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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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표어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창당일

2000년 1월 30일

해산일

2011년 12월 5일

당 색

주황색 (#EE7700)

정치적 스펙트럼

좌파

이념

민주사회주의
좌익 민족주의
진보주의

국제 조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옵저버)

해산 당시 대표

이정희
초선 (18대)

해산 당시 원내대표

권영길
재선 (17, 18대)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2가 25-1
종도빌딩 1, 2층

18대 국회 의석수 (최종)

5석 / 300석


1. 개요2. 당의 역사
2.1. 국민승리 212.2. 민주노동당의 성장(2000~2004)2.3.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분당(2004~2008)2.4. 분당 이후의 민주노동당(2008~2011)
2.4.1. 2008년 진보신당 분당 이후2.4.2. 2010년 이정희 지도부2.4.3. 2011년
3. 종북주의 성향
3.1. 당내 NL계의 성향3.2. 2006년 일심회 사건3.3. '종북' 논란이 제기된 배경과 구체적 설명
4. 노조 논란5. 역대 선거결과6. 여담

1. 개요[편집]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


진보정당의 실질적 기원이자 오래된 미래.

2000년 1월 30일에 창당해 2011년 12월 5일 소멸한 대한민국정당. 민주공화당(1963년), 한나라당 다음으로 가장 오래 당명을 유지한 정당이다. 1997년에 '민중 후보' 권영길의 15대 대선 출마를 앞두고 세워진 진보정당 '국민승리21'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 최후의 당대표는 이정희.

당 강령 등에서 국가사회주의사민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 시킨다는 점을 미뤄보아 민주적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추정된다. 민주노동당 이후에 탄생한 제도권 진보정당의 강령들은 거의 모두 이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기반으로 조금씩 변화시켜서 만들어져 있다.

고도화된 산업 국가의 좌파 정당으로서는 흔치 않게 민족주의 색채가 매우 강한 것이 특색이며, 북한 정권에 대한 온건 협력 노선은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1]

정의당 이전의 한국 진보정당 중에서는 유일하게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었던 정당. 16대 대선에서는 3자 토론의 한축으로 TV 출연이 가능했고, 17대 총선에서 비례 지지율 13%로 지역구 2석과 비례 8석을 확보하여 원내 3위 정당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18대 총선에서도 지지율 5%로 지역구 2석과 비례3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서 16대보다 조금 못미친 지지율을 받았다.

역대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중 지지율이 10%가 넘는 거대 정당은 민주노동당과 그 실질적 후신인 정의당뿐이다.(민주노동당 10년 4월 통계 13.3%, 정의당 18년 8월 통계 15%).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결과가 선거연대에 앞장선 민주노동당에게 유리했고, 통합논의로 인해 소위 좌파진보진영에서는 그 위상을 회복했었다. 그야말로 진보정당의 살아있는 희망이자 유일한 버팀목. 한편 처음으로 남북 연방제 통일 논의와 대북 유화정책을 주장한 원내 정당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서는 매우 논란이 많다.

주요 지지층은 영남 지역(특히 울산광역시, 창원) 대단위 산업 단지 노동자 및 대학생, 40대 이하 고학력 사무원 등이며 전국농민회연합회(전농)을 중심으로한 진보 성향의 농민도 일부 포함되었다. 물론 이들 계층에서 상대적으로 지지층이 두텁다는 것이지 그곳에 속한 사람들 대다수가 민주노동당의 지지자란 뜻은 아니다. 노년층, 자영업자, 비조직 노동자와 비 전농 농민에게서도 일정 정도 지지를 끌어내며 전국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한때는 호남에서도 농민을 중심으로 상당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지역색이 강한 경북, 전라, 울산 등지에서는 제2정당콩라인(= 유일야당) 기믹이다. 2010년 지방선거 항목 참조.


민주노동당 당가인 평등, 통일의 새 세상을 향하여(김문영 작사, 박향미 작곡)
곡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제목이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를 향하여 였으나 NL계 취향이 반영되어 변경되었다. 당가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정파간 힘겨루기가 있었다고 한다. #
희망찬 분위기의 음악도 좋고, 가사도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면서도 당내 모든 정파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도 당가로서는 최고라고 꼽는 경우도 있으며, 민주노동당이 사라진 이후로도 진보 진영과 학생 운동권에서 명곡으로 회자되는 곡이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
자유로운 민중의 나라 노동자 해방을 위해

오늘의 절망을 넘어 희망의 역사를 열어라
아아 민주노동당이여 이제는 전진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회가 평등하게
노동이 아름답게 민중이 주인되게

평등과 통일의 길에 어떠한 시련도 마다 않겠다
아아 민주노동당이여 이제는 전진이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kdlp.org'였다.

2. 당의 역사[편집]

2.1. 국민승리 21[편집]

1996년1997년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 이후,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정치영역에서 노동을 대표하는 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97년 3월 27일의 대의원대회에서 정당건설을 결의하게 된다. 그리고 NLPDR 성향의 전국연합, PD 성향의 진보정치연합과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다. 8월 18일 '국민승리21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추진위원회에서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추대하여 10월 26일 국민승리 21을 결성하고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결정했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이라는 정당명과,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NL냄새 물씬 나는 선거구호를 사용하는 바람에 PD 계열로부터는 비판받고,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해오던 NL 계열의 전국연합은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데다[2],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 중 대다수가 사표 방지 차원에서 김대중 지지로 쏠리는 바람에 결국 15대 대선 결과 1.2%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2.2. 민주노동당의 성장(2000~2004)[편집]

비록 대선에서는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49명의 후보를 내어 22명을 당선시켰다. 진보 성향의 기초의원, 구청장의 당선으로 자신감을 얻은 진보정당 창당 준비 세력은 2000년 권영길을 대표로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목표는 2000년 예정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원내 진입이었다. 그러나 가장 공을 들였던 울산 북구 선거구에서 울산연합이 자파 세력을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기습적인 경선을 벌여 유력 후보였던 이상범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하고, 경선에서 승리한 민주노동당 최용규 후보는 간발의 차로 본선에서 패배했다. 거기에다가 남북정상회담 발표로 영남권에서 역풍이 불면서 명색이 대선후보였던 권영길도 창원에서 낙선하는 등, 조직력이 완비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원내 진입에 실패하고 만다.

다행히 민중당과 달리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세력은 흩어지지 않았고, 다시 당을 재건하면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헌법재판소에서 비례대표를 지역구 투표의 합으로 결정하는 방식에 대하여 위헌결정을 함에 따라 1인 2표제가 도입되면서 민주노동당에게 숨통이 트였다. 선거 결과 지역구에서는 2곳의 기초단체장과 2명의 광역의원만 배출했지만, 정당별 비례대표에서 8%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자민련을 제치고 일약 3당으로 도약, 정당보조금까지 수령하게 되었다.

연이어 열린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앞서 8%의 비례 득표를 바탕으로 대선 후보 토론회 참가를 요구했고, 결국 소송 끝에 참여가 허가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당 후보였던 권영길은 노무현, 이회창이라는 거대 양당의 후보들에 밀리지 않으면서 당의 인지도를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토론회 과정에서 그 유명한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는 유행어가 될 정도였고[3], 진보적인 공약을 토대로 지지율을 끌어올리면서 조봉암 이후 처음으로 100만표 이상 얻는 진보 후보가 되는가 싶었지만, 대선 직전 정몽준의 지지철회와 이에 따른 여파로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이어지면서 정말 아깝게 100만표에는 미치지 못하며 대선을 마무리했다.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은 확실시되었고, 그 의석 수가 문제라는 평가였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한 역풍은 민주노동당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았다. 총선에서 처음 도입한 1인 2표제는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이 비례 표에서만은 사표 방지를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투표할 수 있게 만들어 줬다. 총선이 끝나고 지역구 2석, 비례 8석으로 총 10석을 얻으면서 원내 진입 성공을 넘어 일약 제3당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막판 정당별 비례대표 득표 최종 집계 결과 토론회에서 신선한 비유를 선보인 노회찬이 당선되고, 9선 관록의 김종필이 낙선하는 장면은 민주노동당의 작지만 큰 성공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원내에 입성한 전 민주노총 위원장 단병호가 개원식에서 노동자를 대변하는 의원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외교관이 미래의 집권 정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당의 외교안보정책에 힘을 보태기 위해 사직하는 장면 등, 2004년 총선 직후에는 분명 미래가 밝아보였다.

2.3.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분당(2004~2008)[편집]

사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위기라고 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비록 조승수 의원이 애매한 선거법 위반 판결로 의원직을 잃고 이어진 재보궐선거에서 의원직 사수에 실패했지만[4], 그래도 작지만 나름대로 잘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속은 조금씩 곪아들어가고 있었는데, 바로 진보 진영의 해묵은 과제인 NL 계열에 의한 분란이었다. NL 계열은 원래 진보정당 운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5] 예상과 달리 민주노동당이 성장세를 보이자, 2005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입당하기 시작했다. 일단 입당하자 쪽수로는 절대 밀리지 않던지라 당직을 접수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른 분란은 내부에서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견제할 수 있던 기존 정치인들은 하필이면 당직과 의원직의 겸직 금지 조항에 따라 당직에서는 멀어진 상태였다. 어느덧 2004년부터 2007년 대선까지 당권은 새로 들어온 NL 계열이 장악하게 되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열린우리당의 몰락으로 귀결되었고, 그 과정에서 민주노동당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믿었던 울산 지역에서도 기초단체장을 내지 못하는 등, 분명 광역의원 15명(지역구 5명, 비례 10명), 기초의원 66명으로 만족하기에는 분명 아쉬운 결과였다. 하지만 비례 정당 득표에서는 당시 3당이었던 민주당보다 앞선 결과를 내는 지역도 있었기 때문에 아주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열린우리당의 해체 시기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만 했다면, 열린우리당 지지층 중 진보 성향의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 경선에서는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심상정을 제치고 권영길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권영길 자신이야 진보정당 운동에서 중요한 정치인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NL의 지지로 대선후보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선거 구호가 바로 코리아연방이었다. 당시 주된 논쟁거리였던 경제 문제(부동산 폭등, 양극화 등)와는 상관없는 이 구호로 인해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표도 날리면서 2002년 대선에서 얻은 3.9%보다도 못한 3.0%라는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친다. 당시 선거 구도 상 이명박의 당선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역대 민주당계 정당 최약체 대선후보(...) 정동영과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상황을 보았을 때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된 후보, 제대로 된 정책으로 대선에 임했다면 10%, 아니 정동영을 넘어 진보정당 운동 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2위 득표도 충분히 노려볼만 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면서 여당에 실망한 개혁성향의 표는 외려 문국현이 상당수 가져갔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석패도 아니고 참패를 당한 셈.

약간 부연하자면 애초에는 본인들의 독자후보를 내서 경선을 치르는 것이 당시 NL계열의 목표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진보정당 진영의 대선후보 급 명망가는 전부 非NL 계열... 당시 경선에 참가한 후보 3명이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이었는데, NL이 아무리 조직력이 뛰어나더라도 김창현(...)이나 그 아래 체급 후보로 이들을 경선에서 누르고 본선에 진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다보니 NL에서는 저 세 후보 중 그나마 가장 본인들과 가깝고 정파색이 옅던 권영길에게 접근, 조직적 지원을 매개로 경선과 본선에서 NL진영을 대변하여 선거를 치러줄 것을 밀약한 것이었다. 당원들이 바보도 아니고(...) 1차 경선 당시부터 당게, 진보누리 등 민주노동당 계열 웹에서 치열한 논쟁이 일었으나 결국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 겸 대선 2회 출마 경력자(...)인 본인의 명망에 더해 NL의 조직적 지원을 업은 권영길이 심상정과 붙은 결선투표[6]에서 51:49로 심상정을(그리고 당내 非NL 당원들을) 누르고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것. 선출 과정도 이랬는데 선거 운동 과정도, 결과도 거지같았으니 당시 非NL 당원들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일심회 사건에서 드러난 종북문제, NL 계열의 패권 문제, 당내 경선의 대리 투표 등 문제를 둘러싼 NL-PD의 해묵은 갈등이 폭발하면서 2008년 2월 심상정이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자, 당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잔류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2.4. 분당 이후의 민주노동당(2008~2011)[편집]

2.4.1. 2008년 진보신당 분당 이후[편집]

당내 자주파(NLPDR)를 비판하며 평등파(PD)가 빠져나가 진보신당을 창당하면서 PD 계열에 대해 비판이 집중되었다. 남은 세력들은 비교적 북한과 통일운동에 유화적인 NL 자주파가 중심이 되었다.

이후 NL-PD 이념 대립을 수습하기 위해 여기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전농 출신의 강기갑 의원[7]을 대표로 선출하였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하여 "MB 정권에 책임을 묻고 사과하지 않으면 국민적 저항을 부를 것"이라는 성명을 낸 바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며칠 후에 일어난 북한 핵실험에 대해 '북한핵은 북한의 행동 방식 '이라고 밝혀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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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2010년 이정희 지도부[편집]

지방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2010년 7월 이정희 의원이 대표로 새로 선출되면서 "유연한 진보"를 주장하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정희 대표가 대표 취임식날 입은 파란색 복장[8]이 상징성이 있다는 평도.

7월 말의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은평구 을에서는 민주당과 연대하면서 광주 남구에서는 "야4당" 단일후보로 민주당과 경쟁했다. 광주의 결과는 절반의 성공. 40%를 넘는 엄청난 득표를 얻었다만 당선엔 실패했다. 그리고 민주당의 은평을 재보궐 패배를 더 암담하게 만들어주었다.

대외적으로는 반값등록금 시위에 당대표 이정희의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비록 민노당과 밀접한 관계로 표현되는 한대련이 주도한 시위라곤 하지만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당, 정치인이 이정희이고 민노당이란 것에서 이슈가 되어 나름의 정치력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 하겠다. 하지만 이제는 다 필요가 없지

말기에는 진보신당과의 '진보대통합'이 이야기되었으며, 여기에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같은 진보신당과 PD계열의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통합'논의가 나오고 있어 명실공히 민주노동당은 좋든 싫든 진보대통합의 중심정당이 되었다.

참고로 언론 등에서 "민노당"이라고 언급하지만 민주노동당 스스로는 약칭을 규정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과거 04년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에게 "'민노당'이란 표현을 쓰지 말아달라"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대개 정당 이름에 자주 붙는 이름인 "민주"를 생략하면 (민주공화당의 예처럼) "노동당"이 되건만 그렇게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2.4.3. 2011년[편집]

2011년 1월 27일 오후 성남시 판교 주민센터에서 민주노동당 소속 이숙정 시의원이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로 여직원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숙정 의원은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가 여직원 이모씨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자 직접 주민센터를 찾아가 이씨의 머리채를 잡는 등 행패를 부리며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숙정 의원은 곧바로 주민센터에 찾아와 신고 있던 구두를 바닥에 벗어던진 후 서류뭉치를 집어던지고 여직원에게 무릎을 꿇으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주민센터의 CCTV 영상엔 빨간색 모자를 눌러쓴 이숙정 의원의 행패가 고스란히 담겼다고. 여직원 가족들은 이숙정 의원을 폭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하였다.#이에 대하여 민주노동당은 이정희 대표가 직접 트위터에 사과를 하였고 이숙정 의원에 대한 징계절차에 들어갔으나... 이숙정의원이 탈당해 버리는 바람에 닭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현행법상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는지라 이 문제로 비판을 계속 받고 있는 상황이다.

4월 재보선에서는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로 김선동 후보를 선출 순천지역에서 6번째 국회의원을 탄생 시켰다.# 4월 재보선이 워낙 화제거리가 많아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다곤 하지만 여러번 무소속에도 이기지 못했던 군소정당의 설움을 겪어온 민주노동당으로썬 후보단일화의 위력과 함께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울산광역시 등지에서도 성과를 거두어 전직 동구(울산) 구청장 출신으로 진보세력 독자후보를 천명하며 무소속으로 출마, 울산에서 유력한 복병이었던 이갑용[9] 후보를 민주노동당 김종훈[10] 후보가 압도(47.3% 대 4%...)해 버리고, 한나라당(43%)을 꺾고 당선되었다.

5월 말부터는 진보신당과의 소위 '진보대통합'문제가 당내 이슈가 되었다. 향후 진보정당의 미래에 있어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사항이라 이슈가 되기 충분하였고 5월 27일 1차적으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하지만 6월 1일 새벽까지 계속된 재논의 끝에 '진보대통합'합의안이 통과되었다.# 물론 이 합의안을 놓고 내외부적으로 논란이 많았다. 진보신당 내의 논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민주노동당도 당내 논라이 있었으나 진보신당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야4당"으로 공조하던 국민참여당이 가세했다. 특히 이정희 의원이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 <미래의 진보> 공동출간 소식이 들려오면서 나름 당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나 소수였다.

6월 18,19일에는 1박 2일로 일산신도시 킨텍스에서 대대적인 정책 당대회를 실시했다. 여기서 주요쟁점이었던 진보대통합 합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사회주의' 강령이 '진보된 민주주의'로 대체 되었다. [11] 이번 정책 당대회에는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가 참여하여 축하발언을 하였는데, 특히 조승수 대표는 지난 분당과정에서의 자신에 행보에 대해서 사과를 취지로 한 연설을 하였다. 이로써 진보대통합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 했다고 한다.

6월 22일에는 권영길 의원이 지난 대선과정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 진보대통합이 성사되면 다음 총선에서 불출마를 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젠 정말로 공은 진보신당에게 간 셈이다. 결과는 26일 진보신당 임시 당대회에서 나올 것이었는데... 2/3에 미치지 못하여 부결되었다. (음?)

이로인해 진보신당은 통합파와 통합 반대파가 갈라져버렸고, 당의 주축이었던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현직 대표와 상당수 지방의회 의원이 탈당해 "새진보통합연대"를 구축했다. 민노당은 진보신당 탈당파와 국민참여당과 함께 원샷 통합을 모색한다. 11월 안에 진보대통합을 이루어야 12월부터 시작되는 2012년 4월 총선의 후보자 예비등록이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11월 안에는 결론을 내려야했다.

결국 2011년 12월에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들을 주축으로 통합 진보정당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당 규모를 고려해 민노당이 50%, 국참당이 30%, 진보신당 탈당파가 20%의 지분을 가지기로 했다고. 대표는 이정희, 유시민, 노회찬이 공동대표로 추대될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기존에 기대했던 진보신당과의 통합은 무산되어서 도로 민노당이라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 통합진보정당은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등이 주도하는 야권 중통합 정당과는 연대는 하더라도 통합은 고려안한다고 선을 명확히 긋고 있어서 일부에서 기대했던 야권 대통합은 무산될것으로 보인다. 당내에서는 권영길 전 대표 등이 국민참여당의 합당을 반대하였고, 통합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다가 총선 이후 탈당했다.

어쨌든 민주노동당은 2012년 1월 통합진보당 창당과 함께 신설합당 방식으로 소멸하게 되었다. 창당한지 12년만이었다.

3. 종북주의 성향[편집]

3.1. 당내 NL계의 성향[편집]

민주노동당의 소위 '종북' 논란은 보수진영과 심지어 일부 진보진영 내에서도 논란을 제기했던 것인데, 실제 이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분리되는 원인인 당권 헤게모니 다툼과 무관하지 않다. 97년만 해도 PD계열이 창당에 주도적이었고, NL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우호적이었는데[12]이런 흐름이 대략 2001년부터 NL계가 본격적으로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13] 지부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14]에서 PD계 혹은 중립파가 대거 의원직에 당선되었기는 했지만 그 직후의 당직자 선거에서 NL계가 강력한 조직력[15]을 바탕으로 당직자 직 다수를 차지하며 당권을 쥐게 되었다. [16]

민노당의 주류입장은 분당과 관련하여 단순히 표면적이라 문제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 진보대통합 합의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제기했던 일부 진보진영측은 현재 완전히 지리멸렬한 상황.. 하지만 통합진보당에서 기어이 터졌다

3.2. 2006년 일심회 사건[편집]

2006년 10월 검찰은 전직 민노당 중앙위원 이정훈 등 5명을 당국의 인가를 받지 않고 북한 공작원 등과 접촉한 혐의로 체포하였다. 조사결과 이들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내부의 정치 동향 및 민노당 내부 주요 인사에 대한 인적사항 및 성향 분석 등이 포함된 보고서를 북한에 제출하는 사실상의 간첩행위를 하고 있었고, 특히 장민호(마이클 장)는 밀입북하여 조선노동당 가입 및 충성서약을 했음이 드러났다.

민노당은 이에 대해 이 사건이 국가보안법에 의한 민노당 탄압이라고 규정하였다. 후일 위키리크스에서 공개된 미국 외교전문에 따르면 당시 노무현 정부에 의해 이 사건이 실제보다 축소 수사되었으며 일심회 간첩행위 적발에 관여한 국정원장이 청와대의 압력에 의해 사퇴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실제로는 수사된 것보다 더 크고 광범위한 간첩행위가 존재했을 개연성이 있는 셈.

민노당은 2008년 2월 당대회에서 심상정의 주도하에 사건에 연루된 당내 인사에 대한 제명안을 제출했으나, 당내 다수파인 NL계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PD계열이 대거 탈당해 진보신당으로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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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내 일각에서 친북 논란이 발생하자 민노당은 더 친북해야 한다는 구호가 등장했다.

3.3. '종북' 논란이 제기된 배경과 구체적 설명[편집]

원래 '종북'이라는 단어는 당내외 좌파쪽에서 친북과 구분하여 만들어내 사용한 단어였다. 기존의 친북은 독재시절부터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하는 사람들 싸잡아 빨갱이로 매도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주체사상을 학습, 자신들의 철학으로 삼은 운동권 일부 세력을 따로 구분해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친북이라나 단어가 범주도 다르고 목적도 불순하므로, 실제로 북한정권을 추종하고 주체사상을 자신들의 철학으로 삼은 운동권 세력을 가리켜 만든 단어였던 것. 물론 초창기에는 군소정당의 당내 논쟁에서만 나오던 인지도가 낮은 단어였다.[17] 그런데 자주파들의 북한의 연이은 도발에 대한 옹호가 각종 논란을 불러오면서 이 '종북'이란 단어가 점차 수면으로 올라오게 되었다.[18]

2009년 11월 9일 일어난 대청해전에 대한 성명서 내용에서는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은 없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노선 변경만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좌초 논란이 불거진 천안함과 관련해서 민주노동당은 각종 논평을 발표했다. #

그해 10월에는 북한의 김정은 3대세습을 '북한이 알아서 결정해야할 문제'라 하여 또 다시 보수 세력의 비난을 받았으며, 민노당 울산시당에서는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던 경향신문에 대해서 북한 사회의 특이성과 똘레랑스를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면서 경향신문의 절독을 선포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정희 대표가 한 발언이 진중권 등 일부 PD계열 지식인들에게 비난받기도 했다.

같은해 가을 연평도 포격 사건에 이르러서는 이정희 대표가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이명박 정권은 똑똑히 봐야 한다'라는 말은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http://news.search.naver.com/search.naver?ie=utf8&se=0&mobile=0&tx=&where=news&query=%EC%97%B0%ED%8F%89%EB%8F%84+%EC%9D%B4%EC%A0%95%ED%9D%AC+%EB%98%91%EB%98%91%ED%9E%88&sm=tab_tmr&frm=mr 이 사건 이후 최대 규모로 이루어진 한미훈련이나 (이건 이전부터 쭉 반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정기적인 사격훈련에 대해서도 '전쟁도발' 위험을 이야기하며 반대하였다. 다만 이것은 진보정당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처사이다. 애초에 미국의 전쟁 훈련을 찬성하는 좌파 정당이란 있을 수 없다. #

2011년에 들어서도 '북한인권법'에 대해 '북한을 자극한다'면서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자 진중권은 5월 27일 진보대통합 합의안이 난항을 겪는 것을 기회 삼아 민주노동당에게 '종북을 못버리는 사이비 종교집단'이라는 말까지 쓰면서 극심한 비난을 쏟아냈다. 2011년 말 김정일의 사망으로 서울대에서 김정일 분향소를 설치하려던 학생이 민주노동당 당원에 한대련 소속인걸로 밝혀지면서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4. 노조 논란[편집]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창당한, 노동자 계급 정당을 표방했지만 2007년 1월 설립된 상근자노조에 대해 '당직자가 노동자냐', '상조회가 있는데 노조가 필요하냐', '다른 시민단체나 노조 내부에 상근자노조가 있냐',[19] '보수 세력에 빌미를 주는 것 아니냐'는 식의 당내 반발이 있기도 했다.[20] 이후 상근자들에 대한 임금이 체불되면서 노조가 당 지도부와 교섭을 시도했으나 지도부가 교섭을 거부하면서 '당 지도부와 악덕 기업가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21] 당 조직국장이라는 사람의 인식이 이러했으니..[22]

5. 역대 선거결과[편집]

6. 여담[편집]

도메인 주소가 http://www.kdlp.org였다.[23] KLDP.org와 도메인 주소가 유사해 해당 사이트 이용자들이 실수로 민노당 홈페이지에 접속하게 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1] 이 특징들은 주로 NL계가 정당을 잠식해가며 나타났다.[2] 전국연합 상임의장 이창복은 그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3] 당시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꽁뜨로 위 3명을 패러디한 토론을 내보냈는데, 이회창은 박명수가, 노무현은 배칠수가, 그리고 권영길은 김학도가 맡았다. 김학도의 성대모사는 권영길과 진짜 흡사해서 나중에 권영길이 당 홍보에 도움을 줬다고 직접 프로에 나오기도 했다.[4] 이 판결은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탄원서를 써 주기도 했다.[5] NL계열 중 대중노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舊전국연합이 명목상으로는 국민승리21 시절부터 진보정당운동을 지지하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민주노동당 초기부터 참여한 건 김창현으로 대표되는 울산연합 정도였다. NL에서도 극단적인 노선을 고수하는 범민련 같은 경우는 남한에서의 의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바가 전혀 없다. 왜냐? 통일 조국의 유일정당은 조선노동당 뿐이니까 [6] 셋 중 조직이 가장 취약한 노회찬이 1차에서 낙방했다. 권영길은 그렇다치고 심상정도 당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최대주주였던 금속연맹 사무처장 출신이었으니 뭐...[7] 강기갑은 중도파가 아닌, 그런 분류에서 아예 벗어나 있는 인물이다. 이른바 민족해방(NL) 계열과 민중민주(PD) 계열의 대립은 80년대 학생 운동권의 분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만 족보 따지지 않고 정세 인식을 두고 보면 전농은 PD보다는 NL 쪽에 가깝기는 하다.[8] 당시 파랑색은 한나라당의 상징색이었다.[9]노동당 대표[10] 현 20대 국회의원[11] 사회주의 강령은 진보신당, 사회당에도 없었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대체되었고. 물론 한나라당, 민주당은 말 할 것도 없고.[12] 정작 김대중은 1980년대에 미국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한 뒤에, 미국으로 망명을 갔고 이후 1985년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을때에도 미국 저명인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한총련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며 대통령 당선 뒤에도 클린턴 정권하고 친하게 지내고 한총련을 여전히 이적단체로 내비두는 등 친미적 정책을 취했다.[13] 김대중이 친미정책을 취한것도 있었고 애시당초 미국 덕분에 목숨구했는데 반미일리가...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2000년 총선에서 대거 정계에 진출한데다가, 남북정상회담의 영향으로 NL계의 세를 넓히기 딱 좋다는 판단도 있었다. 물론 외부(민주당 지지자 포함)에서 보기엔 그저 정신승리하는걸로 보였지만...[14] 다만 이전에도 말뚝을 박았던 민노당에 NL계 인사나 들은 있었긴 하다.(대표적으로 울산연합계) 물론 당시에는 다수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PK지역 지부에서 어느정도 영향력은 발휘하는 수준은 되었긴 했다. 물론 2000년 총선당시 울산북구 경선에서 쓸데없는 집념을 발휘하는 바람에 민노당의 원내진출이 실패했다는 흑역사가 있었다.[15] PD계가 평소에 대립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잘뭉치는 NL계와는 달리 잘 뭉쳐지지 않다보니 조직력이 약해서 득표에서 다수를 차지하고도 당직자직에서 대거 밀려났다는 후문이 있다.[16] 다만 NL들이 조직력은 강했지만 하나로 단합된 집단(결정적 일이 터질때는 잘 뭉쳤지만)까지는 아니라서 그 내부에서도 계파간의 성향다툼이나 이합집산같은것(그래서 특정계파(이를 테면 경기동부연합)이 특정 지부를 차지 할려고 하면 타 계파가이 이를 막기 위해 PD계나 다함께등 성향이 다른 정파와 손을 잡는 경우도 "가끔씩"은 있었다.)은 있었고 그 싸움에서 경기동부연합-광주전남연합(원래 광주전남연합은 인천연합과 연계가 있었지만 인천연합의 영향력이 점차 쇠퇴하게 되면서 경기동부하고 짝짜꿍하게 되었다,)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면서 2006년 당직자 선거에서 경기동부연합계가 당권을 차지하게 된다.[17] 3회 지방선거 당시 사회당의 서울시장 후보 원용수가 토론회에서 처음 '종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원래는 진보진영(운동권)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지만 이 단어가 발굴(?)된 이후로는 오히려 보수계열에서 더 자주 사용하게 된다.[19] 답을 한다면 있다. 당시 이런 의문들이 많았는지 아예 FAQ의 형태로 답변들이 만들어졌었는데, 노조 안의 노조의 예시로 든 것이 지하철노조상근자노조, 한국노총직원노조 등이었다.[20] 주로 NL계열에서(분당 이전이었기 때문에 NL과 비NL이 민노당 안에 같이 있었던 상황) 나온 반응이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정보를 아는 유저가 추가 바람.[21] 여기서 당시 민노당 당헌을 보도록 하자. '다섯째, 노동 기본권을 보장한다. 노동자의 권익과 노동조합 활동을 억압하는 악법들을 폐지하고 생산현장의 부당 노동 행위와 각종 억압을 없애고 자유로운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 행동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한다'[22] 당시에 '노동자의 적은 자본가인데 민노당에는 자본가가 없으니, 전세계의 자본가와 자본가를 등에 업은 남한 정부에 따져라'라는 얘기가 있기도 했다고(....).[23] 현재 독일어로 된 비트코인 관련 사이트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