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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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American Revolutionary War[1]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mericanRevolutionaryWarMon.jpg

날짜

1775년 4월 19일 ~ 1783년 9월 3일

장소

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동부, 플로리다 주,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유럽: 발레아레스 제도, 지브롤터, 유럽 해안가
인도아대륙의 식민지들
인도양
대서양

결과

미국 독립군의 승리, 미합중국탄생
파리 조약(1783), 이로쿼이 연맹해산

아메리카&유럽 교전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Grand_Union_Flag.svg.png13개 식민지(~1776)
파일:external/www.iup.edu/earlystarsandstripes.jpg 미국(1776~)
버몬트 공화국(177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Royal_Standard_of_the_King_of_France.svg.png프랑스 왕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Flag_of_Cross_of_Burgundy.svg.png스페인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파일:영국 국기.png대영제국
발데크피르몬트 공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이로쿼이 연맹
하노버 선제후령
헤센-카셀 공국
헤센-하나우 공국
안스바흐 공국
[2]

아대륙 교전국

마이소르 왕국(1780-1784)[3]
마라타 동맹(1775-1782)[4]

포르투갈 왕국(1776-1777)

지휘관[5]

조지 워싱턴
헨리 녹스
리처드 몽고메리
베네딕트 아놀드
호레이쇼 게이츠
존 폴 존스
프리드리히 슈토이벤
질제르 라파예트
장 드 비뫼르

조지 3세
프레드릭 노스
토머스 게이지
윌리엄 하우
리처드 하우
존 버고인
호레이쇼 넬슨
찰스 콘월리스
헨리 클린턴

아대륙지휘관

하이데르 알리
티푸 술탄
라자람 2세
마드하브라오 2세

로베르 맥도웰
조지 하드캐슬

병력

농민군 2만 명
워싱턴군1만1,000명

정규군 4만 2,000명
독일 용병 2만 명

피해규모

2만 5,000명 전사
1만 7,000명 병사
총 5만 명

1,240명 전사
1만 8,500명 병사
4만 2,000명 탈영응?[6]
1만 3,000명 포로
상선 1,500척 나포
독일인 1,200명 전사
독일인 6,354명 병사
영국군 1만 9,470명 사망
독일인 7,554명 사망
총 2만 7,024명 사망


1. 개요2. 발단
2.1. 미국 혁명의 시작
3. 계란으로 바위치기
3.1. 보스턴 공방전
4. 바위가 깨지다5. 결과6. 프랑스의 지원: 영국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이었는가?7. 혁명으로서의 미국 독립8. 기타9. 당시를 다루는 작품

1. 개요[편집]

오늘은 어떤 중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지 3세의 글 중. (1776년 7월 4일)[7]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진행된 대영제국13개 식민지(Thirteen Colonies) 사이의 전쟁. 미국 독립 혁명 혹은 더 간단하게 미국 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결과로 13개 식민지미국이라는 나라로 독립했다.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근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 성립의 뿌리가 된 사건 중 하나이다.

2. 발단[편집]

근본적인 원인은 식민지와 본국 간의 갈등이었다. 본래 본국과 북미 식민지의 사이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북미 식민지는 영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식민지 개척을 했던 19세기와는 양상이 달랐다. 북미 식민지에 대한 대우는 인도 제국 같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처럼 자국민이 가서 개척한 자치령과 유사했다.

물론 16세기의 로어노크 식민지 이주시도나 17세기의 제임스타운(Jamestown) 개척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성공한 식민 이주는 메이플라워호로 이주한 청교도들 이후였다. 본국은 북미 식민지에 총독을 임명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총독들은 본국 출신보다는 북미 식민지 태생의 이민 2세대나 3세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각 식민지들은 영국과 국왕에 충성한다는 조건하에서 자체적으로 의회와 주 정부를 구성하여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영국도 이렇게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나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보조하기 위해 제정된 항해법이 점차 확대되는 식민지의 경제에 족쇄로 작용하자 미국의 식자층과 상인층을 바탕으로 반영감정과 혁명의 씨앗이 파종되었고, 1761년에는 이러한 경제권 제약에 대한 소송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물론 아직까지 이러한 움직임은 대중의 이해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이렇게 파종된 씨앗은 이후 큰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2.1. 미국 혁명의 시작[편집]

그러다가 '프랑스-인디언 전쟁'(프랜치-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8]이 일어나자 북미 식민지와 영국 본국은 프랑스에 맞서 일치단결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본국과 식민지가 단결하여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양측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7년 전쟁에 포함되는 전역 중의 하나였고, 비록 영국이 승리했을지언정 7년 내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느라 재정이 버거운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이 전쟁에만 든 전비가 무려 650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 파운드까지 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9]

이러한 전쟁이 또 반복되었다가는 영국의 재정상황이 버티지 못하기에, 맨 먼저 1763년 미국 식민지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의 확장을 금지시키는 포고문이 발표되어, 식민지 대중들에게 반영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또한,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영국의회는 1764년 설탕조례(Sugar Act)를 제정했고 이듬해인 1765년에는 인지조례(Stamp Act)가지 통과시켰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지조례였는데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붙여야 한다라는 게 법안의 핵심이었다.[10]

식민지인들은 지난 전쟁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공헌했는데 돌아오는 보답이 이주제한과 세금이냐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반발의 배경에는 기존 세금이 간접세였던 것과 달리 인지조례가 제정되어 시행되는 인지세는 직접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라 대중들이 보다 직접 느낄 수 있는 세금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앞서 제정된 서부로의 확장 금지 포고로 인해 돈을 더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까지 막혀버렸으니, 두 가지의 시너지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반대로 영국은 식민지인들이 전쟁에서 거의 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공을 영국군에게 돌렸다. 때문에 인지세는 "한 게 없으면 세금이나 내라"는 의도였다.

식민지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식민지 자치 및 식민지인의 권리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결국 인지세에 반대하면서 식민지인들이 내놓은 말이 그 유명한 "대표 없는 곳엔 세금도 없다!"[11]였다. 현재는 수도 워싱턴이 그렇다. 국회가 있는 땅에 상원의원 선출권이 없다 당시 식민지인들이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가 없었던 이유는 영국과 북미 식민지에서 동시선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현대에도 선거 한 번 하는 데 며칠씩이나 걸리는 나라가 한둘이 아닌데, 대서양을 넘나드는 투표? 게다가 영국 역사를 살펴봐도 영국은 식민지에서는 총선을 치루지 않았다. 만약 식민지도 영국 의회에 의원을 보낼 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하지만 그랬다면 미국의 엄청난 인구 증가율을 볼 때 오히려 영국이 미국의 식민지가 될 판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식민지에 투표권을 주는 원칙을 만들게 되면, 영국의 식민지는 미국만도 아니라는 문제 때문에 미국이 영국과 함께 다른 영국 식민지의 간섭도 받게 되는 결과가 된다. 예컨대 (나중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듯이) 인도 같은 나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 영국의 지배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미국이 인도 같은 다른 식민지에게 사실상 지배당하게 되는 상황은 더더욱 받아들일 리가 없는 만큼, 어차피 미국의 독립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선거와 세금 문제로 연일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벌어졌고 북미 식민지의 거상들은 자신들과 거래하는 영국 상인들에게 인지세 폐지 안 해주면 너희들과 장사 안 할 거임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북미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많이 보고 있던 영국 상인들도 의회에 인지조례를 폐지해달라고 사정했고 결국 인지조례는 곧 철폐됐지만 불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은 영국 의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식민지인들의 조직적 반발로 의회의 결정이 되돌려지자 영국 의회에서는 "이놈들 봐라?"라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러자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물리는 법안을 잇달아 만들기 시작했다. 1770년에 이런 경향이 매우 강했는데 이를 "타운센드 법안"이라 한다. 타운센드 법안이 통과되자 식민지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다시 법안은 폐기되었지만 기묘하게도 홍차에 붙인 세금만은 폐지되지 않았다. 사실 위에서 말한 식민지 의회 대표를 보내는 방안이 아니더라도 식민지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를 들어 국회에 일종의 로비 채널인 북미 식민지 대표단 같은 옵저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외무 장관을 임명할 때 북미 식민지 여론을 고려하거나 혹은 아예 북미 식민지 장관을 신설하고 명망있는 북미 식민지인을 초빙해 임명하여 북미 식민지의 이해관계를 정부 내각에 반영할 수 있는 채널만 만들어줬어도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은 거꾸로 '괘씸죄'를 적용하기 시작했고 외무 장관과 주요 내각에 북미 식민지에 강경 입장인 인물들을 임명했다.

물론 이런 갈등을 사람들이 넋놓고 바라보지는 않았다. 어쨌든 북미 식민지를 유지하는 게 영국으로서도 이득이었다. 당시 북미 식민지의 GDP는 대영제국 전체 GDP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자랑했다. 이걸 유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 수상을 지낸 바 있던 윌리엄 피트는 영국에 체류중이던 식민지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과 접촉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모색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던 프레데릭 노스는 조지 3세의 동의를 얻어 식민지에 강경책을 펴려 했다.

거기다 계속 서부로 진출하려는 식민지인들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인한 비용 지출을 막기 위해 영국이 이를 저지함에 따라 갈등이 격화되는 와중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으로 인해 이때까지만 해도 소수 세력이었던 독립파들이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12]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제대로 열받은 영국은 군대를 파병했고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자치령 폐기 선언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는 두 번에 걸친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대륙회의는 어떻게든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자는 입장으로 모인 자리였지만 영국의 입장은 단호했고 결국 독립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친 자연환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군대를 제대로 키울 여력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식민지인들 중 독립에 반대하거나 전쟁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거기다 전쟁 상대는 대영제국이었다. 물론 19세기의 막강한 위세가 18세기에도 그러했던 것은 아니고 다른 유럽 열강의 막대한 견제를 받았으나, 이미 세계에서 전쟁을 치르던 영국군과 식민지인들의 경력 차이는 비길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국 본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조직되기는 했으나 민병대는 본질적으로 내 고향만 지킨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게다가 이들을 규합해서 이끌만한 세력 주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이에 대해 미국인들이 '억지'를 부렸다는 의견도 있다. 수많은 영국 노동자들이 굶어죽고 투표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던 상황에서 잘 먹고 풍족한 곳이고 투표권도 있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영국 리버풀이나 맨체스터보다 미국 식민지 사람들의 수입이 무려 20배나 높았다고 한다. 또한 신대륙은 당시 그야말로 풍족한 음식이 넘치던 곳이었다. 랍스타가 얼마나 많았는지 죄수들에게 지겹도록 배급되고, 하인들은 랍스타에 신물이 나 파업을 벌여 '일주일에 세 번은 식탁에 빵을 올린다'라는 합의를 본 예는 지금도 전설로 남아있다.[13]

    게다가 인지 조례의 경우 단 한 푼도 걷어들이지 못했으며, 악명높던 타운센드 법도 3년 동안 고작 265파운드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거기에다 보스턴 차 사건은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 밀수업자들의 불법 행위였으며 보스턴 학살도 당시 분위기상 그들이 심리적으로 몰려있어 벌어진 우발적 사태로 인식되고있다. 기록에 따르면 눈뭉치를 영국군에게 던졌다고 한다. 게다가 이 영국군[14]은 그날 밤 자신들의 몇 배나 되는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조롱과 협박을 당했으며,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당시 변호사)는 법원에서 살인 혐의로 기소된 영국 병사들을 기꺼이 변호했다. 기소자 중 두 명을 제외한 기소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두 명도 엄지손가락에 낙인이 찍히는 (당시 기준으로) 가벼운 형벌로 끝났다.

    미국은 애초에 독립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이는 토마스 페인이 그 유명한 소책자 <상식>을 내기 전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워싱턴조차 반역은 입에도 내지 않았다. 그 유명한 "이것이 반역이라면 최대한 활용하자(패트릭 핸리)" 같은 발언은 지극히 후대에 와서 과장된 것.

3. 계란으로 바위치기[편집]

3.1. 보스턴 공방전[편집]

독립전쟁의 시작은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되었다. 보스턴 사람들은 영국의 매사추세츠주 자치령 폐기에 격분했고 영국군에게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우후죽순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토마스 게이지가 이끄는 4개 연대가 보스턴 시내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보스턴 밖까지 통솔권이 미치지는 못했다.

결국 토마스 게이지는 보스턴을 위협하는 민병대부터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1775년 4월 18일, 700명의 병력을 파견해 콩코드에 있는 민병대의 무기창고를 제압하고 민병대를 무장 해제시키도록 지시했다. 독립파에 속했던 폴 리비어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알고서는 말을 타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든 채로 렉싱턴으로 가서 영국군이 쳐들어온다고 알려주었다.[15] 이에 렉싱턴의 민병대 77명이 소집되어 영국군을 기다렸다.

4월 19일 아침, 영국군이 렉싱턴의 초지에 이르러 민병대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이 렉싱턴에서의 교전이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렉싱턴-콩코드 전투).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 근처 노스브릿지에서 민병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민병대에게 밀려 보스턴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는 영국군을 각지에서 몰려들어온 민병대들이 공격했고 영국군은 궤멸직전에 보스턴 시내에서 지원군을 보내 겨우 보스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민병대들은 이제 보스턴 시내를 탈환하려는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다(보스턴 포위전). 대륙의회도 결국 싸움을 피할수 없음을 깨닫고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을 규합하게 했다. 영국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4500명의 원군을 파병했다.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에 도착했다.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은 애국심과 총만 있던 오합지졸들이었고 워싱턴은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최강 전력인 영국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16] 비록 우발적으로 동원된 민병대의 특성상 무기, 탄약, 식량 등의 보급 문제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포의 부족, 또한 치열한 시가전에서 발생할 여러 불확실성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 진격을 포기했지만, 민병대가 규율이나 전투 경험이 부족하긴 해도 애국심으로 강화된 숫적우세가 영국군의 숙련과 규율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증명했기 때문에 영국군 역시 보스턴에서 치고 나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결국 지루한 장기 대치 끝에, 영국군에 대한 도발로 일어난 벙커힐 전투[17] 후 영국은 보스턴 포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학수 고대하던 대포를 확보한 대륙군이 다시 한 번 도체스터 고지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도발하자 영국은 마침내 보스턴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양측 사령관의 암묵적인 신사 협정[18]에 따라 영국군이 함대를 이용해 해상으로 철수한 후 대륙군이 진입하여 보스턴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후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한 영국군이 다시 침공해오면서 전쟁이 재개된 뉴욕 전역에서 초장에는 대륙군은 계속 개박살날 수밖에 없었다.[19] 그리하여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물자 보급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영국의 약점을 이용,[20] 전투를 피하고 계속 시간을 장기간 끄는 소모전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777년 벌어진 새러토가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첫 승리로 평가된다. 사실 트랜턴과 그 직후 일어난 프린스턴 전투에서 한 번 이기긴 했는데... 당시에는 통상적으로 겨울이 되면 연간 전쟁 계획은 종료되어 군대는 겨울 숙영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영국군은 병력을 나누어 여기저기에 나누어 배치해 겨울 숙영 상태에 들어갔고 이 점을 이용해 조지 워싱턴은 야간에 병력을 도하시켜 트랜턴에서 주둔하던 영국군 소속의 독일 헤센 용병을 기습한 것이다. 그리고 트랜턴 전투 결과에 화가 나 병력을 집결시켜 조지 워싱턴을 쫓아 나온 주력 영국군 뒤로 돌아가 프린스턴을 수비하기 위해 남겨진 영국군을 다시 기습한 것이 프린스턴 전투. 즉 트랜턴 전투와 프린스턴 전투 모두, 비록 연이은 패배와 계속된 쫓겨다님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대륙군과 식민지인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데는 큰 공헌을 하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영국군을 기습한 것이라 정규 전투급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지 워싱턴 휘하의 주력 대륙군이 영국군에게 털리며 사실상 쫓겨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난데없이 첫 정규전급 승리가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조지 워싱턴을 쫓아다니고 있는 주력 영국군과는 별개로 캐나다에서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이 남하하면서 벌어진 것이 새러토가 전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국군의 규모도 총 7000명으로 작았고, 오히려 이를 상대했던 호레이쇼 게이츠 휘하의 대륙군은 비록 민병대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9000명 이상, 나중에는 계속된 민병대 합류로 15000명에 달할 정도로 병력에서 훨씬 우세했다. 즉 캐나다에서 남하한 영국군은 식민지 민병대의 수준을 깔보며 적은 병력으로 무리하게 진격하다 적진에서 포위당하면서 GG를 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4. 바위가 깨지다[편집]

한편 이 시기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몇몇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건너가 영국과 전쟁 중인 미국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에서 구원요청이 들어오자 원군을 약속하고 실제로 엄청난 원군을 보냈다. 그 결과 프랑스,[21]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 지원하게 되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전쟁의 양상도 미국에게 좀 더 유리해졌지만 좀처럼 끝이 나지 못한다. 이유는 양측 모두 내분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측에서는 점차 돈이 부족해지자 군인들에게 줄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탈영병들이 속출하게 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다. 베네딕트 아놀드 같은 경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거기다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점차 반전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 또한 전쟁의 장기화로 늘어가는 빚과 미국의 근성, 군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미국 독립 의견이 늘게 된다. 그럼에도 조지 3세와 영국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대병력을 보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그런데 새러토가 전투의 결과는 한편으로는 미국에게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 영국이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또한 전쟁의 목적을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면, 거기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내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목적이 전자에 머물러 있을 때는, 조지 워싱턴이 그렇게 했듯이, 대륙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넓은 북미 아메리카 대륙 여기 저기로 도망다니다가 영국군이 방심했을 때 기습하거나 혹은 유리한 조건에서만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국의 목적이 후자로 바뀌고 남부 파견 영국군이 몇 번의 대승을 통해 남부 식민지 지역을 손쉽게 점령해 버리자, 이대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신생 독립국 미국은 13개 주에서 세력이 더 줄어들게 될 뿐 아니라 북쪽(훗날의 캐나다)과 남쪽(이번에 점령한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일부)에 강력한 영국의 식민지와 맞닿게 되고, 또한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로 뻗어나갈 기회도 불확실해 진다(거기다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뉴욕시도 문제. 영토 한 복판에 영국군 점령지를 허용하거나, 그게 싫으면 협상을 통해서 다른 영토나 이권을 내주고 뉴욕시를 찾아와야 한다).

한마디로,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반 자체을 상실하면서 영국의 위협에 맞서 계속해서 프랑스에게 의존해야 하는 프랑스 꼬봉 국가로 전락할 상황이 된 것.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서 데꿀멍한 영국으로부터 13개 주 온전한 독립과 여러 기타 권리를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것밖에 없는데... 문제는 뉴욕을 점령하고 있는 영국군 주력 병력은 쉽게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고, 남부 파견 영국군을 각개격파하자니 남부 여러 지역으로 재빠르게 대병력을 수송할 수 있도록 제해권이 받쳐줘야 하는데, 상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도 전 지구적인 제해권을 잃지 않고 있는 영국이었다. 북미 대륙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는 아직 변변한 전공 하나 올리지 못하고 있었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영국 본토 침공과 지브롤터 포위를 시도했으나 그것 역시 영국 함대에게 막혔다.

그런데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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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의 항복. 1797년 존 트럼블 그림.

1781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해상 수송에 앞서 재해권 확보를 위해 서인도 제도에서 프랑스 함대가 북상했으며, 프랑스 함대의 정확한 규모, 목적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출항 첩보를 입수한 영국도 견제를 위해 함대를 선제적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프랑스는 대담하게도 드 그라스 제독이 서인도 제도의 전 함대 전력을 다 이끌고 온 반면, 영국은 '미치지 않고서야 프랑스가 서인도 제도를 무방비로 비워놓고 전 함대를 이끌고 오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고 적당한 전력의 함대만 파견했는데, 그 결과 영국 함대는 체서피크 만에서 열세의 전력으로 프랑스 함대와 조우해야 했다. 또한, 그럼에도 (결과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영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었으나, 영국 함대 사령관 그레이브스 제독에게는 그런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한 차례의 체서피크 만 해전(9월 5일)을 치루고는 영국 함대는 후퇴해 버린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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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피크 만에서 교전하는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 이 전투에서 토머스 그레이브스가 이끄는 영국 해군은 패퇴했다.

그렇게 체서피크 만 재해권이 일시적으로 프랑스 함대에게 넘어간 사이,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가 이끌게 된 요크타운 요새에서 주둔하던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 2배가 넘는 대규모의 미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좀 더 부연하면, 요크타운 포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9월 20일부터고, 9월 첫째주에는 아직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필라델피아 근처에 머물러 있었고 해상 수송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게다가 8월 30일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뉴욕과 아주 가까운 스태튼 아일랜드 서쪽에 있었고, 여기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뉴욕시를 공격할 때 취해야 하는 공격로와 동일하기 때문에 영국군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즉 9월 5일 체서피크 만 해전이 일어났을 때 요크타운의 포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23] 또한 영국 함대가 출항할 때는 요크타운이 포위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체서피크 만 해전의 패배는 결과론적으로 요크타운의 포위를 막지 못한 것이지, 요크타운의 포위를 보고 영국이 구원함대를 내보냈는데 체서피크 만 해전에서 패배한 게 결코 아니다.

체서피크 해전 및 요크타운 요새 포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프랑스 함대 규모와 대규모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요크타운 요새임을 알게 된 영국은 구원을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과 함대를 준비했지만, 10월 5일까지 도착하겠다던 구원군이 도착할 기미가 없자 희망을 잃은 콘월리스는 10월 19일에 마침내 GG를 쳐 버린다.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선 전쟁 지지자들이 크게 줄게 되었고 결국 영국 의회에서도 마침내 전쟁 반대파가 우세해지면서[24] '미국과의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조지 3세와 영국의 적이다'라는 궁극의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라는 특성상 저 결의문 하나로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면서, 영국 정부는 즉시 기존의 전쟁 수행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의 평화협상과 철군 준비에 매진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막후의 강력한 전쟁 지지자였던 조지 3세 역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앞에서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라고 표현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얘깃거리들이 있다.

  • 원래 남부 파견 영국군은 남부 지역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그 상태에서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한 곳을 포위 공격했다면 영국군은 고작 2,000-3,000명 수준의 병력만 잃게 되므로 별 타격이 없다. 그런데 식민지 민병대 게릴라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콘월리스가 상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병력을 이동시켰고, 상관인 클린턴은 콘월리스의 독단 행동을 묵인했으며, 그 결과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것도 대규모 상륙 작전이 용이한 해안에 인접한 요크타운 요새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또한 9,000명이란 병력의 손실은 영국이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 콘월리스가 독단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상황에서 이미 영국의 '남부 전략'은 수정이 불가피했다.[25] 그 얘기인 즉, 굳이 콘월리스가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를 데리고 요크타운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재해권을 확보할 강력한 영국 함대도 있었으니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프랑스 함대가 북상하기 전에 콘월리스의 병력을 안전한 뉴욕시로 철수시킬 수 있었고, 그럴 경우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닭쫓던 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체서피크 만 전투와 요크타운 포위 사이에는 20여 일이라는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 사이에 영국군이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어도 최악의 참패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구원군이 도착한 건 콘월리스가 항복한 지 단 5일 후였다.

  • 조지 워싱턴은 가능성이 희박한 뉴욕시 공격에 집착했다. 당시 뉴욕시는 주둔 중인 영국군만 11,000~14,000명이고 수년 이상 요새화된 도시였기 때문에, 공성전을 하려면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최소 40,000명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프-미 연합군이 그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영국군을 쳐바르고 전쟁 끝냈을 것이다. 물론 뉴욕이 향후 협상 테이블에서 가질 가치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상당했지만, 뉴욕 공격은 미친 짓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를 정할 최종 결정권을 주라고 로상보 장군에게 지시했으나, 로상보는 조지 워싱턴의 뉴욕시 공격 제안을 끈질기게 반대했다. 마침내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 함대가 재해권을 확보하는게 중요하니까 함대 사령관인 드 그라스 제독이 상황에 따라 어디로 함대를 몰고 오느냐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한발 물러섰는데, 이번에도 로상보는 몰래 드 그라스에게 체서피크 만으로 함대를 이끌고 오라고 전문을 보냈다. 로상보 장군의 오지랖이 그렇게 넓지 않았다면 역사는 바뀌었다.

  • 앞에서 설명했듯이 체서피크 만 해전의 승리는 본진을 비우고 전 함대를 이끌고 나온 드 그라스 제독의 대담함 덕분이지, 북미 전역의 영국 함대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체서피크 만 해전의 영웅인 드 그라스는 얼마 후 영국 함대에 패해 본인까지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만약 이런 프랑스 함대의 패전이 단 몇개월 전에만 일어났다면 역시 요크타운 전투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크타운 전투 이후로도 당시 시대적 한계와 정치적 문제로 인해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독립전쟁은 2년 더 이어졌으며 요크타운 전투 이후 종전까지의 2년동안 발생한 사상자 수가 전쟁 개시 이후 요크타운 전투 이전까지의 6년 가까운 기간동안의 사상자들의 수보다 더 많았다.

미국이 불리한 가운데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다른 원인에는 장교저격이 있다. 현대에도 '민간인은 공격하면 안 된다' 혹은 '전쟁 전 선전포고', '포로에게는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 등과 같은 나름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이 당시에 국제 전쟁에 규칙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서 부득이한 상황(눈먼 포탄, 총탄에 맞는 경우 등)이 아니면 장교는 대개 귀족이니 포로로서 대우하고, 전쟁종료와 함께 협상 후 풀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를 반영한 것인데, 귀족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층으로서 정치가, 법률가, 군인 이외의 직에 종사하면 사실상 귀족의 신분을 박탈당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 국가의 장교 계급은 연공서열을 중시한 계급 매관제이다. 따라서 군인이 곧 정치가이며 정치가가 곧 군인이 될 수 있고, 귀족은 유럽세계에서 그들만의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국가를 떠나 교류하였기 때문이다. 당대 독일, 러시아 등의 국가도 궁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 귀족도 주권국, 슈탄데스헤어, 일반귀족으로 구분하여 유럽 전체에서 통혼하였고, 주권국의 경우 부계로든 모계로든 어느 왕실과도 8촌 이내로 묶여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반 귀족 또한 귀천상혼에 의해 각국의 귀족과 교류하고 통혼하였으니... 추가로 19세기 말에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항과 가문전체가 수록된 책자까지 간행되었다.

여기에 서유럽으로 산업혁명이 전파되고,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며 유럽=문명국이 사실상 공식화되던 시대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장교 저격은 부대의 지휘계통을 마비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26] 위에서 언급한 당대 유럽의 분위기에서 장교저격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대에 금기시하는 민간인 학살인 대도시 전략폭격이나 다를 바 없는 파격적인 수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 또한 이를 신사답지 못한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5. 결과[편집]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규정되었다. 한편 미국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그 결과 투표로 인한 선출로 그 사람이 뽑혔다. 이것이 인류사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지위가 처음 생겨서 미국 시민들 대부분도 대통령이 선거군주제와 뭐가 다른지 정확한 개념이 없었기에 조지 워싱턴은 실질적 통치행위 이외의 여러 의전의 면에서 왕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많은 미국 시민들은 조지 워싱턴에게 '종신' 대통령을 해달라고 청원했을 정도고, 따라서 만약 조지 워싱턴이 굳이 종신 대통령 하겠다고 난리칠 것 없이 계속 선거에 출마만 했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 당선되어 사실상의 종신 대통령과 동일한 지위를 누릴 뻔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은 깨끗하게 8년만 하고 물러났고, 또한 워싱턴의 후임 대통령이 종신 대통령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낮았기에[27] 민주주의는 미국에서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다.민주주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남미처럼 한바탕 난리를 겪고 나라가 쪼개졌을 거다

한편 파리 조약에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 강 동쪽까지로 인정되었다(기존의 공식적 영역은 애팔래치아 산맥까지였다. 물론 그 서쪽에도 이미 미국인들이 진출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순순히 떠날 리 없었고, 이는 결국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 ~ 1795)을 유발하게 된다.

6. 프랑스의 지원: 영국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이었는가?[편집]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에 구원 요청으로 파견되어, 그가 프랑스에게 준 것은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열등감을 자극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략은 기가 막히게 성공적이어서, 루이 16세로부터 영국을 북미에서 몰아내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프랑스 정부인사들은 영국에 대한 열세 의식에서 무리하게 전쟁을 추구했고, 루이 16세는 이때 막 왕위에 오른 22세 청년이라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루이 16세에게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이 올린 보고서는 이러했다.

'프랑스 서인도 제도의 섬들이 위험하다. 이유는'
1. 식민주를 돕지 않아 영국이 무력 진압에 성공할 경우: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꾸기 위해 영국은 프랑스를 공격한다.
2. 식민주가 자력으로 독립에 성공한다면: 영국은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를 공격한다.
3. 영국이 식민주에게 양보해 평화적으로 독립할 경우: 영국은 새로운 영토 확보를 위해 프랑스를 공격한다.
4. 식민주가 영국에 양보해 항복할 경우: 식민주는 프랑스를 원망하며 영국에 협력할 것이고, 영국은 프랑스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민주를 도와 영국을 공격한다!


이리하여 영국 정규군에게 곧 제압당할 수준이었던 "식민지 반란"이 프랑스의 자금과 군사적 지원으로 성공. 북미 13개 식민주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미국이 탄생했다. 이때 프랑스는 얼마나 두고두고 즐거워했는지 후일 미국에 독립 100주년 기념선물로 자유의 여신상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미국 지원은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신의 한 수였다는 주장도 강하다. 실제로 미국 독립 전쟁 기간에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영국 본토 침공과 지브롤터 포위를 시도했으나 영국 함대에게 막혔을 정도로 영국은 여전히 압도적인 파워를 자랑했다. 미국-프랑스-스페인이 편 먹고 영국하고 싸웠는데 겨우 겨우 이긴 거다.그것도 콘월리스와 클린턴의 삽질 덕분에

그럼 프랑스-스페인이 편 먹고 영국(+미국 식민지)하고 싸우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더구나 북미만 놓고 본다해도, 이미 프랑스 식민지였던 캐나다 지역이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결과로 영국에게 빼앗긴 역사가 있고, 또한 당시 북미 대륙 식민지보다 훨씬 더 가치 있었던 게 설탕과 담배라는 교역품을 생산하는 서인도 제도 식민지, 특히 지금의 아이티인 생 도맹그라는 점을 감안할 때,[28] 만약 '어떤 이유로든' 영국-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경우 당연히 영국은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서인도 제도+미국+캐나다 식민지 지역의 세력과 자원을 이용해서 프랑스의 서인도 제도 식민지를 공격할 것이란 점은 너무나 자명하다. 더구나 전쟁 발발시 전지구적인 재해권을 이용해서 전 세계의 적국 식민지에 점령, 항구봉쇄, 식민지 약탈, 상선 나포 등으로 전쟁 피해를 확대해 나가는 것은 영국의 주특기였다.[29]

게다가 프랑스의 미국 지원 역시 그렇게 맹목적이거나 무리하지 않았다. 영국-식민지 갈등 초기부터 프랑스는 이것이 영국-프랑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다소 맞추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비밀 요원을 보내 정보를 수집했으며, 렉싱턴-콩코드 전투를 보고 미국이 독립할 저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미국 지원을 결정하면서도 영국을 상대할 있는 해군 육성 계획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발 빼고 나몰라라 해도 그만인 중립을 표방하면서 철저히 비밀리에만 지원했다. 트랜튼, 새러토가 전투 등을 보고 본격적인 참전을 했으나, 그럼에도 부족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브롤터 때문에 이를 갈고 있던 스페인을 끌어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고,[30] 전쟁 후반에야 북미에 파견한 육군 병력조차 영국이 파견한 병력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큰 피해도 입지 않았으며, 전쟁의 결과를 비롯한 모든 것이 프랑스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게 없다. 조지 3세의 의중이 내각의 인선과 전쟁 수행에 크게 작용했던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대한 처음부터 끝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이는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베르젠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의 열세 의식을 이용했다고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능수능란한 베르젠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건 미국 대표단이었다. 미국 대표단은 베르젠에게 수많은 요청, 제안, 반협박 등을 시도했으나, 베르젠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서 미국 대표단에 제공한 통상 조약, 동맹, 원조, 차관을 제외하고 더 얻어낸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 심지어 베르젠은 북미로 병력과 함대를 파견하려고 계획 중에 있고 심지어 실제로 그 함대가 대서양으로 출항하고 있을 때에도, 제발 병력과 함대를 더 북미에 파견해 달라는 미국 대표단의 요청에 어떠한 힌트나 암시조차 주지 않았을 정도로 동맹국 미국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의 열세 의식을 이용해서 뭘 한게 아니라, 벤자민 프랭클린은 베르젠에 대해서 뭘 할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에 본인의 인기를 이용해서 프랑스에 친미 여론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한 게 전부인데, 그 덕분에 벤자민 프랭클린은 몇몇 동료들과 의원들한테 '프랑스 정부를 압박해서 더 얻어낼 생각은 안하고 그저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다'고 까였다. 하지만 벤자민 프랭클린을 깠던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인 존 애덤스가 미국 대표단 후임으로 왔어도 베르젠에게서 딱히 더 얻어낸 것은 없었다. 심지어 고집불통의 존 애덤스에게 짜증이 난 베르젠은 비밀리에 미국 의회에 압력을 넣어 존 애덤스를 다른 자리로 옮겨가게 만들 정도였는데, 이제 막 국제 외교란 걸 해본 미국이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프랑스를 가지고 놀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단 프랑스가 예상 못한 '한두 개'는, (1)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되었다는 것과 (2) 장기화된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미국 의회의 권한이 주정부들의 노력을 이끌어내고 하나로 결집시키기에 너무 미약했다는 점이다.[31] 그 결과 미국은 더욱 더 프랑스의 원조와 차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국력이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프랑스에게는 큰 짐이 된 것이다.[32]

영국 정부는 미국 식민지인들은 겁쟁이들이며 따라서 미국 식민지 정도는 약간의 군대로도 몇개월이면 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강경책을 밀고 나갔는데, 렉싱턴-콩코드 전투, 벙커힐 전투에서 줄줄이 망하고 북미 13개 주 식민지라는 광대한 영토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배상 차원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에게도 일부 식민지를 넘겼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 원정으로 인해 엄청난 부채를 뒤집어 쓰게 되었으며, 더불어 원정 직후를 기점으로 불어닥친 폭설과 기근으로 국가적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미국에 원정갔던 프랑스의 장교와 병사들이 자유와 박애 정신을 배워 와서 루이 16세의 뒤늦은 진화 노력도 잠시,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버렸다. 원정 갔던 군인들의 사상수입은 특이한 게 아니어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 장교들 중 일부도 귀국 후 어설프게 혁명을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다.

프랑스의 주요 수입은 서인도 제도 섬들의 특산물을 가공해서 내다 파는 것에 있었지 퀘벡 등 북미 식민지가 주력은 아니어서, 이게 결정적인 참전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문제는 그 수익을 써먹을 정도로 루이 16세가 오래 살지는 못했다는 것

어찌되었건 미국 독립은 전 세계에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내셔널리즘[33]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스페인포르투갈의 타격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열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시몬 볼리바르가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건립한 모습은 조지 워싱턴을 똑 닮았다. 하지만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은 끝내 분열되면서 두 아메리카의 진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이와 별개로, 한국의 서양사학자인 주경철 교수는 <프랑스 혁명사>를 통해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회피 목적도 어느정도 있다고 주장한다. 루이 16세는 특유의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상 정복전쟁이나 유럽 내의 영토적 정치적 변화를 꺼려했기에 사돈네의 바이에른 침탈 계획을 꺼려했으나 어쨌든 동맹인지라 참전을 피할 명분이 필요했는데 그 명분이 바로 미국 독립전쟁이었다는 것.

7. 혁명으로서의 미국 독립[편집]

시민 혁명이라는 관점에서는 유럽 한복판에서 일어난 프랑스 혁명보다는 인지도가 덜하지만, 최초로 근대적 공화국을, 그것도 고도의 안정성을 바탕으로[34] 수립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혁명이다.

물론 미국 혁명의 혁명성에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이에 의하면 혁명이라고 하면 말그대로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무엇인가 혁명적인 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 독립전쟁은 말그대로 일개 식민지가 경제적 원인을 주요 요인으로 한 독립 전쟁에 불과하는 것이다. 최소한 혁명으로 불리려면 영국청교도 혁명처럼 왕당파로 불리는 구 귀족체제에서 의회파로 대변되는 시민세력으로 정치세력이 변동되고, 이로인해 영국의 경제정책이나 기타 정책들이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격변하는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여진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의의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우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있었다고 한들 아메리카 식민지는 국왕귀족이라는 본토의 봉건적 계층에 예속되어 있었다는게 중요하다. 즉 철저하게 본토인들의 의지에 따라 자치권이 박탈 가능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태를 무력으로 바꾸었다면 혁명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세금 내기 싫어서 일으킨 전쟁이라며 미국 혁명의 혁명성이 폄하되어야 한다면, 영국 내전(이른바 청교도 혁명)이야말로 찰스 1세의 폭정은 대외적 명분이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청교도들이 자기들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루터파이든 국교회이든 가리지 않고 가톨릭이라 몰아붙인 수사에서 일어난 내란이니 더더욱 혁명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도 결국 이전부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자본가들이 전통적 귀족 계급을 몰락시킨 '있는 자들의 밥그릇 싸움'이니 혁명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영국 내전은 그렇다쳐도 프랑스 혁명의 혁명성마저 완전히 부인할 사람은 적다. 미국 혁명이 대외적 명분과 실질적 이유가 따로 놀았다고 한들, 혁명성을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

신생 아메리카 합중국은 성문헌법이 통치하였고, 혈통적 신분을 부정했으며,[35] 권력의 분립과 상호견제가 이루어졌다. 봉건적 문화가 상당한 본국의 지배를 무력으로 뒤엎고 이러한 신생 독립국이 탄생했으니 충분히 혁명이라 할 만하다. 한나 아렌트처럼 프랑스 혁명보다 미국 혁명을 더더욱 높게 평가하는 정치학 연구자도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자유(freedom)와 해방(liberty)을 혼동하였기에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전체주의의 씨앗을 남겼다고 평했으나, 미국 혁명은 자유와 해방을 구분하였기에 고도의 안정성과 민주정을 쟁취한 성공한 혁명이 되었다고 본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20세기 유럽의 지식인보다도 미국의 지식인들이 미국혁명을 프랑스혁명의 견지에서 해석하고, 미국혁명이 프랑스혁명의 교훈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혁명을 비판하는 것이다. 슬픈 진실은 파국으로 끝난 프랑스혁명이 세계사를 만든 반면 그렇게도 성공적이었던 미국혁명은 국지적인 중요성밖에 가지지 못한 사건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혁명론>

8. 기타[편집]

1775-1784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기에 사진의 시대와는 무관해보이지만 놀랍게도 100세 넘게 장수한 노병들의 사진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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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인물은 레뮤얼 쿡이며 브랜디와인 전투와 요크타운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각각의 발발년도가 무려 1777년과 1781년이다. 생몰년일은 1759년 9월 10일 - 1866년 5월 20일인데 어느 정도냐면 나폴레옹보다 10년 먼저 태어났고 정조보다 7년 늦게 태어난 거다. 미국의 탄생을 위해 싸웠고 미국의 통합을 직접 눈으로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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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더 많은 사진은 위 사이트 참고. 대부분 100살을 넘겼다!

9. 당시를 다루는 작품[편집]

  • 영화 패트리어트 - 늪 속의 여우: 2000년작. 멜 깁슨, 히스 레저 주연. 독립전쟁 당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배경으로 한다.

  • 영화 혁명 : 1985년작. 알 파치노 주연. 불의 전차를 연출한 휴 허드슨 감독 작품으로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 갔던 "탐" 이라는 인물을 통해 바라본 전쟁서사시.

  • 드라마 존 아담스: 2008년작, HBO. 폴 지어마티, 로라 리니 주연. 존 애덤스를 중심으로, 미국의 독립과 건국 과정을 배경으로 한다.

  • 게임 어쌔신 크리드 3: 2012년작. 어떤 미친 역덕후살신성인에 힘입어 오히려 이 문서보다 해당 게임의 문서가 독립전쟁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더 많은 편이다(...). 일부 작중요소가 가상인 것을 제외하고 실제 있었던 일과 소소한 요소들을 보는 정도로는 괜찮은 편. 어쌔신 크리드 3/게임 관련 정보 참조.

  • 게임 시드 마이어의 콜로니제이션, 문명 4 콜로니제이션: 신대륙의 식민지 개척자가 되어 원주민과 싸우면서 결국엔 독립을 쟁취하는 게임. 동시기를 다루고 있다.

  • 게임 유럽전쟁 4: 시나리오 모드의 일부인 미국의 굴기 편에서 미국 독립전쟁을 다루며 정복 모드에서도 1776년 편에서 다룬다.

  • 뮤지컬 해밀턴: 주인공 해밀턴과 워싱턴 장군, 프랑스 소속의 지원군 라파예트 장군등 역사 속 실존인물들이 주인공인 뮤지컬인 만큼 1부는 이 독립 전쟁을 주로 다루고 있다. 뮤지컬의 메인 넘버인 Yorktown에서 마침내 요크타운 전투로 승리를 거두고 미국이 독립하게 된다.


[1] 미국 내에서는 이렇게 불리는게 일반적.[2] 당시 독일 소국들중 일부는 용병산업을 국가 주요산업으로 하는경우가 있었으며 독립전쟁시기 상당수가 영국을 대상으로 장사를했다. 단 하노버 선제후령의 경우 용병보다는 영국의 동군연합 국가였기에 파병한 것에 가깝다.[3] 제2차 영국-마이소르전쟁[4] 제1차 영국-마라타전쟁[5] 아이러니하게도 양측 총 지휘관의 이름이 조지다.[6] 탈영병 대다수가 해군이기에 많아보이는 것이라고 한다[7] 전보도 없던 시절이니 당연하겠지만, 미국에서 독립 선언문이 발표된 당일에 영국까지 소식이 전해졌을 리가 없다.[8]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의 발발 원인은 한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가 우발적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살해한 데서 시작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정체불명의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의 정체가 조지 워싱턴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만약 조지 워싱턴이 전쟁의 발발 원흉(?)이었다면 결국 그의 우발적 살인이 미국 독립이라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 한편으로 북미 원주민이나 인도 사람과 무관한 전쟁이었다는 것. 자기네는 쏙 빠지고 엉뚱한 사람들 끼워넣기[9] 2013년 9월 1파운드는 1700원 내외이니 가장 적은 숫자인 100억 파운드라고 하더라도 17조 2,482억 원, 5000억 파운드라면 862조 4,100억 원.[10] 심지어는 트럼프 카드에도 인지를 붙여야 했다고 한다. 흠좀무. 오늘날에도 스페이드 에이스만 유난히 도안을 크고 화려하고 복잡하게 그리는데, 이때 붙인 인지의 흔적이다.[11]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라임 굿[12] 사실 보스턴 학살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독립파들은 이 사건을 아주 잘 활용했다.[13] 당시 랍스타는 현재의 조리법이 널리 퍼지기 전인 데다 국물을 갖다버려서 매우 맛없는 저급 식재료로 취급받았고 미국 북동부에서는 널린 게 랍스타다. 현재도 매사추세츠나 메인 등의 지방에서는 랍스타가 매우 싸다. 하지만 본국에서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넘쳐났는데?[14] 당시 'lobsterback(가재 등짝)'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당시 영국군 제복이 빨간색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15] 정확히는 여기여기 참고. 폴 리비어가 한 말이 "The British are coming!"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The Regulars are coming out."이라고 한다.[16] 심지어 장교급이라고 있는 인물들조차 보고서를 어찌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워싱턴이 일일이 다 가르쳐줘야 했다고... 또한 군기도 개판이라 미국 독립군의 서열 2위였던 찰스 리의 경우엔 전쟁 중에 적진 근처의 술집에서 문란한 파티를 벌이다가 다음 날 아침 영국군 순찰병에게 체포되기까지 한다. 결국 미국 측은 미인계를 써서 영국군 장교를 납치한 후 맞교환하며 그를 구해낸다.[17] 영국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피해가 더 커서 숫적열세를 더 악화시켰다.[18] 말이 신사 협정이지, 실제로는 해상 철수 중에 공격하면 보스턴에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19] 사실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기보다는, 우물쭈물 하다가 뉴욕시에서 영국군 포위망에 갇혀서 아작날 뻔했던 게 더 큰 문제였다. 처참한 패배를 한 번이라도 당하면, 국력이 미약한 미국으로서는 독립 운동을 더 이상 지속할 여력이 없기 때문.[20] 당시 범선 시대고 영국 본토와 미국 간의 거리는 구글 지도로 재보면 5000km 가 넘는다. 그리고 전보라는 개념도 없어서 연락관이 지원 요청서를 작성하여 영국행 배에 올라 직접 전달 해야 했고. 현대의 항공기는 몆십 시간만 타고 가면 되지만 범선시대에는 한 번 보급물자와 지원군을 실어서 도착하면 과장 섞어서 달 단위로 걸렸다(...) 그야말로 거의 현지 원정군으로만 전투를 치뤄야 하는 셈.[21] 사실 이쪽은 1777년부터 비공식적으로 미국을 지원해주고 있었다.[22] 이전 서술에서 영국 함대가 대패한 것처럼 설명되어 있었으나, 체서피크 만 해전에 실제 투입된 24:19라는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가 전열이 붕괴되면서 쫓겨간 것이 아니라 일주일 후에 스스로 퇴각 결정을 내린 것이고, 손실 역시 전투 종료 후 상태가 안 좋은 전함 한 척을 자침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패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물론 이는 수송작전에 참여했던 바라스(Barras) 함대가 임무를 마치고 합류하면서 36:18의 압도적인 전력 우세 속에서도 프랑스 함대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지 않았기에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23]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이전에 요크타운 요새 주변 지역에는 라파예트 휘하의 병력에 프랑스 함대에서 상륙시킨 해병을 합쳐 고작 3,000명밖에 없었는데 그 병력으로 9,000명에 달하는 영국군을 포위한다는건 어불성설.[24] 그동안 영국 의회에서도 전쟁 지지파와 전쟁 반대파 사이에서의 법안, 결의문 등에 있어서 표결 대립이 끝없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전쟁 지지파가 항상 승리했다.[25] 남부 전략은 병력을 분산해서 남부 식민지 지역을 폭넓게 점령하겠다는 것인데, 그와 반대로 병력을 한 곳으로 모으면 요크타운 거점을 제외하고는 남부 식민지 지역은 도로 식민지 민병대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26] 2차대전 이후 소위, 중위가 계급별 전사비율로 보면 압도적이며 베트남전에서 소위의 평균 생존시간은 1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장교가 저격의 제1순위이다.[27] 워싱턴은 7년 동안 총사령관(만약 미국 독립 운동이 실패한다면 반역죄로 총살당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자리인)으로 대륙군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7년 동안 자신의 저택은 요크타운 포위를 앞두고 프랑스 장군들을 접대하는 겸 해서 겨우 딱 한 번 들렀을 정도로 항상 대륙군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종종(특히 전열이 붕괴되려는 상황일 경우)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천만한 최전선까지 달려가 병사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바람에 부관들이 억지로 말고삐를 잡고 끌고 나왔던 적이나 도망치려는 대륙군 병사들의 길을 가로막다가 공격당한 뻔한 적도 있었고, 전황이 나빠지자 원래 매년 받기로 했던 상당한 금액의 총사령관 급료를 미국 독립 후 총사령관 활동을 위해 지출한 경비를 실비 정산만 해서 받는 것으로 바꾼 것도 조지 워싱턴 본인이었다. 그 정도로 미국 독립운동에 독보적으로 헌신적이었고 미국 독립운동에 독보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다.[28] 실제로 당시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60%, 커피의 40%가 생 도맹그에서 생산되었다. 이로 프랑스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프랑스 전체 국부의 4분의 1을 차지했고 때문에 7년 전쟁 이후 프랑스가 북미와 인도를 포기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프랑스 혁명 정부가 대군을 보내 아이티의 독립 운동을 탄압한 이유도 생 도맹그를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 한 것이다.[29] 영국 해군은 프랑스를 상대로도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1793-1815년까지 20년이 넘게 장기간 해상봉쇄로 프랑스의 무역망을 완전 붕괴시켰다. 다만 미국 독립전쟁 당시엔 프랑스 왕립해군의 수준도 상당해서 체서피크 만 해전처럼 함대 결전을 벌일 수 있었으나 혁명 당시엔 해군 장교단에 대한 숙청으로 악화되었다.[30] 스페인은 미국의 동맹이 아니라 프랑스의 동맹 자격으로 참전.[31] 실제로 미국에 돈이 없었던 게 아니다. 대륙군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적지 않은 필라델피아 시민들은 여전히 호화스러움과 사치를 누리고 있었고, 그것을 의회 방문 길에 목격한 조지 워싱턴은 불편한 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32]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에게 짐이 되었다 한들, 프랑스의 왕정이 무너진 유일한 이유라 할 수 없고 왕정이 무너진 것 역시 프랑스의 국력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미쳤다라고 볼 수도 없다. 반대로 미국 독립 인정 이후에도 1812년 영-미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영국과 미국의 관계는 금방 봉합되지 않았는데, 이를 통해 프랑스가 추구하려고 했던 목적은 100% 이상 달성되었다.[33] 굳이 민족주의가 아닌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영국과 미국 사이 '민족(혈통 혹은 인종)의 차이'가 있지 않았기 때문. 반면 특정 공동체를 대표하는 별개의 'nation'을 건국해야 한다는 내셔널리즘에는 부합한다.[34]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가 공포정치와 쿠데타, 자국민 학살, 군주정 복고 등을 겪은 것과 비교하면, 미국의 체제는 정말 기묘할 정도로 안정성있게 지속되었다. 이 정도로 안정성 있는 공화정 체제를 세운 시민 혁명은 찾기 어려운데 이는 미국 독립전쟁이 프랑스 대혁명처럼 내부의 지배구조를 근본부터 재구축해야하는 혁명이 아니라 내부의 자치정부는 유지한 채 외부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했던 혁명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미국조차도 각자 다른 나라 수준이었던 주들간의 연맹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나라로 통합하고자 했을 때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 끝내 거대한 내전이 발발했다는 것은 그만큼 내부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35] 물론 사회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명문가와 엘리트들이 있으나, 이건 21세기의 서방 국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변함없다. 중요한 점은 혈통적 신분을 법으로 부정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