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옥

최근 수정 시각:

중국의 대표적 반달리즘(시대순)

분서갱유
(기원전 212년 ~ 213년)

문자의 옥
(1660년 ~ 1799년)

문화대혁명
(1966년 ~ 1976년)


1. 개요2. 배경3. 강희-옹정제 시기
3.1. 명사집략(明史輯略) 사건(1660)3.2. 남산안-대명세 사건(1711년)3.3. 사사정 사건(1726년)3.4. 증정-대의각미록 사건(1728년)3.5. 건륭제 시기
4. 결과

1. 개요[편집]

文字-獄
고대에 분서갱유, 현대에 문화대혁명이 있다면 근세에는 이게 있었다

서책이나 시구 등에 나온 문구나 단어를 이유로 탄압하는 공포정치의 일환.

서양에도 있었으나, 주로 중국 왕조에서 나타났고 그 가운데 명의 홍무제와 청의 강희~가경 연간의 일이 가장 유명하다. 가끔은 군주가 아니라 권신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짓거리를 하기도 했는데, 진회가 대표적이다. 영어로는 Literary Inquisition이라고 한다.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문자의 옥은 강희제 시기에 시작되어 옹정제 시기에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 규모가 커져 건륭제 시기에 절정을 이루고 가경제 시기까지 이어진 청나라 제국의 대규모 사상탄압 사건들을 말한다.

2. 배경[편집]

근본적 원인은 당연히 청이라는 만주족, 즉, 오랑캐 국가의 중국 대륙 통일이었다. 원 멸망 이래 300년간 한족 국가 명으로 존속하던 중국인들에게 오랑캐의 지배란 수치스러웠고, 당연히 한족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장 한족의 반발을 통제하지 못 하고 100년도 못 가 무너진 원나라의 선례가 있었으니 이러한 집단반발은 당연히 청에게는 심각한 국가적 위협이었고 놔두지 못 할 일이었다.

청은 이러한 반발을 대규모 학살과 탄압으로 억눌렀다. 양주나 광주, 사천 등지에서 난 명청교체기 대학살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 십만 명, 최대 몇 백만명에 근접하는 대규모 인구를 탄압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학살 및 변발 등 만주족 문화 억지 강요 등의 탄압은 원의 남송 정복 때도 없었고 칭기즈 칸의 화북 정벌 때에나 나올 뻔하다가 장춘진인의 만류로 나타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청은 강력한 힘이 바탕인 강경책(대량학살과 변발의 강요 등)과 회유책(한족 관료의 등용과 향신층의 우대 등)을 같이 펴며 중국 전토 지배에 나섰다.

그러나 비록 힘으로 억눌렀어도 사람의 마음까지는 굴종시키지 못 하는 법. 어쩔 수 없이 변발을 하고 청에 충성하는 척했으나 한족들, 특히 강남 지방에서는 여전히 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고, 청을 피해 재야에 숨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족 중심의 반청사상이 나타났다. 청은 이러한 반청의 기반인 사상 그 자체를 말살한다는 대담한 정책을 세워 약 1세기에 걸친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상 탄압을 폈다. 문화대혁명이 10년을 갔다면 비슷한 성격인 문자의 옥은 100년을 갔다 그런데 스케일은 문화대혁명이 더 컸다 21세기에는 중국에 어떤 검열 사건이 터질까

3. 강희-옹정제 시기[편집]

3.1. 명사집략(明史輯略) 사건(1660)[편집]

명나라는 다른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남겼는데,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면서 숭정제 연간이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당시 편찬을 담당했던 주국정(朱國楨)이란 신료는 미완성인 기록들을 가지고 강남으로 피난하여 살다 죽었는데, 그의 후손이 궁핍해지자 이를 지방 유력가 장정롱(莊廷鑨)에게 팔았다.

장정롱은 이 명사를 완성해 자신의 가문을 그냥 돈 좀 있는 유력가가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로 발전시켜 명성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장정롱은 초기 작업 중에 급사하고 동생 장정월(莊廷鉞)이 이 작업을 마무리했는데, 장정월이 워낙에 학식이 없었던 관계로(…) 주변의 여러 학자들과 명사들을 초빙, 서문과 평론을 달고 미완인 부분을 보충했다. 그리고 이게 화근이 되었다.

장정월이 초빙한 학자와 명사들은 하나같이 학식과 명성이 드높았지만 동시에 청나라에 이를 가는 반청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때다 싶어 의뢰받은 명사 편찬 작업에서 신나게 명나라 만세 우왕ㅋ굳ㅋ 청나라 나쁜넘 개갱키 오랑캐넘들 수준의 글을 마구 써댔고, 장정월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이거 팔면 명성도 상승하고 돈도 벌고 우왕ㅋ굳ㅋ라는 생각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렇게 출간된 책에는 청조로서는 당연히 아연실색할 내용들로 가득 찼다. 우선 청 황제들을 묘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1] 청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명과 청의 전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명의 연호를 쓰고 후금/청군을 반란군으로 적었으며, 항장 출신 상가희와 경정충을 나라 팔아먹은 도둑놈이라 비판했다.

그럼에도 지방 관아에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장정월이 막대한 뇌물을 주어 문제 되는 내용을 삭제하고 출간하는 선에서 해결했으나, 끝내 이 책은 강희제에게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책을 정독한 강희제는 이 역적놈의 쉐키덜!!! 하면서 연루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 책의 편찬 작업을 시작한 장정롱의 의도와 달리 장씨 집안은 멸족, 이미 죽은 장정롱은 부관참시를 당했고, 편찬에 관여한 학자와 명사들은 물론, 그들의 가족과 친척, 제자들까지 싸그리 다 처형당했다. 강희제는 뇌물을 받고 책의 개정출간을 허용한 지방 관리들, 심지어 단순히 책을 인쇄한 사람과 책을 받아 시장에서 판매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처형했다. 강희제는 1655년생으로 61년 즉위했으니 이때는 꼴랑 7살이어서 황제 본인보다는 황족들과 보정대신들의 의중이 더 강했겠지만, 탄압이 절정에 이른 후대 황제들만 보더라도 강희제가 성년으로 직접 처벌을 시행했어도 별다른 자비는 없었을 것이다.

대대적인 탄압이기는 했으나, 명사집략은 워낙 대놓고 반청기조가 셌던 책이기에 그나마 다른 필화에 비하면 이유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본격적인 문자의 옥을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김용녹정기 서장에 이 명사집략 사건 이야기가 소설적인 각색이 더해져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예전의 국내 출판본에서는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었지만 2008년판 이후 판본에서는 제대로 들어가있다.

3.2. 남산안-대명세 사건(1711년)[편집]

청 초기 산문계에서 이름 높았던 대명세(戴名世)라는 사람이 명 시절 역사와 저집을 연구하고 참고하면서 자신의 저작 남산집(南山集)을 냈는데, 그 과정에서 남명 최후의 황제 소종 주유랑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썼음이 드러났다.

끝내 남명의 연호 사용 → 명나라 추종 세력이네? → 그럼 너는 반역수괴라는 논리로 대명세는 처형, 저서들은 모두 불태웠고 가족은 만주 외곽으로 유배되었다.

3.3. 사사정 사건(1726년)[편집]

옹정제 6년, 향시의 감독관이던 사사정(査嗣庭)[2]이라는 문인이 시험문제를 출제하면서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 문구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 나온 문구라[3]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유(維) 자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획만 뺀 것이니 유민소지의 뜻은 황제 옹정을 참수(…)하겠다는 의도를 담은 반역음모라며 사사정을 체포하고 구족을 멸족했다. 사사정은 체포 이후 판결이 나기 전에 옥사했는데, 잠시 땅에 묻혔다가 끝내 부관참시당했다. 사사정의 집을 수색한 결과 정부를 비난하는 글이 많아 이것도 시비거리가 되었다.

3.4. 증정-대의각미록 사건(1728년)[편집]

옹정제 8년이던 1728년, 천섬(사서)총독 악종기(岳鍾琪)를 충동질한 증정이라는 인물의 반란미수 사건이 있었다.

증정(曾靜)은 반청사상가를 자처했지만 실상은 흔해빠진 백면서생으로 명망 높은 학자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반청사상의 지주 가운데 1명이던 여유량(呂留良)의 저작을 읽고 크게 감동, 여유량을 추종했고, 여유량이 이미 죽은 뒤라 그의 아들로부터 여유량의 저작 몇 권을 더 구해 읽으며 열렬한 여유량 추종자 & 반청주의자 노릇을 했다. 그는 섬서총독 악종기를 충동질해 반청복명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제자 장희(張熙)를 거쳐 서신을 보내 반란을 일으키라 권유한다.

섬서총독 악종기는 한인팔기 출신으로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고 만주족만 임명받던 천섬총독 자리에 올라 만주 출신 귀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냐면 만주귀족들이 작당해 악종기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할 정도였고, 그럼에도 옹정제는 개소리 집어쳐! 누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악종기를 철썩같이 믿었으니 악종기는 당연히 충성했다.

증정이 왜 하필 그런 청조의 충신 악종기를 골랐냐면… 악씨라는 성에서 알겠지만, 악종기가 중국 역사상 악씨성을 가진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송의 애국명장 악비의 21대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신의 조상은 한족 왕조를 위해 충성하고 끝까지 싸워 금나라 여진족 오랑캐들을 물리쳤으니 당신도 조상을 본받아 여진족 오랑캐들을 토벌하고 한족의 증흥을 이뤄달라는 소리(…).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고 악종기는 일단 수긍하는 척 하여 증정의 전반적인 계획을 캐낸 뒤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 옹정제는 증정과 장희를 당장 북경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옹정제는 증정과 키배를 떠서 증정을 탈탈 처발라 완벽하게 사상개조를 시켜버리는 충공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빅 브라더?! 그리고 증정과 장희를 방면하고 자신과 증정의 키배를 기록으로 남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출간, 전국적으로 보급해 청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증정이 가지고 있던 서찰을 모조리 압수하고, 사상개조한 증정의 진술을 토대로 여유량의 후손 및 반청사상을 가진 명망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옹정제는 여유량을 부관참시했고 여유량의 제자 엄홍규까지 걸리자 두 집안의 직계후손 중 16세 이상을 모조리 처형, 그 이하는 노비로 만들었다. 여유량의 저작을 출판한 사람들도 반역죄로 처형당했고, 그 저작을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감옥에 끌려갔다. 그리고 증정은 사상개조로 참회록을 출간해 벼슬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다가 건륭제 원년에 이때의 일을 핑계 삼아 처형당한다. 대의각미록엔 증정이 주장하는 황실의 추문이나 궁정 암투가 많이 적혀있었는데 옹정제가 이걸 반박한답시고 책을 썼다가 오히려 이런 내용들이 전국으로 퍼지는 결과가 됐기 때문.#

한편 이 사건은 옹정제의 갑작스런 죽음에 관해 인기 있는 야사를 남겼다. 여사랑(呂四娘, 여사낭이라고도 한다)이라고 불리는 여유량의 딸 혹은 손녀가 무예를 익혀 궁녀로 잠입해 옹정제를 암살해 복수했다는 이야기다.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옹정제를 다루는 작품에 높은 빈도로 등장한다. 양우생의 무협소설 강호삼여협이 이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녹정기 2부라고 사기개칭해서 출간했다.

3.5. 건륭제 시기[편집]

강희제, 옹정제 시기에는 그래도 명사집략 사건이나 대명세 사건[4]처럼 청조의 지배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거나, 증정 사건처럼 분명한 반란모의를 중심으로 탄압했기에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에는 그냥 일반인들이 실수거나, 별다른 의미가 없이 쓴 단어 하나하나까지 트집을 잡으며 닥치는 대로 탄압하고 처형하니 그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못 적을 지경(…).

대표적으로 호중조(胡中藻)라는 문인이 일파심장논탁청(一把心腸論濁淸, 한 줌 마음으로 청탁을 논하고 싶구나) 이라는 시문에서 흐리고 맑음이라는 의미인 탁청(濁淸)이란 문구를 쓴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건 본래 한시에서 사성법과 각운법에 맞추기 위해 청탁을 탁청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었는데, 감히 국호인 청 앞에 탁이라는 부정적 글자를 썼다는 이유로 반역혐의로 처형(…)한 사건이 있고, 강희자전의 문자가 너무 어렵다고 한탄했다면서 반역죄로 처형(…)도 했으며, 그보다 더 막장인 사례로는 순치제 시기 시인이 쓴 구절에 순치제보다 후대인 건륭제의 시호와 어명을 피휘하지 않았다(…)고 그 시인의 고손자가 끌려와 고문도 겪었다.[5]

심지어 청나라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지식인들도 청이나 건륭제를 칭송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트집을 잡혀 처형되는가 하면[6] 명백한 미치광이의 헛소리에까지 "미쳤는데도 이렇게 불손한 소리를 지껄이니 정신이 멀쩡할 때라면 어떤 발칙할 마음을 품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이쯤 되면 아예 찬성이든 비판이든 생각 자체를 하지 말고 고분고분 황제에 순종하기만 하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강희제와 옹정제 시기의 문자옥은 일부 억지사례에도 불구하고 실제 반청복명사상에 기반한 사건을 청황조의 존립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당연히 처벌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건륭제 시기에는 그냥 황권 강화를 이유로 그냥 걸리면 다 죽이는 탄압이었다는 것(…). 건륭제의 피해자들은 반청복명과는 거리가 먼 일반 순수학자나 시인이 대다수였다. 애시당초 건륭 연간은 명이 멸망하고 1세기나 지난 뒤라 반청복명 세력이 대규모로 있기도 힘든 때였다. 그냥 정권의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라고 보는 게 더 합당할 것이다.

특히 사고전서 편찬 때문에 건륭제 시기 문자의 옥은 극에 달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전국의 모든 서책과 기록을 긁어모으라 지시하고 그 가운데 청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기록은 모조리 불태웠다. 단순히 당대의 서책와 기록만이 아니라 명 말엽의 기록들도 그 대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명 말기 장수들이 여진족과 후금/청을 상대로 하면서 이민족/오랑캐/반란군이라 쓴 표현이 있으면 모조리 날려버렸다. 명 말기 명의 장수가 명의 황제에게 하는 보고이니 당연히 청군을 반란군이라 표현하는 건데 그걸 없앤 거다. 간혹 당대의 기록에 그런 말이 보이면 즉시 저자는 끌려가서 숙청. 농담이 아니다(…).

탄압이 이처럼 가혹하고 온갖 트집을 잡아대니 정상적인 문학 창작 활동이나 학문 연구가 발전할 리가 없었다. 당대 지식인층은 아예 교우 목적의 단순한 서신조차 보내기를 꺼렸고, 설사 서신을 주고받더라도 보는 즉시 불태울 지경이었다. 서신의 내용이 정말로 불순해서가 아니라 어디서 어느 글자 갖고 어떻게 트집잡힐지 몰라서. 실제로 청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할때 필담으로 교류를 했는데 대화가 끝나고 곧장 쓴 종이를 태워버렸다고 한다.

4. 결과[편집]

강희제, 옹정제 시기의 대규모 탄압으로 화남지방에 기반한 반청복명세력의 사상적 기반은 거의 뿌리째 뽑혔다. 그리고 뒤이은 건륭제의 탄압으로 얼마 안 남은 복명사상가들과 수많은 저작저술들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문자의 옥에는 한족과 만주족을 안 가렸고, 서로 황제나 반대파에게 무슨 트집을 잡혀 역적으로 몰릴 수 있다 보니 무조건 몸을 숙이고 조심하게 되면서 황제의 독재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그러나 "한족들의 마음을 굴종시키겠다"는 청조의 의지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제 아무리 많은 사상자들을 탄압하고 숙청하고 서책을 불태워도 한족들은 만주족과 청조에 대해 겉으로만 굴종할 뿐, 속으로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멸만흥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7] 애초에 청나라 때 문자의 옥의 피해자들 중에는 만주족도 많았으니 어떻게 보면 문자의 옥은 청나라의 제 살 깎아먹기인 셈 이는 건륭제 말기 백련교도의 난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반란의 연속으로 드러났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만주족이 보복으로 갈려나갔다.

한편 문자의 옥은 명대 중기 이후 나타난 자유로운 학문 연구 환경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당연하겠지만 자유로이 연구하고 토론하면 꼬투리 잡아 죽일 텐데 누가 연구에 나설까? 그 결과, 청대의 지식인들은 트집잡힐 염려가 거의 없는 머나먼 과거의 기록이나 유물이 대상인 고증학에 빠져들었다. 당시 청나라 학문의 막장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있다. 흔히 사문난적 운운하지만, 조선의 학문적 분위기[8]는 최소한 청나라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애초에 한반도 역사상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문자의 옥과 같이 자국의 역사와 사상가들을 탄압하는 희대의 검열 사태는 일어난 적이 없다. 아니, 전세계 역대 왕조들 어디를 둘러봐도 특정 계층에 대한 탄압이나 숙청을 심하게 한 사례는 많더라도 청대 문자의 옥처럼 자국의 학문과 사상의자유를 통째로 초토화시킨 검열 사례는 없었다.

동양이 서양에 뒤쳐지게 된 계기중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로 이 사건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서양은 학문을 탄압하던 중세에서도, 생각이 마음에 안든다고 죽이던 종교전쟁의 시기에서도 한참 벗어나 상당히 높은 수준의 학문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보수 교회 앞에서 무신론을 외쳐도 별 일없는 사회의 학자들과 증조할아버지 (...) 가 쓴 편지에 글자 하나 잘못 썼다고 후손이 몰살당할 수 있는 사회, 인구나 경제력은 비슷했다고 해도 어느 쪽이 더 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 할 수 있었는지는 자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20세기에는 훨씬 더 거대해진 스케일로 중국에서 재현된다.

[1] 피휘 항목 참조, 현대 한국에서도 부모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고 0자,0자,0자 하면서 높이는 버릇 등에도 남아있다. 유교사회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예의이며 잘못 부르다가 목이 날아가는 수가 생긴다. 이런게 해제되는건 오로지 전 왕조가 망했을 때 뿐[2] 유명한 무협작가 김용의 조상이다. 김용(金庸)은 필명이고 본명은 사량용(查良鏞)이다. 김용 본인도 사사정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하긴 했는데 직계인지 방계인지는 아는 분이 추가바람.[3] 詩云, 邦畿千里, 維民所止. (시경에 이르되 나라의 도읍 사방천리는 백성들이 멈추어 사는 곳이니라.) 시경 상송 현조편에 나온 것으로 사서 중 하나인 대학에도 재인용해 유명한 문구다.[4] 칭제건원에서 보듯 연호의 제정은 대표적인 정통황제의 상징과도 같아서 명나라 참칭황제의 연호를 쓴다는 건 청의 지배를 대놓고 부정하는 일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완전히 같은 이유로 영력 연호를 썼다.[5] 이 건은 당대의 관념으로는 시비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청나라 이전에도 후대 제왕의 피휘를 위해 후손이 선대의 글을 고치는 일도 있었기 때문. 그냥 보고 넘어가는 때도 있었지만 피휘를 엄히 지키자면 충분히 따질 수 있었다.[6] 전국시대 상앙도 비슷하게 자신의 신법을 칭송하는 사람까지 처벌하여 아예 평가 자체를 근절시킨 일이 있다.[7] 이 시기 청나라에 사신으로 온 조선인들의 복색을 보고 한족 지식인들이 '이것이 선왕의 유풍'이라며 탄식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8]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은 국왕의 면전에서 효종은 적통이 아니라고 했으며, 성호 이익은 대놓고 우왕신씨설을 디스했다. 소위 사문난적드립 역시 이것으로 제도권의 제재가 가해진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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