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시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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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츠네의 초상화는 당대에 그린 것이 아니고, 모두 후대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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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노우라에 있는 요시츠네 동상. 이 동상 옆에 헤이케의 장수인 다이라노 토모모리가 공격하는 모습으로 동상이 있다. 요시츠네가 토모모리의 공격을 피해 다른 배로 점프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에 자세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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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義経/源義經
1159년 ~ 1189년 6월 15일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겐지의 대장군2.3. 이치노타니 전투와 임관2.4. 야시마 전투2.5. 단노우라 결전과 헤이케 멸망2.6. 코시고에장과 숙청2.7. 도망, 그리고 죽음
3. 요시츠네의 전술과 인격4. 유품5. 요시츠네가 칭기즈칸?6. 요시츠네 생존설과 가짜설7. 창작물에서
7.1. 의경기7.2. NHK 대하드라마 <요시츠네>7.3. 기타 창작물

1. 개요[편집]

일본 겐페이(源平) 전쟁기의 무장. 아명은 우시와카마루(牛若丸). 존호는 차나왕[1]. 통칭이 쿠로라서 미나모토노 쿠로 요시츠네라고 불리는 일이 많고, 겐쿠로 요시츠네로 불리기도 한다.

미나모토 가의 동량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교토에서 이름난 미녀 도키와 고젠[2] 사이에서 출생. 어머니의 미모 덕분에 미청년으로 알려져 있고, 남겨진 초상화에도 대부분 귀족적인 겐지의 귀공자로 그려져 있다. 다만 그의 초상화는 당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고 모두 전국 시대에서 에도 시대 사이에 그려진 것들이 많으며, 무용담과 전설에 다분히 영향을 받은 것.

요시츠네 사천왕이라든가 시즈카 고젠과의 로맨스가 유명. 그리고 동상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전설이나 무용담에서는 점프력이 뛰어난 인물로 나타나곤 한다. 무사시보 벤케이와 고죠 대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묘사를 보면 벤케이의 공격을 피해 점프해서 다리 난간에 착지한 것도 있고[3] 단노우라 전투에서는 집중공격을 피해 배와 배 사이를 뛰어다니며 도망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이른바 '팔척뛰기 전설'이다.

창업의 일등공신이면서도 팽당해 분하게 숨진 비극적인 운명, 여리여리 귀족적이었다는 외모, 무패의 상승장군 경력, 화려한 로맨스 전설 등 여러 가지로 영웅적이며 동정을 끄는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일본 역사인물 중 한 사람이다. 거의 제갈량을 방불케 할 만큼 일본 여기저기에 요시츠네와의 인연을 끌어대는 문화재나 유적, 전설이 퍼져 있을 정도.'判官贔屓'[4]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겐지의 지도자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9번째 아들(九郞)[5]로서 태어나지만 아기 때 헤이지의 난에 휘말려, 아버지 요시토모는 오와리 우츠미에서 부하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는다. 이 때 어머니 토키와 고젠이 헤이케 세력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첩으로 들어가는 대신 아들들의 구명을 요구하였고, 헤이케의 큰 어른이었던 이케노젠니가 죽은 아들과 닮았다는 이유로 겐지의 구명을 요구하는 등[6] 일이 겹쳐서, 요시츠네도 다른 겐지 일족들처럼 목숨만 붙은 채 쿠라마 산의 절에 유폐된다. 이 때 요괴인 텐구 키이치 호간의 딸과 밀통하여 아버지가 가진 육도와 삼략 등의 병서를 훔쳐내 배웠다던가, 무술을 전수받아 달인이 되었다는 등의 전설이 있다.[7] 후일 출가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히라이즈미로 도망쳐 히라이즈미에서 독자적인 정권을 구축한 후지와라 씨에게 의탁한다.[8]

2.2. 겐지의 대장군[편집]

1180년 형인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거병하자 이에 오슈에서 돌아와 후지가와 전투에서 막 헤이케에게 승리를 거둔 요리토모를 대면하고, 이후 겐지 군의 사령관이 되어 요리토모의 선봉에 선다.

한편, 헤이케는 겐지의 또 다른 세력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9]에게 쿠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참패하여 1183년 수도인 교토를 버리고 도주하였다(都落ち). 요시나카는 요리토모와 아슬아슬한 연합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본인의 행정능력이나 정치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데다가 군기가 잡혀 있지 않고 야만스런 군대를 이끌고 교토에 주둔했으니 교토는 삽시간에 혼란에 휩싸인다. 노련한 책략가였던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시나카가 제 입맛대로 조정과 황가에까지 손을 뻗치는 것을 막으려고 하다가 요시나카에 의해 감금당했고, 요리토모에게 SOS를 보낸다.

요시츠네는 교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우미 근처까지 진군하여 이를 요리토모에게 하나하나 보고하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고, 결국 요리토모를 제끼고 자기가 겐지의 수장이라 선언해서[10] 요리토모를 적으로 돌리는 등 자폭에 가까운 짓만 되풀이하다 인심도 잃고 군대도 대부분 흩어진 요시나카를 1184년 우지가와 전투에서 죽이고 교토에 입성한다.

2.3. 이치노타니 전투와 임관[편집]

헤이케는 겐지 가문끼리 동족상잔을 벌이는 동안 헤이케의 기반이었던 사이고쿠(큐슈 일부, 시코쿠, 츄고쿠 등의 서일본)에서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군대를 후쿠하라[11]까지 진출시켰다.

헤이케는 늘 그렇듯이 상당한 대군을 이끌고 있었는데다 이치노타니라는 곳에 진을 쳤는데, 이 곳은 북쪽은 험난한 절벽을 끼고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하고, 동쪽과 서쪽은 좁은데다 방어망이 튼튼해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으며, 남쪽의 해안에는 해양 세력이었던 헤이케의 대함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예 논외였다. 그야말로 우주방어를 구현한 거점이어서 겐지 군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요시츠네는 정찰을 나가서 사슴이 북쪽의 절벽을 오고 간다는 소리를 듣고 어? 그러면 말도 갈 수 있겠는데?라면서 단 70기의 기병만 이끌고 절벽을 뛰어 내려가서 헤이케를 기습한다. 겐페이 합전 내내 병사들이 영 오합지졸인 감이 있던 헤이케는 바로 모랄빵이 나서 처참히 패주하고, 요시츠네의 이름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가케오토시(崖落し)"[12]

이후 요리토모의 일차적인 논공행상이 이뤄지는데, 미나모토노 노리요리[13] 등 겐지의 장수들이 장원을 하사받았는데 요시츠네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서는 요시츠네는 보상을 강하게 바라고 있었는데 요리토모가 일부러 허가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 이 때부터 요리토모의 요시츠네 견제와 푸대접이 시작된다.

이후 요시츠네는 우선 겐페이 전쟁의 제일선에서 물러나 교토에 거주하는데,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에몬노죠(左衛門少尉)의 관위와 함께 게비이시(検非違使)의 한간(判官)[14]이라는 관직을 받았는데, 이 관직이 나중에 요시츠네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 정처를 맞이해 결혼한 것도 이 때인데, 요리토모가 주선한 결혼이지만 이 사토 고젠은 나중에 요시츠네와 죽음까지도 함께 한다.[15]

2.4. 야시마 전투[편집]

문제는 요시츠네를 견제하느라 수도에 남겨 두고 노리요리를 총사령관으로 내세웠더니, 노리요리가 이끄는 겐지 군은 영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 제해권을 완전히 쥐고 있는 헤이케 군 때문에 겐지 쪽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요리토모는 요시츠네를 다시 기용한다. 요시츠네는 1185년 초, 다시 법황에게 상주하여 헤이케 토벌의 최전선에 선다.

헤이케의 본진은 지금의 시코쿠 사누키 지방에 있는 야시마였는데, 제해권을 쥐고 있는 헤이케와 바다에서 싸울 방법도, 바다를 건널 방법도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요시츠네는 쿨하게 폭풍이 불면 적들은 우리가 안보일 터이고, 폭풍에 몸을 실으면 졸라 빨리 도착하겠네?하는 역발상을 하고 두려워하는 선원들을 위협해서 바다로 내몰아버린다. 그리고 폭풍우 덕에 보통 3일은 걸리는 항로를 4시간만에 돌파해서 시코쿠에 상륙한다.[16] 야시마 남쪽 아와에 상륙한 요시츠네 군은 겐지 측에 붙은 지방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가느라 본진인 야시마에 병력이 거의 없단 정보를 얻고 즉석에서 전격전을 개시한다.

요시츠네 군은 또 주변 민가에 불을 질러서 대군인 척 하고 본진을 급습했고, 헤이케 군은 다시 대혼란에 빠져서 단노우라 쪽으로 도망쳤다. 이 때, 배로 도망치던 와중에 헤이케 군은 미녀에게 부채를 들게 하여 겐지를 약올렸는데, 요시츠네는 이걸 보고 용맹으로 유명하던 부장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17]에게 "저 부채를 활로 쏴 맞추라. 맞추지 못하면 겐지의 망신이다"라고 하는데, 시게타다는 못 하겠다며 부하인 나스노 쥬로에게, 쥬로는 다시 부상을 이유로 자기 동생인 나스노 요이치에게 서로 미룬다. 그리고 요이치는 어쩔 수 없이 "나무 하치만 대보살!"하고 외치면서 활을 쐈는데 그게 부채에 명중했다! 그걸 보고 열받은 헤이케의 무사가 부채가 있던 자리에서 겐지를 약올리며 춤을 추자, 요이치는 이 무사까지 쏘아 죽였다. 헤이케는 완전히 사기가 꺾였고 겐지 군은 환호했다.

여담이지만 출격 전에 겐지의 참모였던 카지와라노 카게토키는 사카로우(逆魯)라고 하는 후퇴용 보조 노를 달자고 주장했으나, 요시츠네가 도망갈 수단이 있으면 사기가 저하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카게토키는 요시츠네를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멧돼지 같은 자라며 비난하여 큰 다툼이 벌어졌다. 게다가 카게토키는 폭풍이 부는 바다로 나가려는 요시츠네를 미친 자 취급하며 날씨가 개는 걸 기다려 천천히 출항했는데, 도착하니 이미 야시마 전투는 끝나 있었고, 기다리고 있는 건 기고만장해 있는 요시츠네와 군사들의 '6일의 창포'[18]라는 비웃음 뿐이었다. 카게토키는 깊은 원한을 품는다. 문제는 카게토키가 겐지 정권의 2인자로 꼽히는 요리토모의 심복인 데다가, 참소와 숙청 매니아였다는 것.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가자고 칼을 빼들고 소리치는 사령관이 참모의 눈에 미친 놈으로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니.

2.5. 단노우라 결전과 헤이케 멸망[편집]

헤이케의 해상 거점은 야시마 이외에도 나가토(후일 조슈, 현재의 야마구치 현)의 히코시마가 있었는데, 헤이케는 요시츠네의 기동전에 연전연패를 당하고 요시츠네의 승리로 움직임과 보급이 자유로워진 노리요리의 대군이 진출하면서 히코시마에 갇혀버린다. 게다가 요시츠네는 이번 결전이 헤이케의 세력을 물리적으로 괴멸하는 마지막 일전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토 내해의 토착세력인 쿠마노 수군, 코노 수군 등을 끌어들인 84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편성해 이번만은 소규모 전력을 이용한 기만 전술이나 기습이 아니라 대규모 결전을 준비한다. 전투 준비단계에서 카게토키는 무사에게 큰 명예가 되는 선봉을 맡겨 달라 청원했는데, 요시츠네는 자기가 선봉을 하겠다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카게토키는 자기 공로를 뺏으려고 그런다 생각했는지 총대장이 선봉을 서는 경우가 어딨냐. 저건 무사 감도 못된다라며 폭언을 내뱉었고, 양측의 가신들이 거의 유혈사태 직전까지 치닫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둘의 사이는 이미 빼도 박도 못할 철천지 원수가 되어 있었고, 이것이 나중에 요시츠네가 비운의 죽음을 맞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양군은 1185년 3월 24일 정오 간몬 해협에서 격돌했고, 초전에는 해상 세력인지라 바다를 잘 알고 조류의 흐름을 이용한 헤이케 세력이 겐지 군에게 우세를 점하며 쭉 밀어낸다. 그러나 물결이 바뀌고, 요시츠네가 당시는 비전투원으로 취급되어 살상행위의 대상이 아니었던 노잡이/키잡이를 조준사격할 것을 명령하여[19] 전세가 뒤바뀌고, 헤이케 세력은 괴멸당한다.

요시츠네는 헤이케의 맹장이[20][21] 육박전을 걸어 오자 배 사이를 펄쩍 뛰어서 순식간에 8척의 배를 뛰어 건너서 도주하는 묘기를 선보였는데, 이게 그 유명한 팔척뛰기(八艘飛び) 고사다. 헤이케의 주장이던 다이라노 토모모리는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볼 것은 다 보았다" 라는 말을 남기고, 갑옷을 두 벌 껴입고 닻을 짊어진 채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사령관이던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시녀, 헤이케 일족의 여자들, 신기 쿠사나기의 검을 껴안은 안토쿠 덴노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지만 죽기 무서워졌는지 허우적거리다가 살아나 구조된다. 이는 위의 토모모리가 자신은 헤엄을 잘치니 갑옷 한벌만 입고 뛰어들면 살지도 모르니까 두벌의 갑옷을 입고 닻을 껴앉은채 뛰어내린 것과 비교된다. 극도의 무능함으로 헤이케의 패인이 된 무네모리에 우호적인 서술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서에는 대부분 죽으려고 뛰어들었는데 뛰어들어 보니 죽기 무서워져서 헤엄쳐 살아났다던지, 비만해서 잠수해 죽으려고 해도 자꾸 물에 떠올라서, 그러다 잡혔다.라고 써 있다. 무네모리의 어머니이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후처인 니이노아마[22] 다이라노 토키코는 어디로 가느냐 묻는 안토쿠 덴노에게 "아미타불의 정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파도 속에도 도읍이 있나이다"라는 비감 어린 유언을 남기고 투신했다. 이로써 헤이케는 완전히 멸망했고, 헤이케 토벌은 끝이 났다.[23] 이후에도 도깨비게등 헤이케 잔당에 관련한 각종 전설이나 헤이케의 후손을 자칭하는 여러 호족이 각지에 나타나지만 헤이케의 정권은 다신 나타나지 못했으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아시카가 다카우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쇼군직을 계승하려면 겐지의 후계여야 한다는 암묵의 룰이 생긴다.[24]

여담으로 삼종의 신기가 모두 유실된 것은 아니지만 이 때 삼종의 신기 중 쿠사나기의 검이 어린 안토쿠 덴노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고, 끝내 찾지 못했다. 이외에도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삼종의 신기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신비주의에 싸여 정확한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보물이 유실되거나 한 역사가 있어서 황가가 가지고 있으면 삼종의 신기 취급. 요시츠네는 야사카니의 곡옥과 야타의 거울만을 확보하였다.

2.6. 코시고에장과 숙청[편집]

그런데 수도에 돌아오자 상황은 요시츠네에게 나쁘게만 돌아가기 시작한다. 우선 요시츠네에게 원한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던 카게토키는 교토에 귀환하자마자 요리토모에게 "요시츠네는 자기가 공은 다 세운 양 군다"라든가 하는 험담에 가득 찬 서찰을 보내기 시작하고, 막부의 2인자였으며 여러 사람을 참소해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만큼 권한이 막강했던 카게토키의 참소에 요시츠네의 기반은 뿌리부터 흔들린다.[25]

게다가 일전에 요시츠네는 케비이시 호우간의 직책을 받아버렸는데, 이것은 조정이 무사들을 분열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서로 싸우게 만들기까지 하던 책략가 고시라카와 법황을 극도로 경계한 요리토모가 절대 금기시한 이른바 "무단임관"으로, 요리토모의 중개나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관직이었다. 애초에 요리토모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깡촌이나 다름없는 간토 지방에 막부를 연 것도 조정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무사 정권을 수립하고 싶어서 고심한 끝에 내놓은 비책이었는데, 요시츠네는 형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요리토모는 겐페이 전쟁 중 무단임관을 한 무사들을 격하게 비난하고 가마쿠라에 입성하는 것을 금하는 서찰을 각지로 보냈는데, 여기엔 요시츠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놀란 요시츠네는 포로로 잡힌 다이라노 무네모리를 호송한다는 구실로 가마쿠라에 들어가 직접 형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탄원하려고 하지만, 가마쿠라의 외곽 경계선인 코시고에에서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발이 묶인다. 이에 요시츠네는 피눈물로 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서찰을 써서 막부의 중신이자 이름높은 정치가였던 오오에노 히로모토에게 보냈고,[26] 이 서찰이 바로 코시고에장이다. 후출사표처럼 위작의 의심이 있으나, 일본사에서 손꼽히는 명문이라 전문을 소개해 본다. 메이지 시대에는 서예 교과서에도 쓰였다고.

사에몬노죠 요시츠네, 감히 한 말씀 올립니다. 소인은 (주인인 요리토모의) 대관으로 발탁되어, 칙명을 받은 사자로서 역적을 멸하고, 선대의 궁술[27]을 세상에 드러내어, 회계의 치욕[28]을 씻었나이다. 그러나 크게 칭찬받을 터인데 오히려 무시무시한 참언을 당하여 막대한 공훈을 묵살당하고, 공이 있을지언정 죄는 없는데 (요리토모) 공의 진노를 사 오랫동안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양약은 입에 쓰고,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참언의 진실 여부를 가려 보지 않으시고, 가마쿠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시니, 진의를 말씀드리는 것도 할 수 없고, 그냥 맥없이 며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존안을 뵙지 못하니, 골육 동포의 정도 이미 공허해진 것 같습니다. 소인의 명운이 다한 것인지, 전생의 악업 때문인지, 아아, 슬프도다. 저 세상에 계신 아버님의 영이 되살아나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있어 소인의 비탄을 들어 주겠습니까. 어떤 자가 소인을 가련히 여겨 주겠습니까. 지금 새삼스레 말해 봐야 지나간 일일 뿐이지만, 이 요시츠네, 신체발부를 부모에게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마노카미 공(아버지 요시토모의 관직명)을 잃고 고아가 되어 어머님 품에 안겨 야마토 국 우다 군 류몬에 간 이래로,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나이다. 보람 없는 목숨을 부지할 따름이었으나, 교토 주변에 사는 것조차 어려워져 각국을 방랑하며 이곳저곳에 몸을 숨겨, 여러 토지를 집 삼아 사민 백성의 일을 하여 목숨을 잇는 형편이었습니다.[29] 그러나 때가 이르러 헤이케 일족 토벌을 위해 상경하여 키소 요시나카를 주륙하고 나서는 헤이케를 쳐부수기 위하여 어떤 때는 깎아지른 바위산에서 준마에 채찍을 가하고, 적에게 목숨을 잃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어떤 때는 망망대해에서 풍파의 난을 무릅쓰고, 이 몸이 바닷속에 가라앉고 시신이 고래 밥이 되는 것조차 꺼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갑옷을 베개 삼고 화살을 생업으로 삼았으니, 이는 구천에 계신 아버님의 영을 위로하여 오랜 숙원을 달성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일체 없습니다. 또한 이 요시츠네가 쥬고이노게(종오위하)의 관직을 받은 것은 실로 저희 가문의 큰 명예로 보기 드문 중임이며 이에 비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 하나, 지금은 다만 비탄에 깊이 잠겨 있을 뿐, 신불의 구원이 없다면 제 호소를 누가 들어 주겠습니까. 제신 제사(모든 신을 모신 모든 신사)의 쿠마노고오(熊野牛王) 보인(寶印)의 뒷면[30]에 맹세하며 전 일본의 신에게 서약하는 각서를 수차례 (요리토모에게) 보내었으나 여태 용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일본은 신의 나라이며, 신은 무례를 용납하지 않으니 달리 매달릴 곳도 없고, 오직 귀공(오오에노 히로모토)의 관대한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부디 저를 배려하시어 (요리토모에게) 전달해 주시고, 부디 계책을 궁리하시어 제게 잘못이 없는 것을 (요리토모가) 납득할 수 있또록 하여 저를 방면하도록 해 주신다면, 그 선행이 가문에 미쳐, (히로모토의) 자손에 길이 영화를 전할 터입니다. 또한 그리하면 소인도 오랜 걱정을 풀고, 일생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여기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리며, 요시츠네 삼가 서찰 올립니다.

겐랴쿠 2년(1185년) 5월 사에몬노죠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이나바노카미(오오에노 히로모토의 관직)께 올림


문제는 이 서찰을 요리토모는 읽어 보지도 않았고, 냉혹하게 요시츠네를 내친다. 요시츠네는 마음 한 가득 억울함과 비탄을 안고 쓸쓸히 교토로 돌아가야만 했다. 요시츠네는 홀로 교토에 돌아와 슬픔과 분노로 병을 앓게 되는데, 원수였던 카게토키가 당시 요리토모에게 반기를 들고 잠적해 있던 미나모토노 유키이에[31] 토벌의 안건으로 요시츠네를 방문한다. 철천지 원수인 걸 뻔히 알면서 요시츠네에게 카게토키를 보낸 이유는 당연히 요시츠네가 모반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염탐하러 보낸 것.

하지만 요시츠네는 병이 무거워 이틀이나 만남을 미루고, 이틀째에도 다 죽을상을 하고 간신히 만나 몸 상태가 이러니 유키이에 토벌은 미루자고 하는데, 카게토키는 이를 옳다꾸나 하고 극도로 왜곡해 "이틀 후에 만나자고 해서 이틀 동안 굶어서 낯빛 나쁜 척 하면서 유키이에 토벌을 미루자고 하더라. 뒤로 유키이에랑 내통하고 모반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라며 참소한다. 이에 요리토모는 요시츠네의 봉토를 박탈한 뒤 자객을 보내기에 이른다. 형제의 사이는 완전한 전면전으로 돌입한 것.

2.7. 도망, 그리고 죽음[편집]

암살 시도는 미수로 끝나고, 격노한 요시츠네는 자객을 손수 참수하고 이에 맞서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토벌 허가를 받아 유키이에와 협력하여 병사를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무사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면, 요시츠네는 무사들에게는 인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응하는 병력이 너무나 적어 실패하고 결국 오슈[32]지방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지에 요시츠네와 연관된 전설과 에피소드, 유적을 남기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가부키로도 남아 있는 칸진쵸이다. 칸진쵸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오슈로 도망치던 요시츠네 일행은 코야히지리(일종의 유랑 순례자)로 변장해 칸진쵸(사찰에 기부를 권하는 문서)를 전하러 간다는 구실로 요리토모 군이 지키는 관문을 지나려고 하지만 칸진쵸 인증을 요구받게 되고, 물론 그런 것이 없는 일행은 난관에 처한다. 그러자 승려 출신의 벤케이가 기지를 발휘해 아무것도 없는 백짓장을 들고 진짜 칸진쵸를 든 양 내용을 순간적으로 꾸며내 읽는다.그리하여 위기를 지나치려는 찰나, 이번에는 시종으로 변장했던 요시츠네가 종답지 않게 귀족적인 외모로 의심을 사게 되고, 벤케이가 다시 기지를 발휘해 주군인 요시츠네를 "너 때문에 가는 곳마다 의심을 받지 않느냐"라며 마구 두들겨패 "부하가 주군을 저렇게 팰 리가 없다"라고 생각한 경비병들에 의해 위기를 넘기는 이야기.(물론 벤케이는 나중에 싹싹 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관문의 수비대장이 겐페이 전쟁에 참전한 무사여서 요시츠네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지만 벤케이의 고충에 감격하여 통과를 눈감아 주었다는 미담이 딸려 있다.)

이외에도 도망치는 도중 배에서 단노우라 결전에서 전사한 헤이케의 다이라노 토모모리의 유령을 만나 배가 난파하려 하자 승려인 벤케이가 염불로 퇴치하는 이야기 등이 유명하다. 요시츠네가 해로를 택하지 않고 기나긴 육로의 도피행을 택한 데 대한 민간의 해석인 듯 하다.

이후 오슈로 무사히 도망쳐서 일전 요시츠네의 보호자였던 후지와라 가문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에 몸을 의탁했으나 히데히라는 곧 병사하고 만다. 히데히라는 후계자인 아들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에게 '요시츠네와 협력할 것, 굴복하지 말 것, 적이 시라카와 관문을 넘으면 바로 격퇴할 것'을 당부하고 숨졌다. 그러나 요리토모가 군대를 보내 시라카와 관문을 돌파하자 반격할 것을 주장하는 요시츠네와 자신의 형제인[33] 쿠니히라, 타다히라에 대해, 심약한 겁쟁이였던 야스히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요리토모의 압력에 굴복하여 요시츠네를 보호하여 결사 항전할 것을 주장한 타다히라와 요리히라를 모살하고 500여 명의 군사를 보내 요시츠네를 습격한다.

결국 요시츠네는 코로모 강가에서 후지와라의 추격병에 둘러싸여 부인과 4살짜리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향년 31세. 충실한 심복 벤케이가 이 때 주인을 지키며 온몸에 화살을 맞아 선 채로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는 전설이 유명.

이후에도 요시츠네의 애첩이던 시라뵤시[34] 시즈카 고젠[35]이 요시츠네를 찾아 헤매다가 지치고 병들어 쓰러져 죽었다고도, 그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냈다고도 하는 애처로운 후일담이 각지에 전해진다.

당연히 겁에 질려 자기 양팔을 잘라버린 야스히라가 정권을 유지할 수도 없었고, 냉혹한 요리토모는 자신에게 굴종했다고 해서 야스히라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36] 가마쿠라의 군대는 번성했던 히라이즈미를 무자비하게 불살라 버렸고, 한때 교토에 비유되며 영화를 누리던 대도시 히라이즈미는 이후 다시는 그렇게 번성하지 못했다. 야스히라 본인은 비참하게 도주하다가 부하 가와타 지로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요시츠네의 목은 가마쿠라로 보내져 원수인 카지와라노 카게토키의 주관으로 확인을 거쳤다고 한다.

3. 요시츠네의 전술과 인격[편집]

요시츠네의 전술을 현대전의 장군과 비교하자면 에르빈 롬멜 정도가 꼽힐 것이다. 때로는 저돌적일 만큼 적극적인 기동전, 돌격전을 중시했으며 사령관이 최전선에서 전투지휘를 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게다가 롬멜처럼 실제보다 몇 배나 많은 것처럼 위장하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전격적으로 찔러 적의 지휘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기만전술에 매우 능했다.

문제는 후일 정착된 신비스런 문화인, 무술가, 귀공자로서의 이미지와 달리 성격이 상당히 저돌적이고 거만했다는 것.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가자고 부하를 닦달한다던가, 명예로운 자리라 부하에게 위임하는 것이 상식이고, 총대장이 맡기에는 위험하기까지 한 선봉장 자리를 고집하는 것 등은 솔직히 말해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큰 결격사유로 탄핵받아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후일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요시츠네가 억울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그런 기록이 있어야 할 텐데, 당대의 기록 어디를 찾아봐도 요시츠네의 인간성에 대한 변호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교토에서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병사가 모이지 않아서 도주하는 꼴이 됐으니 인망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실제 요시츠네는 훗날 미화된 것처럼 점잖은 비련의 영웅이 아니라 저돌적이고 상당히 야만적인 무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귀족적인 기풍이 남아 있어서 헤이케가 적인 겐지의 자손들을 다 죽이지 않았을 만큼 전국시대에 비해 인간적인 구석이 있던 당시의 무사 치고 요시츠네는 상당히 잔혹행위를 많이 했다. 3차례의 큰 승전인 이치노타니, 야시마, 단노우라 전투 중 이치노타니와 야시마에서는 기습작전을 위해 민가에 불을 질렀고, 단노우라에서는(요시츠네가 명령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비전투원인 노잡이와 키잡이를 조준사격했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표현한 문화작품이 데즈카 오사무 최후의 대작 불새/난세편.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등에서 묘사되는 극악한 요시츠네의 행동은 전부 다양한 당대의 기록과 군담에 기초한 것으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많다.

4. 유품[편집]

현재 요시츠네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일본도히자마루[37]를 다이카쿠지(大覚寺)에서 소장하고 있다. 호신용 단도로 이마노츠루기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5. 요시츠네가 칭기즈칸?[편집]

그가 몽골로 건너가 칭기즈 칸이 되었다는 설이 일본내에서 유명하며, 아직도 일부에선 정설로 취급된다. 쿠빌라이 칸이 일본을 침공한 이유도 할아버지인 요시츠네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나. 헌데 웃기는 건 칭기즈 칸은 요시츠네보다 3살 연하인 1162년 생이다. 게다가 칭기즈 칸의 생모나 수부타이가 포함된 사준사구 등 칭기즈 칸과 젊었을 때부터 같이 살아온 사람들도 꽤 된다는 것과 칭기즈 칸의 3남인 오고타이가 요시츠네가 죽기 3년 전인 1186년생이라는 점 역시 요시츠네 = 칭기즈 칸 설이 거짓임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환빠급 개드립. 당연히 일본 안에서만 주장하며 일부 교과서에까지 실려있을 정도이지만 몽골은 물론 세계 어디서도 무시하는 설. 요즘 현대 일본인들도 개드립으로 치부하는 중.

이런 괴상한 설은 제국주의 시대에는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연구도 된 설이다. 이유로는 요시츠네가 죽고나서 7년간이 대원사에서 칭기즈 칸의 행적이 묘연한 7년 간과 기간이 같다는 것과 그외 억지로 범벅되어 있는데, 똑같이 백기를 썼다거나 원(元)이라는 국명이 미나모토(源)의 원과 같은 발음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딱 유사역사학 수준의 주장. 정식 학문으로 연구되었던 만큼 어떤 의미로는 유사역사학보다 더욱 괴악하다. 자세한 것은 이 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오야베 젠이치로의 '칭기즈 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다.'를 참고.

일본의 역사학자 히구치 키요유키는 칭기즈 칸은 거구였지만 요시츠네는 체구가 작았다.(요시츠네의 갑옷을 조사해서 얻은 사실) 고로 둘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칭기즈 칸이 죽었을 때 몸이 줄어들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위엄을 위해 작은 체구를 옷 등으로 부풀린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물론 일본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개드립 취급한다.

다나카 요시키창룡전에서 이런 개드립치며 책으로 써달라는 자에게 조상 족보가 당당하게 남은 몽골 사람을 일본인이라는 헛소리 그만하라는 투로 류도 하지메가 깐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참 많은데, 야마구치 모모에가 자기는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주장을 했고, 자기랑 가까운 족보에 있는 야마구치 가문이 실제로 중국에 가서 조사를 했는데, 두계 양씨라는 것만은 알고 양귀비라는 이야기는 확인 못했다고 한다. 또 쵸소카베 가문의 조상이 실은 시황제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스터 초밥왕으로 유명한 데라사와 다이스케는 자신의 저서 절대미각 식탐정에서 일종의 양불고기인 징기스칸을 설명하는 화에 이 이야기를 하고 일본인들은 과대망상 기질이 있다라며 깠다.

수라의 문과 수라의 각으로 유명한 카와하라 마사토시는 일본격투만화 특유의 일본제일주의가 진득한 만화를 그리면서도 수라의 각 요시츠네편 후기에서 이 설을 말하면서 몽골인들에게 실례되는 설이라고 단언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외국인이다라고 말하는것 만큼 실례되는 말이라고. 일본 내에서 얼마나 병맛돋는 설로 받아들여지는지 알수 있는 부분.

라이트 노벨 비탄의 아리아에서는 이 설이 전격 채용되어 히로인 중 하나인 레키가 이 인물의 후손이자 칭기즈 칸의 후손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하지만, 작품 내에서도 주인공인 킨지가 "그건 헛소리잖아?" 라는 투로 얘기하는걸 보면 작가 본인도 단순히 흥미를 위해 집어넣은 것일 뿐인 듯(...). 애초에 이 설정이 등장한 것도 초반에 "레키는 외국인인데 왜 외모는 일본인같은 거지" 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이었고 그 이후론 등장하지도 않았던데다, 정작 일러스트의 레키는 전혀 일본인스럽지 않다.

차나왕 요시츠네에서 시작부분에 고문서를 연구하던 한 연구원이 혹시 칭기즈 칸 이야기도 있나요라고 묻지만 바로 무시당한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일본 제국 시절 요시츠네의 칭기즈칸 설을 주장하는 데 쓰였던 사료들의 경우 사실은 당시 몽골의 가한들에게 고용된 일부 일본인 무사들에 대한 기록이 남은 것을 요시츠네로 끼워맞추려 한 것이라고 본다. 일본은 20세기 초에 신국 드립을 친 것과 달리 에도시대 이전까지는 오히려 일본 열도가 특별한 땅이라는 인식이 전무했으며, 따라서 중세의 사무라이들은 일본 내에서 일거리를 찾기 어려우면 몽골이나 동남아시아 등의 타지에까지 흘러가는 일이 적지 않았다.

6. 요시츠네 생존설과 가짜설[편집]

일본인들에게 당대에도 후대에도 인기가 많던 영웅이라서 인지 위의 칭기츠칸설은 무시당하지만 의외로 생존설과 가짜(대역)설이 나온다. 그리고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생존설의 시작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 기록인 "아즈마카가미(오처경)"의 모순된 기록에서 출발한다. 아즈마카가미의 4월 30일 기술에는 요시츠네가 습격을 받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술되어있지만, 희한하게 5월 22일에 다시 요시츠네의 죽음에 대한 기술이 나오는데 "민부쇼보의 집에서 살해되었다"라는 기술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아즈마카가미의 4월 30일자 기록으로 요시츠네의 죽음을 설명하지만 왜 5월 22일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지는 알도리가 없다. 이런 모순 때문이었는지 에도시대의 학자들은 요시츠네 생존설을 진지하게 연구했는데 하야시 라잔의 "속본조통감"이나 미토 고몬으로 유명한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대일본사"에서 요시츠네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대일본사"에 의하면 요시츠네가 사망한건 윤4월 30일, 요시츠네의 목이 가마쿠라에 도착하여 목을 확인한건 6월 13일이라고 하는데 무려 40여일이 넘게 걸렸고 요시츠네의 목이 이미 심하게 부패되어서 본인인지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오슈 히라이즈미에서 가마쿠라까지 2주일이면 갈수있는 거리를 왜 40일이 넘어서야 도착했는지도 의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생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역사기록들과 도호쿠 북부, 홋카이도 각지에 있는 요시츠네에 관한 전설들[38]을 근거로 요시츠네가 히라이즈미를 탈출해 도호쿠 북부지역을 거쳐서 홋카이도로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요시츠네가 홋카이도로 도망친 이유는 그곳에 거주하는 아이누인들을 포섭해서 요리토모를 타도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며, 홋카이도에 숨겨진 후지와라 일족의 비자금 창고를 찾아내 군자금으로 사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이런 요시츠네 대신 죽은 사람의 정체는 후지라 일족의 가신인 스기메노 타로였다고도 한다.

한편 가짜설은 요리토모가 왜 동생 요시츠네를 불신하고 죽이려했는가란 의문에서 출발한다. 가짜설에 따르면 요리토모는 처음 동생과 재회했을때무터 요시츠네가 진짜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가짜설 주장자들에 의하면 요시츠네가 직접 요리토모에게 보낸 저 유명한 코시고에장에서 자신을 "농부의 일을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하며 아즈마카가미에 의하면 요시츠네가 22살때 요리토모의 진에 직접 찾아온게 요시츠네와 요리토모의 첫 만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요시츠네는 자신이 오슈에서 수년간 지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가짜설 주장자들은 진짜 요시츠네는 진작에 죽어버렸고 교토의 고시라카와 덴노와 연결되어 있던 후지와라 일족이 요리토모에게 스파이로 붙인것이 이 가짜 요시츠네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가짜 요시츠네의 정체는 후지와라 일족의 가신인 스기메노 타로의 형제 스기메노 지로였다는것. 스기메노 타로에게는 스기메노 지로, 스기메노 메사부로라는 동생들이 있었는데 스기메노 메사부로는 후지와라 일족의 무장으로 기록에 남아있으나 스기메노 지로에 대한 기록은 어디어서도 찾을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짜설 주장자들은 후지와라 일족이 가신인 스기메노 형제중에 둘째인 지로를 가짜 요시츠네로 만들어서 요리토모에게 보냈고 후에 요리토모가 요시츠네 토벌령을 내리자 의지할데가 없던 가짜 요시츠네인 스기메노 지로는 고향인 오슈로 도망쳐서 후지와라 일족에게 의탁했다가 야스히라에게 배신당했다는것.

이런 생존설과 가짜설을 종합하면 요리토모의 압박에 못견딘 야스히라가 가짜 요시츠네엔 스기메노 지로를 습격하자 형인 스기메노 타로가 동생 지로를 도피시키고 자신이 가짜 요시츠네로 위장해 죽었으며 홋카이도로 도망친 지로는 복수를 위해 전부터 후지와라 일족과 교류가 있던 아이누인들을 찾아가 그들과 손을 잡고 요리토모에 대한 반격을 도모했다는것이다.

물론 이런 생존설,가짜설들이 기대고 있는 부분의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그냥 재미있는 설의 하나로 보는게 더 올바를것이다.

차나왕 요시츠네는 스토리적으론 다르긴 하지만 생존설과 가짜설을 작가 나름의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7. 창작물에서[편집]

7.1. 의경기[편집]

의경기(義経記, 기케이키)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활약을 주제로 한 군담소설로, 남북조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성립된 작품이다. 가부키로도 만들어졌다. 여러 매체이서 등장하는 요시츠네 및 주변 인물들의 이미지를 형성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

7.2. NHK 대하드라마 <요시츠네>[편집]

일본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의 44번째 작품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바람.

7.3. 기타 창작물[편집]

왕랑전(王狼伝)은 "고비 사막을 탐사하던 현대 일본인이 타임 폭풍에 휩쓸려 과거로 가보니 요시츠네가 칭기즈 칸이었다"는 생각치도 못할 병맛같은 내용이다.(스토리는 부론손(북두의권으로 유명), 그림은 미우라 켄타로.).

이와테현 히라이즈미에서는 히라이즈미에 도피해 온 요시츠네 일행이 대대적으로 환영받은 것에서 유래한 마츠리가 열리는데, 당시의 문물을 재현해 불교 의식이나 노, 쿄겐 등의 공연 등이 볼거리이다. 요시츠네 일행으로 분장한 대행렬이 클라이맥스인데, 원래도 유명한 스타들이 요시츠네 역할을 맡지만 2005년에는 대하드라마 요시츠네에 출연한 타키자와 히데아키가 요시츠네 역할을 맡아 수십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가 등장하는 만화, 게임에는 수라의 각, 차나왕 요시츠네, 의경천본앵, GENJI, 요시츠네 영웅전, 머나먼 시공 속에서 3(미나모토노 쿠로 요시츠네 항목 참고), 무사의 혼, 드리프터즈 등이 있다. 시끌별 녀석들에서도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으며, 이 만화의 서브 히로인 중 하나인 쿠라마 공주의 아빠다.

쿠로즈카에선 팜 파탈 스킬 만렙을 찍은 쿠로미츠에게 낚이고 이어서 그녀에게 반한 벤케이의 배신으로 인해 불완전한 불로불사를 얻은 채로 영원히 반복되는 지옥 같은 삶[39]을 살아가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은 열린 결말이긴 하나, 나름 생전의 은원을 다 정리하고[40] 쿠로미츠와 둘이서 도주한다.[41] 작품 내내 보여주는 능력치로 보아서[42] 가는 곳마다 무쌍을 찍어가며 잘 살아갈 듯 하다. 덧붙여 쿠로미츠를 불사신으로 만든 것은 골고다 언덕의 13번째 제자.또 그를 불사신으로 만든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참고로 이런저런 비밀이 많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소녀 요시츠네 전이라고 하는 일종의 여성화 게임도 2까지 나왔다. 기종은 PS2이다. 또한 요시츠네의 부하들중 유명한 캐릭터들도 다들 여성화. 주인공은 무사시보 벤케이인데, 사실 주인공은 미래에서 온 캐릭터로, 어쩌다 보니 무사시보 벤케이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그 후 요시츠네와 같이 싸우다가 원래 시공으로 돌아가는게 1이며, 2에서 주인공은 다시금 요시츠네 일행이 있는 시공에 오게 되나 기억상실에 걸려 버린다.

그 외에도 요시츠네가 여성이라는 설정을 깐 창작물 중에 여성향 게임 별의 왕녀 ~우주 의식에 눈을 뜬 요시츠네~(진짜 요시츠네는 여주인공의 오빠인 샤나오지만 샤나오가 죽어버려 주인공이 남장하고 오빠의 행세를 한다.), 순정 만화 '천년지애 료우'(원래 여자로 태어났지만 키요모리가 여자라면 자신의 손자와 결혼시키겠다고 해 어머니가 남자라고 거짓말을 했다. 참고로 결혼 상대는 타이라노 코레모리.) 등이 있다. 순정만화가 그렇듯이 연애치정물...덤으로 시간이동까지 얽혀서 복잡하다.

파일:attachment/미나모토노 요시츠네/미나모토요시츠네.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원조비사에서는 사용자 시나리오에서 가마쿠라 막부 휘하 장수로 등장하는데, 능력치가 정치 D 전투 A 지도력 C 매력 A로 매우 준수한 편이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전 시나리오 통틀어 일본 무장들 중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한다. 전투치가 95이며 지모도 나쁘지 않고 무사를 이끌면 공격력이 올라간다. AI 특성상 히라이즈미 정권이 가마쿠라에게 일방적인 공격을 받음에도 오래 버틸 수 있는 이유. 실제 AI 가마쿠라는 죽어라 히라이즈미를 공격하지만 몇십 년이 지나도 요시츠네 하나 때문에 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사이에 남송이나 고려에게 뒷치기를 당해 멸망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가마쿠라를 잡으면 곧바로 요리모토를 간첩으로 보내 요시츠네와 벤케이를 등용시킬 수 있다... 1189년에 사망해서 등장시키기 애매한 감이 있지만 자연사도 아니었고 그 엄청난 인기를 감안하여 굳이 등장시킨 듯. 전투 특기를 주인공 칭기즈 칸과 똑같이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시츠네=칭기즈 칸설을 의식한 것일지도. 또한 애첩인 시즈카 고젠이 왕비로 되어 있는데, 국왕이 아닌 장수가 처음부터 왕비를 갖고 시작하는 유일한 케이스다. 정치 45, 전투 95, 지모 79.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나이는 다르다. 무사시보 벤케이와 함께 충성심이 낮아서, 다른 나라도 아니고 고려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공격하면 "구랑 판관 요시츠네 여기 있다! 이국 장수, 승부를 겨뤄라!"라는 고유대사를 외친다.[43] 그리고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공격하면 "형님! 인사 대신에 내 활이나 받아라!" 라면서

진 여신전생 데빌서머너에서는 영웅 종족의 악마로 등장한다. 치트급 스킬 팔척뛰기를 가지고 있다.
페르소나 4에서는 탑 아르카나의 페르소나로 등장한다. 마사카도, 시키오우지, 오오쿠니누시, 하치만, 히토코토누시의 5신합체로 나오는데, 얘도 역시 최강의 기술 팔척뛰기를 배운다. 자세한 것은 요시츠네항목과 팔척뛰기항목 참조.

무쌍 오로치 에서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무쌍 오로치 시리즈) 항목 참조

원평토마전에선 형과 함께 악역으로 타이라노 카게키요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생긴 것도 무슨 귀신 같이 생긴데다가 "호호호호" 하며 웃는 이상한 놈으로 등장한다.

센고쿠히메2에선 여성화. 초기에 통솔력 11이라는 강캐이며, 일반적인 통상판에는 없고 소프맙 매장 특전 CD를 통해서만 등장시킬 수 있다. 일단 초반 지나면 우연히 소우마와 만나는데, 난데없이 시공을 넘어서 온 지라 헤메던걸 소우마가 데려와서 고용한다. 1에서도 비슷하게 같은 브랜드의 판타지 작품의 히로인을 시공을 넘어 오게 해서 서비스 참전시킨 적이 있다.

PSP판 태합입지전5에도 등장한다. 후지산에서 망령으로 나오며 물리치면 검호 비기인 무도토리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불새 난세편에선 영웅 취급 받지만 전쟁광에 목적을 위해선 무슨 짓도 저지르는 잔인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반대로 순박한 무사시보 벤케이는 그의 욕망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마는 희생양으로서 그려지기도 한다.[44]

사무라이디퍼 쿄우에선 벤케이와 함께 좀비로 등장. 거의 졸개 수준. 토모에 고젠은 오요성의 일원인데!

수라의 각에서는 다른 매체에서 명장으로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출중한 인물로 묘사되며, 개인적인 무용이나 지략은 평범한 인물로 등장한다. 벤케이와의 고죠 대교에서의 결투도 무츠 키이치가 대신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도 마지막에 죽지는 않고 살아남는다.

공작왕 2부 퇴마성전의 한 에피소드에서 등장, 귀일법안도의 원 소유자로 인간으로서의 죽음의 조건 때문에 천개의 무기를 모으던 귀신 벤케이를 마지막 무기인 귀일법안도를 미끼로 개처럼 부려먹었던 것으로 드러나며 그 검에 원혼이 달라붙어 있다 검을 손에 넣은 한 소년의 육체에 빙의, 귀문을 열고 일본을 귀신의 나라로 만들려다 공작에게 당하고 그 혼은 공작이 휘두른 귀일법안도에 의해 끝장이 난다.

파일:源義経.jpg

파일:源義経1.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코에이의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 PS판 특전무장으로 등장한다. 통솔 120 무력 91 지력 93 정치 36 의리 88로 괴물같은 능력치.

PS판 삼국지7 신무장등록에서 이름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스탯이 뜬다. 특기로 성흔을 보유하고 있다.[45]

반프레스토귀신강림전 ONI에서 벤케이, 이세와 같이 야스히라군에게 전사당하고도 육신 잃는 영혼으로만 등장한다.

선소프트벤케이 외전에서 마지막 동료로 등장한다.

일본판 신과 함께라고 볼 수 있는호오즈키의 냉철에서는 마초를 희망하는 미소년으로 나온다.

유유백서에는 이 사람의 아명인 '우시와카마루'에서 이름을 따온 캐릭터인 시시와카마루가 등장한다. 또한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의 주인공 카자미 하야토의 별명이 '우시와카마루'이다.

일기당천의 OVA에서도 등장하며 여기에서는 '미나모토노쿠로 요시츠네'라는 호칭으로 여성화하여 등장한다. 랭크는 S. 용 보유자를 제외한 S랭크는 둘 있는데 호죠인과 이 아가씨다.그러나 일반적인 투사로 한정짓는다면 명실상부 여자 중에서는 최강. 성우는 타츠미 유이코. 금발 롤빵머리에 붉은 롱스커트 로리타 패션이라는 전형적인 서양 아가씨 패션으로 등장한다. 참고로 보닛에 토끼귀가 달려있다....[46] 체구는 중등부로 오인될만큼 작은 편인데다가 빈유. 붉은 칼집의 긴 칼을 사용한다. 1화 극초반에 실루엣으로만 등장했고, 야규의 입에서 언급되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화. 옥상에서 조우한 조조를 피칠갑으로 만들어버린다. 조조의 망막을 칼로 찢어놓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조조에게 움직임을 읽혀 두들겨 맞는다. 이후 리타이어한 것으로 추정.

비탄의 아리아에선 위 항목의 칭기즈칸 설을 아주 자연스럽게 스토리에다가 삽입시켜놓았다.

재배소년 천자루의칼 씨앗의 맨드레이크 '와카'의 모티브이다.

Fate/Grand Order에서 아명인 우시와카마루로 등장한다.

귀참에서 나오는 요시츠네도 이 인물의 모에화로 추정된다. 애초에 풀네임부터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47]

도검난무에서는 요시츠네가 썼다는 일본도타치 히자마루탄토 이마노츠루기가 등장하며, 이들의 대사에서도 요시츠네가 직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모탈 컴뱃 시리즈의 전 주인공 리우 캉의 기획단계에서의 이름 혹은 개발중 개발진사이에서의 코드네임이 미나모토 요시츠네였으나 탈락했다. 아마 스트리트 파이터의 영향이었는 듯.

하이큐!!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별명이 "우시와카"다. 심지어 한자도 같고, 하이바 리에프가 우시와카에 대해 질문하면서 '우시와카마루'라고 이름을 헷갈린 적도 있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의 주인공인 벨 크라넬의 단도 이름이 아명인 우시와카마루다. 미노타우로스의 뿔로 만들어서 소의 이름이 들어간 이름이 되었다.

세토의 신부에서는 그의 후손이라는 설정인 미나모토 요시오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꽤 지위가 높은 귀족집안 출신으로 나오며 성격이 매우 불량하다. 마침 요시츠네 본인은 세토 내해와 인연이 있다.

쾌락 히스토리에 가마쿠라 편에서 등장. 고죠 다리에서 무사들을 습격하여 에로 망가를 빼앗던 무사시보 벤케이와 싸우다 옷이 벗겨지면서 여자임이 들통난다. 그리고 벤케이도 사실은 여자임을 밝히며 부하가 된다. 이후 벤케이는 아랫도리가 선체로 죽었고 요시츠네는 그틈을 타 벤케이가 남긴 에로 망가와 함께 해외로 도망친다.

[1] 샤나오라고 읽는다.[2] 교토 미녀 천 명 중 백 명을 가려 뽑고, 그 중에 열 명을 다시 가려 뽑았는데 그 중에서 도키와가 가장 아름다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3] 이 이야기는 요시츠네를 다룬 이야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장면이다.[4] 일본 발음은 호우간비이키. 우리나라에서는 '판관 편애'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간단히 말해서 언더독 효과를 일본에서 일컫는 단어이다. 호우간은 요시츠네의 관직.[5] 깃케이키(義經記)에 의하면 원래 8남 이었으나, 숙부 미나모토노 타메토모(源爲朝)의 별칭이었던 친제이하치로(鎭四八郞)과 겹치기 때문에 쿠로(九郞)를 칭하였다고 나오나, 깃케이키 자체가 역사서가 아닌 군담소설 인지라 신빙성이 없다. 실제로 그의 형들은 출가한 사람까지 합쳐 8명이고 출가한 사람을 제외 해도 6명이다.[6] 그래서 이케노젠니의 아들 요리모리(賴盛)는 나중에 겐지가 모반하자 정치적으로 입장이 미묘해진다. 설마 어머니가 살려줬는데 나를 죽이진 않겠지 싶어 겐지 쪽에 투항했다.[7] 요시츠네를 시조로 삼는 무술 유파가 여러 개 있다.[8] 이 때 같이 출가를 강요당했던 요시츠네의 형제들은 후일 환속하여 요시츠네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기도 한다.[9] 또는 영지가 키소였기 때문에 키소 요시나카라고 불린다. 이 당시는 이렇게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성(姓) 말고 장원이나 영토의 이름을 딴 봉건사회식 묘지(苗字)가 등장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풀네임은 키소노 카쟈 요시나카[10] 문제는 겐지도 헤이지의 난 이전 호우겐의 난부터 서로 갈라져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는 것. 호우겐의 난에서는 다이라노 키요모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같은 편이었다. 요리토모의 아버지 요시토모는 요시나카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기 때문에, 둘이 갈라설 것은 어느정도 예상된 일이었다.[11] 지금의 고베. 키요모리가 교토를 버리고 천도하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12]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간단 뜻이다. 여담이지만, 여러 기록에는 이 때 요시츠네가 헤이케를 교란하기 위해 민가를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요시츠네 미화물인 대하드라마 요시츠네에서는 요시츠네가 몰래 주민과 밀약을 맺고 퇴거시키고 불을 지르는 것으로, 보기 드물게 요시츠네가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오는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에서는 요시츠네가 주민을 학살해버리고 불을 지르는 것으로 나온다. 요시츠네는 이후 야시마에서도 심리전을 위해 민가를 불지른다.[13] 요시츠네의 이복형으로, 역시 겐페이 합전에서 실컷 요시츠네와 나란히 굴러 놓고서 나중에 모반을 꾸몄다며 팽당한다. 요리토모에게 통수를 당한 개국공신의 대표주자 중 하나.[14] 요시쓰네가 받은 게비이시의 판관(判官=少尉)은 3등관(長官=가미-次官=스케-'判官=조'-主典=사칸)이다. 게비이시의 장은 게비이시 벳토(検非違使別当)이며 오위부(五衛府)의 장관 중 하나가 겸직하는 요직 중의 요직으로 요시쓰네 정도의 인물이 받을 수 있는 관직이 아니다. 원래 발음은 '한간'이지만 후에 '호우간'으로 발음이 변화되어 요시츠네를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된다.[15] 이런 열녀적인 인물인데 드라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기 병풍으로 몇컷 안나오다가 도피행을 시작하면서 조용히 헤어지는 걸로 나온다. 안습. 이시하라 사토미 버프를 있는대로 받은 시즈카 고젠과의 로맨스가 강조되는 드라마에서 시즈카 고젠이 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고증하기는 현대 시청자의 감각에 좀 껄끄러웠던 듯.[16] 아무리 폭풍이 불어도 이 부분만은 아즈마카가미의 작성자가 하루 정도 날짜를 착각했을 거라는 게 현재 연구자들의 의견. 현대에 페리를 타도 약 3시간 반이 걸린다고.[17] 특히 괴력으로 유명했다. <겐페이 성쇠기>에서는 시게타다가 이치노타니의 기습 때 명마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을 들어올려 짊어지고 절벽을 뛰어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우키요에 등에서 흔히 보이는 소재[18] 창포는 한일 공통으로 단오날의 상징인데, 단오날은 5월 5일이다. 즉 하루 늦게 창포를 구해 봐야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한마디로 너님 뒷북 짱짱맨이라는 지독한 조롱이 된다.[19] 이 부분은 학자에 따라선 약간 창작이 섞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겐지 군이 당시로서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한 것은 맞는데, 요시츠네가 그것을 직접 명령한 부분이나 그것으로 전세를 뒤엎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여담으로, 이 부분은 역시 요시츠네가 악당으로 묘사된 불새에서는 훌륭한 민간인 학살행위로 묘사된다.[20]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다이라노 노리츠네(平敎經)로 나오는데,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활을 쏘아 겐지측 무사들을 쓰러뜨리고 화살이 떨어진 뒤에는 양손에 칼을 들고 싸우다 "패배가 확실해진 판인데 부질없는 살생은 그만두지 그러냐"는 사촌형제 다이라노 토모모리의 말에, 어차피 죽을 바에는 적의 사령관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함께 죽을 생각으로 배와 배를 오가면서 요시츠네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요시츠네를 발견하고 그와 전투를 벌이려는 찰나에 요시츠네는 배 8척 정도의 거리를 뛰어 도망쳐버렸고, 노리츠네는 갑옷도 투구도 벗어던진 채로 "누구든지 와서 나를 잡아봐라. 가마쿠라로 가서 요리토모에게 한 마디 해줘야겠다"며 겐지군을 도발, 자신에게 뛰어든 세 명의 무사(성인 남자 30명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가운데 한 명을 발로 차서 바다에 처넣고 남은 두 명은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네놈들은 이제 나와 함께 황천으로 가자꾸나"라며 바다에 뛰어드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했다.[21] 다만 군담소설과는 달리 정사인 《아즈마카가미》에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어, 단노우라 전투에서 요시츠네와 싸웠다는 이야기와는 대치된다. 이미 당대 구교들의 일기에서도 "수도 제일의 무사"로 소문이 자자하던 노리츠네가 이치노타니에서 죽지 않고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단노우라 전투에서 전사한 헤이케측 무장의 명단을 보고할 때에도 노리츠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2005년에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요시츠네>는 이 점을 감안한 것인지 요시츠네를 쫓아다니며 그가 배 8척을 뛰어다니게 한 헤이케측 무사를 다이라노 토모모리로 변경했다. 그래서 항목 상단의 요시츠네의 동상에서 요시츠네를 노리는 헤이케 측 장수로 토모모리가 조각되어 있다.[22] 후일 출가해서 여승이 되었는데, 쥬니이(종2품) 상당의 관위가 있었기 때문에 니이노아마라고 불린다.[23] 단노우라 근처에는 헤이케의 패잔병들이 해변에 밀려와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고 죽었다는 우물이나, 닻을 짊어진 토모모리, 팔척뛰기를 선보이는 요시츠네 등의 동상이 남아있다.[24] 후대에 가면 쇼군이 겐지 종가(겐지 쵸쟈源氏長者)까지 겸하는 경우가 생긴다.[25] 여담이지만 결국 카게토키는 후일 참언에 의해 모반 의혹을 받고 도망치다가 원한을 산 사람들에게 추격당해 처참히 죽음을 당한다. 인과응보의 훌륭한 사례.[26] 사실 이건 요시츠네의 부족한 정치적 통찰력을 잘 보여주는 요소로, 엄청나게 잘못된 인선이다. 오오에노 히로모토는 "철 들고 나서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이 없다"라고 스스로 술회할 만큼 손속에 정을 두지 않는 냉혹한 정치가로 유명했는데, 그런 사람에게 감성에 호소하는 서찰을 보냈으니 먹힐 리가 있나. NHK의 드라마에서는 히로모토가 직접 요리토모에게 코시고에장을 무시하고 요시츠네를 단죄할 것을 진언하는 것으로 나올 정도니 말 다했다.[27] 활이나 활쏘기는 곧 무사의 무력이나 위엄, 군사력을 나타내는 비유이기도 하다.[28]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의 고사.[29] 요시츠네는 오슈로 가는 여행길에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백성의 잡일을 도울 지경이었다고 전한다.[30] 쿠마노 신사에서 발행하는 신성한 부적. 이 뒤에 서약서를 쓰고 그것을 어기면 쿠마노 신의 사자인 까마귀가 한 마리 죽고, 이어서 서약을 어긴 자가 피를 토하고 죽어 지옥에 떨어진다는 신앙이 있다.[31] 겐지 일족. 요리토모나 요시츠네에게는 삼촌에 해당한다. 문제는 그 삼촌은 요시토모에게 아버지를 잃은, 말하자면 가문 내 다른 파벌의 철천지 원수 중 하나였다는 것. 헤이케 토벌을 명하는 방계 황족 모치히토왕의 명령서를 각지에 전하여 겐페이 전쟁을 시작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32] 현재의 토호쿠 이와테현[33] 쿠니히라는 야스히라의 형이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가문 내 서열을 결정하던 당시 풍습에서 천첩의 아들인 쿠니히라는 적장자가 될 수 없었다.[34] 남장을 하고 춤과 노래를 하던 헤이안 말기의 무용수.[35] 마치 부인처럼 취급받고 있으나, 정처는 따로 있다. 정처 사토 고젠은 요시츠네의 도피행에 동행해 함께 죽었다고 전해진다.[36] 2005년에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요시츠네>에서는 히데히라가 요시츠네를 내놓으라는 말에 대답 대신 독수리 깃털과 사금, 비단 등의 예물들을 보냈는데, 히라이즈미의 오슈 후지와라 씨가 우리한테 굽히고 들어 오겠다는 뜻 아니냐는 호조 도키마사에게 요리토모는 "아니, 이건 오슈에는 이 정도의 재력이 있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면서 우리한테 위협하는 것이다. 오슈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했었는데, 사후 당주가 된 야스히라는 요시츠네를 내놓으라는 요리토모에게 "요시츠네는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버려서 우리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편지를 보내고, 요리토모는 "아버지보다 못한 바보 같은 놈이네, 요시츠네는 절대로 내줄 수 없다고 없으면 나도 함부로 못 했을 텐데ㅋㅋ"라며 히라이즈미를 칠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37] 요시츠네는 우스미도리(薄緑)라는 이름을 붙여서 사용했다.[38] 요시츠네 신사나 요시츠네의 이름이 붙여진 산, 요시츠네의 창(!)이 남아있다고 한다.[39] 영생을 얻는 도중 목이 잘리는 바람에 목을 제외한 몸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주기적으로 바꿔줘야 하며, 몸을 바꿀 때마다 자신의 이름과 쿠로미츠에 대한 집착 이외의 모든 기억을 잃는다.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불사신이 된 벤케이 등 쿠로미츠에게 반한 남자들을 상대로 쿠로미츠 쟁탈전을 치르게 되며, 겨우 승리하고 기억을 회복한 찰나 몸을 다시 바꿔줘야 할 시기가 됨으로서 몸을 새로 교체하고 또 다시 기억상실.[40] 벤케이와 화해한 직후 불로불사를 노리는 인간들로부터 도망칠 시간을 벤케이가 벌어주었다.[41] 원작소설과 만화책에서는 소행성충돌로 세기말상태가 된 세상에서 쿠로가 완전한 몸(쿠로의 완벽한 복제인간)을 얻은 대신 기억을 잃은 무렵의 쿠로에게 반한 여자가 과거의 쿠로와 비슷하게 불로불사의 목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애니에선 쿠로미츠에 의한 무한반복상태로 끝.[42] 신체스펙 자체가 비범한 것도 있고 수명이 짧은 불완전한 복제체들이 나이를 좀 먹자 염동력 등의 초능력을 발휘한 걸 볼 때 먼 미래에는 쿠로미츠나 쿠로도 초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43] 직역체 구사 내지는 오역이다. 구랑(쿠로九郞)는 아홉번째 아들이므로 붙은 개인 이름이고, 판관(호우간判官)은 각주에서 설명한 관직의 이름. 즉 이는 유비 현덕이나 조조 맹덕처럼 일종의 격의 있는 호명이다. 결국 제대로 번역하자면 '호우간 쿠로 요시츠네 여기에 있다'정도였어야 한다.[44] 심지어 벤케이의 아내가 자기들을 가만히 놔두라고 앞을 가로 막는 것을 칼로 베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 열받은 벤케이에게 죽고 만다.[45] 같은 방식으로 등장시킬 수 있는 장량도 성흔이 없다. 더구나 장량은 진짜 신선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46] 전위 다음으로 등장한 두 번째 로리타 캐릭터이다. 전위는 파랑이었지만 얘는 붉은색이라는 것이 차이.[47] 그밖에도 벤케이라는 부하를 두고있는등 시즈카고젠이랑 가까운 사이인듯 나름 실제 역사를 고증한듯한 설정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