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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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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공식명칭

민주자유당
(民主自由黨, Democratic Liberal Party)

약칭

민자당

창당일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

해산일

1995년 12월 6일 (신한국당 창당)

선행조직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1990년, 3당 합당)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5-1
(여의도동 14-8, 극동VIP빌딩)

대통령

노태우, 김영삼

국회의원

149석 / 299석(14대 국회)

당 색

파란색 (#003990)

이념

보수주의, 반공주의

1. 개요2. 창당 배경3. 당명을 둘러싼 잡음4. 집권에서 개명에 이르기까지
4.1.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5. 당가6. 민주자유당 출신 정치인7. 역대 선거결과8. 일본의 가상정당명9. 관련 문서


1995년에는 로고가 변경됐다. 바뀐 로고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렀다. 바뀐 로고


진행 순서

1990년: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과 과정

1

민주정의당(1981년)

통일민주당(1987년)

신민주공화당(1987년)

2

민주자유당(1990년)

1. 개요[편집]

파일:민자당.jpg

대한민국 현 보수정당의 아버지

현재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의 모태가 되는 정당.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으로 출범하여 1995년 12월 신한국당으로 개명하기 전까지 존속한 한국의 집권보수정당. 1990년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일명 민정계), 야당이자 그 당시 가장 지지율이 높던 김영삼 계열의 통일민주당(일명 민주계), 김종필 계열의 신민주공화당(일명 공화계)이 3당 합당해서 출범했다. 창당부터 개명 당시까지 계속 여당이었으며 약칭은 민자당.

2. 창당 배경[편집]

기존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은 야권 후보의 분열로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전체 299석 가운데 125석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진 것. 이후 이루어진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 등에서 탈탈 털리면서 민주정의당야당과의 합당을 통해 이러한 정국을 돌파하려고 했다.[1]

처음에 노태우는 당시 제1야당[2]평화민주당과 합당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10년이 채 안되었던 시기라는것을 감안하면 당연히 엄청난 무리수였고 김대중의 거부로 무산되면서 김영삼김종필을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각제 개헌을 밀약으로 내세웠다. 결국 1990년 1월 22일, 갑작스럽게 노태우와 야당의 두 대표는 합당을 선포했다. 민주당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지만, 김영삼의 일대일 설득 끝에 대부분 합당에 참여했고, 이탈자는 5명(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장석화)에 그쳤다. 공화당에선 김현 한명만이 합류를 거부하였다. 여기에 무소속이었던 정몽준, 문희갑, 유한열 3명이 참여하면서 민주자유당은 299석 가운데 218석(민정127 + 민주54석 + 공화34 + 무소속3)을 차지하는 초거대여당으로 출범하였다.

3. 당명을 둘러싼 잡음[편집]

민주자유당이란 이름은 우연찮게도 일본 자유민주당과 어순이 반대인데다 유력 정당간의 합당[3]이라는 형성과정의 유사성[4], 의석의 과반을 넘는 집권 거대 보수 정당이라는 점 등이 비슷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자유민주당에서 따왔다는 속설이 야권에서 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김영삼 총재의 경우엔 신당 창당 과정에서 일본자유민주당을 여러번 강조했다고 하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외국 나가서 그런 말을 한적 없다'고 부정하기도 했다. 본격 주어 없습니다의 선조[5] 한편 김종필은 이미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자민당과 교섭이 잦았던데다 자민당의 정국 안정 수완을 높이 샀기에 일본 자민당의 예를 여러차례 강조했다. 민자당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의 말실수[6] 를 두고 같은 해 2월 연설에서 10월 유신메이지 유신을 따라하더니 신당도 그렇다면서 일본 자유민주당 한국 지부라고 하지 그러냐고 비꼬았다. 결국 실증성보다는 이런저런 정황상의 심증이 속설을 부풀린 셈이다. 그래도 적절하긴 너무 적절하잖아 사실 민주자유당에도 민정계 출신이 대다수 존재했는데 이 때만 해도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민정계 인사들과 공화계 인사들이 있었다. [7][8]

사실 자유민주는 별로 특이하다고 할 것도 없이 전통적으로 한국 정당명에 흔히 붙었던 단어였다. 실제로 이미 1960년대에 야권 계열에서 창당된 같은 이름의 자유민주당도 존재했던 데다 민주자유당 이후에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쪽도 어감이 비슷하긴 마찬가지. 또 초창기 창당 과정에서는 민주통일당 등의 다른 당명이 거론되기도 했다. 더구나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름이라면 불과 창당 5년, 대선 3년만에 바꿀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9], 반면 그런 민자당을 "김영삼당"[10]인 신한국당으로 바꾼 김영삼이 더 압박이란 해석도 있다.

노태우 회고록 등에서 보듯, 민정계 인사들은 민자당 창당을 정치 안정의 초석으로 보았다. 그래서 훗날 민정계, 공화계를 축출하고 민자당이라는 '좋은 이름'을 바꿔서 총선과 대선에서 졌다(...)라고 까지 해석했다. 미련이 꽤 있었던 모양. 한편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정당명 개명은 민정계를 축출하고 당을 민주화시키며 자신의 슬로건인 "신한국 창조"를 상징하는 당연한 마무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당자체가 한국판 자민당을 꿈꾼 노태우, 김종필 등과 그런 거 없다였던 김영삼의 동상이몽이었을지도 모른다.

4. 집권에서 개명에 이르기까지[편집]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도 역사 내내 이루지도 못했던 전체 의석의 2/3를 확보했다. 그랬기 때문에 1990년 당시에는 자민당의 55년 체제처럼 "90년 체제"가 이루어질 것이란 분석이 상당히 우세했다. 대한민국 헌법 개정도 가능한 만큼 내각제 개헌을 창당 초창기부터 공약했기에 더욱 그랬다.[11]

하지만 내각제 개헌은 김영삼 등 대선 후보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다. YS가 삼당합당에 찬성한 이유가 DJ와 후보단일화 문제로 싸우기 싫었던 것임을 감안하면 내각제 개헌은 처음부터 지켜질 가능성은 없었다. 그리고 JP가 내각제를 주장한건 대통령제 하에서는 DJ나 YS와의 정면승부는 불가능한 상황[12]에서 자신이 가진 충청도표를 바탕으로 정부내에서 최대한의 영향력을 얻기 위한 면이 컸다.[13]

합당하고 나서도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의 계파 간 갈등이 상당했다. 이를 두고 당시 문화방송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가 날치기가 심심하면 벌어진데가가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나고 더군다나 물가상승률 마저 높아졌기에 1990년 양대 재보궐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속에 1991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기초의회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생각보다 선전을 거두었고,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막판 계란투척 사건과 야권단일화 실패, 투표율 저조로 광역의원 선거에서 564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그러나 공천잡음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자 난립+군부재자투표 부정사건+안기부 흑색선전물 배포사건이 겹쳐지면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9석만을 확보하며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다.[14] 일본 자민당은 중의원에서 과반확보 실패하는데 21년씩이나 걸렸는데 한국 민자당은 2년도 채 못갔다.

이후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주영이 조직한 통일국민당에 압력을 넣어 붕괴시키면서 이들 중 일부를 끌어들여 안정 과반확보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YS계와 JP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각종 당직에서 JP계가 축출되자 김종필을 위시한 공화계과 일부 민정계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그 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15개 광역단체장 중 5곳만을 건지고, 서울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은 물론 강남구서초구를 제외한 모든 구청장을 내주면서 패배한다.

1995년 11월 하순쯤에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노태우가 구속되고, 김영삼의 대선자금과의 연관성을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자, 당 쇄신 및 다음 총선을 대비하고자 당명을 바꿀 것을 검토한다.[15] # 이후 12월 들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한 후[16]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노태우를 잡아가둔 마당에 노태우와 함께 만든 민주자유당 간판을 계속 달고 있기는 좀 그렇잖아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 중에 민정계와 공화계는[17] 민주계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반면 민주계는 [18] 등 몇몇에 불과했다.

민자당 시절 민정계와 공화계 중에는 일부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이종찬(1936)을 중심으로 해서 새한국당을 창당해서 독립했다. 이종찬과 같이 당을 나간 사람들은 특히 YS에게 원한이 컸던 박철언, 이 외에도 김용환, 장경우, 이영일이 있었다. 다만 일부는 다시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19]

이후 1995년 연초에 김종필과 김영삼 양자간의 갈등이 지속되자, 일부 민정계와 공화계가 이에 가담해서 당을 나갔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를 중심으로 해서, 8선의 박준규 등의 대구경북권의 민정계와 충청권의 공화계 상당수가 짐을 싸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후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했던 세력들이 신민당으로 간판을 갈았다가, 다시 자민련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처남인 김복동 의원.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의 다수는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는데[20] 수많은 민정계가 아직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다.

흥미로운건 민자당이 간판을 내리자 자민련은 쾌재를 부르며 "정통 보수" "원조 보수" "민자당 적통"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자민이란 이름부터 노림수잖아

이 시기 당명 변경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동시에 개혁공천[21]과 함께 민정계 중심+민주계, 공화계의 1강 2약 구도는 민정계 대거 탈락+민주 중심의 구도로 바뀌게 된다. 당시 신한국당은 과반확보에 실패했으나 수도권에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했다.[22] 15대 총선 이후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민정계는 점점 쇠퇴하였다.

4.1. 신한국당과 한나라당[편집]

당명 변경으로 이미지 쇄신을 노렸던 신한국당은 1996년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반에 실패하고[23][24] 결국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한 책임론 부상과 더불어 경기도 지사였던 이인제의 탈당 등 악재가 겹쳐 당내 쇄신론이 일었고, 이에 당시 정치 신인이었던 이회창이 대쪽 이미지를 표방하고 총재직에 올라 당의 새 주도권을 쥔다.

이회창 후보는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25] 이는 정통 여당 민자당(신한국당)과 정통 야당 민주당의 결합이라고 선전되었다. 이로서 탈당한 JP의 자민련과, DJ의 동교동계를 제외한 상당수의 구 야당파(비 호남파) 정치인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야권의 영남 출신들이 대거 사라지면서 지역감정이 가장 강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다시 바꾼 보람도 없이 대선에서 불과 1.6%차로 석패하면서, 결국 이들의 여당으로서의 입지는 막을 내렸다. 한국판 자민당이 되려던 계획은 망했어요.. 1+1+1이 반드시 3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26][27] 이렇게 김영삼-이회창으로 이어지던 민주계가 장악한 한나라당은 이회창의 대선패배/민주당-열린우리당 간 갈등으로 인한 노무현 탄핵의 총선 후폭풍/민주계의 후신 손학규의 권력싸움 패배 등의 악재가 겹치며 점점 헤게모니가 TK를 기반으로 한 시장보수 세력 이명박과 군부 세력 박근혜로 흘러가게 되었고 다시금 반공 성향, 강경 보수 성향이 드리워지게 되었다. 지금은 경남이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의 접전 지역으로 변했지만 YS-이회창 시기에선 경남은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다. 반대로 경북에서는 한나라당의 비토가 커서 선거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정도였고, 박근혜가 들어오면서 점점 반대로 흘러가게 된다.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의 계보는 사실상 현 자유한국당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는 정당으로, 반대파들은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계보를 민주공화당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한편, YS계(민주계, 상도동계)에서는 김영삼이 창당한 통일민주당을 근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도 현재 자유한국당 당사에는 PK 민주세력의 상징 김영삼과 TK 군부세력의 상징 박정희의 사진이 같이 걸려있으며 영남 내에서의 민주계와 민정계의 갈등을 드러내주고 있다.[28]

5. 당가[편집]

작사는 김병걸, 작곡은 김강섭이 맡았다.

(1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달린다 세계로 미래로

개혁의 큰 물결로 꿈과 희망을
민주 복지 통일의 선봉에 서서
세계속의 한국을 이끌어 나가자

(후렴) 아 세계로 미래로 힘차게 가는 그 길
그 길에 우뚝 선 민주자유당

(2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뭉쳤다 하나로 뭉쳤다

희망의 새 정치로 더 크고 넓게
자유 평화 통일의 역군이 되어
세계속의 한국을 드높여 보자

6. 민주자유당 출신 정치인[편집]

민주자유당 소속이었던 정치인

소속기간

이름

직위

비고

1990년 3월 ~ 1992년 9월 18일

노태우

초대 총재

13대 대통령
민주자유당 창당

1990년 3월 ~ 1995년 12월 6일

김영삼

2대 총재[29]

14대 대통령
자유당 3대 국회의원
민주당(1955년) 4. 5대 국회의원
민정당 6대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초대 대표최고위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신한국당 명예총재

1990년 3월 ~ 1995년 2월 9일

김종필

대표최고위원

11, 31대 국무총리
민주공화당 6.7.8.10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9대 국회의원
신민주공화당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2대 대표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총재

1990년 3월

박태준

최고위원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32대 국무총리
1963년 육군소장 예편.
1981년 민주정의당 제11대 국회의원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
※ 구 포항제철(포스코) 회장

1990년 3월

김재광

상임고문[30]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1988년 국회부의장
충청북도 청주시[31] 출신
1993년 사망

1992년 ~ 1995년 12월 6일

이명박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 15대 선거법 위반 의원직 상실.[32]
한나라당 소속 → 새누리당 소속 → 무소속
2009년 6월 7일 청계재단 설립
17대 대통령
32대 서울시

1990년 3월 ~ 1995년 12월 6일

김무성

의사국장
의원국장

※ 삼동산업(주) 대표이사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국회행정실장, 기조실차장
1994년 제48대 내무부 차관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위 총괄국장
※ 제14대 김영삼 대통령후보 정책보좌역
※ 대통령 민정비서관, 대통령 사정비서관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한나라당 16대 국회의원(부산 남구)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 2007년 박근혜 경선후보 조직총괄본부장
※ 2008년 7월 한나라당 복당 [33]
※ 2008년 5월 18대 총선에서 친박무소속연대 출마 당선
한나라당 18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2014년 7월 ~ 2016년 4월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당대표)
새누리당 19대 국회의원(부산 영도구)
새누리당 20대 국회의원(부산 중구·영도구)
2017년 1월 ~ 11월 바른정당 고문

.

박희태[34]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13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16대~18대 국회의원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당대표
2010년~2011년 18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새누리당 상임고문

.

구상찬

.

1990년~1992년 민주자유당 정책위원장 보좌역[35]
2006년~2008년 한나라당 강서(갑)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2006년 한나라당 서울시당 뉴타운 정책개발위원장
2008년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중국 특사
2008년~2011년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서울 강서갑)

.

박대해

.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
통일민주당 국회 총무실 행정부실장
민주자유당 동래구 을(연제) 지구당 사무국장
한나라당 연제구지구당 부위원장, 중앙위원
한나라당 대선경선후보 박근혜 선대위 연제구 본부장
2008년 한나라당 제18대 국회의원(부산 연제구)

.

노재봉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이만섭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최병렬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김종인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김광수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상실
※ 국회의원직 사퇴

.

최불암

.

통일국민당에서 민자당으로 당적을 옮김.
통일국민당 14대 국회의원

.

박재홍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강용식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김영수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김영진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이현수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이재명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김영순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탈당

7. 역대 선거결과[편집]

8. 일본의 가상정당명[편집]

일본 만화소설에서 사실상 자유민주당을 등장시킬 때, 껄끄러움을 피하려고 '민주'와 '자유'를 뒤집어서 역순으로 써서 '민주자유당'이라는 가공의 당명을 만들어내서 쓰기도 한다. 다만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진짜로 민주자유당이라는 정당이 존재했다. 사회당과의 연정에 반대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클럽과 자유당이 합당해 창당한 정당이었지만 1950년에 자유당이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이후에 1955년에 민주당과 합당되면서 현재의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9. 관련 문서[편집]

[1] 실제로 84년도부터 민정당에서 자민당을 모델로 한 '2000년대 장기 집권 계획'을 계획하기도 했다고. (#)[2] 당시 70석[3] 더구나 자유(보수) + 민주의 구도라는 점이 그렇다.[4] 한국의 경우는 평민당, 일본의 경우는 일본 사회당이 부상할 때 이루어졌다.[5] 90년 2월 9일자 동아일보[6] 당시 초대 총재 겸임. 첫 전당대회 날부터 실수로 민주자유당을 자유민주당이라고 불렀다... (90년 5월 12일자, 5월 7일자 동아일보, 1990년 5월 7일자 매일경제 참조) 자기도 만들어놓고 헷갈린다 이거지[7] 허삼수, 허화평, 정호용, 이진우, 홍우준, 김윤환, 김영구, 박주천, 박명환, 이태섭, 최돈웅, 박희태, 김기춘, 김형오, 진의종, 권익현, 김용채, 김종필, 나웅배, 김명섭, 이웅희, 이인근, 이강두, 강상욱, 박준규, 채문식, 강경식, 김진재, 곽정출, 최영철, 구자춘, 유학성, 양경자, 정석모, 이광노, 양창식, 이도선, 심정구, 심명보, 이성호, 박준병, 함종한, 이승윤, 유경현, 채문식, 이종찬, 김종호, 안교덕, 이한동, 류돈우, 조종호, 노인환, 최병렬, 오세응, 서상목, 심국무, 류승원, 김숙현, 조진형, 조영장, 박종문, 허청일, 이춘구, 안무혁, 이학봉, 김유탁, 강우혁, 서정화, 강성모, 윤길중, 오유방, 정래혁, 서상린 등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출신들도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8] 당시 현역 의원들 중 김영삼을 지지한 경우는 서정화, 이세기, 노승우, 김영구, 이순재, 백남치, 김용채, 박명환, 박주천, 박범진, 김기배, 나웅배, 서청원, 김덕룡, 김중위, 정상천, 곽정출, 허삼수, 김형오, 정재문, 김정수, 박관용, 강경식, 최형우, 허재홍, 유흥수, 문정수, 신상우, 김운환, 서석재, 박종웅, 김진재, 송두호, 김복동, 박준규, 정호용, 강재섭, 김용태, 김한규, 최재욱, 서정화, 심정구, 강우혁, 조진형, 이승윤, 조영장, 남재두, 강창희, 이재환, 김인영, 남평우, 오세응, 이인제, 손학규, 김영광(정치인), 임사빈, 이성호, 이자헌, 정창현, 박명근, 이택석, 정영훈, 이한동, 안찬희, 이영문, 이웅희, 이해구, 류종수, 최돈웅, 류승규, 김문기, 이민섭, 박경수, 심명보, 김기수, 박우병, 정재철, 김재순, 이용삼, 이종근, 이춘구, 신경식, 박준병, 김종호, 민태구, 김용환, 황명수, 김종필, 이긍규, 조부영, 오장섭, 성무용, 함석재, 양창식, 황인성, 허화평, 서수종, 박정수, 김길홍, 박세직, 금진호, 박헌기, 김상구, 구자춘, 김윤환, 김동권, 류돈우, 강신조, 이상득, 황윤기, 이영창, 장영철, 유학성, 반형식, 김종하, 황낙주, 강삼재, 하순봉, 배명국, 정순덕, 김기도, 김영일, 정동호, 신재기, 신상식, 나오연, 김채겸, 김봉조, 박희태, 노인환, 이강두, 권해옥, 현경대, 양정규, 변정일 등 대부분의 현역 의원들이 김영삼을 지지했는데 이 당시만 해도 민정계와 공화계가 다수 포진해 있었다.[9] 사실 공화당, 민정당이야 그렇다 치고, 민자당의 정당사 5년은 최근의 정당사 가운데서는 '그나마' 나름 오래간 것이긴 사실이다. 또 그 반면으로 한나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이 1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심오한 뜻을 품은 당 의미도 아니었다.[10] 1992년 당시 김영삼 후보의 선거 슬로건이 '신한국 창조'였다.[11] 일단 민정계 + 공화계 등의 경우는 이종찬(1936), 서정화(1933), 김영구(1940), 신오철, 김용채, 오유방, 강성모, 남재희, 김기배, 유기수(1941), 김명섭, 나웅배, 이태섭, 김중위, 김진재, 유수호(정치인), 박준규(1925), 정호용, 문희갑, 최운지, 이정무, 김용태(1936), 이치호, 김한규, 서정화(1939), 심정구, 이강희, 강우혁, 이승윤(정치인), 조영장, 김인영(정치인), 이병희, 이대엽, 김문원, 임무웅, 김병용, 권달수, 이덕호, 장경우, 황철수, 전용원, 이성호, 정동성, 이자헌, 박지원(1934), 최무룡, 이택석, 이한동, 김영선(1932), 이영문, 이웅희, 이해구, 정해남, 한승수, 함종한, 최각규, 홍희표, 김문기(정치인), 이응선, 이민섭, 심명보, 박우병, 김재순, 정종택, 오용운, 이종근(1923), 이춘구, 신경식(정치인), 박준병, 김종호(1935), 김완태(정치인), 안영기, 김현, 윤성한(정치인), 김홍만, 박충순, 정일영(1944), 윤재기, 김용환(1932), 이인구, 김제태, 김종필, 이긍규, 조부영, 박병선(1925), 김현욱(정치인), 김종식, 이진우(1934), 김일윤, 박정수(정치인), 박재홍(1941), 김진영(1939), 정동윤(정치인), 김근수, 구자춘, 김윤환, 정창화(정치인), 류돈우, 황병우, 오한구, 이상득, 황윤기, 이재연, 장영철(정치인), 유학성, 김중권, 김태호(1935), 정순덕, 황성균, 이학봉, 안병규, 정동호, 신재기, 신상식, 박진구, 박희태, 노인환, 권해옥, 채문식, 윤길중, 정석모, 강영훈, 이병용, 박태준, 김동인, 이광노, 이윤자, 이원조(1933), 김종곤, 김인기(군인), 이동진(1931), 김길홍, 강재섭, 서상목, 박철언, 최재욱, 최창윤 등을 비롯해서 많이 있었는데 민주계의 경우에는 박용만(1924), 백남치, 김재광, 강신옥, 서청원, 김덕룡, 황병태, 김우석(정치인), 김동규(1932), 김광일, 김영삼, 정재문, 김정수(정치인), 박관용, 최형우(정치인), 허재홍, 정상구, 문정수, 신상우, 서석재, 이인제, 신하철, 최기선, 유기준(1924), 류승규, 박경수(정치인), 최정식, 황명수, 박태권, 오경의, 신영국, 황낙주, 심완구, 백찬기, 강삼재, 조만후, 박재규, 김동주(정치인), 김봉조(1939), 김동영, 강보성, 송두호, 김운환 등이 있었는데 이 때 민주계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12] 3김이라며 김종필을 김대중, 김영삼과 함께 묶기는 하지만 입지면에서 김종필은 다른 두사람과 비교가 안됐다. 애초에 김종필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야권운동가도 아니다.[13] 이에 발끈한 JP계는 YS측과 결별하여 훗날 DJ측과 연합하면서 다시 내각제 개헌을 공동 공약에 내걸고 승리하나,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다. 이건 사실 DJ측도 내심 바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넘는 의석을 움켜쥐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회창도 대통령은 하고 싶거든요[14] 총선 직후 무소속의원 영입으로 14대 국회가 개원할 때는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였다.[15] 이때는 아직 5.18 특별법 제정을 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전이었다.[16] 현역 민자당 국회의원이었던 허삼수, 허화평, 유학성도 구속되었다!![17] 이종찬(1936), 서정화(1933), 이세기, 김영구(1940), 이순재, 김용채, 박명환(정치인), 박주천, 박범진, 김기배, 나웅배, 김중위, 정상천, 곽정출, 허삼수, 김형오, 강경식, 유흥수, 김진재, 유수호(정치인), 김용태(1936), 김복동, 박준규(1925), 정호용, 강재섭, 박철언, 김한규, 최재욱, 서정화(1939), 심정구, 강우혁, 조진형, 이승윤(정치인), 조영장, 남재두, 강창희, 이재환, 김인영(정치인), 남평우, 오세응, 김영광(정치인), 임사빈, 장경우, 이성호, 이자헌, 정창현, 박명근, 이택석, 정영훈, 이한동, 안찬희, 이영문, 이웅희, 이해구, 류종수, 최돈웅, 김문기(정치인), 이민섭, 심명보, 박우병, 정재철, 김재순, 이종근(1923), 이춘구, 신경식(정치인), 박준병, 김종호(1935), 민태구, 성무용, 이상재(1934), 김용환(1932), 김종필, 이긍규, 조부영, 오장섭, 함석재, 양창식, 황인성(1926), 허화평, 서수종, 박정수(정치인), 김길홍, 박세직, 금진호, 박헌기, 김상구, 이승무, 구자춘, 김윤환, 김동권, 류돈우, 강신조, 이상득, 황윤기, 이영창, 장영철(정치인), 유학성, 김종하, 하순봉, 배명국, 정순덕, 김기도, 김영일(정치인), 정필근, 정동호, 신재기, 신상식, 나오연, 김채겸, 김봉조(1939), 박희태, 노인환, 이강두, 권해옥, 현경대, 양정규, 변정일, 박태준, 노재봉, 권익현, 이만섭, 정석모, 안무혁, 최병렬, 김종인, 박재홍(1941), 서상목 등이었는데[18] 노승우, 백남치, 서청원, 김덕룡, 정재문, 김정수(정치인), 박관용, 최형우(정치인), 허재홍, 문정수, 신상우, 김운환, 서석재, 박종웅, 송두호, 서훈(1942), 이인제, 손학규, 류종수, 박경수(정치인), 이용삼, 황명수, 김찬우(1933), 반형식, 황낙주, 김호일, 강삼재[19] 새한국당 잔류파는 이종찬을 따라서 국민회의에 입당했다.[20] 서정화(1933), 이세기, 김영구(1940), 이순재, 박명환(정치인), 박주천, 박범진, 김기배, 나웅배, 김중위, 곽정출, 김형오, 강경식, 유흥수, 김진재, 강재섭, 김용태, 김한규, 서정화, 심정구, 조진형, 이승윤, 조영장, 남재두, 이재환, 김인영, 남평우, 오세응, 김영광, 임사빈, 이성호, 이자헌, 정창현, 박명근, 이택석, 정영훈, 이한동, 안찬희, 이영문, 이웅희, 이해구, 류종수, 최돈웅, 이민섭, 박경수, 정재철, 박우병, 이춘구, 신경식, 김종호, 민태구, 성무용, 조부영, 오장섭, 양창식, 황인성, 김길홍, 김윤환, 김동권, 류돈우, 강신조, 이상득, 황윤기, 이영창, 장영철, 김종하, 배명국, 정순덕, 하순봉, 김기도, 김영일, 나오연, 박희태, 이강두[21] 혹은 민정계 몰아내기[22] 00년, 04년 총선에서도 계속 진행된 이런 '탈민정계' 흐름은 16대 국회에 당선된 소위 민정계 의원이 세명(이상득, 박희태, 강재섭)뿐이었다는 것으로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 세 명의 의원 중 한 명대통령의 형이 되어 당의 실세가 되고, 나머지 은 연이어 당 대표를 맡는다 한편 공화계 역시 지역들의 표심 변화와 탄핵 역풍으로 쇠퇴하게 되어, 17대 국회에서 자민련은 4석의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근데 2010년대엔 민정계도 많이 돌아왔네 누가 그리 될 줄 알았나 영영 은퇴 할 줄 알았지 [23] 이는 수도권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구 경북에서 자민련과 민정계 축출에 의한 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준 영향이 크다. 관련 해프닝으로 방송3사의 공동 조사에서 신한국당이 무려 175석을 얻는걸로 나타났지만, 예측이 완전히 빗나면서(실제 결과는 139석)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참고로 1995년 지방선거때 MBC에서 예측보도를 했는데, 이 때는 15개 광역단체장 당선자를 전부 맞혔다.) [24] 그 다음 총선인 2000년 총선에선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된다는 예측이 등장했으나 이 역시 빗나가면서 출구조사 무용론이 나오게 된다. 이후로도 총선 출구조사 결과는 번번히 망신을 당했고, 반면 대선이나 지방선거의 광역 결과는 매우 잘 맞추는 경향을 보면 표본의 크기 차이 문제라고 봐야한다.[25] 김영삼이 민정계 색을 지우기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듯 이 역시 이회창 대선후보가 김영삼 색을 지우기 위해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26] 애초에 득표율부터가 30% 중반에서-40%초반대로 생각외로 시너지 효과를 못냈고, 20대와 30대층으로부터 지지율이 별로 높지 않았다.[27] DJP 연합을 통해 여당 지위를 얻은 새천년민주당 역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분당과 하향세 등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다만 새천년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것에 비해 한나라당은 여전히 대형정당으로 남았다는 차이점이 있다.[28] 이승만의 사진도 있으나 자유당과 민주공화당 간에 큰 갭이 있어 그냥 '넓은 의미의 보수' 에서 걸어둔 듯하다.[29] 대표최고위원이었다가 총재로 변경[30] 김재광 국회부의장[31] 청주-청원 통합 이전의 청원군.[32] 링크[33] 프로필[34]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D%9D%AC%ED%83%9C[35] 구상찬-위키백과[36] 과반수 확보(194석->149석)에 실패하여 패배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민주당도 크게 의석수(75석->97석)를 늘린건 아니고 오히려 제3당인 통일국민당이 선전했다.[37] JP계가 자유민주연합으로 빠져나갔다는걸 감안하면 비교적 선전한 편이었지만 민주화 + 지방자치제 직후였기에 패배로서 여겨졌다. 특히 서울특별시장 선거 패배와 서울특별시 지역 구청장 선거에서 22곳을 내준 것이 패배의 결정적인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