 사건으로 심복에게 살해당하면서 청와대에서 나와 신당동 사저 생활을 시작했다.[19] 이후 박근혜는 1980년 영남대학교,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자리에 올랐고 영남대 이사장에서는 1988년 사임했다. 한국문화재단은 2012년 해산될 때까지 줄곧 이사장 자리를 유지했다. 영남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90년 사임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가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전두환의 5공 시절은 정통성이 부족한 정부에서 흠을 메꾸기 위해 독재자인 전임 박정희를 비난하던 상황이였다. 박근혜는 이때를 자신의 인생 최대 암흑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1981년 경에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육대학원의 석사과정(M. A. in Ch.Ed.)을 한 학기 다녔던 것이 당시 재직하던 교수들로부터 확인되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발발 이후, 재학생들 가운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나오고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소위 '은둔의 시기를 보냈다'고 전해지는데, 외부자들에서 전여옥 전 의원에 의하면 박근혜는 이런 말을 싫어했으며, 박근혜 본인은 이 시기에 대해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등을 통해 활발히 활동했다"고 말했다고 한다.[20] 그러나 박근혜의 측근이었고 최태민의 의붓아들인 조순제의 증언에 의하면 "박근혜는 업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100% 꼭두각시였고,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조순제와 그 측근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만 했다"고 한다. # 한마디로 표현하면 낙하산 인사.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 후엔 7년간 딱 하루만 출근하고 거액의 봉급만 챙겨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재단 일은 측근 4인방[21]에게 떠넘기다시피 하여, 이들에 의한 전횡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한다.#[22]

2.2. 대통령 이전 정치 경력[편집]

1997년[23]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회창 지지 선언들 통해 한나라당에 입당하고[24] 1998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다.[25] 제16·17·18·19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선출직 부총재에 올랐지만, 이회창과의 갈등으로 2002년 제3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탈당을 하여 선진 여성정책의 구현과 양성평등을 기본정책으로 하는 신당,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오래 가진 못했고 2명의 광역자치의회의 의원 당선자를 낸 뒤 그해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과 합당하였다. 2004년도까지만 해도 정치인 박근혜의 당내 입지는 보수당 텃밭의 흔한 지역구 국회의원 혹은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유도하기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했다.[26] 그런 그녀를 대권주자이자 보수정당의 핵심 주자로 키운 사건이 바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다. 당시 탄핵을 주도한 핵심 인물 중의 한 명이 박근혜였다.

당시 북한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하기도 했는데# 무단 방북 논란(사실이 아니다)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에 대표 명의로 김정일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공개되면서 통일부 허락의 문제와 북한에서 쓰는 주체라는 연호를 써서 국가보안법 위반까지 문제가 번지고 있다.편지 전문 여기다가 TV조선에서는 주체사상탑까지 가서 방명록까지 적고 왔다고 폭로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에게 패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27], 한나라당에는 박희태 체제, 최병렬 체제 등이 들어섰다. 하지만, 한나라당차떼기 파동(불법 대선 자금)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역 구도 타파와 전국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한나라당 내 개혁파 인사 김부겸, 이우재, 김영춘, 이부영, 안영근 등이 가담하면서[28] 한나라당 소속 박근혜 의원 또한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격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29]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 김기춘청와대 비서실장[30]은 이 당시 탄핵 서류를 제출하였고, 박근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에 참여하였다.[31]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인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탄핵을 하느냐[32]'는 수많은 국민들의 격노를 불러 일으켰고 새천년민주당에 이어 한나라당까지 엄청난 여론의 역풍에 휘말려 17대 총선열린우리당이 단독 과반은 따 놓은 당상이고, 잘 하면 180석~200석까지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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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역풍으로 인해 당사를 헌납하고 천막당사로 현판을 옮기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결국,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고, 박근혜 의원이 당 대표에 올라 사태 수습과 선거 지휘에 나섰다.[34] 차떼기로 모금한 돈을 되갚기 위해 당사를 매각하고 '천막당사'를 차렸다. 또 당내 소장파들이 탄핵 찬성 철회를 주장했으나[35], 이를 거부하여 지지층 이탈을 막는 한편, 거대 여당 견제를 부동층에 호소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이를 막고자 하였으나[36] 오히려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하락세에서 반등했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얻어 처음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는 기쁨을 안았으나, 180석~200석까지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분위기로 볼 때 솔직히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받았고,[37] 80석이라도 확보하면 다행이라던 한나라당은 기대 의석을 훨씬 웃도는 121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했다.[38] 물론 그 와중에 피습 사건을 당하는 등 위기는 있었다.

이후 박근혜 대표는 참여정부의 모든 정책에 반대하며 참여정부를 가열차게 공격하였고,[39] 사학법 개정에 반대한다고, 촛불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40] 이로써 그는 한나라당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고,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했던 여러 비판들이 본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참여정부를 가열차게 공격하면서 의원 활동을 제대로 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MBC기자 출신 국회의원인 신경민 의원이 박근혜와 같은 상임위에서 활동했던 국회의원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박근혜는 상임위에 나오면 보좌진이 써준 질문지를 읽기만 하고, 장관들의 답변은 듣지도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보통 상임위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장관들이 엉뚱한 답변이나 엉터리 답변을 하면 이를 알아채고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의무이나, 박근혜는 의정활동 15년간 장관들의 답변에 한 번도 되 묻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동료 상임 위원들의 말에 의하면, 박근혜는 자기의 질문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질문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의 실책은 본인이 대통령직에 있었던 2014년 한미정상회담 당시 한미 공동 기자회견 때도 기자들의 질문을 잊어버리면서, 망신을 당했다.# 재밌는 건 2015년에도 또 기자들의 질문을 잊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며 박근혜에게 참여정부 국정 발목잡기는 아예 만성화 되어버린 듯한 정황도 보인다. 전여옥 전 의원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박근혜 당시 당대표는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뜬금없이 '여당과 전면전을 하겠다'는 폭탄발언을 던진다. 놀란 기자들은 데스크에 박근혜의 발언을 보고하기 위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운다. 그러나 자기가 던진 말의 중대함조차 파악하지 못한 박근혜는, 해맑은 얼굴로 미소를 짓더니 전여옥 전 의원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기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죠?'[41]

2007년 참여정부레임덕이 왔다. 노무현 대통령 개인의 지지율은 상향세였지만, 야당이나 대권 주자들의 지지도가 그보다 더 높았던 것이다.[42]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가 잡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 유력할 상황이었으나, 독재자의 딸이라는 거부감, 참여정부와의 대립 과정에서 보인 강경함은 지지율 외연 확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고, 당내 지지는 다소 부족했지만,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이 당시 분위기는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가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사람이 곧 다음 대통령이나 다름없었던 그런 분위기였다.

둘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고,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가 안 좋기로 유명한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도 이 당시에는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각각 조직 담당, 정책 담당으로 일했다. 그런데 이때 한나라당은 각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친이계친박계로 갈라져 살벌하기 짝이 없는 폭로전을 이어갔다. 이 당시 싸우면서 생긴 감정의 앙금이 후술할 18대 총선 당시 일어난 친이계친박계 공천 학살과 19대 총선 때 일어난 친박계친이계 공천 학살로 이어졌고, 그 원한은 20대 총선새누리당을 흔들었던 친박계비박계 숙청으로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새누리당이 분당되어 자유한국당바른정당으로 갈라지기에 이른다.

또한 두 사람에 대한 의혹은 상당수가 이때 나온 것으로, 여담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그 유명한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43]가 이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과 보궐선거 패배로 박근혜에게 불리한 요소가 하나 둘씩 터졌고 경선 룰 공방을 거쳐 결국 이명박서울시장이 여론조사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며 다음 대선으로 기회를 미루게 된다.[44]

결국, 이명박 후보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7대 대선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18대 총선이 시작되자 이명박 대통령의 계파인 친이계는 박근혜 의원을 따르는 친박계 인사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이에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을 나와 친박연대라는 사상 초유의 가설 정당을 만들어 18대 총선에 출마했고, 친박연대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으로 출마했다.

이 때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 공천 심사에서 합격했으나 말 그대로 팔다리가 다 잘린 상태였고, 기자회견을 연 뒤 눈물을 보이며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또 탈당한 친박계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는 메세지를 남기기도 했다.

지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던 것처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됐다. 그러나 18대 총선 결과 한나라당은 국회 전체 의석 300석 중 153석을 얻어 턱걸이 과반에 만족해야 했다. 잘하면 200석도 차지할 수 있을 지 모른다던 기대에서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반면 친박연대는 박근혜 의원의 본거지인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서 돌풍을 일으켜 14석을 얻어 원내 제4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고, 친박 무소속 연대도 12~16명의 당선자를 내면서[45] 무려 26명의 친박계 인사들이 살아남았다. 박근혜 본인도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선거기간 내내 전국을 돌며 선거유세를 했던 17대 선거와는 다르게 18대 선거에서는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등 사실상 당의 지원유세조차 거부하였다.[46]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봉하마을에 가 조문하려 했으나 진입도 못 하고 쫓겨났다. 노무현 국민장 위원회 측 관계자가 상황이 어수선하니 국민장 때 조문하라고 권유했다고.

예상 밖의 선거 결과에 한나라당은 내부 진통을 겪긴 했지만 탈당해서 생환한 친박계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거기에 보수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까지 더해진 결과 한나라당은 무려 183석에 달하는 절대 다수의 의석을 가진 초거대 여당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때 박근혜 의원은 '여당 안의 야당' 역할을 하며 세종특별자치시 문제 같은 중요한 이슈가 생겼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정면으로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차기 대권 주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혀 나갔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의 인기도 덩달아 바닥을 찍어, 땅 속을 뚫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보편적 급식(무상급식)' 문제로 셀프 탄핵을 하면서 공석이 된 서울특별시장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2011년 10월에 실시된 서울특별시장 재보궐선거 결과 친이계로 분류되던 나경원 후보가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고, 이때를 시작으로 친이계의 힘이 상당한 속도로 빠지기 시작했다. 고승덕 의원이 홍준표 체제가 선출된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가 돌았다는 이야기를 폭로하고, 선거관리위원회에게 디도스 공격을 가한 범인이 한나라당 당직자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홍준표 체제는 붕괴됐고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식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레임덕의 그림자가 급속도로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도 당연지사.

결국 당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유력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박근혜 비대위는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외부 인사들을 비대위로 영입하였으며, 당의 색깔을 공산주의의 상징인 빨간색으로 바꾸는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당의 전권을 거머쥔 박근혜 위원장은 18대 총선 때 겪었던 수모를 고스란히 친이계 공천 학살로 되갚아줬다.[47] 그런 가운데 치러진 19대 총선민주통합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새누리당의 승리로 끝나 박근혜라는 이름의 가치를 최대치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박근혜 의원은 18대 대선에 출마할 것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친이계+비박계의 여러 후보들이 경선에 참여했으나 박근혜라는 이름 앞에 모두 듣보잡 취급을 받았고,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박근혜 의원의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2012년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가열찬 대결을 펼친 끝에 51.6%의 득표율을 얻어 18대 대통령에 당선, 숙원을 풀게 되었다. 역대 대통령 후보들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였다.[48]

현행 헌법이 탄생한 제9차 헌법 개정 후 제6공화국이 출범하며 역대 대통령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를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등 정부의 가치나 목표를 나타낼 수 있는 슬로건 같은 정부 명칭을 붙여왔다.

이는 사실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 장면 내각과 윤보선 대통령의 제2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을 의미하는 제4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 또 후임 정부들이 명칭을 달리하여서 노태우 대통령 정권을 뜻하게 된 제6공화국처럼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어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면 공화국 호칭이 달라지며 별도의 호칭으로 정권을 구분해온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말해,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공화국의 번호가 달라진 것이기에 새 행정부의 출범과는 관계가 없다. 이처럼 헌법이 달라져서 공화국을 구분해온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헌법질서하에 있는 정부들이 대통령이 다르다는 이유로 명칭을 달리할 수 없다는 법률적 논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 당시에는 '실용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되다가 무산되었다. 후임인 박근혜 대통령 또한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며 박근혜정부로 명칭이 결정되었다.[49]

사실 일반적인 경우에서 특정 정부를 칭할 때,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MB정부 등으로 칭하는 것은 명확한 의미가 잘 구분되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다면 제재될 이유가 없다. 다만 헌법학적 관점에서 모두 현행 헌법 질서하에 있는 제6공화국 정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 별 명칭이 달리 한다는 것을 꺼린다는 것을 명심하자.

2.2.1. 선거 이력[편집]

박근혜가 당 대표로 선거캠페인을 지휘할 때, 한나라당은 승리를 계속 거두었다. 위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총 3번의 선거를 당 대표 또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진두지휘하면서 승리를 이끌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121석을 가져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원래 탄핵정국에서 열린우리당 180석 vs 한나라당 60석까지 밀릴 것으로 예상되던 것을 크게 반등해서 이 정도로 막아낸 것은 천막당사, 거대 여당의 폭주를 막을 야당의 존재 어필 등 박근혜 대표의 캠페인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된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워낙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여론이 커서 이기기 쉬운 선거였지만, 유일한 광역자치단체 접전지였던 대전광역시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가 서울에서 유세 도중 괴한이 휘두른 커터칼에 얼굴을 피습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수술 직후 깨어난 박근혜가 당직자에게 첫 마디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은 것이 큰 화제가 되고, 결국 대전시장 판세가 역전되어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때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광역자치단체 12곳을 모조리 이기는 역대 최고의 승리를 거둔다. 그나마도 제주지사 연임에 성공한 김태환 지사는 공천문제로 탈당한 한나라당 출신인지라 사실상 13곳을 얻은 셈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친이계가 한나라당 당권을 장악하면서, 친박계 현역 의원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한 이른바 '친박계 공천 학살'이 일어났다. 이에 불복한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여 이른바 친박 무소속[50]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51]라는 당을 급조해 출마했고, 박근혜 본인은 탈당은 안 했으나 "저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습니다"와 같은 발언으로 은근히 친박세력을 지원했다. 이것이 또 한 번 대박을 낸다. 친박연대는 무려 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8%)으로 14석이나 의석을 확보했고, 이와 별도로 친박으로 분류되는 약 16명의 무소속 지역구 의원도 당선되었다. 이들 친박 후보들 덕분에 한나라당은 최대 200석까지도 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반수를 조금 넘기는 대패를 당했고, 친박 세력은 한나라당 내의 친박 의원 10여 명과 함께 '한나라당 내 야당'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5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연이은 선거에서의 패배, 정권 심판론에 따른 당 지지도 추락의 위기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총선과 대선에서 필패라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에 일시적으로 당권을 쥐어 주고[53], 강력한 쇄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고치고, 김종인, 이상돈 등 개혁적 인사와 이준석, 손수조, 이자스민, 문대성 등 젊은 인사를 영입하였으며[54], 경제민주화와 같은 개혁적 공약과 행보를 보였다. 때마침 민주통합당의 당내 공천문제와 통합진보당과의 단일화 갈등에 결정적으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한 김용민의 막말파문이 터지면서 선거 판세는 참패 위기에서 '그래도 제1당은 할 수 있겠다'(과반까진 힘들겠지만)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152석의 단독 과반 확보.

이를 기반으로 박근혜의 선거의 여왕 이미지는 확고해졌으며 그 후 자연스레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선주자로 발돋움하였으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서 사과하며 아버지와 선 긋기에 나서면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며 이미지 쇄신에 성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고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모든 선거를(재보궐선거 포함) 새누리당을 승리로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55] 비록 선거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맞게 자신의 이미지 어필을 잘 조절했다는 평.

그러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분열되는 호기를 맞았음에도 새누리당 내부의 공천 파동, 낡아빠진 북풍, 그간 보여온 무능한 모습 때문에 유권자들의 민심이 돌아서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치른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유례 없는 대참패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향후에 남은 임기 동안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리게 되는 초석으로 작용되었다.

2.3. 제18대 대통령 선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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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선 후보 포스터

준비된 여성 대통령


- 대선 당시 슬로건


선거캠프에서 처음 발표한 슬로건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으나, 2012년 11월 18일부로 "준비된 여성 대통령"으로 변경하였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박근혜와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다시피 했기에, 경선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84%에 달하는 득표율로 어렵지 않게 통과하며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되었고, 본선에서는 민주통합당문재인 후보와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토론회에서 눌변을 보이기도 하며 안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56]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게 면전에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라는 발언을 들으며 곤욕을 치뤘다. 하지만 이는 도리어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일으켜 박근혜 당선에 한몫하는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선거의 여왕' 이라는 이명이 무색하지 않게 복지 관련 공약을 선점하며 문재인 - 안철수 후보 단일화에도 단 한번의 지지율 역전도 허용하지 않고 승세를 이어갔고[57]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51%의 득표율과 역대 최다 득표 수를 보이며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8대 대선 진행 과정에서 국가기관의 여론조작 의혹으로 인해 대선 무효 주장이 표면화되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고.}}}

2.4. 박근혜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임기 중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박근혜정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2.4.1. 임기 중 주요 사건 및 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박근혜/임기 중 주요 사건 및 사고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관련 사건 목록은 여기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2.4.2. 국정 농단 사태[편집]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참조. 박근혜/임기 중 주요 사건 및 사고 문서에도 작성되어 있으나 그 중대성을 고려하여 분리 서술한다.

2.5. 탄핵, 그리고 구속[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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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당한 직후, 삼성동 자택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으나 삼성동 자택이 입주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탄핵당한 당일에는 청와대에서 숙박하였으며 탄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참모 중 하나는 "사실상 정치적 사형선고인데 이에 대한 메세지를 바라는 것은 너무 잔혹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헌재가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58]

이와 같은 행보에 대부분 언론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침묵에 대해 비판했다.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수용 의사를 밝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감정인지 아니면 불순한 의도인지 계속해서 시간을 끌어 혼란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59] 실제로 박사모 등에서는 탄핵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적 양상이 짙어지면서,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3명으로 불어나기까지 했다.

파면됨으로써 대통령직을 박탈당했으면 청와대를 떠나야 하지만, 탄핵이 인용된 지 이틀이 되도록 청와대를 떠나지 않았으며, 이에 노동당은 박근혜를 건조물 침입(정확히 말하자면 퇴거 불응) 혐의로 형사고발했다. 본디 청와대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설이기 때문에, 이 시설과 관련된 직위에서 물러나면 무조건 퇴거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증거 은폐를 위해 이틀이나 청와대에 있었던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한편, 청와대에서 퇴거하게 되면서 키우던 진돗개 9마리가 주인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

마침내 3월 12일 오후 7시 16분에 청와대에서 퇴거해서 독립문, 서울역, 삼각지, 반포대교를 거쳐 오후 7시 39분에 삼성동 자택에 도착했다.[60][61][62] 방송국에 다수의 시청자가 원래 오후 5시 경에 출발한다고 했으나 계속 30분씩 연기하다 오후 7시 쯤에 관저 밖으로 나왔는데, 참모들과 인사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삼성동으로 이동하는 도중 취재진들이 뒤쫒는 모습이 추격전을 방불케 했다. 취재진들이 이동하는 도중 올림픽대로에 진입했는데 자동차 전용도로였기 때문에 오토바이로 이동하던 취재진들은 따라가지 못했다. 자택 앞에는 김진태, 조원진 등의 친박계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박근혜 지지자들 500명 가량 모여 탄핵이 무효라고 외치며 모여 있었으며 경찰은 2개 대대(8개 중대, 800여 명)를 배치하었다. 일부 지지자들은 대형 태극기로 생중계하는 기자들의 카메라를 막거나, 소란을 피우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박근혜는 2번째 차량에서 내린 뒤, 친박계 의원들과 지지자들에게 웃으면서[63] 인사를 나누고 공식 입장 발표 없이 7시 39분에 자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집 안에서 인터뷰를 했고, 탄핵인용 이후 처음으로 간단히 입장표명을 했다.

아래는 민경욱 의원의 대독을 통해 밝힌 입장 전문.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여러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64][65]


사실상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불복을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 # 친박의원 민경욱은 헌재결과 승복한다는 말이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검찰 수사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승복한다는 말은 할 수 없다면 이미 지지자가 3명이나 사망한 상황이므로 적어도 지지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집회를 자제해달라고 하는 게 마땅한 도리인데도 그것조차 없었다. 갈등이 계속 나오든, 유혈사태가 일어나든 상관이 없다는 뜻일 뿐이다.

박근혜가 탄핵으로 불명예 퇴임하자 대한민국 검찰청에서는 박근혜에 대한 출국금지 명령을 검토하기로 했다. 아직 출국금지 명령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나올 예정이다.

그리고 마침내 3월 21일, 박근혜가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현재 받고 있는 혐의가 뇌물수수 등 13가지에 달하기에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3월 21일 오전 9시 16분에 삼성동 자택에서 출발하였으며 2호선 선릉~서초구간 및 테헤란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경찰경호 및 교통통제덕분에 7분만에 서초역 인근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했으며, 포토라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라고 짧은 발언 후 곧바로 조사실로 올라갔다. 예우차원에서 전 대통령이라고 부를 가능성이 높으며, 검찰 수뇌부와 티타임을 가진 후 조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탄핵 이후 검찰 수사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검찰을 참고.

3월 27일,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서 세번째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사유는 다음과 같다.

  • 도주 및 증거인멸 가능성 매우 높음.

  • 최순실 및 그 일당들과의 형평성 고려.

  • 대통령에서 파면될 정도의 무거운 혐의. 애초에 불구속일 정도의 혐의였으면 대통령에서 파면당하지도 않았다.

  • 공무상 기밀을 누설한 것은 국가존치에 큰 악영향을 끼침.

  • 권력남용이 너무 심함.


이에 대해 박근혜 본인은 "매우 억울하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본인이 기자들에게 직접 밝히거나, 하다못해 변호사를 통해 밝힌 것도 아니라 측근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내용인 만큼 적당히 걸러 들을 필요는 있지만, 지금까지의 언행이나 정황을 볼 때[66] 기사의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17년 3월 31일,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수인번호는 503번.

이후 상황은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사건 문서, 재판 경과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재판/박근혜·최순실·신동빈 문서 참고.

2.6. 2017년[편집]

9월 13일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서청원, 최경환 의원에게 '탈당권유'를 할 것을 지도부에 권고했다. 박 전 대통령은 별 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만기일(10월 16일)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이 자택에 자신이 좋아하는 능소화나 배롱나무를 심어 달라거나 인테리어에 관련해 여러 부탁을 했다고 한다. 법률지원단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구속만기 출소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다', '각오를 하고 계신 듯 하다'고 말했다.#

3. 평가와 비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박근혜/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경제적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박근혜/평가/경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외교적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박근혜/평가/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사이비 종교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박근혜/평가/사이비 종교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개인처신 문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박근혜/개인처신 문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5. 역사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박근혜/역사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 자질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박근혜/평가/자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기타[편집]

  • 최초를 기록한 것들이 많은데, 먼저 대한민국 유력정당의 첫 여성 대선후보자였으며[67], 이어 첫 부녀 대통령이었고, 이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입건되고 탄핵소추에 의해 파면된 첫 번째 대통령이다.[68]

  •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예를 했다고는 하는데, 글씨의 굵기와 대칭의 일관성, 여백의 간격 등을 봤을 때는 아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만 같다. 한글 휘호가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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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글씨는 필체가 '백강고시체'[70]와 상당히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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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선 후보 당시 한국경제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 벨기에 만화 땡땡의 모험을 엄청 좋아했다. 이 때문인지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시절, 육영재단에서 발간했던 만화 잡지 보물섬에서 땡땡의 모험이 연재되기도 했다. MBC에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기도 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시절에 브뤼셀에서 한국전쟁 참전 기념탑 참배 행사 일정 이후 계획에도 없던 만화 박물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여기서 수행원들에게 열심히 땡땡을 설명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취임 첫 해인 2013년, 프랑스벨기에 영국 방문 당시 벨기에 국왕 앞에서 이 만화를 언급하며 팬임을 인증한 바 있다.

  • 정계 입문 시절부터 수첩을 애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첩이 없으면 안 그래도 어눌한 말을 더 못한다 하여 "수첩공주"라는 별명이 있다. 이것으로 유명한 이 있다.

  • 패션에 무척 신경 쓴다고 한다. 대통령 취임 1년 동안 공식 석상에서만 122벌의 다른 옷을 착용했다. 관련 기사 그러나 정작 정장을 착용할 경우 절대로 스커트 형태의 치마를 입지 않았으며 치마를 입을 경우 무조건 긴 치마만 입었고 하이힐이나 팬티스타킹 등 서구적인 여성복 하의는 일절 착용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모든 의상에 최순실이 개입했다는 것은 지금은 잘 알려진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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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편일간베스트 유저들이 영화 겨울왕국주인공엘사와 박근혜가 닮았다는 주장을 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들은 엘사의 부모가 사고로 죽은 것과 박근혜의 부모가 사살당해 죽은 것을 동일시하였고, 마침내 여왕으로 복귀하여 금의환향한 엘사의 모습과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청와대에 입성한 박근혜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당시 대구시장 후보였던 주성영은 겨울왕국을 아예 '박근혜 영화'라고 명명하기까지 하였다. # 친박세력이 이렇게까지 어거지로 박근혜를 애니메이션 주인공에 끼워맞춘 이유는 당시 폭발적 흥행으로 1,000만 관객을 넘긴 영화 변호인의 실제 인물인 노무현이 주목받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대항마로 황급히 겨울왕국을 내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박근혜가 탄핵되고 감옥에 간 현재 겨울왕국의 엘사와 박근혜가 닮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 박근혜가 가장 싫어한 자기에 대한 평가는 '아는 것이 없다', '이해력이 부족하다', '콘텐츠가 없다', '백 단어 공주다', '수첩이 없으면 아무 말도 못한다.' 등등의 말이었다. [71] 그러나 지금 와서 돌아보면 모두 맞는 말들이다.

  • 박근혜의 전담 기자들은 술자리에서 박근혜에 대한 취중진담을 늘어놓곤 했는데, '박근혜는 머리가 텅 비어가지고 고집만 세다', '여러 번 설명해 줘도 못 알아듣는데, 성질 같아선 한 대 패주고 싶었다'는 등의 극언을 내뱉곤 했다고 한다.[72]

  • 전여옥 전 의원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박근혜는 당 대표 시절 최순실을 대동하여 대구방송 임원들과 식사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는데, 최순실은 먹던 젓가락으로 특정 반찬을 가리키며 '저 반찬 좀 이리 줘 봐요'라고 임원에게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반찬을 박근혜 앞에 갖다 놓자 박근혜는 만족해하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는데, 그 때 박근혜의 표정은 엄마가 자기 앞에 좋아하는 반찬을 놓아줬을 때 아이가 짓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고 한다. 또한 박근혜는 무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최순실의 반응을 살폈고, 최순실이 고개를 끄덕여줄 때마다 흐뭇해했다고 한다.

  • 친박의원들은 박근혜의 마음에 들려고 온갖 아부와 찬양을 하였는데, 박근혜의 모습에서 빛이 난다던지, 너무 아름다웠다는 등 아부도 3류급이었다고 한다. 전여옥 전 의원이 꼽는 아부의 최강자는 김기춘으로, 거의 예술의 경지에 오른 수준이었다고 한다. 박근혜는 김기춘의 아부를 들을 때면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 한나라당 대표 시절 당 인사가 부동산 대책에 대한 브리핑을 한 적이 있다. 브리핑이 끝난 후 박근혜에게 궁금한 사항이 있냐고 묻자, 박근혜는 '그런데 근저당권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던져 참석자들을 경악시킨 적이 있다. 부동산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부동산 대책회의를 한 것인데, 한마디로 쇠 귀에 경 읽기를 한 셈이다. #

  • 전여옥한나라당 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박근혜는 유세연설이 있을 때마다 미리 손바닥만한 종이에 연설문을 적은 뒤 외워서 연설을 하였는데, 문제는 하루에 많게는 20곳의 유세장소에 연설을 다니더라도 연설의 내용이 종이에 적은 내용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단 거다. 이를 본 기자들은 박근혜의 연설을 '립싱크 유세', '판박이 유세'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 신문 사설이나 칼럼의 내용을 읽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여옥 전 의원은 증언한다. 심지어 자신을 칭찬하는 칼럼마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전여옥 전 의원에게 '이 칼럼이 날 칭찬한 거냐'고 물어본 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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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은 박근혜의 대선후보시절 홍보물인데, 자기가 직접 물을 떠다 먹는 걸 자랑이랍시고 홍보하다가 애기냐? 네티즌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박근혜의 최측근이었던 전여옥 전 의원은 박근혜가 당 대표를 맡던 시절 비서실장들이 박근혜의 옆에 찰싹 붙어서 물 심부름을 도맡아 해서 기자들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어, 물을 직접 떠다 먹는다는 위 홍보물조차 연출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 전여옥 전 의원이 박근혜의 보좌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박근혜는 자신의 집에서 10년간 일하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단 한 번도 선물을 준 적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기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박근혜의 선물을 받고 감격한 아주머니는 그날 저녁 집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으려고 했는데, 막상 먹으려고 보니까 너무 질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1년도 더 넘은 고기를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떠넘긴 것이다.인성

  • 박근혜 특유의 올림머리 헤어 스타일은 실핀 10개 이상으로 고정 시켜 만든다고 한다. 이 머리 모양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는 평이 많다. 젊은 시절부터 해 왔는데, 최근에는 보기 힘들지만 젊은 시절이나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 초반 단발 머리라던지 잠깐씩 다른 헤어 스타일을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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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 현빈을 이상형으로 꼽았다. 현빈에게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하거나, 현충일 추념사의 낭독까지 맡기기도 하였다. 채널A의 '풍문으로 들었쇼'에 의하면, 최순실게이트가 터진 후 박근혜와 이름이 같이 거론되는 걸 부담스러워한 현빈 측에서 서둘러 강소라와의 열애설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 현빈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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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탤런트 송중기의 열렬한 팬이다. 송중기가 주연으로 출연한 '태양의 후예'의 애청자인 박근혜는 송중기를 청년 애국자로 추켜세우며 'K-스타일 허브' 한식문화관 개관식에 초대하여 송중기와 함께 약과를 빚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그 뒤 박근혜는 안종범 수석에게 지시하여 소위 '송중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라고 지시하는데, 송중기의 발자취를 영상으로 만들고 건물 안에 송중기의 입간판을 세우게 하고, 관광공사tv에 송중기 광고를 내보내게 하고, 송중기가 주연한 드라마인 태양의 후예의 홍보자료를 보완하라고 하는 등, 관련 세부적인 사항을 직접 지시하였다. 이후 관련 예산도 26억원에서 171억원으로 급증하는데, 이로 인해 박근혜는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팬질을 하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였다는 비난을 받는다. # 정치평론가 최진봉 교수는 "대통령이 팬심으로 특정연예인을 콕 찝어 세부적인 특혜를 직접 지시하는 것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면서 "개인의 사심을 채우느라 국정에 악영향을 끼친, 안 좋은 사례"라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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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기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멤버인 민호에게 ‘K콘 2016 프랑스’ 안내를 맡기기도 했다. 박근혜는 샤이니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그룹"이라고 극찬하였으며, 민호 역시 박근혜에게 "피부가 좋은 이유가, 한국 화장품을 써서 그런 것 아니냐"고 화답하기도 하였다. #

  • 대통령 선거 연설 중 배경에 있는 새누리당 로고 앞에서 묘한 위치선정으로 사진이 찍히자, 고양이귀가 연상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 대통령 재임 중 이용했던 관용차 중에는 특수 제작한 2세대 현대 에쿠스 방탄 리무진이 있다. 시판되는 에쿠스 리무진과는 길이 등에서 큰 차이가 난다. 여담으로 취임식에서 국산차를 의전용 차량으로 사용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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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에쿠스 리무진을 타고 있는 박근혜

    ▲ 2015년 대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열린 '무인이동체 및 엔지니어링 산업 발전 전략 보고회' 당시 현대자동차 전자제어개발실이 만든 현대 제네시스 2세대 모델[73]베이스의 자율주행차를 시승하는 장면이다. 여담으로 뒤의 인물은 국가과학자문기술위원회 부의장이자 울산과학기술대[74] 초대 총장이자 마지막 총장인 조무제 전 총장.

  • 운전은 대통령 당선 전까지는 직접 하였던 듯 하다. 강남 면허장에서 2011년,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는 동영상이 찍히기도 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박연대는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하는 쾌거를 맛봤으나, 박근혜 팬클럽인 박사모가 기자회견장을 점령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한나라당 의원이 출동하는 소란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같은 정치인을 지지하는 두 단체에서 일어난 싸움이라 주목을 받았다.

  • 형제자매는 박재옥, 박근령, 박지만 이렇게 셋이다. 언니 박재옥은 전처 김호남 소생인지라 이복동생들과는 나이 차이가 굉장히 벌어지는데,[75]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 외엔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다. 문제는 동생들. 여동생 박근령은 최근 친일 관련 실언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었고, 남동생 박지만은 마약사범으로 구속된 전력이 꽤 유명하다. 박근혜가 최태민 일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동생들이 무지 싫어했기 때문에, 큰 가족행사 이외엔 남매들과 관계를 거의 끊고 살았다고.

  • 젝스키스 멤버이자 가수은지원과 친척관계다. 박정희의 누나 박귀희의 친손자, 즉 5촌 관계로서 은지원 입장에서는 진외당고모, 약칭으로 고모라고 부르는 사이다. 2011년 같이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으며, 박근혜가 대선 후보였던 시절 선거운동에서 지원 유세를 했던 적도 있었다.[76] 대통령의 8촌 이내의 가족 및 친척들은 특별관리대상이 됨으로서 은지원도 그 덕택을 누리게 되었다.[77]

  • 박근혜의 가톨릭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며, 불교 법명은 '해당화'이다. 믿는 종교는 불교지만, 종교 활동을 한 이력이 다소 독특하다. 가톨릭을 믿은 적도 있고 불교를 믿은 적도 있는데, 둘 다 세례 및 수계만 받았다. 다만 한나라당 불자회의 회장이 정적김무성이던 시절에도 빠지지 않고 한나라당, 새누리당의 불자회는 물론 다른 불교 행사에도 나갈 정도로 불심은 있다.

  • 어떤 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 중 지금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는 말에 자신의 촌평을 붙여 놓았다.기사.

  • 국회의원 재직 시절 본회의장에서 잠을 자거나 볼펜을 세우는 행동을 해 반대파의 빈축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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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중국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매우 초보적인 수준으로, 기본적인 4성조차 흉내내지 못하고 있다. 영상 2분 45초부터 젊은 시절에 5개 국어를 익혀서 국제적 감각을 길렀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 그런데 중국 칭화대에 방문해 한 중국어 연설을 보면, 기본적인 문장 암기는 고사하고 보좌관이 미리 써준 연설문을 힐끔힐끔 보고 읽는 데다가, 그나마 성조도 전혀 지키질 않아서 여러모로 큰 웃음을 선사했다. 영어와는 다르게 중국어는 성조가 틀리면 알아듣기 힘들다.마마마마마마마를 성조만 넣어서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박근혜의 어학 능력 부족 자체가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다.

  • 신경민 의원이 간담회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박근혜는 5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면서도 복잡하지 않은 국회 길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고, 국회출입기자들이 질문할 때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얘기를 하곤 하였다고 한다. #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 중 오바마 대통령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리버리하다가 엉뚱한 대답으로 넘어가서 뉴스가 되었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오바마 대통령이 10여 분간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한 뒤, 박 대통령이 차례가 되자 머뭇거린 것. 이 상황에서 오바마의 발언은 "Poor President Park doesn't even remember what the other question was"였다. 이게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자. 어찌 됐든 북핵위기에 대한 질문에 답변은 '중국이 강한 조치로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었다. 영상.

  • 2016년 5월 1일에 이란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때 히잡을 착용하겠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다. 박근혜는 상대 문화 존중이라는 명목으로 착용하겠다고 했는데,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슬람 국가가 아니며 이란의 속국도 아니다"라는 반응과 "굴욕적이다"라는 반응이 공존하고 있다. 참고로 히잡이슬람교의 유입이 시작되는 나라나 사우디아라비아 수준의 극렬 이슬람 국가가 아닌 좀 강도가 약한 이슬람 국가에서는, 적지 않게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물건 중 하나다. 영화배우 이자벨 아자니는 아예 히잡 반대 운동을 주동하기까지 한 적이 있었다.

  • 2016년 4.13 총선 선거운동 당시 박근혜 대통령 존영 논란이 있어 화제가 되었다. "새누리당, 탈당한 4인은 대통령 '존영' 반납하라" 실질적인 재산 가치도 없는 사진 가지고 반납하네 싫네 하는 것도 화제가 되었지만, 왕조시대나 독재 시대에나 나올 법한 특정 인물의 사진에 대한 극존칭인 존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더 화제가 되었다. 다만 더불어민주당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을 두고서 존영으로 지칭했다. 존영이 뭐길래 그 밖에 7월 14일 주한미군 사드 배치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경북 성주군에 배치하겠다고 발표하자, 고령 박씨 문중에서 이에 대한 항의로 대통령 사진을 떼어 버리고 아레 사진처럼 쓰레기통에다 아무렇게나 구겨서 처박아 놓맜다. 경북 성주군은 박 대통령 선영(조상의 묘소)이 있는 마을로, 증조부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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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통 관련 행사에 여러 번 참석했다. 2015년 4월에는 호남고속철도 개통식에 참석했고, 2015년 8월에는 경원선 남측구간 철도복원 기공식에 직접 DMZ-train을 각부 장관들과 함께 타고 백마고지역으로 간 덕에 경원선에 경복호가 떠서 수많은 철도 동호인들이 몰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광주대구고속도로 확장개통식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 탁구를 즐겨하는 듯 하다. 젋은 시절에 탁구를 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며[78], 문제가 된 늘품체조 시연 때도 체육 동호인들과 탁구를 했다고.#

  • 전직 국회의장 등 정치 원로들은 박근혜가 최대한 빨리 하야를 하게 되면 2017년 4월에 하야한다고 했다. 그 이유인 즉 하야를 위한 각 정당별 경선 및 대선 준비도 그렇고 정권 인수 준비도 존재하는 등 준비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 대선을 하기 위해서는 각 정당벌로 대선 후보에 누굴 올려 보낼지를 결정하는 일명 '선거 속의 선거'라 할 수 있는 경선을 치러야 하고 경선에서 후보로 당선된 사람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다. 이에 불복하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박근혜를 최대한 빨리 하야시키려면 지금 당장 경선을 해야 하며 그랬을 때 기준이 2017년 4월에 박근혜가 하야하는 것이다.

  • 집권 초기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란 점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군주인 선덕여왕과 비교하는 기사 등이 많이 났다. 물론 대중적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위인으로 알려진 선덕여왕이기에, 박근혜의 지지자가 아닌 이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정했다. 그러나 박근혜 집권 중반부를 넘어가며 실정이 점차 드러나면서 선덕여왕과의 비교가 부적절하다는 평이 늘어나는 한편, 비현실적인 찬양과 신화로 점철된 선덕여왕의 실제 역사적 행보가 알려지면서 이전과는 반대 의미로 박근혜와 닮았다는 평이 다시 늘어났다.

  • 여담으로, 박근혜는 2016년 6월 국회 개원연설에서 취임사는 꿈으로, 퇴임사는 발자취로 쓴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79] 그로부터 1년도 안 되어 대통령 자리에서 파면당할 것을 예상한 사람은 당시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 2015년의 위안부 합의로 인해서 한국 내에서는 친일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던 최규하를 제외하고 국가원수 자격으로 일본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적이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다. 역대 국가 원수 중에서도 유달리 해외 순방이 잦았던 박근혜임에도 정작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일본을 가지 않은 점은 상당히 의외인데, 박근혜 정부의 전반기는 오히려 일본에서는 반일 인사에 가깝다는 평을 들을정도로 일본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위안부 합의 이후에는 잇따른 정치적 실패로 인해 사실상 레임덕에 빠져버려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80] 그리고 이후 대통령 자리에서 파면됨에 따라 국가 원수자격으로는 일본을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 마가렛 대처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집권 초기에는 영국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마가렛 대처인데 파면된 후에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마가렛 대처와 같다. 박근혜 본인도 롤모델 중 하나로 마가렛 대처를 꼽았으며, # 실제로 대처처럼 독단적으로 정책을 추진한 면이 있다.# 그러나 대처는 적어도 자신의 사상에 입각한 정책을 펼치려는 자주성, 실행하는 행동력과 정책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데 필요한 언변을 갖추었고, 자신을 보호받아야 하는 여성으로 부각시켜 동정표를 얻으려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았으므로 일개 민간인에게 정신적으로 휘둘린 박근혜와는 능력 면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게다가 대처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지지율이 치솟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포클랜드 전쟁에 맞대응해 사력을 다해 맞붙었고, 결국 이겨서 재선에 성공했다. 집권 말기에 내부의 등돌림과 여론의 압박에 어느 정도 스스로 사임한 대처와 달리 박근혜는 끝까지 버티다 파면당했으며, 파면 이후에도 불복 투쟁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게다가 재선에 당선된 대처와는 달리 박근혜는 자기 임기조차 다 채우지 못했다.

  • 유난히 18이라는 숫자와 인연이 깊다.[81]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기 기간동안 청와대에서 지낸 기간이 18년이었고, 박 전대통령의 사망 그 후의 칩거[82] 기간도 18년이었다. 또한 정치에 입문하여 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후 탄핵소추안 가결로 정치 생명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이 18년이었다. 거기에 파면된 이후 구속전까지 자택에 머물렀던 기간[83]18일이다. 심지어 3월 30일 자택을 나와 다음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까지 18시간이 걸렸다.[84] 화룡점정으로 2017년 6월 22일, 서울 지역에서만 동명이인개명 신청이 18건이 접수되었다고 한다. # 개명 신청 사유로는 박근혜란 이름으로 좋은 뉴스가 연일 보도되는 상황과 더불어 '박근혜'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갖는 선입견으로 인해 이를 감수해야 하는 주변 사람들의 미묘한 시선이 개명을 신청한 이유로 알려지고 있다.그리고 현재는 18년이라고 불리고 있다.

  •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들의 친필이 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친필이 훼손되어 있다.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소행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펜으로 out 이라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이 한 것으로 보인다.

  • 박근혜 집권 1개월 차인 2013년 3월에 올라온 네이버 지식in에 '대통령이 탄핵 당해 감옥에 갇혀 백발이 된 꿈'을 꾸었다는 내용의 질문이 탄핵 이후로 화제가 되었다. 지식인 링크

  • '삼성동 아주머니'로 오랫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식사를 담당했던 김막업 씨의 인터뷰가 기사화 되었다.# 그러나 인터뷰를 보면 "박근혜는 절약정신이 강해 뇌물을 받지 않을 것"이라거나 "꼼꼼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등 박근혜에 대한 동정론을 자극하는 발언이 다수 있기에, 내용을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심지어 김막업은 "박근혜는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막업의 발언에 대한 반론들은 차고 넘친다. 박근혜는 이미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정치자금으로 돈가방을 받았다는 증언#부터 이전 해명과는 달리 최순실의 뇌물에 직접 개입하였다는 정황#까지 드러나고 있으며, 대국민담화에서조차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후보자 자격 검증회에서는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조순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거짓말을 하거나#, 최태민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등# 김막업의 발언에 대한 반론은 나무위키의 새 항목을 만들어도 모자랄 정도로 차고 넘친다.

  • 거울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증언이 나왔다. 청와대에 '거울방'을 만들고 잠시 머무르는 곳에도 거울과 장막을 특별히 주문했다고 한다.거울방 기사 거울왕국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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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6월 즈음에 박사모로 추정되는 단체쪽에서 현재 박근혜는 진짜 박근혜가 아니라 일란성 쌍둥이 유형 복제인간이라는 설을 주장한 바 있다(?)
    '도사·신세계'란 범죄조직이 박근혜의 클론을 만들어 국민을 속인 채 당선시킨 뒤 진짜 박근혜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이용해 철저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내용.
    물론 이는 복제인간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철저한 개소리, 헛소리불과하다. 게다가 사진 속 문서를 잘 보면 자연인 박근혜는 이미 죽어 있다고 써있다. 이게 사실이라도 애초에 진짜 박근혜가 이미 죽고 없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는 문서가 된다.

  • 세계에서 2번째로 탄핵 당한 여성 대통령이다.[85]

4.1. 어록[편집]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박근혜/어록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4.2. 각종 타이틀[편집]

각종 최초 타이틀이 많은데, 이승만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

  • 최초의 독재자의 자녀 출신 대통령

  • 최초의 여성 대통령

  • 최초의 영부인 대행 출신 대통령

  • 최초로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과반을 득표한 대통령

  • 역대 최다 득표수를 얻은 대통령[86]

  • 최초의 미혼 대통령

  • 최초의 대통령의 부녀 출신 대통령[87]

  • 최초의 이공계 학과 출신 대통령(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88]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

  • 6.25 전쟁 발발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

  •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최저 지지율(4%)을 기록한 대통령[89]

  • 헌정 사상 최초로 임기 중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는 대통령 뉴스기사

  • 헌정 사상 2번째로 탄핵안이 가결되어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

  •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 절차에 의해 파면된 대통령[90]

  • 헌정 사상 3번째로 검찰의 구속영장이 청구된 전직대통령

  • 헌정 사상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첫 전직대통령

  • 가장 오랜 시간 검찰 조사를 받은 전직대통령관련기사[91]

  • 영장실질심사 제도 도입 이래 8시간 40분이라는 최장 조사 시간 기록을 세운 피의자관련기사[92]

  • 헌정 사상 3번째로 구속 수감된 전직대통령

  • 헌정 사상 3번째로 부패 혐의 기소된 전직대통령

4.3. 대중매체에서[편집]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전유진[93]이, 제5공화국에서 고정민[94]이 연기했으며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이진아[95]가 박근혜로 출연했다.

정식 배역이 아닌 풍자까지 포함하면, <싱글벙글 쇼>에서 김미진, 9595쇼 등에서 전영미가 성대모사를, SNL 코리아 시즌 4에서 정성호가, 롤러코스터 격동 10분에서 성우 홍경화가 성대모사 및 코스튬플레이를 했다.

4.4. 자택[편집]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해 있으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1990년부터 2013년 대통령 취임 이전까지, 또 파면 된 이후 2017년 3월부터 거주 중인 공간이다. 파면 되어 자택으로 돌아온 이후 친박 단체들과 박근혜 개인에 관련한 여러 문제들과 얽혀 다시금 조명받은 곳이기도 하다. 원칙대로면 삼성동 자택은 자택이지 절대 사저가 아니다! 사저란 관저의 반대말로, 관저가 있는 자가 소유한 사적 거주지를 뜻하는 말이라 박근혜가 엄연히 탄핵되어 공직에서 파면되었으므로 삼성동 자택을 사저라고 부르는 건 옳지 않다.

한편, 박근혜는 구속수감된 이후 측근을 통해 삼성동의 자택을 67억 5,000만 원에 팔았다.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96]이 자택을 구매했다. 그리고 박근혜는 측근에게 명령해서 내곡동에 새로운 자택을 구매했다. 자택을 옮기면서 생긴 차액으로 막대한 변호사 수임료로 사용하기 위해 매각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자세한 사항은 박근혜/자택 문서로.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8

4월 재보궐선거 (대구 달성 국회의원)

한나라당

34,271 (61.3%)

당선 (1위)

[97]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

한나라당

37,805 (61.4%)

당선 (1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

한나라당

45,298 (70.2%)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

한나라당

50,149 (88.6%)

당선 (1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새누리당

9,130,651 (42.8%)

당선 (11번)

[98]

2012

제18대 대통령 선거

새누리당

15,773,128 (51.6%)

당선 (1위)

[99]

낙선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면 매우 안방 챔피언스럽다. 지역구는 무조건 대구 달성군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비례대표 11위의 경우 새누리당은 18위까지 안정권인데 실제로 박근혜가 비례대표로 당선된 그 선거에서 새누리당은 25위까지 당선되어 결과적으로 박근혜의 11위는 상위권이 된다.

물론 현재는 의미가 없어진 기록인데, 파면당한 공무원은 공직경력이 전부 말소되기 때문이다.

6. 저서[편집]

7. 관련 문서[편집]

8. 틀 둘러보기[편집]

역대 대한민국 영부인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8대

9대

10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프란체스카 도너

공덕귀

육영수

홍기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이순자

김옥숙

손명순

이희호

권양숙

김윤옥

*

김정숙

†: 박정희 대통령의 8대 임기 중이었던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가 사망 후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가 박정희 대통령 사망시까지 역할 대행.
*: 박근혜 대통령이 미혼인 관계로 부군이 없으므로 공석.

파일:Hannara New reverse logo v2.png 한나라당 대표

제3대
최병렬

제4대
박근혜

권한대행
김덕룡

권한대행
김덕룡

제5대
박근혜

권한대행
김영선

파일:Saenuri reverse logo cut.png 새누리당 대표

한나라 권한대행
황우여

한나라당 제13대 /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박근혜

초대
황우여

파일:국회상징.png 대한민국 국회의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제15대
김석원

제15~18대
박근혜

제19대
이종진


[1] 초상화 자체는 사실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진을 그대로 보고 베껴 그린 것이다. 제작 일화는 대한민국 대통령 초상화 문서 참조.[2]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5길 25.[3] 가톨릭에서는 세례성사도 받았고, 불교에서는 수계도 받았다. 박근혜의 가톨릭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며, 해당 기사. 불교 법명은 '선덕화'다. 해당 기사. 사이비 종교 관련 내용은 박근혜/평가/사이비 종교 논란 문서 참고.[4] 현재 당원권 정지 상태. 당원권이 정지된다고 해서 당적이 말소되는 것은 아니다. 참고[5] 탄핵이 소추된 2016년 12월 9일부터 탄핵이 인용된 2017년 3월 10일까지는 직무가 정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공식적인 재임 기간은 4년 14일이지만, 실제로 대통령 권한을 행사한 기간은 3년 9개월 15일이다.[6] 입춘 이전 출생이므로 용띠가 아니라 토끼띠다.[7] 위로 15살 차이나는 이복언니 박재옥이 있다. 고로 아버지 쪽으로는 차녀다.[8] 1974년 8월 15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퍼스트 레이디 권한대행을 지냈던 것은 모친 육영수가 총격으로 사망한 뒤부터, 김재규가 부친 박정희를 암살할 때까지 맡았다는 얘기이다. 2012 대선토론에서 이정희가 했던 유명했던 말인 '유신 독재의 퍼스트 레이디'는 여기에 기인한 말이다.[9] 지지자들은 최초의 부녀(父女) 대통령이라는 데에 큰 의의를 부여하며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만으로 유권자들의 표를 얻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정치 경력으로 보면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당 대표로 재임하며 각종 재보궐 및 지방선거에서 40:0이라는 스코어로 완승을 이끌어 내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점을 들어 아버지로부터 정치적 감각을 물려받았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10] 다만 후술하듯, 현재로선 과학기술 관련 지식이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배웠던 내용을 망각했을 수도, 혹은 애초에 배운 것이 없을 수도 있다.[11] 퇴임 이후 비리 등으로 법정에 서거나 검찰 수사를 받게 되는 경우는 있었고, 대통령 친인척의 문제로 (2012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국회부의장을 지냈던 6선 국회의원. 즉 현직 정치인이었다.) 재임 도중 대통령의 친인척이 구속되는 사례도 있었으나 대통령 본인이 피의자로 특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대통령은 헌법상 불소추특권이 있어서 탄핵 이전 구속은 면했다. 그러나 파면 후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함에 따라 역대 최장 시간의 영장실질심사 끝에 구속당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12] 검찰 "'피의자 박근혜' 적용 혐의는 모두 13개"[13]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제7조(권리의 정지 및 제외 등)② 전직 대통령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제6조 제4항 제1호에 따른 예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에 따른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아니한다. 1. 재직 중 탄핵결정을 받아 퇴임한 경우 2.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 <이하 생략> 덧붙여서, 예우가 박탈되었다고 해서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것까지 부정되지는 않는다. 헌법에 규정된 대로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지위가 박탈되기 위해서는, 이 국민투표가 위법해서 무효라는 판결이 있어야 한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문서에서 적혀 있듯이 선거무효소송(2013수18)을 하였지만 2017년 4월 27일 대법원이 각하판결을 내렸다. 뉴스[14] 원래 탄핵 계산은 법적으로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었음을 선포한 일이 아니라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즉 퇴임일은 2016년 12월 9일로 보는 것이 합법적입니다.[15]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동창이었다.[16] 스캔한 성적증명서 참고.[17] 3월부터 8월까지 있었으므로 학위 과정을 위한 유학이 아니라 어학연수라고, 제부 신동욱이 파파이스를 통하여 정정하였다.[18] 최태민과 난잡한 성관계를 가졌고 그 때문에 최태민을 닮은 차은택을 총애했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 가깝다.[19] 이 과정에서 10.26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에게 6억(현재 물가로는 수백억 수준)을 받아 논란이 되었는데, 이후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증여세 납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 또다시 논란이 되기도 했다.[20] 두 재단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도 사실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지, 한 일은 거의 없다. 당시 육영재단에 근무했던 이의 말에 의하면, 권위적이고 영부인처럼 행동하였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부모가 생전에 세운 (뺏어서 이름을 바꾼) 재단이었기 때문이다.[21] 문고리 3인방+이춘상이 아니다. 혼동하지 말자.[22] 여기서 측근 4인방을 최순실로, 영남대학교를 청와대로 바꾸면 바로 이 사건이 된다. 되돌아보면 박근혜가 대통령이나 정치인으로서의 자질 따위가 없었다는건 이 시기에서부터 이미 드러났었다.[23] 그 때 본인의 자서전에는 'IMF 사태를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적혀 있다.[24] 정작 동생인 박지만은 국민회의 김대중후보를 지지했다.[25] 상대는 새정치국민회의 엄삼탁 후보였다.[26]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했을 당시 한나라당김영삼이 정치에 입문시킨 민주화 계열을 주축으로 이회창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당을 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전두환 시절의 민정계조차도 당에서 축출된 마당에 그 이전 세대인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박근혜의 당내 입지는 당연히 매우 형편없을 수밖에 없었다.[27]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서 당 총재직은 폐지되었다. 당 대표는 선출직인 대표최고의원으로 바뀌었는데 첫 선출직 대표가 훗날 친박계의 거두가 되는 서청원이었다. 이후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하자 사퇴한다.[28] 당 총재가 공천권을 휘두르던 시절, 김영삼이 개혁 길공천을 표방하면서 많이 끌어들이기도 했고, 97년 대선 직전 민주당이 정권 교체냐 3김 청산이냐의 갈림에 있을 때 3김 청산을 주장하던 인사들이 이회창 지지로 돌아서면서 넘어가기도 했다.[29] 대립의 근원을 앞으로 당긴다면 2000~2001년 전후로 나타나 이어진 민주당 정풍 운동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이후 대선 과정 및 대선 자금 수사, 대북 송금 특검 등으로 곪아 터졌다.[30]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절인 1972년에 법무부 과장으로서 유신 헌법의 초안 작성에 핵심적인 역할로 관여하였고, 유신 정권 말기에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인연이 있다.[31] 12년 뒤,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 박근혜는 본인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당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탄핵이 인용되어 대통령직에서 완전히 파면되었다.[32] 엄밀히 따져 말한다면, 국회의원도 대의제라는 정치 제도하에서 국민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 인물이기에 이 말은 옳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당시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리고 국회의원과 달리 대통령은 전 국민이 투표해서 뽑는다는 차이도 있다. 다만, 박근혜가 파면된 탄핵소추는 많은 국민들이 원했다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와는 성격이 다르다.[33] 그러나 정동영 의원의 노인 발언으로 막판 표심을 잃고, 최종적으로는 과반을 조금 넘긴 152석을 확보하게 되었다.[34] 지금은 숙적이 된 김무성 전 대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된 걸로 알려져 있다. 김무성 전 대표는 박근혜 대표 밑에서 당 사무총장으로 일했고,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박근혜 캠프에서 조직 담당으로 일하며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렸지만, 2009~2010년 세종시 문제로 의견이 갈리게 되었고, 박근혜 의원은 '친박에 좌장은 없다'는 말로 사실상 그와 결별하였다.[35]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등[36] 젊은이 투표 독려 발언 중 "60대 이상은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라는 발언이 노인 폄하라는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정동영 문서 참조.[37] 정동영의 노인 발언 때문에 152석 밖에 못 얻었다는 말이 정설이다.[38] 이것으로 박근혜는 차떼기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실패로 몰락하던 보수정당을 살려내며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잡고 선거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로 떠오르지만, 후보자 선출을 위한 한나라당 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2016년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결국 자신이 살려냈을 당시의 모습보다 더한 지옥의 구렁텅이로 대한민국 보수정당을 추락시켜 버렸다.[39] 현재의 자유한국당이 그 당시 박근혜 대표 체제의 한나라당과 비슷했다. 다만, 지지율 결집은 없다는 것이 그 때와 다른 점이다.[40] 이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도 같이 촛불 들고 나갔다.[41] 출처는 전여옥 저서 '오만과 무능'[42]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던 고건 전 총리도 불출마 선언을 하자 완전히 동력을 잃었고, 노 대통령은 2007년 2월에 당적을 정리하면서 사실상 무소속이 된다.[43] 박근혜 진영에서 자신을 음해했다는 취지에서 한 발언.[44] 박근혜는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모두 승리했으나, 전화 여론조사에서 뒤집혀 이명박에게 패배했다. 이 전화 여론조사도 사실 뒷말이 엄청 많은데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이명박에 대한 비판 문서에 나와 있다.[45] 12~16이라고 한 것은 친박계가 확실한 사람과 굳이 계파 분류를 하자면 친박계로 분류되는 사람을 포함한 표현이기 때문이다.[46] 이 때 자신의 지역구에서만 선거운동을 한 덕분에 무려 득표율 88.57%로 당선되었고, 이 득표율은 당해 총선 전국 2위의 기록이었다. 당시 1위는 박주선 의원.[47] 이 시기만 해도 친박이던 유승민 의원은 무사히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됐지만, 세종시 수정안 등의 문제를 두고서 비박계로 돌아선 김무성 전 대표는 이때 공천에서 탈락됐다.[48] 가장 18대 대선이 양극화가 심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여촌야도 현상은 이 때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9] 다만, 한동안 '민생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되었다.[50] 김무성, 김세연 등이 유명하다.[51] 서청원이 당대표를 맡았고 홍사덕이 원내대표를 맡았다.[52] 총선 직후에는 이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친박 세력이 전략적으로 야권과 공조하면, 친박+자유선진당+통합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 세력이 사실상의 여소야대를 이루며 친이계 한나라당의 정국 주도권을 뺏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천시에서,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자 친이계의 실세로 평가받던 재선 의원 이방호가 민주노동당 강기갑에게 178표 차이로 패배했는데, 이것이 친박 성향 한나라당 지지층이 단지 이방호를 떨어뜨리기 위해 강기갑을 지지하면서 벌어진 결과라고 평가받았다. 비록 현실에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만 제외하면 보수 성향에 맞춰 알아서 잘 협력했지만.[53] 한국의 정당은 200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모두 당권과 대권을 나누어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있는데, 이를 한 사람에게 몰아 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당과 정당 구성원의 생사여탈권을 넘긴다는 것을 의미한다.[54] 2017년 현 시점에서 보면 손수조, 문대성을 빼고 모두 나갔다.[55] 지방선거서 광역자치단체장이 새정치민주연합보다 1석 뒤진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기초자치단체장은 새누리당의 압승이었다.[56]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 화법 문단 참고.[57] 초창기 박근혜 - 문재인 - 안철수의 3자 대결에서도 모두 우위를 이어갔다. 다만, 박근혜 - 안철수 양자대결에서는 밀린 적이 있었다.[58] 그러나 이는 언어도단이다. 헌재 재판 중 탄핵심판은 대통령의 직무 위반 행위를 갖고 판단하므로 정치성이 아예 배제될 수 없다. 법리를 저버리고 정치적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안되겠지만, 탄핵심판에 정치성이 가미되는 건 불가피하다. 애초에 박근혜 변호인단도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의 정치적 대립 싸움으로 재판을 몰고 가려했다. 본인들의 변호 과정에서는 정치적 이념을 들먹여놓고 막상 판결에 정치성이 가미됐다고 비판하는 건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59] 서울일보에서는 "국가분열 조장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고, "꼼수를 쓴다고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요구하고 변호인단에게도 비난 자제를 촉구해야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지적했다.[60] 경호상 최단경로인 광화문 광장-남산3호터널-반포대교-사평대로-봉은사로 루트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에 이 루트를 선택할 것이라 추측되었고, 실제로 출발 1시간 전까지 이 루트로 방송을 통해 안내되고 있었으나, 갑자기 본문에서 언급한 루트로 바뀌었다. 일부 언론에서 이것이 "촛불집회의 본진인 광화문 광장을 보기 싫다는 박 전 대통령의 의지로 보인다"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광화문이나 종각을 거쳐 남산터널로 갈 경우 어느 정도 예상된 경로라서 인파들을 많이 마주칠 수 있으므로 그것을 피해 좀 우회하는 경로로 갔을 수도 있다.[61] 이날 6시 경에 출발한다는 것 때문에 공중파 방송에서는 KBS2를 제외하고는 정규방송을 중간에 중단하고 특별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MBC의 복면가왕, SBS의 꽃놀이패가 방송 중간에 중단되었으며, 퇴거가 늦어지면서 그 뒤에 예정되어 있던 예능 프로그램은 결방되었다. 이것 때문에 예능프로를 기다리던 시청자의 항의가 있었고, 중간에 중단된 프로그램에 대한 입장 표명도 없었기에 더욱 그렇다.[62] 다만, 광화문/종각-남산터널이 아닌 독립문-서울역-삼각지(의주로-한강대로)-녹사평-반포대교-올림픽대로를 택한 것은, 광화문/종각을 통해서 남산터널로 갈 경우 이미 예상된 루트이기도 하고 이쪽 인파들이 좀 있는 만큼, 구경 나온 이들과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거기다가 일요일 저녁 같은 경우 시간 특성상 서울 도심의 인적과 교통량이 적어, 인파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인적이 적은 시간과 우회 루트를 선택해서 퇴거한 것일 수도 있다.[63] 이걸로 박근혜가 매우 불안하다든지 자살한다든지의 동정론은 사라졌다.[64] 이는 박근혜 본인이 리플리 증후군이거나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의 행보를 했다고 보여진다. 탄핵 인용 결과를 승복한다는 것은, 곧 닥칠 검찰의 수사와 이미 특검이 밝힌 내용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재판이 상당히 진행되었고, 증거가 쏟아져 나와도 자기의 범행을 인정하지 않는 최순실의 태도와 매우 흡사하다. 사실 하나만 인정해도 그 여파가 엄청나기에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65] 네티즌들은 이 발언을 듣고 나서는 되려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진실이나 밝혀 보시지?"라고 박근혜에게 되물으며 분노했다.[66] 헌재에서의 탄핵 인용 직후 박근혜 본인을 포함한 청와대 쪽에서는 이틀 후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아무런 반응을 내어놓지 않았다. "대통령이 충격을 받았다"라는 기사만이 측근이나 대변인 정도를 통해 기자들에게 전해져 보도되었을 뿐,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없다. 그러나 박근혜가 삼성동 자택로 돌아가던 날 민경욱 의원을 통해 밝힌 내용, 탄핵 심판에서의 대통령 대리인단의 행동 등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박근혜 본인은 진심으로 탄핵이 인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박근혜 측에서는 검찰에서 구속영장을 당연히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67] 모든 정당을 통틀어서 첫 여성대선 후보는 13대 대선의 홍숙자, 완주한 첫 여성후보는 14대 대선의 김옥선.[68] 임시정부를 포함하면 이승만이 최초이다.[69]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시절 새누리당 내 이공계 출신 국회의원들의 모임에 회원으로서 소속되어 있었으며, 대선후보 때 이들과 같이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운영 필요성을 논하기도 했었다.[70] 백강 이태희라는 서예가가 고시생들이 답안을 휘갈겨 쓰더라도 알아보기 좋게끔 고안한 글씨체다.[71] 전여옥 저서 '오만과 무능' 55p[72] 전여옥 저서 '오만과 무능' 56p[73] 페이스리프트가 되며 제네시스 G80으로 이름이 바뀌었다.[74] UNIST가 울산과학기술원으로 전환한 이후는 총장직에서 물러났다.[75] 육영수-박재옥 12살 차이, 박재옥-박근혜 15살 차이. 그래서인지 박재옥은, 아버지의 새 아내인 육영수를 여사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76] 공인이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이유로 잠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친척 일을 도울 수도 있지"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77] 사실 은지원이 1978년 생으로서, 태어나자마자 박정희가 사망하기까지 1년 간 같은 혜택을 누린 적이 있었다.[78] 모친 육영수 여사 역시 탁구를 즐겨했다. 육 여사와 당시 최전성기였던 한국 탁구계의 레전드 이에리사가 자주 탁구를 쳤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에리사는 육영수 여사, 박근혜와의 이러한 인연으로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공천 받아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79] 朴대통령 "취임사는 꿈으로, 퇴임사는 발자취로 쓴다" [80]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수면위에 오른 후에 일본 방문을 계획하였으나 이후 반대 세력의 어마어마한 비판으로 흐지부지 되었고, 마침 박근혜 탄핵 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권한이 정지되었다.[81] 청와대 생활 18년. 국회의원 되기 전까지 18년.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82] 사실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을 뿐 육영재단 등을 통한 대외활동은 꾸준히 했다.[83] 순수하게 머물렀던 기간.[84] 30일 오전 10시 9분 ~ 31일 오전 4시 45분으로 18시간 30여분 정도 걸렸다.[85] 첫번째는 브라질지우마 호세프.[86] 총 1,577만 3,128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선거에서 박근혜와 문재인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의 득표율 총합이 1%도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실상 문재인 한 사람과의 대결에서 이긴 것이라 이렇게 된 것인데, 그래서 문재인에게는 "가장 많은 득표를 하고 낙선한 대통령 후보"라는 기록이 추가되었다. 이는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나 빅 매치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전 기록은 2002년 대선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얻은 1,201만 4,277표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물론 2위로 낙선한 문재인까지 이 기록을 깼다.[87]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88] 이전 대통령들의 대학 전공은 이승만 - 철학과, 윤보선 - 고고학과, 최규하 - 영어영문학과, 김영삼 - 철학과, 이명박 - 경영학과이다. 김대중노무현은 고졸이고, 박정희는 괴뢰국 만주국의 군대인 만주군의 장교 양성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들 중 신경군관학교 출신(그 이전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해 소학교 교사를 하기도 했다)이고, 전두환노태우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89] 한국갤럽 2016년 11월 4주 정기 여론조사 링크[90] 단, 임시정부로 범위를 넓히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긴 했다.[91] 기록은 21시간 25분.[92] 전 최고 기록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약 7시간 30분.[93] 아역 탤런트 출신으로 MBC 마지막 승부에서 장동건의 여동생으로 출연했다. 현재는 중앙일보 선데이 매거진 디자이너 겸 기자로 일하고 있다.[94] 본명은 고은님. MBC 28기 공채 탤런트로 단아한 외모로 주로 사극의 단역이나 단막극 위주로 활약한다.[95] SBS 1기 공채 탤런트로 무사 백동수에서 장미로 출연했다. 당신의 여자, 어머님은 내 며느리, 달콤한 원수 등 SBS 아침연속극에 주로 출연하는 중.[96] 홍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인 전재국 씨 소유의 허브빌리지를 매입한 이력이 있다.[97] 전임자 김석원이 쌍용양회 회장직으로 복직하기 위해 사퇴하였다. 이에 따른 재보궐 선거.[98] 2012년 11월 의원직 사퇴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대선에 출마하는데 의원직을 사퇴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경쟁자였던 문재인도 의원직을 유지했다) 당시 박근혜가 대선에서 당선되지 못하면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강수를 두는 과정에서 의원직을 사퇴했다.[99] 직선제 개헌 이후 가장 많은 득표수와 득표율로 당선된 후보이다. 낙선한 문재인 후보도 대선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수와 득표율을 받고 낙선한 후보이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결정(2016헌나1)에 의해 파면.[100] 남편 한병기 전 의원[101] 남편 신동욱 공화당 총재[102] 부인 서향희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